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 정치가는 없고 원자력 전문가만 있는 나라
⊙ 미국과 핵 협상, 신규 원전 건설, 월성 1호기 복구, 사용 후 핵연료 중간 저장소 건설 추진해야
⊙ 이승만, 1955년 미국 주도의 제1회 원자력 국제회의에 대표단 보내 자료 수집
⊙ 박정희, NPT 가입 조건으로 재처리 가능한 중수로 건설
⊙ 전두환, 핵개발 대신 원전에 집중… 원자력 산업 강국 기초 다져
⊙ 노태우, 비핵화 선언… 원폭 고려 않고 원전만 보는 짝짝이 나라가 되어버려
이정훈
1962년생. 연세대 학사·석사, 경기대 박사(정치학) / 《월간조선》 기자, 《신동아》 편집위원, 《주간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위원 역임 / 저서 《한국의 핵주권》 《탈핵비판》 《그래도 원자력이다》 외 다수
⊙ 미국과 핵 협상, 신규 원전 건설, 월성 1호기 복구, 사용 후 핵연료 중간 저장소 건설 추진해야
⊙ 이승만, 1955년 미국 주도의 제1회 원자력 국제회의에 대표단 보내 자료 수집
⊙ 박정희, NPT 가입 조건으로 재처리 가능한 중수로 건설
⊙ 전두환, 핵개발 대신 원전에 집중… 원자력 산업 강국 기초 다져
⊙ 노태우, 비핵화 선언… 원폭 고려 않고 원전만 보는 짝짝이 나라가 되어버려
이정훈
1962년생. 연세대 학사·석사, 경기대 박사(정치학) / 《월간조선》 기자, 《신동아》 편집위원, 《주간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위원 역임 / 저서 《한국의 핵주권》 《탈핵비판》 《그래도 원자력이다》 외 다수
- 박정희 대통령 시절 건설이 결정된 월성 원전은 중수로 방식으로 핵 재처리를 염두에 둔 원전이었다. 사진=조선DB
2023년 4월 28일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한국은 핵무장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빠른 시일 내에, 심지어 1년 이내에도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 기반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독자 핵개발을 안 하고 NPT(핵 확산 금지조약) 체제를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조야(朝野)는 이 발언에 주목했다. 한국은 핵무장할 능력과 의지가 있지만 참고 있으니 북한처럼 한국을 위협하는 나라들은 자제하라는 요구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지난 6월 19일 김정은과 푸틴은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로부터 무력(武力)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련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4조)’를 담고 있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을 맺었다. 최고의 군사동맹인 상호방위를 약속한 것이다. 조약 본문은 여간해선 공개하지 않는데 북한은 만족한 듯, ‘온 세계가 보라’고 전문을 조선중앙통신에 올렸다. 이는 노태우 정부 때인 1990년 소련과의 수교로 시작한 대한민국의 북방외교가 실패했다는 뜻이 된다.
‘하버드 발언은 뭐였나?’
불법으로 핵을 가진 북한과 불법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공동방위를 약속한 것에 대해 우리가 보여야 할 첫 번째 반응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제공과 자체 핵무장이다.
북러조약 체결 직후 미국의 싱크탱크들은 바로 한국의 핵무장론을 거론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유사한 주장이 나오지 않았다. 야당엔 아예 없었고 여당에서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국민의힘 대표에 도전한 나경원 의원 정도만 외쳤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놀랍게도 기자 간담회에서 “자체 핵무장은 고려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핵무장론을 틀어막는 발언을 했다.
이러하니 ‘하버드 발언은 뭐였어?’라며 윤 정부의 안보관을 의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윤 정부의 안보관이 오락가락하게 된 것은, 미국·일본은 우습게 봐 반미·반일을 외치지만 그보다 훨씬 못하고 밥 먹듯이 배신을 하는 러시아와 북한을 두려워하는 ‘야릇한’ 지식인과 정치인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겁이 날 때는 두려움에 젖어 있지 말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부터 찾아야 한다.
올해 김정은은 만 40세다. 후계자 생활을 빼도 13년간 통치한 경험이 있으니 그를 애송이로 볼 수 없다. 그가 문재인을 속여 ‘꿈에 그리던’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해 강성 대국을 입증한 것은 ‘핵 정치’를 아는 이를 곁에 두고 ‘미국 포비아’ ‘한국 공포증’을 극복해낸 탓이다.
지금은 희미해진 기억이 됐지만 우리에게도 핵 정치에 밝은 지도자가 있었다. 엄혹했던 시절 그들은 4차원이나 두려움에 빠져 있지 않고, 방법을 찾아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줬다. ‘에너지 빈국’ 대한민국의 문제도 해결하면서 안보도 강화하고 통일까지 넘봤던 그 시절을 돌아보며 북러방위조약이 나온 윤석열 시대의 핵 정치를 모색해보기로 하자.
원자력잠수함에서 나온 경수로
대한민국 핵 정치의 태조(太祖)는 ‘외교의 귀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다. 그는 세계정세를 이용해 척박한 환경이었음에도 원자력 씨앗을 심고 묘목으로 키워냈다. 그가 직면한 세계정치는 ‘냉전’이었다. 연합국을 이끌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곧바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소련의 배신에 직면했다. 자신이 ‘해방’시킨 동유럽 제국과 북한을 공산화하며 적대적으로 나온 소련은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해 미소(美蘇) 대립을 극대화했다. 그해 중국에서는 공산당 군이 국민당 군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차지했으니 ‘동서(東西)냉전’은 치열해졌다. 이듬해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의식’ 있는 나라들은 핵개발에 눈을 돌렸다.
1952년 영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이 경쟁은 가열됐는데, 이렇게 되면서 미국은 세계 통제력을 잃는다. 핵 보유국 사이의 경쟁은 3차 대전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53년 12월 7일, 이를 염려한 미국이 담대한 국제정치를 펼쳤다. 유엔을 찾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려는 나라에는 미국의 원자력 기술을 제공하겠다며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이란 제목의 연설을 한 것이다.
소련의 기세를 꺾어야 하는 미국은 평화적인 원자력 기술 제공으로 동맹국을 늘리면서 원폭을 통제하기 위해 이 제안을 한 것이다. 이듬해 미국 해군이 ‘STR 마크-2’ 원자로를 탑재한 최초의 원자력잠수함(原潛) ‘노틸러스(SSN-571)’함을 진수했다. STR-2는 핵연료와 접촉해 열을 받아 나오는 물과 그 물로부터 넘겨받은 ‘열’로 수증기를 발생하는 물을 완벽히 분리했기에 이 원자로와 같이 지내야 하는 승조원들은 안심하고 노틸러스함을 탈 수 있었다. 전기를 생산하는 상업용 원자로(상업로) 가운데 가장 안전한 것이 경수로(輕水爐)인데, 경수로는 STR 마크-2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삼일절에 원자력연구소 개소식
이때는 6·25 전쟁이 막 끝난 직후라 다수의 우리 국민은 미국이 원폭으로 일본을 항복시켰다는 것만 알았지 원잠과 원자로, 우라늄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이젠하워의 유엔 연설에 주목한 ‘외교의 귀신’은 신속히 움직였다. 1955년 미국 주도로 유엔이 제1회 원자력 국제회의를 열자 대표단을 보내 자료를 모으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미국을 상대로 한미원자력협정을 맺고 문교부 교육기술국에 원자력과를 설치하게 했다. 미국의 군사 원조로 상당액의 정부 예산을 꾸리고 있을 때인데 ‘상상도 못 할’ 일을 저지른 것이다.
