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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1년 만에 ‘어게인 2024 투란도트’ 준비하는 박현준 예술 총감독

“〈투란도트〉 성공시켜 오페라 시장 부활 이끌겠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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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는 플라시도 도밍고·주인공은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 등 초호화 출연진
⊙ 성경 속 ‘솔로몬의 성전’을 무대로… 몽환적이고 신비한 세계로 초대
⊙ “우리가 흥얼거리는 노래 중 상당수가 오페라의 음악이고 모든 음악의 근간”

朴賢俊
1962년생. 한양대학교 성악과 졸업, 이탈리아 로시니 국립음악원 성악과, 파르마 국립음악원 성악과 졸업 / 2003 상암월드컵오페라 〈투란도트〉 예술 총감독, 수원대학교 성악과 교수, 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초빙교원,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정권교체동행위원회 대외협력본부 문화예술정책단장 역임. 現 한국오페라협회 회장 겸 한강오페라단 단장, ㈜2024 투란도트문화산업전문회사 대표
  “무대에 오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역일지라도 열정이 넘치는 연기자를 뽑아 함께 공연하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하기 전날에 박현준(朴賢俊) ‘어게인 2024 투란도트’ 예술 총감독은 공연에 함께할 조연 연기자 오디션을 보고 왔다고 했다. 공연에 필요한 인원은 주인공 10여 명을 비롯해 조연·단역 등 300여 명과 오케스트라 단원 100여 명 등 총 400여 명. 통상 오페라에 출연하는 조연 배우들은 극단이나 학교를 통해 한꺼번에 뽑는 것이 관례지만 박현준 감독은 자신이 직접 단역 배우 오디션을 봤다. 하나의 공연에도 완벽을 기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 인터뷰 내내 얘기했던 “목숨 걸고 준비 중”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구나 싶었다.
 
 
  7000석 코엑스에서 연말 공연
 
오는 12월 22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어게인 2024 투란도트’ 제작 발표회 모습이다.
  지난 2003년에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야외극장에서 오페라 〈투란도트〉를 성공리에 공연한 박현준 감독이 21년 만에 똑같은 오페라로 관객들을 찾는다. ‘어게인 2024 투란도트’가 오는 12월 22~31일까지 7000석 규모의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 총 10회에 걸쳐 막이 오른다. 총 제작비 200억원이 들어가는 공연에 업계는 술렁이고 있다. 2003년에 11만 명의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박현준 총감독이 제작 겸 예술 총감독을 맡았고, 이번 공연을 위해 12개국에서 세계 최고의 오페라 스타들이 한국을 찾는다. 출연자의 면면은 화려하다. 연출은 제노바 국립극장 예술감독인 다비데 리베르모어(Davide Livermore)가 맡고, 지휘는 20세기 최고의 테너이자 지휘자인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 차세대 세계적 테너인 이탈리아의 호세쿠라(Jose Cura), 파올로 카라냐니가 번갈아 역할을 소화한다.
 
  〈투란도트〉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푸치니가 작곡한 3막의 오페라로 1926년에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남자를 혐오하며 결혼을 거부하는 중국의 투란도트 공주, 공주에게 반한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가 목숨을 걸고 수수께끼를 풀며 진실한 사랑을 찾는 얘기다. ‘목숨을 걸고 작업한다’는 박현준 총감독의 심정과 비슷한 스토리일 수 있다. 주인공인 투란도트 역에는 전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여왕으로 군림하는 리투아니아의 소프라노인 아스믹 그리고리안(Asmik Grigoryan), 칼라프 역에는 테너 유시프 에이바조프(Yusif Eyvazov), 시녀 ‘류’ 역은 박미혜 서울대 음대 교수가 맡는다. 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박현준 총감독을 8월 7일 투란도트문화산업 사무실에서 만났다.
 
  ― 21년 만에 똑같은 작품을 들고 나온 이유가 뭡니까.
 
  “죽어가는 오페라 시장을 다시 살리고 싶어서요. 2003년에 〈투란도트〉가 성공하면서 국내 오페라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몇몇 후속 작품이 관객들에게 외면받으면서 야외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아예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평생 오페라만 생각해온 사람으로서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 시장이 형성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물거품처럼 사라졌다는 거군요.
 
