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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행

도쿄-요코스카 기행

침략 원흉들과 함께 아오야마에 잠든 김옥균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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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와유신’ 내세우며 2·26 쿠데타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의 위령탑이 있는 시부야
⊙ 천황절대주의에 도전했던 국가주의자 기타 잇키
⊙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전 〈주신구라〉의 ‘아코 의사’들이 묻힌 센가쿠지
⊙ 페리가 함대를 이끌고 일본의 개국을 요구했던 요코스카 구리하마
⊙ 메이지 시대 이후 주요 인사들이 묻힌 아오야마묘지… 을미사변 주범 미우라 고로,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등도 묻혀 있어
요코스카 미카사공원.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 기함이었던 미카사함 앞에는 도고 제독의 동상이 서 있다.
  기자의 여행은 ‘비상(碑像)여행’, 즉 비(碑)와 동상을 찾아다니는 여행이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자취를 찾아다니다 보면, 그곳에는 동상 아니면 기념비, 묘비, 하다못해 그곳에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돌 말뚝이나 안내판이라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옛사람의 숨결을 느끼고, 역사의 함성을 듣는다. 6개월 만에 일본 도쿄(東京)를 다시 찾은 것은 지난 몇 달간 책을 읽으면서 만나고 싶어진 고인들이 있어서였다.
 
  4월 27일. 토요일 늦은 오후의 시부야(澁谷) 구청 인근 길모퉁이에 섰다. 이제는 도쿄의 상징 중 하나가 된 시부야 스크램블(교차로)에서 걸어서 10분쯤 되는 곳이다. ‘자유의 여신상’처럼 오른손을 든 관세음보살상 앞에는 ‘2·26 사건 위령상’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2·26 사건
 
시부야구청 근처에 있는 2·26 사건 위령상.
  2·26 사건은 1936년 2월 26일 황도파(皇道派) 위관(尉官)급 청년 장교들이 일으켰던 쿠데타를 말한다. 주로 농촌 출신이었던 이들은 소설 및 드라마로 유명한 〈오싱〉에 나오는 것처럼 딸자식까지 팔아넘겨야 하는 농촌의 극심한 가난, 재벌의 횡포, 현실을 타개하지 못하는 부패한 기득권(旣得權) 세력을 깨부수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파사(破邪)’ 하면 ‘현정(顯正)’은 저절로 된다는 생각으로 그들이 ‘천황 측근의 간신’이라고 생각한 중신(重臣)들을 습격해 닥치는 대로 살상했다. 조선 총독과 총리를 지낸 사이토 마코토(齊藤實·1858~1936년) 내대신(內大臣·천황의 정치고문), 총리를 지낸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1854~1936년) 대장대신(大藏大臣·재무장관), 와타나베 조타로(渡邊錠太郎) 육군교육총감 등이 살해됐다.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1868~1948년. 1945년 패전 당시의 총리) 시종장은 쿠데타군의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1868~1952년) 총리는 쿠데타군의 습격을 받았지만 피신에 성공, 목숨을 부지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은 히로히토(裕仁·1901~1989년) 천황을 받들고 ‘쇼와유신(昭和維新)’을 단행한다는 생각이었지만, 천황은 자신이 아버지처럼 여기던 스즈키 시종장을 비롯한 중신들이 살상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 청년 장교들에게 동정적이던 육군 상층부도 천황의 진노 앞에서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결국 쿠데타는 나흘 만에 진압되었다. 관련자들은 처형되었다.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2·26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민간 정치인들은 군부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하게 되었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황도파를 제거하고 군부 내 실권(實權)을 장악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1884~1948년) 등 통제파(統制派)는 결국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몰고 갔다.
 
 
  ‘테이블 차지’
 
  2·26 사건은 한국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빈농(貧農)의 아들은 2·26 사건을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의 정서에 공감했고, 만주군관학교 재학 중에는 2·26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만주로 쫓겨온 반골(反骨) 기질의 교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가 바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다.
 
  이곳에 2·26 사건 위령상이 들어선 것은 이유가 있다. 바로 이곳이 2·26 사건 관련자들이 처형된 육군형무소 자리이기 때문이다. 감개(感慨)가 깊었다.
 