미국이 움직인 만큼 주요 국가들은 기민하게 대응했다. 1956년 영국이 세계 최초로 상업용 원자로(상업로)인 콜더홀 원전을 준공하자, 이듬해 소련이 오브닌스크 원전, 그 이듬해 미국이 시핑포트 원전을 준공했다. 시핑포트 원전이 바로 원잠용 원자로인 STR 마크-2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경수로였다. 상업로 붐에 주목한 이승만 대통령이 1957년 237명의 엘리트를 국비 훈련생(일명 원자력 유학생)으로 뽑아 미국과 영국으로 보냈다.
1958년에는 ‘가당치도 않게’ 원자력법을 만들게 하고 한양공대에 처음으로 원자력 공학과를 개설하게 했다(서울공대는 1959년 원자핵 공학과 만듦). 그리고 우리도 원자로를 가질 수 있도록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게 했다. 1959년 그는 장관급이 이끄는 행정부 조직으로 ‘원자력원(原子力院)’을 만들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국책(國策)연구소인 원자력연구소를 세웠다. 이 대통령은 과학 기술로 강국을 만들어 ‘다시는 식민지가 되지 말자’는 뜻으로 이 연구소 개소식을 삼일절에 가졌다.
박정희, 1962년부터 원전 관심
그해 7월 14일 이 연구소가 미국에서 도입하기로 한 연구용 원자로(연구로) ‘트리가 마크-2’ 설치를 위한 기공식을 가졌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장차 원자력연구소는 훌륭한 아토믹 머신을 만들어야 합니다”란 연설을 했다. ‘아토믹 머신’은 원자로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 국민들은 원폭만 알았기에 “이 대통령이 원폭을 만들라고 했다”며 설왕설래를 했다.
이 대통령이 얼마나 빨랐는지는 일본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일본은 1955년 미국과 ‘일미원자력연구협정’을 맺고 ‘원자력기본법’을 만들었다. 1956년엔 원자력을 다루는 정부 기구로 과학기술청을 설치했다. 이승만은 일본과 엇비슷하게 원자력 토대를 닦았다.
1960년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민주당 집권기를 거쳐 1961년 5·16으로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들어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 원자력을 성장 궤도에 진입시켜 첫 수확까지 한 태종(太宗)에 해당한다. 1962년 트리가 마크-2를 준공하자 기념우표를 발행해 경축한 그는 1963년부턴 ‘꿈도 꾸지 못한’ 원전(原電) 건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엔 화력발전이 원전보다 훨씬 경제성이 좋았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원전 건설을 독려한 이유는 숙원인 ‘전기 보급(에너지)’과 안보 때문이었다.
원자력발전을 하려면 자연 상태에서는 0.3% 정도로 있는 우라늄235의 순도를 높여야 한다. 0.7%대로 높이면 중수로용 핵연료, 5%대로 올리면 경수로용 핵연료, 30%대로 높이면 연구로용 핵연료, 90%대로 올리면 핵폭탄(원폭)이 된다. 이러한 핵연료를 원자로에서 태우고 꺼낸 것을 ‘사용 후 핵연료’라고 하는데, 사용 후 핵연료에는 자연 상태에서는 없는 플루토늄이 있다. 자연 상태에서는 99.7% 비율로 있던 우라늄238 중 일부가 원자로 안에서 중성자를 흡수해 플루토늄으로 변하는 것이다.
플루토늄도 우라늄235처럼 핵분열을 한다(우라늄238은 핵분열을 하지 못한다). 플루토늄은 중수로와 연구로용 사용 후 핵연료에서 많이 만들어지는데, 플루토늄을 긁어내고 나머지는 폐기하는 것을 ‘재처리’라고 한다. 따라서 원폭은, 원자로가 없다면 우라늄235의 순도를 높이는 농축으로, 원자로가 있다면 농축과 재처리로 만들 수 있다. 이 중 비용이 훨씬 적은 쪽이 재처리이다.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어 연구로나 상업로를 지으면 미국은 핵연료를 제공해주는데, 이를 연구로나 상업로에서 태운 다음 재처리하면 핵무기는 가장 쉽고 싸게 만들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핵무기를 만든 나라가 인도와 북한이다. 캐나다의 기술을 받아 중수로를 완공한 인도는 비밀리에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얻은 플루토늄으로 1974년,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받은 연구로 IRT-2000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2006년 최초 핵실험을 했다. 인도의 경쟁국인 파키스탄은 지금도 원자로가 없기에 20여 년간 농축만으로 원폭을 만드는 노력을 하다 1998년 첫 핵실험을 했다. 농축으로 만든 원폭을 ‘우라늄탄’, 재처리로 만든 것을 ‘플루토늄탄’이라고 하는데, 효율(성능)은 플루토늄탄이 월등히 좋다.
이것이 현실이기에 미국 등 원자력국은 농축과 재처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원자력협정을 맺어준다. 그러함에도 미국은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1957년 유엔에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 for Peace)’을 로고로 내건 IAEA를 만들고, 1970년엔 NPT(핵확산금지조약)를 만들어 ‘원폭 개발’을 뜻하는 핵 확산을 막으려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지 않았고 NPT에도 가입하지 않았기에 핵개발을 할 수 있었다.
월성 1호기는 재처리 가능한 중수로
북한은 소련과 원자력협정을 맺고 1985년엔 NPT에도 가입했다. 그래서 IRT-2000 연구로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인데, 1991년 소련이 무너져 고난의 행군에 빠지자 이 연구로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며 몰래 핵개발을 했다. 그리고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 선언을 하고 3월 19일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위협을 해 엄청난 ‘북핵 공포’를 조성했다.
북한은 소련과 맺은 원자력협정을 어긴 것인데, 러시아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우리 눈치가 보였는지 1995년 북소우호조약을 파기하고 불곰사업을 시작했다(1993년 북한의 NPT 탈퇴는 선언으로 끝났다. NPT는 가입국이 탈퇴한다고 하면 그만인 것이라, 북한은 그 후로도 몇 번 탈퇴 선언을 했다. 하지만 2006년 1차 핵실험을 한 뒤로는 확실히 탈퇴한 것으로 여기게 됐다).
북한의 핵개발 과정을 약술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핵 정치의 길을 먼저 걸으려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 착공식을 가진 1971년 3월 19일, 그는 진해항에서 타봤던 미국 원자력잠수함을 예찬한 후 “원전은 경제성이 없지만 먼 장래를 본다면 싸게 전력(電力)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얘기를 했다.
그러함에도 국민들은 원전 건설을 반겼는데 이는 박 대통령의 설명이 먹힌 데다 원폭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갈망 때문이었다. 1978년 고리 1호기 완공으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원전을 가진 나라가 됐다.
그런데 고리 1호기를 짓던 1973년 오일쇼크가 일어나 석유는 물론이고 석탄까지 값이 올라, 원전은 화전보다 단가가 싸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말한 먼 장래가 7년도 안 돼 나타난 것이다.
