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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僞作과 고독하게 싸우는 미술사학자 강우방

“僞作은 범죄, 미술사학자들이 僞作으로 논문 발표하기도”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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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람하는 위작 현상… 21세기 한국 미술사학의 위기”
⊙ “위작 범람 원인은 학자들 책임… 정년퇴임 후 학계와 인연 끊어”
⊙ 하버드대 박사 과정 미루고 미국 전역 돌며 소장 작품 조사하며 안목 넓혀
⊙ “추사 명품집과 추사 관련 저서들 3분의 2가 위작”
⊙ 인간이 창조한 조형예술품의 90%가 문양… 문양 혹은 무늬에 심원한 철학사상 담겨

姜友邦
1941년생. 서울대 독문학과 졸업, 美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 수료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및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및 관장, 이화여대 초빙교수 역임. 現 일향 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 /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감로탱》 《미의 순례》 《일향 강우방의 예술 혁명일지》 등 다수
사진=조선DB
  이분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말씀에는 거침이 없었고 글에는 상상력이 가득해보였다.
 
  뵙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뵙고 싶은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무덥던 지난 8월 2일 오후 기자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 위치한 ‘일향 한국미술사연구원’에 도착할 무렵, 반걸음 앞서 걷던 택배기사를 우연히 따라갔다. 입구에 놓아두고 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낸 묵직한 도록 상자를 건네며 우리는 마주 앉았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어떤 해맑음이 얼굴 전체에서 풍겨 나왔다. 이 느낌은 인터뷰 내내 지속되었다.
 
 
  세계 미술사를 한데 아우르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부장 시절인 1978년 4월 강우방 선생은 일본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일본 불교미술의 원류전〉에 참석해 〈경주 안압지 출토의 불상〉을 주제로 발표했다.
  강우방(姜友邦). 1941년, 만주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다시 고고인류학과에 학사 편입했지만 중간에 그만두었다. 일본 교토와 도쿄의 국립박물관에서 연수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및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및 관장(재임 1997~2000년)을 역임했다. 퇴임 후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우리나라 미술품들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 나를 발견하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미술사학자로서 그는 우리나라 불교 미술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처음엔 한국 미술의 모태가 통일신라 시대 미술에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더 근원적인 모태가 고구려 미술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고분 벽화임을 깨달은 후 한국 미술 전체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자신의 삶에서의 모티브가 된 열정을 한 줄로 요약했다.
 
  더 나아가 세계 미술사를 한데 아우르기 위해 중국과 일본, 인도, 그리스, 로마, 중세 유럽 미술, 서아시아 미술 등을 새로이 개척하여 전 세계를 누비며 100회 이상 학술 발표와 강연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다.
 
  기자가 그를 만나기로 결심한 것은 위작(僞作)에 대한 학자로서의 양심에 진정성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범람하는 위작 현상을 21세기 한국 미술사학의 위기”라고 강우방 선생은 진단한다. 위작을 판별하기 위해선 “문헌 위주의 역사적 접근 방법이나 이론 중심의 공허한 방법론 대신 작품의 본질을 파악하는 감식안(鑑識眼)을 길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정확하게 2년 전인 2022년 8월 12일부터 8개월여 동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이 열렸다. 이를 보고 난 뒤 강우방 선생은 전시 작품 대부분이 위작이라고 단언했다. 일부 몇몇 작품이 위작일 수 있다거나 그럴 우려가 있다는 두루뭉술하거나 우회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저 단호하게 위작이라고 말했다.
 
 
  이중섭을 두고 위작 논란이 많은 이유는…
 
  《월간조선》은 최근 6월호에 〈발굴-이중섭 위작 논란 검증의 ‘기준작’ 공개〉를 실었다. 위작에 대한 일관된 생각을 듣고 싶어 선생을 찾아갔다.
 
  ― 이중섭을 두고 위작 논란이 많은 이유는 뭘까요.
 
  “우리 국민이 사랑하는 화가가 정말 몇 안 되잖아요. (위작이 만연하면) 이중섭(李仲燮·1916~1956년)의 예술세계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의 예술혼을 무너뜨리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 배후에 삼성이 있고 그다음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있으니까 의혹이 제기돼도 신문사에서 안 쓰는 거예요. 광고를 안 주니까 부담이 되지요.”
 
  ― 계속 위작 의혹을 제기한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위작을 용서 못 하는 성격이에요. 왜냐하면 그러면 안 되니까! 위작들을 가지고 책(도록, 논문–편집자 주)을 내거나 전시하면 제가 가만히 안 있어요. 위작을 만드는 것은 범죄입니다. 위작을 저서에 싣는 것은 위작을 진작으로 만들게 되므로 더 큰 범죄입니다.”
 
