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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南北 미사일 개발 경쟁

南은 정밀·정확도, 北은 추진체(로켓) 기술 앞서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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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은 미국 미사일(나이키), 北은 소련 미사일(스커드) 逆설계해 미사일 개발
⊙ 南, 세계 7번째로 地對地 탄도미사일 개발… 美와 미사일 지침 맺고 스스로 족쇄 채워
⊙ 미사일 개발 중단한 全斗煥, 아웅산 테러 이후 개발 재개
⊙ 김정은 국방종합대학, 지난해 극초음속미사일 학부 新設
⊙ 金正恩, 美의 對北 강압 정책에 맞서 核과 미사일로 對美 ‘逆강압’ 정책 펼쳐
⊙ 한국국방연구원, 北 극초음속미사일 개발에 중국·러시아 관여
북한이 2020년 10월 10일 새로운 ICBM과 11축(양쪽 바퀴 22개) 이동식 발사차량(TEL)을 공개했다. 사진=뉴시스
  광학, 공기역학, 구조역학, 동역학, 열역학, 유체역학, 제어공학, 재료역학, 체계공학, 추진공학, 화학공학, 항공우주공학, 회로설계, 소프트웨어 설계, 성능분석….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기술 분야 중 일부를 나열했다. 물리·화학과 같은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첨단 공학 기술이 필요하다. 한 국가의 미사일 수준을 두고 ‘과학기술과 경제력, 국방력을 종합한 결정체’라고도 말한다.
 
  경제력 세계 110위권, 재래식 군사력 20위권인 북한은 지난 1월 한 달간 미사일 시험 발사를 7차례 하며 총 11발을 쏘았다. 극초음속미사일(시속 마하5 이상)부터 IRBM(Intermediate Range Ballistic Missile·중거리 탄도미사일·사거리 1000~5000km), ICBM(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대륙간 탄도미사일·사거리 5500km 이상) 등 종류도 다양했다.
 

  지난 1월 5일 북한이 극초음속미사일(마하6)을 발사하자 우리 합동참모본부(합참)는 “극초음속미사일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에 북한은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사정거리 700km 극초음속미사일을 발사한 사실을 공개하고는 “(미사일이) 표적에 명중했다”고 밝혔다. 6일 뒤인 1월 11일에는 앞서 발사한 미사일보다 2배가량 빠른 마하10에 이르는 미사일을 발사했다. 마하(Mach·音速)는 시속 약 1250km에 이른다.
 
  합참은 이날 “우리 군은 이번 발사체에 대해 탐지 및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지만 전문가들은 극초음속미사일은 요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북한이 핵탄두를 장착한 극초음속미사일을 수도권으로 발사하면 도달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아 대비할 시간이 거의 없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이날 “극초음속미사일에 대해선 선제타격이 유일한 해법”이라고도 했다.
 
 
  北 미사일 시험 발사, 핵무력 高度化 의미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스커드 미사일(왼쪽)과 나이키 미사일 모형(오른쪽). 스커드 미사일은 연필처럼, 나이키 미사일은 이등변 삼각형처럼 생겼다. 사진=뉴시스/AP
  북한이 연초부터 미사일을 쏘자 상당수 언론은 ‘정치적 동기’를 중심으로 분석하며 ‘남한 대선 개입용’ ‘대미압박용’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핵무력 고도화’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한국국방연구원(KIDA) 책임연구위원을 지낸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두고 기술적 발전은 보지 않고 정치적 동기를 가진 ‘정치 행위’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북한의 의도는 단순히 ‘핵보유국 지위 획득’이 아니라 수십 년간 축적해온 기술을 검증하고 핵무기를 고도화하려는 차원이다. 북한은 이미 지역 핵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김정은은 집권(2012) 이후 지금까지(2022년 2월 10일 기준) 미사일 136발을 쏘았다. 선대(先代) 김일성은 1984년 첫 미사일 발사를 시작해 1994년까지 15회, 김정일(1994~2011년)은 16회 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은 투발(投發) 수단(발사체)을 고도화·다양화해 시험 발사를 가속하고 있다. 이미 단거리·중거리 미사일은 실전 배치를 마쳤고, 성능 개량을 위해 같은 사거리를 가진 미사일이더라도 시험 발사를 계속하고 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남한을 목표로 하는 단거리 미사일 개발을 시작해 1990년대 들어 일본을 겨냥하는 IRBM을 개발했다. 현재는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두는 ICBM과 초기 포착이 어려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Submarine-launched ballistic missile)인 ‘북극성’을 개발 중이다.
 
