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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史 증언

美中 ‘화웨이 분쟁’에 소환된 ‘상감령 전투’

치열한 고지쟁탈전… 엄청난 희생, 국군 2사단의 승리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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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유엔군)은 백마고지를 빼앗길 것 같으니까, 중공군 전투력을 분산시키면서 저격능선을 확보할 생각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지. 그러나 중공군은 유엔군이 오성산을 빼앗으려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했어요”

‌⊙ 중국의 입맛대로 역사 해석… 상감령 전투, 강원도 화천의 ‘破虜湖’ 명칭 변경 요구, 영화 〈안시성〉 항의
⊙ “TNT 15kg 삼각고지 중공군 땅굴 폭파… 100여 명 몰살시켜”(이상옥 당시 소위)
⊙ “수류탄 80발을 차례로 던졌죠. 7부 능선까지 올라오던 중공군들이 와르르 뒤로 밀려나게 되었어요. 간혹 중공군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죠.”(문관혁 당시 소위)
⊙ “지금 가보면 백마고지엔 아름드리 나무가 자랐지만, 저격 능선엔 나무가 없어”
강원도 화천에서 바라본 DMZ 지역의 북한의 오성산과 그 아래 저격능선이 군데군데 구름 그림자로 그늘이 져 장엄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미국과 무역전쟁 중인 중국이 최근 6·25전쟁을 언급하며 미국과의 항쟁의지를 다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국영방송 CCTV를 통해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를 미화한 다큐멘터리 〈빙혈(冰血) 장진호〉, 철의 삼각고지 전투를 다룬 영화 〈상감령(上甘嶺)〉 등을 방영했다.
 
  중국 정부는 특히 상감령 전투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즉 6·25를 승리로 이끈 전투라고 자화자찬해왔다. 미국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의 런정페이(任正非)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내년에 우수한 인재들이 배출되면 그들을 이끌고 상감령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지난 5월 26일 CCTV 대담)
 
중국 영화 〈상감령〉 포스터. 중국에서 1956년 제작된 영화다.
  미·중 간 화웨이 분쟁에 상감령이 소환되는 게 우리나라로선 불쾌하다. 또 얼마 전 중국은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가 담긴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한 호수 ‘파로호(破虜湖)’의 명칭 변경을 요구해 논란이 일고 있다. 파로호는 6·25 당시 중공군에 승전한 것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지은 이름이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도 주중대사 시절 이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파로호 외에도 영화 〈안시성〉을 두고 중국 측이 “우리 영웅(당 태종)을 비하한다”고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구려 장군 양만춘이 당 태종을 물리친 전투를 담은 영화가 불편했던 것이다.
 
  상감령 전투와 파로호, 영화 〈안시성〉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자기 입맛대로 역사 해석이 드세다. 우리 민족의 승전기록까지 바꾸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르겠다.
 
  기자는 휴전을 한 해 앞둔 1952년 10월에서 11월 사이 벌어진 치열한 고지쟁탈전인 상감령 전투의 흔적을 더듬어보았다.
 
  우리 전사(戰史)에서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42일간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에서 일어난 전투를 ‘저격능선’ ‘삼각고지 전투’라고 명명한다. 반면 중국은 저격능선과 삼각고지 사이에 있던 고개 이름을 따와 상감령 전투라고 부른다. 상감령 밑에 하감령이라는 고개도 있다.
 
 
  상감령 전투, 저격능선 전투, 삼각고지 전투…
 
이상옥 예비역 중령.
  먼저 우리 국군이 상감령이란 재 이름 대신 저격능선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51년 10월부터라고 한다. 당시 미 제25사단은 김화 지역에 진출하여 중공군 제26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능선에 자리 잡은 중공군이 미군 병사를 그야말로 ‘저격’해 피해가 상당했다. 미군은 그 고지를 ‘스나이퍼 리지(Sniper Ridge)’라 부르며 치를 떨었다. 저격능선은 민통선 내 철원군 북방의 근동면 하소리에 위치한 매봉 위쪽의 ‘A고지’와 그 오른쪽의 ‘돌바위고지’, 그리고 북쪽의 ‘Y고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면 삼각고지는 저격능선 바로 왼쪽의 해발 598m 능선을 말한다.
 
  기자가 만난 이상옥(李相玉) 예비역 중령은 삼각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1931년생인 그는 경남 의령이 고향이다. 유년 시절 일본에서 자랐고, 경남 진주의 진주중을 졸업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입대해 국군 제8사단에서 복무하다 6·25가 한창인 1952년 육군보병학교 갑종장교 25기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은 그해 8월 26일. 두 달도 채 안 돼 이른바 삼각고지 전투, 혹은 상감령 전투에 참전했다.
 
