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이트, 점잖고 단정한 친필 보고 놀라… ‘뭔가 엉뚱한 글씨체일 것 같았는데’
⊙ 발이 묶여 부어 있었기에 사람들은 ‘부은 발’이라는 의미인 오이디푸스라 불러
⊙ 아테네의 척박한 땅, 온통 바위뿐인 곳에서 작은 올리브나무 그늘에 앉아 인생과 세상 논해
⊙ 자기주장 난무하는 한국 민주주의… ‘라코닉’(간단한, 핵심적인)의 정신 돌아봐야
金容新
1950년생. 美 조지워싱턴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메릴랜드주립대 대학원 정치철학 박사 / 단국대 석좌교수,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사단법인 한국일용근로자복지협회 회장 역임. 現 세계정통서학회 회장 / 저서 《심리학 한국인을 만나다》 《나는 누구인가: 일반인을 위한 정신분석학》 《한국사회 빈부의식은 어떻게 변했는가》 《書의 美學》 외 다수
⊙ 발이 묶여 부어 있었기에 사람들은 ‘부은 발’이라는 의미인 오이디푸스라 불러
⊙ 아테네의 척박한 땅, 온통 바위뿐인 곳에서 작은 올리브나무 그늘에 앉아 인생과 세상 논해
⊙ 자기주장 난무하는 한국 민주주의… ‘라코닉’(간단한, 핵심적인)의 정신 돌아봐야
金容新
1950년생. 美 조지워싱턴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메릴랜드주립대 대학원 정치철학 박사 / 단국대 석좌교수,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사단법인 한국일용근로자복지협회 회장 역임. 現 세계정통서학회 회장 / 저서 《심리학 한국인을 만나다》 《나는 누구인가: 일반인을 위한 정신분석학》 《한국사회 빈부의식은 어떻게 변했는가》 《書의 美學》 외 다수
-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 신전 모습이다. 사진=김용신
오랜 기간 정신분석학과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년)가 활동했던 빈과 그가 차용한 오이디푸스 신화의 자취를 찾아보기 위해 그리스를 방문해보고 싶었다. 특히 서양철학의 발상지인 아테네의 산천은 어떠한지도 꼭 보고 싶었다. 그간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70 중반이 될 때까지 정작 보고 싶은 곳을 못 갔으니 아쉬움이 남아서 올여름 더 늙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빈과 그리스를 가보기로 하였다.
빈에서 나의 주목적은 프로이트 박물관 방문이었지만, 나는 간 김에 다른 역사적인 곳들도 자유롭게 돌아보기로 하였다. 그리스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이 넓게 분포되어 있어 여행사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내가 보고 싶은 아테네(Athens), 코린트(Corinth: 코린토스, 고린도), 미케네(Micane), 델피(Delphi:델파이), 테베(Thebe)만을 살펴보는 코스는 없고, 여기에 더하여 에피다우로스(Epidaurus) 원형경기장, 올림피아 고대 유적지 그리고 메테오라(Meteora)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이를 택하기로 하였다.
융과 아들러가 떠난 이유
나는 먼저 빈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지도를 살펴 전차를 타고 프로이트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빈 날씨는 하루에 사계절이 있다고 하더니 한여름인데도 저녁은 쌀쌀할 정도로 시원하고 낮에는 매우 더웠다. 그러나 건조해서인지 그늘에만 가면 더위를 모를 정도였으며, 대중교통이 주로 전철 및 전차여서인지 공기도 매우 상쾌했다.
프로이트는 현재 체코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오스트리아 땅 프리보르(Pribor)에서 1856년에 태어나 3세 때 빈으로 왔다. 현재 프로이트 박물관은 그가 빈에서 살았던 집에 꾸며져 있다. 얼핏 초라하기까지 한 박물관에는 그의 저서들이 진열되어 있고 환자를 돌보던 긴 의자 그리고 벽에는 그의 연표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또한 그가 쓴 편지 및 서명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내 생각과는 달리 필체가 매우 점잖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뭔가 엉뚱한 글씨일 것 같았는데….