  “〈투란도트〉 5월 공연을 마친 뒤 흥행이 된다 싶으니까 잠실, 연세대 등 야외에서 〈아이다〉 〈카르멘〉 같은 대작들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야외 오페라 시대를 기대했지만, 수준 미달인 공연에 관객들이 외면했습니다. 졸속으로 만들어진 야외 공연이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꺾어버린 겁니다. 제가 후속 공연을 제작했다고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비판을 받았고요. 저는 〈투란도트〉 외에 다른 공연에 일절 관여한 적이 없는데 그런 얘기가 돌다 보니 많은 피해를 봤습니다. 이후에는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의미 있는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출하고, 그렇게 20년을 지냈습니다.”
 
 
  세계적 성악가 20여 명이 한자리에
 
코엑스 컨벤션센터 D홀에서 열리는 〈12월의 투란도트〉 포스터 사진.
  오페라에 관심 좀 있다는 사람 중에서 여전히 2003년의 〈투란도트〉를 최고라고 꼽는 이들이 많기에 그 공연을 연출한 사람은 업계에서 나름 승승장구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실상은 달랐다. 오페라에 대한 관심은 이내 사그라졌고 시간이 한참 흐르고 주위에서는 박현준 총감독에게 ‘〈투란도트〉를 다시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투란도트〉는 오페라 중에서도 워낙 대작이라 준비 기간이 길고, 막대한 재원(財源)이 필수라 투자자를 찾기 어렵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지난해 5월 한 회사가 44억원을 투자키로 하면서 공연 재개에 물꼬가 터졌다.
 
  “재작년 12월부터 막연히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지난해에 투자가 전격 이뤄졌습니다.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투자 결정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21년 전에 성공하셨잖아요. 성공 인자가 있으시잖아요?’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피가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 20여 년이 지났으니 마음가짐이 다르시겠죠?
 
  “체력이 좀 떨어졌고(웃음), 대신에 모든 시스템 등이 하나하나 다 눈에 들어옵니다.”
 
  ― 어떻게 다른지 스포일러성 멘트를 좀 해주신다면요.
 
  “과거 공연 때 배경은 중국의 자금성이었습니다. 관객들이 무대를 보는 순간에 압도될 정도로 스케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번에는 중국이 아닌 천국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성이 배경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을 상상하면서 만들고 있습니다. 단순히 무대의 사이즈에 치중하지 않고 환상적이고 몽환적이며 상상 속의 이미지가 마치 현실에서 구현되는 듯한 디테일한 아름다움을 관객들에게 선사할 겁니다. 이번 공연에는 지휘자만 3명이고, 한 명만 출연해도 모든 자리가 매진되는 성악가 20여 명이 한꺼번에 옵니다. 굉장히 드문 일이고 역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축구 경기로 치면 손흥민, 호날두, 메시, 음바페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겁니다.”
 
 
  “오페라는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출연진 중에 가장 먼저 섭외된 인물은 테너에서 지휘자로 변신한 플라시도 도밍고다. 도밍고는 미국 LA필하모닉 총감독이자 지휘자로 15년 동안 군림하며 LA필하모닉을 업그레이드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도밍고가 ‘어게인 투란도트’를 지휘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세계적인 소프라노, 테너 가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오페라는 주로 여름에 공연하고 12월은 성악가들에게 비수기에 해당해 일정 조정은 많이 어렵지 않았다. 또 다른 지휘자인 호세쿠보는 자신이 먼저 박현준 총감독에게 출연 의사를 타진했다. 제안받은 출연자들은 “7000석에서 공연한다는 게 사실인가?”라며 관심을 보였다.
 
  “도밍고는 미투 논란(성희롱 등 논란)이 있어서 중간에 교체를 고려했는데 결국 낙점됐고, 나머지 배우들과도 세심한 조율을 거쳐 협의했습니다. 세계적인 오페라 스타들이 우리나라에 온다는데 오히려 언론에서 안 믿으며 출연자들에게 ‘12월에 서울에서 만나자’는 영상을 찍어 보내라고 했습니다(웃음).”
 
  ― 그만큼 뜻밖의 소식이고, 관심이 많다는 거겠죠. 물론 출연진의 몸값이 어마어마할 테고요.
 
  “회당 억대죠. 완성도 높은 공연을 기획하다 보니 제작비가 많이 올라갔습니다.”
 
  ―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모니를 잘 이루나요? 자기가 돋보이려고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오페라의 구조를 잘 모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저한테 ‘그게 가능한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오페라는 ‘소리와 공간의 예술’인데 규칙과 음악 안에서 자기 역할이 딱 정해져 있고 배우들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규칙 안에서 본인의 빛나는 목소리로 어떻게 노래할 것인지, 관객들에게 절정감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를 정해야 합니다. 자기 역할이 분명하고, 그 안에서 자기 기량을 뽐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팀워크를 위해서 연습이 필요하다거나, 300명이 한날한시에 모여서 서로 합(合)을 맞추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 불과 넉 달 뒤에 무대에 올릴 수 있겠느냐는 우려에 대한 답이네요.
 