  ‘남들이 주체사상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책들을 읽고 있을 때, 나는 한상일 국민대 교수가 쓴 《일본의 국가주의》를 읽으면서, 2·26 사건에 대해 처음 접했는데…. 그로부터 36년이 지나 그 사건의 현장에 내가 서 있구나. 그 책을 읽을 때에는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2·26 사건 주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淺一·1905~1937년)는 “미치도록 나라를 생각하고 바보처럼 국가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사실 이것은 청년 장교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나라를 생각하되 자신들의 행위가 가져올 후과(後果)를 고려하면서 계산적으로 생각했어야 하고, 영리하게 국가를 사랑했어야 했다. “미치도록 나라를 생각하고 바보처럼 국가를 사랑하라”는 ‘주관적 애국’이 국가를 해칠 수도 있다는 걸 그들은 생각지 못했다.
 
  저녁 식사는 시부야의 핫플레이스인 미야시타파크 인근 식당가에서 했다. 꼬치와 교자, 야키소바에 하이볼도 한잔 했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비용이 더 나온 것 같았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테이블 차지(charge)”라고 한다. 식당에서 테이블 차지라니!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 때문에 관광객들에게 비용을 더 물리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는데, 이게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모양이다(여행 중 관광지 이외 지역에서는 테이블 차지를 물지 않았다).
 
 
  ‘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
 
기타 잇키
  도쿄 여행 이틀째. ‘벚꽃길’로 널리 알려진 도쿄 메구로(目黑)구에 있는 류센지(瀧泉寺)를 찾아갔다. 일본 3대 부동명왕상(不動明王像) 중 하나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절이다.
 
  일요일을 맞은 류센지 앞은 축제 분위기였다. 절 앞에서는 길거리 음식과 장난감들을 파는 난장이 펼쳐져 있었다. 절 입구에 있는 커다란 비석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바로 이 비석, 즉 ‘기타 잇키(北一輝) 현창비’를 보기 위해서였다. 기타 잇키(1883~1937년)는 2·26 사건을 일으킨 청년 장교들에게 쿠데타의 이념을 제공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그였다. 이 비석은 기타 잇키의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일본의 국가주의자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1886~1957년)가 세웠다.
 
  기타 잇키는 묘한 인물이었다. 혹자는 그를 ‘마왕(魔王)’이라고 했고, 혹자는 ‘파시스트’라고 했다. 〈법화경(法華經)〉을 끼고 신(神)의 계시를 받는다고 했던 점에서 광인(狂人)의 기미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의 평전을 쓴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는 그를 ‘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기타 잇키는 ‘메이지 천황제 국가’에 대한 안티 테제, 즉 자유민권운동, 사회주의, 반(反)천황절대주의의 총화(總和)였다.
 
  니가타(新瀉)현 사도(佐渡) 출신인 그는 삿초번벌(薩長藩閥·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쓰마-조슈 출신의 독점적 정치체제)에 맞섰던 자유민권운동에 가담했던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중학교 중퇴의 학력이면서도 젊은 시절에는 당대의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했다.
 
  23세 때 그는 ‘동양의 루소’를 자처하면서 《국체론(國體論)과 순정(純正)사회주의》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천황절대주의에 의해 신격화(神格化)된 천황에 대해 “국가의 본질과 법리(法理)에 대한 무지, 신도적(神道的)인 미신, 노예 도덕, 전도(轉倒)된 허망한 역사 해석으로 날조하는 토인부락(土人部落)의 토우(土偶)”라고 야유했다. 그는 ‘천황의 국민’이 아니라 ‘국민의 천황’을 요구했다.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떠받들던 당시로서는 큰일 날 소리였다. 책은 닷새 만에 판매 금지됐다. 하지만 이 책을 접한 당대의 명사들 가운데는 “한마디로 천재의 저작”(후쿠다 도쿠조 도쿄고등학업학교 교수)이라고 열광하는 이도 있었다.
 
