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조선 재상 열전 18 | 이덕형(李德馨)전

탁월한 吏才와 신중한 처신으로 38세에 정승에 오르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당론을 좋아하지 않았다”(실록)
⊙ “明나라 조정에 있다 하더라도 예복 차림으로 위엄을 갖추어 묘당에 서서 백료들을 복종하게 할 인물”(명나라 장수 양호)
⊙ 선조가 요동 망명 서두르자 “우리나라에 한 고을도 남은 곳이 없게 된 뒤에 가야 될 것”
⊙ 임진왜란 중 홍문학 대제학·한성판윤으로 明軍 접대 등 對明 외교 담당
⊙ 광해군 즉위 시 對明 외교 맡아 기여했으나 폐모론 반대하다가 실각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이덕형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세 분의 정승(政丞)이 좌우에서 돕고 인도하여 오늘이 있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백성들 사이에서 떠돌았다는 말이다. 이원익(李元翼·1547~1634년),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 그리고 이덕형(李德馨·1561~1613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덕형은 조선 초 명문가 광주(廣州) 이씨(李氏)로 연산군 때 정승을 지낸 이극균(李克均)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지사를 지낸 이민성(李民聖)이다. 1561년(명종 16년) 한양에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났고 성품 또한 침착하고 굳세고 순후(醇厚)하면서도 조심성이 있었다고 한다. 한양의 북쪽에 살았다고 해서 호를 한음(漢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선조의 총애받아 고속 승진
 
이덕형의 장인 이산해.
  스무 살(선조 13년·1580년)에 과거(科擧)에 급제해 괴원(槐院·승정원)을 거쳐 사원(史苑·예문관의 별칭)에 천거를 받았으나 당시 장인이던 이산해(李山海)가 궁중 소장의 서적을 주관할 때라 이덕형은 사사로운 친분을 이유로 사절했는데 선조(宣祖)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강(講)하려고 하면서 고문(顧問)에 대비할 재신(才臣) 다섯 사람을 선발케 하고 어부(御符·임금 전용 도서관)의 책을 내어주자 마침내 참여했다.
 
  1582년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그를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사적(私的)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했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이덕형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귀를 보내왔다고 한다.
 
  선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은 이덕형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홍문관 정자(正字)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문풍 진작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했다. 이 뒤에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됐다.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 사신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조경(趙絅)이 지은 비명이다.
 
  〈두 왜사(倭使)는 공의 의표(儀表)를 바라보고는 자신들도 모르게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며, 서울로 들어와서는 향연(享燕)을 베푼 자리에서 현소 등이 보빙(報聘)을 몹시 간청하므로 공은 얼굴에 엄정한 빛을 띠고 말하기를 ‘이웃 나라와의 수교(修交)는 신의(信義)를 버리고는 할 수가 없다. 지난날 네 나라의 봉강신(封疆臣)이 우리나라의 망로(亡虜) 사화동(沙火同)을 부추겨 끼고서 변방을 침범하여 우리의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는데도 너의 나라에서는 금할 줄을 모르니, 신의라는 게 있는가?’라고 하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소와 평의지는 졸왜(卒倭)를 우리나라로 보내어 한 달이 못 되어 사화동과 사로잡혀 간 늙은이와 아이들 100여 명을 데리고 와서 바치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특별히 직제학(直提學)을 제수하고 은대(銀帶)를 하사(下賜)하였다.〉
 
 
  31세에 文衡에 오르다
 
  이 무렵 이덕형의 승진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했다. 이때 이덕형의 나이 31세였다. 대제학이란 국가 문장을 주관하는 자리라 하여 문형(文衡)이라 불렀다. 승지로서 기밀 업무를 다루는 데 능함이 입증되었는데 문재(文才) 또한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것이다. 비명이다.
 
