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충원서 지워졌던 누이의 이름, 막냇동생이 되살려
⊙ 대북 첩보 수집 중 희생된 21세 여성… 미군 소속 전환 이유로 전사 처리 취소
⊙ 누이 명예회복 애쓴 동생 도용영씨… 10년 노력 끝에 순국 인정 길 열어
⊙ 권익위, 도종순씨 전사자 처리 취소한 정보사에 ‘재심사 의결’
⊙ 대북 첩보 수집 중 희생된 21세 여성… 미군 소속 전환 이유로 전사 처리 취소
⊙ 누이 명예회복 애쓴 동생 도용영씨… 10년 노력 끝에 순국 인정 길 열어
⊙ 권익위, 도종순씨 전사자 처리 취소한 정보사에 ‘재심사 의결’
- 6·25 때 대북 첩보 수집 중 희생된 21세 여성 특수부대원 도종순씨. 남아 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사진=도용영
대전 현충원 충혼탑 위패(位牌)에 새겨진 세 글자. 도용영(74)씨에겐 자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이름 위에 검은 테이프가 붙었다. 가려진 건 누이의 이름. 도종순. 6·25전쟁 당시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 전사(戰死)한 육군첩보부대(HID) 대원이다.
군(軍) 기록에 따르면 도종순씨는 지난 1953년 7월 정전(停戰)을 며칠 앞둔 시점, 중공군(中共軍)의 기습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압록강 하구가 내다보이는 평안북도 철산군 앞바다의 섬 수운도(水運島·순도)에서다. 겨우 21세의 나이.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이름이 지워진 건 지난 2012년. 갑작스레 전사 처리가 취소되면서다. 도용영씨는 “그 꽃다운 나이에, 여자의 몸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명예를 인정받지 못했다”면서 “혼백이 구천에서 떠돌 만큼 원통한 일”이라고 했다.
도씨는 그로부터 10년간 누이의 명예회복을 위해 팔방으로 뛰었다. 그러고 올해 현충일, 충혼탑에서 누이의 이름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이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6남매를 강하게 키운 아버지
도종순씨는 1932년 서울 공덕동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맏딸이었다. 19세가 되던 1951년 2월 첩보부대에 자원(自願)했다. 같은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던 동료와 함께다. 대목수(大木手)였던 아버지 덕에 비교적 넉넉한 형편에서 자랐다고 한다. 도용영씨의 말이다.
“여유가 있는 편이었죠. 학교 다닐 때 저도 구두를 맞춰서 신고 다녔으니까요. 그런데도 누님은 생활전선에 일찍 뛰어들었어요. 동사무소에 취직을 했다가, 같이 일하던 여성 동료 두 명과 함께 특수부대에 자원을 했답니다. 애국심이었다고 할 수밖에요. 거기서 누님만 뽑혔어요. 누님이 워낙 똑똑했대요. 우리 집안에서 머리가 가장 좋았고, 맏딸 노릇을 그렇게 잘했답니다. 동생들도 살뜰하게 챙겼고요. 여자지만 군 업무를 수행할 정도로 체력도 다부졌대요.”
17세 터울인 도씨는 누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전사 사실도 뒤늦게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다고 한다. 1980년 초였다.
“워낙 말씀이 없었던 아버지는 저희 6남매를 굉장히 강하게 키웠어요. 늘 ‘할 일은 스스로 찾고,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누님의 특수부대 자원 소식을 듣고도 ‘본인이 선택한 길이니 알아서 잘하라’고 했답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처음으로 제게 누님 얘기를 해줬습니다.
‘너의 누이가 특수부대원으로 참전(參戰)했다가 전사(戰死)한 것 같다’고요. 1951년 어느 날 누님이 집에 잠깐 오더니 ‘아버지,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더 깊이 알려고 하지 마시고, 딸이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만 아셔요’라고 말했대요.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고요.”
무뚝뚝한 아버지의 그 말뜻은 누이를 찾으라는 거였다.
“처음 누님 얘기를 들었을 때, 참 자랑스럽고,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희 6남매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게 숙제를 낸 것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그땐 저도 참 무딘 게, 저 살기 바빠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를 못했어요. 찾아야 하는데, 하면서 누님을 못 챙겼어요.”
