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트럼프의 ‘한일 핵무장 허용’ 발언은 “미국이 계속 쇠퇴한다면, 자체 핵무장을 원할 것”이라는 의미
⊙ “미국이 북핵에 직접 맞서 싸울 생각이 없다면 한국 핵무장을 허용해야”(더그 밴도)
⊙ 1940년대 쑹메이링 앞세운 중국 장제스 정부의 대미 외교처럼 총력 외교 펼쳐야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 “미국이 북핵에 직접 맞서 싸울 생각이 없다면 한국 핵무장을 허용해야”(더그 밴도)
⊙ 1940년대 쑹메이링 앞세운 중국 장제스 정부의 대미 외교처럼 총력 외교 펼쳐야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 한국이 핵무장을 하려면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등 대미 핵 외교가 필요하다. 사진은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5년 4월 22일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가서명식. 사진=조선DB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 ‘지나친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Nothing in excess).’ ‘맹세 이후 남는 것은 수많은 문제들뿐이다(Give a pledge and trouble is at hand).’
2600여 년 전 고대(古代) 그리스 델피신전 정문에 걸려 있던 세 개의 아포리즘(Aphorism), 즉 경구(警句)다. 첫 번째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유명해졌다. 이 경구들은 최근 북한-러시아 동맹과 같은 급변하는 안보 상황 속에서 한국의 외교·안보가 나아갈 길을 시사(示唆)해준다. 한국 아니 한반도 전체를 한순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북핵 문제가 30여 년간 표류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놀라기는 하지만, 언제부턴가 ‘북핵=강 건너 불’로 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북핵에 집착할수록 냉전(冷戰) 시대 꼴통으로 보는 분위기도 나타났다. ‘설마 같은 민족에게 핵무기를 쏘겠느냐?’는 말을 믿거나, 믿고 싶어 하는 ‘우리 민족끼리 신자’들도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다.
북핵은 결코 ‘우리’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 북핵을 개발, 강화해온 김정은은 대한민국의 명백한 적(敵)이다. 북핵에 정면으로 대응할 방법은 ‘남핵(南核)’뿐이다.
수많은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90%는 북한 비핵화(非核化) 가능성을 10% 이하라고 보고 있다. 한국 독자 핵무장에 찬성하는 여론은 70%를 넘는다.
앞에서 본 델피신전 신탁(神託)의 첫 번째 경구는 ‘너 자신을 알라’다. 한국은 한국을, 한국인은 한국인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핵무장에 찬성하는 여론 70%는 스스로의 자세와 운명을 제대로 파악한 뒤 내린 판단일까? 자기 자신은 모른 채, 일회성 군중심리에 기초한 국뽕으로서 핵무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북한, 공병부대 파병
한국의 핵무장 여론을 재점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지난 6월 19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간에 체결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이다.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안보구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초특급 태풍’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한쪽이 무력 침공을 받을 시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 이 조약의 핵심이다. 구체화하기까지 여러 조건이 필요하겠지만, 조약으로만 보면 사실상 동맹 수준까지 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미동맹에 맞선 북러동맹이 2024년 6월 갑자기 탄생한 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북한의 지원에 대한 선물이 바로 이 동맹 조약이다.
김정은은 푸틴의 생각에 맞춰 무기만이 아니라, 인적 지원도 감행할 수 있다. 7월 초 나온 영국발 뉴스에 의하면, 1만5000명에 달하는 북한 공병여단이 우크라이나 돈바스에 파병될 예정이거나, 이미 파병됐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뉴스를 접하면서 1960년대 한국군의 월남 파병이 떠올랐다. 전투요원이 아닌 병원지원팀과 태권도 교관으로 시작된 파병은 건설 및 후방 지원 부대(비둘기부대) 파병을 거쳐 결국 전투부대인 맹호·청룡·백마부대 파병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파병 부대가 공병부대에서 전투부대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조만간 우리는 우크라이나군의 포로가 된 북한군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김정은은 북한군의 피를 대가로 선물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제7차 핵실험 지지와 핵 관련 기술 확보, 나아가 실험 후 닥쳐올 후폭풍에 대한 푸틴의 안전보장 약속이 그것일 것이다. 무기뿐 아니라 북한군을 많이 보낼수록 푸틴의 보답과 약속은 보다 확실해질 것이다.