  〈신묘년(辛卯年·선조 24년·1591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초배(超拜·특진)되어 대제학(大提學)을 겸하니 당시 나이 31세였다. 춘정[春亭·변계량(卞季良)] 이후 문형(文衡)을 맡았던 사람들은 모두 오래도록 덕망을 쌓고 품계가 높은 이들을 등용하였고 공과 같은 묘령(妙齡)에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 문학에도 능숙하고 덕망을 쌓은 훌륭한 이가 몇 사람에만 그치지 않았는데 공이 문형을 맡은 우두머리가 되기에 이르자 모두가 이르기를 ‘이모(李某)보다 앞설 사람은 없다’라고 하였다.〉
 
  이덕형은 문약(文弱)한 인재가 아니었다. 《선조실록》 17년(1584년) 3월 25일 자 기록이다.
 
  〈임금이 서총대(瑞葱臺)에 친림(親臨)하여 무예를 시험할 때 공이 응제(應製)하여 장원(壯元)했는데 이로부터 무예를 겨룰 적마다 항시 수위(首位)를 차지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이덕형의 담대함은 두고두고 그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의 비명은 당시 그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진년(壬辰年·1592년)에 들어 왜구(倭寇)들이 대거 침입해 우리나라를 천식(荐食·점차로 먹어 들어감)하면서 이모(李某)를 만나 강화를 논의하겠노라 선언하므로 선조가 조신(朝臣)들에게 그 대책을 두루 하문(下問)했으나 모두가 겁에만 질려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 공이 나아가 이르기를 ‘급히 서두르는 것이 신하 된 자의 직분입니다’라고 자청하여 단기(單騎)로 급히 달려 구성[駒城·용인(龍仁)]에 이르러 보니 벌써 적(賊)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널리 퍼져 있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곧바로 되돌아 한강(漢江)을 건너와 보니 대가(大駕)는 이미 서행(西幸·몽진)한 뒤라 사잇길로 뒤쫓아 평양(平壤)에 도착했다.
 
  그동안 적들은 패수[浿水·대동강(大同江)의 옛 이름]까지 핍박해 들어와서 공을 만나기를 청하므로 공은 또 가길 자청하여 단가(單舸)로 강중(江中)에까지 나아가 그들을 회견하였다. 뭇 신하들과 여러 장수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두려움에 질려 얼굴빛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건만 공은 적을 만나 태연자약한 기세로 꾸짖기를 ‘너희들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군사를 일으켜 오랫동안의 우호(友好)를 깨뜨림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현소 등이 이르기를 ‘우리는 명(明)나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조선(朝鮮)에서 군도(軍途)를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지라, 공은 준엄한 표정을 지으며 잘라 이르기를 ‘너희들이 우리의 부모국(父母國)과 같은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니, 설사 우리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없다. 어찌 화의(和議)가 이루어지겠는가?’라고 했다. 이후에 현소 등은 떠들썩하게 공을 칭송하여 이르기를 ‘험악한 적진 속에서도 말하는 품이 지난날 연회의 주석(酒席)에서 하는 태도와 다름이 없으니 참으로 미치기 어려운 인물이다’라고 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다
 
윤두수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이덕형은 관직이 대사헌이었지만 원병을 청하는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요동을 방문하고 돌아온다.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태가 급박해지면 선조가 요동으로 피신해도 되는지를 타진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원병 파견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선조 25년(1592년) 7월 3일이다.
 
  먼저 요동에 들어가기를 서두르는 선조의 촉구에 이덕형은 사실상 불가함을 이렇게 에둘러 말한다.
 
  “우리나라에 한 고을도 남은 곳이 없게 된 뒤에 가야 될 것입니다. 만일 한 고을이라도 남아 있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공억(供億·물자 제공)을 어느 아문(衙門)에서 하겠습니까. 반드시 적병의 핍박(逼迫)으로 부득이하게 된 뒤에 가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 파견은 이런저런 이유로 지연되고 있었다. 8월 22일 대사헌 이덕형은 문형의 직임을 감당키 어렵다며 체직(遞職)을 청했다. 그러나 전쟁이 터져 명나라와 외교 교섭이 더욱 중요해진 상황에서 국왕의 문서 작성을 책임져야 하는 문형의 비중은 더 커졌다. 이에 선조는 여러 신하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덕형은 동인(東人)-북인(北人)의 거두 이산해의 사위였다. 서인(西人)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말했다.
 