 
  ‘42일간의 전투’
 
삼각고지 전투에서 발생한 부상병을 호송하는 모습이다. 사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사》에는 ‘42일간의 싸움’으로 기록돼 있다. ‘42일간 미 제9사단 소속의 국군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이 김화 북방 7km 지점에 위치한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에서 중공군 제15군단과 공방전을 벌인 전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햇병아리 이상옥 소위는 6·25전쟁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에 첫 지휘관으로 참전한 셈이다.
 
  이 소위의 증언을 본격적으로 듣기에 앞서 국군 제2사단의 위치를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2사단은 하감령(상감령 아래)에서 동북쪽으로 하소리에 이르는 주(主)저항선에서 오성산(해발 1062m)을 확보하고 있던 중공군 제15군단의 제45사단과 대치 중이었다. 또 2사단의 왼쪽에는 미 제7사단이 철원평야 동쪽에서 김화 북쪽 하감령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무렵 중공군 제45사단은 오성산에서 김화로 뻗어 내린 능선상의 고지군에 전초진지를 설치하고 있었다. 당시 중공군의 전초진지는 국군 2사단과 미 7사단의 전초와 불과 200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특이점이라면 중공군이 엄청난 지하갱도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땅굴’을 말한다.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은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250여km에 걸쳐 땅굴을 거점으로 한 지하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하나의 진지는 20~30km의 종심(縱深)을 가진 거대한 거미집과 같았다고 한다.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은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250여km에 걸쳐 땅굴을 거점으로 한 지하진지를 구축했다. 사진은 중공군의 땅굴도서관.
  1952년 10월 14일 국군 제2사단 31연대 2대대 5중대 2소대장으로 삼각고지 전투에 참전한 이상옥씨의 회고다.
 
  “갑종장교 25기 발령을 받고 31연대에 신임 소위 12명이 갔어요. 나도 12명 중 한 명이었어. 2사단에서는 우리를 바로 전쟁터로 보내지 않았어. 왜냐? 배치하면 바로 죽으니까. 사단장이 목숨을 아끼려고(지켜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당시 2사단장은 정일권(丁一權)이었다. 훗날 국무총리(1964~1970)와 국회의장(1973~1978)을 역임했다.
 
  “정일권 장군은 신임 소위들에게 낮에는 국군 진지를 둘러보고 오라고 시켰어. 그러고 나서 소감을 물었고, 우리는 보병학교 전술학 시간에 배운 대로 이야기했지. 정 장군은 이야기를 듣고서 ‘(내일) 너희가 가서 고쳐주고 오라’고 지시했어요.
 
  그러나 전시상황이 급해지니까 배치하더군. 철원평야를 가본 적이 있나요? 철원평야가 무지 넓어요. 김일성이 중공군에게 철원 땅만은 지켜달라고 부탁했을 만큼 곡창지대야. 북한에 그만한 곡창지대가 없어요.”
 
우리 戰史에 언급된 최후 승자는?
 
 
“저격능선 전투에서 국군 제2사단이 승리함으로써…”

 
  이른바 상감령 전투는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국군 2사단과 미 7사단이 저격능선과 삼각고지를 공격하면서부터 미 7사단이 삼각고지에서 철수하게 된 10월 25일까지다.
 
  2단계는 2사단이 삼각고지를 인수하여 양 고지에서 전투를 수행한 10월 25일부터 11월 5일까지, 3단계는 저격능선 전투가 종료되는 11월 24일까지다.
 
  이 42일간의 치열한 고지쟁탈전은 결국 어느 편에도 일방적인 승리를 안겨주지 못했지만 우리 전사는 이 전투를 한국군의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사(총 11권)》 10권(휴전협상 고착과 고지쟁탈전 격화)에 이렇게 써 있다.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진행된 저격능선 전투에서 국군 제2사단이 승리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유리한 전초진지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군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전 전선에 걸쳐 작전의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전투는 유엔군 측이 휴전회담을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p.444)
 
  42일간의 저격능선 전투에서 중공군은 사살 3772명, 추정사살 1만1023명, 포로 72명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유엔군의 우세한 화력에도 아군 역시 국군 제2사단이 그동안의 반격작전에서 전사 1096명, 부상 3496명, 실종 97명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반면 중국은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의 모든 삼각고지 전투와 저격능선 전투를 상감령 전투라고 칭하며 ‘한국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미화한다.
 
  제인러셀 고지
 
42일간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벌였던 삼각고지(왼쪽)와 저격능선.
  철원 땅 위쪽이 삼각고지다. 삼각고지는 저격능선에서 서쪽으로 도상 2km에 위치한 해발 598m 고지를 가리킨다. 고지가 역삼각형 모양이었다. 이 고지를 중심으로 북동쪽에 제인러셀 고지(Jane Russell Hill), 북서쪽에 파이크스 봉(Pikes Peak), 남동에 샌디 능선(Sandy Ridge)이 있었다.
 
