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국가적 진실 수호를 포기하고 선동 여론을 따라가면 세월호처럼, 브라질 축구팀처럼, 나폴레옹 3세처럼, 3군단처럼 ‘조직붕괴’를 맞을 수도 있다.
- 지난 7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이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지난 6월 25일 청와대 자유게시판은 전날 사퇴한 문창극(文昌克) 국무총리 후보자와 관련,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글로 뒤덮였다. 지지를 철회한다는 내용이 많았다. KBS 등의 왜곡보도와 선동된 여론에 굴복한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감이 묻어나는 글들이었다.
보수층의 박 대통령 비판은 좌파(左派)의 비판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동체의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보수세력이고 이들이 대통령의 주된 지지층이었다. 이들이 비판을 넘어서 반대로 돌아서면 정권이 불안정해진다. 군대에서 사병이 사령관을 욕하는 것과 장교가 비판하는 것의 성격이 다르듯이.
‘이제 진정한 여론이 어떤 건지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안은정씨는 보수 지지층을 ‘집토끼’에 비유하였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이제 법과 원칙이란 가소로운 말은 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껏 어떤 여론을 살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진짜 숨어 있던 여론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보수 지지자들이 집토끼라 생각해서 무시해도 될 거라 생각했다면, 이제부터 집토끼들이 화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십시오.>
임미숙씨는 ‘전교조보다 의리 없는 대통령’이란 제목의 글에서 ‘어제 처음으로 민주당하고 전교조가 부러웠습니다’란 말로 시작했다.
집토끼들의 배신감
<그들은 자기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사활(死活)을 거는데, 대통령은 진실을 코앞에 놔두고 도망가기에만 바빴습니다. 김종훈, 안대희, 문창극은 대통령이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해서 모두 낙마한 겁니다. 하이에나한테 뜯기든 말든 내버려두고 방관하는 자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젠 방송에 나오는 대통령 모습도 보기 싫고, 뭐 하나 다 가식으로 느껴지고 모든 게 엉망입니다. 대통령이 보수에 던져준 이 충격파 상처가 대통령 임기 내에 아물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젠 더 이상 보수는 대통령의 팬클럽이 아닙니다. 거짓에 항복하고 왜곡된 여론에 항복하는 대통령의 낮은 수준을 어제 자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는 마음에 안 들지만 대통령을 생각해서 새누리를 찍은 사람들이 엄청 많을 겁니다. 저도 그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새누리가 무너지면 대통령이 무너지니 그것만은 막아 보겠다고 온 집식구가 투표장으로 향해 새누리를 찍고 왔습니다. 그래서 배신감이 백배 더 드는 겁니다. 집토끼들이 나가면 집에 다시 들어올 것 같습니까?
한 번 배신감을 가지면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 텐데 왜 문창극 후보를 버리셨습니까?
당신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온 겁니다. 그것도 51.6%가 당신한테 준 권력입니다. 51.6%의 국민을 바보로 만드니 좋습니까? 속 시원합니까? 나라의 국익보다 진실보다 대통령의 인기가 더 중요합니까? 이 상처가 언제 아물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각부터 대통령과 새누리에 대한 관심 일절 끊을 겁니다.>
원한과 경멸
곽종은씨는 ‘문창극 후보가 자진사퇴의 형식을 취했지만 청와대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라면서 이렇게 썼다.
<저는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의 온누리교회 강연 동영상 전부를 시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종교가 없는 제가 온누리교회에 다니고 싶어질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강연은 흠을 잡기가 힘든 것이었음을 제 양심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이런 애국자를 청문회에 세울 수 없다면 그 누구를 청문회에 세우려 하십니까!
청문회를 통과해서 꼭 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청문회까지는 가야 그게 정상입니다. 이런 일 하나 정상화로 만들지 못하는 청와대가 무슨 ‘기본이 바로 선 국가를 위한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야기하십니까? 그러니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화면 우측 배너 ‘기본이 바로 선 국가-비정상의 정상화’ 배너 당장 내리십시오!>
한국 보수층의 정치적 판단 기준은 헌법, 사실, 국익(國益)이다. 그들 눈에는 박 대통령이 선동세력으로부터 국가적 진실을 수호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인기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피해야 할 점이 두 개 있다고 했다. 경멸을 받는 것, 그리고 원한을 사는 것.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이 지지자들로부터 이 정도의 본질적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조직붕괴’의 전(前) 단계가 아닌지 주의해야 할 일이다. 집토끼의 반란은 산토끼의 도주와는 성격이 다르다.
세월호 사고와 KBS의 편파방송 파동을 겪으면서 한국에선 ‘국가적 진실’을 담보하는 두 개의 기준이 무너졌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권위와 보수언론의 신뢰성이 그것이다. 보수언론마저 선동에 합세하고, 대통령이 이에 굴복한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국민들이 기댈 곳을 좁히고, 외교와 안보에도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월드컵 준결승전, 브라질-독일전(戰) 축구 중계방송을 보면서도 ‘조직붕괴’라는 말이 생각났다. 브라질팀은 개인기는 뛰어나도 조직윤리가 무너졌다.
군대든 회사든 축구팀이든 모든 조직은 지도력과 팀워크를 바탕으로 조직의 성공(승리, 돈벌이 등)을 목표로 한다. ‘조직붕괴’가 일어나면 ‘조직윤리’가 무너져, 상하(上下) 구분이 사라지고, 정상적인 사고(思考)가 마비되며, 개별적으로 행동한다. 세월호 사고도 배가 급히 기우니 선장과 선원들의 조직윤리, 즉 직무(職務)의식과 지휘계통의 작동이 정지된 경우이다.
한국-알제리 축구전의 전반에서도 한국팀은 ‘조직붕괴’의 현상을 보였다. 홍명보 감독은 지도력을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조직붕괴를 막을 책임은 지휘관에게 있다. 지도자는 어려울 때를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다. 모두가 잘나갈 때는 지도자가 필요 없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월드컵 후, “한국 선수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잘할 때와 못할 때의 차이가 크다”는 평을 했다. 히딩크 감독이 지휘할 때 한국팀은 어이없이 지는 경우가 없었다. 한국선수들의 단점을 보완, 조직붕괴를 막았다는 이야기이다.
한국군은 6·25 남침이란 기습을 받았지만 조직붕괴는 없었다. 후퇴는 했지만 부대 단위의 집단투항이 없었다. 인천상륙 작전으로 북진(北進)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조직이 붕괴, 부대 단위로 항복했다.
한국전 때 주한 미국대사였던 존 J. 무초는 1971년 1월과 2월, 워싱턴에서 ‘역사 기록을 위한 육성(肉聲) 증언’ 프로그램에 응했는데, “그날 한국군은 기습을 당하고도 참으로 잘 싸웠다”고 말했다. “한국군의 조직적인 저항과 전선(戰線)의 폭우(暴雨)가 한국을 구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호의 선장은 ‘이승만級’이라야
그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 대하여는 비판과 칭송을 섞었다.
<이 대통령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한 목표를 위해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강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 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고차원(高次元)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감정적으로 되면 그는 독립투사 시절의 본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으나 위기 때 일처리를 잘했으며 자신의 뜻을 고급 영어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의 영어는 글과 말 무엇이든지 유창했습니다. 그는 제퍼슨류(類)의 민주주의자임을 자랑했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많은 사람은 외국인 부인(편집자주: 프란체스카 여사)이 그에게 큰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군은 기습을 받고도 ‘조직붕괴’를 겪지 않았다. 지휘계통이 살아 있어 후퇴할망정 부대 단위로 항복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미군이 곧 도우러 올 것이란 소문이 돌았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어 공황(恐惶)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75~78세 사이에 전쟁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 나이에도 국내외의 적대(敵對)세력-때로는 미국 정부-와도 싸우면서 정권을 유지하고 국가의 방향타를 놓지 않았다. 무초의 평대로 생존의지가 강하고, 어려울 때 일처리를 잘했으며,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한 덕분이었다.
핵(核)무장한 북한정권, 이들을 추종하는 종북(從北)세력, 국력(國力) 팽창기의 중국, 전쟁할 수 있는 나라 되기를 선언한 일본, ‘아시아로의 중심 이동’을 정책화한 미국. 그 사이에서 핵무장을 포기한 한국이 있다. 황천(荒天)항해를 각오해야 하는 대한민국호의 선장은 ‘이승만급(級)’이라야 하는데, 선원들(보수층)에게도 신뢰받지 못한다면?