재처리를 의식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망설이지 않았다. 고리 1호기를 짓고 있던 1977년 월성 1호기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고리 1호기는 경수로였지만, 월성 1호기는 재처리를 하면 제법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는 중수로였다. 박 대통령은 무서운 집념을 보였다. 월성 1호기 기공 직후 고리 2호기 공사를 시작하고, 고리 1호기 완공식을 한 1978년 7월 20일엔 함께 고리 3·4호기 기공식을 했다.
박정희, 프랑스와 원자력협정 체결
1971년 이래 그는 다섯 기의 원전을 짓게 한 것인데, 이는 국제정세 때문이다. 한국전쟁 정전(停戰) 이후 미국은 지속적으로 주한미군을 철수했는데 그때마다 안보 위기가 일어났다. 이 위기는 미국에서 1969년 닉슨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극대화됐다. 닉슨은 소련을 잡으려면 공산블록을 흔들어야 한다고 보고 ‘핑퐁외교’로 제2의 공산 대국인 중국에 접근했다. 그 후임자인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를 독재자라며 싫어했으니 그의 시절 한미 관계는 최악이었다. 그런데 소련의 준동으로 유엔에서는 유엔사 해체 주장이 큰 지지를 얻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해외 주둔 미군 감축에 반대하는 미국 군부를 움직여 1978년 한미연합사를 만들고 중수로인 월성 1호기도 짓게 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중수로 건설은 매우 드라마틱했다. 1973년 프랑스는 고리 1호기를 공급한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로부터 기술을 구입해 원자력 기술 국산화를 이뤘다. 그리고 1974년부턴 이라크에 오시라크 연구로와 재처리 시설을 지어주게 됐는데, 이를 위협으로 본 이스라엘이 1981년 공군을 동원한 ‘오페라 작전’으로 파괴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스-이라크 밀월에 주목한 박정희 정부는 1975년 프랑스와 원자력협정을 맺고 이듬해부터는 핵연료와 재처리 연구 시설을 도입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해 캐나다와 월성 1호기 도입 계약도 맺었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이 인도가 핵실험(1974년)을 한 때 이뤄졌다는 점이다. 당시 대만도 주(駐) 대만 미군 철수로 안보 위기가 커졌기에 중수로 도입을 추진했다. 그러자 카터가 이끄는 미국이 강한 태클을 걸어왔다. ‘놀랍게도’ 박정희 대통령은 NPT에 가입하지 않고 고리 1호기를 짓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의도를 알고 있는 미국은 “중수로 도입을 중단하고 즉각 NPT에 가입하라”고 요구했다. 같은 압력을 받은 대만은 중수로 도입을 포기했으나, 박 대통령은 “NPT에 가입하면 중수로를 지어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맞서 관철시켰다. 미국에 맞서는 ‘핵 외교’를 한 것인데, 이는 먼 훗날의 재처리를 위해서일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의 원자력발전소는 물론이고 원자력연구원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국방과학연구소는 IAEA의 사찰을 받게 됐다.
이러한 때인 1979년 3월 28일 미국에서 스리마일 섬-2호기 사고가 발생하자 카터는 미국 내 신규 원전 건설 중단을 결정했다. 이 사고로 방사선은 유출되지 않았고 희생자도 전무했지만 반(反)원전주의자인 카터는 이를 의도적으로 키웠다. 그리고 10월 26일 원자력 풍운아 박정희는 스나이더 미국 대사와 자주 접촉해온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당했다. 12·12 사건을 거치며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들어섰다. 전두환 정부는 레이건 정부와 합의해 복잡해진 한미 관계를 정리했다.
가장 큰 성과는 안보 문제 해결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를 중단한 것이고, 두 번째는 미국으로부터 기술을 받아 현무-1 미사일 개발을 한 것을 꼽을 수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우리는 미국이 넘겨준 나이키-허큘리스를 토대로 ‘백곰’ 미사일을 만들었으나 정확도를 자신할 수 없었다. 카터 정부는 박정희 정권을 미워했으니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은 한미연합사를 움직여 대통령이 된 레이건을 제일 먼저 면담한 후, 주한미군 철수를 중단시키고 미사일 기술을 발전시킬 기회를 잡았다.
부차적으로 일본에 압력을 넣어 우리에게 60억 달러라는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게 했는데, 서울올림픽 유치를 국책과제로 삼은 전두환 정부는 한강을 재개발하고 강변도로를 만들어 서울을 탈바꿈시켰다. 도로 등 SOC 투자를 늘림으로써 간접자본을 확충해 흑자 경제의 기반도 닦았다. 대신 박정희의 꿈인 핵개발은 포기했는데, 이를 보여주기 위해 원자력연구소를 에너지연구소로 개칭케 했다. 그러나 그도 먼 훗날을 보고 핵 외교를 펼쳤다.
원전 기술 자립 기반 만든 전두환
미국의 의심을 떨쳤다고 판단한 1981년 전두환 정부는 영광 1·2호기는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웨스팅하우스에 주었다. 그러나 이듬해 울진 1·2호기는 기술 국산화 이후 수출을 위해 저가(低價) 공세를 하며 안달하고 있던 프랑스의 프라마톰에 맡겼는데, 이는 핵개발을 포기시킨 미국에 대한 작은 반발이기도 했다. 한국을 자기 시장으로 알고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불만을 토로했지만, 전두환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담대한 원자력 외교를 했다. 대한민국에 원전 기술을 주는 기업이 있으면 그 기업에 영광 3·4호기를 짓게 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 미국에는 경수로 업체로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밥콕 앤 윌콕스가 있었는데 스리마일 원전을 지은 밥콕 앤 윌콕스는 이 원전 사고로 폐업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물론이고 주요 국가들은 원전 건설을 중단했기에, 남은 회사들은 고통을 받았다. 웨스팅하우스는 고리 1·2·3·4호기에 이어 영광 1·2호기도 지었으니 부속품 공급 등 후속 사업을 할 수 있어 그래도 형편이 나았다. 프랑스의 프라마톰도 울진 1·2호기를 따냈기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가장 절박한 것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었기에 가장 좋은 답변을 해, 1986년 전두환 정부는 이 회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에너지연구소 등에 있는 많은 연구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원전 설계 기술을 익히게 됐다. 그렇게 습득한 기술로 만든 것이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의 시스템 80 원자로와 동형인 한국표준형 원자로 KSNP이다. 노태우(盧泰愚) 정부 이후 우리는 영광 5·6호기와 울진 3·4·5·6호기를 KSNP로 도배하면서 완벽한 기술 자립을 했다. 전두환 정부는 핵개발은 뒤로 미루고 시급한 에너지 확보를 위해 원전에 집중하게 해 대한민국을 원전 강국으로 만드는 기초를 닦았다.
우리 글 훈민정음은 세종(世宗)이 창제했다. 원전 국산화의 기반을 만들고 난제를 정리해 흑자 경제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전두환은 원자력계의 세종으로 볼 수도 있다.
원전 국산화를 5공 비리로 몬 야당
서울올림픽 유치, 한미 관계 안착, 일본으로부터 받은 차관으로 비약적으로 SOC 구축, 원자력 기술 자립이란 기록을 세운 전두환 대통령이 그때로서는 ‘가장 중요한 약속’이었던 단임(單任)을 실현하겠다며 1988년 2월 퇴임하고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러자 민주 세력으로 위장해 있던 불만 세력과 좌파 세력이 튀어나왔다. 1988년 그들이 장악한 국회는 광주 청문회와 5공 청문회를 열었다.