프로이트 박물관을 나와 현관 벤치 앞에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이곳에서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정리하고 이를 연구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성애(性愛)로 번역될 수 있는 리비도(Libido)의 개념을 설파했을 것이다. 당시 빈에 살았던 아들러(Alfred Adler·1870~1937년) 그리고 멀리 스위스의 융(Karl Gustav Jung·1875~1961년)도 이곳에 왔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성애에 집착한다는 이유로 결국 떠나고 만다. 이후 아들러는 모든 정신 문제는 열등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소위 ‘개인 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을 창시하였다. 융은 리비도를 단순한 성적 에너지가 아닌 하나의 ‘환상적 이미지’로 봤다. 확대하면 인간 마음을 움직이는 심리적인 에너지로 재해석하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 범주에 국한되어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무의식의 원형(Archetype)은 일종의 ‘조상의 흔적’으로 요약될 수 있는 ‘집단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후 프로이트도 리비도를 넓게 이해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이에 한하여서는 융의 이론을 일부 받아들인 꼴이 되었다.
에로스 & 타나토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창안했다. 리비도라는 본질적 에너지와 함께 인간 무의식의 원초적 욕구가 무엇인가에 집중하였다. 바로 소포클레스(Sophocles·BC 497/6~406/5)가 쓴 생부를 죽이고 생모와 혼인하게 되는 〈오이디푸스 왕(Oedipus the King)〉이라는 비극 속에 증오 혹은 살해욕구(Death Wish)와 사랑(Love)이 있다는데 주목했다. 그 핵심은 어린이가 태어났을 때 자기 사랑의 대상은 어머니라고 생각하는데, 3~6세가 되어 현실을 알아갈 즈음 어머니의 진짜 사랑의 대상은 자기가 아닌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최초로 좌절감을 맛보면서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초기 그의 정신분석학은 한 인간의 무의식적 특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소 과정 및 양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프로이트 본능 이론의 핵심인 사랑(Eros)과 죽임 혹은 공격(Thanatos or Aggression)의 양대 본능도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얻어진 인간의 원초적 욕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은 이후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그 하나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여자아이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산업사회의 도래로 가족이 해체되면서 프로이트 당시의 가족 관계에서 도출된 어린이들의 무의식 형성은 이제는 유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후기 근대주의자들(Post Modernists) 중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년)와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1930~ 1992년) 등은 《반(反) 오이디푸스(Anti-Oedipus)》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대상 관계 이론의 탄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결된 프로이트의 본능 이론은 후일 미국의 설리번(Herbert Harry Sullivan·1892~1949년)을 선두로 주장된 인간은 본능보다는 환경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는 소위 신프로이트학파(Neo-Freudian School)로부터 큰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후 영국의 클라인(Melanie Klein·1882~1960년)은 프로이트의 양대 본능을 대상과의 관계에서 맺어진 사랑과 미움(Hate)의 감정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였다. 그것은 바로 현대 정신분석학의 주류인 대상 관계 이론(Object Relation Theory)으로서, 인간의 무의식이란 본능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서로 얽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어린 시절에는 양육을 받아야 하므로 양육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 어린이의 본능적 반응은 한 사람의 무의식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상 관계 이론에서는 어린이가 자기를 돌보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좋든 나쁘든, 즉 환경이 어떠하든, 본인이 본능적으로 좋게 생각하면 사랑의 감정이, 싫게 생각하면 미움의 감정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부모가 아닌 양육자와의 관계로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으며, 문화에 따라 양태가 달라질지라도 어린이의 무의식 형성에 있어 완전히 무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프로이트 박물관을 나와 베토벤 박물관과 오스트리아 국회의사당 그리고 미술사 박물관 등을 둘러보고 그날 일정을 마쳤다. 다음 날은 호프부르크(Hofburg) 궁전, 빈 국립오페라 극장, 카를(Karl) 성당, 벨베데레(Belvedere) 궁전 등을 구경하였다. 사흘째는 쇤부룬(Schonbrunn) 궁전과 분리파(Secession) 미술관 등을 방문하였다. 분리파 운동은 19세기 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혁신적 미술 활동으로서 자신의 예술과 기존의 예술을 분리시켜 특정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실질적인 삶과 예술을 연결하여 표현하자는 사조였다. 그래서인지 분리파 미술관에는 여러 장르가 서로 결합된 다양한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이디푸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코린트로
빈 구경을 마치고 나는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숙소에 도착해 맞은편 언덕에 고대 건축물이 보여서 물었더니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고 했다. 파르테논(Parthenon) 신전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테네를 방문하면 필수적으로 아크로폴리스 성채에 올라 파르테논 신전을 방문하는데, 나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된 곳을 찾아보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그곳 방문은 계획에 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숙소 바로 건너편이 아크로폴리스라니! 가까이는 아니지만 육안으로 그 아름다운 파르테논 신전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이었다.