 
  ‘잇키’라는 이름
 
  이후 기타 잇키는 중국혁명운동에 투신, 신해혁명 후인 1911년 중국으로 건너가 쑹자오런(宋敎仁·1882~1913년) 등 혁명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중국 혁명의 추이를 관찰하다가 1920년 귀국했다.
 
  이 시기에 그는 본명 대신 ‘잇키(一輝)’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에서 ‘민중봉기’를 뜻하는 ‘잇키(一揆)’와 발음이 같다. ‘잇키’라는 이름에서 의회 정치로는 당대 일본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없으니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천황의 대권(大權)으로 국가 개조를 단행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사상을 정리한 책이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화족(華族·귀족)제 폐지, 사유재산제의 제한, 노동성 신설, 8시간 노동제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주장을 했다.
 
  히틀러의 나치즘은 원래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에서 나온 말인데, 기타 잇키의 사상이야말로 국가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합이라는 면에서 ‘일본적 국가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타 잇키의 사상은 당시 일본의 국가주의자들은 물론 후일 총리가 되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26 사건을 일으켰던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기타 잇키를 자기들의 멘토로 여겼다. 기타 잇키도 그들을 자기의 자식처럼 생각했다. 2·26 사건이 일어나자 군부는 기타 잇키를 ‘순진한 청년 장교들을 선동’한 수괴(首魁)로 몰아 처형했다. 기타 잇키는 2·26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자기를 따랐던 젊은이들이 죽음을 맞는 마당에 자기만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 “청년 장교들은 죽을 때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제자 니시다 미쓰지(西田稅·1901~1937년)의 물음에 기타 잇키는 웃으면서 “아니, 나는 하지 않겠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주신구라〉의 현장 센가쿠지
 
센가쿠지에 있는 아코 의사 묘역. 왼쪽에 작은 전각처럼 보이는 것이 오이시 구라노스케의 무덤이다.
  류센지에서 나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센가쿠지(泉岳寺)로 향했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옛날 얘기인 〈주신구라(忠臣藏)〉의 주인공인 아코 의사(赤穗義士)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주신구라〉의 배경이 되는 ‘아코 사건’은 1701년 4월 21일에 일어난 일이 발단이 됐다. 에도(江戶·도쿄)를 방문한 천황의 칙사들을 대접하는 일을 맡은 아코번 다이묘(大名·영주) 아사노 나가노리(淺野長矩)가 자신의 상사(上司)인 기라 요시히사(吉良義央)에게 칼부림을 한 것이다. 막부의 의전 전문가인 기라가 아사노의 일처리에 대해 나무라자, 젊은 아사노가 이를 참지 못한 것이다. 쇼군(將軍)이 거처하는 에도성에서 상사에게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힌 아사노는 할복해야 했다. 아코번은 폐번(廢藩)되었고, 아사노의 가신(家臣)들은 주인 없는 사무라이, 즉 로닌(浪人)이 되었다.
 
  1703년 1월 30일 밤, 에도를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코번의 가로(家老·총리 격)였던 오이시 구라노스케(大石内藏助)가 이끄는 아코번 무사들이 주군(主君)의 원수인 기라의 저택을 습격한 것이다. 이들은 기라의 목을 베어 센가쿠지에 있는 주군의 무덤 앞에 바치고 막부의 처분을 기다렸다.
 
 
  의리와 국법
 
  에도의 민중은 아코 낭인들의 거사에 열광했지만, 막부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해 용서하자니 법질서가 무너질 것이고, 그렇다고 이들을 의법(依法) 처리하면 무사에게 요구되는 충(忠)의 가치나 민중의 여망에 반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개인적 의리’와 ‘공동체 국법’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당대의 유학자였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1666~1728년)가 해법을 제시했다.
 
  “의리는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는 길이고, 법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따라야 할 기준이다. 지금 47인의 사무라이가 그 주군을 위해 원수를 갚은 것은 옆에서 섬긴 사람들로서 그 부끄러움을 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깨끗이 하는 도리로서 이 일은 의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무리에 한정되는 일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사적(私的)인 논의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조정의 허락도 없이 꺼릴 것 없이 궁궐 내에서 죄를 범했다. 이들을 사무라이의 예로써 할복에 처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사론(私論)을 가지고 공론(公論)을 해친다면 천하의 법도가 서지 않게 된다.”
 
