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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나의 선생님

정리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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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난 피아노 스승들
  “5등이 6등보다는 좋을 것 같은데?”가 가져온 나비효과

 
  ⊙ 집에서 피아노 연습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온 선생님의 외침… “빨라지고 있잖아!”
  ⊙ 제자의 제자까지 살피시는 이런 스승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피아니스트
 
1973년 무렵 김대진군과 이성균 선생님.
  음악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성립되어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다. 실제로 전공 지도교수의 영향력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 학생은 스승의 음악관을 전수받는 것뿐 아니라, 인생관까지도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연주하는 모습은 물론이고, 심지어 걸음걸이와 말투까지 비슷해지는 경우도 있다. 시간이 흘러 학생이 선생이 된 다음에도 그 영향은 계속된다. 오죽하면 ‘배운 대로 가르친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이처럼 스승의 가르침은 학생 무의식에 스며들어 이들이 일생 동안 이루는 모든 음악 활동의 근간이 된다.
 
  “너 정말 피아니스트 되겠구나”
 
1979년 동아 콩쿠르 대상 후 오정주 선생님.
  한 음악도가 성장하는 동안 보통 두세 명의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나에게도 나를 있게 만들어준 세 분의 스승이 있다. 나의 첫 번째 스승은 이성균(李成均·1934~2012년) 선생님이다. 당시 같은 교회(연동교회)를 다닌 것이 인연이 되어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가르침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전형적인 교수법인 도제(徒弟)식의 엄격함과 거리가 먼 너무나도 자상하고 친절한 스승이셨다. 항상 최고라고 칭찬해주시고 용기를 북돋아주셨는데, 그 칭찬과 격려가 자신감을 만드는 비결임을 내가 선생이 된 다음 깨닫게 되었다. 당시 나는 부친의 열성적인 관심하에 피아노를 공부했는데, 레슨을 받으러 갈 때는 항상 부친이 동행했다. 레슨을 받는 중에 부친은 항상 선생님께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조금의 피곤한 내색 없이 친절히 답해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참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선생님의 빠른 진도에 맞추어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데뷔 연주를 했다. 그 연주 후 선생님께서 “너 정말 피아니스트 되겠구나”라고 하신 말씀 한마디로 나는 결국 피아니스트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친절하시고 자상하시고 따뜻하신 나의 첫 스승이다.
 
  중학교 3학년부터는 오정주(吳貞珠·1931~1983년)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이때부터는 내가 피아니스트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인지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레슨으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선생님 댁이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 내가 집에서 혼자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빨라지고 있잖아!”라는 고함이 들렸다. 혼비백산하여 창밖을 보니 선생님께서 나의 연습 소리를 듣고 계셨다. 당시에는 연습실이라는 장소가 없던 때이고, 요즘처럼 방음에 유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건반을 치던 나의 연습 소리는 항상 동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물론 선생님 댁과 가까우니 편한 점도 많았다. 레슨은 항상 저녁 시간 이후로 잡혔고, 레슨이 두 시간을 훌쩍 넘는 일은 당연했다. 레슨이 끝난 다음에는 선생님과의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노라면 밖에서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고, 나는 얼른 뛰어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사실 나는 레슨보다 레슨 후 나눈 대화의 시간을 통해 음악적 가치관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고, 음악 외적인 면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요즘 자주 강조되는 전인(全人)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 어떤 학생이 이런 특권을 누렸겠는가.
 
  자만심으로 인해 동아 콩쿠르 1차 예선을 가까스로 통과하고 선생님께 엄한 꾸짖음을 들은 후, 대상으로 내가 호명됐을 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아직도 나의 가슴 한편에 소중한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아, 선생님
 
