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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북한요지경

北으로 간 재일교포들

北送 재일교포의 90% 보위부 조사 받아

글 : 장원재  (사)배우고나누는무지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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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1984년 9만3340명 북송, 일본인 6839명 포함
⊙ ‘째포’라고 멸시받아… 반항 심리에서 日本風 과시하기도
⊙ 보위부의 조사 자료는 조총련이 제공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영국 런던대학 연극학 박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경기파주영어마을 사무총장,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 現 (사)배우고나누는무지개 대표 / 저서 《끝나지 않은 축구 이야기》 《오태석 연극: 실험과 도전의 40년》 《배우란 무엇인가》 등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첫 북송선에오른 재일교포들. 지옥으로 가는 항해의 시작이었다. 사진=《마이니치신문》
  1959년 12월 14일, 첫 북송(北送) 선박이 일본 니가타(新潟)항을 출발해 원산으로 향했다. 이른바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의 시작이다. 북한, 조총련, 일본 적십자사 등이 협조하여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적(朝鮮籍)이나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북한으로 보냈다. 1984년까지 9만3340명이 북한으로 갔다. 이 중에는 일본인 아내 또는 남편 등 6839명의 일본 국적자도 있었다.
 
  그들은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며 ‘귀국선’에 몸을 실었지만, 북한에서는 더 심한 차별과 냉대를 당했다. 북한 사람들은 그들을 ‘째포’라고 불렀다. ‘재일동포(在日同胞)’의 비칭(卑稱)으로서, “당신은 째포잖소” “야, 이 째포 ××야!” 등 일상 대화에서 대놓고 쓰이던 용어다.
 
  그래서 귀국자들은 정체성(正體性)의 혼란을 겪었다. 일본에서 평생 차별을 받다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일본보다 더한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국자들은 일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한 사람도 아니었다. 이런 상태를 일컬어 ‘귀국자병(歸國者病)’ 혹은 ‘일본인병(日本人病)’이라 한다.
 
  귀국 1세대 부모들은 째포 차별로 고생했지만, 그 자식들은 반대로 재일동포라는 것을 무기로 삼고 살아간다. 차별에 대항하는 방법인데, 일본에서 왔음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는 것이다.
 
  그들 부모 중에는 허영심과 자식들이 무시당하는 것이 싫은 마음에서 경쟁적으로 ‘일본풍(日本風)’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귀국자 친척들이 일본에서 보내준 옷이나 아디다스·퓨마 등 유명 브랜드 신발을 신으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북한에서는 신기하고 희귀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헤어스타일이나 장신구가 바로 눈에 띌 정도로 ‘세련되게’ 하고 다닌다. 호텔이나 외화(外貨) 상점 등 북한 일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곳을 단골로 다니기도 한다. ‘나는 특별하며 너희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런 상황을 즐기는 것이다. 비교 대상은 자신과 동갑내기 북한 현지 친구들이다. ‘너희는 평생 이런 체험, 이런 물건들을 못 쓰지만 우리는 일본의 친척 덕분에 이렇게 살 수 있다’고 과시하며 자존감(自尊感)과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동경심이 생긴다. 그들의 마음이 영원히 어중간하게 일본을 향하게 되는 이유다.
 
  이런 ‘병’이 깊어지면 버스 안이나 상점 등 공공장소에서 일부러 일본어로 대화하기도 한다. 재일교포들은 이 병이 자신들이 일본에서 겪는 ‘조국병(祖國病)’ ‘민족병(民族病)’, 다시 말하면 ‘어머니 조국에 대한 과도한 동경심으로 북한을 추종하는 심리’와 공통점이 있다고 이해한다.
 