  “오케스트라, 주역 배우, 합창, 무용수, 단역 배우들이 이 시각에도 각자 따로 연습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첫 연습 때 악보를 통째로 외워야 합니다. 악보를 외우지 않으면 무대에 설 수 없어요. 합창 지휘자, 무용 안무자, 기술감독, 조명감독, 음향감독, 무대세트 디자인, 의상 디자이너들이 모두 각자의 파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오페라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네요. 이를 총괄하는 이의 몫이 가장 크고 중요할 테고요.
 
  “맞습니다. 자동차 부품을 갈아 끼우듯이 어떤 파트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부분만 교체하면 됩니다. 각자 자기 역할을 준비하고 공연 며칠 전에 맞춰보고 공연하는 게 오페라입니다.”
 
 
  〈투란도트〉의 선율은 변화무쌍
 
성악가로서 무대에서 노래하는 박현준 총감독.
  박현준 총감독의 얘기를 들으면서 오페라에 대해서 그동안 너무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무대에 오르다 보니 그들 간의 협업, 하모니 등과 관련된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오페라는 누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누군가는 희생하는 부류의 장르가 아니었다. 서로 기량을 뽐내려 큰 목소리를 낼 필요도 없고, 각자 자기 파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예술이다.
 
  ― 오페라가 많고 많은데 왜 하필 〈투란도트〉에 꽂혔나요.
 
  “저는 오페라를 평생 했고 오페라에 미친 사람인데, 그중에서도 〈투란도트〉에 가장 미친 사람이 맞습니다(웃음). 영화도 투입 예산, 제작 기간, 장르 등이 다르듯이 오페라도 그렇습니다. 오페라 중에 가장 스펙터클하고 대작이라고 불리는 것이 〈투란도트〉와 〈아이다〉 〈카르멘〉 정도예요. 〈아이다〉 작곡자인 베르디는 고전적 기법, 〈투란도트〉를 쓴 푸치니는 모던한 작곡 기법을 썼습니다. 〈아이다〉가 쿵짝짝, 쿵짝짝 하는 화성적 기법이 베이스라면 〈투란도트〉는 그런 화음 대신에 선율적입니다. 화음을 계속 듣다 보면 지루함이 약간 있는데, 푸치니의 선율은 아름답고 변화가 있어 관객들을 자극하지요. 〈투란도트〉의 스토리가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 수수께끼를 푸는 동화 같은 내용 아닙니까. 관객들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오페라 전반에 흐르는 선율이 물 흐르듯이 아름답고 선율의 극치를 느낄 수 있는 오페라인데 제가 어떻게 거기에 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웃음).”
 
  ― 성악가로서 〈투란도트〉 아리아를 부르신 적이 있나요?
 
  “무대에서 많이 불렀지요. 그런데 저는 평생을 테너 성악가로 살았지만 이제 연주자로서의 역할은 그만할 생각입니다.”
 
  ― 예술 총감독은 어떤 자리인가요.
 
  “건축할 때 설계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집은 어때야 한다는 철학 아래 구조물, 인테리어, 들어갈 집기를 세팅하고, 그들이 각자 역할을 잘하도록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 일반인을 붙잡고 ‘아는 성악가 이름을 대봐라’고 하면 조수미 정도 외에 누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성악가가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음, 이번에 공연을 다시 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투란도트〉라는 오페라를 통해 관객들과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오페라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 하고 싶어요. 저는 신앙과 오페라, 딱 이 두 가지 때문에 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제 바람은 우리나라에서 오페라가 뿌리내리고, 보다 많은 사람이 오페라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겁니다.”
 
 
  “국내에 설 무대가 없어 외국으로 나간다”
 
  지금은 〈투란도트〉 감독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줄곧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성악가다.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 KBS 〈열린음악회〉에 수백 회 출연했고, 지금은 작고했거나 여든을 넘긴 음악 선배들과 함께 오페라 1세대로 분류된다. 박현준 총감독은 오페라의 지평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에 2018년에는 한국오페라협회를 만들었다. 그는 협회를 만들면서 “우리 오페라는 위기에 처해 있으며 성악가들이 전업(轉業)하는 가슴 아픈 시대다. 성악가, 오페라인들의 생계와 생존을 넘어 오페라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 성악을 전공한 수많은 사람이 어디에서 노래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노래해서 먹고사는 사람은 5~10% 정도입니다. 서울대·한양대·연세대·한국종합예술학교 출신 성악가들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대단히 잘합니다. 그런데 노래를 할 만한 무대가 없으니까 유럽으로 나가서 합창단원부터 시작해서 솔리스트 주역이 되고, 해외파로 활동하는 겁니다.”
 