웨스팅하우스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전두환 정부가 상당한 자금을 받고 성능이 떨어지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을 선택했다는 제보를 한 것이다. 때문에 5공 청문회에서 김영삼(金泳三)이 이끈 통일민주당과 김대중(金大中)이 이끈 평화민주당 의원들은 원전 국산화를 난도질해 복마전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싸움이 있은 후 우리나라에서는 탈핵(脫核) 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정치적으로는 보수 정당은 친원전, 민주당 등 좌파 정당은 반원전이라는 구도도 형성됐다. 2017년 출범한 문재인(文在寅) 정부가 탈핵 운동가인 양이원영과 김제남씨를 국회의원과 기후환경비서관으로 진출시키고, 반핵 학자인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를 에너지정보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삼아 ‘탈핵 정책’을 펼쳤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5공 청문회는 원전 국산화를 대표적인 5공 비리로 선정해 뒤집었기에 여러 관계자가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유죄를 받은 이는 없었다. 원전 기술을 갖춰 ‘산업 사회의 젖’인 에너지를 확보하고 안보를 보강하자는 데 원전인들은 단결했기에 부정부패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노태우 정부는 전두환 정부가 수립한 대로 원전 건설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90년 7월 19일 한국표준형 원전(KSNP) 건설 계획을 확정 짓고 울진 3·4·5·6호기와 영광 5·6호기를 KSNP로 지어나가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먼 미래에 있을 재처리를 위한 준비도 했다. 1991년 10월 9일 중수로인 월성 원전 2호기도 짓게 한 것이다. 이후 두 기를 더 지어 우리는 네 기의 중수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노태우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실수
5공 청문회에서 원전 기술 자립이 흔들린 탓인지 노태우 정부는 핵 정치·핵 외교와 관련해 큰 실수를 했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된 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도 러시아와 함께 핵무기 보유국이 됐다. 당시는 냉전 종식 직후라 미소 관계가 좋았기에, 미국은 세 나라에 “핵무기를 러시아로 넘겨라”며 세계적인 비핵화(非核化)를 추진했다. 인도가 이미 핵실험을 해 핵 보유국으로 있는데, 핵무기는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만 보유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 것. 1992년 카자흐스탄과 벨라루스는 러시아로 핵무기를 넘겼고 우크라이나는 갈등을 겪다가 1994년 넘겼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의 핵개발을 막는다는 이유로 소련이 무너지기도 전인 1991년 11월 8일 우리만의 비핵화를 선언하고, 소련이 붕괴한 이듬해 1월 20일엔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1990년부터 소련은 사실상 붕괴했고 노태우 정부는 중수로를 계속 지어가기로 했으니, 미국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먼저 우리만의 비핵화를 선언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이 선언은 성급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휴지가 됐는데, 우리만 비핵화 선언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것도 이상하기 그지없다. 노태우 정부 때부터 우리는 원폭은 고려하지 않고 원전만 보는 짝짝이 나라가 돼갔다. 원폭에 대해서는 확실히 약한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한 1993년 김영삼 정부는 당황했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다고 봤기에 북폭(北爆)을 하겠다는 미국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그리고 미국이 북한과 제네바합의를 하고 KEDO를 만들어 북한 신포에 경수로를 지어주겠다고 하자 ‘원전 건설로 통일이 될 것 같은’ 망상에 빠졌는지, ‘신포에는 KSNP를 지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때문에 5공 청문회에서 그들이 난도질한 KSNP를 신포에 짓는 공사가 신포에서 시작됐으나,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하는 것이 확인돼 제네바합의가 폐기됨으로써 중단됐다. 우리는 공사비 11억 달러를 고스란히 날린 것이다.
박근혜, 사용 후 핵연료 사용할 수 있게 원자력협정 개정
2006년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했다. 그런데도 한국에선 핵 정치가가 아니라 원자력 전문가만 양성되었다. KSNP는 한국과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 공동으로 설계한 것인데, 여섯 기를 짓다 보니 완전한 기술 습득이 됐다. 때문에 OPR-1000이라는 독자 모델을 설계해 2007년부터 신월성 1·2호기와 신고리 1·2호기를 지었다. 그리고 APR1400을 설계해 2009년 신고리 3·4호기를 지으면서 UAE에 원전을 수출(바라카 원전 4기)하는 기적을 만들었다. 이 수출에는 현대건설 회장을 하며 수주 마케팅을 많이 한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정부는 UAE와 계약을 한 2009년 12월 27일을 ‘원자력의 날’로 지정해 경축했다.
그리고 우리는 농축과 재처리로 눈을 돌렸다. 그때 사용 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만 긁어내는 재처리를 하지 않아도 사용 후 핵연료에 있는 플루토늄을 이용해 다시 핵연료를 만드는 MOX(Mixed Oxide·혼합산화물)연료와 파이로프로세싱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사용 후 핵연료를 손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야 했다.
박근혜(朴槿惠) 정부 때인 2015년 우리는 미국의 동의가 있으면 우라늄을 20%대까지 농축할 수 있고 파이로프로세싱 등을 위해 사용 후 핵연료를 사용할 수 있다는 쪽으로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북한의 핵실험이 강력해졌기에 미국이 태도를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기 기술은 빠르게 앞서갔다. 2017년 6차 핵실험을 하면서 북한은 수소폭탄 개발을 선언했다. 이후로는 어뢰나 단거리 탄도미사일, 순항미사일에 탑재하는 전술핵무기 개발과 고체연료를 탑재하는 ICBM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북한은 완벽한 핵 보유국이 된 것이다.
멀쩡한 월성 1호기 죽인 문재인
그런데 2017년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2011년에 있었던 후쿠시마 사고와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석굴암과 첨성대도 무너뜨리지 못한 2016년의 경주 지진을 ‘경주 대지진’ 운운하면서 ‘탈핵 정책’을 선언하고 반핵 운동가를 제도권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경제성 수치 조작을 통해 멀쩡하게 계속 운전 중인 월성 1호기를 세우고 폐로(閉爐)로 몰고 갔다. 월성 원전은 경제성만 따져 지은 것이 아닌데…. 삼척과 영덕에 마련해놓은 신규 원전 부지도 문재인 정부는 해제해버렸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던 대한민국 원전은 2022년 윤석열(尹錫悅) 정부가 등장함으로써 기사회생(起死回生)했으나 기대했던 전진은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원자력계는 문 정권이 해제한 원전 부지를 필요로 하는데, 윤 정부는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
사용 후 핵연료는 재처리를 할 수 있는 자원이다. 그렇다면 25기가 넘는 원전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한데 모아놓고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윤 정부는 사용 후 핵연료 중간 저장소 설치도 미적거리고 있다.
1989년 목포에 간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원자력에 대한 의견을 밝히라고 하자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는 원전을 건설할 수밖에 없으나 주민과 충분한 협의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를 김대중 지지자들은 ‘목포선언’으로 부르며 DJ를 친원전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부안사태까지 일어나며 난제가 된 방폐장을 경주에 지었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진 좌파 정권은 기본적으로 원자력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탈핵 정책을 펼친 문재인 정권이었다.
NCG로 북핵 대응은 난센스
조선의 세조(世祖)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세종 사후 거대해진 신권(臣權)을 제압하고 왕권(王權)을 강화했다. 지금 한국 원자력계가 필요로 하는 인물은 ‘세조’ 같은 핵 정치가이다.