  “문형(文衡)의 직임은 평소 양성한 명망이 가볍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중국 사신을 만날 경우에는 전적으로 나라를 빛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현재 호종(扈從·임금을 호위하는 일)한 재신(宰臣) 중 누구인들 골육과 친속이 오랑캐의 수중에 빠져 있지 않겠습니까. 대의(大義)가 중하기 때문에 힘써 종사하면서 구구한 사정(私情)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이덕형은 나이도 젊고 명망도 무겁고 문학도 넉넉하니, 대제학의 직임은 아마도 가볍게 바꾸지 않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이덕형이 조정 신하들로부터 어떤 신망을 받고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발언이다.
 
 
  한성부판윤으로 明軍 접대 담당
 
  선조 25년(1592년) 12월 18일 대사헌 이덕형은 한성부판윤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이덕형의 주된 업무는 접대사(接待使), 접반사(接伴使) 등으로서 명나라에서 온 장군들을 만나 그들의 속내를 파악하고 조선이 원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선조는 이덕형을 중추부 지사로 임명한다. 특히 평양성 탈환 이후 속히 일본군을 조선에서 내몰 수 있도록 명나라 군대에 진격을 촉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러나 남의 나라 군대를 우리 뜻대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 중신들은 이로 인해 명나라 장수들에게 곤욕을 당하곤 했는데 이덕형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선조 26년, 이덕형은 다시 한성부판윤, 형조판서에 임명되지만, 본 업무는 ‘제독 접반사’였다. 명나라 수뇌부 이여송(李如松)과 협의하는 최고위 통로였다. 그만큼 선조의 신임이 깊었다. 이해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비명이 간략하다.
 
  〈4월에 들어 공은 명군(明軍)을 인도하여 한양(漢陽)에 입성(入城)해서 묘사(廟社·종묘사직)의 회신(灰燼)을 말끔히 쓸고 크게 통곡하니 살아남은 고로(故老)들이 모두가 울면서 공을 보기를 부모와 같이 여겼다. 경성(京城)은 이제 막 병화(兵禍)에 결딴이 난 뒤라 굶주린 데다 돌림병마저 치열하게 번져 부자가 뼈를 바꾸어 씹을 지경에 이른 백성들이 고난(苦難) 속에 슬피 울부짖었고, 이미 굶어 죽은 시체가 길가에 가득하였는데, 공은 쉴 새 없이 굶주린 백성들을 거두어 먹인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고, 또 한편으론 흩어진 서적(書籍)들을 수집하여 강유[講帷·강연(講筵)]에 대비하게 하였다.〉
 
  1594년 이덕형은 모친상을 당했다. 그러나 선조는 그를 기복(起復)하여 이조판서에 제수했다. 이에 이덕형은 아홉 차례나 사직을 청했다. 선조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국세가 위급할 때에는 인물을 전형하는 일에 국가의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단지 금혁(金革·무기)을 친히 맡은 것뿐이겠는가. 한갓 사정(私情)만을 고집하고 군부(君父)의 위급함은 돌아보지 않으니,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는가. 경은 전번의 전지에 따라 급히 올라오라.”
 
 
  ‘경리 접반사’
 
  1595년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이듬해 이덕형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1596년에 호서(湖西)의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일으켜 두 고을을 함락하자 홍주목사(洪州牧使) 홍가신(洪可臣)이 그를 토멸해 주살했는데, 그 잔당(殘黨)이 체포당해 이덕형의 이름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덕형은 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벌의 명을 기다렸으나 선조는 문제 삼지 않았고 병조판서의 자리에서만 물러나게 했다.
 
  정유년(丁酉年·선조 30년·1597년)에 왜적(倭賊)이 재침(再侵)하자 명(明)나라 황제가 네 사람의 장수(將帥)를 보내면서 병사(兵士) 10만 명을 인솔하게 했고, 어사(御使) 양호(楊鎬)를 감군(監軍)으로 삼았다.
 