2002년 서울 연주 후 만난 마틴 캐닌 선생님.
  이후 나는 선생님과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해야 했다. 1982년 선생님의 강한 권유로 나는 줄리아드로 유학을 떠나 이듬해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서울에 머무르던 때였다. 선생님께서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고 미국으로 떠나셨고, 나는 선생님께서 오실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선생님의 사망 소식. 선생님께서 1983년 소련군에게 격추된 대한항공 비행기에 탑승하셨던 것이었다. 40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왜 일정과 항공사를 바꿔 그 비행기에 오르신 것인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제자의 콩쿠르 지도를 위해 일정을 며칠 앞당기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나에게는 교육자의 열정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였고, 교육자로서의 꿈을 갖게 해주었다. 미국으로 떠나시기 전 나에게 건네신 서울대 연구실 열쇠는 아직도 나의 보물함 속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슬픔을 뒤로하고 다시 줄리아드로 돌아온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시간의 의미와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고, 시쳇말로 피아노에 ‘올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스승이셨던 마틴 캐닌(Martin Canin·1930~2019년) 선생님은 오정주 선생님과 줄리아드 학창 시절부터 각별한 우정을 유지한 사이였기에 나의 상황을 잘 이해해주셨다.
 
  유학을 하게 되면 보통 두 분 이상의 스승을 모시게 되는데, 나는 9년의 유학 기간 동안 오로지 한 분에게 사사할 정도로 캐닌 선생님을 신뢰했다. 솔직히 9년간 배운 모든 가르침에 마음으로 온전히 동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그동안 나의 가르침을 받은 나의 제자들도 분명 마찬가지겠지만), 결코 단 한 번도 그 가르침을 부정한 적은 없다. 설사 나의 생각과 전혀 다른 해석을 요구하실 때도, 내가 정말 연주하기 싫은 곡을 주셨을 때도, 질책받는 정확한 이유를 모를 때도 나는 선생님의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떠올려 보면 그때의 나의 생각은 한없이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이었지만, 내가 선생이 되고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깨닫게 된 다음부터는 선생님을 더 존경하게 되었던 것 같다. 큰 소리의 질책 한 번 없이도 머릿속에 새겨지는 한마디 한마디로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만들어주신 선생님이셨다.
 

  그 순간에는 섭섭하지만, 지나고 보면 선생님의 대단한 계략(?)이 숨겨져 있던 적도 있다. 선생님께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신 1985년 로베르 카사드쉬 콩쿠르(현 클리블랜드 콩쿠르)에서 일어난 일이다. 본선 연주에서 나의 차례 직전에 휴식 시간이 있었는데, 화장실에서 선생님을 마주치게 되었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학생은 구세주를 만난 느낌으로 당연히 선생님의 격려를 듣고 싶어 한다. 나 역시 선생님의 따뜻한 한마디를 기대했건만, 돌아온 선생님의 말씀은 “5등이 6등보다는 좋을 것 같은데?”(대개 국제 콩쿠르에서는 6등까지 수여한다)였다. 아직도 나에게는 가끔 그 순간의 실망감과 일종의 분노가 떠오를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 분노가 집중으로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어쩌면 나의 평생 가장 마음에 든다고 여길 만한 연주를 했고, 결국 1등을 했다.
 
 
  선생으로서 가졌던 의문들 하나씩 풀려
 
수원시향 지휘자 시절의 김대진 총장.
  스승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캐닌 선생님은 나에게 큰 거울이셨다. 그 거울은 직선에서 나를 가깝게 비추는 거울은 아니었지만, 거울 한쪽에 희미하게 보이던 나의 모습을 마음속에서 제대로 비추게 만들어 결국 나를 온전히 보게 하는 힘을 가진 ‘마력의 거울(magic mirror)’이었다. 나는 선생으로서 이런 거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캐닌 선생님과 같은 마력은 지니지 못한 그저 평범한 거울에 그친 것 같다.
 