핵 보유국인 북한이 핵 보유국인 러시아와 방위조약을 맺었다면 장호진 안보실장은 ‘NPT 탈퇴 선언’은 못 하더라도 미국과 상의한 후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이미 무력화(無力化)됐다. 그런데 북러조약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가중됐기에 1990년 우리만의 비핵화 선언과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효력이 정지됐음을 밝힌다”란 주장이라도 해야 한다.
1978년 박정희 정부가 미국이 준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토대로 백곰 미사일을 만들어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원천 기술 보유국을 주장하며 ‘한국이 보유한 미사일의 사거리는 180km를 넘어서면 안 된다’며 한미미사일지침 수용을 요구했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기술이 발전하자 1999년과 2012년, 2017년 이 지침을 수정해주더니 2020년에는 폐기해버렸다. 대한민국을 핵탄두만 붙이지 않으면 ICBM을 개발해도 되는 나라로 만들어준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북한과 미사일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봤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핵을 가진 북러가 동맹조약을 맺었는데 한미가 핵협의그룹(NCG)만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미국 싱크탱크들은 항공기 투하 핵폭탄인 B-61을 한국에 재배치하거나 한국과 핵공유협정을 맺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동서냉전이 첨예하던 시절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핵무장을 용인했는데, 이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이 만든 남중국해와 대만 위기, 러시아가 만든 러-우 전쟁과 북러조약이 우리에게 핵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미국 처지에서는 이것 외에는 동북아에서 중·북·러의 위협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공격원잠 건조해야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전범국(戰犯國)이라 일본의 핵무장을 허용하면 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구성된 유엔 안보리는 정당성을 잃게 된다. 미국은 유엔 붕괴라는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대만의 핵무장은 중국의 자존심을 정통으로 찌르는 것이라 진짜 대만 위기를 부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전범국도 중국의 속국(屬國)도 아닌데다 숙적(宿敵)인 북한이 핵무장을 했으니, 북한이 비핵화될 때까지 ‘조건부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 핵 정치가·핵 외교가들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의 원자력을 다시 한 번 조이는 세조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과 핵 협상을 해 안보를 강화하고 신규 원전을 짓고 월성 1호기를 되살릴 수 있는지 살펴보고 사용 후 핵연료 중간 저장소도 지어야 한다. 20% 농축 우라늄을 연료로 쓰는 공격원잠도 건조해야 한다.
여론으로 위장한 선동에 밀리지 않고 국가가 필요한 것을 해내는 것이 진짜 정치인이다.⊙
지난 6월 19일 김정은과 푸틴은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로부터 무력(武力)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련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4조)’를 담고 있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을 맺었다. 최고의 군사동맹인 상호방위를 약속한 것이다. 조약 본문은 여간해선 공개하지 않는데 북한은 만족한 듯, ‘온 세계가 보라’고 전문을 조선중앙통신에 올렸다. 이는 노태우 정부 때인 1990년 소련과의 수교로 시작한 대한민국의 북방외교가 실패했다는 뜻이 된다.
‘하버드 발언은 뭐였나?’
불법으로 핵을 가진 북한과 불법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공동방위를 약속한 것에 대해 우리가 보여야 할 첫 번째 반응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제공과 자체 핵무장이다.
북러조약 체결 직후 미국의 싱크탱크들은 바로 한국의 핵무장론을 거론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유사한 주장이 나오지 않았다. 야당엔 아예 없었고 여당에서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국민의힘 대표에 도전한 나경원 의원 정도만 외쳤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놀랍게도 기자 간담회에서 “자체 핵무장은 고려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핵무장론을 틀어막는 발언을 했다.
이러하니 ‘하버드 발언은 뭐였어?’라며 윤 정부의 안보관을 의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윤 정부의 안보관이 오락가락하게 된 것은, 미국·일본은 우습게 봐 반미·반일을 외치지만 그보다 훨씬 못하고 밥 먹듯이 배신을 하는 러시아와 북한을 두려워하는 ‘야릇한’ 지식인과 정치인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겁이 날 때는 두려움에 젖어 있지 말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부터 찾아야 한다.
올해 김정은은 만 40세다. 후계자 생활을 빼도 13년간 통치한 경험이 있으니 그를 애송이로 볼 수 없다. 그가 문재인을 속여 ‘꿈에 그리던’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해 강성 대국을 입증한 것은 ‘핵 정치’를 아는 이를 곁에 두고 ‘미국 포비아’ ‘한국 공포증’을 극복해낸 탓이다.
지금은 희미해진 기억이 됐지만 우리에게도 핵 정치에 밝은 지도자가 있었다. 엄혹했던 시절 그들은 4차원이나 두려움에 빠져 있지 않고, 방법을 찾아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줬다. ‘에너지 빈국’ 대한민국의 문제도 해결하면서 안보도 강화하고 통일까지 넘봤던 그 시절을 돌아보며 북러방위조약이 나온 윤석열 시대의 핵 정치를 모색해보기로 하자.
원자력잠수함에서 나온 경수로
대한민국 핵 정치의 태조(太祖)는 ‘외교의 귀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다. 그는 세계정세를 이용해 척박한 환경이었음에도 원자력 씨앗을 심고 묘목으로 키워냈다. 그가 직면한 세계정치는 ‘냉전’이었다. 연합국을 이끌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곧바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소련의 배신에 직면했다. 자신이 ‘해방’시킨 동유럽 제국과 북한을 공산화하며 적대적으로 나온 소련은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해 미소(美蘇) 대립을 극대화했다. 그해 중국에서는 공산당 군이 국민당 군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차지했으니 ‘동서(東西)냉전’은 치열해졌다. 이듬해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의식’ 있는 나라들은 핵개발에 눈을 돌렸다.
1952년 영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이 경쟁은 가열됐는데, 이렇게 되면서 미국은 세계 통제력을 잃는다. 핵 보유국 사이의 경쟁은 3차 대전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53년 12월 7일, 이를 염려한 미국이 담대한 국제정치를 펼쳤다. 유엔을 찾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려는 나라에는 미국의 원자력 기술을 제공하겠다며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이란 제목의 연설을 한 것이다.
소련의 기세를 꺾어야 하는 미국은 평화적인 원자력 기술 제공으로 동맹국을 늘리면서 원폭을 통제하기 위해 이 제안을 한 것이다. 이듬해 미국 해군이 ‘STR 마크-2’ 원자로를 탑재한 최초의 원자력잠수함(原潛) ‘노틸러스(SSN-571)’함을 진수했다. STR-2는 핵연료와 접촉해 열을 받아 나오는 물과 그 물로부터 넘겨받은 ‘열’로 수증기를 발생하는 물을 완벽히 분리했기에 이 원자로와 같이 지내야 하는 승조원들은 안심하고 노틸러스함을 탈 수 있었다. 전기를 생산하는 상업용 원자로(상업로) 가운데 가장 안전한 것이 경수로(輕水爐)인데, 경수로는 STR 마크-2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삼일절에 원자력연구소 개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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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7월 14일 한국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2’ 설치를 위한 기공식에 노구를 이끌고 참석, 직접 삽을 떴다. 사진=조선DB |
미국이 움직인 만큼 주요 국가들은 기민하게 대응했다. 1956년 영국이 세계 최초로 상업용 원자로(상업로)인 콜더홀 원전을 준공하자, 이듬해 소련이 오브닌스크 원전, 그 이듬해 미국이 시핑포트 원전을 준공했다. 시핑포트 원전이 바로 원잠용 원자로인 STR 마크-2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경수로였다. 상업로 붐에 주목한 이승만 대통령이 1957년 237명의 엘리트를 국비 훈련생(일명 원자력 유학생)으로 뽑아 미국과 영국으로 보냈다.
