⊙ “北 고위 대남공작관, ‘이제 남측 상대할 방법은 수중 가미카제밖에 없다’… 해작사 기무부대장에게 전달”(前 정보사 부산부대장)
⊙ “‘가미카제의 유형’이라는 단어 포함해 기무사에 계통 보고… 해군작전사령관에게도 알렸다”(해작사 기무부대장)
⊙ “연평해전 때도 북한의 어뢰 공격 시도 있었다”(前 해군 지휘관)
⊙ “‘가미카제의 유형’이라는 단어 포함해 기무사에 계통 보고… 해군작전사령관에게도 알렸다”(해작사 기무부대장)
⊙ “연평해전 때도 북한의 어뢰 공격 시도 있었다”(前 해군 지휘관)
- 인양된 천안함 함수. 사진=조선DB
천안함 폭침 당시 첩보의 존재 여부는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백히 드러난 게 없다. 있었다, 혹은 없었다는 말만 나돌 뿐이다. “사전 징후는 있었으나, 정보나 첩보는 없었다”는 게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한마디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의문이 들 수 있다. 당시 군(軍) 정보기관은 뭘 했을까.
폐쇄적인 군 정보기관의 특성상 그간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현 국군방첩사령부)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에서는 천안함 관련 첩보를 수집, 공유하며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천안함 첩보보고서를 작성한 당사자를 비롯해 복수의 군 정보기관 관계자들을 통해 당시 비화를 들어봤다.
北, “수중 가미카제밖에 없다”
천안함 폭침 당시 정보사 부산부대장이었던 A씨는 “2009년 9월 무렵 대북접경지역의 핵심 에이전트(정보원)로부터 ‘북한 고위 대남공작관이 ‘이제 남측을 상대할 방법은 수중 가미카제밖에 없다’고 했다’는 내용을 입수, 첩보 보고서를 작성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A씨는 “그때 북한의 발언이 이것저것 시도해본 뒤 ‘최후 작전 개시’를 결심한 뉘앙스였던 만큼, 계통 보고 후 부산 해군작전사령부 기무부대장을 만나 첩보 내용을 전달했다”면서 “첩보의 심각성을 공감한 기무부대장은 이날 해군작전사령관에게 즉각 보고하겠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보사에서 기무사로, 기무사에서 해군작전사령관으로 첩보가 전달된 셈인데, A씨는 “지휘계통상 없는 일이지만, (가미카제라면) 당장 오늘 밤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급박한 사안”이라면서 “만일 합참에 보고서를 올리면 내려오는데(회신 오기까지) 한 달이 걸릴 수도, 정보 사용권자에 따라 응답이 없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9년 9월 무렵은 앞서 박왕자씨 피살 사건, 비핵개방3000, 2차 핵실험 등으로 남북 관계가 극도로 긴장된 상태였다. 그런 한편 싱가포르에서는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인사의 비밀회동(2009.10)이 이뤄졌고, 이때 사정을 잘 아는 A씨에 따르면 이는 ‘성사 직전’에 결렬됐다. 그러던 중 그해 11월 10일 대청해전이 발발, 북한이 완패했다. 이때부터 ‘절치부심 후 돌아간 북한이 서해에서 뭔가 일을 벌일 것’이라는 수준의 이야기는 공공연히 군과 외교라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A씨는 “그러나 대청해전 훨씬 이전부터 북한은 수중 침투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면서 “천안함 폭침은 북한이 장기간에 걸쳐 준비한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이후 2010년 1월 북한은 서해 4군단장으로 김격식 전 총참모장을 부임시켰다. 김정일, 김정은 부자는 서해에서 합동화력을 점검했고, 한국에도 새로운 ‘통항 질서’를 제시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발했다.
해군 작전지휘관 출신인 한 인사는 “2011년 고위 탈북자도 증언했듯이 북한은 제1 연평해전(1999년) 이후부터 (천안함) 보복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면서 “(A씨가 언급한) 대남공작관의 말처럼 실제로 북한에 남은 방법은 ‘가미카제식’ 공격밖에 없었다”고 했다.
