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노동당, ‘총비서의 대리인’으로 제1비서 신설
⊙ 나치 독일의 ‘총통대리’ 헤스, ‘히틀러의 후계자’ 괴링은 자살
⊙ 마오쩌둥의 후계자였던 류사오치는 문화대혁명 때 獄死… 린뱌오는 비행기 추락사
⊙ 나치 독일의 ‘총통대리’ 헤스, ‘히틀러의 후계자’ 괴링은 자살
⊙ 마오쩌둥의 후계자였던 류사오치는 문화대혁명 때 獄死… 린뱌오는 비행기 추락사
북한 노동당이 당 규약을 개정, 총비서인 김정은 밑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자리를 신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1비서는 총비서의 대리인’이라는 규정도 당 규약에 들어갔다. ‘제2인자’ 자리를 공식화한 것인데, 이 자리는 최근 급부상한 조용원 당 조직담당비서가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국민의 선택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국가에서는 실질적인 ‘2인자’는 있을 수 있어도 그 자리를 공식화할 수는 없다. ‘2인자’를 공식화하는 것은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는 전체주의·독재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런 전체주의·독재주의 국가에서도 혹시 2인자에게 권력이 누수될 것을 우려해 ‘2인자’를 공식화하는 일은 드물다. 공식화하더라도 ‘2인자’에게 실권(實權)을 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또 그렇게 해서 ‘2인자’로 공인되더라도 그 뒤끝은 좋지 못했다.
‘총통대리’ 루돌프 헤스
북한 노동당이 총비서 밑에 제1비서를 두고, 제1비서를 ‘총비서의 대리인’이라고 규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독일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사례이다. 나치당은 당과 국가의 지도자(총통・Führer)였던 히틀러를 대신해서 당무(黨務)를 관장하는 ‘총통대리(Stellvertreter des Führers)’라는 직책을 두었다. 역자(譯者)에 따라 부(副)당수, 총통 관방(官房), 사무총장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직책은 나치당 당수인 히틀러를 대신해 당무를 처리하고, 당 대회를 진행하는 다분히 의전적(儀典的)인 자리였다.
히틀러의 오랜 동지였던 루돌프 헤스(1894~1987)가 이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헤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별로였고, 그가 히틀러 승인 없이 영국과의 단독강화를 위해 1941년 비행기를 타고 스코틀랜드로 날아간 후 이 자리는 폐지됐다. 영국은 헤스를 정신이상자로 간주해 구금했다. 전후(戰後) 헤스는 뉘른베르크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슈판다우교도소에 수감 중 1987년 자살했다.
히틀러는 헤스가 떠난 후 총통대리 자리를 폐지하고, 대신 당수부(黨首部)를 두어 부장에 마르틴 보어만(1900~1945)을 앉혔다. 일종의 당수 비서실장 내지 사무총장 격인 자리였다. 충직한 듯하면서도 교활한 성격의 보어만이 패전 시까지 이 자리를 지키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했다. 그는 히틀러가 자살한 후 베를린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살됐다. 한때 그가 남미로 탈출해 위장된 신분으로 숨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낭설로 확인됐다.
國家元帥 괴링
나치 독일의 공식적인 2인자는 ‘국가원수(國家元帥·Reichsmarschall des Grossdeutschen Reiches)’ 헤르만 괴링(1893~1946)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에이스 조종사였던 그는 초창기 나치당 멤버로 1923년의 불발쿠데타에도 참여했다. 나치당이 대두하면서 정치적으로 급성장한 그는 국회의장, 프로이센주 내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나치 집권의 길을 닦았다. 악명 높은 게슈타포와 강제수용소를 창설한 사람이 바로 괴링이었다. 히틀러 집권 후에는 4개년 계획청장, 공군총사령관 등을 지냈다.
1939년 히틀러는 괴링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괴링의 큰소리와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수행 과정에서 공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그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당에서는 마르틴 보어만이, 무력·공안기관에서는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그의 자리를 잠식해 들어왔다. 다만 괴링은 뚱뚱하면서 천진해 보이는 외모와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라는 점 때문에 나치 지도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
1945년 4월 말 베를린 함락이 임박한 시점에서 괴링은 1939년 히틀러가 내렸던 명령에 의거해 히틀러 유고(有故) 시에 자신이 권력을 인수하는 데 동의해달라는 전문(電文)을 히틀러에게 보냈다. 이를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한 히틀러는 괴링을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고 감금하라고 친위대에 지시했다. 패전 후 괴링은 뉘른베르크전범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을 선고받자 자살했다.