  사실 캐닌 선생님의 잔소리는 제자들 사이에서 항상 화제였다. 특이한 것은 제자들이 듣는 잔소리가 각각 다르다는 점이었다. 일종의 ‘맞춤 잔소리’인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잔소리는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나에게는 선생님의 강도 높은 잔소리가 없었기에 내심 의아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그 시간은 내가 학생이었을 때가 아니라, 귀국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였다. 나의 제자 김선욱이 2004년 독일 에틀링겐(Ettlingen)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 참가했는데, 이 콩쿠르는 1회 때 랑랑이 1등을 한 이후 전 세계 청소년 피아니스트들의 공식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대회였다. 마침 캐닌 선생님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셨는데, 선생님께서 김선욱의 1등 결과 발표 후 독일에서 전화를 하시더니 나에게 김선욱이 연주한 곡의 악보를 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선욱이 연주의 전반적인 의견을 말씀하시더니,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든 부분을 자세히 코멘트해주셨다. 지금 당신의 말을 악보에 기입하고 있는지를 거듭 확인하시면서…. 국제전화 통화는 한 시간 정도 이어졌고, 그동안 선생으로서 내가 가졌던 의문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제자의 제자까지 살피시는 이런 스승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마음속으로 제2의 부친이라고 여긴 캐닌 선생님은 2019년 우리 곁을 떠나셨고, 이제 나는 세 분의 스승을 모두 떠나보냈다. 오히려 학생 때보다 더 많은 조언이 필요한 지금의 상황이지만, 이제는 나의 고민을 들어줄 분이 계시지 않는다. 그저 공허한 마음만이 남았다.
 
  ‘배운 대로 가르친다’라는 말처럼 선생의 역할은 매우 어렵다. 선생의 역할을 한 지 어언 3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나에게는 가르치는 일이 힘들고,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의 무게가 느껴진다. 온 마음으로 존경하는 나의 세 분의 스승은 이런 무게감을 어떻게 감당하셨을지, 또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어떤 선생이었을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따라 스승들의 질책과 잔소리가 무척이나 그립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교장 선생님
  “지금이라도 제가 고래를 잡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

 
  ⊙ “너 같은 놈은 때릴 것도 없어. 퇴학이야!”
  ⊙ “페스탈로치 같았으면 제 자식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오효진 소설가·前 《월간조선》 부장·前 SBS보도본부장
 
오효진 언론인.
  나는 어린 나이에 담배를 입에 댔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대전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여름방학 때 시골집에 갔다. 내 고향은 지금은 대전과 이웃한 경계 마을이 됐지만 그때는 대전에서 20여km나 떨어진 충청북도 변경의 두메산골이었다.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신탄진역에서 내려서, 금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또 산을 넘어, 한 시간이나 걸어가야 고향마을이 나왔다.
 
  고향에 가 보니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벌써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친구들은 저녁때 강변 풀밭으로 소를 끌고 나와서 풀을 뜯겼다. 다들 이때 모여 재깔거렸다. 그날 나도 우리 집 황소를 몰고 강변으로 갔다. 그때 이웃 친구가 신문지에 담배를 말아 피우면서 나에게도 한 대 말아 줬다. 시골에서는 어른들도 풍년초라는 봉지 담배를 피울 때였다. 전매청이 잘게 썬 잎담배를 길쭉한 봉지에 두툼하게 담아 팔았다. 그걸 손으로 조금 덜어서 작은 종이 위에 길게 펴놓고 돌돌 말아 혀끝으로 침을 쓱 바르면 나팔 같은 개비 담배가 됐다.
 
  친구들은 담배를 받아 쥐고 난처해하는 나를 보고 빙긋빙긋 웃었다. 그러다 한 아이가 성냥갑을 들고 나한테 다가왔다. 나는 엉겁결에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는 성냥을 그어 내 입으로 가져왔다. 나는 눈을 감고 담배를 용감하게 한 모금 쭉 빨았다. 무서워하는 꼴을 보여주기 싫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첫 담배였다. 나는 어른처럼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아이들을 봤다. 그러나 아이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 쓰윽 빨아서 꿀꺽 삼켜야지.”
 
  누군가가 말했다.
 
 
  잊히지 않는 그날의 기억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렇게 했다. 순간 목이 캑 막히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머리가 핑 돌았다. 나는 그만 풀밭에 주저앉았다. 아이들이 깔깔 웃어댔다.
 
  첫날 이렇게 망신당한 나는 이후 몰래 연습을 열심히 했다. 지기 싫었다. 담배 공부를 학교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다. 그러니까 진도도 빨라졌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엔 내가 우리 동네서 담배를 가장 멋지게 피우는 아이가 됐다. 월반에 월반을 거듭한 것이다. 우쭐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사건이 터진다. 3년 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때였다. 아침에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느닷없이 우리를 다 일으켜 세우셨다. 그러고는 모두 뒤로 나가 서 있으라고 하셨다. 반장하고 둘이 우리 가방 검사를 했다. 그 무렵 우리 반엔 담배를 피우는 애가 벌써 셋이나 있었다. 뜻밖에 얌전한 학생이었던 내 가방에서 ‘사슴’이란 담배가 나왔다. 한 갑에 열 개비가 들어 있는 고급 담배였다. 담뱃갑이 작아서 어디 감추기에도 좋았다. 그런데도 불행하게 나만 걸렸다. 담임 선생님은 뻘쭘해진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셨다.
 
