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野圈)의 대선 주자로 주목받고 있는 최재형(崔在亨) 전 감사원장의 부친인 최영섭(崔英燮) 예비역 해군 대령이 지난 7월 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고인은 1928년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평강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최병규·1909~2008)는 1926년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등학교) 재학 시절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 공로로 2002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고인은 1947년 가족과 함께 월남(越南)한 후 해군사관학교(3기)에 입학, 1950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6·25동란 발발 다음 날인 6월 26일에는 백두산함(PC-701함)의 갑판사관으로, 부산에 상륙하려던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을 태운 선박을 격침시킨 대한해협 해전(海戰)에 참전했다. 백두산함은 해군 장병들이 월급의 10%를 갹출하고, 해군 장병 부인들이 삯바느질을 해서 마련한 돈으로 구입한 군함으로, 당시 우리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함이었다. 항도(港都) 부산,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한해협 해전에서의 승리 덕분이었다. 고인은 이후에도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해 전쟁 중 한국 해군이 수행한 주요 작전에 모두 참가했다.
고인은 5·16군사혁명 이후인 1962년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 총무비서관으로 근무했다. 그해 10월 박정희(朴正熙) 의장의 울릉도 방문 시에는 바다에 빠진 박 의장을 구해내기도 했다. 1963년 민정(民政) 이양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으나, “각하, 저는 한강을 건너온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거절하고 해군으로 복귀했다.
구축함 충무함(DD-91함) 함장으로 있던 1965년 3월에는 동해안으로 침투하는 북한 간첩선을 나포, 간첩 8명을 사로잡았다. 군에서의 마지막 보직은 해군사관학교 부교장 겸 생도대장이었다. 당시 그의 훈육을 받은 해군 장교들은 아직까지도 그를 ‘참군인’으로 존경하고 있다. 1967년 장성 진급에 탈락하자 해군참모총장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인은 대령까지만 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전역(轉役)했다.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광복장·천수장)을 각각 두 차례 받았다.
이후 국영기업인 한국냉장주식회사 영업이사를 비롯해 공·사기업의 임원을 지냈고, 한때 개인사업을 하기도 했다. 1994년부터는 한국해양소년단 고문으로 학생과 교사들에게 해양사상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말년에는 대한해협 전투 등 6·25 당시 해군이 수행한 작전들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특히 대한해협 전투에서 전사한 김창학·전병익 중사의 유가족들을 찾아 그들의 장렬한 최후를 전하고, 두 사람의 모교 등지에 흉상을 건립하도록 했다. 《6·25 바다의 전우들》 《민족성지 고하도》 등의 책도 냈다. 군 복무 시에는 해군 장병들의 애창군가 ‘구축함의 세일러’의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월간조선》은 2000년대 초부터 백두산함이나 고인의 활동에 대한 기사를 여러 번 실었다. 기자도 백두산함에 대한 짧은 기사를 쓴 것이 인연이 되어 고인을 알게 되었다. 종종 안부 전화를 드리면 고인은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90년을 써먹은 몸이라 여기저기 다 고장 났어. 이제 죽을 때가 된 거지”라고 하다가 이내 “그런데 배 기자, 이거 나라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요?”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통화를 마칠 때면 “배 기자, 이 나라를 꼭 지켜줘!”라고 당부했다. 연말이면 지인(知人)들에게 나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연하장을 보냈다.
고인은 정옥경씨와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둘째 아들이다. 최 전 원장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고인을 꼽았다. 2017년 최 전 원장이 문재인 정부로부터 감사원장직을 제안받고 고민 끝에 수락하자 고인은 ‘단기출진 불면고전 천우신조 탕정구국(單騎出陣 不免苦戰 天佑神助 蕩定救國)’이라는 글을 써주며 아들을 격려했다. ‘홀로 진지를 박차고 나가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근래 최재형 전 원장이 정치 참여 결심을 굳히면서 다시 회자(膾炙)되고 있다.