  “삼각고지 옆에 당시 미국 유명 여배우 제인 러셀의 가슴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인 제인러셀 고지에 미 7사단 소속 2개 소대가 있었어요. 이들은 낮에는 공격하고 밤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쉬었는데, 어느 날 심야에 중공군이 기습해 2개 소대 미군 80명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지. 그 고지는 철원평야를 지키는 요지였으니 대단히 중요했어요.”
 
  당시 삼각고지를 두고 아군과 적군이 서로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미군 병사 80명이 사망하자 국군 2사단이 삼각고지를 인수하게 되었어요. 흑인 병사 2명에게서 기관총과 실탄, 엄청난 양의 수류탄을 인계해 43명의 부대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어. 또 가슴 높이의 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어요.”
 
  그에 따르면 미군이 놓고 간 기관총 1정과 소대 보유 기관총 2정, 그리고 자동소총 3정을 약 70m 거리로 이격시켜 놓았다. 실탄을 아끼기 위해 아군 주둔지 전방 50~100m에서만 사격하도록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무렵 국군이 삼각고지 꼭대기에 자리 잡았고 중공군은 고지 8부 능선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었다.
 
 
 
중공군 땅굴에 특공대 투입했다 몰살당해

 
  철원에 큰 못이 있어 아침마다 안개가 짙게 끼었다.
 
  “안개를 이용해 우리 진지에서 밑으로 150m쯤 내려가 적의 움직임을 살폈어요. 적의 입장에서 약점을 찾으려고…. 그때 안개 속에서 소리가 나는데 중공군 셋이 식수를 들고 올라오는 소리야. 안개가 꽉 끼어서 앞이 안 보여.
 
  제일 앞선 자를 향해 ‘추항!’이라 외쳤지. ‘투항하라’는 말이야. 뒤따르던 중공군 병사 둘이 도망치기에 쏴 죽였어요. 생포한 중공군을 조사하니 군관이더군요. 군관은 국군으로 치면 장교야. 그가 보자기를 풀더니 미숫가루를 줘. 안 먹었지.
 
  그때 우리 소대에 중국 팔로군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하다 입대한 선임하사가 있었어. 이름이 이용남. 그를 통해 중국말로 심문하니 ‘삼각고지 8부 능선의 땅굴 속에 1개 중대(100여 명)가 있다’는 겁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2사단 연대본부에서 장교 1명과 사병 9명으로 편성된 특공부대를 투입하였으나 땅굴 속에서 전원 몰살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소위는 삼각고지 땅굴에 대한 공격 계획을 혼자 세웠다.
 
 
  혼자서 TNT 15kg을 지고…
 
  “우리 소대가 위치한 곳에 땅굴이 있으니 내가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보병학교에서 배운 대로 땅굴 폭파에 필요한 TNT를 계산하니까 5~7kg 정도면 되겠더라고. 그런데 연대에서 무려 15kg을 보내왔어.
 
  그 무거운 것을 나 혼자 들고 갈 수도 없고 해서 소대원 한 명이랑 7kg씩 나눠 짊어지고 우리 진지에서 내려와 중공군 땅굴 입구로 갔어.”
 
  사전(事前) 관찰에 따르면 땅굴 입구는 기관총으로 화망(火網)이 구성돼 있었다고 한다. ‘이 기관총을 무력화(無力化)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군은 미군과 달리 진지 구축을 위한 호 파기 공사를 많이 해서 중공군 땅굴 쪽으로 토사와 바위 등을 많이 흘려보냈다. 그때마다 중공군이 기관총 사격을 해왔다. 그러나 호 파기 공사 때문인 것을 알고 이후 토사가 내려와도 기관총을 쏘지 않았다.
 
  “중공군을 속이려고 이틀 동안 계속 진지 공사를 하는 척했어요. 흙이랑 바위를 그네들 땅굴 쪽으로 흘려보낸 거지. 기관총 사격을 안 하는 틈을 이용해 땅굴 입구까지 접근하게 되었어요.”
 
  막상 입구에 도착하니 중공군 보초병이 곤히 자고 있었다. 동행한 소대원에게 대검을 주며 “지키고 있으라”고 명했다. “만약 깨면 총은 절대 쏘지 마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곤 혼자서 TNT 15kg을 지고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말이다.
 
  “굴속 냄새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 속에서 똥 싸고 오줌 싸고, 송장도 동굴 안에 있지…. 냄새가… 정말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어. 그때 방독면을 가져갔는데 갑종 동기생인 진찬호 소위가 동굴작전을 한다니까 어렵게 구해줬던 방독면이야. 고마움을 지금도 못 잊어.”
 