아테네에서 첫날 밤을 보낸 후 여행사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오이디푸스 신화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나와 같은 여행 스케줄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서 대형 버스에 겨우 14명만이 타 단촐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해설사의 영어 발음도 알아듣기 쉬워서 한결 편안하였다. 우리 일행은 아테네 시내를 빠져나와 먼저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가느다랗게 본토와 연결되어 있는 입구의 코린트로 향했다. 이곳은 오이디푸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지금은 운하가 생겨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실제로 섬이 된 꼴이다.
오이디푸스는 아테네의 동북쪽에 있는 테베 왕자로 태어났다. 그 아버지 라이오스(Laius) 왕은 어느 날 델피에 있는 아폴로(Apollo)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그에게 살해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자였기에 아내인 이오카스테(Iocaste)와 동침할 일이 없어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술김에 아내와 동침하게 되어 아이를 얻게 되자 라이오스는 아폴로의 예언이 생각나 하인에게 그를 죽게 발을 묶어 산에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하인은 당시 코린트의 폴리보스(Polybus) 왕이 자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아이를 몰래 폴리보스에게 주게 된다. 일설에는 버려진 오이디푸스를 코린트 목동들이 데려와 폴리보스에게 주었다고도 한다. 발이 묶여 부어 있었기에 사람들은 ‘부은 발’이라는 의미인 오이디푸스라고 불렀다.
오이디푸스 이야기
오이디푸스는 청년이 되자 자신이 폴리보스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델피의 아폴로를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자신은 결국 아버지를 죽일 운명을 가졌다고 하니 크게 실망하여 코린트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무작정 가고 있었다. 그러다 좁은 길에서 마차를 탄 사람을 만나 서로 길을 비켜달라는 시비 끝에 그를 죽이고 말았는데, 그가 바로 자신의 생부인 라이오스 왕이었다.
당시 테베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자신이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테베를 멸망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어서 라이오스 왕은 몰래 테베를 빠져나와 아폴로에게 그 답을 묻기 위해 델피로 가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라이오스를 죽인 오이디푸스는 결국 테베에 도착하였는데 스핑크스가 오전에는 네 발로, 점심때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무어냐고 묻자 “사람”이라고 답하자 스핑크스는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이를 본 테베 사람들은 오이디푸스를 향해 테베를 구원한 영웅이라 칭송하였다. 그리고 마침 라이오스 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오이디푸스를 테베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전통에 따르면 정복자는 피정복 국가의 왕비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기에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비였던,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생모인, 이오카스테와 혼인하여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은 테베 도시국가를 세운 카드모스(Cadmus)는 제우스의 추천으로 아프로디테(Aphrodite)의 딸인 하르모니아(Harmonia)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를 축하하기 위해 그리스 신들이 영원히 늙지 않는 목걸이를 주었으며 이것이 후임 왕비들에게 계속 전달되어 이오카스테 또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오이디푸스는 그녀가 생모인지 전혀 몰랐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세월이 흐른 후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 눈을 찔러 눈이 먼 채 테베를 떠나 아테네 부근 콜로누스(Colonus)에서 방황하다 생을 마치게 된다.