中, 北의 7차 핵실험에 부정적
6월 19일 새벽 2시38분 푸틴의 심야 평양 방문과 관련해, 일본 안보 관계자들이 주목한 사안 하나가 있다. ‘김정은이 갑자기 결정된 푸틴의 방북(訪北) 소식과 북러조약 내용을 중국 시진핑(習近平)에게 미리 알렸을까?’ 하는 점이다. 일본 안보 관계자들은 김정은이 아니라 푸틴이 ‘먼저’ 시진핑에게 방북 소식을 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의 제7차 핵실험은 미국뿐 아니라 중국도 막고 있다. 김정은이 제7차 핵실험에 나설 경우, 중국의 대북(對北) 지원이 ‘왕창’ 축소될 것이란 경고도 주기적으로 북한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왜 북한 핵실험에 반대할까? 북한이 제7차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김정은과 미국 간의 대화는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한이 담판에 들어갈 경우 중국의 영향력은 대폭 축소될 것이다.
푸틴의 방북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다. 김정은이 시진핑을 아예 패스하거나, 대충 통보하는 시늉만 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김정은의 입장에서 북러조약 체결은 한국과 미국에 맞서는 생명보험인 동시에, 중국의 등을 찌르는 비수(匕首)다. 아마 북한이 가까운 시일 내에 푸틴의 지지·지원을 바탕으로 하지만 중국 생각에는 반하는 제7차 핵실험을 강행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핵무장 나서는 순간 국제적 왕따 시작
6월 이후 한국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온 한국 독자 핵무장 여론은 이런 배경하에서 나온 것이다. 제7차 핵실험 후 북한과 미국이 대화에 나설 경우, 중국은 물론 한국도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의 ICBM 제한에 주력할 것이고, 한국을 노리는 북한 전술핵은 논외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미동맹이 한국의 안보를 어디까지 보장할지도 의문이지만, 설상가상으로 트럼프 재등장은 문제를 한층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국가 존망에 관한 문제는 국내 정치, 경제성장, 국제 외교보다 훨씬 중요한 최우선 국가 정책이다.
국가 존망 이슈의 최종 해결자는 해당 국가의 국민과 정치가다. 동맹국 미국이나 이웃 중국이나 일본이 문제의 최종 해결자가 되어줄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화려한 외교 수사(修辭)와 함께 재래식 무기와 돈으로 도와줄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최후에 현장에 남는 것은 우크라이나 국민들뿐이다. 북러조약 체결 후 독자적 핵무장 지지 여론이 높아진 것도 이런 인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누울 공간을 보고 몸과 다리를 뻗어야 한다. 워싱턴은 한국의 생각과 여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국인 절대다수가 핵무장을 지지한다 해도, 미국이 반대하는 한 불가능하다. 북한처럼 ‘고난의 행군’을 감수해서라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한국이 미국의 지지·지원 없이 핵무장에 나서는 순간 국제적 왕따가 시작될 것이다. 단계를 밟아 올라가겠지만 미국만이 아닌 국제기구를 통한 에너지 봉쇄나 금융 제재가 이어질 것이다. 한국인의 해외여행도 제한될 수 있다. 한국은 핵무장에 나서는 순간부터,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다. 핵무장을 하려면 미국의 도움과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에 핵을 줘라’
흥미롭게도 미국에도 한국 독자 핵무장을 지지하는 발언들이 존재한다. 많지는 않지만 주로 워싱턴 싱크탱크 연구원들이나 전직 관료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의견이다. 대개는 한국의 핵무장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얘기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일정한 조건이나 한반도 환경 변화를 전제로 한 논의일 뿐이다. 무조건 찬성이나 지지는 없다. 2022년 3월 나와서 주목을 받았던 〈한국에 핵을 줘라(Give South Korea Nuclear Weapons)〉는 도전적인 칼럼은 그 대표적인 본보기다. 한반도 핵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온 워싱턴의 싱크탱크 케이토(CATO) 연구소 상급연구원 더그 밴도(Doug Bandow)는 ‘미국이 북핵에 직접 맞서 싸울 생각이 없다면 한국의 핵무장을 허용해야만 한다’는 칼럼을 썼다. 다시 말해 한국에 핵을 허용해, 북핵에 대한 ‘남핵’으로 미국에 튈 핵공격을 막아야만 한다는 논리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국가 존망의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핵무기가 아니라, 미국을 대신해 북핵에 맞설 나라에 허용해주는 핵이란 의미다.
