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10월 20일 한민구 국방부 장관(오른쪽)과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왼쪽)이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한일국방장관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10월 말부터 한국과 일본이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GSOMIA·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 지소미아)’ 체결을 위해 협의를 시작하자 북한이 발끈하고 있다. 북한은 인터넷 선전매체 ‘메아리’를 통해 GSOMIA 논의 재개가 박근혜(朴槿惠) 정부의 ‘위기 극복용 카드’라며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조선반도 재침(再侵)의 길을 열어주는 매국적 협정”이라고 공세를 취하고 있다.
좌파 성향의 의원과 언론들도 ‘건수’를 잡았다는 듯 거들고 나섰다. 그들은 GSOMIA가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에 한국을 편입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한국 정부가 GSOMIA를 최순실(崔順實) 국정 개입 파문으로 혼란한 틈을 타 군사작전 하듯 체결을 밀어붙이려 한다고도 한다.
한술 더 떠 미국 음모론까지 떠돌고 있다. 10월 중순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외교국방(2+2) 장관회의와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미국 측이 한일 간 GSOMIA 체결의 재추진을 하라고 등을 떠밀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지난 9월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미 하원 외교위에서 “미국의 방어체계 기능 향상의 핵심 중 하나는 세 동맹국(한·미·일) 사이의 (군사) 정보공유와 (무기체계의) 상호운용성이다”라고 역설한 것을 확대 해석한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은 ‘개입’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의제로 상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시점에서 모든 논란은 오비이락(烏飛梨落)이요, 좌파들의 마타도어일 뿐이다. 국방부 대변인의 말대로 “한일 양국은 북한의 5차 핵실험 상황에다, 지난 8월과 9월 북한의 탄도미사일이 연속해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떨어진 것을 계기로 실무논의를 재개했다”는 것이 ‘팩트’다.
2012년, 서명 50분 남기고 체결 무산
GSOMIA는 국가 간 군사기밀을 공유하기 위해 맺는 협정이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 32개국과 이 협정 또는 약정을 맺고 있다. 러시아와도 1995년 체결했다. 북한 핵 대응을 위해선 한일 간에도 이 협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2012년 6월 당시 이명박(李明博) 정부는 차관회의(정부 내부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국무회의에서 이 안건을 비공개로 처리했다가 비난여론이 끓어오르자 서명식 50분을 남겨놓고 체결을 무산시켰다. 야당의 정권비판, 국내 여론에 내재된 반일 감정, 차기 대선을 우선시한 정부의 결정이 복합된 결과였다.
GSOMIA 체결을 주도한 김태효(金泰孝)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등이 그 일로 경질됐고 이후 한일관계는 냉각됐다. ‘친일정권’이란 비난이 빗발치자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 방문(8월 10일), 일본 무시 발언(8월 13일), 일왕 사죄 요구(8월 14일) 등의 행보를 했고 일본에선 반작용으로 혐한(嫌韓) 분위기가 쓰나미처럼 일어났다.
1969년 11월 ‘오키나와(沖繩) 통치권 반환’을 위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닉슨의 미일 공동성명에서 한국의 안보와 관련해 ‘한국조항(한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평화유지가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최초로 언급되면서, 한·미·일 3국의 안보협력은 시작됐다.
GSOMIA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1987년 일본이 한국에 GSOMIA 체결을 처음으로 제의했다고 한다. 군 관계자들에 따르면, GSOMIA와 비슷한 형태의 한일 군사정보 교류를 제의한 것은 박정희(朴正熙) 정부 때인 1970년대 무렵이었다고 한다. 노태우(盧泰愚)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구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기 전까지 우리 정부는 북한 내부 소식에 사실상 감감소식이었다.
당시 북한과 조총련은 일본의 승인을 얻어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조총련계 재일동포 9만3000여 명을 ‘만경봉호’에 태워 북송했다. 이때 상당수의 일본인 처(妻)들이 북한으로 이주해 그들을 통해 일본은 북한 관련 정보를 상당히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 미국을 제외한 외국과의 군사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국내 정치적으로 매우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한일 간 국방부-방위청, 육해공군과 육해공 자위대와의 정보교류회의가 시작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일본, 이미 5개국과 협정 체결
2010년 9월 7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센카쿠 열도의 구바지마(久場島) 인근 해상에서 중국 어선을 나포하면서 센카쿠 열도 영토분쟁이 본격화한다. 일본은 중국 포위 전략의 일환으로 주변국과의 정보교류 협정 체결을 서두른다. 그해 12월 일본 방위성은 ‘2011년 이후의 방위계획 대강(大綱)에 관하여’를 발표하며 한국과 호주에 ‘러브콜’을 보냈다.
일본 방위성은 방위대강의 별지(別紙)에 ‘미국의 동맹국이며 우리나라와 기본적인 가치 및 안전보장상의 이익을 공유하는 한국, 호주와 2개국 간 또는 미국을 포함한 다국 간 협력을 강화한다’는 조항을 담는다.
