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시간 달려 태국에 도착… “북한에서 왔어요”
⊙ 동물사료 운송 트럭에서의 24시간
⊙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 동물사료 운송 트럭에서의 24시간
⊙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 2015년 8월 탈북 일가족 6명이 라오스 메콩강을 통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북한인권시민연합
현재 남한에서 살고 있는 탈북자 수가 3만명을 넘었다. 통일부 통계에 따르면 2018년 9월 기준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는 3만2147명이다. 이들의 탈북 이유와 목적, 방법은 모두 다르다.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 탈북한 사람들은 식량난 때문이다. 반면 2006년 이후 탈북자들은 먼저 온 가족이나 친구의 권유로 남한으로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탈북 방법도 다양해졌다. 탈북자의 90%는 중국을 거쳐 3국을 통해 남한으로 입국한다. 탈북자의 상당수는 중국과 태국 루트를 이용한다. 이 밖에 베트남, 캄보디아 등을 거쳐 오는 이들도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몽골→남한으로 오는 루트가 있었다. 하지만 이 루트는 사막을 건너야 한다는 위험 부담으로 인해 더 이상 이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중국→태국 루트를 통해 남한에 입국했다. 기간은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오기까지 5개월 걸렸다. 18세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도 있었다. 목적지도 모른 채 길을 나섰지만 내가 그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 《월간조선》 1월호에서도 밝혔지만 아버지로부터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들은 것은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 도착해서다.
“여긴 어디고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윈난성 쿤밍에서 아버지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남한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됐다. 이후 그곳에서 15일 정도 머물렀다. 보통 탈북 과정에서 신변의 안전 때문에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하지만 2006년 당시 태국의 정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태국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우리는 상황이 안정된 뒤에야 출발했다. 일행은 6명이었다. 보통 6명이 한 조로 움직인다. 우리는 동물 사료를 실은 트럭에 올라 24시간을 달려 윈난성 쿤밍시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가는 동안 한 번 정도 휴게소에 정차해 화장실과 끼니를 해결했다. 이 외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중간중간 오줌보가 터질 듯이 화장실이 급했지만 기사는 차를 세우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도착한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브로커는 다음 날 일찍 우리를 깨웠다. 우리는 아침도 거른 채 작은 트럭에 올라야 했다. 비탈진 산길을 3시간쯤 달려 차가 멈췄다. 그냥 산이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반대편에서 트럭 한 대가 왔다. 그는 우리를 안내할 브로커였다. 브로커 두 사람은 중국어로 뭐라고 말을 하곤 우리를 좀 전에 도착한 트럭으로 옮겨 타라고 했다. 정말 이 사람들이 누구고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른 채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우리는 트럭을 옮겨 타고 다시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또 그렇게 4~5시간 남짓 달려 메콩강(Mekong River)을 사이에 두고 라오스가 바라보이는 중국의 한 국경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차를 타고 거의 10시간 가까이 이동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들었다. 나는 세수와 양치만 하고 대나무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러나 정작 잠은 오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온갖 이상한 상상들을 하게 됐다. 아버지가 남한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우리를 물건 취급하는 낯선 남자들을 따라다녀야 하는 상황, 또 그들이 시키는 것만 해야만 하는 현실, 여기가 어디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라는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아버지와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이동 중에는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다. 특히 그곳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공안에 잡힐 염려 때문이었다. 한참을 뒤척이다 새벽 4시가 돼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브로커는 우리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하니 빨리 짐을 챙겨라’고 했다. 밖을 보니 아직 어둠이 깔려 있었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5시30분이었다. 우리는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브로커는 우리를 이끌고 강가로 갔다. 그곳에는 6인승 보트가 있었다. 운전하는 이는 태국인이었다. 우리는 그 보트에 올라타 메콩강 하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보트를 타고 6시간을 달려 태국에 도착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보트는 선착장이 아닌 강기슭에 세워졌다. 보트 운전하던 이는 우리 일행을 향해 빨리 보트에서 내리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그의 지시대로 보트에서 내렸다. 그러자 보트는 다급히 출발했다.
“북한에서 왔어요. 북한”
우리는 당황스러웠다. 일행 중 한 명이 보트를 향해 다시 돌아오라고 고함도 질러봤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강기슭에서 낮은 언덕을 올라가니 고속도로였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는 쿤밍을 떠나기 전 브로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태국 땅에 도착하면 무조건 경찰서로 찾아가야 됩니다. 가서 노스 코리아(North Korea)라고 말하세요.’ 우리는 경찰서를 찾아 무작정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앞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지금도 당시 왜 손을 흔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태국어도 모르면서 오토바이를 세워 어쩌자는 것인지 아무 생각도 없이 무작정 흔들었다.
