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쟁 이후 ‘나라의 재상’에서 ‘당파의 재상’으로
⊙ 중종 때 영의정 지낸 정광필의 손자 정유길, 선조 때 좌의정 지내
⊙ 정유길의 아들 정창연, 광해군 때 우의정, 인조 때 좌의정 역임
⊙ 정유길의 손자 정태화는 효종 때 좌의정, 동생 정치화는 우의정 지내
⊙ 정태화의 아들 정재숭은 숙종 때 우의정, 후손 정홍순은 정조 때 우의정 지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중종 때 영의정 지낸 정광필의 손자 정유길, 선조 때 좌의정 지내
⊙ 정유길의 아들 정창연, 광해군 때 우의정, 인조 때 좌의정 역임
⊙ 정유길의 손자 정태화는 효종 때 좌의정, 동생 정치화는 우의정 지내
⊙ 정태화의 아들 정재숭은 숙종 때 우의정, 후손 정홍순은 정조 때 우의정 지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정광필
일반적으로 선조 8년(1575년)에 조선의 당쟁이 본격화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실은 이미 그전부터 조짐이 있었고 이때에 이르러 심의겸과 김효원이 인사권 문제로 충돌하면서 물밑에서 갈등하던 당쟁(黨爭)이 수면으로 올라온 것일 뿐이다.
당쟁의 폐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재상 혹은 정승이 바로 이 당파의 일원이 됨으로써 나라 전체의 인재를 쓰지 못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조 이전의 재상과 선조 이후의 재상은 그 품격에서 이미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선조 8년 이후부터 좌의정을 맡았던 이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 무렵 좌의정은 박순(朴淳)인데 그는 노골적으로 이이(李珥)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서인(西人) 계열이다. 학문이 깊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쟁이 시작되던 시기에 그것을 제어하기보다는 어느 한쪽에 서서 좌의정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당시 우의정은 노수신(盧守愼)이었는데 그 또한 서인과 관련이 깊었고 뒤에 좌의정에 오르지만 실록은 “정승으로 있는 동안 이렇다 할 건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이때부터 나라의 재상은 드물게 되고 당파의 재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정승을 국상(國相)이라고까지 했는데 이때부터는 당상(黨相)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런 한계를 감안하면서 선조 이후의 재상들을 짚어볼 때 그들의 현실 속의 모습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함부로 ‘명재상’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다.
정광필 손자 정유길
이런 맥락에서 정유길(鄭惟吉· 1515~1588년)을 살펴보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누구보다 잘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어서다.
우선 그의 배경은 든든하다. 할아버지가 중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1462~1538년)이다. 또한 훗날 서인을 좌우하게 되는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의 외할아버지다. 즉 그 이전까지는 한미한 편이었던 안동 김씨는 바로 이 정유길의 외손자였다는 사실 하나로 조정에서 발언권을 높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창연(金昌衍)도 좌의정에 올랐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유길은 겨우 이를 갈 무렵에 할아버지 문익공(정광필)이 슬하에 놓고 가르치면서 항상 부인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뒤에 반드시 나의 지위에 이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무렵 어떤 재능을 보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으로 볼 수도 있고 사람을 보는 데 밝았던 정광필이 그에게서 뭔가 특이한 점을 살핀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문장에서 일찍부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조금 장성하자 문장의 구상이 넘쳐흘러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부해져 재능이 몇 사람을 아우를 수 있었으므로 동료 중에 앞선 사람이 없었다.”
간쟁 없이 탄탄대로
관리로서 그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1531년(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그 뒤 공조좌랑, 이조좌랑, 중추부도사, 세자시강원 문학 등을 역임했다.
뒤에도 그랬지만 정유길은 당파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쏠리는 성향은 아니었다.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외척들 사이에 틈이 생겨 조정이 분분했는데 정유길은 격동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으니 사론(士論)이 귀의했다고 한다. 1544년에는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했다.
굳이 말하자면 정유길은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관리형 인재였다고 할 것이다. 1552년(명종 7년) 부제학에서 도승지가 됐다. 1560년에는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 및 이황을 추천했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필가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흔히 폭정의 시대로 불리는 명종 때 이렇다 할 간쟁(諫爭)은 없이 벼슬에만 올랐다는 것은 그리 자랑이라 할 수는 없다. 결국 먼 훗날 우의정에 제수됐을 때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 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해야 했다. 그러나 결기가 없다고 해서 자신의 뜻을 굽히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당시의 배경에 대해 외손자인 김상헌은 정유길의 묘비명을 통해 이렇게 변명했다.
〈다시 찬성(贊成)이 되었을 때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지적해 배척하니 임금의 하교에 “내가 정 아무개를 보건대 그 마음이 순실(純實)하여 정말로 경박한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들이 마음을 합쳐 나라를 도울 것은 생각지 않은 채 오직 자신들에게 빌붙지 않은 사람은 번번이 배척하고 있으니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때 선배와 후배가 서로 불신하여 당파로 나뉘는 조짐이 있었으므로 부군이 피차의 간격을 두지 않고 한결같이 화평하도록 조절하였는데, 소년(少年·신진인사)들이 일을 좋아하여 함부로 비평하며 공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굳이 요즘 식의 용어를 빌리자면 ‘어용(御用)’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사실 정유길이 걸었던 길은 큰 시각에서 보면 임금을 섬기는 바른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동서(東西)로 갈라지면서 당색을 떠나 두루 정치를 하려 했던 인물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끝자리에 정유길이 있었던 것이다.