류사오치와 린뱌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도 ‘2인자’들의 말로(末路)는 좋지 못했다.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국가부주석,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지내다가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1959년 국가주석 자리에서 물러나자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에 올랐다. 마오쩌둥은 공산당 주석 자리를 유지했지만, 실권은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에게 있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극좌(極左)노선을 시정하려 노력하다가 마오쩌둥의 노여움을 샀다. 마오쩌둥에게는 공산혁명의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있었다. 이 권위를 바탕으로 마오쩌둥이 정권 탈환을 위해 저지른 정변(政變)이 바로 문화대혁명이었다. 류사오치는 문화대혁명 중 홍위병들에게 폭행을 당한 후 투옥되어 1969년 옥중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류사오치의 뒤를 이어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공인된 사람은 국방부장 린뱌오(林彪·1907~1971)였다. 국공내전 당시 공산군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명장이었던 그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마오쩌둥이 궁지에 몰린 후에도 일관되게 그를 지지했다. 류사오치 실각 후에는 공산당 부주석을 맡으면서 ‘마오쩌둥 동지의 둘도 없는 충직한 전우’라는 호칭을 얻었다.
린뱌오는 “마오 주석은 천재”라는 문구를 공산당 강령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면서 아부했지만, 마오쩌둥의 시의심(猜疑心)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군부(軍部)를 기반으로 자신에게 도전할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린뱌오는 1971년 9월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도망치다가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린뱌오가 쿠데타를 시도했다느니, 그의 아들이 마오쩌둥을 암살하려 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후 린뱌오는 ‘마오 주석의 충직한 전우’에서 ‘혁명의 배신자’ ‘만고(萬古)역적’으로 추락했다.
‘제1비서’의 운명은…
이처럼 극우 나치 체제하에서건, 극좌 중국공산당 체제하에서건, ‘2인자’ 자리는 칼날 위에 앉은 것 같은 위험천만한 자리였고, 뒤끝이 좋지 못했다.
북한에서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권력 서열 2위로 여겨졌던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은 처형됐고, 한때 노동당 조직지도부 1부부장, 인민군 총정치국장, 인민군 차수(次帥)로 승승장구하던 황병서도 2017년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그가 뇌물수수 혐의로 처형됐다는 설도 있다. 인민군 총정치국장,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등을 지낸 최룡해는 부침(浮沈)을 거듭하다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자리에 올라 한동안 권력 서열 2위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조용원에게 밀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노동당이 난데없이 제1비서직을 신설하고 그에게 공식적인 ‘2인자’ 자리를 부여한 것은, 김정은의 통치부담,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만일의 경우 그에게 책임을 전가(轉嫁)하기 위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혹시 ‘백두혈통’이라는 김여정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몰라도, 김씨 일족이 아닌 자는 조용원이든 누구든 그 자리에 올랐다가는 장성택처럼 비명횡사할지도 모른다.⊙
사실 국민의 선택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국가에서는 실질적인 ‘2인자’는 있을 수 있어도 그 자리를 공식화할 수는 없다. ‘2인자’를 공식화하는 것은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는 전체주의·독재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런 전체주의·독재주의 국가에서도 혹시 2인자에게 권력이 누수될 것을 우려해 ‘2인자’를 공식화하는 일은 드물다. 공식화하더라도 ‘2인자’에게 실권(實權)을 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또 그렇게 해서 ‘2인자’로 공인되더라도 그 뒤끝은 좋지 못했다.
‘총통대리’ 루돌프 헤스
북한 노동당이 총비서 밑에 제1비서를 두고, 제1비서를 ‘총비서의 대리인’이라고 규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독일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사례이다. 나치당은 당과 국가의 지도자(총통・Führer)였던 히틀러를 대신해서 당무(黨務)를 관장하는 ‘총통대리(Stellvertreter des Führers)’라는 직책을 두었다. 역자(譯者)에 따라 부(副)당수, 총통 관방(官房), 사무총장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직책은 나치당 당수인 히틀러를 대신해 당무를 처리하고, 당 대회를 진행하는 다분히 의전적(儀典的)인 자리였다.
히틀러의 오랜 동지였던 루돌프 헤스(1894~1987)가 이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헤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별로였고, 그가 히틀러 승인 없이 영국과의 단독강화를 위해 1941년 비행기를 타고 스코틀랜드로 날아간 후 이 자리는 폐지됐다. 영국은 헤스를 정신이상자로 간주해 구금했다. 전후(戰後) 헤스는 뉘른베르크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슈판다우교도소에 수감 중 1987년 자살했다.