  핵(무기)과 이를 운반하는 로켓(발사체)의 관계는 ‘실과 바늘’ ‘화살과 활’의 관계와 같다. 화살을 손에 쥔 채 목표물에 다가가 직접 찌를 수도 있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활(발사체)을 이용해 먼 거리에서 화살을 쏘아 목표에 명중시키는 방식이다.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는 주된 이유는 로켓 추진력·정확도 등을 향상시켜 핵무력을 고도화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
 
  로켓을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하면 미사일(유도탄·유도무기), 로켓 앞 부분에 위성을 부착해 우주로 쏘아 올리면 인공위성 발사체가 된다. 좁은 의미의 로켓은 비행체에 추진력(동력)을 제공하는 ‘추진체’ ‘추진기관’에 해당한다.
 
  로켓은 유도형 로켓과 무유도형 로켓으로 나눈다. 유도형 로켓을 미사일로 통칭한다. 무유도 로켓은 다연장로켓(MLRS·Multiple Launch Rocket System)이 대표적이다. 북한은 이를 ‘방사포(放射砲)’라고 한다. 2010년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북한이 사용한 무기가 방사포이다. 조선 시대에 개발한 신기전(神機箭)이 오늘날 MLRS의 효시이다.
 
 
  남북한 미사일 경쟁, 박정희가 먼저 시작
 
  유도탄(誘導彈) 개발은 남한이 먼저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후반부터 증가한 북한의 대남(對南) 도발(1·21사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과 1970년대 초반에 벌어진 안보 환경 변화를 경험하고는 자주국방(自主國防)을 위한 국방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개입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 닉슨이 1968년 11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듬해 7월 25일에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됐다. 동서 냉전의 당사자인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데탕트(detent·긴장완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여기에 닉슨 행정부는 당시 한국에 주둔 중인 미 2·7사단을 철수할 계획이었다. 1971년 3월 미 7사단은 모두 철수했다. 1972년에는 닉슨의 방중(訪中), 1973년에는 미군의 베트남 철수 등도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 이후 ‘자주국방’을 앞세운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1970년 8월 6일 국방부 산하에 국방과학연구소(ADD·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를 만들어 무기 국산화 및 무기 개발을 추진한다.
 
  당시 보안을 유지하고자 ADD는 ‘홍능기계공업회사’라는 위장 명칭을 썼다. 대외적으로도 농업용 기계를 만드는 곳으로 알려졌다. ADD 창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각군 사관학교 박사급 교관들이 참여했다.
 
  1971년 11월 10일 박정희는 ADD에 ‘제1차 번개사업’을 지시했다. 내용은 20개 예비군 사단을 무장시킬 60mm 박격포 등 기본 병기를 개발하는 사업이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어야 할’ 만큼 기간이 촉박해 사업의 별칭이 ‘번개사업’으로 정해졌다.
 
  1차 번개사업(3차 사업까지 진행) 당시 ADD가 만들어낸 시제품은 ▲M1 소총(2정) ▲카빈 소총(10정) ▲수류탄(MK2 300발) ▲3.5인치 로켓 발사기(M20A1 2문, M20B1 2문) 등이 있다. 미제 무기를 단순 모방하는 정도였지만 국산 무기 개발의 잠재력이 보였다.
 
  1차 번개사업이 성공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연구원들에게 친필 메모를 전달했다.
 
  “1975년까지 200km 사거리의 국산 지대지(地對地) 미사일을 개발한다.”
 
  박 대통령은 1972년 4월 14일 ADD로 ‘4년 내에 국산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대지 유도탄 개발 사업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항공공업육성계획’이라는 위장 명칭이 붙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지대지 미사일 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전 세계 6개국으로 모두 선진국이었다.
 
  1972년 9월 15일 ‘항공공업육성계획’으로 위장한 ‘미사일 개발계획안’이 청와대에 보고됐다. 이 초안은 약 1년 반 동안 보완을 거쳐 1974년 5월 14일 최종 재가를 받았다.
 
  당시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과 국방 산업을 오원철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에게 맡겼지만, 국산 지대지 탄도탄 사업(백곰 사업)만큼은 본인이 직접 챙겼다고 한다.
 
 
  美 나이키 미사일 逆설계해 국산 地對地 미사일 개발
 
  당시 국산 미사일 개발진은 4년 안에 지대지 미사일을 새롭게 개발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에 미국에서 1965년부터 도입해 운용한 지대공(地對空) 미사일 ‘MIM-14 나이키-허큘리스(NK·Nike-Hercules·1952년 개발)’를 역설계해 지대지 유도탄을 만들기로 했다.
 