  막부가 참형(斬刑) 대신 할복을 명한 것은 국법 질서를 해한 죄는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아코 사무라이들의 명예는 지켜주는 방안이었다. 이를 두고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1996년)는 “소라이는 동양 역사상 최초로 도덕에 대한 ‘정치성의 우위’를 주장한 인물”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후 아코 사무라이 47명은 아코 의사로 칭해졌고, 소설과 연극, 영화로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판타지 모험 액션 영화’ 〈47 로닌(47 Ronin)〉(2013년)도 〈주신구라〉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주신구라〉의 현장에서
 
  센가쿠지 입구에는 아코 사건을 이끌었던 오이시 구라노스케의 동상이 서 있다. 진중하게 생긴 인물이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오이시는 거사 직전에 주군의 부인에게 받았던 돈의 사용 내역서를 보내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음을 보고했다고 한다. 또 그는 거사에 나서면서 부하들에게 임무를 나누어 주면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라의 집 밖에서 망을 보는 것이나, 기라의 목을 베는 것이나, 그 공로는 똑같이 여길 것이니, 각자 자신의 임무를 다하라.”
 
  절 왼쪽에는 ‘아코의사묘소’가 있다. 따로 입장료가 없으려니 싶어 묘역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향로 옆에 있던 승려가 제지한다. 향로 앞을 보니 향 값이 300엔이다. 승려는 영어로 열심히 설명을 했다.
 
  “여기서는 향을 사가지고 들어가야 하는데, 왜냐하면 여기는 사무라이 47명의 묘소가 있는 곳이어서….”
 
  기자도 짧은 영어로 말했다.
 
  “아코 기시(‘아코 의사’의 일본어 발음)와 〈주신구라〉 얘기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훌륭한 사무라이들이다.”
 
  ‘아코 기시’ ‘주신구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승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300엔을 낸 후 향을 받아 들기는 했는데, 참 난감했다. 다른 일본인 참배객들은 47개의 묘비 앞에서 향을 사르고 경건하게 합장 배례하는데, 나는 그냥 사진이나 몇 장 찍자고 온 관광객일 뿐이었으니….
 
  오이시 구라노스케 부자(父子)의 묘를 비롯한 묘역을 보고 내려오는데, 몇 개의 비석이 보인다. 다가가서 보니 아코 사건의 발단을 제공했던 아코번주 아사노 나가노리와 그의 부인, 그리고 일족의 묘비였다. 아사노의 묘비를 보며 생각했다.
 
  ‘한순간의 분을 삭이지 못해 자신 또한 목숨을 잃고, 가문을 망하게 하고, 충직한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몬 어리석은 위인 같으니라고…. 아,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지. 배진영, 너도 성질 좀 죽이고 살아라.’
 
 
  영친왕의 옛 저택에서
 
아카사카 프린스 클래식 하우스. 영친왕의 저택이었다.
  센가쿠지를 구경하고 나온 후에도 해는 중천이었다. 이번에는 지하철을 타고 아카사카 클래식 하우스로 향했다. 구글 지도에는 ‘舊李王東京邸(구이왕동경저)’라는 설명이 부기(付記)되어 있었다. 바로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1897~1970년)이 살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일본의 황족인 기타시라카와(北白川) 친왕의 저택이었는데 메이지 천황이 이은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 집은 참의원 의장 관저가 되었다가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영빈관으로 오래 사용되었다. 지금은 고급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다. 새로 들어선 초고층 복합쇼핑몰 옆에 선 ‘클래식’한 건물, 그 앞에 서 있는 사슴상이 뜬금없게 느껴졌다.
 
  영친왕 이은은 메이지 천황이 하사한 집이라고 이 집을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한다. 문득 그의 정체성(正體性)이 궁금해졌다. 그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산 조선의 왕자였을까, 아니면 현실에 만족하면서 산 대일본제국의 황족(혹은 준황족)이었을까?’
 