 
  “TNT 폭발로 산 지형 바뀌어”
 
  “땅굴 높이는 120cm, 좌우폭은 60cm 정도였다”고 한다. 한 5~6m 안으로 들어가니 땅굴이 좌우 두 갈래로 갈라졌다. TNT 두 뭉치에 기폭 장치를 한 후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입구로 돌아오니 아직도 보초병이 자고 있었다.
 
  “지독한 냄새를 맡다가 지상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깊은 잠에 빠진 것이지. 그 ‘꿀잠’이 고맙게도 우리 작전을 도왔던 거야.”
 
  보초병을 그냥 두고 진지로 되돌아오는데 이상하게도 폭발음이 들리지 않았다. 이상옥 소위는 속으로 ‘아이고, 실패구나. 두 번 하라면 못 할 것 같은데…’ 하며 낙담했다. 순간, 꽝 하는 소리가 났다.
 
  온 땅이 흔들리고 큰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이 폭발로 산 정상의 지형이 조금 바뀌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적 사상자 수는 세어보지 못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공격로에 적의 사체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어요. 당시 동굴에는 적 1개 중대 100여 명이 있다는 진술을 제가 생포한 중공군 장교에게 들었습니다.”
 
  그는 “실제로는 150명이 더 됐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최소 100명, 최대 150명 이상이 땅굴이 무너져 죽었을 것이란 얘기다.
 
  그날 저녁 화가 난 중공군은 엄청난 병력으로 2소대를 공격해왔다. 하지만 적의 공격로는 급경사로 방어에 유리했다고 한다.
 
 
  43명의 소대원 중 7명만 생존
 
  “저녁 8시부터 다음 날까지 네 차례에 걸쳐 어마어마한 양의 포탄이 날아왔어. 그래도 호를 많이 파서 숨을 수 있었지. 낮에는 아군이 공중폭격을 하니까 못 오지만 밤이 되니 (중공군이) 올라오는데 그 수를 세지 못해요. 무지무지하게 올라와. 미군에게서 인계한 실탄과 수류탄으로 방어했어요. 삼천포 뱃사람 출신인 기관총 사수가,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외국 전쟁영화에서나 봤던 ‘서서 쏴’를 하다가 전사했죠.
 
  소대장이니까 보통 부대원이 전사하거나 다치면 바로 보고를 받아요. 그날 전투에 임하며 부대원에게 ‘다쳐도, 죽어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어요. 후송하려면 최소 3명은 있어야 하는데 그럼 어떻게 싸웁니까.”
 
  이튿날 새벽 생존자를 확인하니 43명의 대원 중 7명이 생존했고, 나머지 병사는 모두 전사했다.
 
  “이 작전은 상급부대의 계획이나 지도(指導)가 없었어요. 오직 나 혼자 생각과 소대원들의 생사를 같이한 용전분투가 만들어낸 결과야. 그러나 (훗날) 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마치 자신이 계획입안자, 작전지휘자, 작전유공자인 양 자처하고 수훈 신청을 했어요. 부하들의 공을 가로채는 상관의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지.”
 
  이 전투로 이상옥 소위는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휴전 이후 그는 군수사 부산지역 경비대대장, 군수사 종합교육대장, 2군 산하 동해안경비대대장, 서울교육대학 학군단장을 지냈다. 그리고 1977년 4월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다.
 
  지난 2000년 5월 어느 날, 육군본부에서 그에게 공식 서한이 왔다고 한다. 당시 진상을 파악하려 하니 육본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수차례 전화도 왔지만, 완곡히 거절했다. 미 태평양지구사령부 육군 대령이 집을 찾겠다는 요청이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거부했다.
 
  “이미 상훈은 끝났고, 당시 상관들이 모두 작고한 상태여서 진상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아서였어요.”
 
  ― 그때 살아남은 7명은 이후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합니다.
 
  “농사짓고 살았겠지. 이후 따로 만난 적은 없어요. 그냥 소식만 들었어. 모두 구차하게 살아서…. 한번은 병원에서 부대원을 만났는데 형편이 딱해서 내 주머니를 털어서 줬어요.
 
  생존자 7명 중 나 빼고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작전 일주일 전에 공격연습
 
문관혁 예비역 대령.
  경기도 광명에서 만난 문관혁(文官赫·87) 예비역 대령도 갑종장교 25기 출신이다. 고향은 평안남도 성천. 1950년 10월 19일 북진하던 보병 8사단이 성천에 입성하자 현지 입대했다. 사병으로 평남 영원, 황해도 토산, 강원도 횡성, 양구 백석산 전투, 지리산 공비토벌 등 많은 전투에 참전하다가 갑종 25기 소위로 임관, 2사단 32연대 3대대 11중대 2소대장으로 저격능선 전투에 뛰어들었다.
 