1568년(선조 1년)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 안정에 진력했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됐다. 우의정이 사헌부에 의해 좌절된 지 2년이 지난 1583년에 다시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이 하사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됐다. 이 무렵 정유길에 대한 김상헌의 기록이다.
‘고사를 행하기에 힘쓰고 개혁하는 것에 신중’
〈고사(故事)를 행하기에 힘쓰고 개혁하는 것에 신중을 기했다. 항상 명예와 세도를 멀리하고자 문호(門戶)를 세워 사사로이 후진과 결탁하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해 누차 분분한 탄핵을 초래하였다. 부군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오래된 가문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받았다고 여겨 차마 결연히 떠나지 못하였으나 의중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부군이 꿈속에 어느 정자에 이르러 마음에 매우 들었었는데 그 뒤에 사들인 정자가 한결같이 꿈속의 경관과 같았으므로 그냥 “몽뢰(夢賚)”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집은 “퇴우(退憂)”로 편액을 걸어 만년에 휴식하는 뜻을 의탁했다.〉
1588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북인 쪽에서 편찬한 《선조실록》은 그 일에 관해 “정유길이 죽었다”고만 기록했다. 그나마 서인에서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은 조금 길긴 하다.
〈재주와 풍도가 있어 일찍부터 훌륭한 명성을 드날려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러나 천성이 화유(和裕)하고 엄하지 아니하여 권간(權奸)이 용사(用事)할 때를 당하여 이견을 표시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사론이 이를 이유로 가볍게 여겼다. 만년에 다시 등용되어 자주 공격을 받았으나 상의 권고(眷顧)가 쇠하지 아니하여 공명을 누린 채 졸하였다.〉
이 또한 졸기(卒記)치고는 그다지 긍정적이라 할 수 없다. 한마디로 정유길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이다.
정유길 아들 정창연
정창연(鄭昌衍·1552~1636년)은 정유길의 아들로 1579년(선조 12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가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는 당쟁의 불길이 점점 크게 타오르던 때였다. 4년 후인 선조 16년(1583년) 오억령(吳億齡)과 함께 이조좌랑에 제수되면서 본격 관리 생활을 시작했고 5년 후인 선조 21년(1588년) 3월 9일 동부승지가 되어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게 된다. 당시 정창연은 종4품 조산대부(朝散大夫)임에도 정3품 당상관인 승지에 오른 것인데 실록은 “상이 특별히 임명토록 했다”라고 적고 있다.
얼마 후에 정여립(鄭汝立·1546~ 1589년)의 난이 일어나 정창연도 위기를 맞는다. 그를 김제 군수로 추천한 인물들을 추적하던 중에 선조 19년(1586년)에 이조에 있었던 인물이 모두 조사 대상이 되었는데 이조판서가 이산해(李山海)였고 정창연은 이조정랑이어서 조사를 받았다.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난 정창연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년) 4월에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석 달 후인 7월 6일 좌부승지로 본래 자리로 복귀한다. 선조에 대한 그의 총애를 엿볼 수 있다.
이후 그의 승진은 눈부실 정도다. 같은 해 7월 22일 이조참판으로 옮겼고 임진왜란 직후인 이듬해 5월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벼슬살이 시작한 지 10년 만에 판서에 오른 것이다. 이때 정창연은 세자 좌빈객도 겸하게 되는데 이는 그만큼 행실이 두터웠다는 뜻이다.
선조 26년(1593년) 1월 16일 대사헌에 제수된 정창연은 5월 6일에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된다. 이후 정창연은 다시 대사헌 좌참찬 예조판서를 순환하며 직무를 수행했는데 이렇다 할 문책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재(吏才)가 뛰어나고 글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98년(선조 31년) 12월 6일 처음으로 사헌부 지평 구의강(具義剛)과 사간원 정언 권진(權縉)이 “전 풍원부원군 류성룡의 삭탈관작을 명하소서”라고 하자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 이때 대사헌이 정창연이었다. 처음으로 당쟁과 관련된 문제에 그의 이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듬해 1월 14일 대사헌 정창연은 이원익(李元翼)이 류성룡 탄핵을 변론한 일은 부당하다며 자기는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류성룡 탄핵은 당시 선조의 본심이었기 때문이다.
선조 32년 3월 27일 정창연은 이조판서가 되고 얼마 후에 형조판서로 옮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에도 정창연은 이조·형조판서 외에 중추부 동지사와 대사헌을 순환하고 있다.
살얼음을 걸어야 했던 광해군 시기
북인(北人), 그중에서도 대북(大北)이 중심이 된 광해군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서인 정창연은 광해군 초기부터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을 맡았다. 특히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인 광해 즉위년 3월 7일 어떤 진사가 이조판서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에 대해 실록 사관은 이렇게 비평하고 있다.
〈정창연이 세 번이나 가망(加望)된 끝에 이조판서에 제배되었는데 과장하기 좋아하고 이욕을 즐기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마구 달려나와 빌붙었으므로 정사를 혼란시키는 제일의 원두(源頭)가 되었다.〉
그 무리가 누구일까? 다행히 6월 3일 자 《광해군 일기》에는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조정은 정인홍의 당이고 이이첨의 심복이다.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사악하고 아첨을 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임금을 버려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버림받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창연이 맨 먼저 그를 전조(銓曹)에 끌어들였다.〉
즉 정창연은 대북 핵심인 정인홍과 이이첨 세력이 인사를 책임지는 전조에 진입할 수 있는 물꼬를 터주었던 것이다. 동래 정씨 특유의 화합 정신이랄까? 그러나 같은 서인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기에 이처럼 말이 거친 것이다. 참고로 《광해군 일기》는 서인 입장에서 편찬된 것이다.