“연평해전 당시에도 북한의 어뢰 공격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 배의 폭뢰 때문에 계속 실패했다. 북한 잠수정은 굉장히 약하기 때문에 폭뢰를 맞으면 수중 폭발 수압에 의해 그대로 파괴된다. 때문에 이들 입장에서 어뢰 한 발을 갖고 올 수 있고 수심 2.5m 아래서 움직이는 반잠수정이건, 잠수정이건 잠수함을 이용한 어뢰 공격은 모두 ‘가미카제식’ 공격이다.”
참고로 천안함도 함미 갑판에 잠수함 공격용 폭뢰(MK9)를 좌우 6기씩 모두 12기를 갖고 있었다.
해작사령관, 당일 헬기 타고 2함대로
A씨의 말을 교차검증하기 위해 당시 해군작전사령부 기무부대장이었던 B씨를 만나봤다. 천안함 폭침 얼마 뒤 전역한 만큼 그는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B씨는 “2008~2009년 사이 북한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게 100회 가까이 될 정도로 서해 군사정세가 매우 엄중했다. 부대장 재직 1년간 내가 쓴 보고서만 273건일 정도”라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접한 가미카제 첩보라 신빙성이 상당히 높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보고서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가미카제의 유형’이라는 단어를 포함해 기무사에 계통 보고를 하고, 해군작전사령관에게도 첩보 사실을 알렸다”면서 “해군작전사령관 또한 해당 내용을 중대하게 받아들였고, 보고받은 당일 헬기를 타고 평택 2함대로 가서 상황을 살피고 대비할 것을 지휘했다”고 했다.
B씨는 또 “기무부대장이 작전사령관에게 정보사의 첩보 내용을 알리는 것은 생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시간이 흘렀다지만 이 같은 내용을 언급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B씨는 “기무부대에서는 작전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서로 남긴다”면서 “그날 사령관의 출타 일정과 목적 등의 기록은 작전사는 물론 기무사에도 남아 있다”고 했다.
수많은 첩보와 한 명의 사용권자
천안함 폭침 당시 기무사령관은 김종태 중장이었다. 김종태 사령관 또한 ‘수중 침투’ 관련 사전 징후를 언급한 기록이 있다. 폭침 약 5개월이 지난 2010년 8월 12일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위원단이 해군 2함대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김 사령관은 “천안함 사건 발생 며칠 전 수중 침투 관련 징후를 국방부와 합참에 보고했으나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면서 “침투 징후를 예하 부대에 전파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고 이런 군 기강 해이 사항이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해당 발언은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 일행 부대 행사 결과’라는 제목의 문건에 기록돼 있다.
이 자리에는 3군 출신 장군(10명)과 민간인 전문가(4명) 등 총 16명이 참석했다. 이날 참석한 한 인사는 “김종태 사령관의 그러한 발언을 틀림없이 기억한다”면서 “다만 군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데 대해 일부 참석자들은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기무사 관계자는 “기무사에서 정보사용권자는 사령관 단 한 명뿐이다. 나머지는 수집과 분석만 하며, 서로 공유하지도 않기 때문에 당시 사령관이 B씨의 정보를 사용한 건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면서 “다만 당시 극도로 긴장된 서해상의 작전을 총괄 지휘하는 부대인 해군작전사령부의 기무부대장이 올린 보고서인 만큼 그냥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윤종성 전 국방부 조사본부장은 이에 “‘5% 지시, 95% 확인’이라는 말이 있다”면서 “지휘관이 설사 지시를 했더라도 이행되지 않았다면 지시를 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뜻”이라고 했다.
왜 막지 못했나
첩보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씩 쏟아진다. 정보사 한 관계자는 “1998년 김대중 정권 때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처음 쐈을 당시도 수십 군데에서 받은 첩보들을 넘겼는데, 사용권자가 쌓아두기만 하다, 미사일 발사 이후 ‘왜 이런 첩보가 없었느냐’고 추궁했다가 쌓아둔 기록을 뒤늦게 확인한 후 망신을 당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2009년 9월 수중 가미카제 첩보’는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사건’의 극히 일부일지도 모른다. 해당 첩보 외에 천안함 관련 첩보들이 더 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복수의 군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일촉즉발의 남북정세, 북한 잠수정 속도를 따져봤을 때 1시간 내로 돌아가려면 20km 이상 내려와서는 안 된다는 북측의 전술적 위치, 북한 대동강, 압록강 하구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3월이라는 시기 등을 미루어봤을 때다. 하지만 ‘기습 공격’이었던 만큼 막을 재간이 없었다고 했다.
