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주민, 재일교포의 富와 생활양식에 위화감 느끼며 그들을 ‘째포’라고 비하
⊙ 재일교포, 북한 주민을 ‘오지의 원주민’이라는 뜻으로 ‘겐짱’이라 비하
⊙ 재일교포 학생들, 학교폭력에 시달리다가 외화와 일본 상품으로 주먹패 매수
⊙ 재일교포 1960년대 말 평양 항의시위… 1972년 검덕광산을 방문한 김일성 앞 시위 벌여
⊙ 재일교포, 북한 주민을 ‘오지의 원주민’이라는 뜻으로 ‘겐짱’이라 비하
⊙ 재일교포 학생들, 학교폭력에 시달리다가 외화와 일본 상품으로 주먹패 매수
⊙ 재일교포 1960년대 말 평양 항의시위… 1972년 검덕광산을 방문한 김일성 앞 시위 벌여
-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첫 북송선이 출항했다. 사진=《마이니치신문》 제공
북한은 전체주의 사회다. 손톱만 한 이견(異見)도 없어야 한다. 김정은이 정하면 인민은 따라야 한다. 그런데 토를 다는 집단이 있다. ‘재일 귀국동포’다. 일본에서는 ‘귀환자(歸還者)’라 부르고 대한민국에서는 ‘북송교포(北送僑胞)’라 부르는 사람들이다.
북한 당국과 인민은 북송교포에게 이질감을 느낀다. 평양으로 배치된 북송교포는 중구역과 모란봉구역에서 산다. 평양에선 부촌(富村)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브랜드 운동화와 깔끔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100% 북송교포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장화를 신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일론 스타킹을 신었거나 일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역시 북송교포다. 품질에서 북한산과 압도적인 차이가 나기에, 그냥 지나만 가도 곧바로 티가 난다.
북송교포 친구 집에 놀러 가면 현관부터 외국이다. 일단 집 안이 깨끗하다. 어머니가 친절하고 싹싹하게 맞아주는 건 문화적 충격이다. 무릎을 꿇고 차를 따라주시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차와 함께 과자를 내온다. 과자 봉투에 적힌 일본 글씨에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맛에 대한 호기심과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다. 먹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다. 다기(茶器)도 북한에선 보기 힘든 고급품이고, 찬장에 놓인 반짝이는 법랑(琺瑯) 그릇도 북한에선 거의 볼 수 없는 물건이다. 낯선 음식과 물건 앞에서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인다.
이해 불가한 존재 ‘째포’
이런 불편한 마음은 일본과 북송교포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진화한다. 어쩌면 적개심(敵愾心)은 열등감(劣等感)의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시간제로 물이 나오고 한 달에 두 번 목욕이 상식인 평양에서 매일 씻는 째포들은 여전히 이해 불가한 존재다. 체취가 없다는 점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째포’(북송교포에 대한 비칭) 친구의 부모님이 일본어로 대화하는 내용도 궁금하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대단한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린다. 개 두 마리를 기르고 철창을 덧댄 창문에도 자격지심(自激之心)이 생긴다. ‘생활조절위원회’(도둑·북한 은어)를 막기 위한 자구책이지만, 왠지 북한 주민을 무시하는 것 같아 얼굴이 뜨겁다. 어쩌면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공격성은 엉뚱한 곳에서 폭발한다. 카레와 커피까지는 참겠는데, 사케(일본 전통술)부터는 ‘용인선(容忍線) 넘어’다. 벽에 걸린 기모노나 유카타를 보면 여기가 일본인지 북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마음속 송곳을 감추고 그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네가 생각하는 조국은 어디냐?”
돌아오는 답에 더 기가 막힌다. ‘수령님 만세’가 아니라, “서울도 조국이고 평양도 조국이다. 한반도 전체가 내 조국이다. 남도 북도 하나다”라고 진지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반역자가 있나!’라는 생각에 당장 밥상을 뒤엎고 싶지만, 일단은 참는다. ‘음식과 현금의 힘’ 때문이다. 그 대신에 ‘째포들은 우리 글자도 어린애처럼 쓰고, 글씨가 삐뚤빼뚤해 읽기가 힘들다’며 그들이 없는 곳에서 뒷얘기를 한다.
째포에 대응하는 말은 ‘겐짱’이다. 째포들이 북한 주민을 낮춰서 부르는 은어다. 원주민(原住民)의 ‘원’ 일본식 발음 ‘겐’에 사람을 뜻하는 ‘짱’을 붙인 단어다. ‘원주민’이라는 단어 안에는 물론 ‘오지(奧地)에 살며 문명적으로 뒤처진 사람’이라는 속뜻이 담겨 있다. 어쩌면 째포와 겐짱은 서로를 동물원의 동물 보듯 이질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인데, 째포와 겐짱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나 어떤 과정을 거쳐 친구가 되는가. 학교다.