  “너 같은 놈은 때릴 것도 없어. 퇴학이야!”
 
  선생님은 담배만 압수하고 교무실로 가셨다.
 
  1교시가 끝나고 교무실에서 호출이 왔다. 교장실로 불려 갔다. 교장 선생님은 내 성적표를 보고 계셨다. 박관수(朴寬洙) 교장 선생님은 경북대 교수로 계시다가 우리 학교 교장으로 오신 분이었다. 조회 시간에 우리를 작은 운동장에 모아놓고 페스탈로치,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위인들의 고사를 말씀해주시곤 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얘기도 해주셨다. 우리 학생들에게 모두 나라의 정승 판서 같은 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며 하늘 높이 자존심을 불어넣어주시고 그에 걸맞게 이끌어주신 분이었다. 그 덕분에 그 무렵 우리 시골 학교에선 1년에 서울대에 150명씩이나 들어갔다. 교장 선생님은 그때 세계도덕재무장기구(MRA)의 한국회장도 맡고 계셨다.
 
  “공부는 꽤 하는 놈이구만. 아버지 모시고 와.”
 
  교장 선생님은 딱 한마디만 하셨다. 담임 선생님이 하신 말과 같은 뜻으로 들렸다. ‘넌 퇴학이야!’
 
  나는 할 수 없이 고향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대낮에 돌아오는 나를 보고 놀라셨다.
 
  “아버지, 교장 선생님이 오시래요.”
 
  나도 한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두루마기를 입고 대전으로 떠나셨다.
 
  “필연코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른 모양이구나. 걱정 말고 집에 가만히 있거라. 퇴학시킨다면 다른 학교로 전학 가면 되지.”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교사로 계시다가 사직하신 아버지는 학교에서 돌아가는 일을 눈치채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저녁때 돌아오셨다. 가족이 함께 저녁상을 받은 자리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교장 선생님이 널 퇴학시키겠다고 말씀하시기에 내가 이랬다. ‘나는 자식을 이 학교에 입학시킬 때 어떤 처벌이든 감수하겠으니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서약서를 썼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퇴학시키겠다면 제 자식을 포기하셨나 봅니다. 제 자식이 도저히 사람이 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다면 퇴학시켜주십시오. 그럼 제가 교장 선생님이 포기한 제 자식을 사람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조회 시간에 페스탈로치 얘기를 많이 하신다고 자식한테 들었습니다. 페스탈로치 같았으면 제 자식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교장 선생님이 내 말을 듣고 나를 한참 보시더라. 내가 ‘말씀이 끝났으면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일어서려니까 내 손을 덥석 잡고 내일부터 학교에 보내라고 하시더라.”
 
 
  “페스탈로치 같았으면 제 자식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튿날 나는 학교에 갔다. 마침 작은 운동장에서 조회를 서는 날이었다. 박관수 교장 선생님은 우리를 세워놓고 훈화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
 