평택 2함대 기무장교였던 한 인사는 “우리 군이 결코 무방비 상태, 혹은 속수무책으로 있었던 건 아니다”라면서 “해군은 물론 당시 모든 부대원이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바 임무를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막지 못했다. 매년 이 시기, 특히 올해 계속되는 북의 도발을 보면 그때의 일이 자꾸 떠오른다”고 했다.⊙
폐쇄적인 군 정보기관의 특성상 그간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현 국군방첩사령부)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에서는 천안함 관련 첩보를 수집, 공유하며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천안함 첩보보고서를 작성한 당사자를 비롯해 복수의 군 정보기관 관계자들을 통해 당시 비화를 들어봤다.
北, “수중 가미카제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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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에서 천안함의 함수 인양 작업 중인 장병들. 사진=조선DB |
A씨는 “그때 북한의 발언이 이것저것 시도해본 뒤 ‘최후 작전 개시’를 결심한 뉘앙스였던 만큼, 계통 보고 후 부산 해군작전사령부 기무부대장을 만나 첩보 내용을 전달했다”면서 “첩보의 심각성을 공감한 기무부대장은 이날 해군작전사령관에게 즉각 보고하겠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보사에서 기무사로, 기무사에서 해군작전사령관으로 첩보가 전달된 셈인데, A씨는 “지휘계통상 없는 일이지만, (가미카제라면) 당장 오늘 밤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급박한 사안”이라면서 “만일 합참에 보고서를 올리면 내려오는데(회신 오기까지) 한 달이 걸릴 수도, 정보 사용권자에 따라 응답이 없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9년 9월 무렵은 앞서 박왕자씨 피살 사건, 비핵개방3000, 2차 핵실험 등으로 남북 관계가 극도로 긴장된 상태였다. 그런 한편 싱가포르에서는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인사의 비밀회동(2009.10)이 이뤄졌고, 이때 사정을 잘 아는 A씨에 따르면 이는 ‘성사 직전’에 결렬됐다. 그러던 중 그해 11월 10일 대청해전이 발발, 북한이 완패했다. 이때부터 ‘절치부심 후 돌아간 북한이 서해에서 뭔가 일을 벌일 것’이라는 수준의 이야기는 공공연히 군과 외교라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A씨는 “그러나 대청해전 훨씬 이전부터 북한은 수중 침투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면서 “천안함 폭침은 북한이 장기간에 걸쳐 준비한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이후 2010년 1월 북한은 서해 4군단장으로 김격식 전 총참모장을 부임시켰다. 김정일, 김정은 부자는 서해에서 합동화력을 점검했고, 한국에도 새로운 ‘통항 질서’를 제시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발했다.
해군 작전지휘관 출신인 한 인사는 “2011년 고위 탈북자도 증언했듯이 북한은 제1 연평해전(1999년) 이후부터 (천안함) 보복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면서 “(A씨가 언급한) 대남공작관의 말처럼 실제로 북한에 남은 방법은 ‘가미카제식’ 공격밖에 없었다”고 했다.
“연평해전 당시에도 북한의 어뢰 공격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 배의 폭뢰 때문에 계속 실패했다. 북한 잠수정은 굉장히 약하기 때문에 폭뢰를 맞으면 수중 폭발 수압에 의해 그대로 파괴된다. 때문에 이들 입장에서 어뢰 한 발을 갖고 올 수 있고 수심 2.5m 아래서 움직이는 반잠수정이건, 잠수정이건 잠수함을 이용한 어뢰 공격은 모두 ‘가미카제식’ 공격이다.”
참고로 천안함도 함미 갑판에 잠수함 공격용 폭뢰(MK9)를 좌우 6기씩 모두 12기를 갖고 있었다.