 
  페리기념비
 
요코스카 구리하마에 있는 페리기념비.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다.
  여행 사흘째인 4월 29일. 전철을 타고 요코스카(橫須賀)로 향했다. 출근 시간인데도 전철은 의외로 한산했다. 생각해보니 ‘쇼와(昭和)의 날’이라는 이름의 일본 법정 공휴일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 우리에게는 윤봉길(尹奉吉·1908~1932년)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제의 고위 장성들과 관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날이기도 하다.
 
  요코스카는 10여 년 전 메이지 유신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래 늘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바로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1853년 함대를 이끌고 와서 도쿠가와 막부에 개국(開國)을 요구한 우라가(浦賀)만이 바로 요코스카 앞바다이기 때문이다.
 
  함포를 쏘아대는 거대한 증기선을 일본인들은 ‘구로후네(黑船)’라고 부르며 공포에 사로잡혔다. 미증유(未曾有)의 사태에 직면한 막부는 전국의 다이묘(영주)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도쿠가와 막부 250년 동안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막부로서는 ‘소통’에 나선 것이지만, 이는 막부의 약점을 노출한 것이기도 했다. 양이(洋夷)의 침략 앞에 무기력한 막부를 규탄하면서 천황을 받들어 양이(攘夷)를 단행해야 한다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요코스카의 동남쪽 끝 구리하마(久里浜)에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바로 페리가 상륙한 곳임을 기념하는 공원이다. 공원에는 거대한 돌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에는 ‘北米合衆國水師提督伯理上陸紀念碑(북미합중국수사제독백리상륙기념비)’라고 새겨져 있다.
 
  1901년 세워진 이 기념비의 글씨를 쓴 사람은 바로 젊은 날 ‘존왕양이(尊王攘夷) 지사(志士)’를 자처하면서 칼을 휘두르고 다녔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년)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양이파’ 사무라이들은 서양 열강과의 무력 충돌을 경험하면서 그들의 힘을 체감(體感)하게 되었다. 그들은 결국 당장 눈앞의 양이들을 물리치는 데 급급해하는 ‘소양이(小攘夷)’ 대신 실력을 길러 나라의 독립을 보존하는 ‘대양이(大攘夷)’의 길로 전향(轉向)했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의 요체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 기념비의 글씨를 쓰고, 그의 고향 후배인 가쓰라 다로(桂太郞·1848~1913년) 총리 등 당시의 거물들이 이 비의 준공식에 참여한 것은 ‘페리 함대의 개국 강요로 인해 야기된 국난(國難)을 극복하고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에 성공, 결국 열강의 일원이 되었노라’는 자부심의 반영이 아니었을까?
 
  불행히도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조선은 1875년 일본이 서양 열강의 함포 외교를 그대로 흉내 낸 운요(雲揚)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듬해 강화도조약을 통해 나라의 문을 열었지만, ‘운요호 쇼크’는 ‘구로후네 쇼크’와는 달리 자주적 근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운요호 사건 30년 후 조선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35년 후인 1910년에는 주권을 상실했다.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
 
요코스카 베르니공원에 있는 오구리 다다마사의 흉상.
  페리 말고 요코스카에서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오구리 다다마사(小栗忠順·1827~1868년)가 그 사람이다.
 
  오구리 다다마사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재무장관, 도쿄시장, 외무장관, 육군장관 격인 요직을 역임한 관료였다. 1860년에는 미일수호조약 비준을 위한 방미(訪美)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세계를 보는 눈이 열린 그는 도쿠가와 막부를 필두로 하는 260여 봉건 영주들이 할거(割據)하는 막번(幕藩)체제를 개혁해 도쿠가와 막부 중심의 근대적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식 군제(軍制)를 도입해 근대적 육군과 해군 건설을 추진했고, 그 일환으로 요코스카 조선소 건설도 시작했다.
 