한국 핵무장이 허용될 경우 미군의 위상이나 기능 변화는 필연적이다. 미군이 북핵에 맞서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은 곧바로 미군 철수로 이어진다. 한국에서 보도되는 워싱턴발 ‘한국 핵무기 용인’ 뉴스의 대부분은 더그 밴도의 생각과 거의 비슷하다. 미국 본토에 대한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남핵으로 북핵을 막겠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이 핵무장에 나선다고 해도 여러 가지 전제조건이 달려 있다. 한미연합사 기능과 지휘권 문제, 일본과의 협력체계 구축, 주한미군 위상 변화 등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 없이, 곧바로 결(結)로 나타나는 핵무장이 아니란 말이다. 분명한 것은 미국 전체가 ‘남핵’에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한국 핵무장 문제를 언급한 인물 가운데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있다. 공화당 예비선거 후보들 간의 정책 경쟁이 활발하던 2016년 5월 26일, 《뉴욕타임스》는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생각을 트럼프에게 물어봤다. 8년 전 발언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때 나온 트럼프의 말은 올 11월 대선에서 그가 재선될 경우에도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모범답안’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람, 특히 나이 든 사람의 생각은 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 일본과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은 어떤 시점에는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이고, 미국이 계속 쇠퇴한다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에 관계없이, 그들(일본과 한국)은 어쨌든 자체 핵무장을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 나라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자국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일본과 한국이 미군 주둔 비용을 증액하지 않을 경우, 미군을 철수할 것인가.
“물론이다. 기쁘진 않겠지만 그렇게 할 의지가 있다.… 우리는 미군 주둔과 관련된 수십억 달러의 막대한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들(한일)이 미군 주둔 분담금 상당액을 올릴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생각한다). 나는 양국이 분담금을 올리리라 생각하지만, (만약) 올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렇게 (미군 철수를) 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때 트럼프는 한일 핵무장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약해진다’는 전제하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서 한일 핵무장이 이뤄질 수 있다는 ‘동조적 시각’의 얘기였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다른 결론이 나온다. ‘미국이 강해질 경우’에는 한일 핵무장 논의가 불필요하다는 논리다.
이 인터뷰의 핵심은, 트럼프가 자위책(自衛策)으로서의 한일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만약 오늘 당장 한국이 핵무장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해도 트럼프는 ‘결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약한 미국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것인지 추궁할 것이다. 반면에 이런저런 이유로 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의 핵무장은 필연적인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트럼프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은 신뢰의 문제
‘맹세 이후 남는 것은 수많은 문제들뿐이다.’
델피의 신탁 제2 경구는 약속에 관한 것이다. 타자(他者)와의 관계 속에서의 맹세·약속은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점을 강조한 아포리즘이다. 맹세·약속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맹세·약속을 한 이상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지키라는 의미이다. 동맹은 맹세·약속을 기초로 한다. 한 번 한 이상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월간조선》 2023년 9월호를 보면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미국과의 전략자산 참여 훈련 횟수는 실질적으로 3회에 불과했다고 한다. 북한의 핵공격에 대비하는 한미군사훈련이 3번이라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집권 1년 동안엔 15회의 훈련이 실시됐다.
워싱턴이 문재인 정권을 어떻게 대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문 정권은 한미동맹이라면서 미국이 요청하는 훈련 자체를 무시했다. 북한의 핵 위협을 얘기하면 김정은에게 결례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이때부터 한미동맹의 의미가 정권 입맛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안 좋은 전례가 만들어졌다. 문재인 정권 시절에는 맹세와 약속은 있었지만, 책임과 의무는 없었다. 문재인 정권의 한미동맹 무시는 워싱턴에서 한국의 좌파 정권만이 아닌, 한국 정치·외교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이 문제는 결국 ‘한국은 믿을 수 있는 나라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맹세와 약속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상대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실 이것이 한국의 핵무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모래알 국가’ 한국
협상의 기본은 우군(友軍)은 늘리고 적군은 줄여나가는 것이다. 한국이 정말로 독자 핵무장을 원한다면, 먼저 워싱턴 내 우군을 늘리는 데 주력해야만 한다. 한국에 대한 신뢰 회복, 신뢰 확장은 기본이다.