엘렉트라 콤플렉스
우리는 바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남쪽 에피다우로스에 있는 고대 원형경기장을 보고 아르고스(Argos) 항구를 지나 서쪽으로 멀지 않은 미케네로 갔다. 여기에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가멤논(Agamemnon)의 묘가 보존되어 있다. 아가멤논은 아내인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와의 사이에 이피게니아(Iphigenia)와 엘렉트라(Electra)라는 딸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카산드라(Cassandra)라는 애첩이 있었다. 또한 트로이 전쟁 전 승리를 위해 이피게니아를 신께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이 전쟁에서 돌아오자 그와 카산드라를 살해하고 만다. 이에 다른 딸인 엘렉트라는 아버지를 죽인 자신의 생모를 살해한다. 이는 바로 소포클레스가 쓴 〈엘렉트라〉라는 비극이다.
융은 이야말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언급이 안 된 여자아이의 경우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여자아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다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새롭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엘렉트라 비극은 프로이트가 찾고자 했던 원초적인 사랑과 죽임을 동시에 나타내는 이야기는 아니다. 즉 어머니를 살해한 것이 아버지와의 사랑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엘렉트라 콤플렉스 이론은 이후 널리 인용되지 않고 있다. 왜 융은 이걸 몰랐을까?
다음으로 우리는 서북쪽으로 향해 올림피아 고대 유적지 부근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튿날 오전 유적지를 방문했는데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7월 초에도 매우 더워 땀을 뻘뻘 흘렸지만 가끔은 그늘에서 쉬어가며 둘러보았다. 이곳은 이번 나의 여행 목적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올림피아 유적지를 둘러본 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단에 있는 좁은 해협의 다리를 건너 그리스 본토 서쪽 중남부에 있는 델피로 향했다. 델피 근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맑은 정신으로 아폴로 신전을 방문하였다. 제우스로부터 예언을 허락받은 아폴로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지자 사람들은 기원전 6세기경 델피에 아폴로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이곳이 파괴되자 4세기경에 그 자리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다만 지금은 기둥 몇 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 사람들은 델피가 세상의 중심인 배꼽과 같은 곳이라 믿었는데 지금도 ‘배꼽(Navel)’돌이 세워져 있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물었던 이곳에서 나는 한참 동안 과거를 돌이켜보고 남아 있는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았다.
미케네에서 델피, 테베, 다시 아테네로
다음 날 우리는 그리스 중북부 바위산 위에 지어진 메테오라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메테오라는 “공중에 매달린”이라는 뜻인데, 정말 공중에 매달린 듯 바위 꼭대기에 수도원들이 지어져 있었다. 버스로 수도원까지 올라갔는데, 모든 전경이 장엄하고 아슬아슬한 것이 누구나 사는 동안 한번은 가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007 영화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1981)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메테오라 수도원을 떠나 우리를 실은 버스는 곧바로 남쪽을 향해 델피와 아테네의 동쪽으로 중간쯤에 있는 오이디푸스의 고향 테베로 향했다. 지금은 모든 유적이 사라지고 넓은 평원에 조그마한 마을만 형성되어 있었다. 다만 그 옆에 커다란 호수가 있어서 작물을 재배하기 쉬웠을 것을 생각하니, 당시 테베 사람들은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했을 것으로 짐작됐다. 버스가 쉬기 위해 테베 평원 어느 휴게소에 잠시 들렀을 때, 나는 드디어 내가 보고 싶었던 오이디푸스 신화의 자취를 대략이나마 찾아보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아테네로 다시 돌아온 나는 왜 이곳이 서양철학의 발상지가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테네의 땅은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평원은 없고 산은 온통 바위뿐이었다. 나무는 자생적으로 자란 올리브나무와 키 작은 서양 소나무뿐이었다. 농사나 목축하기도 쉽지 않고, 바다가 비교적 멀리 있어서 어업에 종사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기온은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 그러니 한가하게 올리브나무 그늘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인생과 세상을 논하게 된 것은 아닐까? 기록에는 이웃 도시국가와의 교역에 의존했다고 하는데, 그 대상은 주로 올리브 열매와 석재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교역을 하자니 말도 화려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들이란 바로 자기 생각을 여러 사람 앞에서 유창하게 이야기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장들이 정제된 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일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동양의 경우는 춘추전국시대 철학이 꽃피었는데 전쟁이 난무하고 세상이 어지러워 철학이 융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한가하거나 아주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잉태된다는 것인가? 조금은 엉뚱한 추측을 해보았다.