  오구리 다다마사는 막부가 에도성을 열고 메이지 신정부에 항복하는 과정에서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주장하다가 파면되었고, 이후 신정부군에 체포되어 참수(斬首)당했다.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년),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1836~ 1908년) 등 막부 정권하에서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던 이들이 메이지 정권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잘나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잊혔지만, 메이지 말기부터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 해군, 아니 메이지 일본의 성취를 상기하는 가운데, 그 원점(原點)에 오구리 다다마사가 있었다는 것이 새삼 주목받게 된 것이다.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1848~1934년) 등이 오구리를 ‘막부 측의 근대화 실행자’로 높이 평가했다. 메이지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을 많이 쓴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23~1996년)는 그를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라고 평했다.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 인근 베르니공원에서 오구리 다다마사를 만났다. 한눈에 봐도 영민해 보이는 그의 흉상(胸像)을 보며,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임을, 누군가 씨앗을 뿌리면 거두는 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베르니공원은 오구리의 초빙으로 일본에 와서 요코스카 조선소와 항구를 건설했던 프랑스 엔지니어 프랑소와 레온스 베르니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오구리의 흉상 옆에는 베르니의 흉상이 있다. 공원 내에는 작기는 하지만 베르니기념관도 있다. 기념관 안에는 요코스카 군항과 조선소, 그리고 일본 해군 건설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있다. 기념관 바깥 항구에는 미 해군의 군함들이나 일본 해상자위대의 잠수함들이 정박해 있다.
 
 
  해군 카레
 
요코스카 거리. 도로 한가운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모양의 조형물이 서 있다.
  일본 해군의 산실(産室)인 요코스카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카레라이스의 산실이기도 하다. 장기간 바다에 나가 근무하기 때문에 비타민 섭취 부족 등으로 건강이 상하기 쉬운 해군 장병들을 위해 일본 해군이 개발한 음식이 영국식 카레 스튜에 감자와 당근, 야채, 고기 등을 큼직하게 썰어 넣고 밥에 얹어 먹는 카레라이스였다. 이것이 민간에 퍼져 오늘날의 카레라이스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요코스카시는 ‘해군 카레’라는 이름으로 카레라이스의 고향임을 널리 광고하고 있다.
 
  요코스카추오역 인근에 있는 ‘해군 카레 본포(本鋪)’라는 가게가 유명하다기에 찾아 나섰다. 호텔 옥상에 서 있는 짝퉁 ‘자유의 여신상’,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짝퉁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미군 관계 시설임을 알리는 영문 안내판, 미군을 상대로 하는 영문 부동산 광고들, 군복이나 유사 군복을 파는 상점들, 미군 병사들…. 꼭 이태원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후 두 시가 다 되어서 갔음에도 ‘해군 카레 본포’는 맛집답게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할 수 없이 인근 다코야키 가게에서 배를 채운 후 미카사(三笠)공원으로 향했다. 미카사공원은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한 일본 연합 함대의 기함(旗艦)이었던 전함 미카사가 전시되어 있는 공원이다.
 
 
  미카사에서
 
  미카사함 앞에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동상이 서 있었다. 그 옆에 있는 돌에는 ‘皇國興廢在此一戰(황국흥폐재차일전)’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발틱 함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도고 제독이 휘하 장병들을 독려하며 한 말이다.
 
  이 말은 트라팔가 해전을 앞두고 넬슨 제독이 했던 말과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넬슨은 이렇게 말했다.
 
  “잉글랜드는 모든 이가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바란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도고 제독의 말에서는 당시 최고의 군사 강국으로 꼽히던 러시아와 글자 그대로 국가의 명운(命運)을 건 전쟁을 벌였던 일본인들의 결기와 함께 ‘제국주의 후발 주자’의 조바심이 느껴진다. 반면에 넬슨의 말에서는 시민들의 의지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팽창하는 가운데 어느덧 제국을 이루게 된 제국의 여유가 느껴진다.
 

  미카사함에는 이 배의 구조, 미카사와 일본 해군의 역사, 러일 전쟁 해전의 전개 과정 등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함교(艦橋)에는 쓰시마 해전 당시 함교에 올랐던 도고 제독 이하 참모와 지휘관들의 모습을 담은 부조(浮彫)가 있고, 그들이 섰던 위치도 표시되어 있었다.
 