먼저 미국 내에 아직은 몇 안 되는 ‘남핵’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을 하나로 연결한 종합 네트워크를 설립해야 한다. 기승전결 없이 곧바로 핵무장으로 갈 수는 없다. 장기적·종합적인 사전(事前) 준비가 필요하다. 집 하나를 구입하는 데도 수많은 서류와 보증이 필요하다. 핵무장은 전 세계인 모두와 만나 신뢰를 주면서 동의를 받는다는 심정으로 행해야 한다. 외교·안보나 정치·경제뿐 아니라 교육·에너지·환경 등의 문제들까지 감안한 전방위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필자가 워싱턴에서 경험한 바로는 언제부터인가 한국은 머리·손·발·몸통·다리가 전부 따로 노는 ‘모래알 국가’가 된 느낌이다. 정권이 바뀌면 사람도 달라지고, 종전의 네트워크도 전부 끊어진다.
문재인 정권이 워싱턴 내 아시아 전문가들과 불화를 빚거나 그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 것은 그 좋은 사례다. 문 정권은 국내 정치에서 그러던 것처럼 워싱턴에다 ‘문재인 외교 용비어천가’를 열심히 퍼트렸다. 이 과정에서 워싱턴의 지한파(知韓派) 대부분이 한국으로부터 멀어졌다. 10년은커녕, 1년 앞을 내다본 외교 전략마저 없었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유엔에 아이돌을 불러 K-팝을 부르게 하는 것을 외교라고 믿는, ‘당일치기 쇼 이벤트’가 벌어지곤 했다.
한국이 핵무장을 원할 경우 워싱턴을 무대로 하는 ‘핵 외교’는 장기적·입체적·개방적·쌍방향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하는 총력전(總力戰)이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 한국의 핵무장 논의를 활성화·가속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 워싱턴의 백악관·의회·국무부·국방부·싱크탱크·미디어 등을 아우르는 ‘남핵 프로젝트’를 가동할 대통령 직속기구라도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이러한 노력이 미국 전역, 나아가 자유세계 전체에 널리 전파(傳播)되어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쑹메이링의 대미 외교
방법론적 얘기지만, 이러한 핵 외교에는 직업 외교보다는 영어가 가능하고 교양을 쌓은 사람들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외교부를 뛰어넘는 국가 총력 대응이 필요하다. 외교관 가운데는 워싱턴을 물 좋은 순환보직 근무처로만 생각할 뿐, 잘못할 경우 나라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다는 긴장감은 갖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표 내고 척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와인 마시는 법과 음식을 주문하는 수준만으로도 그 사람의 외교적 능력을 판단할 수 있다. 정상(頂上)회담의 최고봉은 다른 나라 정상을 자택으로 초대해서 펼치는 ‘잡담 외교’다. 외교는 우등생 시험이 아니라, 웃고 마시고 떠들면서 이뤄진다. 나폴레옹 전쟁 후의 유럽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비인 회의가 왈츠와 코냑 때문에 10개월이나 걸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길 바란다. 왈츠와 코냑 덕분에 2~3년 걸릴 회의를 1년 안에 끝낼 수 있었다고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1940년대 중국(중화민국)의 대미(對美) 외교는 좋은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곧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하는 ‘판다 외교’는 사실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뉴욕 브롱스 동물원에 판다 한 쌍을 기증한 데서 비롯되었다.
미국에서 기독교 계통의 웰즐리대학을 나온 쑹메이링은 투박하지만 세련된 미국 남부 악센트 영어를 구사했다. 지금도 미국에서 남부 악센트는 신뢰·전통·복음(福音)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쑹메이링은 이런 점들을 활용해 미국 전국을 순회하면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는 중국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했고,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쑹메이링은 당대 ‘아시아의 여성 스타’였다. 쑹메이링은 이후 장제스의 통역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전 세계를 누비면서 서방 지도자들과의 개인적 친분을 쌓았다. 쑹메이링을 앞세운 외교는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당시 중국(중화민국)의 핵심 국가 프로젝트였다. 엄청난 돈과 인맥이 동원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 축적된 외교 자산은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밀려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北京)을 전격 방문할 때까지 대만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파제가 되었다.