  최장 사거리 약 140km인 나이키 미사일은 주 용도가 항공기 격추였지만 지대지 유도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옵션(option)’이 있었다.
 
  나이키 미사일은 레이더 2개를 사용해 각각 미사일과 표적을 추적한 뒤 이 값을 지휘소로 전송한다. 지휘소는 레이더가 보낸 값을 컴퓨터로 계산한 후 수정된 진로를 미사일에 알려 표적으로 유도한다. 이를 지령유도(指令誘導·Command Guidance)라고 한다.
 
  나이키는 지대공 미사일임에도 지상을 공격할 수도 있다. 공중에서 날아오는 표적이 아닌 적지 상공에 ‘가상의 표적’을 설정하고 이 표적으로 미사일을 유도한 뒤 조종 날개를 0도로 고정해 비행시키면 미사일이 지상으로 강하해 지상 표적을 타격한다. 이를 ‘지대지 옵션’이라고 한다.
 
  ADD가 나이키를 모델로 삼은 또 다른 이유는 미국에 내세울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대지 유도탄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은 나이키 미사일 생산을 중단했다. 이에 한국은 나이키를 운용 유지할 기술이 필요하다며 제조사인 맥도널드 더글라스에 기술 지원 등을 요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해나갔다. 한편에서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추진제(推進劑) 제조 기술, 추진 기관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ADD가 유도탄 기술을 확보해나가자 주한미군사령관과 주한미국대사 등은 ADD를 방문해 미사일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미국은 미사일 사거리를 180km 이내, 탄두 무게 역시 454kg(1000파운드) 이내로 제한하라고 요구했고 한국은 이를 수용했다.
 
 
 
세계 7번째로 지대지 유도탄 개발

 
백곰 시험 발사 성공 다음 날인 1978년 9월 27일 자 《조선일보》 1면. 사진=조선DB
  1978년 9월 26일, 충남 태안에 위치한 안흥종합시험장에서 국산 최초 지대지 미사일인 백곰이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7번째 지대지 미사일 보유국이 됐다. 이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다. 당시 ADD는 보안을 위해 위장 사업명을 부여했다. 미사일을 개발하던 연구원이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눈을 뒤집어쓴 채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북극곰 같다고 해 백곰이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미사일을 개발한 후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고 의심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나라는 대부분 지대지 미사일을 함께 개발하는 경향을 보인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박정희 정부처럼 핵·미사일 개발을 병행 추진했으나 핵개발은 포기하고 미사일에서만 성과를 냈다. 핵개발 의혹을 받은 이란이나 핵무기를 보유했다가 포기한 남아프리카공화국도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병행했다.
 
  공군사관학교 엄정식 교수가 발표한 박사 학위 논문(〈카터 행정부 시기 대한 무기 이전 정책의 변용〉)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군수산업을 담당하는 오원철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에게 1971년 11월 10일 핵무기 개발을, 같은 해 12월 26일에는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했다.
 
 
  〈한미 미사일 양해각서〉
 
  한국은 미국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백곰 개발 이듬해인 1979년 ‘한미 미사일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미사일 부품과 기술 지원을 제공받는 대가로 ‘사거리 180km 이상, 탑재 중량 500kg을 초과하는 로켓 시스템은 개발하거나 획득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우리 스스로 미사일 개발에 족쇄를 채운 셈이다.
 
  미국이 탄두 중량을 500kg 이하로 제한한 이유는 백곰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핵미사일에 부착하는 소형화된 핵탄두는 중량이 통상 500kg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 양해각서는 아무런 법적 효력도 없으나 ‘한미 미사일 지침’이라는 용어로 바뀐 채 2001·2012·2017년 등 세 차례 개정을 거쳤다. 2017년 11월 문재인 정부는 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을 완전히 해제하는 ‘2017 개정 미사일 지침’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사거리 800km짜리 미사일에도 탄두 중량에 제한을 받지 않게 됐다.
 