  주포(主砲) 앞에 서서 든 생각은 ‘부럽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에서 승리해 이웃 나라를 집어삼킬 수 있었던 것이 부럽다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자기들이 의지를 갖고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을 기획하고 실천에 옮겼던 경험이 부럽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끝은 1945년의 비참한 패전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는 세계를 보는 시야의 폭과 깊이가 다르다. 대한민국은 그 많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런 시야가 없다. 외교관, 군인, 정치인 할 것 없이 말이다.
 
 
  ‘모자와 와인병’ 묘비
 
묘비도 아름다울 수 있다! 겐소지에 있는 가와시마 나쓰미의 묘비.
  4월 30일. 주일 한국 대사관이 있는 아자부(麻浦·서울의 마포와 한자가 똑같다)에 있는 겐소지(賢崇寺)를 찾았다. 2·26 사건을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의 묘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묘역을 둘러보는데 고색창연하거나 획일적인 비석들 사이에서 눈에 확 띄는 비석이 하나 있었다. 금색 띠가 둘러진 여자 모자와 와인병, 그리고 ‘YOROIZUKA’라고 새겨진 글씨. ‘누군지 몰라도 인생을 참 신나게 낭만적으로 살다 간 사람이겠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이 묘의 주인공은 일본에서 유명한 베이커리 및 레스토랑 창업주인 도시 요로이쓰카(鎧塚俊彦)의 아내 가와시마 나쓰미(川島なお美·1960~2015년)라고 한다. 와인병은 가와시마 나쓰미가 태어난 해의 ‘로마네 콘티’라나?
 
  기자가 찾는 묘비가 좀처럼 보이지 않아 관리사무소 승려에게 ‘2·26’이라고 한자로 적어주자 바로 알아듣고 그들의 묘역이 표시된 종이를 프린트해 준다. 주변의 다른 묘들과 구분되어 있는 묘역의 비석에는 ‘二十二士之墓(이십이사지묘)’라고만 새겨져 있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들의 ‘주관적 애국’은 ‘결과적 망국’으로 이어졌지만, 과거 일본인 가운데는 ‘청년 장교’라는 말을 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2·26 사건을 다룬 영화도 여러 편 만들어졌다.
 
  겐소지가 있는 아자부주반역에서 도쿄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인 롯폰기는 멀지 않았다. 도쿄에 오면 늘 사적지들만 보고 다녔는데, 롯폰기의 마천루들을 보니 눈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도 이런 식으로 과감한 도심 재개발을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롯폰기에서 다시 10분 정도 걸으면 노기자카(乃木坂)역이다. 노기자카라는 지명은 글자 그대로 러일 전쟁 당시 뤼순(旅順) 공략전에서 승리해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1849~1912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 근처에 노기 장군이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었다. 노기가 젊은 시절 유학했던 프랑스의 병사(兵舍)를 모티브로 해서 지었다는 서양식 건물이다. 노기의 저택은 바로 옆에 있는 노기신사(神社)로 통했다.
 
 
  아오야마영원
 
  다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아오야마영원(靑山靈園)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아오야마영원은 1872년에 조성된 일본 최초의 공영(公營) 묘지다. 오랜 역사를 가진 묘지답게 메이지 시대 이후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군인, 정치가, 지식인들의 묘가 즐비했다. 한국과 악연이 있는 이들의 묘도 많이 보였다.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 측 대표였고 후일 제2대 총리를 지낸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1840~1900년), 을미사변의 주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1847~1926년), 을사조약 당시 주한일본군사령관이었고 제2대 총독으로 3·1 운동을 탄압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외상이었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1855~1911년),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던 노기 마레스케 등이 그들이다.
 
  아, 아오야마영원에는 유명한 개의 무덤도 있다. 매일 시부야역으로 나가 퇴근하는 주인을 마중했고, 주인이 죽은 후에도 10년 동안 역으로 나갔다가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충견(忠犬) 하치고가 그 주인공이다. 시부야역 앞에는 하치고 광장이 있고, 하치고의 동상도 있다. 리처드 기어 주연의 영화 〈하치이야기〉 때문인지, 동상 옆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항상 줄을 서 있다.
 