대북 첩보부대 복무, 중공군 기습에 전사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2000년 들어 서울시청 앞 북파공작원 시위를 목격했고, 도씨는 그제야 본격적으로 누이를 찾아야겠다 싶었다. 팔방으로 알아보던 어느 날. 한 지인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그 지인은 본인의 아들이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에 있다면서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한 이틀 지났을 때 연락이 오더라고요. 부대원 명단에 누님의 이름이 있다고요.”
도씨는 그길로 정보사에 누이의 복무 기록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했고, 정보사는 누이가 1951년 2월부터 11월까지 대북(對北) 첩보부대인 4863부대에서 복무했다는 것을 확인해줬다.
수소문 끝에 누이의 동료 대원도 만났다. 동료 대원은 누이를 비롯한 다른 대원들과 함께 평북 철산군 일대에서 국군 유격대와 연락하면서 적의 동태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던 중 치열한 교전(交戰)으로 대원 다수가 전사했고, 누이와 연락대장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만 먼저 철수했다고 했다. 정보사는 이를 바탕으로 2009년 2월 20일 도씨에게 ‘도종순씨가 특수 임무 수행 중 1951년 말 전사했다’는 전사 확인서를 보냈다.
한데 그 무렵,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은 다른 의견을 내놨다. 보상지원단은 도종순씨가 한국군 첩보부대에서 특수 임무를 수행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1951년 말 사망하지 않고 이후 미군으로 소속을 변경해 첩보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고 봤다. 정보사는 보상지원단의 결정에 따라 재조사 후 새로운 결론을 냈다. 요약하면 이렇다.
“도종순씨는 입대 후 1951년 11월까지 대한민국 제4863부대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하루는 부대원들과 함께 임무 수행에 나섰다가 본부와 통신이 두절돼 고립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미군 극동 공군사령부 소속 무장부대에 의해 구출돼 송도 기지로 이송됐다. 여기서 심문을 받으면서 수집한 첩보를 제출해 그 공(功)을 인정받았다. 이후 미군 극동사령부 직할 특수첩보부대 중 하나인 호염부대로 소속을 전환해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3년 7월 평북 철산군 근해의 순도라는 섬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미군 소속 전환’ 이유로 전사 처리 취소
요컨대 더 오래 살아남아 싸웠다는 얘기다. 미군 첩보부대와 함께 더 많은 전과도 올린 셈이다. 종전보다 예우가 더 좋아져야 맞을 듯한데, 의외의 결과가 뒤따랐다. 정보사는 “한국군 소속이 아닌 미군 소속으로 전사했으므로 발급된 전사확인서를 회수하고 대전 현충원과 충혼탑 전사자 명단에서도 삭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보사는 미 호염부대 소속 근무자들이 증언한 도씨의 호염부대 근무 사실 등을 토대로 이 같은 판단을 내렸다.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 제2호에 따르면 ‘군 첩보부대’란 대한민국의 국군이 특별한 내용, 형태의 정보 수집 등을 목적으로 창설해 운용한 부대를 말하며, 외국 군에 소속됐거나 군 첩보부대의 창설 이전에 구성돼 유격전 등에 종사한 부대는 제외한다.
2012년 6월 18일. 정보사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서신을 도씨에게 보냈다. ‘도종순’의 이름에 검은 테이프가 붙은 건 그 직후다.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누님은 이미 팀을 이룬 우리 군 소속이었어요. 미군에게 작전 수행 지시를 받았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정보사는 미군으로 소속이 ‘전환’됐다고 판단했어요.”
도씨는 정보사에 누이의 심의 관련 자료를 정보공개 청구했다. 심의 자료와 미군 소속으로 전환된 근거, 미군 소속 당시 전사확인서 또는 전사자 명부, 그리고 민원인의 탄원서와 이의 제기서 및 답변 내용이었다. 정보사는 이에 심의 자료는 비공개, 나머지 청구 사항에 대해서는 ‘정보 부존재’를 통보했다.
“미군 부대로 소속이 전환됐다고 봤지만, 그 기록은 없는 겁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이사만 가더라도 전입신고를 하는데, 한국군이 미군으로 전환했는데, 그 기록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잔류 업무 마치고 철수하겠다”
도종순씨의 동료대원 또한 “당시 KLO(미 극동군 사령부 소속)와 HID 소속 대원과는 관계가 없으며 합류하거나 파견된 사실도 없다”고 했다. 지난 2010년 4월 자 동료대원의 진술 중 일부다.