“지휘체계가 무너진 것은 공포 때문”
모든 사고는, 군사적 용어로 설명한다면 ‘기습’이다. 예고되지 않은 장소에서 예고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브라질 축구팀이 7분 안에 네 골을 먹은 것이나 세계최강의 육군을 갖고 있다고 평가되던 프랑스가 1940년 5월 히틀러의 독일군으로부터 ‘아르덴 기습돌파’를 당하자 6주 만에 항복한 것은 기습상황에서 지도력이 마비된 탓이다.
기습을 받는 등 불리할 때도 잘 싸우는 군대로는 영국군, 독일군, 일본군을 친다. 오랜 군사문화, 지휘관의 솔선수범, 강인한 민족성, 평소 훈련이 모인 결과일 것이다. 한국군은 남침기습을 당하고선 무너지지 않았지만 1951년 5월 동부전선의 중공군 대공세 때는 3군단 2개 사단이 와해된 적이 있다.
5월 17일 새벽에 두 사단의 유일한 퇴로(退路)가 지나는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 우회 점령되었다. 3군단 소속 2개 사단 약 2만 병력과 수백 대의 차량이 전방 방어선을 포기, 현리 부근으로 집결했다. 밀려든 병력과 차량으로 폭 5m도 안 되는 좁은 길이 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9사단 28연대 부(副)연대장이던 염정태 중령은 이렇게 말했다.
“유일한 후퇴로가 막혀 버려 아군(我軍)이 중공군의 포위망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리 부근에 모여 있던 장병들 사이에는 공포감이 확산되었습니다. 밤이 오고 오마치 돌파에 실패하자 순식간에 집단적인 공황상태가 빚어졌어요. 아직은 중공군이 현리 쪽으로 집중사격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장병들은 뿔뿔이 방대산으로 기어올라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휘체계가 무너져 버린 것은 적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공포감 때문이었습니다.”
3軍團 와해
‘영천 회전(會戰)의 영웅’ 유재흥(劉載興) 당시 3군단장은 17일 오후 현리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작전명령을 내린 뒤 군단 사령부로 돌아갔다. 포위망 속의 장병들은 이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야, 군단장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공황상태에 빠진 2개 사단은 싸워 보지도 않고 방대산(해발 1436m)을 타고 후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하면서 흩어지고 지휘체계는 마비되었으며 조직이 와해되어 버렸다. 군대가 군중으로 변했다.
지휘체계 무너지면 사단장이나 이등병이나 개인으로 돌아가 자신의 체력(體力)만 믿고 제 살길을 찾아간다. 보고체계나 통신도 마비된다. 장교들은 붙잡힐 때를 대비해 계급장을 떼 버린다. 옥수수를 먹고 있는 사병에게 허기진 장교가 좀 달라고 해도 거절당한다. 군악병은 나팔이 무겁다고 버리고 갔다. 심지어 시계도 무겁게 느껴져 풀어 던져 버렸다. 중화기(重火器)도 버렸다. 높이 1000m가 넘는 산과 계곡,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사흘간 달아나는 과정에서 중공군의 매복, 요격, 추적을 받은 양 사단 약 2만명 중 6000명 이상이 전사(戰死), 아사(餓死), 부상, 실종되었다.
5월 18일, 미군은 국군이 현리에 버리고 간 수백 대의 차량과 대포들을 폭격하여 불태워 버렸다. 5월 23일 유엔군은 반격을 개시, 실지(失地)를 회복했다. 화가 난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국군 3군단을 해체하여 9사단을 미 3사단에, 3사단을 국군 1군단에 배속시켰다.
6사단의 奮戰
6·25 남침 때 춘천을 지키던 제6사단(사단장 金鐘五)은 압도적 전력(戰力)을 가진 북한군 2개 사단의 기습을 받고도 사흘간 버티었다. 국군의 퇴로를 수원에서 끊어 섬멸한다는, 북한군의 전략을 못 쓰게 만들었다. 춘천에서 북한군의 남진(南進)을 3일간 저지한 것이 한국을 살렸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6사단 소속 중대장이었던 이대용(李大鎔)씨는 1975년 월남이 적화(赤化)될 때 정보부 소속 공사로서 교민들을 탈출시키고 잔류(殘留), 5년간 감옥살이를 한 뒤 생환(生還)한 분이다. 그는 6사단이 기습을 당하고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원칙에 충실했다. 북한군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연대장의 지휘하에 호(壕)를 파기 시작했다.
둘째, 공세적 방어로 대처했다. 6·25가 나기 전에 38선상에서 인민군과 전투를 해 보았고 자신감이 생겼다. 인민군이 몰려내려 왔어도 겁을 먹지 않았다. 서북(西北) 청년 출신들이 많아 적개심이 대단했다.
셋째, 포병(砲兵)의 화력 효과가 컸다. 인민군은 사람이 없는 곳에도 무작정 포를 쏴 대었던 반면, 우리 포병부대는 전선의 가장 가까운 곳에까지 가서 포격을 했다.
넷째, 연대장(林富澤 중령)의 지휘통솔력이 탁월했다. 평소 사병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따뜻하게 보살폈는데 전투가 벌어지자 후방으로 빠져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최일선에 나와 독려했다. 존경하는 연대장이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戰場)에 의연히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병들의 사기(士氣)는 백배 올라갔다.
다섯째, 지형(地形)의 유리함을 최대한 이용했다.”
가장 센 군대는 지휘관이 미국인, 참모는 독일인, 병사는 일본인인 군대라고 한다. 가장 약한 군대는 지휘관이 중국인, 참모는 일본인, 사병은 이탈리아인이란다. 물론 우스개이다.
프랑스는 문화대국일 뿐 아니라 군사강국이었고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을 배출한 나라이지만 전사(戰史)를 읽어 보면 기복이 심하다. 나폴레옹 군대처럼 영웅적으로 싸우는가 하면 영·불(英佛) 백년전쟁(1415년 아진코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분의 1밖에 안되는 英軍에 대패, 1만명을 잃었다), 보불(普佛)전쟁,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다수 병력을 갖고도 무너졌다. 모든 조직붕괴는 지도층이 위기를 만나 공황상태에 빠질 때 일어난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구멍이 보인다는 속담에 진리가 있다.
나치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한 달 뒤인, 1939년 10월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 서부과(西部課)는 프랑스군의 행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프랑스 군인들은 감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전쟁의 목표가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피해를 크게 보면 부대는 내부로부터 흔들리게 된다. 반면, 프랑스군은 설득력 있는 말을 들으면 쉽게 사기가 고양(高揚)된다. 국토를 지키는 전쟁에서는 항상 열정적으로 격렬하게 싸운다. 프랑스군의 핵심적 문제점은 너무 조심한다는 것이다. 대담한 작전으로 큰 전과(戰果)를 거두는 것보다 안전성을 항상 우선시킨다.>
“무식하면 용감할 수 없다”
기습을 당하거나 사고를 당하였을 때 조직붕괴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지휘체계가 살아 있어야 한다. 상관의 명령이 먹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전 때 가장 잘 싸운 지휘관으로 평가받는 이병형(李秉衡) 장군(2군 사령관 역임)은 생전(生前) 인터뷰에서 이런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저는 전투를 통해 적나라한 인간본성을 관찰하면서 그동안 알려진 풍문과 달리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 용감하게 싸운다는 사실을 인상 깊게 체험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염치가 없고 자기 가족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 때문에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부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 전투에서 이기는 최상의 비결이더군요. 이런 사실을 부하들이 이해하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활기차고, 용맹해지며, 자신들의 생명을 바쳐 지휘관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하더군요.
행군 도중에 도로에 나무가 쓰러져 있을 때 부비트랩이 설치되었는지 조사하기 위해 제가 앞으로 나가려면 병사들이 먼저 뛰어가 처리합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병사들이 흔쾌히 죽음의 언덕으로 돌진해 가는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인간은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표출됩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군사적 판단을 해야 할 때 군 경험이 없는 국군통수권자나 정치인들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군 경험이 없는 인사들이 우리 사회 지도부를 구성할 때 국가안보에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됩니다.”
愛國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
“애국(愛國)이란 국가의 주체인 국민, 즉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선진국들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 국가관과 전쟁관을 길러 왔습니다. 전투에서 부상한 전우(戰友)를 살리기 위해 업고, 메고, 사지(死地)를 탈출하면서 평상시에는 느낄 수 없는 진한 우정과 우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는 무사(武士) 통치의 역사발전단계를 거쳐 온 선진국들과 경쟁하려면 국민정신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국민을 산업 노동자와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그들의 의식수준을 기사도(騎士道)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어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지도부는 사무라이제도를 폐지하고 선진국의 근대국가제도를 모방하여 국민정신교육을 강화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사범학교를 세워 사무라이를 교사로 양성해 평민을 사무라이정신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을 시켰습니다. 일제(日帝)시대 교사들이 칼을 차고 교단에 선 이유는 자신이 사무라이 출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죠.”