 
  눈물 섞인 카레
 
  그래서 귀국자 집안 분위기는 일본식이다. 일본어로 대화하며, 일본 커피와 카레를 먹는다. 여담이지만, 귀국자들에게 ‘카레’는 솔푸드다. 19세기 말 혼슈(本州) 가나가와(神奈川)현의 요코스카(橫須賀)항에 정박한 영국 함대의 수병(水兵)들이 커리 먹는 것을 보고 일본 해군은 커리가 영국군의 쌩쌩한 체력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얼마 후 커리는 일본에서 ‘서양과 근대화’를 상징하는 음식이 되었으며, 각기병(脚氣病)을 없애는 탁월한 약용식품(藥用食品)이라는 신화적 믿음도 획득했다. 그 결과, 일본 해군은 수병들에게 일본식 커리인 카레를 자주 먹였다. 1945년 4월 7일에 격침된 일본 해군 1번 함 야마토 전함의 주메뉴 중 하나가 바로 카레였다.
 
  카레는 일본의 전후(戰後) 산업화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지금도 요코스카항에서는 ‘해군 카레축제’가 열리며, 지방자치단체별로 개최하는 ‘어린이 카레 만들기 대회’는 어디서나 성황이다. 문학작품이나 애니메이션에도 추억이 깃든 어린 시절 먹던 카레 냄새가 자주 등장한다. 나카무라아카데미(요리학교) 서울분교의 가와시마 도시오 교수가 “가난하던 시절, 어머니가 해준 카레를 많이 먹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일본인의 유년 시절 기억에는 카레가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귀국자들에게도 카레는 일본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그들은 눈물 섞인 카레를 먹으며 일본을, 정확히 말하면 일본에서의 자유롭던 생활을 그리워한다.
 
  귀국자들이 커피를 마시며 카레를 먹고, ‘사치’를 할 수 있는 배경이 있다. 일본에서 보내주는 돈이다. 돈뿐 아니라 생활용품, 시계, 전자제품, 중고 옷 등 환금성(換金性) 물품도 받는다. 부모, 형제 등 직계가족이 남아 있는 사람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일본으로 SOS를 친다. 통신 수단은 수신자 부담 국제전화다. 조금 통화해도 금방 1만~ 2만 엔 청구서가 나올 만큼 비싸다. 송금(送金)을 받는 요령은 두 가지다.
 
 
  ‘째포’와 ‘겐짱’
 
  첫째, 송금받을 구실을 잘 생각할 것. 거짓말도 보태고, 정말로 위급해서 돈이 꼭 필요한 상황임을 강조하는 것이 요령이다. 돈을 보내주는 가족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둘째, 돈이나 물건을 받을 때 가급적이면 인편을 이용할 것. 예를 들어 친구 형이 일본에서 ‘조국방문단’으로 북한에 온다고 하자. 그가 내 가족을 직접 찾아가 돈과 물건을 받아서 올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 요령이다. 그렇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 부탁하는 것이 귀국자 사회의 관습이다.
 
  일본에서 돈과 물건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아는 사람을 통해 인편으로 보내야만 안전하게 전달된다는 믿음이 있다. 우편으로 보내면 적어도 4분의 3 이상은 사라진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20박스를 부쳤는데 ‘보내주신 3박스 잘 받았습니다’라는 답장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북한 업자들과 세관원이 서로 짜고 물건을 빼돌리기 때문이다. 일본의 가족이 사실상 인질이나 다름없는 북한의 가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차곡차곡 싸서 보낸 짐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장마당으로 흘러나온다.
 
  같은 귀국자라도 송금 수준에 따라 생활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지방 시골에 배치된, 일본 가족의 도움이 없는 귀국자들은 엄청 고생을 했다. 그런 집 자녀들은 북한 사람인지 교포 자식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일부러 현지인처럼 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현지인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장 적극적인 ‘현지화(現地化)’ 노력은 북한 현지인들과의 결혼이다. ‘나는 재일교포가 아니다’ ‘더는 귀국자 취급을 받기 싫다’며 북한에서 태어난 귀국자의 자녀들이 귀국자 사회 밖에서 배우자를 택했다.
 