다케사다 히데시(武貞秀士) 전 방위연구소 총괄연구관은 “당시 일본과 호주는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을 이미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의 이러한 조치는 다분히 일본과 한국 사이 국방 분야의 협정 체결을 염두에 둔 조항이었다”고 했다.
2011년 1월 10일 일본의 기타자와 도시미(北澤俊美) 방위상과 한국의 김관진(金寬鎭) 국방부 장관은 서울에서 회담을 갖고 2013년 12월 남수단 한빛부대의 탄약 임대처럼 PKO 활동 과정에서 자위대와 한국군이 상호간 물자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ACSA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에 들어간다. 이때 기타자와 방위상은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과 함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도 맺자”고 제안한다.
김관진 장관도 이에 긍정적으로 답하면서 양국은 본격적으로 협정 체결을 준비한다. 그러나 2012년 6월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졸속처리’로 반대여론이 들끓자 이명박 정부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무릎을 꿇고 만다.
한편, 2007년 미국과 처음으로 GSOMIA를 체결했던 일본 정부는 2011년 호주와 GSOMIA를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등 현재 5개국과 GSOMIA 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2012년 GSOMIA 체결 당시 국내의 협정 반대론자들은 “굳이 일본의 군사대국화의 물꼬를 왜 한국이 터줘야 하느냐”는 논리를 내세웠으나, 이제는 아쉽게도(?) 그들의 논리도 힘을 잃고 말았다.
GSOMIA는 한반도의 전쟁발발 상황에 대비한 시스템
현재 한일 양국은 직접적인 정보교환 대신에 2014년 12월 발효된 한·미·일 정보공유약정(TISA)에 의거해 미국을 매개로 북핵 및 탄도미사일 관련 정보만 공유하고 있다. 북핵과 미사일 관련 정보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탐지해야 하는 ‘속도전’ 측면이 강해 일본→미국→한국 순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국방부 류제승(柳濟昇) 정책실장은 “2년 가까이 한·미·일 정보공유약정을 운영해 본 결과, 북핵과 미사일 위협 관련 정보교류는 긍정적이었다”며 “GSOMIA를 통해 이중삼중으로 북핵과 미사일 동향을 점검할 수 있어 정보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우리가 갖지 못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반도 유사시 미국은 일본의 자위대를 한반도 전장의 후방지원 세력으로 동원한다. 일본에 있는 주일미군기지 가운데 7개의 후방기지는 유엔군이 지정한 기지로서 이 기지들을 온전하게 가동해야 전쟁을 치를 수 있다. 오키나와의 미 해병대가 사용하는 후텐마(普天間) 기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등 8개국과 ‘유엔군 지위협정’을 맺고 있어 한반도 유사시 일본에 유엔군이 드나들게 될 것이고 일본은 자동적으로 유엔군을 협력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만일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유사시 정보공유 등 의사소통이 불충분하다면, 작전수행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송화섭(宋和燮) 한국국방연구원 일본실장은 “한일 간 GSOMIA를 체결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면서 “GSOMIA는 한반도의 전쟁발발 상황에 대비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 현안과는 별개로 취급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가이드라인’ 통해 일본에 방위 역할 분담
1950년대 들어 미일은 ‘밀월관계’에 접어든다. 1951년 양국 간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조약’(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1960년 ‘안보소동’을 거치며 한 차례 개정에 나선다. 무장해제당한 일본은 미국에 주일미군기지를 제공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는 것이 조약의 핵심 내용이다.
조약은 제5조에서 ‘일본국의 시정(施政)하에 있는 영역’, 6조에서 ‘일본국의 안전에 기여하고 동시에 극동의 국제평화와 안전유지에 기여’라는 표현으로 미일동맹의 적용 범위를 좁게는 일본, 넓게는 극동 지역으로 설정했다.
미국과 일본은 1960년 개정된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근거로 1978년 미일 방위협력지침, 미일 가이드라인을 확정했다. 일본이 외부로부터 직접적인 무력 공격을 받았을 경우를 상정, 주일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공동작전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이 ‘가이드라인’은 소련의 아시아 진출과 미국의 아시아 이탈이 우려되는 속에서 일본 측이 주도권을 쥘 수 있었기 때문에 ‘5조 사태’(일본 유사시)에 있어서 자위대와 일본 주둔 미군이 어떻게 공동 방위할 것인지를 분명히 한 최초의 것이다. 이른바 미일동맹이 ‘지상(紙上)의 동맹’에서 ‘운용(運用)하는 동맹’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관심은 한반도와 대만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의 안전보장에 있었고 일본이 이른바 ‘6조 사태(한반도를 포함한 극동 지역 유사시)’에도 협력해 주기를 기대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소련이 붕괴하고 북한 위협이 증대하자 미일 양국은 1996년 안보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아태 지역의 평화와 안정 유지를 위해 신(新)가이드라인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1997년 9월, 미일이 개정된 신가이드라인을 발표하자 일본은 가이드라인에 따라 국내 안보 관련 법제들을 하나 둘씩 만들어 나갔다. 1999년 5월 24일 중의원에서 주변사태법안, 자위대법 개정안, 미-일 물품·역무(役務) 상호제공협정(ACSA) 개정안 등 3개 법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
미일 정부는 2015년 4월, 중국의 해양 진출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 가이드라인을 18년 만에 개정한다. 양국 정부가 가이드라인 재개정을 결정한 것은 미국이 2012년 1월 공표한 ‘신국방전략’과 일본 정부가 2010년 말 책정한 ‘방위계획 대강’의 내용을 반영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양국은 재개정할 가이드라인에 중국의 동중국해 도서 침공과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이 미군의 투입을 방해하는, 미일동맹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최전선인 제1열도선의 접근저지·영역거부전략(A2/AD, Anti-Access/Area Denial)에 대한 대책을 담았다.