광해군 6년(1614년) 1월 19일 마침내 정창연은 우의정이 되어 정승 반열에 오른다. 이때 영의정은 기자헌(奇自獻·1562~1624년), 좌의정은 정인홍(鄭仁弘)이었다. 이때 정창연은 건강을 이유로 열아홉 차례 사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해 11월 7일 마침내 출사하는데 《광해군 일기》는 그 이유를 정인홍이 아니라 기자헌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창연은 평소에 기자헌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자헌이 수상(首相)이 되자 대간이 번갈아 상소를 올려 탄핵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창연은 자헌과 함께 정승을 하기 싫어서 병을 핑계로 사직서를 18차례나 올렸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때에 이르러 출사하였다.〉
정창연은 2년 후인 광해군 8년(1616년)에도 스무 차례 사직소를 올려 마침내 우의정에서 물러나 돈녕부 영사가 된다. 돈녕부란 왕실 친인척을 관리하는 부서로 영사 지사는 왕실 친인척이 맡았다.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柳自新·1541~1612년)이 정창연 매부였다. 따라서 광해군은 정창연에게 조카사위였다.
광해군 9년에 인목대비 폐비(廢妃) 문제가 본격 제기되자 정창연은 두문불출했다. 이에 조정뿐만 아니라 재야에서도 정창연이 친척이면서도 폐비 문제를 관망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상소가 끝없이 올라왔다. 광해군 10년 2월에는 정사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38명의 명단을 정리했는데 여기에도 정창연은 이름이 올라 있다.
인조반정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좌의정에 오르다
광해군 15년(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이로써 정창연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을 진출시킨 잘못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말기 폐모 논의에 끝내 참여하지 않은 공이 높게 평가를 받았다.
인조 1년(1623년) 3월 24일 정창연은 마침내 좌의정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이날 실록은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적고 있다.
〈창연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조심스러웠다. 폐비의 가까운 인척으로 자못 자신을 단속하고 경계하여 폐모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시론이 훌륭히 여기었다.〉
2년 후에 좌의정에서 물러나 원로로 있으며 생을 마쳤다.
아들 정광성(鄭廣成·1576~1654년)은 선조 36년(1603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에서 요직을 거쳤고 인조 때는 승지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나 병자호란 이후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졸기다.
〈광성은 고 정승 정창연의 아들이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화려한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고 혼조(昏朝·광해군)에 있어서는 수립한 것이 적지만, 평소에 재능과 명망을 짊어지고서 몸가짐이 간소 검약하였다. 때문에 반정 이후에 위임하고 대우함에 쇠퇴한 적이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물러나 전리(田里)로 돌아가 벼슬에 대한 뜻을 끊어버렸다. 상이 그의 아들 정태화가 바야흐로 국정을 맡아 항상 귀근(歸覲·부모를 찾아뵘)을 청한다는 까닭으로 누차 그를 부르자 광성이 부득이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졸하니 나이가 79세였다.〉
정창연의 둘째 아들 정광경(鄭廣敬·1586~1644년)은 아버지 정창연 말기에 함께 조정에 있었다. 정광경은 아버지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폐비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반정 후에 조정에서는 그 사정을 알기에 죄를 묻지 않았다. 벼슬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효종·현종 때 재상 정태화 형제
조선 중기에 이르러 동래 정씨만큼 성대한 집안도 드물 것이다. 정광성은 아들 셋을 두었다. 태화(太和), 치화(致和), 만화(萬和)가 그들이다. 이름에서 화(和)를 강조한 데서 집안 정신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다. 이 중 태화와 치화는 모두 정승에 이른다.
정태화(鄭太和·1602~1673년)는 인조 6년(1628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다녀왔다. 1637년 심양에서 돌아오자 요직을 거쳐 1649년 49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후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사 문제로 조정이 갈라져 격심한 충돌이 있었는데 이 와중에서 예조·형조판서, 대사헌 등을 맡으면서도 무탈할 수 있었던 것은 적대 세력을 두지 않은 때문이라고 한다. 사관은 이렇게 평한다.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이름을 떨치다는 의미)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
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었고 이후 20년 동안 5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했다. 그 시대는 북벌(北伐) 정책과 예송(禮訟) 논쟁 등으로 신하들 간에 반목이 심했는데도 당색(黨色)을 드러내기를 꺼려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나라 일은 적극 담당하지 않고 처신만 잘하니, 사람들은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정태화의 졸기다.
〈재주와 지혜가 넉넉하고 총명하고 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일에 앞서 생각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법도가 있어 자제들에게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말고 붕당(朋黨)을 결성하지 말도록 신칙하였다. 의정부에 출입한 지 25년이나 되어도 세력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행동하고 국사를 제대로 담당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기롱도 있어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향년 72세로서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하나는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고, 하나는 명관(名官)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음사(蔭仕)를 하였으므로, 조복(朝服)이 집에 가득하였다. 동생 정치화와 더불어 번갈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복록(福祿)이 온 세상에 비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중도 노선 지킨 정치화
정치화(鄭致和·1609~1677년)는 정광성의 아들이자 정태화의 동생이다. 태화의 막내아들 재륜(載崙)을 입양했는데 그가 효종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와 혼인해 동평위(東平尉)가 되니 효종과는 사돈 관계였다.