‘지나친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
한국 핵무장 이슈는 어린 아기가 이제 막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나 우라늄 농축이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핵무장 시도에 따르는 ‘고난의 행군’을 감내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에 앞서 미국과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이 필요하다. 협상이 얼마나 걸릴지, 조건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워싱턴을 무대로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논의와 여론 조성, 확산이 필요하다.
델피 신탁 가운데 두 번째 경구는 ‘지나친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다. 북핵을 강 건너 불처럼 대해서도 안 되고, K-테크놀로지를 자랑하면서 한국이 금방 핵무장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자만해서도 안 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남핵 프로젝트’지만, 여기서 필자의 고교 시절 때까지만 해도 상식으로 통하던 한국식 아포리즘을 하나 떠올려본다. “하면 된다!”⊙
2600여 년 전 고대(古代) 그리스 델피신전 정문에 걸려 있던 세 개의 아포리즘(Aphorism), 즉 경구(警句)다. 첫 번째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유명해졌다. 이 경구들은 최근 북한-러시아 동맹과 같은 급변하는 안보 상황 속에서 한국의 외교·안보가 나아갈 길을 시사(示唆)해준다. 한국 아니 한반도 전체를 한순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북핵 문제가 30여 년간 표류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놀라기는 하지만, 언제부턴가 ‘북핵=강 건너 불’로 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북핵에 집착할수록 냉전(冷戰) 시대 꼴통으로 보는 분위기도 나타났다. ‘설마 같은 민족에게 핵무기를 쏘겠느냐?’는 말을 믿거나, 믿고 싶어 하는 ‘우리 민족끼리 신자’들도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다.
북핵은 결코 ‘우리’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 북핵을 개발, 강화해온 김정은은 대한민국의 명백한 적(敵)이다. 북핵에 정면으로 대응할 방법은 ‘남핵(南核)’뿐이다.
수많은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90%는 북한 비핵화(非核化) 가능성을 10% 이하라고 보고 있다. 한국 독자 핵무장에 찬성하는 여론은 70%를 넘는다.
앞에서 본 델피신전 신탁(神託)의 첫 번째 경구는 ‘너 자신을 알라’다. 한국은 한국을, 한국인은 한국인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핵무장에 찬성하는 여론 70%는 스스로의 자세와 운명을 제대로 파악한 뒤 내린 판단일까? 자기 자신은 모른 채, 일회성 군중심리에 기초한 국뽕으로서 핵무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북한, 공병부대 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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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러시아는 6월 19일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체결했다. 사진=로이터/뉴스1 |
김정은은 푸틴의 생각에 맞춰 무기만이 아니라, 인적 지원도 감행할 수 있다. 7월 초 나온 영국발 뉴스에 의하면, 1만5000명에 달하는 북한 공병여단이 우크라이나 돈바스에 파병될 예정이거나, 이미 파병됐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뉴스를 접하면서 1960년대 한국군의 월남 파병이 떠올랐다. 전투요원이 아닌 병원지원팀과 태권도 교관으로 시작된 파병은 건설 및 후방 지원 부대(비둘기부대) 파병을 거쳐 결국 전투부대인 맹호·청룡·백마부대 파병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파병 부대가 공병부대에서 전투부대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조만간 우리는 우크라이나군의 포로가 된 북한군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김정은은 북한군의 피를 대가로 선물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제7차 핵실험 지지와 핵 관련 기술 확보, 나아가 실험 후 닥쳐올 후폭풍에 대한 푸틴의 안전보장 약속이 그것일 것이다. 무기뿐 아니라 북한군을 많이 보낼수록 푸틴의 보답과 약속은 보다 확실해질 것이다.