 
 
新軍部 집권 후 미사일 개발 폐기

 
2017년 9월 28일 평택 해군 2함대에서 열린 건군 67주년 국군의날 기념식. 공군사관학교 생도대 뒤로 미사일 발사대가 배치돼 있다. 왼쪽은 지대지 탄도미사일 현무-2, 오른쪽은 순항 미사일인 현무-3 발사대이다. 사진=뉴시스
  남한은 백곰 개발 성공 이후 탄도탄 개발을 계속해나갔으나 1년 뒤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미사일 개발 계획은 중단된다. 1980년 집권한 신군부는 부족한 정치적 정통성과 정당성을 만회하고자 미국이 부담스러워하는 미사일 개발 사업을 폐기했다. 이 때문에 ADD 연구 인력의 30%에 해당하는 약 900명이 신군부 집권 후 ADD를 떠나야 했다. 5공은 국산 기술로 개발한 백곰을 두고 ‘나이키에 페인트칠만 한 가짜 유도탄’이라고 폄훼하곤 했다. 실제로는 항법장치(유도장치)를 제외한 90%가량은 국산화한 상태였다.
 
  하지만 1983년 아웅산 테러가 발생하자 전두환 정부는 미사일 개발을 재개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미사일이 바로 북방(北方)을 수호한다는 ‘현무(玄武)’다. 현무는 이후 지대지 유도탄인 현무-2와 순항미사일인 현무-3으로 개발됐고, 현재는 현무-4까지 개발된 상태이다. 현무-4는 SLBM 형태로도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과 달리 우리는 보유 중인 탄도미사일에 대한 정확한 제원이 공개돼 있지 않다.
 
  전문가들은 미사일의 정확도나 정밀성은 우리가 앞서나 추진체(로켓) 기술은 북한이 앞선다고 평가한다.
 
  우리가 동맹국의 압력으로 스스로 미사일 주권(主權)을 제약하는 동안 북한은 국가 역량을 결집해 미사일 개발에 주력했다.
 
  북한은 국방과학원이 앞장서 미사일 개발에 나섰다. 해군 중령 출신인 북한대학원대학교 김동엽 교수는 지난해 12월 8일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의원이 주최한 한 세미나에서 ‘북한 국방과학원의 실체와 국방과학 수준’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김동엽 교수에 따르면, 북한은 1964년 6월 29일 당시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국방부에 해당) 병기국 산하 130 정밀기계연구소를 모체로 1962년 국방경제병진 노선 채택에 따라 국방공업 집중 육성을 목적으로 병기국에 산발적으로 배속됐던 연구소를 통합해 국방과학원을 설립했다.
 
  북한은 1952년 12월 최초의 국방과학연구기관인 정밀연구소를 설립했고, 6·25전쟁 이후 17호 연구소(화약연구소) 등 군종, 병종에 따른 연구소를 조직했다.
 
  김일성은 전쟁을 치르며 옛 소련제 무기가 북한 군인들의 체형에 맞지 않는다는 점과 군수 부문의 독립 없이는 소련에 계속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문제 삼아 북한식 군수 공업 국산화를 진행했다.
 
  1963년에는 미사일 개발을 목표로 국방대학도 만들었다. ‘강계공업대학’ ‘평양공업대학’ 등으로 부르다 현재는 ‘국방종합대학’으로 개칭(改稱)했다. 2016년 김정은이 이곳에 현지지도를 다녀간 뒤에는 교명을 ‘김정은 국방종합대학’으로 바꿨다. 이는 김정은이 미사일을 그만큼 중시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김정은 국방종합대학
 
2016년 9월 13일 북한 《로동신문》은 김정은이 국방종합대학을 현지지도했다고 밝혔다. 뒤로 김일성·김정일 동상이 있다. 사진=뉴시스
  조선중앙통신은 2016년 6월 13일 자 보도를 통해 김정은이 국방종합대학에 방문했다고 공개했다. 정확한 방문 시점은 공개되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국방종합대학을 현지지도하며 “국방종합대학의 기본 임무는 동방의 핵대국, 군사최강국인 선군조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빛내여 나가는 기둥감, 주체가 철저히 선 학술형 인재, 실천형 인재들을 더 많이, 더 훌륭히 키워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이 “(국방종합대학은 내가) 제일 애착을 갖고 중시하는 대학 중의 하나”라며 “인민 군대의 무장장비 현대화를 실현하고 첨단무장 장비들을 개발하는 데 절실히 필요한 과학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였으며 새로운 국방과학기술 분야를 개척하는 데서도 많은 성과를 이룩했다”고 전했다.
 
  2020년 10월 10일 조선중앙통신은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을 보도하면서 “수많은 국방과학기술 인재들을 배출한 김정은 국방종합대학 종대에 이어 조선인민군, 사회안전군 각급 군사학교 종대가 보무당당히 지나갔다”고 보도했다.
 