철학의 발상지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에 스파르타(Sparta)가 위치했던 라코니아(Laconia)라는 고대 도시국가 지역이 있다. 영어로 ‘간단한, 핵심적인’을 의미하는 ‘라코닉(Laconic)’이라는 형용사는 이곳 사람들이 말수가 적었던 것에서 유래된 단어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아테네 사람들이 말이 많아서 그들에게 항상 간결하게 그리고 핵심만 말하라고 했다고 한다. 아테네 사람들은 말이 많고 주장들이 다양하니 스파르타와는 달리 민주주의도 꽃피웠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편 말이 많으면 사회가 화합하지 못하고 주장들만 난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주주의가 퇴행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된다고 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라코닉’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재음미하면서 우리 사회와 연결해보았다. 내가 본 현재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기주장들만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익보다는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변명과 핑계만 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말이다. 특히 정치가 그렇다. 핑계와 거짓말이라는 퇴행적인 자기 방어적 태도의 일관은 정신 이상의 가장 초기 단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추가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잘못 해소하면 아버지의 건전한 권위마저 부정하는 비정상적인 성격이 형성된다고 한다. 이를 사회현상으로 확대하여 해석할 수도 있는데, 현재 우리 정치 현실에서 그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다. 즉 모든 합리적 권위까지 파괴되어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편 욕심만 차리는 심한 편집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 델피의 아폴로 신전 돌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를 생각하며 스스로 변화의 길을 찾아보아야 때가 아닐까?⊙
빈에서 나의 주목적은 프로이트 박물관 방문이었지만, 나는 간 김에 다른 역사적인 곳들도 자유롭게 돌아보기로 하였다. 그리스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이 넓게 분포되어 있어 여행사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내가 보고 싶은 아테네(Athens), 코린트(Corinth: 코린토스, 고린도), 미케네(Micane), 델피(Delphi:델파이), 테베(Thebe)만을 살펴보는 코스는 없고, 여기에 더하여 에피다우로스(Epidaurus) 원형경기장, 올림피아 고대 유적지 그리고 메테오라(Meteora)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이를 택하기로 하였다.
융과 아들러가 떠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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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프로이트 박물관에 전시된 프로이트 글씨다. 점잖고 단정한 필적이다. |
프로이트는 현재 체코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오스트리아 땅 프리보르(Pribor)에서 1856년에 태어나 3세 때 빈으로 왔다. 현재 프로이트 박물관은 그가 빈에서 살았던 집에 꾸며져 있다. 얼핏 초라하기까지 한 박물관에는 그의 저서들이 진열되어 있고 환자를 돌보던 긴 의자 그리고 벽에는 그의 연표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또한 그가 쓴 편지 및 서명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내 생각과는 달리 필체가 매우 점잖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뭔가 엉뚱한 글씨일 것 같았는데….