  “내가 교육자로 들어선 지 몇십 년 만에 이런 아버지는 처음 만났다. 1학년 녀석이 담배를 피워서 퇴학시키겠다고 했더니 그 아버지가 이러시더라. ‘그렇게 잘못을 저질렀으면 퇴학시키십시오. 저는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이 학교에 자식을 입학시켰지 퇴학시켜달라고 서약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사람 되기 틀렸다고 포기하셨다면 퇴학시키십시오’ 이러시더라. 이놈들아! 내가 한 번만 봐달라고 비는 학부형은 여럿 만났지만 퇴학시켜달라는 학부형은 처음 만났다. 그래서 나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이 사건 이후 나는 학교를 무탈하게 다녔다. 대학에도 진학했다. 석사·박사 학위도 받았다. 직장 생활도 열심히 했다.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었다가 기자로도 일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스승일 뿐만 아니라 친구 같은 분이셨다. 아버지는 시골 출신으로 서울에 있는 고보(구제 중고등학교)로 진학해서 5년간 내리 1등에 반장을 하셨단다. 아버지는 그 실력으로 내가 고3이 될 때까지 영어, 수학, 물리, 화학을 가르치셨다. 아버지는 우리 동산에 실험실을 만들어놓고 화학실험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거기서 시를 지으며 살면 좋겠다고 하셨다. 1970년 내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잉어와 꼽추〉로 당선됐을 때였다. 아버지는 어두운 등잔불 아래서 돋보기를 쓰시고 신문 두 면에 가득 실린 내 소설을 밤새 읽으셨다고 했다. 후에 집에 가니 “이번에 동네 앞 금강에서 잉어를 잡았으니 다음엔 태평양에 썩 나가서 집채만 한 고래를 잡아 오거라” 하셨다. 이런 분이 58세에 일찍 돌아가셨다.
 
  지금이라도 제가 고래를 잡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
 
  박관수 교장 선생님은 그 후에 한양대 교수로 올라가셨다. 초대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활동하시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동경제대 철학과를 졸업하셨다. 대구사범 교사 시절에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은사(恩師)로 존경받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우리 시골 학교에 있어 과분한 분이셨다. 이런 분이 마침 그때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와 계셨다. 기다렸다는 듯, 운명처럼 나를 살리셨다. 고마운 박관수 교장 선생님!
 
  나는 그 후 담배를 끊었다. 이제 80 고개를 넘었다. 만약 아버지와 교장 선생님이 그때 나를 버리셨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아무래도 지금 두 분께 고마움이 가득 담긴 이런 글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교실 밖에서 터득한 소중한 인생 교훈
  “인내력과 체력 길러준 젊은 시절의 스승, 조정 경기”

 
  ⊙ 1972년 서울대 에이트 팀, 전국체전에서 은메달 받아
  ⊙ 여덟 명이 조화를 이루는 조정경기,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김도연 태재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前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김도연 서울대 명예교수.
  꽤 큰 지면을 차지하며 주요 신문들에 게재되고 있는 〈오늘의 운세〉는 소, 뱀, 그리고 양 등 띠로 구분되는 독자들의 하루를 짚어주는 기사다. 우연히 오늘 아침 《조선일보》를 통해 필자에 해당되는 용(龍)띠를 살펴보니 40년생은 돈 아니면 건강 근심, 52년생은 희비가 교차하는 하루, 그리고 64년생은 실천 없는 계획은 망상 등이다. 별로 의미 없는 내용들인데, 그럼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런 기사가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아마도 띠란 각 개인의 심장 속에 숨어 있는 동물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오랜 전통 때문일 것이다.
 
  〈나의 선생님〉이란 주제를 받아 들고 책상에 앉으니 당연히 지난 삶을 돌이켜보게 되었는데, 흥미롭게도 용의 해를 맞을 때마다 큰 변화가 있었다. 12세에는 당시 치열했던 입시경쟁을 뚫고 원하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24세에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다. 36세에는 국민 모두에게 엄청난 의미를 지닌 88서울올림픽이 있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에 들어서는 신호탄이었다. 필자와 같은 교수들에게 국가에서 연구비를 마련해주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2000년, 48세에는 21세기가 시작되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리고 2012년에 드디어 환갑(還甲)을 맞았다. 한 바퀴 인생을 돌아 종착점에 이른 것인데, 이때는 오히려 아무런 감회도 그리고 특별한 일도 없었다. 그사이 세상이 바뀐 탓이다.
 
 
  교실에서보다 배를 타면서 인생 교훈 배워
 
  금년에 다시 용의 해를 맞았다. 72세 노인이 되었는데 지나간 학창 시절의 존경하는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는 부탁에 왜 막막한 심정이 되었을까? 누구나 그러하듯 수많은 분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당연히 마음속에 떠오르는 스승도 많이 있었다. 우선은 80여 명이 넘었던 당시 한 반 어린이들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두어 시간씩 합창 연습시켜, 모두가 즐겁게 노래하는 학급을 만드신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의 담임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분의 존함도 정확히 기억 못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중·고교 시절의 몇몇 선생님과 또한 석사 및 박사 과정의 논문 지도교수님 등도 당연히 필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분들을 존경하는 스승이라고 이제 와서 이야기하기가 조금은 스스로에게 민망스러웠다.
 