“1951년 1·4 후퇴 이후 서울 및 지방에서 여성 공작원 20여 명을 모집했다. 대구에서 최초 특수 교육을 받고 강화도로 집결해 남자 대원들과 팀을 구성해 북한 침투 및 첩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연락대장 외 남성 4명, 여성 2명이 평북 철산 지역에 투입됐다. 중공군의 반격이 개시된 시점이었다. 우리는 한국군의 유격대와 긴밀하게 연락하고, 적의 동태와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는 장비와 식량이 너무 열악했다. 신의주 부근인 평북 철산 지역을 대상으로 침투 대기 지점인 ‘회도(호염도)’에서 치열한 적과의 교전으로 인해 다수 요원이 전사했다. 더 이상 임무 수행이 어려웠고 상황이 급박해지자 철수 결정이 내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연락조원 안내하에 서울로 무사히 귀환하게 됐다. 그러나 도종순은 연락대장과 함께 잔류 임무를 마치고 철수한다고 했다.
60년이 지난 시점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호염도라는 섬을 당시 임무 수행할 장비와 식량을 은신한 거점으로 사용한 사실은 있다. 그러나 당시 KLO와 우리 HID 소속 대원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었으며, 특히 합류하거나 파견된 사실은 더더욱 없다. KLO는 HID보다 더 열악한 사정이었는데 HID 소속이 왜 KLO와 합류해 활동하겠느냐.”
권익위, 정보사에 재심사 의견
도씨는 올해 국민권익위원회에 이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민원을 넣었다. 그는 “정보사에서는 늘 같은 입장만 되풀이해서 다른 방법을 모색한 것”이라고 했다. 권익위는 지난 5월 22일 도씨의 고충민원을 받아들였다. “도종순씨의 소속이 미군으로 전환됐다고 하지만 한국군을 탈퇴해 미군으로 재입대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사 처리를 취소한 정보사에 전사 여부를 재심사하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김태규 권익위 부위원장(고충처리위원장)은 “여성의 몸이라 굳이 최전선에 나갈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마다하지 않고 나서 젊음을 만끽하지도 못하고 사지(死地)를 넘나들다 21세의 나이에 전사했다”면서 “그런데 70여 년이나 지나 먹고살 만해진 나라가 규정을 예리하게 적용하면서 전사 처리 여부를 따져 불이익을 준다는 건 참으로 야속한 일”이라고 했다.
권익위 의결 이후인 지난 6월 6일. 도씨는 충혼탑을 다시 찾았다. 검은 테이프는 떨어져 있었다. 그는 “이제라도 누님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정보사의 재심사 결과가 남아 있다. 도씨는 정보사를 상대로 행정심판도 진행 중이다. 그는 “6남매 중 형님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아흔 다 된 둘째 누님과 둘이서 이 문제를 해결 중”이라면서 “누님도 연로하셔서 사실상 명예회복을 해드릴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했다.
“올해 현충일, 누님 이름 석 자를 다시 보게 되자, 그제야 위패 위 검은 테이프가 붙어 있는 다른 희생자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아직도 많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새겨진 이름들을 무슨 연유로 다시 지운 것일까요. 제 짧은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건 두 번 죽이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에는 나라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여러 호국 영령이 있습니다. 모쪼록 이 일을 계기로 누님처럼 명예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군(軍) 기록에 따르면 도종순씨는 지난 1953년 7월 정전(停戰)을 며칠 앞둔 시점, 중공군(中共軍)의 기습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압록강 하구가 내다보이는 평안북도 철산군 앞바다의 섬 수운도(水運島·순도)에서다. 겨우 21세의 나이.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이름이 지워진 건 지난 2012년. 갑작스레 전사 처리가 취소되면서다. 도용영씨는 “그 꽃다운 나이에, 여자의 몸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명예를 인정받지 못했다”면서 “혼백이 구천에서 떠돌 만큼 원통한 일”이라고 했다.
도씨는 그로부터 10년간 누이의 명예회복을 위해 팔방으로 뛰었다. 그러고 올해 현충일, 충혼탑에서 누이의 이름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이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6남매를 강하게 키운 아버지
도종순씨는 1932년 서울 공덕동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맏딸이었다. 19세가 되던 1951년 2월 첩보부대에 자원(自願)했다. 같은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던 동료와 함께다. 대목수(大木手)였던 아버지 덕에 비교적 넉넉한 형편에서 자랐다고 한다. 도용영씨의 말이다.