히틀러는 헤스가 떠난 후 총통대리 자리를 폐지하고, 대신 당수부(黨首部)를 두어 부장에 마르틴 보어만(1900~1945)을 앉혔다. 일종의 당수 비서실장 내지 사무총장 격인 자리였다. 충직한 듯하면서도 교활한 성격의 보어만이 패전 시까지 이 자리를 지키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했다. 그는 히틀러가 자살한 후 베를린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살됐다. 한때 그가 남미로 탈출해 위장된 신분으로 숨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낭설로 확인됐다.
國家元帥 괴링
나치 독일의 공식적인 2인자는 ‘국가원수(國家元帥·Reichsmarschall des Grossdeutschen Reiches)’ 헤르만 괴링(1893~1946)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에이스 조종사였던 그는 초창기 나치당 멤버로 1923년의 불발쿠데타에도 참여했다. 나치당이 대두하면서 정치적으로 급성장한 그는 국회의장, 프로이센주 내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나치 집권의 길을 닦았다. 악명 높은 게슈타포와 강제수용소를 창설한 사람이 바로 괴링이었다. 히틀러 집권 후에는 4개년 계획청장, 공군총사령관 등을 지냈다.
1939년 히틀러는 괴링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괴링의 큰소리와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수행 과정에서 공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그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당에서는 마르틴 보어만이, 무력·공안기관에서는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그의 자리를 잠식해 들어왔다. 다만 괴링은 뚱뚱하면서 천진해 보이는 외모와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라는 점 때문에 나치 지도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
1945년 4월 말 베를린 함락이 임박한 시점에서 괴링은 1939년 히틀러가 내렸던 명령에 의거해 히틀러 유고(有故) 시에 자신이 권력을 인수하는 데 동의해달라는 전문(電文)을 히틀러에게 보냈다. 이를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한 히틀러는 괴링을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고 감금하라고 친위대에 지시했다. 패전 후 괴링은 뉘른베르크전범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을 선고받자 자살했다.
류사오치와 린뱌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도 ‘2인자’들의 말로(末路)는 좋지 못했다.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국가부주석,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지내다가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1959년 국가주석 자리에서 물러나자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에 올랐다. 마오쩌둥은 공산당 주석 자리를 유지했지만, 실권은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에게 있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극좌(極左)노선을 시정하려 노력하다가 마오쩌둥의 노여움을 샀다. 마오쩌둥에게는 공산혁명의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있었다. 이 권위를 바탕으로 마오쩌둥이 정권 탈환을 위해 저지른 정변(政變)이 바로 문화대혁명이었다. 류사오치는 문화대혁명 중 홍위병들에게 폭행을 당한 후 투옥되어 1969년 옥중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류사오치의 뒤를 이어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공인된 사람은 국방부장 린뱌오(林彪·1907~1971)였다. 국공내전 당시 공산군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명장이었던 그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마오쩌둥이 궁지에 몰린 후에도 일관되게 그를 지지했다. 류사오치 실각 후에는 공산당 부주석을 맡으면서 ‘마오쩌둥 동지의 둘도 없는 충직한 전우’라는 호칭을 얻었다.
린뱌오는 “마오 주석은 천재”라는 문구를 공산당 강령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면서 아부했지만, 마오쩌둥의 시의심(猜疑心)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군부(軍部)를 기반으로 자신에게 도전할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린뱌오는 1971년 9월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도망치다가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린뱌오가 쿠데타를 시도했다느니, 그의 아들이 마오쩌둥을 암살하려 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후 린뱌오는 ‘마오 주석의 충직한 전우’에서 ‘혁명의 배신자’ ‘만고(萬古)역적’으로 추락했다.
‘제1비서’의 운명은…
이처럼 극우 나치 체제하에서건, 극좌 중국공산당 체제하에서건, ‘2인자’ 자리는 칼날 위에 앉은 것 같은 위험천만한 자리였고, 뒤끝이 좋지 못했다.
북한에서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권력 서열 2위로 여겨졌던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은 처형됐고, 한때 노동당 조직지도부 1부부장, 인민군 총정치국장, 인민군 차수(次帥)로 승승장구하던 황병서도 2017년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그가 뇌물수수 혐의로 처형됐다는 설도 있다. 인민군 총정치국장,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등을 지낸 최룡해는 부침(浮沈)을 거듭하다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자리에 올라 한동안 권력 서열 2위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조용원에게 밀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노동당이 난데없이 제1비서직을 신설하고 그에게 공식적인 ‘2인자’ 자리를 부여한 것은, 김정은의 통치부담,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만일의 경우 그에게 책임을 전가(轉嫁)하기 위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혹시 ‘백두혈통’이라는 김여정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몰라도, 김씨 일족이 아닌 자는 조용원이든 누구든 그 자리에 올랐다가는 장성택처럼 비명횡사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