  국방대는 김정은의 이름이 붙기 전까지 재학생이 3000~4000명 수준이었으나 개칭한 뒤에는 학과가 10개 이상으로 늘었고 학생 수 역시 증가했다는 증언이 있다.
 
  2021년 3월 31일 자 ‘데일리NK’에 따르면, 북한은 4월 개학을 앞두고 ‘극초음속미사일’ 관련 학부를 신설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동엽 교수에 따르면, 북한은 연구 인력 충원을 위해 동구권 유학생을 집중 배치하거나 신규 연구인력 확보를 위해 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공대) 출신 졸업생 전원을 국방과학원에 배속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 ‘제2경제위원회’가 조직되자 국방과학원은 제2경제위원회 산하 조직으로 바뀌고 비밀 보장이라는 명목으로 명칭도 ‘제2자연과학원’으로 개칭했다.
 
  북한에는 크게 인민경제라고 부르는 일반경제와 제2경제라고 부르는 군수경제가 있다. 제2경제위원회는 북한 군수경제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모든 군수제품의 계획·생산·분배 및 대외무역을 관장한다.
 
  1978년 9월 남한이 지대지 탄도미사일 발사에 성공하자 북한은 1979년 김정일 지시에 따라 국방과학원은 제2경제위원회와 동격으로 위상이 제고됐다.
 
  김동엽 교수에 따르면, 김정일은 제2자연과학원(국방과학원)이 제2경제위 산하에 있는 것을 보고 “국방과학연구사업을 선행시켜야 군수건설을 잘할 수 있다. 국방과학원을 선두마차로 내세워야 한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김일성종합大·김책공대 출신들로 군수공업 육성
 
  이후 2000년대 들어 제2자연과학원은 조선노동당 군수공업부 산하로 이동했고, 2014년 명칭을 다시 국방과학원으로 변경했다. 국방과학원 산하 연구사(연구원)들은 모두 군복을 입고 일한다. 대다수는 국방종합대학과 룡성약전공업대학 졸업생들이다. 인민무력부 산하 미림전자전대학 졸업생, 김일성종합대와 김책공대를 비롯한 유수 대학 출신들이 모여 있다.
 
  운영방식은 우리와 비슷하다. 국방과학원이 무기를 연구·개발하면 이를 제2경제위원회가 생산하고, 북한군이 사용하는 체제이다.
 
  국방과학원 산하에는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동과 중이동 과학촌 기지에만 10여 개 연구소 등 60여 개 연구소가 전국에 산재해 있다.
 
  대표적으로 ‘166공학연구소’는 미사일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가장 큰 연구소이다. 지금까지 북한이 연구 개발한 로켓은 대부분 이 연구소가 중심이 돼 개발됐다. 과거 소련 붕괴 후 북한으로 망명한 소련 미사일 전문연구사 약 20명이 근무했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무수단리 로켓 시험 발사장, 태천 시험 사격장, 동창리(철산) 시험 발사장이 모두 국방과학원 산하에 있다.
 
  김동엽 교수에 따르면, 북한도 남한과 유사하게 1950~60년대 외산 무기를 도입한 후 모방 생산 시기를 거쳐 1970년대 북한형 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자체 성능 개량과 개발을 하는 정도까지 도달했다.
 
  김 교수는 “제재와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지상·해상·항공 분야 재래식 무기 체계는 물론 핵미사일 등 비대칭 전력과 관련한 국방과학 수준은 모방을 넘어 상당한 수준의 독자적 개발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이어 “전략적 운용(국가 목표 타격용)에서 작전전술적 운용(군사 목표 타격용)으로 확장해 다양한 사거리의 탄도미사일을 이용해 한반도와 인근 지역 미군기지는 물론 미 본토까지 타격 가능한 맞춤형 핵공격 능력을 보유했다”고 했다.
 
  김동엽 교수는 “올해는 수중 및 지상 고체 ICBM 개발사업, 핵잠수함 및 핵 SLBM 보유, 사정거리 1만5000km급 장거리 미사일 개발 능력 확보, 북극성 계열 SLBM 발사, 신형 ICBM 지상 연소 실험과 제한된 사거리 발사를 진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또 “2022년 4월 15일 태양절(김일성 생일) 110주년을 맞아 인공위성 발사와 같은 두드러진 성과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올 5월 예정된 남한의 누리호 재발사와 연계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北,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 逆설계로 미사일 國産化
 
2021년 9월 15일 국방과학연구소는 우리 기술로 독자 개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발사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우리 군이 독자 설계하고 건조한 최초 3000t급 잠수함인 도산안창호함에 탑재돼 수중에서 발사되고 있는 SLBM.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7번째 SLBM 보유국이 됐다. 사진=국방과학연구소 제공
  북한이 미사일 개발을 시작한 시점은 분명치 않지만, 북한도 우리가 미국산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을 모방해 백곰을 개발한 방식을 참고했다. 소련이 개발한 스커드 미사일을 역설계해 ‘화성’ 시리즈를 자체 개발한 것이다.
 
