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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水爆 실험 그 이후

러시아가 보는 北核

푸틴의 부국강병책, 김정은의 핵·경제 병진노선과 일맥상통

글 : 박종수  경제학박사, 전(前)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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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틴의 세력 확장 정책, 극동지역과 북극까지 포함돼
⊙ “북한은 풀뿌리를 먹는 한이 있어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 스트롱맨 ‘푸틴’ 통해 김정은 통제해야

박종수
1957년생. 서강대 정외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석·박사(경제학) / 러시아 상트페트르부르크국립대 초빙교수,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공사 역임. 현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정책위원, (사)GEPI 소장 / 《러시아와 한국 : 잃어버린 백년의 기억을 찾아》 《21세기 북한과 러시아 : 신화, 비화 그리고 진화》 《북방에서 길을 찾다 : G7통일한국을 향한 신북방정책, 2017》 등 저술
문재인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9월 6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9월 6일 한·러 정상회담에서도 어김없이 지각했다. 그 다음 일정은 보나마나다. 러·일 정상회담은 17분으로 단축됐다. 푸틴의 상습 지각은 불치의 악습인가? 아니면 의도적 전략인가?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창의적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
 
 
  지각왕 푸틴의 야심
 
  푸틴은 현대판 차르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연속 4년간 선정한 세계 영향력 1위의 인물이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후 서방의 제재로 인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푸틴 지지도는 80%의 고공행진을 했다. 서방에서는 관제언론을 동원한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푸틴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왜 그럴까? 러시아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다. 남한 면적의 173배이고 국경선은 총연장 2만km로 15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총 329회의 전쟁을 치렀고 주로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한 편이었다. 제2차 대전 때는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에 의해 900일간 봉쇄당했다. 1일 125g의 빵으로 연명하고 인구 3분의 1를 잃었다. 제2차 대전의 전체 희생자 5000만명 중에서 2600만명이 러시아인이었다. 러시아인들은 빵 한 조각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지만, 대국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은 참지 못한다. 소련해체의 장본인 고르바초프의 우유부단함에 분노했고 술주정뱅이 옐친의 무능에 분통을 터뜨렸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지도자가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그는 법학도의 치밀함과 유도선수의 날쌤과 정보요원의 은밀함을 갖춘 인물이다. 전투기를 타고 체첸 전쟁터로 날아가고 잠수함으로 바닷 속을 유영하며,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팝송을 부르기도 한다. 푸틴은 대통령보다 상위개념인 왕중왕 차르다. 러시아 국민들은 세계 지도자들이 푸틴에게 쩔쩔매는 듯한 모습을 TV 앞에서 지켜보면서 대리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단일 패권국가인 미국 대통령도, 러일전쟁에서 패배를 안겨 준 일본 총리도, 신의 대리인인 로마 교황도 차르 푸틴을 장시간 초조하게 기다린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러시아는 부국강병(rich & strong state)을 지향하지만, 굳이 양자택일을 한다면 ‘부유한 국가’(rich state)보다는 ‘강한 국가’(strong state)를 더 원한다. 푸틴의 지각습관도 이러한 국민정서에 대한 화답일 수 있다. 물론 협상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1998년 한·러 외교마찰 때 프리마코프 외무장관은 회담 시작 전 박정수 외교장관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면서 기선을 제압하던 외교비화가 있다.
 
 
  표트르 대제에 대한 향수
 
푸틴 대통령의 롤모델인 표트르 대제.
  푸틴의 롤모델은 제정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다. 자신이 표트르의 혼을 간직한 페테르부르크 출신임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여러 면에서 두 지도자는 닮았다. 다만 표트르 대제는 203cm 장신이고 푸틴 대통령은 165cm 단신이다. 푸틴은 표트르식 ‘부국강병’을 지향한다. 구 소련권을 다시 결속시키는 데 진력하고 있다.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출범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유럽과의 갈등을 뒤로하고 외교 나침판을 이젠 동방으로 돌린다.
 
  물론 세계경제의 트렌드가 유럽·아메리카에서 유라시아로 옮아가고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표트르 대제가 최서단에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유럽으로 향한 창’으로 삼았듯이, 푸틴은 최동단 블라디보스토크를 ‘아시아로 향한 창’으로 전진기지화한다. 푸틴의 신(新)동방정책은 2012년 집권 3기부터 본격화됐다. 그해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전담 부처인 극동개발부를 신설했다. 2014년부터 매년 9월초 동방경제포럼을 개최하며, 선도개발구역·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법·극동1헥타르법 등 통큰 개발정책으로 국내외 투자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푸틴의 세력 확장은 극동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소리 없이 북방을 향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2007년 전 세계에서 최초로 북극해 대륙붕에 자국의 깃발을 꽂았다. 당연히 인접국들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10년 후인 지난 3월말에 푸틴은 전격적으로 북극을 방문했다. 이는 자원이 풍부한 북극해의 장악력을 키우기 위한 행보였다. 러시아 정부는 북극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재확인하는 프로젝트를 정부의 최상위 추진과제로 설정했고, 유엔에도 영유권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의 대(對) 남북한 정책 그리고 속내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환영 평양시민대회’에 모습을 나타낸 김일성. 뒤편의 소련군 장성들이 김일성 정권이 소련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여 준다.
  소련은 2차대전 말 미국의 끈질긴 권유로 대 일본 전쟁에 참전했다. 예상과는 달리, 일본 관동군이 쉽게 무너지면서 파죽지세로 내려와 한반도 북부를 점령했다. 미국은 당황한 나머지 38선 분할을 서둘러 제안했고 소련이 이를 수용했다. 북한정권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일체가 소련에 의해 건설됐다. 김정은의 조부 김일성은 스탈린의 철저한 비호하에 양육된 정치·군사적 양자였다. 부친 김정일은 시베리아 땅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동맹조약이 없어도 스탈린은 6·25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했다.
 