신기하게 오토바이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우리 앞에서 멈춰 섰다. 오토바이에 타고 있는 사람은 경찰이었다. 그는 태국어로 뭐라고 묻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경찰에게 다가가 “노스 코리아”를 반복해 말했다. 그러자 경찰은 일행을 한 번 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10분 정도 지나 자동차 한 대가 왔다. 경찰은 일행을 차에 태워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밥을 먹고 휴식을 가졌다. 경찰은 우리를 작은 방으로 안내하며 손짓으로 기다리라고 했다. 2시간이 지나 나이가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그는 우리말로 “안녕하십니까. 먼 길 오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우리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 중년 남성은 한국어 통역을 위해 온 것이었다. 우리는 그 남성과 한참을 얘기를 나눴다. 그는 우리의 현 상황과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얘기가 마무리될 때쯤 경찰이 방으로 들어와 조사를 시작했다. 한 명씩 자신의 이름과 나이, 고향 등 인적사항에 대해 진술했다. 조사는 2시간이 넘게 걸렸다. 통역을 해주던 그 남성은 돌아갔고, 며칠 뒤 우리는 재판을 받게 됐다.
18세 소년 불법체류자로 감옥에 가다
중국과 태국을 통해 남한으로 오는 탈북자들은 대부분 태국에서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죄목은 불법체류다. 탈북자들은 여권이 없다. 그러니 당연히 불법체류자다. 중국은 탈북자들을 적발하게 되면 북한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태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헌법에 따라 북한 주민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북한 주민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나도 여권이 없었다. 당연히 불법체류자였다. 나는 당시 재판에서 5일 형을 선고받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 감옥이라는 곳에 갔다. 너무 무서웠다. 그곳에는 다양한 범죄를 짓고 수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서 내가 나이가 제일 어렸다. 처음엔 무서워서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 나에게 외국인들이 먼저 다가와 간식도 주면서 챙겨주는 모습에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지금 그곳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은 도시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의 감옥이었다. 그런데 나는 들어간 첫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도 감옥이란 곳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익히 들어서 얼마나 열악한지 알고 있었다. 북한 감옥은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아 영양실조는 기본이고 굶어 죽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굶어 죽지 않으면 맞아 죽고, 얼어 죽는 곳이 북한 감옥이다. 그런데 태국 감옥은 정반대였다. 경찰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니 방장이라는 태국 청년이 나와 짐을 놓고 샤워부터 시켰다. 그리고 하루 세끼 쌀밥과 닭고기 국이 나왔다. 그리고 가끔 간식도 나왔다. 북한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들에게는 철문 밖 자유를 누릴 자유만 없을 뿐 거의 일반인들 생활과 비슷했다. 그렇게 5일이 흘러 우리는 태국 치앙마이의 한 감옥으로 이감됐다. 그곳엔 외국인들은 없었고, 탈북자들만 있었다. 치앙마이 감옥에서 일주일 정도 있다가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방콕에 있는 난민 수용소로 옮겨졌다.
실종됐던 어머니와 동생 태국 감옥에서 만나
태국 난민 수용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개인정보 서류를 작성하고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먼저 와 있는 탈북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나는 자리를 배정받아 짐을 풀었다. 짐 정리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 미리 그곳에 계셨던 아저씨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그곳의 규칙과 일과에 대해 얘기해 줬다. 그들의 마지막 한마디가 그동안 쌓였던 긴장을 풀어주었다.
“이곳은 안전하다. 걱정하지 말고 한국에 갈 날만 기다리면 된다.”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몸에 긴장이 풀리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물밀 듯 몰려왔다. 집을 떠나 제대로 자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제 잡힐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마음이 편안해서인지 그날은 꿈도 꾸었다.