1958년에는 ‘가당치도 않게’ 원자력법을 만들게 하고 한양공대에 처음으로 원자력 공학과를 개설하게 했다(서울공대는 1959년 원자핵 공학과 만듦). 그리고 우리도 원자로를 가질 수 있도록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게 했다. 1959년 그는 장관급이 이끄는 행정부 조직으로 ‘원자력원(原子力院)’을 만들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국책(國策)연구소인 원자력연구소를 세웠다. 이 대통령은 과학 기술로 강국을 만들어 ‘다시는 식민지가 되지 말자’는 뜻으로 이 연구소 개소식을 삼일절에 가졌다.
박정희, 1962년부터 원전 관심
그해 7월 14일 이 연구소가 미국에서 도입하기로 한 연구용 원자로(연구로) ‘트리가 마크-2’ 설치를 위한 기공식을 가졌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장차 원자력연구소는 훌륭한 아토믹 머신을 만들어야 합니다”란 연설을 했다. ‘아토믹 머신’은 원자로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 국민들은 원폭만 알았기에 “이 대통령이 원폭을 만들라고 했다”며 설왕설래를 했다.
이 대통령이 얼마나 빨랐는지는 일본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일본은 1955년 미국과 ‘일미원자력연구협정’을 맺고 ‘원자력기본법’을 만들었다. 1956년엔 원자력을 다루는 정부 기구로 과학기술청을 설치했다. 이승만은 일본과 엇비슷하게 원자력 토대를 닦았다.
1960년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민주당 집권기를 거쳐 1961년 5·16으로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들어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 원자력을 성장 궤도에 진입시켜 첫 수확까지 한 태종(太宗)에 해당한다. 1962년 트리가 마크-2를 준공하자 기념우표를 발행해 경축한 그는 1963년부턴 ‘꿈도 꾸지 못한’ 원전(原電) 건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엔 화력발전이 원전보다 훨씬 경제성이 좋았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원전 건설을 독려한 이유는 숙원인 ‘전기 보급(에너지)’과 안보 때문이었다.
원자력발전을 하려면 자연 상태에서는 0.3% 정도로 있는 우라늄235의 순도를 높여야 한다. 0.7%대로 높이면 중수로용 핵연료, 5%대로 올리면 경수로용 핵연료, 30%대로 높이면 연구로용 핵연료, 90%대로 올리면 핵폭탄(원폭)이 된다. 이러한 핵연료를 원자로에서 태우고 꺼낸 것을 ‘사용 후 핵연료’라고 하는데, 사용 후 핵연료에는 자연 상태에서는 없는 플루토늄이 있다. 자연 상태에서는 99.7% 비율로 있던 우라늄238 중 일부가 원자로 안에서 중성자를 흡수해 플루토늄으로 변하는 것이다.
플루토늄도 우라늄235처럼 핵분열을 한다(우라늄238은 핵분열을 하지 못한다). 플루토늄은 중수로와 연구로용 사용 후 핵연료에서 많이 만들어지는데, 플루토늄을 긁어내고 나머지는 폐기하는 것을 ‘재처리’라고 한다. 따라서 원폭은, 원자로가 없다면 우라늄235의 순도를 높이는 농축으로, 원자로가 있다면 농축과 재처리로 만들 수 있다. 이 중 비용이 훨씬 적은 쪽이 재처리이다.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어 연구로나 상업로를 지으면 미국은 핵연료를 제공해주는데, 이를 연구로나 상업로에서 태운 다음 재처리하면 핵무기는 가장 쉽고 싸게 만들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핵무기를 만든 나라가 인도와 북한이다. 캐나다의 기술을 받아 중수로를 완공한 인도는 비밀리에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얻은 플루토늄으로 1974년,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받은 연구로 IRT-2000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2006년 최초 핵실험을 했다. 인도의 경쟁국인 파키스탄은 지금도 원자로가 없기에 20여 년간 농축만으로 원폭을 만드는 노력을 하다 1998년 첫 핵실험을 했다. 농축으로 만든 원폭을 ‘우라늄탄’, 재처리로 만든 것을 ‘플루토늄탄’이라고 하는데, 효율(성능)은 플루토늄탄이 월등히 좋다.
이것이 현실이기에 미국 등 원자력국은 농축과 재처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원자력협정을 맺어준다. 그러함에도 미국은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1957년 유엔에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 for Peace)’을 로고로 내건 IAEA를 만들고, 1970년엔 NPT(핵확산금지조약)를 만들어 ‘원폭 개발’을 뜻하는 핵 확산을 막으려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지 않았고 NPT에도 가입하지 않았기에 핵개발을 할 수 있었다.
월성 1호기는 재처리 가능한 중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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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국내 첫 원전인 고리 원전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고리 원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조선DB |
북한은 소련과 맺은 원자력협정을 어긴 것인데, 러시아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우리 눈치가 보였는지 1995년 북소우호조약을 파기하고 불곰사업을 시작했다(1993년 북한의 NPT 탈퇴는 선언으로 끝났다. NPT는 가입국이 탈퇴한다고 하면 그만인 것이라, 북한은 그 후로도 몇 번 탈퇴 선언을 했다. 하지만 2006년 1차 핵실험을 한 뒤로는 확실히 탈퇴한 것으로 여기게 됐다).
북한의 핵개발 과정을 약술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핵 정치의 길을 먼저 걸으려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 착공식을 가진 1971년 3월 19일, 그는 진해항에서 타봤던 미국 원자력잠수함을 예찬한 후 “원전은 경제성이 없지만 먼 장래를 본다면 싸게 전력(電力)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얘기를 했다.
그러함에도 국민들은 원전 건설을 반겼는데 이는 박 대통령의 설명이 먹힌 데다 원폭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갈망 때문이었다. 1978년 고리 1호기 완공으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원전을 가진 나라가 됐다.
그런데 고리 1호기를 짓던 1973년 오일쇼크가 일어나 석유는 물론이고 석탄까지 값이 올라, 원전은 화전보다 단가가 싸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말한 먼 장래가 7년도 안 돼 나타난 것이다.
재처리를 의식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망설이지 않았다. 고리 1호기를 짓고 있던 1977년 월성 1호기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고리 1호기는 경수로였지만, 월성 1호기는 재처리를 하면 제법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는 중수로였다. 박 대통령은 무서운 집념을 보였다. 월성 1호기 기공 직후 고리 2호기 공사를 시작하고, 고리 1호기 완공식을 한 1978년 7월 20일엔 함께 고리 3·4호기 기공식을 했다.