1997년 미일 가이드라인에서 미군과 자위대의 합력(合力)은 ‘평시’와 일본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주변사태’, 일본이 전쟁상태에 들어가는 ‘일본유사’ 등 3개 분야로 국한돼 있었다. 그러나 2015년의 재개정 가이드라인은 일본 자위대의 작전반경을 사실상 전 지역으로 확대하며 규제를 제거했다.
2015년 5월 14일 일본 정부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고 자위대의 활동을 크게 확대하는 내용 등을 담은 안전보장 관련 11개 법률안을 각의에서 최종 결정했다. 각의에서 결정한 법안은 자위대법·무력공격사태법·중요영향사태법·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 등 10개 개정법안을 묶은 평화안전법제 정비법안(平和安全法制 整備法案), 그리고 국제분쟁에 대처하기 위해 외국 군대의 후방지원을 수시로 가능케 하는 국제평화지원법안 등 2가지다.
두 법안은 참의원 의결을 거쳐 2016년 3월 29일 발효됐다. 이제 일본은 제3국에 대한 공격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반격할 수 있는 집단자위권 행사(무력공격사태법)가 법적으로 가능해졌다.
일본의 혼네(本音)
정부가 10월 27일 한일 GSOMIA 체결을 위한 실무협상을 재개한다고 공식 발표한 이후 협상은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느낌이다. 국방부의 관계자는 “2012년 체결 직전에 무산된 GSOMIA 협정 문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실무협상이 빠르게 진척되는 것”이라며 “빠른 시일 내에 문안 정리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GSOMIA는 양국 간 군사정보의 비밀등급 분류, 보호원칙, 정보 열람권자 범위, 정보전달과 파기 방법, 분실훼손 시 대책, 분쟁해결 원칙 등 21개 조항을 담고 있다. 2012년 당시의 GSOMIA 협정 합의 문안은 인터넷 검색으로도 쉽게 확인 가능하다. 양국이 GSOMIA를 조만간 체결할지도 모른다는 관측도 흘러나온다.
하지만 국내 언론과 정치권의 반응은 녹록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법제처의 협정문 심사→차관회의→국무회의를 거쳐야 하는데 최순실 사태로 정국 주도권을 쥔 야당이 GSOMIA를 반대하기 때문에 4년 전처럼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고까지 보도하고 있다.
국방위 소속 한 야당 의원은 “중요한 협정이라면 국회 비준도 받아가며 천천히 진행해야 하는데 국정이 어수선한 틈에 이렇게 진행하려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주일 국방무관을 지낸 권태환(權泰煥) 장군(육사38기)은 “우리가 러시아를 비롯해 32개국과 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면서 내부적으로 조용히 체결을 해왔고, 지금 이 순간 다른 나라와의 체결협정도 물밑에서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다”며 “일본이 특수한 상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국회 비준까지 끌고 가려는 것은 정치이슈화하려는 행위라고 본다”고 했다.
일부에선 GSOMIA 반대를 위해 ‘중국의 벽’으로까지 논리를 비약시킨다. ‘중국의 벽’이란 일본과의 군사협력이 중국을 자극해 한중관계를 악화시키고 북한과 중국의 협력을 강화시킬 것이란 우려다. 조약이나 협정의 체결은 엄연한 주권국의 권리임에도 사드와 GSOMIA 반대를 위해 망국적 사대주의에 기대는 것이다. 6·25전쟁에서 9만명이나 피를 흘린 미국에는 대들면서, 6·25전쟁 때 한반도 통일을 가로막은 중국에 대해서는 왜 이토록 저자세인지 알 수가 없다.
권태환 장군은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단순히 자국의 군사대국화를 막기 위해 안보법제에 반대한다고 생각한다”며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보호를 받는 미일동맹 때문에 ‘억지춘향’으로 한반도 전쟁 발발 시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으나, 일본 국민들의 ‘혼네’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말려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권 장군은 “따라서 일본은 한국과의 GSOMIA 체결에 적극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꽃놀이패(바둑에서, 한편은 패가 나면 큰 손실을 입으나 상대편은 패가 나도 별 상관이 없는 패)에 불과하다”며 “일본은 GSOMIA 체결을 위해 노력하다 2012년처럼 한국이 막판에 협정 체결을 포기하면 미국 측에 보란 듯이 공을 넘기며 손을 털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정보협정은 백화점의 ‘문’에 해당
송화섭 일본실장은 “한일 간의 국제협력 문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며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기억으로 한반도에 다시는 일본군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국민감정이 강하게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에 독도문제, 역사 왜곡 문제까지 생각이 미치면 우리가 굳이 일본과 군사 분야까지 협력을 해야 하는가 회의론까지 나타난다는 것이다.