프로이트 박물관을 나와 현관 벤치 앞에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이곳에서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정리하고 이를 연구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성애(性愛)로 번역될 수 있는 리비도(Libido)의 개념을 설파했을 것이다. 당시 빈에 살았던 아들러(Alfred Adler·1870~1937년) 그리고 멀리 스위스의 융(Karl Gustav Jung·1875~1961년)도 이곳에 왔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성애에 집착한다는 이유로 결국 떠나고 만다. 이후 아들러는 모든 정신 문제는 열등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소위 ‘개인 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을 창시하였다. 융은 리비도를 단순한 성적 에너지가 아닌 하나의 ‘환상적 이미지’로 봤다. 확대하면 인간 마음을 움직이는 심리적인 에너지로 재해석하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 범주에 국한되어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무의식의 원형(Archetype)은 일종의 ‘조상의 흔적’으로 요약될 수 있는 ‘집단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후 프로이트도 리비도를 넓게 이해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이에 한하여서는 융의 이론을 일부 받아들인 꼴이 되었다.
에로스 & 타나토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창안했다. 리비도라는 본질적 에너지와 함께 인간 무의식의 원초적 욕구가 무엇인가에 집중하였다. 바로 소포클레스(Sophocles·BC 497/6~406/5)가 쓴 생부를 죽이고 생모와 혼인하게 되는 〈오이디푸스 왕(Oedipus the King)〉이라는 비극 속에 증오 혹은 살해욕구(Death Wish)와 사랑(Love)이 있다는데 주목했다. 그 핵심은 어린이가 태어났을 때 자기 사랑의 대상은 어머니라고 생각하는데, 3~6세가 되어 현실을 알아갈 즈음 어머니의 진짜 사랑의 대상은 자기가 아닌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최초로 좌절감을 맛보면서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초기 그의 정신분석학은 한 인간의 무의식적 특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소 과정 및 양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프로이트 본능 이론의 핵심인 사랑(Eros)과 죽임 혹은 공격(Thanatos or Aggression)의 양대 본능도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얻어진 인간의 원초적 욕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은 이후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그 하나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여자아이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산업사회의 도래로 가족이 해체되면서 프로이트 당시의 가족 관계에서 도출된 어린이들의 무의식 형성은 이제는 유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후기 근대주의자들(Post Modernists) 중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년)와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1930~ 1992년) 등은 《반(反) 오이디푸스(Anti-Oedipus)》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대상 관계 이론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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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신 교수가 프로이트 박물관 벽에 새겨진 연표 앞에 섰다. |
인간이란 어린 시절에는 양육을 받아야 하므로 양육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 어린이의 본능적 반응은 한 사람의 무의식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상 관계 이론에서는 어린이가 자기를 돌보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좋든 나쁘든, 즉 환경이 어떠하든, 본인이 본능적으로 좋게 생각하면 사랑의 감정이, 싫게 생각하면 미움의 감정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부모가 아닌 양육자와의 관계로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으며, 문화에 따라 양태가 달라질지라도 어린이의 무의식 형성에 있어 완전히 무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프로이트 박물관을 나와 베토벤 박물관과 오스트리아 국회의사당 그리고 미술사 박물관 등을 둘러보고 그날 일정을 마쳤다. 다음 날은 호프부르크(Hofburg) 궁전, 빈 국립오페라 극장, 카를(Karl) 성당, 벨베데레(Belvedere) 궁전 등을 구경하였다. 사흘째는 쇤부룬(Schonbrunn) 궁전과 분리파(Secession) 미술관 등을 방문하였다. 분리파 운동은 19세기 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혁신적 미술 활동으로서 자신의 예술과 기존의 예술을 분리시켜 특정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실질적인 삶과 예술을 연결하여 표현하자는 사조였다. 그래서인지 분리파 미술관에는 여러 장르가 서로 결합된 다양한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이디푸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코린트로
빈 구경을 마치고 나는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숙소에 도착해 맞은편 언덕에 고대 건축물이 보여서 물었더니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고 했다. 파르테논(Parthenon) 신전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테네를 방문하면 필수적으로 아크로폴리스 성채에 올라 파르테논 신전을 방문하는데, 나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된 곳을 찾아보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그곳 방문은 계획에 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숙소 바로 건너편이 아크로폴리스라니! 가까이는 아니지만 육안으로 그 아름다운 파르테논 신전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이었다.