  시대적 상황과 지도자의 성향에 따라 비록 부침은 있었지만 러·북간 공생관계는 적어도 1990년 한·소수교 직전까지 지속되어 왔다. 북·중관계가 형제관계라면, 북·러관계는 부자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소수교 및 소련해체 과정에서 러·북간 공식관계는 최소한의 명맥만 유지했다. 소북동맹조약도 만료시점에서 한국정부의 압력과 설득으로 재연장되지 않았다. 수교 직후 러시아의 대 남북 관계에서 남한이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러시아 조야에서는 남한 편향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특히 1994년 북핵 1차위기 해결을 위한 4자회담에서 러시아가 배제됨으로써 적잖은 자존심의 상처를 경험했다. 공교롭게도 러·북관계가 악화된 배경에는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한몫했다. 고르바초프는 1980년 소련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시절에 제6차 조선노동당대회에 대표단장으로 방북할 계획이었으나 북측으로부터 격이 낮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옐친의 경우도 1984년 스베르들로프스크 주지사 시절에 모스크바 방문길에 하룻밤을 머문 김일성을 환대하기 위해 바냐(전통사우나) 일정을 준비했으나 거절당했다. 정치학자 라스웰이 말한 ‘사적동기의 공적 전위’라고나 할까. 19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러시아의 대북관계 복원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푸틴은 취임 직후인 2000년 6월 ‘러시아연방 대외정책 개념’ 발표에서 대 한반도 정책방향을 간결하게 제시했다. 즉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러시아의 동등한 참여 보장과 남북한과의 등거리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뒤 러시아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전격적으로 방문했다. 김정일은 답방 일환으로 2001년과 2002년 연속 2년간 러시아를 방문했고, 2001년에는 거의 한 달간 특별열차로 러시아 전역을 누볐다. 푸틴의 실용적 신(新) 등거리 노선은 남한 공략의 한계성과 북한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명료한 인식에 기초하고 국익 스펙트럼 확대의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출발했다. 러·북 신 우호조약을 토대로 북한과는 정치·안보적 유대를 더욱 강화했다. 한국과도 다차원적 경제협력을 증진시켜 경제적 실익을 확보해 나갔다. 이러한 러시아의 대 남북한정책 기조는 현재까지도 변함 없이 지속되고 있다.
 
 
 
러시아의 북핵문제에 대한 입장

 
  러시아는 북핵 공여국이면서도 피해 대상국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북한정권 초기부터 핵개발을 위한 이론·기술·인원·시설·재료 일체를 지원했다. 1946년 김일성대학 설립 시 핵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물리수학부가 동반 개설됐다. 1980년대에 오직 영변에만 핵관련 시설을 100개 이상 건설했고, 소련해체 직전인 1990년까지 두브나핵연구소를 거쳐 간 북한 전문가들은 무려 250명이었다. 물론 전제조건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었다.
 
  러시아 해외정보부(SVR)는 1993년 북한이 일정기간 경과 후 핵을 무기로 전용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 후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대해 외과수술식 타격을 검토한 적이 있었으나 1994년 10월 미·북 간 제네바합의로 철회했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 붕괴의 혼란기를 틈타 핵·미사일 전문가와 장비·기술을 불법적으로 반입해 갔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가 의도하지 않게 북핵 개발을 지원한 셈이다. 또한 러·북 간 국경선은 39.1km에 불과하지만 국경 너머 광활한 극동시베리아 땅과 풍부한 수산자원의 태평양 연안이 있다. 이 청정지역이 제2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는 2003년 1월 6자회담 출범 직전에 일괄타결안을 제안했다. 그것은 최근 중국이 제시한 쌍궤병행·쌍중단과 동일한 개념이다. 유감스럽게 6자회담 참여국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미국과 일본이 반대하고 중국과 한국은 침묵했다. 결국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단행하면서 러시아 측에는 2시간 전에, 중국 측에는 20분 전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지난 9월 3일 6차 핵실험 때도 북한은 2일 전에 러시아 측에 통보했으나 중국 측에는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미국이 2005년 동결시킨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김정일 비자금 2500만 달러를 13개월 만에 북한에 다시 되돌려 주기로 했다. 대북 반환문제를 놓고 중국조차도 미국의 눈치만 살폈다. 마침내 러시아가 나서서 2008년 3월 자국의 스베르방크를 통해 북한에 송금했다. 그 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연평도에 포격을 가할 때도 6자회담국 중에서 유일하게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러시아는 유엔의 대북제재에 동참하면서도 북한과의 관계는 지속 강화시켜 왔다. 2012년 러·북 간 최대의 걸림돌인 110억 달러 경협차관을 ‘90% 탕감·10% 경협기금’에 합의함으로써 협력의 물꼬를 텄다. 2001년에 합의한 북한의 철도 개·보수 사업은 2014년 ‘승리 프로젝트’로 본격화됐다. 아울러 러시아와 북한은 유엔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 제3국을 통해 원유를 거래하고 심지어는 공해상에서도 비공식적인 교역을 지속해 왔다.
 