송 실장은 “일본에 대한 이러한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일본에 대해서만 안보·군사적인 장벽을 쌓고 있는 것이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지 신중히 생각해 볼 문제”라고 했다.
한일 군사문제는 그 실질적 내용보다 다분히 감정적이라는 증좌가 있다. 2005년 8월 한일 간 군사협정을 체결한다는 언론보도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당시 국방부는 일본과 군사교류 프로그램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준비하고 있었다. 언론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당시 진행하던 6자회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해석해 중단하고 말았다.
이때 무산된 한일 간 군사교류협정은 3년이 지난 2009년 4월 이상희(李想憙) 국방부 장관과 하마다 야스카즈(浜田靖一) 방위상 사이에 ‘한일 국방교류에 관한 의향서’라는 명칭으로 체결됐다. 똑같은 협정 내용에 명칭만 ‘의향서’로 바꾸니 한국의 언론들은 잠잠했다. 한국 언론의 모순이다. 송 실장은 “한중 간에도 국방정책실무회의를 통해 군사교류에 관한 양해각서는 매년 체결되고 있다”며 “일본과는 ‘군사’라는 용어만 사용이 되면 문제가 됐었다”고 했다.
한국국방연구원 김두승(金斗昇) 박사는 “GSOMIA는 백화점의 ‘게이트’에 해당하며, 군사정보교류협정을 맺고 게이트를 통과하면, 백화점 내부의 수많은 필요한 상품(정보)을 상대방과 물물교환할 수 있다”며 “한일 간 공유되는 정보는 북한에 대한 정보에 한정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2017년경부터 도입되는 F-35A전투기의 정비 거점도 일본이라 GSOMIA를 체결하지 않고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며 “레이더 기술과 로봇기술, 훈련기, K-9자주포 등의 방산협력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GSOMIA 백화점에 들어가면 일본 측 물건(정보)이 한국 측 물건보다 눈 돌아가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양국의 쇼핑리스트를 살펴보자. 군 당국은 GSOMIA가 체결되면 일본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자산으로 수집한 북한 잠수함 동향과 무기개발 수준 관련 정보, 탄도미사일 탄착지점 정보는 물론이고 대북 인적정보(HUMINT, 휴민트)를 활용한 북한 내부동향 정보까지 신속하게 제공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 측에 탈북민 등을 통해 얻은 휴민트, 북한 통신감청 정보 등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후 정보를 조기에 확보할 수 있고,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후방지원과 주한 일본인들의 구출활동이 용이해질 것이다.
일본은 ‘적’이 아니라 ‘협력국’
2012년 6월 한일 GSOMIA 처리가 불발되고 4년 4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일 양국과 주변국의 정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통일연구원 이기태(李奇泰) 박사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했다”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은 한미동맹을 통해 대북 억제력을 가질 수 있었으나, 현재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괌까지 타격권에 놓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기태 박사는 “GSOMIA는 한반도 전쟁발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절대적인 것”이라며 “한국은 유사시 미국과 일본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수행해야 하며, 일본의 입장에서 GSOMIA를 체결하지도 않은 국가(한국)와 전쟁을 함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권태환 장군은 “일본도 2011년 3월 11일 도호쿠(東北) 지방 대지진 때 미국 등 서방국가 대사관이 도쿄의 방사능 안전 여부에 대한 정보공유를 요구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면서 “결국 육상자위대가 방사능 피폭(被爆)을 무릅쓰고 현장에 헬기를 띄워 주재국 대사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경험이 있어 정보공유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국방부는 1990년대부터 한일 간 군사교류는 물론 한미일 미사일 탐지·추적 공동훈련, 한미일 폭격기-전투기 연계훈련(B-1 폭격기 호위), 한일수색 및 구조훈련(SAREX),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RIMPAC),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 공군훈련인 ‘레드 플래그’에 참가해 일본 육해공 자위대와 상호 운용성(運用性)을 증대해 오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현대전에서는 전·평시를 막론하고 인사, 작전, 정보, 군수 등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할 분야들이 많다”며 “이들 하드웨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소프트웨어가 바로 GSOMIA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전시는 물론이고 평시에도 PKO활동, IS테러에 대한 현지정보, 항공기 추락에 대한 정보 등을 얻기 위해 GSOMIA는 필수라는 것이다.