  “저격능선 전투가 1952년 10월 14일 새벽 5시에 시작됐지만, 공격명령은 일주일 전에 내려왔어요. 그때는 저격능선이란 말이 없었고, 공격부대도 정해지지 않았으며, 공격날짜도 극비였는데, 단지 공격명령만 내려왔죠.”
 
  당시 소대장 대부분이 전투경험이 없었다. 갑작스런 공격명령에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내가 저격능선 공격 예행연습 교관으로 임명되었어요. 연대 작전과장(변일현 대위), 대대 정보장교와 같이 저격능선과 유사한 지형을 선정했죠. 거기다 적 진지를 그대로 만들라고 하더군요. 비슷한 지형을 찾아 닷새간 공격연습을 했습니다.
 
  나중에 정일권 사단장이 (공격연습을) 검사하는데 불합격을 했어요. 불합격이라기보다 긴장감도 불러일으키고 연습을 더 하라는 의미였죠. 그러고 나서 10월 13일 진짜 공격명령이 하달됐는데 D데이는 이튿날(14일) 새벽 5시였습니다.”
 
  당시 공격은 32연대 9중대가 저격능선 오른쪽, 10중대가 왼쪽, 문관혁 소위가 있던 11중대는 뒤에서 예비공격 대형으로 공격에 나섰다.
 
  “그날(14일) 오전 11시쯤 대대 OP(작전지휘소)로 올라갔더니 고급장교들이 9중대와 10중대 공격 상황을 지켜보고 있더군요. 저격능선 A고지를 거의 8부 능선까지 올라붙었어. 그런데 중공군이 갑자기 강력한 저항을 해요. 2시간쯤 지나니 2개 중대(9중대와 10중대)가 전멸한 상황이 됐어요. 적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싸우니까 아군 쪽 피해가 컸던 거지.”
 
  상황이 그렇게 되자 11중대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문관혁 소위도 소대원을 이끌고 고지로 달려갔다. 자동화기 사격과 수류탄에 의한 저항이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7부 능선까진 무난히 올라갔다고 한다.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전진하려는데 전방과 오른쪽에서 총탄이 쏟아지고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이 폭풍 퍼붓듯이 날아오는 겁니다. 나는 3.5인치(8.9cm) 로켓포 사수에게 적의 자동화기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는데, 우리 사수가 총에 맞아 푹 쓰러지는 거야. (내가) 직접 로켓포를 메고 적 화기진지를 조준해 발사했지. 명중했는지 먼지가 일더니 가격이 멈췄어요. 이때다 싶어 ‘돌격하라’고 소리 질렀죠.”
 
 
  쇠사슬에 다리 묶인 적 기관총 사수
 
땅굴 안에서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중공군.
  A고지 7부 능선에서 적 진지까지는 100m 거리였다. 세 차례에 걸쳐 돌격을 감행한 후 그날 오후 5시쯤 점령했다고 한다.
 
  “A고지에 올라가니 10중대장인 홍경태 대위가 609무전기로 계속 대대장을 호출하고 있는 겁니다. 온몸이 피투성이야. 중대원들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은 거지. 반가워서 ‘중대장님!’ 하고 외치니까 ‘야! 이 고지는 내가 점령했어’라고 몇 번이고 말하는 겁니다. 나는 ‘예, 알았습니다’ 했어요.”
 
  문 소위가 A고지 위쪽의 Y고지 방향으로 전진하는데 바로 10m 전방 땅굴에서 적의 자동화기 사격이 다시 작열했다. 뒤따르던 소대원에게 수류탄을 던지라고 소리쳤는데, 웬일인지 그 병사는 적의 땅굴 방향으로 뛰어가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바로 그때 적의 박격포탄이 그야말로 비 오듯이 떨어졌다. 3~4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그때 분대장(한양구 이등중사)이 2.5파운드(1.1kg)짜리 폭약에 뇌관을 꽂아 도폭선에 불을 붙여 던졌어.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명중시킬 수 있었어요. 폭약이 터진 후 땅굴에 가보니 체코식 기관총 사수의 다리에 쇠사슬이 묶여 있었죠. 그날 소대원 30명 데리고 공격했는데 저를 포함해 8명만 살아남았어요. 명복을 빕니다.”
 