  1970년대 북한은 소련과 협력해 미사일을 개발하기로 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중국과 협력해 유도탄 개발을 시작했지만, 미사일 개발·협력을 주도한 중국 천시롄(陳錫聯) 장군이 1978년 문화대혁명으로 실권(實權)을 잃자 북중(北中) 간 미사일 협력도 중단됐다.
 
  북한은 소련이 1961년 개발에 성공한 후 이집트에 수출한 스커드(SCUD)-B형(사거리 300km)을 1980년경 반입한 후 역설계해 지대지 탄도미사일 국산화에 성공한다. 북한은 이 미사일을 화성-5형(스커드-B 모방형)이라고 부른다.
 
  이집트가 북한에 미사일을 공급한 배경에는 1973년 10월 벌어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북한이 공군 조종사를 이집트에 파병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자체 생산한 화성-5형을 1984년 무수단리에서 시험 발사를 했다. 총 6기를 발사해 3기를 시험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남한이 백곰을 개발한 지 6년 뒤였다. 1985~1986년 화성 5호 양산을 시작해 1991년경 후속 모델인 화성-6형을 생산하기 전까지 매년 50~100기를 만들었다. 북한은 화성- 6형을 이란 등 중동(中東) 등지에 수출했다.
 
  화성-6형은 화성-5형과 외형은 거의 동일하지만 사거리를 500km로 연장했다. 개발은 1987년에서 1988년 사이에 시작됐다. 화성 5형의 탄두부(彈頭部) 무게를 750kg으로 줄이고 소련에서 수입한 특수 금속으로 동체를 가공해 비행체 무게를 줄이고 연료탱크 부피를 늘렸다. 화성 6호는 제주도를 포함한 한국 전역을 사거리에 둘 수 있다.
 
  화성-6형은 1990년 6월 첫 시험 발사를 한 뒤 1991년부터 실전 배치를 했다. 화성-6형에 대해 소련이 1965년에 개발한 스커드-C형(사거리 500km)과 유사하다고 평가한다. 이 때문에 화성 6호를 ‘스커드-C 개량형’ 또는 ‘모방형’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화성-6형으로 한반도 전역을 사정권에 넣었지만, 일본과 미국을 겨냥한 미사일도 필요했다. 한반도에 유사시 증원될 주일미군 전력을 사전에 차단하고 미 본토의 미군 병력이 개입하는 것을 억지하기 위한 일본과 미국까지 타격할 수 있는 중장거리 미사일이 필요했다.
 
  장거리 탄도탄이나 우주발사체를 개발할 때 쓰이는 접근 방식은 기존에 개발한 로켓 여러 개를 한데 묶어 하나의 로켓처럼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클러스터링(clustering) 기술이다. 이를 통해 단거리 미사일 기술을 바탕으로 중거리·장거리 로켓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돈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러한 방식으로는 사거리를 1000km 이상으로 늘릴 수 없었다. 이미 화성-5형을 기반으로 화성-6형을 개발할 때 사용한 방법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타격권으로 하는 이른바 ‘노동 미사일(사거리 1000km)’은 스커드 미사일을 단순 구조 변경해서 개발할 수 없었다. 대신 크기를 약 1.5배 키우는 방법으로 개발을 이어갔다.
 
 
  北, 러시아 기술 활용해 미사일 개발 加速
 
2020년 10월 1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 등장한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4A형’. 사진=뉴시스
  이에 북한은 화성-6형의 개발과 함께 1988년 노동 미사일(화성-7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30여 년간 로켓과 우주발사체를 연구한 정규수 박사는 북한의 급속한 미사일 기술 발전을 두고 “스커드 미사일 엔진 설계 제작에 정통한 러시아 기술자들이 화성-5·6형, 노동 미사일 개발에 직접 관여했을 뿐 아니라 제작에 필요한 소재와 핵심 부품, 정밀 가공 장비 등을 외부에서 구입했다고 가정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92년 10월 15일 러시아 기술자 32명이 북한으로 가려다가 공항에서 출국을 제지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32명 중 대부분은 SLBM과 스커드 미사일을 개발했던 구(舊) 소련 마케예프 설계국(Makeyev Design Bureau) 소속 연구원들이었다.
 