1628년(인조 6년) 문과에 급제해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육조판서와 대사헌 등을 지내고 39세 때인 1667년(현종 8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그 또한 대체로 서인과 남인의 당쟁에서 나서지 않고 중도 노선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화 졸기다. 상당히 부정적이다. 아마도 서인 노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진 소론에 의해 집필된 때문으로 보인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치화가 졸(卒)하였다. 나이는 69세였다. 정치화는 어려서부터 강직하고 명민하다는 칭송이 있었고 또 청렴하다는 명망이 널리 알려졌었다. 만년에 서자(庶子)를 지나치게 사랑하여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책망이 있었으므로 그 좋은 명예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정만화(鄭萬和·1614~1669년)는 예조참판을 지냈는데 역시 졸기가 각박하다.
〈본래 재주와 지혜도 없으면서 가혹하고 각박함을 일삼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바르지 못하다고 지목하였다.〉
반면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보면 매우 긍정적이다.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기민(饑民)을 구호하는 한편, 타도의 유민 수천 명까지 구호하는 치적을 쌓아 이원익과 함께 평양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그 뒤 병조참판·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에 뛰어나 김상헌·이정구(李廷龜) 등으로부터 찬탄을 받았다.”
당쟁의 폐해가 실록 편찬에 그대로 반영된 경우라 양단(兩端)을 통해 그의 면모를 떠올려보기를 바란다.
송시열 비호한 정지화
정지화(鄭知和·1613~1688년)는 아버지가 이조참판 정광경(鄭廣敬)이다. 아들을 두지 못해 형 정지화(鄭至和)의 셋째 아들 정재희(鄭載禧)를 양자로 들였는데 정재희는 훗날 예조판서에 오른다.
1637년(인조 15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해 홍문관 부수찬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허적(許積) 등과 함께 홍문록에 올랐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소현세자를 시중해 심양으로 갔다. 1640년 세자가 문안할 때 귀국해 청요직을 거쳤고 현종 5년(1664년)에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후 각조 판서와 대사헌을 거듭했고 1674년 좌의정에 오른다. 서인이면서도 남인과의 충돌을 조정하고 억제하는 등 중도적 길을 걸었다. 숙종 14년(1688년) 3월 23일 자 정지화(鄭知和)의 졸기는 정치화보다는 조금 낫다.
〈정지화는 문익공(文翼公) 정광필의 5대손인데 대가(大家)에서 태어났다. 관직(官職)에 있을 때 엄숙함을 자못 명령하면 시행되고 금지(禁止)하면 그쳐지는 효과가 있었다. 성품이 음악과 여색과 거문고와 퉁소를 좋아하여 분대(粉黛·곱게 화장한 미인)가 좌우(左右)를 떠나지 않았으며, 즐겨 노는 것이 습관이 되어 공무(公務)에 게을러 힘쓰지 않았으므로, 직위(職位)가 열경(列卿)에 이르렀으나, 정책(政策)을 수립하여 밝힌 것이 없었다.
가세(家世)로써 입상하였는데 간당(奸黨)이 정권을 잡은 시기를 만나자 곧 사임(辭任)하여 체직(遞職)되고 집에 있었다. 그러나 윤휴()와 허목(許穆)의 무리가 고묘론(告廟論)을 발의(發議)하여 송시열(宋時烈)을 죽이려고 할 때에 곧 차자(箚子)를 올려 그들의 잘못을 남김없이 말하였으니 사의(辭意)가 밝고 정대(正大)하여 흉론(凶論)이 조금 좌절된 것은 정지화의 힘이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한 가지 일이 자못 정광필의 후손 된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젊어서는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늙어서는 사알(私謁)을 자못 행하였다. 나이 76세에 졸(卒)하였다.〉
간당은 곧 3년상을 주창했던 남인 세력을 말한다.
숙종 때 재상 정재숭
정재숭(鄭載嵩·1632~1692년)은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이다. 현종 1년(1660년) 문과에 급제하고 숙종 2년(1676년)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숙종 11년(1685년) 우의정에 올랐다. 숙종 18년(1692년) 2월 19일 자 그의 졸기다.
〈영중추부사 정재숭이 졸(卒)했는데 나이는 67세였다. 정씨(鄭氏)들은 문익공 정광필 이후로 정승을 지낸 사람이 많았다.
정재숭은 정태화가 아비이고 정치화가 숙부이며 정지화가 종숙(從叔)이었으며 또한 재지(才智)가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오랫동안 탁지(度支·호조)의 판서(判書)로 있었고 또한 정승으로 들어갔었는데 특출한 풍절(風節)은 없었다.
윤이(倫彛·인륜)가 무너져 어두웠을 때를 당해 단지 명위(名位)만 가지고 있다 돌아갔으니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정재숭으로 끊어질 듯하던 재상 배출 전통은 정조 때에 이르러 정홍순(鄭弘淳·1720~1784년)이 이어갔다. 증조부가 정태화의 장남 정재대(鄭載岱)이다. 정재대는 정재숭의 형이다. 할아버지는 정혁선(鄭赫先)이고 아버지는 참판 정석삼(鄭錫三·1690~1729년)이다.
정석삼은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크게 현달하지는 못해 호조·예조참판에 그쳤다.
정홍순은 영조 21년(1745년) 문과에 급제해 이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이후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 문제에 재능을 발휘해 당대 최고의 재정관이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이재(吏才)가 출중했던 것이다.
이재에 밝았던 정홍순
이후 예조판서를 겸하면서 1762년에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 상례를 주관하면서 세자의 의복과 금침(衾枕)에서 미세한 것까지 한 조각씩 떼 내어 잘 보관했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하고 당시 예조판서였던 정홍순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장례에 관한 사항을 묻자 정홍순은 그동안 간직했던 것들을 정조에게 다 내보였다. 이에 정조는 1778년(정조 2년) 정홍순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근 100년 만에 동래 정씨 가문에서 다시 재상이 나온 것이다. 1년 만에 우의정에서 물러났고 이후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정조 8년(1784년) 1월 25일 졸했다. 그의 졸기다.