  ― 성악가들 기량은 풍부한테 터전이 없다는 거죠.
 
  “우리나라 오페라 시장이 받쳐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요. 국립오페라단은 국가 예산으로 명맥을 잘 유지하고 있지만, 성악가들이 설 무대가 별로 없습니다. 가뜩이나 시장은 열악한데 1인(人) 기획사 같은 오페라단이 양산되면서 오페라 생태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각자 살길을 찾는 게 현실입니다. 오페라계는 왜 그런가, 왜 서로 욕을 하나, 왜 뭉치지를 못하는가가 가장 흔히 하는 얘기입니다. 현재 오페라계에 있는 후배들을 3세대라고 하거든요. 오페라계에 몸담는 사람들부터 척박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오페라에 대해 혼(魂)을 바쳤던 대선배들의 업적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오페라에 몸담은 사람들 스스로 반성하고 재건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궁리를 해야 합니다.”
 
 
  “오페라 1세대 선배들의 정신 이어받기를”
 
2003년 〈투란도트〉 공연 당시의 모습. 장이머우 연출자(가운데)와 박현준 총감독(오른쪽).
  박현준 총감독에게는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쳐준 스승 외에 평생 마음에 담는 두 명의 은사가 더 있다. 서울시립오페라단을 만든 고(故) 김신환(金辛煥) 전(前) 세종문화회관 사장과 김일규 오페라상설무대 대표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김신환 사장은 오페라에 푹 빠져 뒤늦게 프랑스 파리고등사범음악원 음악과를 졸업하고 영남대 교수로 지내며 한국 오페라 진흥에 애썼다. 민간 오페라 단체인 ‘오페라상설무대’를 만든 김일규 대표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유학파 1세대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페도라〉 등을 국내에 소개하며 한국 오페라를 꽃피우는 데 앞장섰다.
 
  “두 분은 사재(私財)를 털어가며 한국 오페라를 부흥시켜보겠다고 온 힘을 다한 분들입니다. 오페라를 생명처럼 사랑했고, 제 또래를 개안(開眼)시켜준 분들이죠. 1세대 유학파인 그분들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오는 성악가들도 있었고요. 그들은 돈벌이 수단으로 오페라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오페라가 좋아서, 우리나라에 번듯한 오페라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졌던 분들입니다. 두 분이 돌아가셨을 때 후배들이 많이 찾지 않아서 제가 마음이 아팠는데 후배들은 기획사처럼 오페라를 하지 말고 그분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명감으로 공연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부터 목숨 걸고 연말 ‘어게인 투란도트’ 공연을 성공시키려 합니다.”
 
  ― 비장한 각오이신데 왜 우리나라에서 오페라가 발전해야 할까요? 누군가는 먹고살기도 바쁘다고 할 것 같은데요.
 
  “왜 대다수의 선진국 모든 시(市)에는 오페라 전용 극장이 있을까요? 그게 바로 답입니다. 저는 국가의 근간은 문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중요성은 백 번, 천 번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우리가 영화를 보듯이 집 근처 오페라 극장에서 음악을 듣고 문화를 향유합니다. 오페라 전용 극장이 없는 나라는 없어요. 오페라와 내가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흥얼거리는 노래 중 상당수가 오페라의 음악이고, 모든 음악의 근간입니다. 합창, 단선율(하나의 멜로디만 연주되는 단순 질감), 복선율(여러 개의 독립적인 멜로디가 동시에 연주되는 복잡한 질감)을 극대화한 것이 오페라입니다. 오페라를 공연하기 위해 현악·금관·목관·타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있어야 하고, 노래하는 성악가·연기·오페라 의상·분장·무대장치·조명·음향 등 모든 것이 총망라돼야 합니다. 수백 년 동안 오페라는 문화의 중심이었어요.”
 
  ― 오페라가 문화의 근간이라는 거군요.
 
  “맞습니다. 오페라 안에는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뿐 아니라 세상 사는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관객 없는 예술가는 존재 이유 없어”
 
  박현준 총감독의 답변은 굉장히 간결했다. 간혹 예술가들을 만나면 느껴지는 뜬구름 잡는 듯한 느낌, 비(非)전공자는 좀처럼 공감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리그’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칭 예술인들이 갖고 있다는 선민의식에 대한 비판 질문을 해봤다.
 