中, 北의 7차 핵실험에 부정적
6월 19일 새벽 2시38분 푸틴의 심야 평양 방문과 관련해, 일본 안보 관계자들이 주목한 사안 하나가 있다. ‘김정은이 갑자기 결정된 푸틴의 방북(訪北) 소식과 북러조약 내용을 중국 시진핑(習近平)에게 미리 알렸을까?’ 하는 점이다. 일본 안보 관계자들은 김정은이 아니라 푸틴이 ‘먼저’ 시진핑에게 방북 소식을 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의 제7차 핵실험은 미국뿐 아니라 중국도 막고 있다. 김정은이 제7차 핵실험에 나설 경우, 중국의 대북(對北) 지원이 ‘왕창’ 축소될 것이란 경고도 주기적으로 북한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왜 북한 핵실험에 반대할까? 북한이 제7차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김정은과 미국 간의 대화는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한이 담판에 들어갈 경우 중국의 영향력은 대폭 축소될 것이다.
푸틴의 방북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다. 김정은이 시진핑을 아예 패스하거나, 대충 통보하는 시늉만 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김정은의 입장에서 북러조약 체결은 한국과 미국에 맞서는 생명보험인 동시에, 중국의 등을 찌르는 비수(匕首)다. 아마 북한이 가까운 시일 내에 푸틴의 지지·지원을 바탕으로 하지만 중국 생각에는 반하는 제7차 핵실험을 강행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핵무장 나서는 순간 국제적 왕따 시작
6월 이후 한국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온 한국 독자 핵무장 여론은 이런 배경하에서 나온 것이다. 제7차 핵실험 후 북한과 미국이 대화에 나설 경우, 중국은 물론 한국도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의 ICBM 제한에 주력할 것이고, 한국을 노리는 북한 전술핵은 논외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미동맹이 한국의 안보를 어디까지 보장할지도 의문이지만, 설상가상으로 트럼프 재등장은 문제를 한층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국가 존망에 관한 문제는 국내 정치, 경제성장, 국제 외교보다 훨씬 중요한 최우선 국가 정책이다.
국가 존망 이슈의 최종 해결자는 해당 국가의 국민과 정치가다. 동맹국 미국이나 이웃 중국이나 일본이 문제의 최종 해결자가 되어줄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화려한 외교 수사(修辭)와 함께 재래식 무기와 돈으로 도와줄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최후에 현장에 남는 것은 우크라이나 국민들뿐이다. 북러조약 체결 후 독자적 핵무장 지지 여론이 높아진 것도 이런 인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누울 공간을 보고 몸과 다리를 뻗어야 한다. 워싱턴은 한국의 생각과 여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국인 절대다수가 핵무장을 지지한다 해도, 미국이 반대하는 한 불가능하다. 북한처럼 ‘고난의 행군’을 감수해서라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한국이 미국의 지지·지원 없이 핵무장에 나서는 순간 국제적 왕따가 시작될 것이다. 단계를 밟아 올라가겠지만 미국만이 아닌 국제기구를 통한 에너지 봉쇄나 금융 제재가 이어질 것이다. 한국인의 해외여행도 제한될 수 있다. 한국은 핵무장에 나서는 순간부터,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다. 핵무장을 하려면 미국의 도움과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에 핵을 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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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그 밴도 미 케이토연구소 상급연구원. 사진=케이토연구소 |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일정한 조건이나 한반도 환경 변화를 전제로 한 논의일 뿐이다. 무조건 찬성이나 지지는 없다. 2022년 3월 나와서 주목을 받았던 〈한국에 핵을 줘라(Give South Korea Nuclear Weapons)〉는 도전적인 칼럼은 그 대표적인 본보기다. 한반도 핵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온 워싱턴의 싱크탱크 케이토(CATO) 연구소 상급연구원 더그 밴도(Doug Bandow)는 ‘미국이 북핵에 직접 맞서 싸울 생각이 없다면 한국의 핵무장을 허용해야만 한다’는 칼럼을 썼다. 다시 말해 한국에 핵을 허용해, 북핵에 대한 ‘남핵’으로 미국에 튈 핵공격을 막아야만 한다는 논리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국가 존망의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핵무기가 아니라, 미국을 대신해 북핵에 맞설 나라에 허용해주는 핵이란 의미다.