  문 소위의 2소대는 A고지 인근 돌바위 능선(고지)과 Y고지가 갈라지는 지점의 작은 돌출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형이 암석이어서 호 파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밤 8시쯤 되었다. 무전기로 중대본부를 불렀는데 응답이 없었다. 통신병에게 전화선이 단절되었는지 알아보라고 하니까 10분 후에 헐레벌떡 뛰어와서 하는 말이 “중공군이 뒷 능선(A고지와 돌바위 능선 사이의 이어진 능선)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적과 눈 마주치면 총 못 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적이 역습해 낙오된 것이야. 아군 중대는 벌써 철수했고. 다행히 캄캄한 밤이라 우리 존재를 중공군이 모르고 있었어요. 이튿날(15일) 새벽 2시가 되니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전투 중 명령 없이 철수하면 총살입니다. 생각이 복잡해졌어요. 총살을 당하느냐, 결사항전을 하느냐…. 가만히 생각해보니 통신이 두절돼 내가 철수 명령을 못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명령 불복종으로 총살당하는 한이 있어도 소대원은 살려야겠다고 생각해서 분대장 2명을 조용히 불렀어요. ‘총소리가 나면 각자 무기를 들고 어제 아침 우리가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던 골짜기로 철수해서 집결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소대원 8명이 후다닥 진지를 박차고 초인적인 힘으로 산비탈 500~600m를 뛰어 내려갔어요. 아마 경사가 70~80도는 됐을 겁니다. 사실 호랑이나 맹수가 달려들어도 눈을 마주치면 안 달려든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걸 이용한 겁니다. 적과 눈이 마주치면 총을 못 쏩니다. 머리가 그렇게 빨리 안 돌아가죠.
 
  그렇게 해서 낙오자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저격능선 전투의 첫날을 잊을 수가 없지요.”
 
  문 소위는 이후 저격능선 전투가 끝나는 42일 동안 고지공격과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그 회수는 10여 차례로 기억한다.
 
  “아군과 적군이 고지를 서로 주고받았는데, 낮에는 전투기나 포의 지원을 받아 우리가 공격하면 중공군은 스스로 물러가요. 저녁이 되면 다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새까맣게 올라와. 밤이면 지원 요청을 못 하니 싸워봐야 소용도 없어 물러납니다.”
 
 
  마지막 전투
 
  문 소위는 저격능선 전투 중 11월 24일 전투를 잊을 수 없다. 당시엔 그 전투가 마지막 전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대대장(이재기 소령)이 불러서 갔더니 ‘오늘 저녁은 죽더라도 A고지를 빼앗기지 마라’는 거야. ‘알았습니다’ 하고 말하고 A고지로 올라갔어요.
 
  당시 소대원이 30여 명쯤 됐을 겁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아니나 다를까 중공군 2개 중대가 인해전술로 무질서하게 70~80도 되는 가파른 비탈을 올라와. 중공군은 공격하면서도 시끄러워요.
 
  그런데 중공군 진지에서 낮에 조준해놓은 듯 직사포를 쏟아내 (진지에서 고개를 내밀고) 소총을 쏘기 어려워 수류탄을 던졌어요. 임무를 교대할 때 가져온 수류탄 80발을 차례로 던졌죠. 7부 능선까지 올라오던 중공군들이 와르르 뒤로 밀려나게 되었어요. 간혹 중공군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죠.”
 
  문 소위는 추가로 수류탄 2박스(1박스에 40발)를 지원받아 계속 던졌다고 한다. 그날 중공군은 끝내 A고지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렇게 날이 훤히 샜어. 중공군이 철수했지. 이제 안 올라와. 몇 놈이 죽었는지 모르지.
 
  오전 9시쯤 됐는데 한국군이 올라와요. 우리 소대와 교대하러 오는데 2사단 마크가 아니야. 9사단 마크야. 내 동기생인 9사단 28연대 백성기 소위가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그때 알았어요. 대대장이 왜 그날만은 A고지를 사수하라고 했는지….”
 
  문 소위는 A고지 사수 전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그리고 11월 25일 저격능선 전투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해 12월 중순께 전개된 일부 탐색전을 제외하고 양측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중공군의 오해에서 비롯된 전투
 
  문관혁 예비역 대령은 자신이 경험한 저격능선 전투를 이렇게 평가했다.
 
  “국군(유엔군)은 백마고지를 빼앗길 것 같으니까 중공군 전투력을 분산시키면서 저격능선을 확보할 생각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에요. 그러나 적은 유엔군이 오성산을 빼앗으려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했어요. 오성산은 1069m 고지입니다. 김일성이 왔다고 해서 ‘김일성 고지’로 불렀을 정도예요. 오성산을 잃으면 중공군이 평강 평원에서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해 오성산 앞 상감령(저격능선)을 사수하려 죽기 살기로 싸웠던 겁니다. 사실 그렇게 희생할 가치가 없는 전투였는데….
 
  저격능선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국군(유엔군)이 적 1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시키는 데 든 실탄이 33만 발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효율성만으로 따질 수 없지만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그만큼 치열했어요.
 