꿈에서 나는 반년 전 장사를 떠났다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와 동생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혼자 땅에 주저앉아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얼마나 슬프게 울었던지 옆에서 자고 있던 형(중국에서부터 함께 오면서 나를 친동생처럼 챙겨줬던 분)이 나를 깨우는 것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이미 베개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후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침을 맞았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아침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철창 밖에서 “오빠~” “오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워 있던 나는 반쯤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쪽을 봤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린 여자아이가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곳에서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찾을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여자아이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여기 정광성 오빠 없어요?”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철창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앞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6개월 전 어머니와 함께 장사를 떠났다 돌아오지 않았던 여동생이 그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동생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철창을 사이에 둔 채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었던 동생을 머나먼 타국에서 그것도 난민 수용소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꼭 안아보려고 했지만 철창이 우리 남매의 포옹을 방해했다. 먼저 어머니의 소식을 물어보니 동생은 자기와 함께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어머니도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에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을 선 채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 동생은 열다섯 살이었다. 난민 수용소에서는 15세 미만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유치원은 남자 감방 바로 앞에 있었다. 그 뒤로 동생은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아들아 널 혼자 남겨두고 와서 미안하다”
첫날 동생이 편지 한 통을 주고 갔다. 어머니가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에는 그동안 우리 가족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소상히 담겨 있었다. 2년 전 친구의 도움으로 남한으로 갔던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논의 끝에 동생을 데리고 먼저 탈북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가족이 함께 탈북을 하다 잡히는 사례가 있었다. 만약 가족이 탈북을 하다 잡히면 더 처참한 일을 당하게 된다.
함경북도 한 지역에서 4인 가족이 중국으로 탈출을 하다 잡혔다. 이들의 목적지는 남한이었다. 북한 정권은 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가족 전체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시켰다. 그리고 그 나머지 부모 형제들은 어딘가로 끌고 갔다. 당시 탈북이 늘어나고 있는 시기였다. 북한 정권은 개인의 탈출에 대해선 노동단련형을 선고했지만 가족의 탈북에 대해선 무조건 공개처형 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내가 탈출을 하다 잡히면 결과는 강 건너 불 보듯 뻔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어머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편지 내용의 절반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나의 마음을 제일 아프게 했던 구절은 “아들아 널 혼자 남겨두고 와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식을 홀로 남겨두고 온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나중에 동생을 통해 들은 얘기지만 식사도 거르시고 밤에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북한을 떠나 태국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기도하며 무사히 오길 빌었다고 한다.
소식이 끊겼던 어머니와 동생이 무사하다는 걸 안 뒤부터는 매일매일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아마 그 힘으로 버텼던 것 같다. 어머니와 동생은 나보다 2개월 먼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나는 그로부터 2개월 뒤인 8월 1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북한을 떠나 5개월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한 것이다. 중국에서 2개월,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 3개월을 보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잊지 못할 5개월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금도 인천공항에 도착하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2006년 8월 1일 새벽 6시가 돼서야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그날은 유독 날씨가 맑았다. 나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창문 옆에 앉았던 나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동쪽 하늘에서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 본 해돋이 중 제일 웅장하고 밝은 해돋이였다. 마치 우리의 대한민국 입국을 환영이나 하듯 너무 예쁘게 떠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출구에서 한 남성이 우리를 맞았다. 국정원 직원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고 인사했다. 그 인사 한마디가 대한민국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너무 따뜻하고 감사했다. 우리는 그의 안내에 따라 인천공항 내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10분쯤 지나 다른 남성 두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두 명의 국정원 직원과 인천공항을 빠져나왔다. 물론 출입국 심사는 받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봉고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게 나는 2006년 8월 1일 대한민국에서 다시 태어났다.⊙
탈북 방법도 다양해졌다. 탈북자의 90%는 중국을 거쳐 3국을 통해 남한으로 입국한다. 탈북자의 상당수는 중국과 태국 루트를 이용한다. 이 밖에 베트남, 캄보디아 등을 거쳐 오는 이들도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몽골→남한으로 오는 루트가 있었다. 하지만 이 루트는 사막을 건너야 한다는 위험 부담으로 인해 더 이상 이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중국→태국 루트를 통해 남한에 입국했다. 기간은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오기까지 5개월 걸렸다. 18세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도 있었다. 목적지도 모른 채 길을 나섰지만 내가 그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 《월간조선》 1월호에서도 밝혔지만 아버지로부터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들은 것은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 도착해서다.