  양호는 나이가 어리고 기세를 마구 부리며 세상의 명사(名士)들을 얕보는 버릇이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평판을 듣고 몹시 겁을 먹었는데 선조는 많은 신하 가운데 오직 이덕형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여 보냈다. 다시 정치에 복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경리(經理) 접반사’로서 양호를 만난 이덕형은 첫 대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리란 양호이다.
 
  “지금 왜적(倭賊)의 기세가 몹시 험악하니 순식간에 한강(漢江)을 건너올 것이다. 까딱 한 번 천참[天塹·천연의 요새지 한강(漢江)]을 잃는다면 비록 명군(明軍) 같은 위세(威勢)일지라도 힘이 되기란 어려울 것이다.”
 

  양호는 이 말을 듣고 즉시 서울로 들어가 서둘러 책전(責戰)을 하고 유격장(遊擊將) 마귀(麻貴)가 거느린 용감한 기병들이 왜적을 직산(稷山·지금의 충남 천안)의 소사(素沙) 들판에서 크게 무찔렀다. 그래서 서울이 다시 안정을 찾게 됐다. 이후 양호는 이덕형의 일 처리에 감복해 이렇게 말했다.
 
  “이모(李某)는 비록 명(明)나라 조정(朝廷)에 있다 하더라도 예복(禮服) 차림으로 위엄을 갖추어 묘당(廟堂·정승 사무실)에 서서 백료(百僚·모든 벼슬아치)들을 복종하게 할 인물이다. 참으로 훌륭하다!”
 
 
  급제 18년 만에 정승에 올라
 
  선조는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우상(右相)에 임명하니 나이 38세였는데, 얼마 안 되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불과 18년 만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훈련도감 도제조를 겸한 이덕형은 곧바로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했다. 당시 상황을 비명은 자세하게 전한다.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하할 때 선조(宣祖)가 전송(餞送)을 하니 유정이 간절한 말로 이르기를 ‘이 나라에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가장 훌륭한 자와 함께 동행하게 한다면 만족히 여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우상(右相) 이항복(李恒福)에게 ‘의중(意中)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하문(下問)하므로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모(李某)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공을 종행(從行)하게 명했다. 유정은 몹시 기뻐하면서 ‘나는 성공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순천(順天)에 당도하니 궁지에 몰린 적추(賊酋)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의 기세가 몹시 꺾여 섬멸(殲滅)의 날을 기필(期必)할 수 있었는데 유정은 교활한 성품에다 남에게 분공(分功)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여 몰래 소서행장에게 사람을 보내 피하여 달아날 것을 권유하였다.
 
  공이 그 내용을 미리 탐지하고서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명나라 수군(水軍) 제독(提督) 진린(陳璘)과 약속을 하고 요항(要港)에 잠복했다가 퇴각하는 적을 대파(大破)하게 하니 소서행장은 겨우 죽음만을 면하고 도망하였다. 유정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분개하면서 ‘이모(李某)가 나의 30년의 훈명(勳名)을 떨어뜨린단 말인가?’라며 아쉬워하였다.〉

 
 
  광해군 즉위에 정당성 부여
 
  선조의 한결같은 총애를 받았던 이덕형은 광해군(光海君) 집권과 더불어 큰 시련기를 맞게 된다. 광해군 초기에 그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에 대한 고변(告變)이 있어 삼사(三司)에서 즉시 법대로 다스리길 청하자 광해군이 대신(大臣)들의 논의를 물었다. 이덕형과 좌상(左相) 이항복은 의(義)로써 처단하는 것보다는 은정(恩情)으로 감싸줄 것을 말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도 도헌(都憲·대사헌)으로서 소(疏)를 올려 전은(全恩·온전히 살려주는 은혜)을 주장했으며 상신(相臣) 이원익도 차자(箚刺·약식 상소)를 올려 역시 전은을 주장하자 시론(時論)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전은을 주장한 사람들을 지목하여 호역(護逆)이라 몰아세웠다. 이덕형은 남인(南人)이었고 당시 세상은 북인 천하였다. 결국 임해군의 처형을 막지 못했다.
 