  휴전할 때 저격능선과 그 인근의 백마고지는 사막처럼 됐습니다. 지금 가보면 백마고지엔 아름드리 나무가 자랐지만, 저격능선엔 아직도 나무가 없어. 엄청나게 쏟아부은 화약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으나 그 전투가 수면 아래 가라앉은 것은 휴전할 때 우리 땅으로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지금도 위령제를 지냅니다.”
 
 
  전투 전부터 전쟁 기운 감돌아
 

  갑종장교 5기생인 백낙수(白樂洙·88) 예비역 대위는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이다. 공산주의가 싫어 1948년 일가족이 모두 월남했다.
 
  6·25가 발발하자 그해 12월 제2국민역으로 소집을 받았다가 국군 제8사단이 재편성될 무렵인 1951년 3월 대구에서 현지 입대했다.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지리산 공비토벌에도 참전했다.
 
  1951년 11월 12일 갑종장교 제5기로 임관한 후 제2사단 32연대 1중대의 1소대장과 화기소대장으로 소규모 정찰 활동과 방어임무를 수행하다 이듬해 9월 하순 1대대 중화기 중대 박격포(81밀리) 소대장으로 저격능선 전투에 참전하였다.
 
  “1952년 초가을에 접어들자 저격능선에 무척이나 전쟁 기운이 감돌았어요. 나처럼 말단 소대장들도 예측할 정도로 정찰활동과 각종 포의 기점사격, 탄약보충 등이 활발하게 진행됐으니까.
 
  나는 81밀리 소대장으로 저격능선 일대의 적 예상 진지나 화기 진지, 그리고 기동로(機動路)상의 종합적인 사거리표(기점, 화집점, 거리 등)를 작성하며 전투태세를 가다듬었어.”
 
  1952년 10월 14일 저격능선 전투가 시작되자 그가 속한 중화기 중대는 쉴새 없이 포를 쐈다.
 
 
  판초에 쌓인 사체 조각들…
 
1951년 3월 미 제24사단 제19연대 군인이 생포한 중공군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지 수색하는 모습이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그날 밤 9시30분쯤 중공군이 반격해 아군이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때 적의 포 직격탄이 소대 진지에 떨어지면서 포반장 김 중사가 피를 토하며 전사하는 비통함을 감내한 게 첫 시련이었지.
 
  우리가 얼마나 포를 많이 쏘았는지 탄피가 동산을 이루고 포신이 열을 받아 포탄이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부근에 떨어질 정도였어요. 할 수 없이 물통을 옆에 놓고 물을 부어가며 포신을 냉각시켜야 했어. 그러다 보니 땅이 젖어 포판이 땅속으로 들어가 포를 옮겨가며 사격을 했는데, 결국 많은 사격으로 공이가 부러졌어요. 부속품이 바로 보충이 안 돼 나머지 4문으로만 사격해야 했어요.
 
  한편으론 많은 폭음과 섬광으로 고막이 터져 불러도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이 늘어갔어. 눈이 멀어버린 병사도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었어요.”
 
  백 소위는 이튿날인 10월 15일 2사단 제17연대 2대대가 공격할 당시 많은 병사가 전사하자 화기 소대원들이 차출되었다고 한다.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한 당번병부터 차출돼 짐을 꾸리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적의 반격이 주춤하자 박격포 소대는 전투 임무가 아니라 보급품 수집이나 전사자를 후송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어. 당시 판초에 쌓인 사체 조각들…, 군화 속의 발가락들이 참상을 말해주고 있었어요.”
 
  1952년 10월 29일 저격능선 전투 때 날아오는 적 포탄이 OP 부근이나 포진지 주위에 떨어졌다. 다행히 백 소위의 진지에 떨어지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진지에 포탄이 떨어졌다.
 
  “그날 1개 포반 4명이 포와 함께 공중으로 비사(飛死)하면서 전사하게 되었어. 슬픔과 분노가 교차되었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포사격을 위해 달려가던 병사가 적의 저격병에게 총탄을 맞아 ‘어~머~니~’를 외치며 쓰러지던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죠.”
 
 
  “백 소위만 살았군!”
 
  저격능선 전투의 마지막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11월 24일) 백 소위의 32연대가 저격능선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을 확보하느라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중공군도 피해가 컸다.
 
  “갑종 동기생 3명 중 1명(박완섭 소위)이 전사하고 1명(강순형 소위)은 부상으로 후송돼 나 혼자 남게 되었어요. 17연대 동기생 3명도 그날 함께 전사하고 말았어요.”
 
  슬픔을 달래며 제9사단 28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집결지에 도착했다. 부상으로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던 대대장이 다가와 건넨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다.
 
  “백 소위만 살았군!”
 