아테네에서 첫날 밤을 보낸 후 여행사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오이디푸스 신화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나와 같은 여행 스케줄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서 대형 버스에 겨우 14명만이 타 단촐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해설사의 영어 발음도 알아듣기 쉬워서 한결 편안하였다. 우리 일행은 아테네 시내를 빠져나와 먼저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가느다랗게 본토와 연결되어 있는 입구의 코린트로 향했다. 이곳은 오이디푸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지금은 운하가 생겨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실제로 섬이 된 꼴이다.
오이디푸스는 아테네의 동북쪽에 있는 테베 왕자로 태어났다. 그 아버지 라이오스(Laius) 왕은 어느 날 델피에 있는 아폴로(Apollo)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그에게 살해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자였기에 아내인 이오카스테(Iocaste)와 동침할 일이 없어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술김에 아내와 동침하게 되어 아이를 얻게 되자 라이오스는 아폴로의 예언이 생각나 하인에게 그를 죽게 발을 묶어 산에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하인은 당시 코린트의 폴리보스(Polybus) 왕이 자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아이를 몰래 폴리보스에게 주게 된다. 일설에는 버려진 오이디푸스를 코린트 목동들이 데려와 폴리보스에게 주었다고도 한다. 발이 묶여 부어 있었기에 사람들은 ‘부은 발’이라는 의미인 오이디푸스라고 불렀다.
오이디푸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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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의 고향 테베는 모든 유적이 사라지고 넓은 평원만 남았다. |
당시 테베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자신이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테베를 멸망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어서 라이오스 왕은 몰래 테베를 빠져나와 아폴로에게 그 답을 묻기 위해 델피로 가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라이오스를 죽인 오이디푸스는 결국 테베에 도착하였는데 스핑크스가 오전에는 네 발로, 점심때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무어냐고 묻자 “사람”이라고 답하자 스핑크스는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이를 본 테베 사람들은 오이디푸스를 향해 테베를 구원한 영웅이라 칭송하였다. 그리고 마침 라이오스 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오이디푸스를 테베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전통에 따르면 정복자는 피정복 국가의 왕비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기에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비였던,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생모인, 이오카스테와 혼인하여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은 테베 도시국가를 세운 카드모스(Cadmus)는 제우스의 추천으로 아프로디테(Aphrodite)의 딸인 하르모니아(Harmonia)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를 축하하기 위해 그리스 신들이 영원히 늙지 않는 목걸이를 주었으며 이것이 후임 왕비들에게 계속 전달되어 이오카스테 또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오이디푸스는 그녀가 생모인지 전혀 몰랐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세월이 흐른 후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 눈을 찔러 눈이 먼 채 테베를 떠나 아테네 부근 콜로누스(Colonus)에서 방황하다 생을 마치게 된다.
엘렉트라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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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피가 세상의 중심인 배꼽과 같은 곳이라 믿었고, 지금도 ‘배꼽(Navel)’돌이 세워져 있다. 김용신 박사가 ‘배꼽’돌 앞에 섰다. |
융은 이야말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언급이 안 된 여자아이의 경우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여자아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다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새롭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엘렉트라 비극은 프로이트가 찾고자 했던 원초적인 사랑과 죽임을 동시에 나타내는 이야기는 아니다. 즉 어머니를 살해한 것이 아버지와의 사랑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엘렉트라 콤플렉스 이론은 이후 널리 인용되지 않고 있다. 왜 융은 이걸 몰랐을까?