“여긴 어디고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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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의 주요 탈북 경로. 사진=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
우리는 가는 동안 한 번 정도 휴게소에 정차해 화장실과 끼니를 해결했다. 이 외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중간중간 오줌보가 터질 듯이 화장실이 급했지만 기사는 차를 세우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도착한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브로커는 다음 날 일찍 우리를 깨웠다. 우리는 아침도 거른 채 작은 트럭에 올라야 했다. 비탈진 산길을 3시간쯤 달려 차가 멈췄다. 그냥 산이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반대편에서 트럭 한 대가 왔다. 그는 우리를 안내할 브로커였다. 브로커 두 사람은 중국어로 뭐라고 말을 하곤 우리를 좀 전에 도착한 트럭으로 옮겨 타라고 했다. 정말 이 사람들이 누구고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른 채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우리는 트럭을 옮겨 타고 다시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또 그렇게 4~5시간 남짓 달려 메콩강(Mekong River)을 사이에 두고 라오스가 바라보이는 중국의 한 국경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차를 타고 거의 10시간 가까이 이동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들었다. 나는 세수와 양치만 하고 대나무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러나 정작 잠은 오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온갖 이상한 상상들을 하게 됐다. 아버지가 남한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우리를 물건 취급하는 낯선 남자들을 따라다녀야 하는 상황, 또 그들이 시키는 것만 해야만 하는 현실, 여기가 어디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라는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아버지와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이동 중에는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다. 특히 그곳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공안에 잡힐 염려 때문이었다. 한참을 뒤척이다 새벽 4시가 돼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브로커는 우리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하니 빨리 짐을 챙겨라’고 했다. 밖을 보니 아직 어둠이 깔려 있었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5시30분이었다. 우리는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브로커는 우리를 이끌고 강가로 갔다. 그곳에는 6인승 보트가 있었다. 운전하는 이는 태국인이었다. 우리는 그 보트에 올라타 메콩강 하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보트를 타고 6시간을 달려 태국에 도착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보트는 선착장이 아닌 강기슭에 세워졌다. 보트 운전하던 이는 우리 일행을 향해 빨리 보트에서 내리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그의 지시대로 보트에서 내렸다. 그러자 보트는 다급히 출발했다.
“북한에서 왔어요. 북한”
우리는 당황스러웠다. 일행 중 한 명이 보트를 향해 다시 돌아오라고 고함도 질러봤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강기슭에서 낮은 언덕을 올라가니 고속도로였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는 쿤밍을 떠나기 전 브로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태국 땅에 도착하면 무조건 경찰서로 찾아가야 됩니다. 가서 노스 코리아(North Korea)라고 말하세요.’ 우리는 경찰서를 찾아 무작정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앞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지금도 당시 왜 손을 흔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태국어도 모르면서 오토바이를 세워 어쩌자는 것인지 아무 생각도 없이 무작정 흔들었다.
신기하게 오토바이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우리 앞에서 멈춰 섰다. 오토바이에 타고 있는 사람은 경찰이었다. 그는 태국어로 뭐라고 묻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경찰에게 다가가 “노스 코리아”를 반복해 말했다. 그러자 경찰은 일행을 한 번 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10분 정도 지나 자동차 한 대가 왔다. 경찰은 일행을 차에 태워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밥을 먹고 휴식을 가졌다. 경찰은 우리를 작은 방으로 안내하며 손짓으로 기다리라고 했다. 2시간이 지나 나이가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그는 우리말로 “안녕하십니까. 먼 길 오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우리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 중년 남성은 한국어 통역을 위해 온 것이었다. 우리는 그 남성과 한참을 얘기를 나눴다. 그는 우리의 현 상황과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얘기가 마무리될 때쯤 경찰이 방으로 들어와 조사를 시작했다. 한 명씩 자신의 이름과 나이, 고향 등 인적사항에 대해 진술했다. 조사는 2시간이 넘게 걸렸다. 통역을 해주던 그 남성은 돌아갔고, 며칠 뒤 우리는 재판을 받게 됐다.
18세 소년 불법체류자로 감옥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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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 도착한 탈북자들이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
나도 여권이 없었다. 당연히 불법체류자였다. 나는 당시 재판에서 5일 형을 선고받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 감옥이라는 곳에 갔다. 너무 무서웠다. 그곳에는 다양한 범죄를 짓고 수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서 내가 나이가 제일 어렸다. 처음엔 무서워서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 나에게 외국인들이 먼저 다가와 간식도 주면서 챙겨주는 모습에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지금 그곳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은 도시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의 감옥이었다. 그런데 나는 들어간 첫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도 감옥이란 곳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익히 들어서 얼마나 열악한지 알고 있었다. 북한 감옥은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아 영양실조는 기본이고 굶어 죽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굶어 죽지 않으면 맞아 죽고, 얼어 죽는 곳이 북한 감옥이다. 그런데 태국 감옥은 정반대였다. 경찰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니 방장이라는 태국 청년이 나와 짐을 놓고 샤워부터 시켰다. 그리고 하루 세끼 쌀밥과 닭고기 국이 나왔다. 그리고 가끔 간식도 나왔다. 북한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들에게는 철문 밖 자유를 누릴 자유만 없을 뿐 거의 일반인들 생활과 비슷했다. 그렇게 5일이 흘러 우리는 태국 치앙마이의 한 감옥으로 이감됐다. 그곳엔 외국인들은 없었고, 탈북자들만 있었다. 치앙마이 감옥에서 일주일 정도 있다가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방콕에 있는 난민 수용소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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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난민 수용소에 있는 탈북민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
“이곳은 안전하다. 걱정하지 말고 한국에 갈 날만 기다리면 된다.”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몸에 긴장이 풀리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물밀 듯 몰려왔다. 집을 떠나 제대로 자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제 잡힐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마음이 편안해서인지 그날은 꿈도 꾸었다.