〈판중추부사 정홍순이 졸(卒)하였다. 정홍순의 자(字)는 의중(毅中)이며 영의정 정태화의 후손이다. 영종(英宗·영조) 을축년(영조 21년)에 급제하여 재주와 지모로 벼슬이 올라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여러 번 탁지와 혜국(惠局·선혜청)을 맡았는데 근세에서 이재(理財)를 잘하는 자로는 반드시 먼저 꼽는다. 금상(今上) 무술년(정조 2년)에 비로소 정승에 천거되었는데, 성질이 준엄하고 강직하며 매우 민첩하여 일을 헤아리는 데에 밝았으나 정승의 직무로 보자면 장점이 아니었다.〉
즉 정승으로 갖춰야 할 간이(簡易)함이 부족했고 너무 잘 알았다는 지적이다.⊙
당쟁의 폐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재상 혹은 정승이 바로 이 당파의 일원이 됨으로써 나라 전체의 인재를 쓰지 못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조 이전의 재상과 선조 이후의 재상은 그 품격에서 이미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선조 8년 이후부터 좌의정을 맡았던 이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 무렵 좌의정은 박순(朴淳)인데 그는 노골적으로 이이(李珥)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서인(西人) 계열이다. 학문이 깊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쟁이 시작되던 시기에 그것을 제어하기보다는 어느 한쪽에 서서 좌의정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당시 우의정은 노수신(盧守愼)이었는데 그 또한 서인과 관련이 깊었고 뒤에 좌의정에 오르지만 실록은 “정승으로 있는 동안 이렇다 할 건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이때부터 나라의 재상은 드물게 되고 당파의 재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정승을 국상(國相)이라고까지 했는데 이때부터는 당상(黨相)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런 한계를 감안하면서 선조 이후의 재상들을 짚어볼 때 그들의 현실 속의 모습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함부로 ‘명재상’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다.
정광필 손자 정유길
이런 맥락에서 정유길(鄭惟吉· 1515~1588년)을 살펴보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누구보다 잘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어서다.
우선 그의 배경은 든든하다. 할아버지가 중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1462~1538년)이다. 또한 훗날 서인을 좌우하게 되는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의 외할아버지다. 즉 그 이전까지는 한미한 편이었던 안동 김씨는 바로 이 정유길의 외손자였다는 사실 하나로 조정에서 발언권을 높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창연(金昌衍)도 좌의정에 올랐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유길은 겨우 이를 갈 무렵에 할아버지 문익공(정광필)이 슬하에 놓고 가르치면서 항상 부인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뒤에 반드시 나의 지위에 이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무렵 어떤 재능을 보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으로 볼 수도 있고 사람을 보는 데 밝았던 정광필이 그에게서 뭔가 특이한 점을 살핀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문장에서 일찍부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조금 장성하자 문장의 구상이 넘쳐흘러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부해져 재능이 몇 사람을 아우를 수 있었으므로 동료 중에 앞선 사람이 없었다.”
간쟁 없이 탄탄대로
관리로서 그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1531년(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그 뒤 공조좌랑, 이조좌랑, 중추부도사, 세자시강원 문학 등을 역임했다.
뒤에도 그랬지만 정유길은 당파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쏠리는 성향은 아니었다.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외척들 사이에 틈이 생겨 조정이 분분했는데 정유길은 격동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으니 사론(士論)이 귀의했다고 한다. 1544년에는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했다.
굳이 말하자면 정유길은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관리형 인재였다고 할 것이다. 1552년(명종 7년) 부제학에서 도승지가 됐다. 1560년에는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 및 이황을 추천했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필가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흔히 폭정의 시대로 불리는 명종 때 이렇다 할 간쟁(諫爭)은 없이 벼슬에만 올랐다는 것은 그리 자랑이라 할 수는 없다. 결국 먼 훗날 우의정에 제수됐을 때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 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해야 했다. 그러나 결기가 없다고 해서 자신의 뜻을 굽히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당시의 배경에 대해 외손자인 김상헌은 정유길의 묘비명을 통해 이렇게 변명했다.
〈다시 찬성(贊成)이 되었을 때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지적해 배척하니 임금의 하교에 “내가 정 아무개를 보건대 그 마음이 순실(純實)하여 정말로 경박한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들이 마음을 합쳐 나라를 도울 것은 생각지 않은 채 오직 자신들에게 빌붙지 않은 사람은 번번이 배척하고 있으니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때 선배와 후배가 서로 불신하여 당파로 나뉘는 조짐이 있었으므로 부군이 피차의 간격을 두지 않고 한결같이 화평하도록 조절하였는데, 소년(少年·신진인사)들이 일을 좋아하여 함부로 비평하며 공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굳이 요즘 식의 용어를 빌리자면 ‘어용(御用)’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사실 정유길이 걸었던 길은 큰 시각에서 보면 임금을 섬기는 바른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동서(東西)로 갈라지면서 당색을 떠나 두루 정치를 하려 했던 인물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끝자리에 정유길이 있었던 것이다.
1568년(선조 1년)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 안정에 진력했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됐다. 우의정이 사헌부에 의해 좌절된 지 2년이 지난 1583년에 다시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이 하사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됐다. 이 무렵 정유길에 대한 김상헌의 기록이다.