한국 핵무장이 허용될 경우 미군의 위상이나 기능 변화는 필연적이다. 미군이 북핵에 맞서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은 곧바로 미군 철수로 이어진다. 한국에서 보도되는 워싱턴발 ‘한국 핵무기 용인’ 뉴스의 대부분은 더그 밴도의 생각과 거의 비슷하다. 미국 본토에 대한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남핵으로 북핵을 막겠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이 핵무장에 나선다고 해도 여러 가지 전제조건이 달려 있다. 한미연합사 기능과 지휘권 문제, 일본과의 협력체계 구축, 주한미군 위상 변화 등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 없이, 곧바로 결(結)로 나타나는 핵무장이 아니란 말이다. 분명한 것은 미국 전체가 ‘남핵’에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한국 핵무장 문제를 언급한 인물 가운데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있다. 공화당 예비선거 후보들 간의 정책 경쟁이 활발하던 2016년 5월 26일, 《뉴욕타임스》는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생각을 트럼프에게 물어봤다. 8년 전 발언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때 나온 트럼프의 말은 올 11월 대선에서 그가 재선될 경우에도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모범답안’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람, 특히 나이 든 사람의 생각은 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 일본과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은 어떤 시점에는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이고, 미국이 계속 쇠퇴한다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에 관계없이, 그들(일본과 한국)은 어쨌든 자체 핵무장을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 나라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자국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일본과 한국이 미군 주둔 비용을 증액하지 않을 경우, 미군을 철수할 것인가.
“물론이다. 기쁘진 않겠지만 그렇게 할 의지가 있다.… 우리는 미군 주둔과 관련된 수십억 달러의 막대한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들(한일)이 미군 주둔 분담금 상당액을 올릴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생각한다). 나는 양국이 분담금을 올리리라 생각하지만, (만약) 올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렇게 (미군 철수를) 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때 트럼프는 한일 핵무장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약해진다’는 전제하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서 한일 핵무장이 이뤄질 수 있다는 ‘동조적 시각’의 얘기였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다른 결론이 나온다. ‘미국이 강해질 경우’에는 한일 핵무장 논의가 불필요하다는 논리다.
이 인터뷰의 핵심은, 트럼프가 자위책(自衛策)으로서의 한일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만약 오늘 당장 한국이 핵무장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해도 트럼프는 ‘결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약한 미국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것인지 추궁할 것이다. 반면에 이런저런 이유로 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의 핵무장은 필연적인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트럼프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은 신뢰의 문제
‘맹세 이후 남는 것은 수많은 문제들뿐이다.’
델피의 신탁 제2 경구는 약속에 관한 것이다. 타자(他者)와의 관계 속에서의 맹세·약속은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점을 강조한 아포리즘이다. 맹세·약속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맹세·약속을 한 이상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지키라는 의미이다. 동맹은 맹세·약속을 기초로 한다. 한 번 한 이상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월간조선》 2023년 9월호를 보면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미국과의 전략자산 참여 훈련 횟수는 실질적으로 3회에 불과했다고 한다. 북한의 핵공격에 대비하는 한미군사훈련이 3번이라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집권 1년 동안엔 15회의 훈련이 실시됐다.
워싱턴이 문재인 정권을 어떻게 대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문 정권은 한미동맹이라면서 미국이 요청하는 훈련 자체를 무시했다. 북한의 핵 위협을 얘기하면 김정은에게 결례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이때부터 한미동맹의 의미가 정권 입맛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안 좋은 전례가 만들어졌다. 문재인 정권 시절에는 맹세와 약속은 있었지만, 책임과 의무는 없었다. 문재인 정권의 한미동맹 무시는 워싱턴에서 한국의 좌파 정권만이 아닌, 한국 정치·외교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이 문제는 결국 ‘한국은 믿을 수 있는 나라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맹세와 약속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상대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실 이것이 한국의 핵무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모래알 국가’ 한국
협상의 기본은 우군(友軍)은 늘리고 적군은 줄여나가는 것이다. 한국이 정말로 독자 핵무장을 원한다면, 먼저 워싱턴 내 우군을 늘리는 데 주력해야만 한다. 한국에 대한 신뢰 회복, 신뢰 확장은 기본이다.