북한의 학교는 주먹 서열이 엄격한 사회다. 학생들 사이의 폭력이 난무하고, 다른 학교와의 ‘단체전’이 수시로 열린다. 단순한 패싸움이 아니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할 만큼 폭력의 강도(强度)가 세다. 이것이 북한 학생, 특히 남학생의 일상이다. 학생 시절뿐만이 아니다. 북한 남자는 30~40대까지도 ‘주먹’을 휘두르며 산다. 수시로 만나는 일상의 시비와 분쟁을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주먹인 탓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은 21세기 북한 사회의 진리다. 주먹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다.
폭력이 일상인 사회에서 째포들은 맹수 앞의 먹잇감이다. ‘맹수’들은 학교 앞에서 째포를 기다렸다가 가방과 옷, 신발을 빼앗는다. 때로는 양말과 속옷까지 빼앗기도 한다. 속옷까지 빼앗긴 째포가 어떻게 귀가하는지는 맹수가 알 바 아니다.
평촌구역 아파트 붕괴 사고
‘맹수’들의 주 서식지는 서성구역, 평촌구역, 사동구역이다. 평양에서 상대적으로 못사는 사람이 거주하는 구역이다.
말이 난 김에 하면, 2014년 5월에 23층 아파트 붕괴사고가 난 곳이 바로 평촌구역이다. 이 사고는 천리마 정신으로 ‘속도전’을 하다가 생긴, 전형적인 북한식 인재(人災)였다. 무리하게 잡은 준공일에 맞춰 콘크리트 양생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불량 시멘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그마저 모자라던 철근과 시멘트 등 자재를 대량으로 빼돌렸다. 평촌구역 아파트 건설현장 붕괴사고는 이 모든 일이 겹쳐서 일어난 총체적 부실공사의 결정판이었다.
문제는 여론이었다. 시대가 바뀐 탓에 민간에서도 사고 원인에 대한 소문이 돌아다녔다. 북한 당국으로서는 전례(前例) 없는 위기였다. 오죽하면 북한 최초로 간부가 주민과 유가족 등에게 고개 숙여 공개사과를 하고, 사과하는 사진을 신문에 실었겠는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망자가 얼마인지, 사고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오늘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누가 얼마만큼 처벌을 받았는지도 알 수 없다. 물론 공식 발표도 없다. 진상규명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김씨 일가가 사고의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평양 외곽 사동구역은 구역 내 송신·송화지구에서 1만 세대 규모의 살림집 건설 착공식을 한다며 2021년 3월 23일 김정은이 직접 찾았던 곳이다. 김정은은 착공식 연설에서 “평양시 5만 세대 살림집 건설은 수도 시민들에게 보다 안정되고 문명한 생활조건을 제공해주기 위하여 우리 당이 크게 벼르고 준비해온 숙원사업이며 철두철미 국가의 재부와 근로대중의 창조적 노동의 결과가 고스란히 근로자들 자신의 복리로 되게 하는 숭고한 사업”이라고 했다.
하지만, 환호하고 감사해야 할 주민들은 정작 불만이 가득하다. 건설 과정에서 노력 동원, 자재 기부 등 무리한 요구에 응해야 하고, 완공된 집이 자신들에게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완공한다고 해봐야, 이런 식으로 군인들이 나서서 지은 집은 뼈대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무늬만 집’이다. 운이 좋아 새집을 받는다고 해도, 바닥재, 창문, 인테리어 등 공사는 개인이 일일이 다 해야 한다는 뜻이다.
동업과 배신
다시 북송교포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맹수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최상의 방법은 이이제이(以夷制夷)다. 그에 상응하는 폭력을 동원한다는 말이다. 같은 학교의 ‘주먹’들에게 보호를 청하는 것이다. 점심 식사비로 부모님이 주는 달러나 엔화가 보호와 친교의 수단이다. 도시락으로 가져오는 ‘앙꼬모찌’나 컵라면도 좋다.
같이 다니는 시간이 늘어나면 정(情)이 생기고 방과 후에는 어울리며 집에도 놀러 가는 사이로 발전한다. 세월이 흐르고 신뢰가 쌓이면 같이 사업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일본에서 보내준 물품들을 판매하는 장사다. 원가의 30배가 남는다는 사카린과 스카프가 있고, 한 개를 팔면 1년 치 생활비가 나온다는 세이코 시계도 있다.