한국 국방부는 일본과 GSOMIA 체결을 위한 재협상을 시도하면서 2012년에 이어 이번에도 중국에 GSOMIA를 제안했다고 한다. 초대 러시아 해군무관을 지낸 윤종구(尹鍾九) 제독은 “1996년 공산국가 지도국 러시아에 자동개입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조·소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을 폐기하도록 한 선례를 거울삼아 내친김에 중국에도 북중우호조약의 ‘자동개입조항(제2조)’을 폐기하도록 압박해야 우리의 안보주권을 지킬 수 있다”며 “한일 GSOMIA는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는 물론 대북 억제력과 중국을 견제하는 3가지 전략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윤종구 제독은 “GSOMIA는 우리에게 독(毒)이 아니라 약(藥)”이라며 “일본을 ‘미래의 적’이 아닌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력국’으로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좌파 성향의 의원과 언론들도 ‘건수’를 잡았다는 듯 거들고 나섰다. 그들은 GSOMIA가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에 한국을 편입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한국 정부가 GSOMIA를 최순실(崔順實) 국정 개입 파문으로 혼란한 틈을 타 군사작전 하듯 체결을 밀어붙이려 한다고도 한다.
한술 더 떠 미국 음모론까지 떠돌고 있다. 10월 중순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외교국방(2+2) 장관회의와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미국 측이 한일 간 GSOMIA 체결의 재추진을 하라고 등을 떠밀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지난 9월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미 하원 외교위에서 “미국의 방어체계 기능 향상의 핵심 중 하나는 세 동맹국(한·미·일) 사이의 (군사) 정보공유와 (무기체계의) 상호운용성이다”라고 역설한 것을 확대 해석한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은 ‘개입’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의제로 상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시점에서 모든 논란은 오비이락(烏飛梨落)이요, 좌파들의 마타도어일 뿐이다. 국방부 대변인의 말대로 “한일 양국은 북한의 5차 핵실험 상황에다, 지난 8월과 9월 북한의 탄도미사일이 연속해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떨어진 것을 계기로 실무논의를 재개했다”는 것이 ‘팩트’다.
2012년, 서명 50분 남기고 체결 무산
![]() |
2012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8·15 광복절을 닷새 앞둔 오후 경북 울릉군 독도에 도착한 이 대통령이 ‘한국령(韓國領)’이라고 새겨진 암반비석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청와대 |
2012년 6월 당시 이명박(李明博) 정부는 차관회의(정부 내부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국무회의에서 이 안건을 비공개로 처리했다가 비난여론이 끓어오르자 서명식 50분을 남겨놓고 체결을 무산시켰다. 야당의 정권비판, 국내 여론에 내재된 반일 감정, 차기 대선을 우선시한 정부의 결정이 복합된 결과였다.
GSOMIA 체결을 주도한 김태효(金泰孝)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등이 그 일로 경질됐고 이후 한일관계는 냉각됐다. ‘친일정권’이란 비난이 빗발치자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 방문(8월 10일), 일본 무시 발언(8월 13일), 일왕 사죄 요구(8월 14일) 등의 행보를 했고 일본에선 반작용으로 혐한(嫌韓) 분위기가 쓰나미처럼 일어났다.
1969년 11월 ‘오키나와(沖繩) 통치권 반환’을 위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닉슨의 미일 공동성명에서 한국의 안보와 관련해 ‘한국조항(한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평화유지가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최초로 언급되면서, 한·미·일 3국의 안보협력은 시작됐다.
GSOMIA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1987년 일본이 한국에 GSOMIA 체결을 처음으로 제의했다고 한다. 군 관계자들에 따르면, GSOMIA와 비슷한 형태의 한일 군사정보 교류를 제의한 것은 박정희(朴正熙) 정부 때인 1970년대 무렵이었다고 한다. 노태우(盧泰愚)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구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기 전까지 우리 정부는 북한 내부 소식에 사실상 감감소식이었다.
당시 북한과 조총련은 일본의 승인을 얻어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조총련계 재일동포 9만3000여 명을 ‘만경봉호’에 태워 북송했다. 이때 상당수의 일본인 처(妻)들이 북한으로 이주해 그들을 통해 일본은 북한 관련 정보를 상당히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 미국을 제외한 외국과의 군사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국내 정치적으로 매우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한일 간 국방부-방위청, 육해공군과 육해공 자위대와의 정보교류회의가 시작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일본, 이미 5개국과 협정 체결
![]() |
북한이 5차 핵실험을 실시한 지난 9월 9일, 이나다 도모미 일본 방위상이 도쿄 방위성에서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
일본 방위성은 방위대강의 별지(別紙)에 ‘미국의 동맹국이며 우리나라와 기본적인 가치 및 안전보장상의 이익을 공유하는 한국, 호주와 2개국 간 또는 미국을 포함한 다국 간 협력을 강화한다’는 조항을 담는다.
다케사다 히데시(武貞秀士) 전 방위연구소 총괄연구관은 “당시 일본과 호주는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을 이미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의 이러한 조치는 다분히 일본과 한국 사이 국방 분야의 협정 체결을 염두에 둔 조항이었다”고 했다.