“여유가 있는 편이었죠. 학교 다닐 때 저도 구두를 맞춰서 신고 다녔으니까요. 그런데도 누님은 생활전선에 일찍 뛰어들었어요. 동사무소에 취직을 했다가, 같이 일하던 여성 동료 두 명과 함께 특수부대에 자원을 했답니다. 애국심이었다고 할 수밖에요. 거기서 누님만 뽑혔어요. 누님이 워낙 똑똑했대요. 우리 집안에서 머리가 가장 좋았고, 맏딸 노릇을 그렇게 잘했답니다. 동생들도 살뜰하게 챙겼고요. 여자지만 군 업무를 수행할 정도로 체력도 다부졌대요.”
17세 터울인 도씨는 누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전사 사실도 뒤늦게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다고 한다. 1980년 초였다.
“워낙 말씀이 없었던 아버지는 저희 6남매를 굉장히 강하게 키웠어요. 늘 ‘할 일은 스스로 찾고,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누님의 특수부대 자원 소식을 듣고도 ‘본인이 선택한 길이니 알아서 잘하라’고 했답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처음으로 제게 누님 얘기를 해줬습니다.
‘너의 누이가 특수부대원으로 참전(參戰)했다가 전사(戰死)한 것 같다’고요. 1951년 어느 날 누님이 집에 잠깐 오더니 ‘아버지,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더 깊이 알려고 하지 마시고, 딸이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만 아셔요’라고 말했대요.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고요.”
무뚝뚝한 아버지의 그 말뜻은 누이를 찾으라는 거였다.
“처음 누님 얘기를 들었을 때, 참 자랑스럽고,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희 6남매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게 숙제를 낸 것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그땐 저도 참 무딘 게, 저 살기 바빠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를 못했어요. 찾아야 하는데, 하면서 누님을 못 챙겼어요.”
대북 첩보부대 복무, 중공군 기습에 전사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2000년 들어 서울시청 앞 북파공작원 시위를 목격했고, 도씨는 그제야 본격적으로 누이를 찾아야겠다 싶었다. 팔방으로 알아보던 어느 날. 한 지인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그 지인은 본인의 아들이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에 있다면서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한 이틀 지났을 때 연락이 오더라고요. 부대원 명단에 누님의 이름이 있다고요.”
도씨는 그길로 정보사에 누이의 복무 기록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했고, 정보사는 누이가 1951년 2월부터 11월까지 대북(對北) 첩보부대인 4863부대에서 복무했다는 것을 확인해줬다.
수소문 끝에 누이의 동료 대원도 만났다. 동료 대원은 누이를 비롯한 다른 대원들과 함께 평북 철산군 일대에서 국군 유격대와 연락하면서 적의 동태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던 중 치열한 교전(交戰)으로 대원 다수가 전사했고, 누이와 연락대장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만 먼저 철수했다고 했다. 정보사는 이를 바탕으로 2009년 2월 20일 도씨에게 ‘도종순씨가 특수 임무 수행 중 1951년 말 전사했다’는 전사 확인서를 보냈다.
한데 그 무렵,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은 다른 의견을 내놨다. 보상지원단은 도종순씨가 한국군 첩보부대에서 특수 임무를 수행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1951년 말 사망하지 않고 이후 미군으로 소속을 변경해 첩보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고 봤다. 정보사는 보상지원단의 결정에 따라 재조사 후 새로운 결론을 냈다. 요약하면 이렇다.
“도종순씨는 입대 후 1951년 11월까지 대한민국 제4863부대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하루는 부대원들과 함께 임무 수행에 나섰다가 본부와 통신이 두절돼 고립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미군 극동 공군사령부 소속 무장부대에 의해 구출돼 송도 기지로 이송됐다. 여기서 심문을 받으면서 수집한 첩보를 제출해 그 공(功)을 인정받았다. 이후 미군 극동사령부 직할 특수첩보부대 중 하나인 호염부대로 소속을 전환해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3년 7월 평북 철산군 근해의 순도라는 섬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미군 소속 전환’ 이유로 전사 처리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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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금토동 충혼탑, 특수임무수행 중 전사한 호국 영령들의 위패. 위에서 다섯 번째 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에 도종순씨의 이름이 있다. 그 아래 까만 테이프가 붙은 다른 이름들이 보인다. 사진=도용영 |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 제2호에 따르면 ‘군 첩보부대’란 대한민국의 국군이 특별한 내용, 형태의 정보 수집 등을 목적으로 창설해 운용한 부대를 말하며, 외국 군에 소속됐거나 군 첩보부대의 창설 이전에 구성돼 유격전 등에 종사한 부대는 제외한다.