“전쟁기념관을 건립할 때의 일화(逸話)입니다. 6·25의 재조명을 위해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 참전국 학자들이 모여 심포지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전쟁문학을 전공한 미국의 윌리엄스 교수가 날카로운 지적을 하더군요. 미국의 전쟁문학은 영웅을 설정하여 그의 활약과 교훈을 전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전쟁문학을 분석해 보니 내용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데 놀랐다고 하더군요. 전쟁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고생했고, 고통을 받았으며 비참했는가를 나열하는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영웅을 만들지 못하고, 전쟁을 개인적인 고통으로 해석, 이를 혐오하는 이유는 국가 지도부가 평민을 양반화하는 국가관 교육을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국가단위에서 가장 큰 ‘조직붕괴’는 국군통수권자이기도 한 최고 지도자가 외교적·전략적 오판(誤判)을 할 때 일어난다. 과대망상증이나 인기주의에 휩쓸리면 최단기간에 국가를 전쟁이나 망국(亡國)으로 몰고가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電文 왜곡
1870년 초, 독일의 프러시아 왕가(王家·호헨촐레른)에 속한 레오폴드 왕자(王子)는 혁명으로 공석이 된 스페인 왕위(王位)의 계승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은 구교(舊敎) 국가인 스페인과 신교(新敎) 국가인 프러시아의 연대(連帶)를 걱정하여 레오폴드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였다. 필요할 경우 전쟁도 불사한다는 암시까지 주었다. 7월 레오폴드는 왕위계승 의지를 포기하였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이끌던 프러시아 정부의 외교적 패배로 비쳤다.
프랑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과욕(過慾)을 부린다. 프러시아 왕가의 굴복을 요구한 것이다.
프랑스 외무장관(Duc de Gramont)은, 주(駐) 프러시아 프랑스 대사(빈센트 베네데티)에게, 프러시아 왕으로부터 ‘다시는 우리 집안에서 스페인 왕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라는 훈령(訓令)을 보냈다.
7월 13일,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는 휴양 중이던 엠스에서 산보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대사가 접근하여 본국의 메시지를 구두(口頭)로 전했다. 빌헬름 1세는 정중하게 대사의 제안을 거절했고, 두 사람은 다소 냉랭하게 헤어졌다.
왕의 비서가 두 사람의 대화를 적어 베를린의 비스마르크 수상에게 알렸다. 이는 ‘엠스 전보’로 유명해진다. 비서가 작성한 보고문은 이러했다.
<국왕 폐하께서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베네데티 백작이 산책로에서 짐을 가로막더니 성가시게 하는 태도로, ‘짐은 호헨촐레른 가문 왕자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해 다시는 동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전보로 보내도록 윤허(允許)해 달라고 요구했음. 그런 식의 약속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만큼,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음. 물론 짐은 그에게 ‘짐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고, 짐보다 당신이 파리나 마드리드를 통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우리 정부가 그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음은 잘 알 것’이라고 말했음.
(장관 중 한 명의 조언을 받으신) 국왕 폐하는 상기 요구사항에 대해 더 이상 베네데티 백작을 만나시지 않겠다 하시고, 이 문제에 대해 백작이 이미 파리로부터 전달받은 것과 같은 내용을 폐하께서 (레오폴드로부터) 확인받으셨으니 대사에게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부관(副官·adjutant)을 통해 전달하도록 명하셨음. 폐하는 각하(비스마르크)께서 이번 베네데티 백작의 새로운 요구사항과 이를 거절한 사정을 우리 대사들과 언론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음.”>
비스마르크는 이 전문(電文)을 짜깁기하여 언론에 공개했다.
<스페인 왕국 정부가 프랑스 제국 정부에 호헨촐레른의 왕자가 (왕위 계승을) 포기하였다는 통보를 했다는 뉴스가 나온 후, 프랑스 대사는 (빌헬름 1세) 폐하께서, 앞으로 영원히, 호헨촐레른 가문 사람이 스페인 왕의 후보가 되려고 한다면 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전보를 파리로 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폐하는 이에 대사를 재차 접견하는 것을 거부하고, 부관(adjutant)을 통하여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을 대사에게 전했다.>
선동 여론에 휘말려 전쟁 들어간 나폴레옹 3세
프랑스 통신사 《아바(Havas)》는 비스마르크의 발표문을 번역하면서 중요한 왜곡을 했다. 통신은 대사의 다소 무례한 요구를 ‘질문’이라고 오역했다. 부관(adjutant)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쓰는 바람에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 식으로 해석했다. 프랑스에서 ‘adjutant’는 하사관이지만 독일에선 고급 장교이다. 통신사의 왜곡이 프랑스의 많은 신문에 실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빌헬름 1세가 프랑스 대사와 조국을 모욕했다고 흥분하게 되었다. 이 보도가 나온 날은 하필 프랑스 혁명기념일인 7월 14일이었다. 감정적인 프랑스인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런 반프러시아 정서는 언론을 통하여 베를린으로 전달되어 이번엔 프러시아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노린 바였다.
그는 독일통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프랑스와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판단,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대중영합적인 나폴레옹 3세, 언론의 왜곡 선동, 이성을 잃은 군중의 흥분이 내심 전쟁을 바라던 비스마르크에게 걸려든 것이다. 프랑스가 먼저 전쟁을 걸어 오니 프러시아로서는 피해자 입장에서 외교적 대응을 하기가 쉬웠다.
외교를 내치(內治)에 이용한 인기영합주의자 나폴레옹 3세는 군사적 승리를 확신하였을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도 프랑스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오판(誤判)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신병(身病)으로 막상 전쟁개시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워낙 여론이 들끓으니 할 수 없이 7월 19일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4000만명을 육박했지만 프러시아는 2400만 정도였다. 다수 유럽 나라들도 프랑스의 승리를 점쳤다.
프랑스의 敗戰
1870년 9월 1일 세단에서 나폴레옹 3세와 휘하 군대 10만명이 프러시아의 참모총장 대(大)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20만 대군에 포위당하였다가 항복했다. 보불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는 독일의 수십 개 영방(領邦)국가를 통합하여 통일독일제국을 건설한다.
세단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은 항복교섭을 하면서 비스마르크에게 이렇게 간청했다고 한다.
“프랑스군이 명예롭게 항복하도록 해 주시오. 우리는 무기를 갖고 편제를 갖추어 퇴각하고, 다시는 프러시아 군대와 싸우지 않겠소. 이렇게 해야만 장차 우리 두 나라 사이에는 원한과 복수전이 없을 것이오.”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는가. 프랑스는 지난 2세기 동안 우리 독일을 서른 번이나 침략하였다는 것을.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비스마르크는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하고 있던 기간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러시아 왕 빌헬름 1세를 독일제국의 황제로 추대하는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했다. 독일민족으로서는 통쾌한 복수의 상징적 행사였지만 프랑스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독일이, 이듬해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통해서 알자스와 동부 로렌 지방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간 것은 크나큰 후유증을 남겼다. 알자스는 주민이 원래 독일 사람들이었지만 로렌은 프랑스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이다.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는 그 뒤 사사건건 독일과 적대(敵對)관계에 설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대항하려는 유럽의 모든 국가는 일단 프랑스와 손잡으려고 했다. 프랑스-독일의 리턴 매치는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알자스 합병에서 이미 예비된 셈이다.
核개발 카드를 공식 포기한 대통령
지난 7월 초의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 방한(訪韓)은 국내정치에서 보여준 박근혜식 포퓰리즘이 외교에 적용될 때 친중반일(親中反日) 외교노선을 넘어 친중반미(親中反美)로 흐를 위험성을 노출시켰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의 공동성명엔 한국의 안보와 국익에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대목이 있었다.
<양측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한반도 비핵화 실현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6자회담 참가국들의 공동의 이익에 부합되며, 관련 당사국들이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이러한 중대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가장 중요한 문장에 북핵(北核)이란 말이 없다. 핵을 개발하지 않고 있는 한국을 끌고 들어가 ‘양측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이라고 했다. 북한뿐 아니라 한국의 핵개발도 반대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지 못하고 미국의 핵우산 보장 약속도 믿을 수 없게 되면 국가생존 차원에서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자위적(自衛的) 핵무장을 선언할 권리가 있다.