해작사령관, 당일 헬기 타고 2함대로
A씨의 말을 교차검증하기 위해 당시 해군작전사령부 기무부대장이었던 B씨를 만나봤다. 천안함 폭침 얼마 뒤 전역한 만큼 그는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B씨는 “2008~2009년 사이 북한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게 100회 가까이 될 정도로 서해 군사정세가 매우 엄중했다. 부대장 재직 1년간 내가 쓴 보고서만 273건일 정도”라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접한 가미카제 첩보라 신빙성이 상당히 높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보고서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가미카제의 유형’이라는 단어를 포함해 기무사에 계통 보고를 하고, 해군작전사령관에게도 첩보 사실을 알렸다”면서 “해군작전사령관 또한 해당 내용을 중대하게 받아들였고, 보고받은 당일 헬기를 타고 평택 2함대로 가서 상황을 살피고 대비할 것을 지휘했다”고 했다.
B씨는 또 “기무부대장이 작전사령관에게 정보사의 첩보 내용을 알리는 것은 생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시간이 흘렀다지만 이 같은 내용을 언급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B씨는 “기무부대에서는 작전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서로 남긴다”면서 “그날 사령관의 출타 일정과 목적 등의 기록은 작전사는 물론 기무사에도 남아 있다”고 했다.
수많은 첩보와 한 명의 사용권자
천안함 폭침 당시 기무사령관은 김종태 중장이었다. 김종태 사령관 또한 ‘수중 침투’ 관련 사전 징후를 언급한 기록이 있다. 폭침 약 5개월이 지난 2010년 8월 12일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위원단이 해군 2함대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김 사령관은 “천안함 사건 발생 며칠 전 수중 침투 관련 징후를 국방부와 합참에 보고했으나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면서 “침투 징후를 예하 부대에 전파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고 이런 군 기강 해이 사항이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해당 발언은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 일행 부대 행사 결과’라는 제목의 문건에 기록돼 있다.
이 자리에는 3군 출신 장군(10명)과 민간인 전문가(4명) 등 총 16명이 참석했다. 이날 참석한 한 인사는 “김종태 사령관의 그러한 발언을 틀림없이 기억한다”면서 “다만 군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데 대해 일부 참석자들은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기무사 관계자는 “기무사에서 정보사용권자는 사령관 단 한 명뿐이다. 나머지는 수집과 분석만 하며, 서로 공유하지도 않기 때문에 당시 사령관이 B씨의 정보를 사용한 건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면서 “다만 당시 극도로 긴장된 서해상의 작전을 총괄 지휘하는 부대인 해군작전사령부의 기무부대장이 올린 보고서인 만큼 그냥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윤종성 전 국방부 조사본부장은 이에 “‘5% 지시, 95% 확인’이라는 말이 있다”면서 “지휘관이 설사 지시를 했더라도 이행되지 않았다면 지시를 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뜻”이라고 했다.
왜 막지 못했나
첩보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씩 쏟아진다. 정보사 한 관계자는 “1998년 김대중 정권 때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처음 쐈을 당시도 수십 군데에서 받은 첩보들을 넘겼는데, 사용권자가 쌓아두기만 하다, 미사일 발사 이후 ‘왜 이런 첩보가 없었느냐’고 추궁했다가 쌓아둔 기록을 뒤늦게 확인한 후 망신을 당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2009년 9월 수중 가미카제 첩보’는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사건’의 극히 일부일지도 모른다. 해당 첩보 외에 천안함 관련 첩보들이 더 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복수의 군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일촉즉발의 남북정세, 북한 잠수정 속도를 따져봤을 때 1시간 내로 돌아가려면 20km 이상 내려와서는 안 된다는 북측의 전술적 위치, 북한 대동강, 압록강 하구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3월이라는 시기 등을 미루어봤을 때다. 하지만 ‘기습 공격’이었던 만큼 막을 재간이 없었다고 했다.
평택 2함대 기무장교였던 한 인사는 “우리 군이 결코 무방비 상태, 혹은 속수무책으로 있었던 건 아니다”라면서 “해군은 물론 당시 모든 부대원이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바 임무를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막지 못했다. 매년 이 시기, 특히 올해 계속되는 북의 도발을 보면 그때의 일이 자꾸 떠오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