꿈에서 나는 반년 전 장사를 떠났다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와 동생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혼자 땅에 주저앉아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얼마나 슬프게 울었던지 옆에서 자고 있던 형(중국에서부터 함께 오면서 나를 친동생처럼 챙겨줬던 분)이 나를 깨우는 것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이미 베개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후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침을 맞았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아침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철창 밖에서 “오빠~” “오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워 있던 나는 반쯤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쪽을 봤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린 여자아이가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곳에서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찾을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여자아이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여기 정광성 오빠 없어요?”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철창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앞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6개월 전 어머니와 함께 장사를 떠났다 돌아오지 않았던 여동생이 그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동생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철창을 사이에 둔 채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었던 동생을 머나먼 타국에서 그것도 난민 수용소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꼭 안아보려고 했지만 철창이 우리 남매의 포옹을 방해했다. 먼저 어머니의 소식을 물어보니 동생은 자기와 함께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어머니도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에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을 선 채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 동생은 열다섯 살이었다. 난민 수용소에서는 15세 미만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유치원은 남자 감방 바로 앞에 있었다. 그 뒤로 동생은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아들아 널 혼자 남겨두고 와서 미안하다”
첫날 동생이 편지 한 통을 주고 갔다. 어머니가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에는 그동안 우리 가족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소상히 담겨 있었다. 2년 전 친구의 도움으로 남한으로 갔던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논의 끝에 동생을 데리고 먼저 탈북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가족이 함께 탈북을 하다 잡히는 사례가 있었다. 만약 가족이 탈북을 하다 잡히면 더 처참한 일을 당하게 된다.
함경북도 한 지역에서 4인 가족이 중국으로 탈출을 하다 잡혔다. 이들의 목적지는 남한이었다. 북한 정권은 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가족 전체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시켰다. 그리고 그 나머지 부모 형제들은 어딘가로 끌고 갔다. 당시 탈북이 늘어나고 있는 시기였다. 북한 정권은 개인의 탈출에 대해선 노동단련형을 선고했지만 가족의 탈북에 대해선 무조건 공개처형 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내가 탈출을 하다 잡히면 결과는 강 건너 불 보듯 뻔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어머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편지 내용의 절반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나의 마음을 제일 아프게 했던 구절은 “아들아 널 혼자 남겨두고 와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식을 홀로 남겨두고 온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나중에 동생을 통해 들은 얘기지만 식사도 거르시고 밤에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북한을 떠나 태국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기도하며 무사히 오길 빌었다고 한다.
소식이 끊겼던 어머니와 동생이 무사하다는 걸 안 뒤부터는 매일매일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아마 그 힘으로 버텼던 것 같다. 어머니와 동생은 나보다 2개월 먼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나는 그로부터 2개월 뒤인 8월 1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북한을 떠나 5개월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한 것이다. 중국에서 2개월,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 3개월을 보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잊지 못할 5개월이 될 것이다.
지금도 인천공항에 도착하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2006년 8월 1일 새벽 6시가 돼서야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그날은 유독 날씨가 맑았다. 나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창문 옆에 앉았던 나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동쪽 하늘에서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 본 해돋이 중 제일 웅장하고 밝은 해돋이였다. 마치 우리의 대한민국 입국을 환영이나 하듯 너무 예쁘게 떠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출구에서 한 남성이 우리를 맞았다. 국정원 직원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고 인사했다. 그 인사 한마디가 대한민국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너무 따뜻하고 감사했다. 우리는 그의 안내에 따라 인천공항 내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10분쯤 지나 다른 남성 두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두 명의 국정원 직원과 인천공항을 빠져나왔다. 물론 출입국 심사는 받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봉고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게 나는 2006년 8월 1일 대한민국에서 다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