  하지만 ‘문화 차이’가 비극을 부른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 재일교포 귀국자들은 북한 주민들을 ‘겐짱’이라고 부른다. ‘째포’에 대한 대응어로, ‘원주민(原住民)’의 비칭(卑稱)이다. 북한 며느리와 사위는 시댁과 처가의 생활환경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째포와 겐짱의 정서적 충돌이다. 그래서 시어머니·시아버지, 장인·장모가 숨어서 이불을 덮어쓰고 일본 라디오 방송 듣는 것을 보면, 며느리 또는 사위가 이를 당국에 신고했다. 신고 후 이혼하면 본인들은 무사하지만, 나머지 전 가족은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지는 일이 많았다. 재일교포라는 뿌리가 싫다는 자식의 반발로 인해 귀국자 가족 전체가 사라진 비극이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조총련이 보위부에 자료 제공
 
1959년 12월 10일, 북한으로 가기 위해 일본 교토역에서 니가타로 향하는 ‘귀환 전용 열차’에 오른 재일(在日) 조선인 가족들. 이들은 나흘 뒤인 14일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떠났다. 사진=《마이니치신문》
  ‘귀국자병’에 걸린 호화생활자 중에도 가족 전체가 수용소로 끌려간 경우가 있다. 일본에서 보내준 한국영화나 일본영화가 문제였다. 부모가 숨어서 보던 비디오를 찾아 친구들과 같이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에 북한 특권층 친구들이 끼어든다. 함께 비디오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소문이 나고, 소문이 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자본주의 비디오를 본 사실이 중대범죄 사건으로 확대되면 일이 커진다. 비디오를 본 자식뿐 아니라 부모까지 모두 지방으로 추방되거나 심하면 가족 전체가 수용소로 보내지는 것이다. 물론 비디오를 함께 본 북한 특권층 자녀들은 수사 과정에서 뇌물을 쓰고 빠져나간다.
 
  북한 입장에서 보자면, 귀국자들은 자본주의의 물을 흠뻑 먹은 사람들이다. 언제든지 체제위협 세력으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감시하고,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성인이 된 뒤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중 90% 이상이 반드시 한 번은 보위부에 끌려갔다 오는 이유다.
 
  보위부는 이들이 일본에서 살던 당시 행적에 대해 조사한다. 단순한 조사가 아니다. 취조를 겸한 강도 높은 심문이다. 대답을 잘못하면 바로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위중한 절차다.
 
  이에 대한 기본 조사 자료를 제공하는 곳이 조총련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의 학적부부터 친구들의 증언까지 개인사를 기록한 방대한 문건이 북한으로 넘어온다. 보위부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무엇을 했는지 꼬치꼬치 조사한다. 예를 들어 “○○○○년 ○○월 데모에 참여해서 무엇을 했나, 어떤 생각으로 데모에 나갔나,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하루 구금되어 있었다는데, 그때 일본 경찰에게서 비밀임무를 받지 않았나? 당신이 결백하다는 증거나 증인이 있나”라는 식의 추궁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6개월 동안 강도 높게 이어진다.
 
  그 기간에 직장과 가족에게는 ‘지방 장기출장’ 간 것으로 통보한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다들 짐작한다. 기약 없는 구금은 사람을 극도의 공포감에 질리도록 만든다. 요행히 풀려나더라도 자본주의풍(風)을 주변에 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아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자동 세뇌를 하는 것이다.
 
 
 
속고 산 사람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들이 수십 년 전에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것을 모르고 일본의 노부모가 계속 돈과 물건을 보내주는 경우도 있다. 고국 방문단으로 북한에 와서 가족 상봉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자식의 생사도 모른 채 오랜 세월을 속고 살았다’는 진실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분개하는 백발 노인들의 처절한 모습은 원산항 부두의 가장 가슴 아픈 풍경 가운데 하나일 터이다.
 
  앞의 이야기 상당 부분은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의 초창기 풍경이다. 사업이 시작된 지 61년이 지났고, 귀국자 3, 4대의 사정은 초창기보다 나아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통신의 자유 등 기본인권이 부재(不在)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북한 전역의 정치범 수용소에는 약 20만명이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 재일교포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려주는 통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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