핵미사일을 실전(實戰)배치한 적(敵)의 공격으로 국가가 망하지 않고 국민이 죽지 않으려면 마지막 수단으로 자위적 핵무장을 해야 하는데, 이는 일종의 자연법적(自然法的) 권리라고 할 것이다.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로 하여금 “우리가 북(北)의 핵개발을 막지 못하면 한국이 핵개발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해야 우리의 외교에 힘이 붙는다.
미국 정부도 중국을 압박할 때 “중국이 북핵 해결에 협조하지 않으면 일본과 한국이 핵무장을 할지 모른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대한민국 대통령이 중국 주석에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북핵 해결 카드 하나를 바친 꼴이 되었다. 국제관계에서, 특히 공산국가에 대하여 무엇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은 가장 하수(下手)의 외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닉슨 미국 부통령에게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미국에도 유리하다”고 충고한 적이 있다. 닉슨은 그 뒤 공산권을 상대하면서 늘 이 충고를 염두에 두었다고 회고록에 썼다. 전쟁범죄의 전과(前科)가 있는 집단이 이미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거나 실전배치가 임박한 상황에서 그 피해 당사자가 가장 유효한 (아마도 유일한) 대응책인 자위적 핵개발 포기를 선언한 것은 국가 생존권의 포기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의 후견자(後見者)와 손잡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핵개발을 확고히 반대한다”고 선언한 꼴이다. 강도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왜 피해자(한국)가 “앞으로 우리는 경비원을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는가?
미국 戰術 核무기 再배치 카드도 포기
‘한반도에서의 핵개발 반대’에 이어 ‘한반도 비핵화 실현’이란 말이 또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과 한 공동선언에선 ‘북한의 비핵화’라고 하더니 중국과 한 선언에선 ‘한반도 비핵화’라고 한다. 외교부에 물으면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의 비핵화’를 의미한다는 해명을 한다. 한국인의 국어(國語)실력을 조롱하는 말이다. 안보외교상 가장 중요한 단어를 상대에 따라 지조 없이 쓰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란 말을 통해서 박근혜 대통령은 북핵 대응의 또 하나 유력한 카드를 버렸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한 상황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자위적 핵개발, 미국 전술핵(戰術核) 재(再)배치, 미사일방어망(MD) 건설 등이다. 1990년대 초 미국은 휴전 이후 한국에 배치하였던 전술핵무기를 철수시켰다. 한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우리가 핵개발을 하지 못한다면 철수한 미군 전술핵을 한국에 재배치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재배치한 전술핵에 대한 공동사용권도 가져야 한다” “전술핵 재배치를 거부하면 핵개발을 하겠다고 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한다.
적이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한 뒤, 발사단추를 누르면 10분 안에 핵폭탄이 수도권 상공에서 터지는데, 우리는 대응 핵도, 미사일 방어망도 없는 무장해제 상태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는 미국의 핵우산 제공 약속을 믿게 하는 유일한 대응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중국에 약속, 이 카드를 버렸다. ‘한반도 비핵화’에는 한국에 미국의 핵무기를 재배치하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북한이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 낸 용어이고, 중국 또한 그런 뜻으로 쓰는 데 대한민국 대통령이 동의한 것이다.
6者회담이란 사기극
중국이 주도한 6자회담은 북핵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북한이 핵무장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게 해 주는 데는 성공했다. 북핵 저지를 위한 강제수단을 배제한 회담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11년이 흘렀다. 이번 한중 정상(頂上) 공동성명은 또 다시 “관련 당사국들이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이러한 중대한 과제를 해결해야” 운운했다. “양측은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하여 관련 당사국들이 6자회담 프로세스를 꾸준히 추진하며”라고 합의하기도 했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하는 단계에서도 아직 한국 대통령이 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문제를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만 해결하겠다고, 북한의 후견세력에 약속했다. 미국과 일본조차도 북핵 제거에 대한 한국의 국가적 의지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피해 당사국이 이렇게 소극적인데 북한의 핵무기로부터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는 나라들이 대신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겠는가?
한국으로 시진핑을 초대하여 이뤄진 회담에서 왜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저자세로 일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언론은 시진핑이 북핵 반대를 확고히 했다고 왜곡, 미화한다. 북핵의 ‘북’ 자도 안 나오는 공동성명을 친중적(親中的)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국인의 오랜 대중(對中) 사대주의(事大主義) 근성(根性)이 좌익 득세와 맞물려 되살아나면서 자유와 번영의 생명줄인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흐름을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주는 공동성명이었다.
중국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국가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문장을 굳이 넣을 필요가 있었는가?
<중국 측은 세계에 하나의 중국만이 있으며, 대만은 중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분임을 재천명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충분한 이해와 존중을 표시하고(후략)>
미국은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한국 정부도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시진핑의 페이스에 말렸는지 기존의 정부 방침과 다른 발언을 했다. 한중 정상(박근혜-시진핑)은 7월 4일 서울 성북동 가구박물관에서 오찬을 함께 하면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헌법해석 변경에 대해 여러 나라가 우려하고 있고, 일본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자위권 확대에 반대하는 상황에 주목하면서 일본 정부가 자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정치를 지양하고 평화헌법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방위안보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는 것이다.
고위 외교관 출신의 한 인사는 이런 평을 했다.
“시진핑은 립서비스만 하는데 한국 언론이 너무 미화한다. 중국은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의가 없다.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는 한국에 득(得)이 된다. 우리의 주권을 침범할 가능성도 없다. 우리가 싫으면 얼마든지 한국 영토 내에서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거부할 수 있다. 즉, 유리한 경우만 골라서 취할 수 있다. 한국 대통령이 중국 주석과 함께 집단자위권을 비판했다니! 약(藥)과 독(毒)을 구분 못하고 있다. 정말 이 나라는 큰일이 났다.”
일본이 동북아에서 집단자위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거의가 동맹국인 미국이 중국이나 북한의 공격을 받을 때이다. 일본엔 한국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의 후방 기지가 있고, 한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을 때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로부터 함정과 전투기가 발진, 한반도에서 작전을 펴야 한다. 이때 일본이 미군을 도우려면(즉, 한국을 도우려면) 집단자위권 행사가 필요하다. 그런 권한이 없다면 미군뿐 아니라 한국군의 대북(對北) 작전이 원활하게 되지 않아 우리는 안보상 피해를 본다.
외교적 不渡사태 직면한 한국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 비판은, 적(북한정권)의 후견세력인 중국 편에 서서 동맹국 미국을 간접 비판하는 모양새였다. 미국의 눈에는, 중국의 심부름꾼 역할에 충직한 것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한미동맹이 약해지면, 미사일방어망도 안 만들고, 핵무장도 하지 않는 한국을 중국이 계속 존중해 줄까?
박 대통령은 지금 국력 이상의 외교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잔고(殘高) 이상의 어음을 발행하면 부도가 나듯이 국력을 넘어선 강경책을 펴면 외교적 부도가 나는 수가 있다.
박 대통령은 납치자 문제를 둘러싼 일·북(日北) 접근도 비판하였는데, 한일관계가 좋았더라면 일본의 그런 일방적 대북 접근은 한국의 양해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반일(反日)외교의 무력(無力)함을 드러낸 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유엔헌장도 세계 모든 국가들은 집단적 자위권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한국이 유엔에 가입할 때 헌장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으므로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논리적으로 반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헨리 키신저는 《외교》라는 책에서 보불전쟁으로 몰락한 나폴레옹 3세에 대하여 ‘여론에 민감한 그는 그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교정책을 오락가락 하게 만들었다’고 혹평했다. 반면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목표로 놓고 여론을 이용, 냉정한 외교를 했다. 엠스 전보 사건에서 보듯이 나폴레옹 3세는 여론을 따라갔지만 비스마르크는 여론을 만들었다. 선악(善惡) 평가는 달리할 수 있으나 김정은, 시진핑, 아베가 국가이익을 중심으로 한 외교와 전략을 펴고 있다는 데는 이견(異見)이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가 나폴레옹 3세처럼 국익보다 자신의 인기나 여론(또는 감정)을 더 중시한다면 시진핑, 김정은, 아베한테 이용당하고 한국은 외교적 부도사태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세월號와 대한민국號
세월호 사고는 풍랑이 없는 평온한 바다에서 일어났다. 조각배가 아니라 큰 배였다. 뒤집어지는 데 불과 100분 정도 걸렸다. 선사(船社)의 돈벌이 위주의 안전무시 경영, 감독기관의 결탁, 증축(增築)에 의한 무게중심의 상향(上向), 화물 과적(過積), 고박(固縛) 부실, 평형수(平衡水) 줄이기, 이에 따른 복원력(復原力)의 약화, 자격 없는 선장과 선원들, 대피훈련 부족 등의 요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축적되어 가다가 10도 정도의 변침(變針)으로 이들 모든 요인이 결합되어 폭발한 결과였다.