‘고사를 행하기에 힘쓰고 개혁하는 것에 신중’
〈고사(故事)를 행하기에 힘쓰고 개혁하는 것에 신중을 기했다. 항상 명예와 세도를 멀리하고자 문호(門戶)를 세워 사사로이 후진과 결탁하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해 누차 분분한 탄핵을 초래하였다. 부군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오래된 가문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받았다고 여겨 차마 결연히 떠나지 못하였으나 의중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부군이 꿈속에 어느 정자에 이르러 마음에 매우 들었었는데 그 뒤에 사들인 정자가 한결같이 꿈속의 경관과 같았으므로 그냥 “몽뢰(夢賚)”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집은 “퇴우(退憂)”로 편액을 걸어 만년에 휴식하는 뜻을 의탁했다.〉
1588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북인 쪽에서 편찬한 《선조실록》은 그 일에 관해 “정유길이 죽었다”고만 기록했다. 그나마 서인에서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은 조금 길긴 하다.
〈재주와 풍도가 있어 일찍부터 훌륭한 명성을 드날려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러나 천성이 화유(和裕)하고 엄하지 아니하여 권간(權奸)이 용사(用事)할 때를 당하여 이견을 표시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사론이 이를 이유로 가볍게 여겼다. 만년에 다시 등용되어 자주 공격을 받았으나 상의 권고(眷顧)가 쇠하지 아니하여 공명을 누린 채 졸하였다.〉
이 또한 졸기(卒記)치고는 그다지 긍정적이라 할 수 없다. 한마디로 정유길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이다.
정유길 아들 정창연
정창연(鄭昌衍·1552~1636년)은 정유길의 아들로 1579년(선조 12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가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는 당쟁의 불길이 점점 크게 타오르던 때였다. 4년 후인 선조 16년(1583년) 오억령(吳億齡)과 함께 이조좌랑에 제수되면서 본격 관리 생활을 시작했고 5년 후인 선조 21년(1588년) 3월 9일 동부승지가 되어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게 된다. 당시 정창연은 종4품 조산대부(朝散大夫)임에도 정3품 당상관인 승지에 오른 것인데 실록은 “상이 특별히 임명토록 했다”라고 적고 있다.
얼마 후에 정여립(鄭汝立·1546~ 1589년)의 난이 일어나 정창연도 위기를 맞는다. 그를 김제 군수로 추천한 인물들을 추적하던 중에 선조 19년(1586년)에 이조에 있었던 인물이 모두 조사 대상이 되었는데 이조판서가 이산해(李山海)였고 정창연은 이조정랑이어서 조사를 받았다.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난 정창연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년) 4월에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석 달 후인 7월 6일 좌부승지로 본래 자리로 복귀한다. 선조에 대한 그의 총애를 엿볼 수 있다.
이후 그의 승진은 눈부실 정도다. 같은 해 7월 22일 이조참판으로 옮겼고 임진왜란 직후인 이듬해 5월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벼슬살이 시작한 지 10년 만에 판서에 오른 것이다. 이때 정창연은 세자 좌빈객도 겸하게 되는데 이는 그만큼 행실이 두터웠다는 뜻이다.
선조 26년(1593년) 1월 16일 대사헌에 제수된 정창연은 5월 6일에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된다. 이후 정창연은 다시 대사헌 좌참찬 예조판서를 순환하며 직무를 수행했는데 이렇다 할 문책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재(吏才)가 뛰어나고 글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98년(선조 31년) 12월 6일 처음으로 사헌부 지평 구의강(具義剛)과 사간원 정언 권진(權縉)이 “전 풍원부원군 류성룡의 삭탈관작을 명하소서”라고 하자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 이때 대사헌이 정창연이었다. 처음으로 당쟁과 관련된 문제에 그의 이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듬해 1월 14일 대사헌 정창연은 이원익(李元翼)이 류성룡 탄핵을 변론한 일은 부당하다며 자기는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류성룡 탄핵은 당시 선조의 본심이었기 때문이다.
선조 32년 3월 27일 정창연은 이조판서가 되고 얼마 후에 형조판서로 옮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에도 정창연은 이조·형조판서 외에 중추부 동지사와 대사헌을 순환하고 있다.
살얼음을 걸어야 했던 광해군 시기
북인(北人), 그중에서도 대북(大北)이 중심이 된 광해군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서인 정창연은 광해군 초기부터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을 맡았다. 특히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인 광해 즉위년 3월 7일 어떤 진사가 이조판서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에 대해 실록 사관은 이렇게 비평하고 있다.
〈정창연이 세 번이나 가망(加望)된 끝에 이조판서에 제배되었는데 과장하기 좋아하고 이욕을 즐기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마구 달려나와 빌붙었으므로 정사를 혼란시키는 제일의 원두(源頭)가 되었다.〉
그 무리가 누구일까? 다행히 6월 3일 자 《광해군 일기》에는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조정은 정인홍의 당이고 이이첨의 심복이다.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사악하고 아첨을 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임금을 버려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버림받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창연이 맨 먼저 그를 전조(銓曹)에 끌어들였다.〉
즉 정창연은 대북 핵심인 정인홍과 이이첨 세력이 인사를 책임지는 전조에 진입할 수 있는 물꼬를 터주었던 것이다. 동래 정씨 특유의 화합 정신이랄까? 그러나 같은 서인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기에 이처럼 말이 거친 것이다. 참고로 《광해군 일기》는 서인 입장에서 편찬된 것이다.