소비자가 북한 주민이라는 점이 동업의 배경이지만, 이것이 함정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물건 먼저, 돈은 나중에’라는, 북한 특유의 고급품 거래 방식 때문이다. 금액이 커지면 욕심이 커지고, 욕심이 커지면 사고가 나는 법이다. 북송교포 대부분은 그래서 크든 작든 친하게 지내던 북한 사람들에게 사기당한 경험이 있다. 사기 사건은 때론 1990년대 역사유적보존사업소장 일가족 자살사건 등 비극적인 단계로 커지기도 한다. 피해자인 북송교포들이 돈보다 배신감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낙하
위 일화는 평양으로 배치된 상류층 북송교포에 해당하는 사례다. 지방으로 배치된 교포의 생활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북송교포의 약 20%는 일본에서 기초수급을 받던 사람들인데, 북한 당국은 이들을 노예나 다름없이 취급했다. ‘어버이 조국’은 그들의 믿음을 철저하게 배신했다. 지방에 배치된 북송교포 이야기는 기회를 보아 다음에 말씀 올리겠다.
해방 후 일본에 남은 교포 인구는 약 60만명. 그중 9만명 넘는 인원이 북송선에 올랐으니, 재일교포는 거의 모두 북한에 직계 가족이 있는 셈이다. 조총련 최상부에 끈이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북송교포는 24시간 감시와 차별에 시달렸다. ‘자본주의 물을 먹어본 사람들’은 김씨 일가에겐 그 자체로 위험분자였기 때문이다.
재일교포 대부분이 남쪽 출신이라는 사정도 탄압을 정당화하는 구실이었다. 6·25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다 북행(北行)을 택한 인민군 포로들조차 ‘자본주의 물’을 먹었다며 잔인하게 짓밟은 사회가 전체주의 북한이다. 하루아침에 일가족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일은 북송교포 사회에선 그래서 희귀한 일이 아니다. 평양 부자 동네에서 오지로 추방되고 출신 성분이 격하되는 것을 ‘자유낙하(自由落下)’라고 한다.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면 밧줄이 필요한데, 그냥 밧줄은 곤란하고 ‘황금 밧줄’이어야 한다. 그렇다. 북한 당국자들에게 북송교포는 ‘현금을 빨아들이는 인질’일 따름이었다.
김씨 일가가 ‘자본주의 물’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있다. ‘돈의 힘’도 문제지만,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더 큰 문제다. 세뇌(洗腦)를 벗어난 사람은 언제라도 독재를 겨누는 뇌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1960년대 말 평양 항의시위, 1972년 검덕광산을 방문한 김일성 앞 시위 등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화는 북송교포들이었기에 가능한 ‘의견 표출’이었다.
북송교포가 내는 ‘개인적 의견’은 북한 사회에 미묘한 틈을 만든다. 미묘한 틈은 언제라도 더 큰 균열을 만들 수 있다. 때를 만나면 이미 갈라진 틈 사이로 무엇이 얼마만큼 어떻게 분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북한 당국과 인민은 북송교포에게 이질감을 느낀다. 평양으로 배치된 북송교포는 중구역과 모란봉구역에서 산다. 평양에선 부촌(富村)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브랜드 운동화와 깔끔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100% 북송교포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장화를 신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일론 스타킹을 신었거나 일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역시 북송교포다. 품질에서 북한산과 압도적인 차이가 나기에, 그냥 지나만 가도 곧바로 티가 난다.
북송교포 친구 집에 놀러 가면 현관부터 외국이다. 일단 집 안이 깨끗하다. 어머니가 친절하고 싹싹하게 맞아주는 건 문화적 충격이다. 무릎을 꿇고 차를 따라주시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차와 함께 과자를 내온다. 과자 봉투에 적힌 일본 글씨에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맛에 대한 호기심과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다. 먹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다. 다기(茶器)도 북한에선 보기 힘든 고급품이고, 찬장에 놓인 반짝이는 법랑(琺瑯) 그릇도 북한에선 거의 볼 수 없는 물건이다. 낯선 음식과 물건 앞에서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인다.