  이후에도 러시아 기술자들이 방북하는 일이 늘자 1993년 2월 러시아 외무차관 게오르기 쿠나제(Georgy Kunadze)가 북한을 방문해 러시아에서 핵과 미사일 엔지니어를 포섭하는 작업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노동 미사일은 당초 일본 전역을 사정권에 두기 위해 개발했으나 사거리가 1000km 내외에 불과해 일본 주요 지역과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타격할 수 없었다.
 
  이에 1990년대 초부터 주일 미군기지와 미 본토를 겨냥하는 새로운 장거리 로켓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대포동 1호 ▲무수단(화성-10형) ▲대포동 2호 등이다.
 
  북한은 우주 별자리를 선호해 미사일 명칭에 화성, 북극성, 금성, 광명성, 은하 등의 용어를 붙인다. 화성은 액체연료 사용 지대지 미사일, 북극성은 고체연료 사용 미사일, 금성은 지대함 미사일, 은하·광명성은 인공위성 탑재체나 발사체 등에 부여한다. 한미 당국은 대포동, 무수단 등 북한의 미사일 활동이 최초 식별된 지역명을 사용하거나 북한을 의미하는 영문자 순서를 뒤바꿔 ‘KN-일련번호’를 식별된 순서대로 부여해 사용한다. 노동 미사일도 함남 함주군 로동리 인근에서 처음 포착돼 노동 미사일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북한 주요 탄도미사일을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사거리 300~1000km): ▲화성-5형(SCUD-B·300km) ▲화성-6형(SCUD-C·500km)
 
  준중거리 탄도미사일(MRBM· 1000~3000km): ▲북극성-1형(SLBM·KN-11·1200km) ▲북극성-2형(SLBM·KN-15·1300km) ▲화성-9형(SCUD-ER·1000km) ▲화성-7형(노동·1300km)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 3000 ~5000km): ▲화성-10형(무수단·3000km 이상) ▲화성-12형(KN-17·5000km)
 
  대륙간 탄도미사일(5500km 이상): ▲화성-14형(KN-20·1만km 이상) ▲화성-15형(KN-22·1만3000km)
 
  북한은 2015년부터 SLBM 기술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대북 선제타격을 할 경우 반격할 수 있다는 ‘2격’ 능력(보복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일종의 무력 시위이자 능력 과시다.
 
  미국이 대북 선제타격으로 북한 내 탄도미사일 기지를 무력화하더라도 북한은 은밀성이 보장되는 잠수함으로 미 본토 인근에서 핵탄두가 장착된 SLBM을 발사할 수 있다. 이는 미국 입장에선 불확실성이 커져 대북 선제타격이나 군사적 조치를 주저하게 만든다.
 
 
  金正恩, 집권 후 투발 수단 고도화에 집중해 성공
 
2017년 6월 23일 ADD 관계자들이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성공에 기뻐하고 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도 ADD를 찾았다. 사진=청와대
  우리 군에서 정보를 총괄하는 국방정보본부장을 지낸 김황록 예비역 육군 중장은 북한 김정은이 집권 초기인 2013년부터 2017년 11월 핵무력 완성 선언 시점까지 핵투발수단(미사일)을 고도화하는 데 집중했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강압 정책에 맞서는 대미(對美) ‘역강압’ 정책을 펴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정은 정권은 북한의 핵능력을 무시 내지 과소평가하는 미국에 대항해 미국 영토와 미국민을 직접 위협하는 다종의 핵무기 투발 수단(ICBM·IRBM·SLBM)을 고도화하고 그 위협을 미국에 강제적으로 인식시켜 대미 협상력을 강화했다.”
 
  김황록 예비역 장군이 분석한 틀에 따르면, 최근 북한이 미사일 시험 발사 횟수를 늘리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선대인 김정일 시대에 배치한 핵 투발 수단(미사일)이 충분한 시험과 검증을 거치지 못해 투발 수단으로서 활용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방증한다는 점이다. 이어 김정은은 미완(未完)인 투발 수단을 개선해 실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실제 투발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제8차 대회 기념 열병식에 등장한 ‘북한판 이스칸데르(KN-23)’ 개량형. 이스칸데르는 요격 회피 기동을 해 현재 미사일 방어 체계로 요격이 어렵다. 사진=뉴시스
  북한이 최근 공개한 북한판 이스칸데르(전술 지대지 탄도미사일 KN-23·사거리 500km)나 북한판 에이태킴스(KN-24·사거리 400km)는 핵 투발 수단을 최신화・고도화하려는 북한의 의지와 능력을 나타낸다.
 