대한민국호(號)에서도 이런 전복(顚覆) 요인들이 쌓여 가고 있음은 확실하다. 국가지도부의 무책임과 무능력, 종북세력의 준동, 선동언론의 발호, 국회의 반국가적 행태, 좌편향 국사 교과서, 공무원 집단의 기회주의, 대통령의 인기주의 외교 등이 어떤 외부 요인에 의하여 직렬로 연결되어 폭발한다면 세월호처럼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때 새누리당 정권이 이준석 선장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고지전(高地戰)에서의 승패(勝敗)는 8부 능선에서 지휘관이 일어서면서 “돌격!” 명령을 내릴 때 몇 사람의 부하가 행동을 같이하느냐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한다. 평소 부하들을 아끼던 지휘관일수록 성공률이 높았다. 정권 지지층이 대통령에 대하여 배신감을 품기 시작한 대한민국에선 그런 결단의 순간이 닥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판이다.⊙
보수층의 박 대통령 비판은 좌파(左派)의 비판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동체의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보수세력이고 이들이 대통령의 주된 지지층이었다. 이들이 비판을 넘어서 반대로 돌아서면 정권이 불안정해진다. 군대에서 사병이 사령관을 욕하는 것과 장교가 비판하는 것의 성격이 다르듯이.
‘이제 진정한 여론이 어떤 건지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안은정씨는 보수 지지층을 ‘집토끼’에 비유하였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이제 법과 원칙이란 가소로운 말은 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껏 어떤 여론을 살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진짜 숨어 있던 여론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보수 지지자들이 집토끼라 생각해서 무시해도 될 거라 생각했다면, 이제부터 집토끼들이 화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십시오.>
임미숙씨는 ‘전교조보다 의리 없는 대통령’이란 제목의 글에서 ‘어제 처음으로 민주당하고 전교조가 부러웠습니다’란 말로 시작했다.
집토끼들의 배신감
<그들은 자기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사활(死活)을 거는데, 대통령은 진실을 코앞에 놔두고 도망가기에만 바빴습니다. 김종훈, 안대희, 문창극은 대통령이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해서 모두 낙마한 겁니다. 하이에나한테 뜯기든 말든 내버려두고 방관하는 자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젠 방송에 나오는 대통령 모습도 보기 싫고, 뭐 하나 다 가식으로 느껴지고 모든 게 엉망입니다. 대통령이 보수에 던져준 이 충격파 상처가 대통령 임기 내에 아물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젠 더 이상 보수는 대통령의 팬클럽이 아닙니다. 거짓에 항복하고 왜곡된 여론에 항복하는 대통령의 낮은 수준을 어제 자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는 마음에 안 들지만 대통령을 생각해서 새누리를 찍은 사람들이 엄청 많을 겁니다. 저도 그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새누리가 무너지면 대통령이 무너지니 그것만은 막아 보겠다고 온 집식구가 투표장으로 향해 새누리를 찍고 왔습니다. 그래서 배신감이 백배 더 드는 겁니다. 집토끼들이 나가면 집에 다시 들어올 것 같습니까?
한 번 배신감을 가지면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 텐데 왜 문창극 후보를 버리셨습니까?
당신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온 겁니다. 그것도 51.6%가 당신한테 준 권력입니다. 51.6%의 국민을 바보로 만드니 좋습니까? 속 시원합니까? 나라의 국익보다 진실보다 대통령의 인기가 더 중요합니까? 이 상처가 언제 아물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각부터 대통령과 새누리에 대한 관심 일절 끊을 겁니다.>
원한과 경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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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무초 전 주한미국대사. |
<저는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의 온누리교회 강연 동영상 전부를 시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종교가 없는 제가 온누리교회에 다니고 싶어질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강연은 흠을 잡기가 힘든 것이었음을 제 양심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이런 애국자를 청문회에 세울 수 없다면 그 누구를 청문회에 세우려 하십니까!
청문회를 통과해서 꼭 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청문회까지는 가야 그게 정상입니다. 이런 일 하나 정상화로 만들지 못하는 청와대가 무슨 ‘기본이 바로 선 국가를 위한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야기하십니까? 그러니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화면 우측 배너 ‘기본이 바로 선 국가-비정상의 정상화’ 배너 당장 내리십시오!>
한국 보수층의 정치적 판단 기준은 헌법, 사실, 국익(國益)이다. 그들 눈에는 박 대통령이 선동세력으로부터 국가적 진실을 수호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인기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피해야 할 점이 두 개 있다고 했다. 경멸을 받는 것, 그리고 원한을 사는 것.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이 지지자들로부터 이 정도의 본질적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조직붕괴’의 전(前) 단계가 아닌지 주의해야 할 일이다. 집토끼의 반란은 산토끼의 도주와는 성격이 다르다.
세월호 사고와 KBS의 편파방송 파동을 겪으면서 한국에선 ‘국가적 진실’을 담보하는 두 개의 기준이 무너졌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권위와 보수언론의 신뢰성이 그것이다. 보수언론마저 선동에 합세하고, 대통령이 이에 굴복한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국민들이 기댈 곳을 좁히고, 외교와 안보에도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월드컵 준결승전, 브라질-독일전(戰) 축구 중계방송을 보면서도 ‘조직붕괴’라는 말이 생각났다. 브라질팀은 개인기는 뛰어나도 조직윤리가 무너졌다.
군대든 회사든 축구팀이든 모든 조직은 지도력과 팀워크를 바탕으로 조직의 성공(승리, 돈벌이 등)을 목표로 한다. ‘조직붕괴’가 일어나면 ‘조직윤리’가 무너져, 상하(上下) 구분이 사라지고, 정상적인 사고(思考)가 마비되며, 개별적으로 행동한다. 세월호 사고도 배가 급히 기우니 선장과 선원들의 조직윤리, 즉 직무(職務)의식과 지휘계통의 작동이 정지된 경우이다.
한국-알제리 축구전의 전반에서도 한국팀은 ‘조직붕괴’의 현상을 보였다. 홍명보 감독은 지도력을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조직붕괴를 막을 책임은 지휘관에게 있다. 지도자는 어려울 때를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다. 모두가 잘나갈 때는 지도자가 필요 없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월드컵 후, “한국 선수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잘할 때와 못할 때의 차이가 크다”는 평을 했다. 히딩크 감독이 지휘할 때 한국팀은 어이없이 지는 경우가 없었다. 한국선수들의 단점을 보완, 조직붕괴를 막았다는 이야기이다.
한국군은 6·25 남침이란 기습을 받았지만 조직붕괴는 없었다. 후퇴는 했지만 부대 단위의 집단투항이 없었다. 인천상륙 작전으로 북진(北進)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조직이 붕괴, 부대 단위로 항복했다.
한국전 때 주한 미국대사였던 존 J. 무초는 1971년 1월과 2월, 워싱턴에서 ‘역사 기록을 위한 육성(肉聲) 증언’ 프로그램에 응했는데, “그날 한국군은 기습을 당하고도 참으로 잘 싸웠다”고 말했다. “한국군의 조직적인 저항과 전선(戰線)의 폭우(暴雨)가 한국을 구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호의 선장은 ‘이승만級’이라야
그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 대하여는 비판과 칭송을 섞었다.
<이 대통령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한 목표를 위해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강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 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고차원(高次元)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감정적으로 되면 그는 독립투사 시절의 본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으나 위기 때 일처리를 잘했으며 자신의 뜻을 고급 영어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의 영어는 글과 말 무엇이든지 유창했습니다. 그는 제퍼슨류(類)의 민주주의자임을 자랑했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많은 사람은 외국인 부인(편집자주: 프란체스카 여사)이 그에게 큰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군은 기습을 받고도 ‘조직붕괴’를 겪지 않았다. 지휘계통이 살아 있어 후퇴할망정 부대 단위로 항복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미군이 곧 도우러 올 것이란 소문이 돌았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어 공황(恐惶)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75~78세 사이에 전쟁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 나이에도 국내외의 적대(敵對)세력-때로는 미국 정부-와도 싸우면서 정권을 유지하고 국가의 방향타를 놓지 않았다. 무초의 평대로 생존의지가 강하고, 어려울 때 일처리를 잘했으며,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한 덕분이었다.