  그는 “위작이란 역사를 가짜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역사학이란 게 가능한가”라고 반문했다.
 

  ― 위작이 이렇게 범람하는데 학계가 침묵하는 이유는 뭘까요.
 
  “학자들에게 원인이 있어요. 대학에서 퇴임하면 모두 사라져 버려요. 학문 활동을 안 해요. 학계와 인연을 끊어버려요. 대학이란 게 잡일이 많거든요. 하고 싶은 일을 잘 못 해요. 퇴임한 후 올바른 글이 나와야 하는데 안 해요. 참 이거는….”
 
  ― 학계에서 권력을 지녔던 교수들이 퇴임 후 바로 사라진다는 의미인가요?
 
  “서슬이 퍼렇게 학계를 권력화하고 독점하던 이들이 퇴임을 하자마자 다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하다못해 박물관 가서 작품이라도 좀 보든가 해야 하는데 참으로 아무것도 안 해요. 이건 대학에서 평생 올바로 연구하지 못했다는 증거지요.”
 
  ― 존경받는 교수라면….
 
  “정말 참된 교수라면 위작이 있다면 비판해야 돼요.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 비판의 대상이 다 교수들이에요. 교수들이 진위(眞僞)를 몰라요.”
 
  ― 박물관이나 문화재청 전문가들은 알 수 있지 않나요? 최소한의 고민도 하지 않을까요?
 
  “(고민도 안 하는) 교수들이 문화재 위원들이에요. 그러니까 말이 안 되죠.”
 
 
  “불상과 불화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강우방 선생은 궁궐건축, 불상조각, 불화, 도자기 등이 모두 문양(文樣)으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한다. 직접 손으로 그린 문양들.
  강우방은 불교조각, 즉 불상(佛像)이 주 전공 분야였다. 불상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불교회화, 즉 불화(佛畫)를 연구해야 함을 알고 고려불화, 조선불화를 연구했다. 그래서 “불상과 불화 전체가 문양(文樣)임을 밝히고, 일체를 완벽히 밝히는 세계 최초의 불상과 불화의 연구자가 되었다”고 한다.
 
  불화 연구에 대한 얘기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어떻게 해서 그에게 위작을 가리는 안목과 심미안이 생겼을까 무척 궁금해졌다.
 
  “1980년 무렵 국립경주박물관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는데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라 예산이 얼마 안 됐어도 간단한 시굴(試掘) 정도는 할 수 있었어요.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 바닥을 시굴하는데… 절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부처를 처음 받아들일 때 ‘신선’으로 인식하려 했음을 알 수 있었어요. 매우 고졸(古拙)한 불상들이 고준(高峻)한 절벽과 돌기둥에 새겨져 있었죠.”
 
  그때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급히 미국 클리블랜드 박물관으로 떠나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한국미술 5000년 전(展)〉이 3년 계획으로 순회 전시 중이었다. 1980년, 그로선 미국이 초행(初行)길이었다.
 
  “떠나기 전부터 어쩌면 미국에서 나에게 한국 미술에 대한 강연을 부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행기를 타고 가는 중에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미술의 과도기 양식〉이란 논문 주제를 정하고 클리블랜드에 도착하는 대로 영어로 논문을 쓰기 시작했죠.”
 
  매우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잡아 심혈을 기울여 써 내려갔다. 매일 밤, 선풍기가 있으나마나한 찜통 같은 한여름 더위에도 논문의 페이지를 개미처럼 채워나갔다. 클리블랜드 박물관에는 특히 인도 불상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서 틈틈이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보스턴 박물관 얀 폰테인(Jan Fontein) 관장에게 전화가 왔다. ‘보스턴에서 열리는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하지 않겠느냐’고.
 
  “올 것이 왔구나 싶었죠. 한창 논문을 쓰고 있었고, 준비가 되어 있는지라 참가할 수 있다고 답했어요. 보스턴에 도착해 보니 도시 전체가 유럽풍이었고, 크고 작은 여러 박물관이 많아 흥분되었어요.”
 
  그의 박력 있는 태도 앞에서 준비된 사람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는 문장을 기자는 떠올렸다.
 
 
  학부 졸업 C학점으로 석사 건너뛰고 하버드대 박사 과정 입학
 
  그는 미국에서 조사한 중국 불상과 한국의 불상을 비교하면서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에 대해 발표했다.
 