  현재 한미 군 당국이 보유한 미사일 방어 체계로는 KN-23·24를 막을 수 없다. KN-23은 이른바 ‘회피 기동’을 통해 기존의 요격 체계를 무력화한다. 북한이 최근 시험 발사한 미사일은 기존의 구형 무기를 대체해 남한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는 북한의 공격이 임박할 경우 ‘선제타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의힘 선대본부 장영일 수석부대변인은 “북한이 보유한 각종 미사일을 섞어 쏘면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다. 하나같이 빠른 속도와 요격 회피 기동, 은밀성 등으로 탐지와 요격이 쉽지 않다. 여기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어 대한민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며 “사드(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추가 배치를 비롯해 다층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북한 미사일의 목표는 한국과 미국, 일본
 
  한국국방연구원 전경주 연구위원은 지난 2월 4일 발표한 〈북한의 연말연시 군사 관련 행보와 남겨진 과제〉에서 지난 1월 5일부터 30일까지 7차례 실시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각기 다른 목적(시험 발사, 전술 운용 적합 평가, 성능 확인, 검수, 임무수행 훈련 등)을 갖고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도 “최근 몇 년간 북한이 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능력은 전술핵을 탑재할 수 있는 단거리 미사일이다. 이는 한반도와 인접 해역을 사정거리로 하기에 이러한 (미사일) 능력 향상이 ‘한국을 위협할 의도가 없다’는 북한의 주장은 이율배반적이다”고 했다.
 
  또 “그간 한국 정부는 북한에 일관되게 선한 의도만을 표명해왔음에도 북한이 한국을 (공격) 대상으로 한 능력을 집중 개발한다는 것은 북한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한국을 먼저 공격할 수도 있는 능력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내세우는 주장과는 달리) 여전히 한국과 미국을 위협으로 상정한 군사력 건설을 추구하고 있다”고 했다.
 
  전경주 연구위원은 “북한은 제재를 받고 코로나19로 인한 국경 봉쇄 중에도 무기체계와 관련된 기술과 장비를 어디로부터인가 공급받고 있었다”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는 단연 중국과 러시아”라고 했다.
 
  또 “미사일 개발에 대한 독자적 능력을 일정 수준 갖춘 북한이지만 그럼에도 모든 기술과 장비, 그리고 부품을 북한 내에서 습득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특히 북한은 핵보유국 중에서도 보유국이 많지 않은 극초음속미사일 기술에서 가시적 성과를 보였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캠프에서 활동하는 정항래 예비역 육군 중장(전 육군 군수사령관)은 저서 《북핵본색》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북한은 한국, 미국, 일본을 선제타격할 수 있는 잠재적 핵능력을 갖추는 것을 시급한 전략적 과업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북한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질 수 있다. 북한은 적절한 시기가 오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ICBM 폐기와 주한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빅딜 제안 등 ‘조선반도 통일 전쟁’ 여건 조성을 위해 핵 무력을 더욱 공격적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육군총장 시절 일선 장병들이 ‘주적’ 개념과 대적관(對敵觀)을 두고 혼란스러워하자 2004년 2월 4일 정훈 장교들을 모두 소집해 정신 교육을 했다. 당시 남 전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이 기습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내려왔다가 철수하면서 1950년 12월 5일 한국전쟁의 패인을 분석했다. 패배 이유로는 ▲미국의 참전을 막지 못했고 ▲미국이 참전하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을 편성하기 이전에 조기에 전쟁을 끝내지 못한 점을 들었다.
 
  김일성은 애치슨 선언으로 미국이 참전하지 않으리라 판단했고, 참전한다고 예상했다면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은 민족공조를 통해 미국(군)을 아예 철수시키든가, 미북(美北) 평화협상・협정을 통해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이는 지난 50년 동안 북한이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통한(痛恨)을 품고 단 한번도 변함없이 지속해서 추진해온 전략이다.”
 
  그간 전문가들은 북한 체제가 오래 가지 못하리라고 전망해왔다. 하지만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독재는 시간이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핵과 미사일이라는 두 축이 독재자를 든든하게 지탱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조부가 70년 전 남긴 교훈을 발판 삼아 선대가 이루지 못한 꿈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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