 
  푸틴의 ‘고약한 아우’
 
지난 2014년 2월 7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만난 푸틴. 푸틴과 김정은의 정책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사진=뉴시스
  푸틴과 김정은은 동병상련의 브로맨스 관계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 때 국제사회의 제재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권력을 물려받았다. 집권 초기 풋내기 지도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선은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모부 장성택을 화염방사기로 불태우고 권력을 틀어쥐는 그의 표독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연실색했다. 푸틴도 크림반도 병합 후 서방의 제재로 정치적·경제적 난관에 봉착했지만 전폭적인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김정은의 핵·경제 병진노선은 푸틴의 부국강병책과 일맥상통한다. 비대칭 전력인 핵무기를 개발하고 경제도 살린다는 전략이다. 400개 이상의 장마당을 통해 주민들의 돈맛을 자극한다. 주민들은 30%의 소득세를 국가에 바치고도 70%의 개인소득을 챙길 수 있다. 배급제에 익숙했던 주민들에게는 세금을 납부하고도 상당액을 챙길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했을 것이다. 김정은도 국가는 마냥 시혜자의 입장인 줄만 알았는데 세금을 거둬들여 핵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급기야는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시키고, 미국 본토 도달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면서 스트롱맨 트럼프를 쩔쩔매게 한다.
 
  역사적으로 핵을 개발해 보유한 정권이 스스로 포기한 사례가 없다. “북한은 풀뿌리를 먹는 한이 있어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는 푸틴의 지적을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김정은은 조금만 더 버티면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이제 북핵문제는 개발을 중단시킬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러시아의 활용가치

 
  이제 북한의 핵도발을 저지하기 위해 포괄적인 전략과 전술이 요구된다. 남북한 간 ‘우리민족끼리’ 노닥거리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고도의 외교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주변국을 설득할 수 있는 가용자원을 총동원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개발을 중단시키고, 북핵 관리와 확산 방지에 협력해야 한다. 주체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첫째, 지금 우리는 한반도의 운전대를 잡고 명실상부한 중심축 국가(Pivot state)로 자리매김할 때다. 코리아패싱(한국왕따)의 위기는 오히려 코리아리딩(한국주도)의 기회로 전화위복될 수 있다. 한국은 경제규모 12위 중진국이다. 서세동점기의 소용돌이 속에 함몰됐던 구한말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을 순기능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은 전통 우방이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새 우방이다. 미·일의 해양세력과 중·러의 대륙세력간 갈등을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승화시키는 외교적 지혜가 필요하다. 미국의 사드배치로 인한 중국과 러시아의 기회비용을 보전할 수 있는 협상카드가 마련돼야 한다.
 
  둘째, 한·러관계는 1990년 수교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견고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대북관계도 한반도 비핵화 선언 및 유엔 동시가입 등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다만, 북한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함으로써 새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로 하여금 친북으로 회귀하는 우를 범했다. 이제 다시 친한(親韓)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상호 신뢰회복이 급선무다. 더 나아가 당사국들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견인하는 협력 메커니즘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 북방정책의 요체다. 일본의 아베가 미국의 대 러시아 경제제재에 동참하면서도 외교력을 발휘해 러시아에 대규모로 투자한 사례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셋째, 안보와 경제를 선순환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한·러 정상회담에서 경제협력을 통한 북핵 해결 등 군사적 긴장해소와 평화체제 정착에 방점을 두었다. 역내 국가들이 경제공동체를 형성하고 안보공동체로 발전시킨다는 개념이다. 아울러 푸틴이 제안한 남북한·러 3대 메가프로젝트 등 경제 현안들도 북핵 해결과 연계시켜 풀어 나가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의 경우를 감안해 볼 때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끝으로, 러시아 푸틴의 인적 환경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는 주요국의 스트롱맨들과 전례 없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퍼 스트롱맨 김정은과는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동병상련의 처지다. 그가 중재자로 나서 우선적으로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고 스트롱맨들을 협상테이블에 앉힐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조속히 출범시켜 일사불란한 신 북방정책의 업무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한다. 만약 이대로 방치하면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는 가속될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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