  “제 발표를 들은 하버드대 존 로젠필드(John Rosenfield) 교수가 대뜸 교환 교수(visiting scholar)로 1년간 초청하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때 학위가 없었어요. 그래서 로젠필드 교수가 ‘박사 학위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다시 제안했죠.”
 
  강우방은 학부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고 평점마저 C학점이었다. 석사도 거치지 않았는데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유학을 위한 GRE(미국 대학원 입학 자격시험), 토플 등 일체의 기본적인 시험을 면제할 것이니 몸만 오라”는 것이었다. 1982년 가족과 함께 보스턴으로 향했다. 예상치도 못한 인생의 전환점으로서 42세로 대학원생이 되었다.
 
  “막상 가보니, 머리가 굳었는지 강의 시간에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어요. 그 고충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죠. 중국과 인도 미술에 관한 강의를 들었는데, 사진만 보아도 강의 내용이 그리 들을 만한 것이 아닌 것 같았어요. 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죠.”
 
 
  눈부신 명품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젊은 시절 강우방 선생.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과 학예연구실장 등을 역임했다.
  ― 그래도 학위 논문은 쓰셨나요?
 
  “석굴암에 대한 학위 논문을 쓰다가 중지하고 ‘여기서 (박사 학위를) 마치지 않겠다’고 그랬어요. 일종의 거절(拒絶)의 의미였죠. 난 여기서 안 받겠다! 왜 그랬냐면 거기 있어보니까 (박사 학위를) 아무나 다 줘요. 아시아 학생들이 하버드로 오면 몇 년 있다가 다 줘요. 게다가 한국 미술을 아는 교수가 한 명도 없어요. 그러니 학생들이 뭘 써와도 판단이 안 되죠.
 
  저는 학위를 마치지 않는 대신 1년 박사 과정을 더 연장해서 미국 전역에 있는 작품을 더 조사했죠.”
 
  그는 이 결심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미국은 도시마다 큰 박물관이 있다. 보스턴 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뉴욕현대미술관, 워싱턴DC의 프리어 미술관, 필라델피아 박물관, 클리블랜드 박물관, LA 카운티 박물관,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 박물관, 캐나다의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등 북미의 여러 굵직한 박물관을 발로 직접 찾아다니며 작품 조사에 몰입했다. 몇 번이고 가서 중국, 인도 등 동양 미술품뿐만 아니라 오세아니아 원주민의 미술품과 서양의 미술품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눈부신 명품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을 쓴다고 ‘숨겨진’ 보석의 생생한 찬란함을 눈앞에서 놓칠 수는 없었다.
 
  “작품 조사란 명목으로 미국 주요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들을 보게 되었어요. 사실 미술사 전공자들이 저처럼 사진 찍고 작품 조사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요. 도록을 가지고 하지 직접 눈으로 보진 않아요. 저는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며 작품을 조사했으니 안목이 생겼어요.”
 
 
  “위작이라도 아주 쓰레기 같은 그림”
 
‘성덕대왕 신종’이라 불리는 경주 에밀레종 앞에 선 강우방 선생.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했다.
  ― 작품 조사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걸 의미하나요.
 
  “문제의식을 가지고 원하는 작품을 선정하되 예컨대 불상조각은 입체적이라 눈에 보이는 세부 사진을 각도에 따라 여러 면을 사진 촬영하며 읽어냈어요. 또한 본 것을 스케치하고 꼼꼼히 기록했죠. 회화인 경우는 세부(細部)들을 찍었죠.”
 
  ― 작품을 촬영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스케치하며 문양의 특징을 파악하는 작업이 흥미롭네요.
 
  “진위를 구별하는 감식안이 확고해야 진작인지 위작인지 알 수 있어요. 제가 어느 서울대 교수 회갑 기념논문집을 봤더니 논문집 커버 그림이 위작이에요. 그들은 평생 회화를 연구한 전공자인데 그 그림이 위작인지 몰랐던 겁니다. 위작이라도 아주 쓰레기 같은 그림이었어요. 매우 화가 났지요.”
 
  ― 위작 여부를 가릴 안목은 어떻게 생기나요.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작품들을 많이 조사하고 그걸 가지고 글도 쓰면서 키워지는 건데 그걸(조사를) 안 하니까 없는 거예요.”
 
  그러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안목은 그냥 생기지 않아요. 우리의 전통을 올바로 체험하지 않으면 결코 훌륭한 학자가 못 돼요. 이건 고루한 생각이 아닙니다. 올바른 개안(開眼) 없이는 무엇을 하든 불행합니다.”
 