  필자의 선친은 평생을 중학교 교사로 일하시다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셨는데, 어릴 적 새해가 되면 온 가족을 이끌고 집에 찾아와 큰절 올리던 제자 몇 분이 생각난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돌아가신 날이면 묘소에 찾아와 참배하던 그런 제자들이다. 이제는 그들도 모두 아버님 계신 곳으로 가셨으리라 믿어지는데, 이런 분들을 생각하면 필자는 고맙고 존경하는 스승을 전혀 제대로 모시지 못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스승을 언급하는 것은 어울리는 일이 아닌 듯싶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앞서 언급했듯 그사이 세상이 바뀐 탓이다. 그것도 아주 크게 바뀐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추스른다.
 
  스승이라는 존재를 꼭 학창 시절 중의 인간관계에 한정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젊었던 시절의 무엇이 필자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까? 금년 초 당연히 모두 일흔 살이 넘은 대학 시절 동료들과 모임이 있었다. 한 친구가 자신의 지난 삶에서 가장 탁월했던 선택 두 가지를 꼽는다면, 첫째는 평생을 함께하고 있는 아내를 택한 것이고, 두 번째는 대학 시절 조정(漕艇)부에 들어가 운동을 열심히 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첫째에 대해서는 누가 선택의 주체였는지 모른다며 서로 웃고 넘어갔지만 두 번째에 대해서는 모두가 한결같이 동의했다. 대학 시절 조정을 하면서 당시 한강에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들의 모임이었다. 실제로 조정 선수로 활동했던 대부분의 노인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기는 교실에서보다 배를 타면서 훨씬 더 중요한 인생 교훈을 배웠다고.
 
  모든 스포츠, 즉 육체적 활동에는 이를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으며 이는 단체 스포츠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듯싶다. 그중에서도 조정은 별다르다. ‘에이트’는 노를 젓는 8명과 배의 방향을 조정하며 전체 선수의 노 젓는 리듬을 컨트롤하는 키잡이 1명이 탑승하는 9인승 조정 경기를 일컫는다. 멀리서 보면 고요한 수면 위를 좌우 네 개씩의 노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움직이며 힘차게 질주하는 에이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잡이 8명의 엄청난 육체적 고통이 함께한다. 특정 근육에 의존하는 대부분의 스포츠와는 달리, 조정 선수들은 신체의 모든 근육을 반복적으로 혹독하게 사용해야 한다.
 
  실제로 스포츠 생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2000m 조정 경기에 필요한 선수들의 에너지는 3시간 정도 계속되는 야구 경기를 두 번 연속으로 치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런 에너지를 불과 6~7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쏟아붓는다. 조정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힘든 스포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휴식 시간도 없고 선수 교체도 물론 없다. 압도적인 신체적 고통은 이 운동의 알파요 오메가다. 경기가 끝났다는 신호가 들려올 때까지 바로 앞에 앉은 동료의 땀 흘리는 목덜미만 쳐다봐야 하는 고달픈 스포츠가 조정이다. 그런데도 이런 고달픔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최초로 TV로 생중계된 조정 경기
 
1972년 10월 2일 서울대와 해사가 가졌던 조정 경기인 제1회 문무전(文武戰) 모습이다. 당시 대학신문 기자가 한강교에서 찍은 서울대 팀의 모습인데, 필자는 아래쪽에서부터 헤아려 여섯 번째에 앉아 있다. 팀의 주장은 8번째 앉은 선수이며 다른 모두는 그의 노 젓는 리듬을 따른다. 주장 안성모는 2005년부터 3년간 대한치과의사협회장을 역임했다.
  에이트 경기정의 길이는 보통 19m에 이르지만 폭은 60cm 정도에 불과하다. 이토록 날렵한 보트가 수평을 유지하며 매끄럽게 수면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선수들의 힘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섬세함이 더 중요한데, 조정의 커다란 매력은 사실 여기에 있다. 노의 길이는 4m에 달하며 무게는 4kg 정도인데, 이를 각자 하나씩 잡고 물길을 헤치는 여덟 명의 움직임에는 완벽한 리듬과 상호 간의 조화가 필수적이다. 균형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배는 곧바로 뒤뚱댄다. 그러기에 리듬과 모든 선수의 균형을 지휘하는 키잡이는 누구보다 중요한 에이트 멤버다.
 