  ― 오페라가 한글 노래가 아니고 누구나 따라 부르는 영역 대의 노래도 아니니까, 관객들한테 앉아서 듣기나 하라는 느낌이 좀 있습니다.
 
  “〈투란도트〉 출연진은 오페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악보를 다 외워야만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만약 활자로 된 대본이라면 그걸 다 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악보가 선율이고 리듬이고 흐름이라서 외울 수 있는 겁니다. 무대에 오르는 성악가는 노래를 불러서 관객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해 타고난 본인의 재능 위에 훈련을 거듭하고,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무대에 서는 거죠. 소리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겁니다. 일반인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는 아니지만, 오페라가 가진 매력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가진 선민의식이라, 그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객이 없는 예술가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세계적인 성악가, 연주자가 ‘내가 최고야’라는 선민의식을 갖고 있다고 쳐봅시다. 그건 그의 노래를 들은 관객이 ‘당신이야말로 마에스트로’라고 인정해서 생기는 것이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을 한다며 선민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가의 경지로 갈수록 겸손해야지요. 무대는 끊임없이 연주자를 가르칩니다.”
 

  ― 티켓값이 너무 비싸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인공적이지 않은 라이브, 오케스트라 음악과 노래를 듣는 비용은 얼마가 적절할까에 대해 자주 생각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공연의 질(質)을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2003년 〈투란도트〉 공연 때 가장 먼저 매진된 것은 최고가였던 50만원짜리 티켓이었어요. 올해의 최고가 VIP 티켓 구매자에게는 최고급 호텔의 케이터링과 와인을 준비해서 공연 전부터 식사를 즐기고, 같은 공간에서 출연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할 예정입니다. 유럽의 오페라 극장에서 많이 하는 방식인데 단순히 공연을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나절을 온전히 즐기는 거죠. 하지만 제게도 오페라에 대한 문턱이 낮아져 티켓 가격도 낮아지고 많은 이가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투란도트〉 성공시켜 문화 강국 기반 만들 터”
 
2024년 〈투란도트〉에는 플라시도 도밍고(맨 왼쪽)를 포함해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대거 출연한다.
  ‘어게인 2024 투란도트’를 위해 꾸며질 ‘황금의 성’ 무대는 길이 45m, 높이 17m에 발광다이오드(LED) 화면을 활용할 예정이다. 이탈리아 최고의 팀이 무대 디자인을 맡는데 박현준 총감독은 이들의 시안을 15번이나 퇴짜를 놓았다. 사실 그는 2003년에 〈투란도트〉를 공연할 때에도 장이머우(張藝謀) 연출자의 시안을 10번이나 퇴짜 놓은 적이 있을 정도로 무대의 완벽성을 중히 여긴다.
 
  “무대 하나 올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창조적 작업입니다. 황제의 계단까지 오르는 1~3층을 완벽하게 상상해서 구현해내야 해요. 황금의 성, 천국에 있는 공주, 신비한 아름다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웃음) 20년 전보다 기술이 많이 좋아져서 기대하고 있지만,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하려면 매사에 완벽을 기해야 합니다.”
 
  ― 무대 설치 기술도, 또 시간도 흘렀으니 더욱 완성된 아름다움을 제공한다고 이해하면 되겠군요.
 
  “이제야 말이지만 2003년 공연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야외 공연에서 가장 큰 변수는 날씨죠. 2003년 5월에 공연했는데 사실 5월이면 계절의 여왕이라고 할 정도로 화창할 때 아닙니까. 한데 그해에 태풍이 일찍 찾아온 겁니다. 큰 세트장의 사이즈가 가로 55m, 세로 120m였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작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공연 당일까지 무대를 완성하지 못했죠. 당일 새벽에 동틀 때까지 기다렸는데 해가 비치더라고요. 그제야 안심이 되면서 세트장 작업해서 겨우 올린 작품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웃음).”
 
  ― 200억짜리 대작인데 성공시킬 자신 있으십니까.
 
  “많이 두렵습니다. 다들 기대가 클 텐데 막상 공연을 열어보니 ‘예전보다 별로다’ ‘실망스럽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이 됩니다. 그래서 죽을 각오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예술성, 창조성이라면 우리나라가 충분히 문화·예술 강국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번 공연을 성공시켜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기반으로 문화 강국이 되는 날을 꿈꿉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투란도트〉는 ‘어게인(다시)’뿐 아니라 ‘시작’이기도 합니다.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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