박정희, 프랑스와 원자력협정 체결
1971년 이래 그는 다섯 기의 원전을 짓게 한 것인데, 이는 국제정세 때문이다. 한국전쟁 정전(停戰) 이후 미국은 지속적으로 주한미군을 철수했는데 그때마다 안보 위기가 일어났다. 이 위기는 미국에서 1969년 닉슨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극대화됐다. 닉슨은 소련을 잡으려면 공산블록을 흔들어야 한다고 보고 ‘핑퐁외교’로 제2의 공산 대국인 중국에 접근했다. 그 후임자인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를 독재자라며 싫어했으니 그의 시절 한미 관계는 최악이었다. 그런데 소련의 준동으로 유엔에서는 유엔사 해체 주장이 큰 지지를 얻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해외 주둔 미군 감축에 반대하는 미국 군부를 움직여 1978년 한미연합사를 만들고 중수로인 월성 1호기도 짓게 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중수로 건설은 매우 드라마틱했다. 1973년 프랑스는 고리 1호기를 공급한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로부터 기술을 구입해 원자력 기술 국산화를 이뤘다. 그리고 1974년부턴 이라크에 오시라크 연구로와 재처리 시설을 지어주게 됐는데, 이를 위협으로 본 이스라엘이 1981년 공군을 동원한 ‘오페라 작전’으로 파괴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스-이라크 밀월에 주목한 박정희 정부는 1975년 프랑스와 원자력협정을 맺고 이듬해부터는 핵연료와 재처리 연구 시설을 도입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해 캐나다와 월성 1호기 도입 계약도 맺었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이 인도가 핵실험(1974년)을 한 때 이뤄졌다는 점이다. 당시 대만도 주(駐) 대만 미군 철수로 안보 위기가 커졌기에 중수로 도입을 추진했다. 그러자 카터가 이끄는 미국이 강한 태클을 걸어왔다. ‘놀랍게도’ 박정희 대통령은 NPT에 가입하지 않고 고리 1호기를 짓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의도를 알고 있는 미국은 “중수로 도입을 중단하고 즉각 NPT에 가입하라”고 요구했다. 같은 압력을 받은 대만은 중수로 도입을 포기했으나, 박 대통령은 “NPT에 가입하면 중수로를 지어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맞서 관철시켰다. 미국에 맞서는 ‘핵 외교’를 한 것인데, 이는 먼 훗날의 재처리를 위해서일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의 원자력발전소는 물론이고 원자력연구원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국방과학연구소는 IAEA의 사찰을 받게 됐다.
이러한 때인 1979년 3월 28일 미국에서 스리마일 섬-2호기 사고가 발생하자 카터는 미국 내 신규 원전 건설 중단을 결정했다. 이 사고로 방사선은 유출되지 않았고 희생자도 전무했지만 반(反)원전주의자인 카터는 이를 의도적으로 키웠다. 그리고 10월 26일 원자력 풍운아 박정희는 스나이더 미국 대사와 자주 접촉해온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당했다. 12·12 사건을 거치며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들어섰다. 전두환 정부는 레이건 정부와 합의해 복잡해진 한미 관계를 정리했다.
가장 큰 성과는 안보 문제 해결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를 중단한 것이고, 두 번째는 미국으로부터 기술을 받아 현무-1 미사일 개발을 한 것을 꼽을 수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우리는 미국이 넘겨준 나이키-허큘리스를 토대로 ‘백곰’ 미사일을 만들었으나 정확도를 자신할 수 없었다. 카터 정부는 박정희 정권을 미워했으니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은 한미연합사를 움직여 대통령이 된 레이건을 제일 먼저 면담한 후, 주한미군 철수를 중단시키고 미사일 기술을 발전시킬 기회를 잡았다.
부차적으로 일본에 압력을 넣어 우리에게 60억 달러라는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게 했는데, 서울올림픽 유치를 국책과제로 삼은 전두환 정부는 한강을 재개발하고 강변도로를 만들어 서울을 탈바꿈시켰다. 도로 등 SOC 투자를 늘림으로써 간접자본을 확충해 흑자 경제의 기반도 닦았다. 대신 박정희의 꿈인 핵개발은 포기했는데, 이를 보여주기 위해 원자력연구소를 에너지연구소로 개칭케 했다. 그러나 그도 먼 훗날을 보고 핵 외교를 펼쳤다.
원전 기술 자립 기반 만든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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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0월 13일 울진 원전 9·10호기 기공식에 참석해 현장을 시찰하는 전두환 대통령. 전 대통령은 원전 국산화의 기반을 만들었다. 사진=조선DB |
그때 미국에는 경수로 업체로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밥콕 앤 윌콕스가 있었는데 스리마일 원전을 지은 밥콕 앤 윌콕스는 이 원전 사고로 폐업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물론이고 주요 국가들은 원전 건설을 중단했기에, 남은 회사들은 고통을 받았다. 웨스팅하우스는 고리 1·2·3·4호기에 이어 영광 1·2호기도 지었으니 부속품 공급 등 후속 사업을 할 수 있어 그래도 형편이 나았다. 프랑스의 프라마톰도 울진 1·2호기를 따냈기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가장 절박한 것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었기에 가장 좋은 답변을 해, 1986년 전두환 정부는 이 회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에너지연구소 등에 있는 많은 연구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원전 설계 기술을 익히게 됐다. 그렇게 습득한 기술로 만든 것이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의 시스템 80 원자로와 동형인 한국표준형 원자로 KSNP이다. 노태우(盧泰愚) 정부 이후 우리는 영광 5·6호기와 울진 3·4·5·6호기를 KSNP로 도배하면서 완벽한 기술 자립을 했다. 전두환 정부는 핵개발은 뒤로 미루고 시급한 에너지 확보를 위해 원전에 집중하게 해 대한민국을 원전 강국으로 만드는 기초를 닦았다.
우리 글 훈민정음은 세종(世宗)이 창제했다. 원전 국산화의 기반을 만들고 난제를 정리해 흑자 경제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전두환은 원자력계의 세종으로 볼 수도 있다.
원전 국산화를 5공 비리로 몬 야당
서울올림픽 유치, 한미 관계 안착, 일본으로부터 받은 차관으로 비약적으로 SOC 구축, 원자력 기술 자립이란 기록을 세운 전두환 대통령이 그때로서는 ‘가장 중요한 약속’이었던 단임(單任)을 실현하겠다며 1988년 2월 퇴임하고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러자 민주 세력으로 위장해 있던 불만 세력과 좌파 세력이 튀어나왔다. 1988년 그들이 장악한 국회는 광주 청문회와 5공 청문회를 열었다.