  조정은 스타플레이어가 없는 스포츠다. 예를 들면 10여 명이 훈련하고 이 중 컨디션 좋은 8명이 시합 날 경기에 나서는 스포츠가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처음부터 함께 긴 시간 연습하며 호흡을 맞춘 8명이 필요한 경기다. 연습 때는 유연한 자세로 가장 힘 있게 노 젓는 선수를 따르지만 시합 때는 오히려 제일 처지는 선수에 리듬을 맞추어야 한다. 여덟 명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 배는 수면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데, 조정 선수들은 그 순간의 희열을 평생 잊지 못한다. 엄청난 육체적 고통도 모두 잊는 순간이다.
 
  필자가 입학한 1970년의 서울대는 지금도 그렇지만 스포츠에서는 어느 종목도 신통한 성적을 못 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만은 몇몇 대학 팀 중에서 상당한 실력을 발휘했는데, 그 주축은 치과대학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조정을 사랑하며 엄청난 열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와 더불어 6년을 재학하기에 그만큼 배를 탈 수 있는 기간이 길었던 것도 유리했던 점으로 생각된다. 공과대학에는 1971년에 조정부가 만들어졌으며 필자를 포함한 동료 십여 명이 치과대학 선수들과 더불어 함께 훈련하고 그 후 연합해서 시합에 출전했었다.
 
  1972년에는 필자가 탑승한 서울대 에이트 팀이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받았다. 금메달은 해군사관학교에 돌아갔지만, 여하튼 서울대와 해군사관학교는 서로가 아주 좋은 맞상대였다. 영국의 옥스퍼드-케임브리지 혹은 일본의 와세다-게이오 간의 정기적인 조정 경기처럼 서울대와 해사 간의 시합이 정례화된 것도 같은 해였다. 그해 경기에서 서울대는 네 명이 타는 종목에선 승리했지만 에이트 경기에서는 간발의 차이로 해사에 패하고 말았다. 결승선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아쉬움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이 경기가 소위 제1회 문무전(文武戰)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TV로 생중계된 조정 경기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스스로는 문무전이란 작명(作名)을 당시에도 대단히 탐탁지 않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체력이 관건인 스포츠 경기에서 문(文)과 무(武)가 경쟁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후 3~4년 계속된 문무전은 결국 서울대 조정팀이 해사의 맞수가 되지 못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거의 반 세기가 지난 후인 2018년에 해군사관학교는 대구 DGIST와 다시 제1회 문무전으로 이름 붙인 조정 경기를 벌인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런 역사도 반복되는 모양이다.
 
 
  2016년 포스텍 총장 시절, 조정부 만들어
 
  조정의 근본 가르침은 협력과 배려의 정신이다. 이를 통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인내력과 체력은 삶에 있어 참으로 귀중한 선물이다. 이러한 가르침과 혜택을 준 조정이란 스포츠는 결국 필자에게 가장 잊지 못할 스승이었던 듯싶다.
 
  서울대에서 26년을 교수로 일했고 여기에 다른 대학을 오간 것까지 모두 40여 년 가까운 삶을 대학에서 지냈으니 소위 제자가 엄청 많은 셈이다. 이들에게 필자 스스로는 과연 어떤 스승이었을까?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좀 더 관심을 갖지 못하고 챙겨주지 못한 아쉬움만 짙게 남는다. 그나마 지난 2016년에 포스텍 총장으로 봉직하면서 학생들을 위해 조정부를 만들고 에이트 한 척을 마련해준 것은 비교적 잘한 일인 듯싶다.⊙
 

  수도자로 이끈 내 삶의 참 스승들
  “사제와 수도자는 은퇴가 없다. 꽃동네는 휴가가 없다”(오웅진 신부)