이해 불가한 존재 ‘째포’
이런 불편한 마음은 일본과 북송교포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진화한다. 어쩌면 적개심(敵愾心)은 열등감(劣等感)의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시간제로 물이 나오고 한 달에 두 번 목욕이 상식인 평양에서 매일 씻는 째포들은 여전히 이해 불가한 존재다. 체취가 없다는 점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째포’(북송교포에 대한 비칭) 친구의 부모님이 일본어로 대화하는 내용도 궁금하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대단한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린다. 개 두 마리를 기르고 철창을 덧댄 창문에도 자격지심(自激之心)이 생긴다. ‘생활조절위원회’(도둑·북한 은어)를 막기 위한 자구책이지만, 왠지 북한 주민을 무시하는 것 같아 얼굴이 뜨겁다. 어쩌면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공격성은 엉뚱한 곳에서 폭발한다. 카레와 커피까지는 참겠는데, 사케(일본 전통술)부터는 ‘용인선(容忍線) 넘어’다. 벽에 걸린 기모노나 유카타를 보면 여기가 일본인지 북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마음속 송곳을 감추고 그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네가 생각하는 조국은 어디냐?”
돌아오는 답에 더 기가 막힌다. ‘수령님 만세’가 아니라, “서울도 조국이고 평양도 조국이다. 한반도 전체가 내 조국이다. 남도 북도 하나다”라고 진지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반역자가 있나!’라는 생각에 당장 밥상을 뒤엎고 싶지만, 일단은 참는다. ‘음식과 현금의 힘’ 때문이다. 그 대신에 ‘째포들은 우리 글자도 어린애처럼 쓰고, 글씨가 삐뚤빼뚤해 읽기가 힘들다’며 그들이 없는 곳에서 뒷얘기를 한다.
째포에 대응하는 말은 ‘겐짱’이다. 째포들이 북한 주민을 낮춰서 부르는 은어다. 원주민(原住民)의 ‘원’ 일본식 발음 ‘겐’에 사람을 뜻하는 ‘짱’을 붙인 단어다. ‘원주민’이라는 단어 안에는 물론 ‘오지(奧地)에 살며 문명적으로 뒤처진 사람’이라는 속뜻이 담겨 있다. 어쩌면 째포와 겐짱은 서로를 동물원의 동물 보듯 이질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인데, 째포와 겐짱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나 어떤 과정을 거쳐 친구가 되는가. 학교다.
북한의 학교는 주먹 서열이 엄격한 사회다. 학생들 사이의 폭력이 난무하고, 다른 학교와의 ‘단체전’이 수시로 열린다. 단순한 패싸움이 아니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할 만큼 폭력의 강도(强度)가 세다. 이것이 북한 학생, 특히 남학생의 일상이다. 학생 시절뿐만이 아니다. 북한 남자는 30~40대까지도 ‘주먹’을 휘두르며 산다. 수시로 만나는 일상의 시비와 분쟁을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주먹인 탓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은 21세기 북한 사회의 진리다. 주먹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다.
폭력이 일상인 사회에서 째포들은 맹수 앞의 먹잇감이다. ‘맹수’들은 학교 앞에서 째포를 기다렸다가 가방과 옷, 신발을 빼앗는다. 때로는 양말과 속옷까지 빼앗기도 한다. 속옷까지 빼앗긴 째포가 어떻게 귀가하는지는 맹수가 알 바 아니다.
평촌구역 아파트 붕괴 사고
‘맹수’들의 주 서식지는 서성구역, 평촌구역, 사동구역이다. 평양에서 상대적으로 못사는 사람이 거주하는 구역이다.
말이 난 김에 하면, 2014년 5월에 23층 아파트 붕괴사고가 난 곳이 바로 평촌구역이다. 이 사고는 천리마 정신으로 ‘속도전’을 하다가 생긴, 전형적인 북한식 인재(人災)였다. 무리하게 잡은 준공일에 맞춰 콘크리트 양생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불량 시멘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그마저 모자라던 철근과 시멘트 등 자재를 대량으로 빼돌렸다. 평촌구역 아파트 건설현장 붕괴사고는 이 모든 일이 겹쳐서 일어난 총체적 부실공사의 결정판이었다.
문제는 여론이었다. 시대가 바뀐 탓에 민간에서도 사고 원인에 대한 소문이 돌아다녔다. 북한 당국으로서는 전례(前例) 없는 위기였다. 오죽하면 북한 최초로 간부가 주민과 유가족 등에게 고개 숙여 공개사과를 하고, 사과하는 사진을 신문에 실었겠는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망자가 얼마인지, 사고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오늘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누가 얼마만큼 처벌을 받았는지도 알 수 없다. 물론 공식 발표도 없다. 진상규명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김씨 일가가 사고의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평양 외곽 사동구역은 구역 내 송신·송화지구에서 1만 세대 규모의 살림집 건설 착공식을 한다며 2021년 3월 23일 김정은이 직접 찾았던 곳이다. 김정은은 착공식 연설에서 “평양시 5만 세대 살림집 건설은 수도 시민들에게 보다 안정되고 문명한 생활조건을 제공해주기 위하여 우리 당이 크게 벼르고 준비해온 숙원사업이며 철두철미 국가의 재부와 근로대중의 창조적 노동의 결과가 고스란히 근로자들 자신의 복리로 되게 하는 숭고한 사업”이라고 했다.