  이에 앞서 명나라 조정에서는 적장자(嫡長子)를 버려두고 서자(庶子)를 세웠다는 이유를 들어 광해군의 책봉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고부사(告訃使) 이호민(李好閔)이 연경(燕京)에 도착하자 엄일괴(嚴一魁)와 만애민(萬愛民) 두 차관(差官)을 보내 임해군의 광포(狂暴)한 병 상황을 사문(査問)하려 하자 온 조정이 허둥지둥 놀라 입을 다물 뿐 감히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이에 이덕형이 이들 차관에게 달려가 이르기를 “아우의 일로 형을 사증(査證)하는 행위는 아무리 하국(下國)일지라도 명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니 차관들이 이 말을 듣고 다시는 사문(査問)하지 않았다. 광해군 즉위 정당성 확보에 공을 세운 것이다. 당시 명나라 만력(萬曆) 말엽에 천자(天子)의 뒤를 이을 후계자의 옹립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아 아무리 번국(藩國)에서 자국(自國)의 세자 책봉 허락을 요청하여도 명조(明朝)에서는 그 허락을 자꾸만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이덕형에게 명하여 진주사(陳奏使)로 삼으니 이덕형은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여 27일 만에 연경에 도착하여 5개월 동안 머물면서 백방(百方)으로 주선하여 책봉의 허락을 받아 돌아왔다.
 
  광해군이 몹시 기뻐하여 이덕형의 아버지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를 제수하고 아들에게는 6품(品) 벼슬을 내렸으며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내려 돈독히 대우하였다.
 
 
  영창대군 처형과 폐모론에 맞서
 
  1613년(광해군 5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使嗾)를 받은 삼사(三司)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이덕형을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하는 데 그쳤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같은 해 10월 9일이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53세였다. 짧았으나 참으로 많은 일을 한 생애였다.
 
  《광해군 일기》 광해 5년(1613년) 10월 9일 자에 실린 이덕형 졸기다.
 
  〈이때 죄를 주자는 논계(論啟)는 이미 중지되었는데 덕형은 양근(楊根·양평)에 있는 시골집에 돌아가 있다가 병으로 졸하였다. 덕형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다. 그는 일찍부터 공보(公輔·재상)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문학(文學)과 덕기(德器)는 이항복과 대등하였다. 31세에 대제학에 제수되었고 38세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임진년 이래 공로가 많이 드러나 그의 명성이 중국과 오랑캐들에게도 알려졌다. 일찍이 선위사(宣慰使)로 있었을 때에는 왜인들에게 크게 존경받았으나 임진왜란에 이르러 적의 기세가 날로 급박해지자 조정에서는 이덕형으로 하여금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세력을 늦추도록 보내려 하였다. 이덕형이 명을 듣자마자 즉시 출발하므로 선조가 이에 감읍하였다. 가마가 평양에 도달하자 적장 현소가 이덕형을 뵙기를 구하니 사람들이 이를 크게 위태롭게 여겼다. 이덕형은 한 척의 배로 찾아갔는데 조금의 두려워하는 낯빛이 없었다. 갑진록(甲辰錄) 호성공(扈聖功)에 이덕형의 충성과 노고가 기록되었음에도 봉작을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계축년 옥사가 일어나자 수상(首相)으로 흉배들에게 협박받았다. 비록 옥사(獄事)에 성실히 참여했지만 친구를 대하면서 말이 시사에 미치면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식음을 전폐하는 데 이르렀다. 차자로 영창대군의 원한을 논하면서 말이 조리가 없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겼고 오히려 이 때문에 죄를 받았다.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아 장인 이산해가 당파 가운데서도 지론(持論)이 가장 편벽되고 그 문하들이 모두 간악한 자들로 본받을 만하지 못하였는데 덕형은 한 사람도 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주 소인들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그가 졸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하였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