  백낙수씨는 이 대목에서 숨을 가다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제일선 공격소대들은 가끔 임무를 교대하지만, 보병대대 유일의 81밀리 박격소대는 계속 싸우기만 했어. 중대 단위의 공격전에 가장 효과적으로 근접 지원할 수 있다는 특성상 공격·방어 부대가 바뀌어도 임무교대 없이 계속 전투를 치러낸 박격포 소대장의 긍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즘도 가끔 그때가 생각나면 차를 몰고 김화 와수리(철원군 서면)에서 화천 방향으로 달리다가 말고개에서 천불산 너머로 저격능선의 Y고지를 멀리서 바라봅니다. 영원히 늙지 않은 전우! 그때 그 얼굴! 환하게 웃던 그 모습이 아련하게 보이곤 해요.
 
  오늘도 저 오성산이 얄미울 정도로 위엄을 보이지만 명령 한마디에 죽음을 무릅쓰고 기어오르던 저격능선이었기에 애착도 느껴봅니다.
 
  많은 전우를 앗아간 저격능선과 영령들을 생각하고 위로하기 위해 해마다 6월이 오면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서 차디찬 비석을 쓰다듬으며 ‘백 소위만 살아서 미안하다’를 몇 번씩 되뇝니다.
 
  어느 동기생은 ‘여기에 누워 있는 이놈이 행복한지, 여기 선 우리가 행복한 놈인지 모르겠구나’ 하는 쓴웃음 속에, 많이 변한 조국과 무공훈장 하나, 국가유공자 예우에 만족해야 하는 백발이 성성하게 늙어버린 자신을 투영해봅니다.”
 
  백낙수 소위는 저격능선 전투를 마치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1대대 중화기 중대장(대리), 2대대 교육관, 2대대 6중대장, 제2훈련소 교관과 26연대 중대장, 제26사단 작전처 교육관을 끝으로 1958년 7월 31일 육군 대위로 전역했다. 전역 후 건축설계사로 일했고, 천은건설(주) 대표와 성열산업(주) 대표를 지냈다.
 
 
  “전사자의 80~90%는 신병”
 
(사)6·25 진실알리기본부 사이트(www.koreanwar625.org)가 소개하는 저격능선 전투 당시 사진. 중국은 6·25 당시 상감령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중국 자료는 이 전투에서 중공군 손실 1만1529명(사망은 4838명), 유엔군 손실 2만5498명이라 적어 놓았다. 반면 한국군 자료는 중공군 1만4867명 손실(사망·부상 포함), 국군2사단 손실 4830명으로 적고 있다. 유엔군 자료에서는 중공군 손실 1만9000명, 유엔군 손실 9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직도 못 잊는 장면이 있어요. 병사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면 대개 옷이 깨끗해요. 신병인 것이지. 전사자의 80~90%는 신병이야. 고참병은 요령이 있어 안 죽어. 군대도 요령이 있어야 한다고. 인간의 이성으로 죽음을 대하면 감당 못 해. 당시 이성이 마비되었다고 할까. 죽음을 의식 안 하고… 죽으면 죽었나 보다 그러는 거지. 동료가 죽어도 슬픔을 발산할 겨를이 없었어요.
 
  오랜 시간이 지나서, 문득 전우가 떠올라요. ‘제대하면 광부 노릇이나 하겠다’고 하던 전우가 생각나 오열하는 거지. 그땐 바로 곁에서 고락을 같이한 전우, 친구, 부하들이 죽어도 별 감정이 없었어요. 사생관에 대해 깊은 생각을 못 해. 하게 되면 전투를 못 하니까.
 
  내 생애가 역사인데 체험만 기록한다고 해도 대하소설 한 권은 될 거야. 민족과 나라와 세계사가 다 연결된 6·25 속에서 내가 살았구나, 하고 느껴요. 어떨 때는 감개무량하고… 사실을 왜곡한 전쟁 체험기를 보면 웃기기도 하지.
 
 
  저격능선 전투 그 후
 
  누가 원해서 하는 전쟁인가요? 누가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전쟁인가요? 인간에게 우연히 닥친, 그러나 필연적인, 필사적으로 살아온 인생이 겪은 이야기인 것이지. 말로 다하기 어렵지. 그동안 당시를 회고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으나 다 마다했는데….”
 
  한편 1952년 11월 25일부로 김점곤(金點坤) 준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이 저격능선을 2사단으로부터 인계하게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를 치른 9사단은 저격능선으로 이동하고, 저격능선 전투를 종결지은 2사단은 백마고지로 이동한 셈이다. 국군 2사단 장병들의 투혼이 서린 저격능선의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은 우리 군이 점령하고, Y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전투가 종결됐다. 그러다가 1953년 7월에 전개된 이른바 중공군의 마지막 ‘7·13공세’로 저격능선은 휴전선 북방의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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