광해군 6년(1614년) 1월 19일 마침내 정창연은 우의정이 되어 정승 반열에 오른다. 이때 영의정은 기자헌(奇自獻·1562~1624년), 좌의정은 정인홍(鄭仁弘)이었다. 이때 정창연은 건강을 이유로 열아홉 차례 사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해 11월 7일 마침내 출사하는데 《광해군 일기》는 그 이유를 정인홍이 아니라 기자헌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창연은 평소에 기자헌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자헌이 수상(首相)이 되자 대간이 번갈아 상소를 올려 탄핵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창연은 자헌과 함께 정승을 하기 싫어서 병을 핑계로 사직서를 18차례나 올렸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때에 이르러 출사하였다.〉
정창연은 2년 후인 광해군 8년(1616년)에도 스무 차례 사직소를 올려 마침내 우의정에서 물러나 돈녕부 영사가 된다. 돈녕부란 왕실 친인척을 관리하는 부서로 영사 지사는 왕실 친인척이 맡았다.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柳自新·1541~1612년)이 정창연 매부였다. 따라서 광해군은 정창연에게 조카사위였다.
광해군 9년에 인목대비 폐비(廢妃) 문제가 본격 제기되자 정창연은 두문불출했다. 이에 조정뿐만 아니라 재야에서도 정창연이 친척이면서도 폐비 문제를 관망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상소가 끝없이 올라왔다. 광해군 10년 2월에는 정사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38명의 명단을 정리했는데 여기에도 정창연은 이름이 올라 있다.
인조반정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좌의정에 오르다
광해군 15년(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이로써 정창연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을 진출시킨 잘못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말기 폐모 논의에 끝내 참여하지 않은 공이 높게 평가를 받았다.
인조 1년(1623년) 3월 24일 정창연은 마침내 좌의정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이날 실록은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적고 있다.
〈창연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조심스러웠다. 폐비의 가까운 인척으로 자못 자신을 단속하고 경계하여 폐모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시론이 훌륭히 여기었다.〉
2년 후에 좌의정에서 물러나 원로로 있으며 생을 마쳤다.
아들 정광성(鄭廣成·1576~1654년)은 선조 36년(1603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에서 요직을 거쳤고 인조 때는 승지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나 병자호란 이후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졸기다.
〈광성은 고 정승 정창연의 아들이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화려한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고 혼조(昏朝·광해군)에 있어서는 수립한 것이 적지만, 평소에 재능과 명망을 짊어지고서 몸가짐이 간소 검약하였다. 때문에 반정 이후에 위임하고 대우함에 쇠퇴한 적이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물러나 전리(田里)로 돌아가 벼슬에 대한 뜻을 끊어버렸다. 상이 그의 아들 정태화가 바야흐로 국정을 맡아 항상 귀근(歸覲·부모를 찾아뵘)을 청한다는 까닭으로 누차 그를 부르자 광성이 부득이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졸하니 나이가 79세였다.〉
정창연의 둘째 아들 정광경(鄭廣敬·1586~1644년)은 아버지 정창연 말기에 함께 조정에 있었다. 정광경은 아버지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폐비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반정 후에 조정에서는 그 사정을 알기에 죄를 묻지 않았다. 벼슬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효종·현종 때 재상 정태화 형제
조선 중기에 이르러 동래 정씨만큼 성대한 집안도 드물 것이다. 정광성은 아들 셋을 두었다. 태화(太和), 치화(致和), 만화(萬和)가 그들이다. 이름에서 화(和)를 강조한 데서 집안 정신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다. 이 중 태화와 치화는 모두 정승에 이른다.
정태화(鄭太和·1602~1673년)는 인조 6년(1628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다녀왔다. 1637년 심양에서 돌아오자 요직을 거쳐 1649년 49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후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사 문제로 조정이 갈라져 격심한 충돌이 있었는데 이 와중에서 예조·형조판서, 대사헌 등을 맡으면서도 무탈할 수 있었던 것은 적대 세력을 두지 않은 때문이라고 한다. 사관은 이렇게 평한다.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이름을 떨치다는 의미)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
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었고 이후 20년 동안 5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했다. 그 시대는 북벌(北伐) 정책과 예송(禮訟) 논쟁 등으로 신하들 간에 반목이 심했는데도 당색(黨色)을 드러내기를 꺼려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나라 일은 적극 담당하지 않고 처신만 잘하니, 사람들은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정태화의 졸기다.
〈재주와 지혜가 넉넉하고 총명하고 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일에 앞서 생각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법도가 있어 자제들에게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말고 붕당(朋黨)을 결성하지 말도록 신칙하였다. 의정부에 출입한 지 25년이나 되어도 세력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행동하고 국사를 제대로 담당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기롱도 있어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향년 72세로서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하나는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고, 하나는 명관(名官)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음사(蔭仕)를 하였으므로, 조복(朝服)이 집에 가득하였다. 동생 정치화와 더불어 번갈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복록(福祿)이 온 세상에 비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중도 노선 지킨 정치화
정치화(鄭致和·1609~1677년)는 정광성의 아들이자 정태화의 동생이다. 태화의 막내아들 재륜(載崙)을 입양했는데 그가 효종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와 혼인해 동평위(東平尉)가 되니 효종과는 사돈 관계였다.
1628년(인조 6년) 문과에 급제해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육조판서와 대사헌 등을 지내고 39세 때인 1667년(현종 8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그 또한 대체로 서인과 남인의 당쟁에서 나서지 않고 중도 노선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화 졸기다. 상당히 부정적이다. 아마도 서인 노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진 소론에 의해 집필된 때문으로 보인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치화가 졸(卒)하였다. 나이는 69세였다. 정치화는 어려서부터 강직하고 명민하다는 칭송이 있었고 또 청렴하다는 명망이 널리 알려졌었다. 만년에 서자(庶子)를 지나치게 사랑하여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책망이 있었으므로 그 좋은 명예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정만화(鄭萬和·1614~1669년)는 예조참판을 지냈는데 역시 졸기가 각박하다.