웨스팅하우스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전두환 정부가 상당한 자금을 받고 성능이 떨어지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을 선택했다는 제보를 한 것이다. 때문에 5공 청문회에서 김영삼(金泳三)이 이끈 통일민주당과 김대중(金大中)이 이끈 평화민주당 의원들은 원전 국산화를 난도질해 복마전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싸움이 있은 후 우리나라에서는 탈핵(脫核) 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정치적으로는 보수 정당은 친원전, 민주당 등 좌파 정당은 반원전이라는 구도도 형성됐다. 2017년 출범한 문재인(文在寅) 정부가 탈핵 운동가인 양이원영과 김제남씨를 국회의원과 기후환경비서관으로 진출시키고, 반핵 학자인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를 에너지정보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삼아 ‘탈핵 정책’을 펼쳤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5공 청문회는 원전 국산화를 대표적인 5공 비리로 선정해 뒤집었기에 여러 관계자가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유죄를 받은 이는 없었다. 원전 기술을 갖춰 ‘산업 사회의 젖’인 에너지를 확보하고 안보를 보강하자는 데 원전인들은 단결했기에 부정부패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노태우 정부는 전두환 정부가 수립한 대로 원전 건설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90년 7월 19일 한국표준형 원전(KSNP) 건설 계획을 확정 짓고 울진 3·4·5·6호기와 영광 5·6호기를 KSNP로 지어나가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먼 미래에 있을 재처리를 위한 준비도 했다. 1991년 10월 9일 중수로인 월성 원전 2호기도 짓게 한 것이다. 이후 두 기를 더 지어 우리는 네 기의 중수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노태우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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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은 1991년 11월 8일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사진=조선DB |
노태우 정부는 북한의 핵개발을 막는다는 이유로 소련이 무너지기도 전인 1991년 11월 8일 우리만의 비핵화를 선언하고, 소련이 붕괴한 이듬해 1월 20일엔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1990년부터 소련은 사실상 붕괴했고 노태우 정부는 중수로를 계속 지어가기로 했으니, 미국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먼저 우리만의 비핵화를 선언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이 선언은 성급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휴지가 됐는데, 우리만 비핵화 선언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것도 이상하기 그지없다. 노태우 정부 때부터 우리는 원폭은 고려하지 않고 원전만 보는 짝짝이 나라가 돼갔다. 원폭에 대해서는 확실히 약한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한 1993년 김영삼 정부는 당황했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다고 봤기에 북폭(北爆)을 하겠다는 미국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그리고 미국이 북한과 제네바합의를 하고 KEDO를 만들어 북한 신포에 경수로를 지어주겠다고 하자 ‘원전 건설로 통일이 될 것 같은’ 망상에 빠졌는지, ‘신포에는 KSNP를 지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때문에 5공 청문회에서 그들이 난도질한 KSNP를 신포에 짓는 공사가 신포에서 시작됐으나,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하는 것이 확인돼 제네바합의가 폐기됨으로써 중단됐다. 우리는 공사비 11억 달러를 고스란히 날린 것이다.
박근혜, 사용 후 핵연료 사용할 수 있게 원자력협정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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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UAE 원자로 수출에 큰 역할을 했다. 2011년 3월 14일 바라카 원전 예정부지 기공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사진=조선DB |
그리고 우리는 농축과 재처리로 눈을 돌렸다. 그때 사용 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만 긁어내는 재처리를 하지 않아도 사용 후 핵연료에 있는 플루토늄을 이용해 다시 핵연료를 만드는 MOX(Mixed Oxide·혼합산화물)연료와 파이로프로세싱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사용 후 핵연료를 손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야 했다.
박근혜(朴槿惠) 정부 때인 2015년 우리는 미국의 동의가 있으면 우라늄을 20%대까지 농축할 수 있고 파이로프로세싱 등을 위해 사용 후 핵연료를 사용할 수 있다는 쪽으로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북한의 핵실험이 강력해졌기에 미국이 태도를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기 기술은 빠르게 앞서갔다. 2017년 6차 핵실험을 하면서 북한은 수소폭탄 개발을 선언했다. 이후로는 어뢰나 단거리 탄도미사일, 순항미사일에 탑재하는 전술핵무기 개발과 고체연료를 탑재하는 ICBM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북한은 완벽한 핵 보유국이 된 것이다.
멀쩡한 월성 1호기 죽인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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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권은 고리 원전 1호기를 영구 정지시키고, 멀쩡한 월성 원전 1호기를 죽이는 등 탈원전 정책을 강행했다. 사진=조선DB |
그리고 경제성 수치 조작을 통해 멀쩡하게 계속 운전 중인 월성 1호기를 세우고 폐로(閉爐)로 몰고 갔다. 월성 원전은 경제성만 따져 지은 것이 아닌데…. 삼척과 영덕에 마련해놓은 신규 원전 부지도 문재인 정부는 해제해버렸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던 대한민국 원전은 2022년 윤석열(尹錫悅) 정부가 등장함으로써 기사회생(起死回生)했으나 기대했던 전진은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원자력계는 문 정권이 해제한 원전 부지를 필요로 하는데, 윤 정부는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
사용 후 핵연료는 재처리를 할 수 있는 자원이다. 그렇다면 25기가 넘는 원전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한데 모아놓고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윤 정부는 사용 후 핵연료 중간 저장소 설치도 미적거리고 있다.
1989년 목포에 간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원자력에 대한 의견을 밝히라고 하자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는 원전을 건설할 수밖에 없으나 주민과 충분한 협의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를 김대중 지지자들은 ‘목포선언’으로 부르며 DJ를 친원전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부안사태까지 일어나며 난제가 된 방폐장을 경주에 지었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진 좌파 정권은 기본적으로 원자력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탈핵 정책을 펼친 문재인 정권이었다.
NCG로 북핵 대응은 난센스
조선의 세조(世祖)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세종 사후 거대해진 신권(臣權)을 제압하고 왕권(王權)을 강화했다. 지금 한국 원자력계가 필요로 하는 인물은 ‘세조’ 같은 핵 정치가이다.
핵 보유국인 북한이 핵 보유국인 러시아와 방위조약을 맺었다면 장호진 안보실장은 ‘NPT 탈퇴 선언’은 못 하더라도 미국과 상의한 후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이미 무력화(無力化)됐다. 그런데 북러조약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가중됐기에 1990년 우리만의 비핵화 선언과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효력이 정지됐음을 밝힌다”란 주장이라도 해야 한다.
1978년 박정희 정부가 미국이 준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토대로 백곰 미사일을 만들어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원천 기술 보유국을 주장하며 ‘한국이 보유한 미사일의 사거리는 180km를 넘어서면 안 된다’며 한미미사일지침 수용을 요구했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기술이 발전하자 1999년과 2012년, 2017년 이 지침을 수정해주더니 2020년에는 폐기해버렸다. 대한민국을 핵탄두만 붙이지 않으면 ICBM을 개발해도 되는 나라로 만들어준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북한과 미사일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봤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핵을 가진 북러가 동맹조약을 맺었는데 한미가 핵협의그룹(NCG)만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미국 싱크탱크들은 항공기 투하 핵폭탄인 B-61을 한국에 재배치하거나 한국과 핵공유협정을 맺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동서냉전이 첨예하던 시절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핵무장을 용인했는데, 이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이 만든 남중국해와 대만 위기, 러시아가 만든 러-우 전쟁과 북러조약이 우리에게 핵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미국 처지에서는 이것 외에는 동북아에서 중·북·러의 위협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공격원잠 건조해야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전범국(戰犯國)이라 일본의 핵무장을 허용하면 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구성된 유엔 안보리는 정당성을 잃게 된다. 미국은 유엔 붕괴라는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대만의 핵무장은 중국의 자존심을 정통으로 찌르는 것이라 진짜 대만 위기를 부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전범국도 중국의 속국(屬國)도 아닌데다 숙적(宿敵)인 북한이 핵무장을 했으니, 북한이 비핵화될 때까지 ‘조건부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 핵 정치가·핵 외교가들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의 원자력을 다시 한 번 조이는 세조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과 핵 협상을 해 안보를 강화하고 신규 원전을 짓고 월성 1호기를 되살릴 수 있는지 살펴보고 사용 후 핵연료 중간 저장소도 지어야 한다. 20% 농축 우라늄을 연료로 쓰는 공격원잠도 건조해야 한다.
여론으로 위장한 선동에 밀리지 않고 국가가 필요한 것을 해내는 것이 진짜 정치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