  KBS는 지난 7월 1일 〈미국 미술관서 이중섭·박수근 위작 전시〉 기사를 통해 미국 유명 미술관에 전시됐던 이중섭·박수근 그림이 위작이라는 전문가 의견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라크마(로스앤젤레스카운티뮤지엄, LACMA)는 지난 2021년 한국계 미국인 체스터 장과 그의 아들 캐머런 장으로부터 회화·도자 등 100점을 기증받았으며, 이 가운데 35점을 지난 2월 ‘한국의 보물들’ 전시에서 선보였었다.
 
  홍선표 이화여대 명예교수, 태현선 삼성미술관 리움 큐레이터, 김선희 전 부산시립미술관장 등이 라크마에 전시된 이중섭의 〈기어오르는 아이들〉과 박수근의 〈세 명의 여성과 어린이〉 등을 분석한 뒤 “진작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그의 생각과 일치했다.
 
  ― 이중섭은 우리에게 어떤 화가입니까.
 
  “이중섭은 사랑스러운 예술가입니다. 그의 그림이라고 모두 무조건 전시하는 것은 그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그는 평소에 자기 그림을 누구에게 줘놓고는 마음에 들지 않으니 없애버리라고 말한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처절한 격동기에 살며 자기가 사색하고 체험한 것을 인간의 보편적인 것으로 승화시켜 표현했던 인물이 이중섭입니다.”
 
  이중섭은 지난 2004년 삼성이 심혈을 기울여 개관한 리움 미술관 첫 전시의 주인공이다. 리움은 2005년 5월 이중섭 작품을 중심으로 〈이중섭 드로잉: 그리움의 편린들〉을 선보였다. 리움이 선택한 첫 작가가 이중섭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에 대한 삼성의 애정이 각별했음을 보여준다.
 
  2005년 리움미술관 전시회에서 ‘국민화가’ 이중섭의 엽서화가 무더기로 등장했다. 강우방 선생은 “엽서가 오래전 것이라 사람들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지만 엽서에 그려진 스케치는 한 점도 빠짐없이 전체가 위작”이라고 주장했었다. 이 주장에 대한 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는 “위작과 진작(眞作)이 섞여 있으면 곧 문제가 되지만, 전부가 위작이면 보는 사람의 판단이 흐려진다. 더욱이 스케치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 아니면 위작 여부를 알기 어렵다”고도 했다.
 
  2022년 12월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전이 열렸다. 또다시 다량의 이중섭 위작이 등장했다. 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족이 정부에 기증한 작품이었다.
 
  강우방 선생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2005년 선보인 엽서화와 2022년 전시된 엽서화는 다른 것입니다. 이런 것만 봐도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로운 위작들이 다량으로 진작으로 둔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잘 그린 엽서화라면 몰라도 하나같이 천박한 그림이었어요.”
 
  2022년 전시회 당시 선생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다. 이 블로그의 이름은 ‘학문일기’. 축적된 글이 수십 년 치에 이른다. 연구를 하며 쌓아 올린 단상이 세월의 깊이로 쌓여 있다.
 
  〈오늘 국립민속관 전시 보고 나오는데 맞은편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에 큰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이중섭의 가짜 그림이었다. 몇 번 그냥 지나치자고 했는데 궁금하여 들어가 보았다. 70%가량 모두 위작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직접 스케치를 많이 해보아 스케치를 볼 줄 안다.(중략)
 
  사안이 큰 만큼 윤범모 현대미술관 관장을 만나 상의했다. 그 문제의 그림들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초기 작품이라 그렇다”는 것이다! “대량으로 기증받았다고 하는데 몇 점입니까?” 물으니 “2만 점입니다”고 하길래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물러나왔다. 여기저기 신문사에 알아보니 응답이 없다.〉(일부 문장 수정-편집자 주)

 
  이와 관련, 국립현대미술관은 “전문 감정기관의 감정을 통하여 진품으로 확인받아 기증받고 전시에 출품한 것”이라고 밝혔었다.
 
 
  “제일 심각한 것은 위작으로 논문 쓰기”
 
  강우방 선생은 그 무렵 《스카이데일리》라는 매체에 기고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반향은 컸지만 미술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의 말이다.
 
  “오래된 엽서를 구해서 그 위에 위작을 그린 겁니다. 수많은 엽서에 왜 편지 글이 한 자도 없는지 이상하지 않나요? 그러면 반대로 묻고 싶어요. ‘그 그림들이 왜 진품인가? 증명해보라’고.”
 
  강 선생은 “그러다 보니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년)이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 ~1856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년)의 특별전에서 전시되는 그림과 글씨 중 상당수가 위작이 차지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 탄식한다. 그의 탄식은 점점 깊어졌다.
 