핵(核)무장한 북한정권, 이들을 추종하는 종북(從北)세력, 국력(國力) 팽창기의 중국, 전쟁할 수 있는 나라 되기를 선언한 일본, ‘아시아로의 중심 이동’을 정책화한 미국. 그 사이에서 핵무장을 포기한 한국이 있다. 황천(荒天)항해를 각오해야 하는 대한민국호의 선장은 ‘이승만급(級)’이라야 하는데, 선원들(보수층)에게도 신뢰받지 못한다면?
모든 사고는, 군사적 용어로 설명한다면 ‘기습’이다. 예고되지 않은 장소에서 예고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브라질 축구팀이 7분 안에 네 골을 먹은 것이나 세계최강의 육군을 갖고 있다고 평가되던 프랑스가 1940년 5월 히틀러의 독일군으로부터 ‘아르덴 기습돌파’를 당하자 6주 만에 항복한 것은 기습상황에서 지도력이 마비된 탓이다.
기습을 받는 등 불리할 때도 잘 싸우는 군대로는 영국군, 독일군, 일본군을 친다. 오랜 군사문화, 지휘관의 솔선수범, 강인한 민족성, 평소 훈련이 모인 결과일 것이다. 한국군은 남침기습을 당하고선 무너지지 않았지만 1951년 5월 동부전선의 중공군 대공세 때는 3군단 2개 사단이 와해된 적이 있다.
5월 17일 새벽에 두 사단의 유일한 퇴로(退路)가 지나는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 우회 점령되었다. 3군단 소속 2개 사단 약 2만 병력과 수백 대의 차량이 전방 방어선을 포기, 현리 부근으로 집결했다. 밀려든 병력과 차량으로 폭 5m도 안 되는 좁은 길이 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9사단 28연대 부(副)연대장이던 염정태 중령은 이렇게 말했다.
“유일한 후퇴로가 막혀 버려 아군(我軍)이 중공군의 포위망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리 부근에 모여 있던 장병들 사이에는 공포감이 확산되었습니다. 밤이 오고 오마치 돌파에 실패하자 순식간에 집단적인 공황상태가 빚어졌어요. 아직은 중공군이 현리 쪽으로 집중사격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장병들은 뿔뿔이 방대산으로 기어올라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휘체계가 무너져 버린 것은 적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공포감 때문이었습니다.”
3軍團 와해
‘영천 회전(會戰)의 영웅’ 유재흥(劉載興) 당시 3군단장은 17일 오후 현리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작전명령을 내린 뒤 군단 사령부로 돌아갔다. 포위망 속의 장병들은 이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야, 군단장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공황상태에 빠진 2개 사단은 싸워 보지도 않고 방대산(해발 1436m)을 타고 후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하면서 흩어지고 지휘체계는 마비되었으며 조직이 와해되어 버렸다. 군대가 군중으로 변했다.
지휘체계 무너지면 사단장이나 이등병이나 개인으로 돌아가 자신의 체력(體力)만 믿고 제 살길을 찾아간다. 보고체계나 통신도 마비된다. 장교들은 붙잡힐 때를 대비해 계급장을 떼 버린다. 옥수수를 먹고 있는 사병에게 허기진 장교가 좀 달라고 해도 거절당한다. 군악병은 나팔이 무겁다고 버리고 갔다. 심지어 시계도 무겁게 느껴져 풀어 던져 버렸다. 중화기(重火器)도 버렸다. 높이 1000m가 넘는 산과 계곡,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사흘간 달아나는 과정에서 중공군의 매복, 요격, 추적을 받은 양 사단 약 2만명 중 6000명 이상이 전사(戰死), 아사(餓死), 부상, 실종되었다.
5월 18일, 미군은 국군이 현리에 버리고 간 수백 대의 차량과 대포들을 폭격하여 불태워 버렸다. 5월 23일 유엔군은 반격을 개시, 실지(失地)를 회복했다. 화가 난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국군 3군단을 해체하여 9사단을 미 3사단에, 3사단을 국군 1군단에 배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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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전 주월공사. |
당시 6사단 소속 중대장이었던 이대용(李大鎔)씨는 1975년 월남이 적화(赤化)될 때 정보부 소속 공사로서 교민들을 탈출시키고 잔류(殘留), 5년간 감옥살이를 한 뒤 생환(生還)한 분이다. 그는 6사단이 기습을 당하고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원칙에 충실했다. 북한군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연대장의 지휘하에 호(壕)를 파기 시작했다.
둘째, 공세적 방어로 대처했다. 6·25가 나기 전에 38선상에서 인민군과 전투를 해 보았고 자신감이 생겼다. 인민군이 몰려내려 왔어도 겁을 먹지 않았다. 서북(西北) 청년 출신들이 많아 적개심이 대단했다.
셋째, 포병(砲兵)의 화력 효과가 컸다. 인민군은 사람이 없는 곳에도 무작정 포를 쏴 대었던 반면, 우리 포병부대는 전선의 가장 가까운 곳에까지 가서 포격을 했다.
넷째, 연대장(林富澤 중령)의 지휘통솔력이 탁월했다. 평소 사병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따뜻하게 보살폈는데 전투가 벌어지자 후방으로 빠져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최일선에 나와 독려했다. 존경하는 연대장이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戰場)에 의연히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병들의 사기(士氣)는 백배 올라갔다.
다섯째, 지형(地形)의 유리함을 최대한 이용했다.”
가장 센 군대는 지휘관이 미국인, 참모는 독일인, 병사는 일본인인 군대라고 한다. 가장 약한 군대는 지휘관이 중국인, 참모는 일본인, 사병은 이탈리아인이란다. 물론 우스개이다.
프랑스는 문화대국일 뿐 아니라 군사강국이었고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을 배출한 나라이지만 전사(戰史)를 읽어 보면 기복이 심하다. 나폴레옹 군대처럼 영웅적으로 싸우는가 하면 영·불(英佛) 백년전쟁(1415년 아진코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분의 1밖에 안되는 英軍에 대패, 1만명을 잃었다), 보불(普佛)전쟁,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다수 병력을 갖고도 무너졌다. 모든 조직붕괴는 지도층이 위기를 만나 공황상태에 빠질 때 일어난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구멍이 보인다는 속담에 진리가 있다.
나치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한 달 뒤인, 1939년 10월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 서부과(西部課)는 프랑스군의 행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프랑스 군인들은 감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전쟁의 목표가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피해를 크게 보면 부대는 내부로부터 흔들리게 된다. 반면, 프랑스군은 설득력 있는 말을 들으면 쉽게 사기가 고양(高揚)된다. 국토를 지키는 전쟁에서는 항상 열정적으로 격렬하게 싸운다. 프랑스군의 핵심적 문제점은 너무 조심한다는 것이다. 대담한 작전으로 큰 전과(戰果)를 거두는 것보다 안전성을 항상 우선시킨다.>
“무식하면 용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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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형 전 전쟁기념사업회장. |
“저는 전투를 통해 적나라한 인간본성을 관찰하면서 그동안 알려진 풍문과 달리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 용감하게 싸운다는 사실을 인상 깊게 체험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염치가 없고 자기 가족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 때문에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부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 전투에서 이기는 최상의 비결이더군요. 이런 사실을 부하들이 이해하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활기차고, 용맹해지며, 자신들의 생명을 바쳐 지휘관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하더군요.
행군 도중에 도로에 나무가 쓰러져 있을 때 부비트랩이 설치되었는지 조사하기 위해 제가 앞으로 나가려면 병사들이 먼저 뛰어가 처리합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병사들이 흔쾌히 죽음의 언덕으로 돌진해 가는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인간은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표출됩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군사적 판단을 해야 할 때 군 경험이 없는 국군통수권자나 정치인들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군 경험이 없는 인사들이 우리 사회 지도부를 구성할 때 국가안보에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됩니다.”
愛國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
“애국(愛國)이란 국가의 주체인 국민, 즉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선진국들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 국가관과 전쟁관을 길러 왔습니다. 전투에서 부상한 전우(戰友)를 살리기 위해 업고, 메고, 사지(死地)를 탈출하면서 평상시에는 느낄 수 없는 진한 우정과 우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는 무사(武士) 통치의 역사발전단계를 거쳐 온 선진국들과 경쟁하려면 국민정신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국민을 산업 노동자와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그들의 의식수준을 기사도(騎士道)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어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지도부는 사무라이제도를 폐지하고 선진국의 근대국가제도를 모방하여 국민정신교육을 강화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사범학교를 세워 사무라이를 교사로 양성해 평민을 사무라이정신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을 시켰습니다. 일제(日帝)시대 교사들이 칼을 차고 교단에 선 이유는 자신이 사무라이 출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죠.”