 
  김옥균
 
  아오야마영원에서 기자가 정말 만나고 싶었던 인물은 김옥균(金玉均·1851~1894년)이다. 한국 천안과 도쿄 신조지(眞淨寺)에도 김옥균의 묘가 있지만, 이곳에도 김옥균의 묘가 있다. 김옥균 비석의 비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그의 동지였던 박영효(朴泳孝·1861~1939년)가 쓴 것이다.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아아, 비상한 재능으로,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한 죽음만 있었구나).’
 
  수많은 무덤 사이를 열심히 헤매다가 발견한 김옥균의 묘인데도, 이상하게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작년 5월 하코다테에 갔을 때에는, 그가 묵었던 여관 인근의 벌판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는데….
 
  안타깝게도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의 삶에서 ‘비상’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김옥균의 일본 망명 시절 그와 교유했던 일본 명사들의 회상을 담은 구스 겐타쿠(葛生東介)의 《김옥균》을 봐도 소소한 이야기들뿐, ‘비상한 재능’을 가진 이의 비전은 발견할 수 없었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의 삶은 본인에게도, 나라에도 무익(無益)한 것이었다. 차라리 홍영식(洪英植·1856~1884년)처럼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목숨을 버리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타루비
 
아오야마묘지에 있는 박유굉의 묘. 한쪽 면에는 ‘타루비’(오른쪽), 반대쪽엔 ‘오호박유굉지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김옥균의 묘에서 지척거리에 또 다른 한국인의 묘가 있다. 박유굉(朴裕宏·1867~1888년)의 묘다. 일본 총리를 지낸 이누가이 쓰요시(犬養懿·1855~1932년) 등이 후원해서 만든 김옥균의 묘비와는 달리 초라하기 짝이 없는 비석이다. 한쪽 면에는 ‘墮淚碑(타루비)’, 다른 한편에는 ‘嗚呼朴裕宏之墓(오호박유굉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박영효가 세운 것이다.
 
  박유굉은 1883년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파견됐던 박영효를 따라 도일(渡日), 같은 해 일본 육사 예비 과정인 도야마(戶山)학교에 입교했다. 몇 달 후 도야마학교에 입학한 서재필(徐載弼·1864~1951년) 등 14명은 귀국 후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죽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박유굉 등 일본에 남아 있던 유학생들은 조선 조정의 눈에는 ‘역적 예비군’일 뿐이었다. 조선 조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 정부에 유학생들의 본국 송환(送還)을 요구했고, 직접 유학생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귀국을 종용하기도 했다. 1886년 5월 조선 조정으로부터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고 유학생 6명이 귀국했지만, 이들은 귀국 즉시 처형됐다. 귀국을 거부한 유학생들은 가족이 처형되거나 구금됐다.
 
  이런 상황에서 박유굉은 1886년 정규 일본 육사 생도(생도 11기·사관후보생 11기와는 다름)가 됐지만,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일본인 동기생들은 “자네는 우리와 같이 학생으로서 수양할 때이다. 정변과 같은 것들로 고민해서는 안 된다. 졸업한 다음에 지위를 얻은 후 그때 결사적으로 나서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위로해주었지만, 그의 고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1888년 5월, 졸업을 1년 앞두고 권총으로 자신의 목을 쏘아 자결했다.
 
 
  윤치호의 탄식
 
  박유굉과 약간의 교분이 있었던 윤치호(尹致昊·1865~1945년)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일본 사관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여 내년에 졸업하게 된 박유굉이 6~7일 전 자살한 소식을 들으니 참혹하고 가련하다. 비록 그 사연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그 국가 형세 한심한 일과 그 가사(家事) 창망한 것을 슬피 여겨 자살한 듯. 더욱 불쌍하며 이때까지 공부하여 일시에 무단히 버렸으니 아깝다. 이것도 또한 우리나라 국운(國運)인가.〉
 
  일본 땅에 버려진 스물한 살의 젊은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열불이 났을까? 윤치호가 말했던 ‘그 국가 형세 한심한 일’과 ‘이것도 또한 우리나라 국운인가’라는 탄식도 새삼 가슴을 울렸다. 지금도 국가 형세는 여전히 한심하고, 사람들은 버려지고 있다. 이것도 또한 우리나라 국운인가?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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