〈본래 재주와 지혜도 없으면서 가혹하고 각박함을 일삼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바르지 못하다고 지목하였다.〉
반면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보면 매우 긍정적이다.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기민(饑民)을 구호하는 한편, 타도의 유민 수천 명까지 구호하는 치적을 쌓아 이원익과 함께 평양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그 뒤 병조참판·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에 뛰어나 김상헌·이정구(李廷龜) 등으로부터 찬탄을 받았다.”
당쟁의 폐해가 실록 편찬에 그대로 반영된 경우라 양단(兩端)을 통해 그의 면모를 떠올려보기를 바란다.
송시열 비호한 정지화
정지화(鄭知和·1613~1688년)는 아버지가 이조참판 정광경(鄭廣敬)이다. 아들을 두지 못해 형 정지화(鄭至和)의 셋째 아들 정재희(鄭載禧)를 양자로 들였는데 정재희는 훗날 예조판서에 오른다.
1637년(인조 15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해 홍문관 부수찬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허적(許積) 등과 함께 홍문록에 올랐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소현세자를 시중해 심양으로 갔다. 1640년 세자가 문안할 때 귀국해 청요직을 거쳤고 현종 5년(1664년)에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후 각조 판서와 대사헌을 거듭했고 1674년 좌의정에 오른다. 서인이면서도 남인과의 충돌을 조정하고 억제하는 등 중도적 길을 걸었다. 숙종 14년(1688년) 3월 23일 자 정지화(鄭知和)의 졸기는 정치화보다는 조금 낫다.
〈정지화는 문익공(文翼公) 정광필의 5대손인데 대가(大家)에서 태어났다. 관직(官職)에 있을 때 엄숙함을 자못 명령하면 시행되고 금지(禁止)하면 그쳐지는 효과가 있었다. 성품이 음악과 여색과 거문고와 퉁소를 좋아하여 분대(粉黛·곱게 화장한 미인)가 좌우(左右)를 떠나지 않았으며, 즐겨 노는 것이 습관이 되어 공무(公務)에 게을러 힘쓰지 않았으므로, 직위(職位)가 열경(列卿)에 이르렀으나, 정책(政策)을 수립하여 밝힌 것이 없었다.
가세(家世)로써 입상하였는데 간당(奸黨)이 정권을 잡은 시기를 만나자 곧 사임(辭任)하여 체직(遞職)되고 집에 있었다. 그러나 윤휴()와 허목(許穆)의 무리가 고묘론(告廟論)을 발의(發議)하여 송시열(宋時烈)을 죽이려고 할 때에 곧 차자(箚子)를 올려 그들의 잘못을 남김없이 말하였으니 사의(辭意)가 밝고 정대(正大)하여 흉론(凶論)이 조금 좌절된 것은 정지화의 힘이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한 가지 일이 자못 정광필의 후손 된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젊어서는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늙어서는 사알(私謁)을 자못 행하였다. 나이 76세에 졸(卒)하였다.〉
간당은 곧 3년상을 주창했던 남인 세력을 말한다.
숙종 때 재상 정재숭
정재숭(鄭載嵩·1632~1692년)은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이다. 현종 1년(1660년) 문과에 급제하고 숙종 2년(1676년)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숙종 11년(1685년) 우의정에 올랐다. 숙종 18년(1692년) 2월 19일 자 그의 졸기다.
〈영중추부사 정재숭이 졸(卒)했는데 나이는 67세였다. 정씨(鄭氏)들은 문익공 정광필 이후로 정승을 지낸 사람이 많았다.
정재숭은 정태화가 아비이고 정치화가 숙부이며 정지화가 종숙(從叔)이었으며 또한 재지(才智)가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오랫동안 탁지(度支·호조)의 판서(判書)로 있었고 또한 정승으로 들어갔었는데 특출한 풍절(風節)은 없었다.
윤이(倫彛·인륜)가 무너져 어두웠을 때를 당해 단지 명위(名位)만 가지고 있다 돌아갔으니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정재숭으로 끊어질 듯하던 재상 배출 전통은 정조 때에 이르러 정홍순(鄭弘淳·1720~1784년)이 이어갔다. 증조부가 정태화의 장남 정재대(鄭載岱)이다. 정재대는 정재숭의 형이다. 할아버지는 정혁선(鄭赫先)이고 아버지는 참판 정석삼(鄭錫三·1690~1729년)이다.
정석삼은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크게 현달하지는 못해 호조·예조참판에 그쳤다.
정홍순은 영조 21년(1745년) 문과에 급제해 이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이후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 문제에 재능을 발휘해 당대 최고의 재정관이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이재(吏才)가 출중했던 것이다.
이재에 밝았던 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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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순 |
〈판중추부사 정홍순이 졸(卒)하였다. 정홍순의 자(字)는 의중(毅中)이며 영의정 정태화의 후손이다. 영종(英宗·영조) 을축년(영조 21년)에 급제하여 재주와 지모로 벼슬이 올라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여러 번 탁지와 혜국(惠局·선혜청)을 맡았는데 근세에서 이재(理財)를 잘하는 자로는 반드시 먼저 꼽는다. 금상(今上) 무술년(정조 2년)에 비로소 정승에 천거되었는데, 성질이 준엄하고 강직하며 매우 민첩하여 일을 헤아리는 데에 밝았으나 정승의 직무로 보자면 장점이 아니었다.〉
즉 정승으로 갖춰야 할 간이(簡易)함이 부족했고 너무 잘 알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