“전쟁기념관을 건립할 때의 일화(逸話)입니다. 6·25의 재조명을 위해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 참전국 학자들이 모여 심포지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전쟁문학을 전공한 미국의 윌리엄스 교수가 날카로운 지적을 하더군요. 미국의 전쟁문학은 영웅을 설정하여 그의 활약과 교훈을 전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전쟁문학을 분석해 보니 내용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데 놀랐다고 하더군요. 전쟁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고생했고, 고통을 받았으며 비참했는가를 나열하는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영웅을 만들지 못하고, 전쟁을 개인적인 고통으로 해석, 이를 혐오하는 이유는 국가 지도부가 평민을 양반화하는 국가관 교육을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국가단위에서 가장 큰 ‘조직붕괴’는 국군통수권자이기도 한 최고 지도자가 외교적·전략적 오판(誤判)을 할 때 일어난다. 과대망상증이나 인기주의에 휩쓸리면 최단기간에 국가를 전쟁이나 망국(亡國)으로 몰고가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電文 왜곡
1870년 초, 독일의 프러시아 왕가(王家·호헨촐레른)에 속한 레오폴드 왕자(王子)는 혁명으로 공석이 된 스페인 왕위(王位)의 계승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은 구교(舊敎) 국가인 스페인과 신교(新敎) 국가인 프러시아의 연대(連帶)를 걱정하여 레오폴드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였다. 필요할 경우 전쟁도 불사한다는 암시까지 주었다. 7월 레오폴드는 왕위계승 의지를 포기하였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이끌던 프러시아 정부의 외교적 패배로 비쳤다.
프랑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과욕(過慾)을 부린다. 프러시아 왕가의 굴복을 요구한 것이다.
프랑스 외무장관(Duc de Gramont)은, 주(駐) 프러시아 프랑스 대사(빈센트 베네데티)에게, 프러시아 왕으로부터 ‘다시는 우리 집안에서 스페인 왕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라는 훈령(訓令)을 보냈다.
7월 13일,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는 휴양 중이던 엠스에서 산보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대사가 접근하여 본국의 메시지를 구두(口頭)로 전했다. 빌헬름 1세는 정중하게 대사의 제안을 거절했고, 두 사람은 다소 냉랭하게 헤어졌다.
왕의 비서가 두 사람의 대화를 적어 베를린의 비스마르크 수상에게 알렸다. 이는 ‘엠스 전보’로 유명해진다. 비서가 작성한 보고문은 이러했다.
<국왕 폐하께서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베네데티 백작이 산책로에서 짐을 가로막더니 성가시게 하는 태도로, ‘짐은 호헨촐레른 가문 왕자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해 다시는 동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전보로 보내도록 윤허(允許)해 달라고 요구했음. 그런 식의 약속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만큼,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음. 물론 짐은 그에게 ‘짐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고, 짐보다 당신이 파리나 마드리드를 통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우리 정부가 그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음은 잘 알 것’이라고 말했음.
(장관 중 한 명의 조언을 받으신) 국왕 폐하는 상기 요구사항에 대해 더 이상 베네데티 백작을 만나시지 않겠다 하시고, 이 문제에 대해 백작이 이미 파리로부터 전달받은 것과 같은 내용을 폐하께서 (레오폴드로부터) 확인받으셨으니 대사에게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부관(副官·adjutant)을 통해 전달하도록 명하셨음. 폐하는 각하(비스마르크)께서 이번 베네데티 백작의 새로운 요구사항과 이를 거절한 사정을 우리 대사들과 언론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음.”>
비스마르크는 이 전문(電文)을 짜깁기하여 언론에 공개했다.
<스페인 왕국 정부가 프랑스 제국 정부에 호헨촐레른의 왕자가 (왕위 계승을) 포기하였다는 통보를 했다는 뉴스가 나온 후, 프랑스 대사는 (빌헬름 1세) 폐하께서, 앞으로 영원히, 호헨촐레른 가문 사람이 스페인 왕의 후보가 되려고 한다면 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전보를 파리로 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폐하는 이에 대사를 재차 접견하는 것을 거부하고, 부관(adjutant)을 통하여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을 대사에게 전했다.>
선동 여론에 휘말려 전쟁 들어간 나폴레옹 3세
프랑스 통신사 《아바(Havas)》는 비스마르크의 발표문을 번역하면서 중요한 왜곡을 했다. 통신은 대사의 다소 무례한 요구를 ‘질문’이라고 오역했다. 부관(adjutant)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쓰는 바람에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 식으로 해석했다. 프랑스에서 ‘adjutant’는 하사관이지만 독일에선 고급 장교이다. 통신사의 왜곡이 프랑스의 많은 신문에 실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빌헬름 1세가 프랑스 대사와 조국을 모욕했다고 흥분하게 되었다. 이 보도가 나온 날은 하필 프랑스 혁명기념일인 7월 14일이었다. 감정적인 프랑스인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런 반프러시아 정서는 언론을 통하여 베를린으로 전달되어 이번엔 프러시아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노린 바였다.
그는 독일통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프랑스와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판단,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대중영합적인 나폴레옹 3세, 언론의 왜곡 선동, 이성을 잃은 군중의 흥분이 내심 전쟁을 바라던 비스마르크에게 걸려든 것이다. 프랑스가 먼저 전쟁을 걸어 오니 프러시아로서는 피해자 입장에서 외교적 대응을 하기가 쉬웠다.
외교를 내치(內治)에 이용한 인기영합주의자 나폴레옹 3세는 군사적 승리를 확신하였을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도 프랑스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오판(誤判)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신병(身病)으로 막상 전쟁개시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워낙 여론이 들끓으니 할 수 없이 7월 19일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4000만명을 육박했지만 프러시아는 2400만 정도였다. 다수 유럽 나라들도 프랑스의 승리를 점쳤다.
프랑스의 敗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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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단 전투에서 패한 후 독일군에 항복하는 나폴레옹 3세(왼쪽). 가운데가 빌헬름 1세, 그 뒤쪽이 비스마르크. |
세단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은 항복교섭을 하면서 비스마르크에게 이렇게 간청했다고 한다.
“프랑스군이 명예롭게 항복하도록 해 주시오. 우리는 무기를 갖고 편제를 갖추어 퇴각하고, 다시는 프러시아 군대와 싸우지 않겠소. 이렇게 해야만 장차 우리 두 나라 사이에는 원한과 복수전이 없을 것이오.”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는가. 프랑스는 지난 2세기 동안 우리 독일을 서른 번이나 침략하였다는 것을.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비스마르크는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하고 있던 기간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러시아 왕 빌헬름 1세를 독일제국의 황제로 추대하는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했다. 독일민족으로서는 통쾌한 복수의 상징적 행사였지만 프랑스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독일이, 이듬해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통해서 알자스와 동부 로렌 지방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간 것은 크나큰 후유증을 남겼다. 알자스는 주민이 원래 독일 사람들이었지만 로렌은 프랑스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이다.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는 그 뒤 사사건건 독일과 적대(敵對)관계에 설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대항하려는 유럽의 모든 국가는 일단 프랑스와 손잡으려고 했다. 프랑스-독일의 리턴 매치는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알자스 합병에서 이미 예비된 셈이다.
核개발 카드를 공식 포기한 대통령
지난 7월 초의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 방한(訪韓)은 국내정치에서 보여준 박근혜식 포퓰리즘이 외교에 적용될 때 친중반일(親中反日) 외교노선을 넘어 친중반미(親中反美)로 흐를 위험성을 노출시켰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의 공동성명엔 한국의 안보와 국익에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대목이 있었다.
<양측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한반도 비핵화 실현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6자회담 참가국들의 공동의 이익에 부합되며, 관련 당사국들이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이러한 중대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가장 중요한 문장에 북핵(北核)이란 말이 없다. 핵을 개발하지 않고 있는 한국을 끌고 들어가 ‘양측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이라고 했다. 북한뿐 아니라 한국의 핵개발도 반대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지 못하고 미국의 핵우산 보장 약속도 믿을 수 없게 되면 국가생존 차원에서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자위적(自衛的) 핵무장을 선언할 권리가 있다.
핵미사일을 실전(實戰)배치한 적(敵)의 공격으로 국가가 망하지 않고 국민이 죽지 않으려면 마지막 수단으로 자위적 핵무장을 해야 하는데, 이는 일종의 자연법적(自然法的) 권리라고 할 것이다.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로 하여금 “우리가 북(北)의 핵개발을 막지 못하면 한국이 핵개발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해야 우리의 외교에 힘이 붙는다.