2011년 1월 10일 일본의 기타자와 도시미(北澤俊美) 방위상과 한국의 김관진(金寬鎭) 국방부 장관은 서울에서 회담을 갖고 2013년 12월 남수단 한빛부대의 탄약 임대처럼 PKO 활동 과정에서 자위대와 한국군이 상호간 물자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ACSA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에 들어간다. 이때 기타자와 방위상은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과 함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도 맺자”고 제안한다.
김관진 장관도 이에 긍정적으로 답하면서 양국은 본격적으로 협정 체결을 준비한다. 그러나 2012년 6월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졸속처리’로 반대여론이 들끓자 이명박 정부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무릎을 꿇고 만다.
한편, 2007년 미국과 처음으로 GSOMIA를 체결했던 일본 정부는 2011년 호주와 GSOMIA를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등 현재 5개국과 GSOMIA 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2012년 GSOMIA 체결 당시 국내의 협정 반대론자들은 “굳이 일본의 군사대국화의 물꼬를 왜 한국이 터줘야 하느냐”는 논리를 내세웠으나, 이제는 아쉽게도(?) 그들의 논리도 힘을 잃고 말았다.
GSOMIA는 한반도의 전쟁발발 상황에 대비한 시스템
현재 한일 양국은 직접적인 정보교환 대신에 2014년 12월 발효된 한·미·일 정보공유약정(TISA)에 의거해 미국을 매개로 북핵 및 탄도미사일 관련 정보만 공유하고 있다. 북핵과 미사일 관련 정보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탐지해야 하는 ‘속도전’ 측면이 강해 일본→미국→한국 순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국방부 류제승(柳濟昇) 정책실장은 “2년 가까이 한·미·일 정보공유약정을 운영해 본 결과, 북핵과 미사일 위협 관련 정보교류는 긍정적이었다”며 “GSOMIA를 통해 이중삼중으로 북핵과 미사일 동향을 점검할 수 있어 정보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우리가 갖지 못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반도 유사시 미국은 일본의 자위대를 한반도 전장의 후방지원 세력으로 동원한다. 일본에 있는 주일미군기지 가운데 7개의 후방기지는 유엔군이 지정한 기지로서 이 기지들을 온전하게 가동해야 전쟁을 치를 수 있다. 오키나와의 미 해병대가 사용하는 후텐마(普天間) 기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등 8개국과 ‘유엔군 지위협정’을 맺고 있어 한반도 유사시 일본에 유엔군이 드나들게 될 것이고 일본은 자동적으로 유엔군을 협력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만일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유사시 정보공유 등 의사소통이 불충분하다면, 작전수행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송화섭(宋和燮) 한국국방연구원 일본실장은 “한일 간 GSOMIA를 체결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면서 “GSOMIA는 한반도의 전쟁발발 상황에 대비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 현안과는 별개로 취급해야 한다”고 했다.
![]() |
2015년 9월 19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장에서 안보관련법이 통과되자 여당 의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뉴시스 |
조약은 제5조에서 ‘일본국의 시정(施政)하에 있는 영역’, 6조에서 ‘일본국의 안전에 기여하고 동시에 극동의 국제평화와 안전유지에 기여’라는 표현으로 미일동맹의 적용 범위를 좁게는 일본, 넓게는 극동 지역으로 설정했다.
미국과 일본은 1960년 개정된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근거로 1978년 미일 방위협력지침, 미일 가이드라인을 확정했다. 일본이 외부로부터 직접적인 무력 공격을 받았을 경우를 상정, 주일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공동작전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이 ‘가이드라인’은 소련의 아시아 진출과 미국의 아시아 이탈이 우려되는 속에서 일본 측이 주도권을 쥘 수 있었기 때문에 ‘5조 사태’(일본 유사시)에 있어서 자위대와 일본 주둔 미군이 어떻게 공동 방위할 것인지를 분명히 한 최초의 것이다. 이른바 미일동맹이 ‘지상(紙上)의 동맹’에서 ‘운용(運用)하는 동맹’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관심은 한반도와 대만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의 안전보장에 있었고 일본이 이른바 ‘6조 사태(한반도를 포함한 극동 지역 유사시)’에도 협력해 주기를 기대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소련이 붕괴하고 북한 위협이 증대하자 미일 양국은 1996년 안보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아태 지역의 평화와 안정 유지를 위해 신(新)가이드라인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1997년 9월, 미일이 개정된 신가이드라인을 발표하자 일본은 가이드라인에 따라 국내 안보 관련 법제들을 하나 둘씩 만들어 나갔다. 1999년 5월 24일 중의원에서 주변사태법안, 자위대법 개정안, 미-일 물품·역무(役務) 상호제공협정(ACSA) 개정안 등 3개 법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
미일 정부는 2015년 4월, 중국의 해양 진출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 가이드라인을 18년 만에 개정한다. 양국 정부가 가이드라인 재개정을 결정한 것은 미국이 2012년 1월 공표한 ‘신국방전략’과 일본 정부가 2010년 말 책정한 ‘방위계획 대강’의 내용을 반영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양국은 재개정할 가이드라인에 중국의 동중국해 도서 침공과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이 미군의 투입을 방해하는, 미일동맹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최전선인 제1열도선의 접근저지·영역거부전략(A2/AD, Anti-Access/Area Denial)에 대한 대책을 담았다.