먼저 미국 내에 아직은 몇 안 되는 ‘남핵’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을 하나로 연결한 종합 네트워크를 설립해야 한다. 기승전결 없이 곧바로 핵무장으로 갈 수는 없다. 장기적·종합적인 사전(事前) 준비가 필요하다. 집 하나를 구입하는 데도 수많은 서류와 보증이 필요하다. 핵무장은 전 세계인 모두와 만나 신뢰를 주면서 동의를 받는다는 심정으로 행해야 한다. 외교·안보나 정치·경제뿐 아니라 교육·에너지·환경 등의 문제들까지 감안한 전방위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필자가 워싱턴에서 경험한 바로는 언제부터인가 한국은 머리·손·발·몸통·다리가 전부 따로 노는 ‘모래알 국가’가 된 느낌이다. 정권이 바뀌면 사람도 달라지고, 종전의 네트워크도 전부 끊어진다.
문재인 정권이 워싱턴 내 아시아 전문가들과 불화를 빚거나 그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 것은 그 좋은 사례다. 문 정권은 국내 정치에서 그러던 것처럼 워싱턴에다 ‘문재인 외교 용비어천가’를 열심히 퍼트렸다. 이 과정에서 워싱턴의 지한파(知韓派) 대부분이 한국으로부터 멀어졌다. 10년은커녕, 1년 앞을 내다본 외교 전략마저 없었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유엔에 아이돌을 불러 K-팝을 부르게 하는 것을 외교라고 믿는, ‘당일치기 쇼 이벤트’가 벌어지곤 했다.
한국이 핵무장을 원할 경우 워싱턴을 무대로 하는 ‘핵 외교’는 장기적·입체적·개방적·쌍방향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하는 총력전(總力戰)이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 한국의 핵무장 논의를 활성화·가속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 워싱턴의 백악관·의회·국무부·국방부·싱크탱크·미디어 등을 아우르는 ‘남핵 프로젝트’를 가동할 대통령 직속기구라도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이러한 노력이 미국 전역, 나아가 자유세계 전체에 널리 전파(傳播)되어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쑹메이링의 대미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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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 대미 외교의 상징이었던 쑹메이링은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지원에 감사하다는 라디오 연설을 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표 내고 척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와인 마시는 법과 음식을 주문하는 수준만으로도 그 사람의 외교적 능력을 판단할 수 있다. 정상(頂上)회담의 최고봉은 다른 나라 정상을 자택으로 초대해서 펼치는 ‘잡담 외교’다. 외교는 우등생 시험이 아니라, 웃고 마시고 떠들면서 이뤄진다. 나폴레옹 전쟁 후의 유럽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비인 회의가 왈츠와 코냑 때문에 10개월이나 걸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길 바란다. 왈츠와 코냑 덕분에 2~3년 걸릴 회의를 1년 안에 끝낼 수 있었다고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1940년대 중국(중화민국)의 대미(對美) 외교는 좋은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곧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하는 ‘판다 외교’는 사실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뉴욕 브롱스 동물원에 판다 한 쌍을 기증한 데서 비롯되었다.
미국에서 기독교 계통의 웰즐리대학을 나온 쑹메이링은 투박하지만 세련된 미국 남부 악센트 영어를 구사했다. 지금도 미국에서 남부 악센트는 신뢰·전통·복음(福音)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쑹메이링은 이런 점들을 활용해 미국 전국을 순회하면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는 중국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했고,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쑹메이링은 당대 ‘아시아의 여성 스타’였다. 쑹메이링은 이후 장제스의 통역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전 세계를 누비면서 서방 지도자들과의 개인적 친분을 쌓았다. 쑹메이링을 앞세운 외교는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당시 중국(중화민국)의 핵심 국가 프로젝트였다. 엄청난 돈과 인맥이 동원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 축적된 외교 자산은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밀려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北京)을 전격 방문할 때까지 대만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파제가 되었다.
‘지나친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
한국 핵무장 이슈는 어린 아기가 이제 막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나 우라늄 농축이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핵무장 시도에 따르는 ‘고난의 행군’을 감내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에 앞서 미국과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이 필요하다. 협상이 얼마나 걸릴지, 조건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워싱턴을 무대로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논의와 여론 조성, 확산이 필요하다.
델피 신탁 가운데 두 번째 경구는 ‘지나친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다. 북핵을 강 건너 불처럼 대해서도 안 되고, K-테크놀로지를 자랑하면서 한국이 금방 핵무장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자만해서도 안 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남핵 프로젝트’지만, 여기서 필자의 고교 시절 때까지만 해도 상식으로 통하던 한국식 아포리즘을 하나 떠올려본다.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