하지만, 환호하고 감사해야 할 주민들은 정작 불만이 가득하다. 건설 과정에서 노력 동원, 자재 기부 등 무리한 요구에 응해야 하고, 완공된 집이 자신들에게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완공한다고 해봐야, 이런 식으로 군인들이 나서서 지은 집은 뼈대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무늬만 집’이다. 운이 좋아 새집을 받는다고 해도, 바닥재, 창문, 인테리어 등 공사는 개인이 일일이 다 해야 한다는 뜻이다.
동업과 배신
다시 북송교포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맹수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최상의 방법은 이이제이(以夷制夷)다. 그에 상응하는 폭력을 동원한다는 말이다. 같은 학교의 ‘주먹’들에게 보호를 청하는 것이다. 점심 식사비로 부모님이 주는 달러나 엔화가 보호와 친교의 수단이다. 도시락으로 가져오는 ‘앙꼬모찌’나 컵라면도 좋다.
같이 다니는 시간이 늘어나면 정(情)이 생기고 방과 후에는 어울리며 집에도 놀러 가는 사이로 발전한다. 세월이 흐르고 신뢰가 쌓이면 같이 사업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일본에서 보내준 물품들을 판매하는 장사다. 원가의 30배가 남는다는 사카린과 스카프가 있고, 한 개를 팔면 1년 치 생활비가 나온다는 세이코 시계도 있다.
소비자가 북한 주민이라는 점이 동업의 배경이지만, 이것이 함정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물건 먼저, 돈은 나중에’라는, 북한 특유의 고급품 거래 방식 때문이다. 금액이 커지면 욕심이 커지고, 욕심이 커지면 사고가 나는 법이다. 북송교포 대부분은 그래서 크든 작든 친하게 지내던 북한 사람들에게 사기당한 경험이 있다. 사기 사건은 때론 1990년대 역사유적보존사업소장 일가족 자살사건 등 비극적인 단계로 커지기도 한다. 피해자인 북송교포들이 돈보다 배신감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 |
북송 재일교포 출신 탈북자 가와사키 에이코(왼쪽) 씨는 2015년 12월 14일 일본 도쿄 도심 조총련 본부 앞에서 “동포들을 속여 북한에 보낸 조총련은 사죄하라”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사진=조선DB |
해방 후 일본에 남은 교포 인구는 약 60만명. 그중 9만명 넘는 인원이 북송선에 올랐으니, 재일교포는 거의 모두 북한에 직계 가족이 있는 셈이다. 조총련 최상부에 끈이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북송교포는 24시간 감시와 차별에 시달렸다. ‘자본주의 물을 먹어본 사람들’은 김씨 일가에겐 그 자체로 위험분자였기 때문이다.
재일교포 대부분이 남쪽 출신이라는 사정도 탄압을 정당화하는 구실이었다. 6·25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다 북행(北行)을 택한 인민군 포로들조차 ‘자본주의 물’을 먹었다며 잔인하게 짓밟은 사회가 전체주의 북한이다. 하루아침에 일가족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일은 북송교포 사회에선 그래서 희귀한 일이 아니다. 평양 부자 동네에서 오지로 추방되고 출신 성분이 격하되는 것을 ‘자유낙하(自由落下)’라고 한다.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면 밧줄이 필요한데, 그냥 밧줄은 곤란하고 ‘황금 밧줄’이어야 한다. 그렇다. 북한 당국자들에게 북송교포는 ‘현금을 빨아들이는 인질’일 따름이었다.
김씨 일가가 ‘자본주의 물’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있다. ‘돈의 힘’도 문제지만,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더 큰 문제다. 세뇌(洗腦)를 벗어난 사람은 언제라도 독재를 겨누는 뇌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1960년대 말 평양 항의시위, 1972년 검덕광산을 방문한 김일성 앞 시위 등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화는 북송교포들이었기에 가능한 ‘의견 표출’이었다.
북송교포가 내는 ‘개인적 의견’은 북한 사회에 미묘한 틈을 만든다. 미묘한 틈은 언제라도 더 큰 균열을 만들 수 있다. 때를 만나면 이미 갈라진 틈 사이로 무엇이 얼마만큼 어떻게 분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