  “추사 글씨가 지금 심각한데 지금도 계속 추사 가짜 그림이 옥션에 나와요. 그렇게 많이 나올 수 없어요. 추사의 작품집이 두껍게 나왔는데 3분의 2가 가짜예요.”
 
  그러더니 “제일 심각한 게 뭔지 아느냐”고 반문하며 덧붙이기를, “최근에 미술사를 새로이 연구하기 시작하는 몇몇 학자들이 이런 위작을 가지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위작을 가지고 논문을 쓰면, 그 위작은 진작으로 탈바꿈되게 된다. 학자들에 의해 검증된 논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위작이 진작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며 위작은 더욱 뻔뻔하게 세상에 등장한다. 미술사학계나 화가, 전문가들이 작품의 본질을 파악하는 감식안이 없으니 변질과 둔갑의 악순환 현상이 계속되는 것이다.
 
  “공·사립 박물관에서 다수의 위작이 포함된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 잘못된 작품 목록을 바탕으로 미술사학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이죠.
 
  실수로 한두 점 끼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작품들 수십 점이 모두 위작인 경우도 있어요. 이러한 논문의 수가 점차 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작이 전시회에 출품되거나 논문으로 쓰면 진품으로 정착될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스스로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어요.”
 
 
  獨覺의 독특한 ‘조형언어의 발견자’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 위치한 ‘일향 한국미술사연구원’ 서재에서 강우방 선생이 조형예술 언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근 고미술 경매의 도록을 보면 점차 위작의 양이 많아지고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없었던 일이다. 말하자면 위작의 판매가 공공연히 이뤄지게끔 장치가 마련되었다는 의미다.
 
  “요즈음 옥션에서도 위작이 점점 더 많아지고 공공연히 팔리고 있어요.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작가의 올바른 작품 목록의 작성을 더욱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각 시대의 미술 양식과 미술가 개인 양식의 확립에 치명타가 될 것이 틀림없어요.”
 
  선생은 미술사학계에서 반골(反骨)이자 어쩌면 이단아일지 모른다. 일찌감치 박물관에 들어가 독학으로 미술사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스스로 주제를 정해 부단히 논문을 써 나갔고 저서를 냈다.
 
  평생 독학해서 인간 이해의 지평을 무한하게 넓혀놓았으니 ‘독각(獨覺)’이라고 불릴 만하다. 대학 퇴임 후 ‘무본당(務本堂)’이란 당호를 가진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을 연 이래 오늘날까지 수천 회에 가까운 강의를 이어오고 있다. 무엇보다 독특한 ‘조형언어의 발견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문자언어는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르지만, 조형언어는 세계사적으로나 인류사적으로나 오로지 하나임을 확신합니다.”
 
  그에 따르면 조형언어는 인류의 무의식 세계를 확장하는 데 가장 강력한 아니, 아마도 유일한 언어다.
 
  인간은 300만 년 동안 건축, 조각, 회화, 도자기, 금속기, 복식 등 조형예술 작품을 창조해왔다. 정작 그 본질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인간이 창조한 조형예술품의 90%가 문양으로 되어 있다.
 
  “종교나 궁궐건축, 불상조각, 기독교 성상(聖像), 불화, 도자기, 금속기, 복식 등 일체가 문양이요, 모두 장인(匠人)들이 창조하며 새로운 역사를 이어왔어요.
 
  그런데 그 문양을 아무도 못 읽어요. 그걸 제가 다 풀었어요.
 
  우리가 단순히 문양 혹은 무늬라 부르던 조형들은 심원한 철학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이제 저의 신앙”
 
  선생은 “미술사학이란 본질적으로 조형언어로 만들어진 미술품을 미술사학자가 해독하여 문자언어로 옮기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일상적인 언어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때, 노래가 나오고 그림이 그려지며 춤이 추어지는 등 예술의 세계가 펼쳐진다.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예술의 세계가 형성되므로 초월적 세계라 부르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이 초월적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저는 점점 우리 미술의 불가사의하도록 심원(深遠)한 본질에 매료되고 있어요. 그것이 어느 한 장르에서만, 예를 들면 불상이나 도자기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르에서 확인되고 있어요. 제 관심은 동시에 다른 여러 장르에까지 확대되고 있고, 아름다움은 이제 저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강우방 선생의 아름다움[美]에 대한 한결같은 순수한 갈구를 보며, 기자가 처음에 느낀 그의 해맑음은 평생 진리(眞理)를 위해 홀로 싸워온 시간 속에서 해탈로 승화된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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