1997년 미일 가이드라인에서 미군과 자위대의 합력(合力)은 ‘평시’와 일본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주변사태’, 일본이 전쟁상태에 들어가는 ‘일본유사’ 등 3개 분야로 국한돼 있었다. 그러나 2015년의 재개정 가이드라인은 일본 자위대의 작전반경을 사실상 전 지역으로 확대하며 규제를 제거했다.
2015년 5월 14일 일본 정부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고 자위대의 활동을 크게 확대하는 내용 등을 담은 안전보장 관련 11개 법률안을 각의에서 최종 결정했다. 각의에서 결정한 법안은 자위대법·무력공격사태법·중요영향사태법·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 등 10개 개정법안을 묶은 평화안전법제 정비법안(平和安全法制 整備法案), 그리고 국제분쟁에 대처하기 위해 외국 군대의 후방지원을 수시로 가능케 하는 국제평화지원법안 등 2가지다.
두 법안은 참의원 의결을 거쳐 2016년 3월 29일 발효됐다. 이제 일본은 제3국에 대한 공격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반격할 수 있는 집단자위권 행사(무력공격사태법)가 법적으로 가능해졌다.
일본의 혼네(本音)
정부가 10월 27일 한일 GSOMIA 체결을 위한 실무협상을 재개한다고 공식 발표한 이후 협상은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느낌이다. 국방부의 관계자는 “2012년 체결 직전에 무산된 GSOMIA 협정 문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실무협상이 빠르게 진척되는 것”이라며 “빠른 시일 내에 문안 정리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GSOMIA는 양국 간 군사정보의 비밀등급 분류, 보호원칙, 정보 열람권자 범위, 정보전달과 파기 방법, 분실훼손 시 대책, 분쟁해결 원칙 등 21개 조항을 담고 있다. 2012년 당시의 GSOMIA 협정 합의 문안은 인터넷 검색으로도 쉽게 확인 가능하다. 양국이 GSOMIA를 조만간 체결할지도 모른다는 관측도 흘러나온다.
하지만 국내 언론과 정치권의 반응은 녹록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법제처의 협정문 심사→차관회의→국무회의를 거쳐야 하는데 최순실 사태로 정국 주도권을 쥔 야당이 GSOMIA를 반대하기 때문에 4년 전처럼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고까지 보도하고 있다.
국방위 소속 한 야당 의원은 “중요한 협정이라면 국회 비준도 받아가며 천천히 진행해야 하는데 국정이 어수선한 틈에 이렇게 진행하려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주일 국방무관을 지낸 권태환(權泰煥) 장군(육사38기)은 “우리가 러시아를 비롯해 32개국과 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면서 내부적으로 조용히 체결을 해왔고, 지금 이 순간 다른 나라와의 체결협정도 물밑에서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다”며 “일본이 특수한 상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국회 비준까지 끌고 가려는 것은 정치이슈화하려는 행위라고 본다”고 했다.
일부에선 GSOMIA 반대를 위해 ‘중국의 벽’으로까지 논리를 비약시킨다. ‘중국의 벽’이란 일본과의 군사협력이 중국을 자극해 한중관계를 악화시키고 북한과 중국의 협력을 강화시킬 것이란 우려다. 조약이나 협정의 체결은 엄연한 주권국의 권리임에도 사드와 GSOMIA 반대를 위해 망국적 사대주의에 기대는 것이다. 6·25전쟁에서 9만명이나 피를 흘린 미국에는 대들면서, 6·25전쟁 때 한반도 통일을 가로막은 중국에 대해서는 왜 이토록 저자세인지 알 수가 없다.
권태환 장군은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단순히 자국의 군사대국화를 막기 위해 안보법제에 반대한다고 생각한다”며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보호를 받는 미일동맹 때문에 ‘억지춘향’으로 한반도 전쟁 발발 시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으나, 일본 국민들의 ‘혼네’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말려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권 장군은 “따라서 일본은 한국과의 GSOMIA 체결에 적극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꽃놀이패(바둑에서, 한편은 패가 나면 큰 손실을 입으나 상대편은 패가 나도 별 상관이 없는 패)에 불과하다”며 “일본은 GSOMIA 체결을 위해 노력하다 2012년처럼 한국이 막판에 협정 체결을 포기하면 미국 측에 보란 듯이 공을 넘기며 손을 털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 |
2013년 1월 27일 가고시마현 다네가시마(種子島) 우주센터에서 H2A 로켓을 쏘아올렸다. 이 로켓에는 야간에도 길이 1m의 지상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초정밀 레이더 위성이 실려 있다. 사진=조선일보, 뉴시스 |
송 실장은 “일본에 대한 이러한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일본에 대해서만 안보·군사적인 장벽을 쌓고 있는 것이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지 신중히 생각해 볼 문제”라고 했다.