2012년 6월 18일. 정보사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서신을 도씨에게 보냈다. ‘도종순’의 이름에 검은 테이프가 붙은 건 그 직후다.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누님은 이미 팀을 이룬 우리 군 소속이었어요. 미군에게 작전 수행 지시를 받았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정보사는 미군으로 소속이 ‘전환’됐다고 판단했어요.”
도씨는 정보사에 누이의 심의 관련 자료를 정보공개 청구했다. 심의 자료와 미군 소속으로 전환된 근거, 미군 소속 당시 전사확인서 또는 전사자 명부, 그리고 민원인의 탄원서와 이의 제기서 및 답변 내용이었다. 정보사는 이에 심의 자료는 비공개, 나머지 청구 사항에 대해서는 ‘정보 부존재’를 통보했다.
“미군 부대로 소속이 전환됐다고 봤지만, 그 기록은 없는 겁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이사만 가더라도 전입신고를 하는데, 한국군이 미군으로 전환했는데, 그 기록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잔류 업무 마치고 철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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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2월 국군정보사령부에서 보낸 도종순씨의 전사확인서. 사진=도용영 |
“1951년 1·4 후퇴 이후 서울 및 지방에서 여성 공작원 20여 명을 모집했다. 대구에서 최초 특수 교육을 받고 강화도로 집결해 남자 대원들과 팀을 구성해 북한 침투 및 첩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연락대장 외 남성 4명, 여성 2명이 평북 철산 지역에 투입됐다. 중공군의 반격이 개시된 시점이었다. 우리는 한국군의 유격대와 긴밀하게 연락하고, 적의 동태와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는 장비와 식량이 너무 열악했다. 신의주 부근인 평북 철산 지역을 대상으로 침투 대기 지점인 ‘회도(호염도)’에서 치열한 적과의 교전으로 인해 다수 요원이 전사했다. 더 이상 임무 수행이 어려웠고 상황이 급박해지자 철수 결정이 내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연락조원 안내하에 서울로 무사히 귀환하게 됐다. 그러나 도종순은 연락대장과 함께 잔류 임무를 마치고 철수한다고 했다.
60년이 지난 시점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호염도라는 섬을 당시 임무 수행할 장비와 식량을 은신한 거점으로 사용한 사실은 있다. 그러나 당시 KLO와 우리 HID 소속 대원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었으며, 특히 합류하거나 파견된 사실은 더더욱 없다. KLO는 HID보다 더 열악한 사정이었는데 HID 소속이 왜 KLO와 합류해 활동하겠느냐.”
권익위, 정보사에 재심사 의견
도씨는 올해 국민권익위원회에 이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민원을 넣었다. 그는 “정보사에서는 늘 같은 입장만 되풀이해서 다른 방법을 모색한 것”이라고 했다. 권익위는 지난 5월 22일 도씨의 고충민원을 받아들였다. “도종순씨의 소속이 미군으로 전환됐다고 하지만 한국군을 탈퇴해 미군으로 재입대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사 처리를 취소한 정보사에 전사 여부를 재심사하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김태규 권익위 부위원장(고충처리위원장)은 “여성의 몸이라 굳이 최전선에 나갈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마다하지 않고 나서 젊음을 만끽하지도 못하고 사지(死地)를 넘나들다 21세의 나이에 전사했다”면서 “그런데 70여 년이나 지나 먹고살 만해진 나라가 규정을 예리하게 적용하면서 전사 처리 여부를 따져 불이익을 준다는 건 참으로 야속한 일”이라고 했다.
권익위 의결 이후인 지난 6월 6일. 도씨는 충혼탑을 다시 찾았다. 검은 테이프는 떨어져 있었다. 그는 “이제라도 누님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정보사의 재심사 결과가 남아 있다. 도씨는 정보사를 상대로 행정심판도 진행 중이다. 그는 “6남매 중 형님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아흔 다 된 둘째 누님과 둘이서 이 문제를 해결 중”이라면서 “누님도 연로하셔서 사실상 명예회복을 해드릴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했다.
“올해 현충일, 누님 이름 석 자를 다시 보게 되자, 그제야 위패 위 검은 테이프가 붙어 있는 다른 희생자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아직도 많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새겨진 이름들을 무슨 연유로 다시 지운 것일까요. 제 짧은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건 두 번 죽이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에는 나라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여러 호국 영령이 있습니다. 모쪼록 이 일을 계기로 누님처럼 명예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