미국 정부도 중국을 압박할 때 “중국이 북핵 해결에 협조하지 않으면 일본과 한국이 핵무장을 할지 모른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대한민국 대통령이 중국 주석에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북핵 해결 카드 하나를 바친 꼴이 되었다. 국제관계에서, 특히 공산국가에 대하여 무엇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은 가장 하수(下手)의 외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닉슨 미국 부통령에게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미국에도 유리하다”고 충고한 적이 있다. 닉슨은 그 뒤 공산권을 상대하면서 늘 이 충고를 염두에 두었다고 회고록에 썼다. 전쟁범죄의 전과(前科)가 있는 집단이 이미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거나 실전배치가 임박한 상황에서 그 피해 당사자가 가장 유효한 (아마도 유일한) 대응책인 자위적 핵개발 포기를 선언한 것은 국가 생존권의 포기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의 후견자(後見者)와 손잡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핵개발을 확고히 반대한다”고 선언한 꼴이다. 강도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왜 피해자(한국)가 “앞으로 우리는 경비원을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는가?
미국 戰術 核무기 再배치 카드도 포기
‘한반도에서의 핵개발 반대’에 이어 ‘한반도 비핵화 실현’이란 말이 또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과 한 공동선언에선 ‘북한의 비핵화’라고 하더니 중국과 한 선언에선 ‘한반도 비핵화’라고 한다. 외교부에 물으면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의 비핵화’를 의미한다는 해명을 한다. 한국인의 국어(國語)실력을 조롱하는 말이다. 안보외교상 가장 중요한 단어를 상대에 따라 지조 없이 쓰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란 말을 통해서 박근혜 대통령은 북핵 대응의 또 하나 유력한 카드를 버렸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한 상황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자위적 핵개발, 미국 전술핵(戰術核) 재(再)배치, 미사일방어망(MD) 건설 등이다. 1990년대 초 미국은 휴전 이후 한국에 배치하였던 전술핵무기를 철수시켰다. 한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우리가 핵개발을 하지 못한다면 철수한 미군 전술핵을 한국에 재배치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재배치한 전술핵에 대한 공동사용권도 가져야 한다” “전술핵 재배치를 거부하면 핵개발을 하겠다고 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한다.
적이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한 뒤, 발사단추를 누르면 10분 안에 핵폭탄이 수도권 상공에서 터지는데, 우리는 대응 핵도, 미사일 방어망도 없는 무장해제 상태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는 미국의 핵우산 제공 약속을 믿게 하는 유일한 대응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중국에 약속, 이 카드를 버렸다. ‘한반도 비핵화’에는 한국에 미국의 핵무기를 재배치하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북한이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 낸 용어이고, 중국 또한 그런 뜻으로 쓰는 데 대한민국 대통령이 동의한 것이다.
6者회담이란 사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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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3일 기자회견을 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양국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 등에 합의했다. |
한국으로 시진핑을 초대하여 이뤄진 회담에서 왜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저자세로 일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언론은 시진핑이 북핵 반대를 확고히 했다고 왜곡, 미화한다. 북핵의 ‘북’ 자도 안 나오는 공동성명을 친중적(親中的)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국인의 오랜 대중(對中) 사대주의(事大主義) 근성(根性)이 좌익 득세와 맞물려 되살아나면서 자유와 번영의 생명줄인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흐름을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주는 공동성명이었다.
중국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국가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문장을 굳이 넣을 필요가 있었는가?
<중국 측은 세계에 하나의 중국만이 있으며, 대만은 중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분임을 재천명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충분한 이해와 존중을 표시하고(후략)>
미국은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한국 정부도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시진핑의 페이스에 말렸는지 기존의 정부 방침과 다른 발언을 했다. 한중 정상(박근혜-시진핑)은 7월 4일 서울 성북동 가구박물관에서 오찬을 함께 하면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헌법해석 변경에 대해 여러 나라가 우려하고 있고, 일본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자위권 확대에 반대하는 상황에 주목하면서 일본 정부가 자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정치를 지양하고 평화헌법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방위안보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는 것이다.
고위 외교관 출신의 한 인사는 이런 평을 했다.
“시진핑은 립서비스만 하는데 한국 언론이 너무 미화한다. 중국은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의가 없다.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는 한국에 득(得)이 된다. 우리의 주권을 침범할 가능성도 없다. 우리가 싫으면 얼마든지 한국 영토 내에서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거부할 수 있다. 즉, 유리한 경우만 골라서 취할 수 있다. 한국 대통령이 중국 주석과 함께 집단자위권을 비판했다니! 약(藥)과 독(毒)을 구분 못하고 있다. 정말 이 나라는 큰일이 났다.”
일본이 동북아에서 집단자위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거의가 동맹국인 미국이 중국이나 북한의 공격을 받을 때이다. 일본엔 한국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의 후방 기지가 있고, 한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을 때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로부터 함정과 전투기가 발진, 한반도에서 작전을 펴야 한다. 이때 일본이 미군을 도우려면(즉, 한국을 도우려면) 집단자위권 행사가 필요하다. 그런 권한이 없다면 미군뿐 아니라 한국군의 대북(對北) 작전이 원활하게 되지 않아 우리는 안보상 피해를 본다.
외교적 不渡사태 직면한 한국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 비판은, 적(북한정권)의 후견세력인 중국 편에 서서 동맹국 미국을 간접 비판하는 모양새였다. 미국의 눈에는, 중국의 심부름꾼 역할에 충직한 것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한미동맹이 약해지면, 미사일방어망도 안 만들고, 핵무장도 하지 않는 한국을 중국이 계속 존중해 줄까?
박 대통령은 지금 국력 이상의 외교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잔고(殘高) 이상의 어음을 발행하면 부도가 나듯이 국력을 넘어선 강경책을 펴면 외교적 부도가 나는 수가 있다.
박 대통령은 납치자 문제를 둘러싼 일·북(日北) 접근도 비판하였는데, 한일관계가 좋았더라면 일본의 그런 일방적 대북 접근은 한국의 양해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반일(反日)외교의 무력(無力)함을 드러낸 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유엔헌장도 세계 모든 국가들은 집단적 자위권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한국이 유엔에 가입할 때 헌장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으므로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논리적으로 반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헨리 키신저는 《외교》라는 책에서 보불전쟁으로 몰락한 나폴레옹 3세에 대하여 ‘여론에 민감한 그는 그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교정책을 오락가락 하게 만들었다’고 혹평했다. 반면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목표로 놓고 여론을 이용, 냉정한 외교를 했다. 엠스 전보 사건에서 보듯이 나폴레옹 3세는 여론을 따라갔지만 비스마르크는 여론을 만들었다. 선악(善惡) 평가는 달리할 수 있으나 김정은, 시진핑, 아베가 국가이익을 중심으로 한 외교와 전략을 펴고 있다는 데는 이견(異見)이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가 나폴레옹 3세처럼 국익보다 자신의 인기나 여론(또는 감정)을 더 중시한다면 시진핑, 김정은, 아베한테 이용당하고 한국은 외교적 부도사태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세월號와 대한민국號
세월호 사고는 풍랑이 없는 평온한 바다에서 일어났다. 조각배가 아니라 큰 배였다. 뒤집어지는 데 불과 100분 정도 걸렸다. 선사(船社)의 돈벌이 위주의 안전무시 경영, 감독기관의 결탁, 증축(增築)에 의한 무게중심의 상향(上向), 화물 과적(過積), 고박(固縛) 부실, 평형수(平衡水) 줄이기, 이에 따른 복원력(復原力)의 약화, 자격 없는 선장과 선원들, 대피훈련 부족 등의 요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축적되어 가다가 10도 정도의 변침(變針)으로 이들 모든 요인이 결합되어 폭발한 결과였다.
대한민국호(號)에서도 이런 전복(顚覆) 요인들이 쌓여 가고 있음은 확실하다. 국가지도부의 무책임과 무능력, 종북세력의 준동, 선동언론의 발호, 국회의 반국가적 행태, 좌편향 국사 교과서, 공무원 집단의 기회주의, 대통령의 인기주의 외교 등이 어떤 외부 요인에 의하여 직렬로 연결되어 폭발한다면 세월호처럼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때 새누리당 정권이 이준석 선장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고지전(高地戰)에서의 승패(勝敗)는 8부 능선에서 지휘관이 일어서면서 “돌격!” 명령을 내릴 때 몇 사람의 부하가 행동을 같이하느냐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한다. 평소 부하들을 아끼던 지휘관일수록 성공률이 높았다. 정권 지지층이 대통령에 대하여 배신감을 품기 시작한 대한민국에선 그런 결단의 순간이 닥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