다음으로 우리는 서북쪽으로 향해 올림피아 고대 유적지 부근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튿날 오전 유적지를 방문했는데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7월 초에도 매우 더워 땀을 뻘뻘 흘렸지만 가끔은 그늘에서 쉬어가며 둘러보았다. 이곳은 이번 나의 여행 목적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올림피아 유적지를 둘러본 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단에 있는 좁은 해협의 다리를 건너 그리스 본토 서쪽 중남부에 있는 델피로 향했다. 델피 근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맑은 정신으로 아폴로 신전을 방문하였다. 제우스로부터 예언을 허락받은 아폴로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지자 사람들은 기원전 6세기경 델피에 아폴로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이곳이 파괴되자 4세기경에 그 자리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다만 지금은 기둥 몇 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 사람들은 델피가 세상의 중심인 배꼽과 같은 곳이라 믿었는데 지금도 ‘배꼽(Navel)’돌이 세워져 있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물었던 이곳에서 나는 한참 동안 과거를 돌이켜보고 남아 있는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았다.
미케네에서 델피, 테베, 다시 아테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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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신 박사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메테오라 수도원을 떠나 우리를 실은 버스는 곧바로 남쪽을 향해 델피와 아테네의 동쪽으로 중간쯤에 있는 오이디푸스의 고향 테베로 향했다. 지금은 모든 유적이 사라지고 넓은 평원에 조그마한 마을만 형성되어 있었다. 다만 그 옆에 커다란 호수가 있어서 작물을 재배하기 쉬웠을 것을 생각하니, 당시 테베 사람들은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했을 것으로 짐작됐다. 버스가 쉬기 위해 테베 평원 어느 휴게소에 잠시 들렀을 때, 나는 드디어 내가 보고 싶었던 오이디푸스 신화의 자취를 대략이나마 찾아보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아테네로 다시 돌아온 나는 왜 이곳이 서양철학의 발상지가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테네의 땅은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평원은 없고 산은 온통 바위뿐이었다. 나무는 자생적으로 자란 올리브나무와 키 작은 서양 소나무뿐이었다. 농사나 목축하기도 쉽지 않고, 바다가 비교적 멀리 있어서 어업에 종사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기온은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 그러니 한가하게 올리브나무 그늘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인생과 세상을 논하게 된 것은 아닐까? 기록에는 이웃 도시국가와의 교역에 의존했다고 하는데, 그 대상은 주로 올리브 열매와 석재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교역을 하자니 말도 화려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들이란 바로 자기 생각을 여러 사람 앞에서 유창하게 이야기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장들이 정제된 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일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동양의 경우는 춘추전국시대 철학이 꽃피었는데 전쟁이 난무하고 세상이 어지러워 철학이 융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한가하거나 아주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잉태된다는 것인가? 조금은 엉뚱한 추측을 해보았다.
철학의 발상지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에 스파르타(Sparta)가 위치했던 라코니아(Laconia)라는 고대 도시국가 지역이 있다. 영어로 ‘간단한, 핵심적인’을 의미하는 ‘라코닉(Laconic)’이라는 형용사는 이곳 사람들이 말수가 적었던 것에서 유래된 단어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아테네 사람들이 말이 많아서 그들에게 항상 간결하게 그리고 핵심만 말하라고 했다고 한다. 아테네 사람들은 말이 많고 주장들이 다양하니 스파르타와는 달리 민주주의도 꽃피웠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편 말이 많으면 사회가 화합하지 못하고 주장들만 난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주주의가 퇴행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된다고 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라코닉’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재음미하면서 우리 사회와 연결해보았다. 내가 본 현재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기주장들만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익보다는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변명과 핑계만 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말이다. 특히 정치가 그렇다. 핑계와 거짓말이라는 퇴행적인 자기 방어적 태도의 일관은 정신 이상의 가장 초기 단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추가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잘못 해소하면 아버지의 건전한 권위마저 부정하는 비정상적인 성격이 형성된다고 한다. 이를 사회현상으로 확대하여 해석할 수도 있는데, 현재 우리 정치 현실에서 그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다. 즉 모든 합리적 권위까지 파괴되어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편 욕심만 차리는 심한 편집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 델피의 아폴로 신전 돌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를 생각하며 스스로 변화의 길을 찾아보아야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