한일 군사문제는 그 실질적 내용보다 다분히 감정적이라는 증좌가 있다. 2005년 8월 한일 간 군사협정을 체결한다는 언론보도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당시 국방부는 일본과 군사교류 프로그램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준비하고 있었다. 언론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당시 진행하던 6자회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해석해 중단하고 말았다.
이때 무산된 한일 간 군사교류협정은 3년이 지난 2009년 4월 이상희(李想憙) 국방부 장관과 하마다 야스카즈(浜田靖一) 방위상 사이에 ‘한일 국방교류에 관한 의향서’라는 명칭으로 체결됐다. 똑같은 협정 내용에 명칭만 ‘의향서’로 바꾸니 한국의 언론들은 잠잠했다. 한국 언론의 모순이다. 송 실장은 “한중 간에도 국방정책실무회의를 통해 군사교류에 관한 양해각서는 매년 체결되고 있다”며 “일본과는 ‘군사’라는 용어만 사용이 되면 문제가 됐었다”고 했다.
한국국방연구원 김두승(金斗昇) 박사는 “GSOMIA는 백화점의 ‘게이트’에 해당하며, 군사정보교류협정을 맺고 게이트를 통과하면, 백화점 내부의 수많은 필요한 상품(정보)을 상대방과 물물교환할 수 있다”며 “한일 간 공유되는 정보는 북한에 대한 정보에 한정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2017년경부터 도입되는 F-35A전투기의 정비 거점도 일본이라 GSOMIA를 체결하지 않고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며 “레이더 기술과 로봇기술, 훈련기, K-9자주포 등의 방산협력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GSOMIA 백화점에 들어가면 일본 측 물건(정보)이 한국 측 물건보다 눈 돌아가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양국의 쇼핑리스트를 살펴보자. 군 당국은 GSOMIA가 체결되면 일본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자산으로 수집한 북한 잠수함 동향과 무기개발 수준 관련 정보, 탄도미사일 탄착지점 정보는 물론이고 대북 인적정보(HUMINT, 휴민트)를 활용한 북한 내부동향 정보까지 신속하게 제공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 측에 탈북민 등을 통해 얻은 휴민트, 북한 통신감청 정보 등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후 정보를 조기에 확보할 수 있고,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후방지원과 주한 일본인들의 구출활동이 용이해질 것이다.
일본은 ‘적’이 아니라 ‘협력국’
![]() |
2007년 6월 20일 제주도 동북방 65마일 한일중간수역에서 진행된 ‘한일 해군 공동 수색 및 구조훈련’에서 우리 해군 대잠헬기(LYNX)와 일본 군함 우미기리함이 가상의 화재조난 선박을 향해 긴급 출동하고 있다. 사진=해군 제공 |
이기태 박사는 “GSOMIA는 한반도 전쟁발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절대적인 것”이라며 “한국은 유사시 미국과 일본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수행해야 하며, 일본의 입장에서 GSOMIA를 체결하지도 않은 국가(한국)와 전쟁을 함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권태환 장군은 “일본도 2011년 3월 11일 도호쿠(東北) 지방 대지진 때 미국 등 서방국가 대사관이 도쿄의 방사능 안전 여부에 대한 정보공유를 요구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면서 “결국 육상자위대가 방사능 피폭(被爆)을 무릅쓰고 현장에 헬기를 띄워 주재국 대사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경험이 있어 정보공유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국방부는 1990년대부터 한일 간 군사교류는 물론 한미일 미사일 탐지·추적 공동훈련, 한미일 폭격기-전투기 연계훈련(B-1 폭격기 호위), 한일수색 및 구조훈련(SAREX),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RIMPAC),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 공군훈련인 ‘레드 플래그’에 참가해 일본 육해공 자위대와 상호 운용성(運用性)을 증대해 오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현대전에서는 전·평시를 막론하고 인사, 작전, 정보, 군수 등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할 분야들이 많다”며 “이들 하드웨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소프트웨어가 바로 GSOMIA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전시는 물론이고 평시에도 PKO활동, IS테러에 대한 현지정보, 항공기 추락에 대한 정보 등을 얻기 위해 GSOMIA는 필수라는 것이다.
한국 국방부는 일본과 GSOMIA 체결을 위한 재협상을 시도하면서 2012년에 이어 이번에도 중국에 GSOMIA를 제안했다고 한다. 초대 러시아 해군무관을 지낸 윤종구(尹鍾九) 제독은 “1996년 공산국가 지도국 러시아에 자동개입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조·소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을 폐기하도록 한 선례를 거울삼아 내친김에 중국에도 북중우호조약의 ‘자동개입조항(제2조)’을 폐기하도록 압박해야 우리의 안보주권을 지킬 수 있다”며 “한일 GSOMIA는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는 물론 대북 억제력과 중국을 견제하는 3가지 전략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윤종구 제독은 “GSOMIA는 우리에게 독(毒)이 아니라 약(藥)”이라며 “일본을 ‘미래의 적’이 아닌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력국’으로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