최재형 전 원장이 금년 들어 정치 참여 의사를 밝히자 고인은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그 착한 아이가 어떻게 험한 정치를 하겠느냐?”며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식을 잃기 전 그가 최 전 원장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육필 메시지는 “대한민국을 밝혀라”였다.⊙
고인은 1928년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평강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최병규·1909~2008)는 1926년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등학교) 재학 시절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 공로로 2002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고인은 1947년 가족과 함께 월남(越南)한 후 해군사관학교(3기)에 입학, 1950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6·25동란 발발 다음 날인 6월 26일에는 백두산함(PC-701함)의 갑판사관으로, 부산에 상륙하려던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을 태운 선박을 격침시킨 대한해협 해전(海戰)에 참전했다. 백두산함은 해군 장병들이 월급의 10%를 갹출하고, 해군 장병 부인들이 삯바느질을 해서 마련한 돈으로 구입한 군함으로, 당시 우리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함이었다. 항도(港都) 부산,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한해협 해전에서의 승리 덕분이었다. 고인은 이후에도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해 전쟁 중 한국 해군이 수행한 주요 작전에 모두 참가했다.
고인은 5·16군사혁명 이후인 1962년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 총무비서관으로 근무했다. 그해 10월 박정희(朴正熙) 의장의 울릉도 방문 시에는 바다에 빠진 박 의장을 구해내기도 했다. 1963년 민정(民政) 이양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으나, “각하, 저는 한강을 건너온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거절하고 해군으로 복귀했다.
구축함 충무함(DD-91함) 함장으로 있던 1965년 3월에는 동해안으로 침투하는 북한 간첩선을 나포, 간첩 8명을 사로잡았다. 군에서의 마지막 보직은 해군사관학교 부교장 겸 생도대장이었다. 당시 그의 훈육을 받은 해군 장교들은 아직까지도 그를 ‘참군인’으로 존경하고 있다. 1967년 장성 진급에 탈락하자 해군참모총장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인은 대령까지만 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전역(轉役)했다.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광복장·천수장)을 각각 두 차례 받았다.
이후 국영기업인 한국냉장주식회사 영업이사를 비롯해 공·사기업의 임원을 지냈고, 한때 개인사업을 하기도 했다. 1994년부터는 한국해양소년단 고문으로 학생과 교사들에게 해양사상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말년에는 대한해협 전투 등 6·25 당시 해군이 수행한 작전들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특히 대한해협 전투에서 전사한 김창학·전병익 중사의 유가족들을 찾아 그들의 장렬한 최후를 전하고, 두 사람의 모교 등지에 흉상을 건립하도록 했다. 《6·25 바다의 전우들》 《민족성지 고하도》 등의 책도 냈다. 군 복무 시에는 해군 장병들의 애창군가 ‘구축함의 세일러’의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월간조선》은 2000년대 초부터 백두산함이나 고인의 활동에 대한 기사를 여러 번 실었다. 기자도 백두산함에 대한 짧은 기사를 쓴 것이 인연이 되어 고인을 알게 되었다. 종종 안부 전화를 드리면 고인은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90년을 써먹은 몸이라 여기저기 다 고장 났어. 이제 죽을 때가 된 거지”라고 하다가 이내 “그런데 배 기자, 이거 나라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요?”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통화를 마칠 때면 “배 기자, 이 나라를 꼭 지켜줘!”라고 당부했다. 연말이면 지인(知人)들에게 나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연하장을 보냈다.
고인은 정옥경씨와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둘째 아들이다. 최 전 원장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고인을 꼽았다. 2017년 최 전 원장이 문재인 정부로부터 감사원장직을 제안받고 고민 끝에 수락하자 고인은 ‘단기출진 불면고전 천우신조 탕정구국(單騎出陣 不免苦戰 天佑神助 蕩定救國)’이라는 글을 써주며 아들을 격려했다. ‘홀로 진지를 박차고 나가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근래 최재형 전 원장이 정치 참여 결심을 굳히면서 다시 회자(膾炙)되고 있다.
최재형 전 원장이 금년 들어 정치 참여 의사를 밝히자 고인은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그 착한 아이가 어떻게 험한 정치를 하겠느냐?”며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식을 잃기 전 그가 최 전 원장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육필 메시지는 “대한민국을 밝혀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