 
  ⊙ 병들고 버림받은 가난한 이들은 가장 큰 축복의 선물
  ⊙ “이 몸은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신상현 예수의꽃동네형제회 수사(야고보)·인고자애병원 의무원장
 
프란치스코 교황과 오웅진 신부(오른쪽), 신상현 수사.
  저는 꽃동네에서 내과 의사로 의료 봉사하다가 가톨릭 수도자가 된 사람입니다.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분에 넘치는 의사 수도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게 된 것은 오직 사랑으로 저를 이끄신 참 스승님들 덕분입니다. 그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 훈육하는 사랑, 용서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제게 사제가 되기를 권유하셨지만, 신부(Father)보다 수사(修士)가 되기로 결정한 이유는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19세에 시집오셔서 72년간 어머니의 가정생활은 한마디로 ‘희생’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인고(忍苦)의 삶은 6남매를 양육하시면서, 친부모를 끝까지 모셨고, 알코올 의존성 남편과 42년간 동행하셨습니다.
 
  아버지는 3대 독자 외아들에 고아로 자수성가(自手成家)하기까지 많은 고생을 감당하시며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가난과 싸우며 빚을 얻어 저를 의사로 만드셨습니다.
 
  두 분 다 유복한 가정이 아니라 초등학교만 다니셨지만, 몽땅 주는 사랑으로 자녀들을 기르셨습니다. 아픔이 많았던 세월을 사신 부친께서 폐암으로 선종하시기 며칠 전에, 저에게 “너는 전문의가 되면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남을 돕고 살아라!~” 하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저는 순종하여 꽃동네로 왔고, 병들고 버림받은 가난한 이들은 가장 큰 축복의 선물이었습니다. 가난했고 배움도 없으셨던 부모님은 제게 행복의 길을 열어주신 첫 스승이셨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의사가 돼라 엄하게 가르친 스승의 사랑
 
  제가 성모병원에서 학생으로 임상 실습을 하던 때입니다. 당시 최고의 명의(名醫)로 존경받던 민병석 박사님의 수업 시간에 저는 환자 케이스 발표를 잘했다고 칭찬을 받고 기뻐했는데, 이어서 바로 같은 자리에서 그 교수님께 큰 야단을 맞았습니다. 숙제로 주신 케이스에 대한 최신 논문을 발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대학 도서관에 논문이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숙제를 못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변명하는 저에게 교수님은 얼굴이 붉어지시며, “자네는 논문을 구하러 서울대 도서관에는 가봤나? 연세대는?” 하시며 심하게 야단을 치셨습니다.
 
  꾸지람을 예상치 못한 터라 저는 당황스럽고 부끄러웠지만, 그때 존경하는 교수님께 야단맞은 경험은 후에 제가 최선을 다하는 의료인으로 사는 데 큰 보약이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평소에도 레지던트들에게 “당뇨병성 혼수 환자를 익스파이어(Expire·죽이면)시키면 그 전공의도 ‘익스파이어’한다!” 하시면서 생명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저희를 엄하게 훈육하셨습니다. 저는 주치의가 되었을 때 교수님께 야단맞은 기억과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생명이 위중한 환자를 담당할 때마다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때로는 밤을 새우며 생명을 지켜내곤 하였습니다.
 
  가난 때문에 치료 못 받고 죽어가는 환자를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본과 3학년 임상 실습으로 자선 병동에서 김인철 교수님을 모시고 병실 회진을 도는 시간이었습니다. 수술 명의로 존경받던 교수님은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 앞에서 학생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이 젊은 여성은 가난한 고아라서 치료 시기를 놓쳐 이렇게 불쌍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앞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때, 저는 혼자 마음속으로 “네, 교수님,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고, 지금까지 36년간 꽃동네에서 무언의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꽃동네로 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꽃동네 소식지에 실린 오웅진 신부님의 영적(靈的) 메시지였습니다.
 
  “이 세상에 ‘의지할 곳 없고 얻어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이들이 생긴 이유는 누군가 그분들을 사랑해야 했던 이들이 그분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결핍으로 생긴 재앙을 치유하려면 누군가 그 사랑을 대신 해야 됩니다.”
 
  저는 깨알같은 글씨로 써진 이 메시지를 우연히 읽었는데, 그 작은 글자가 대문짝같이 커지면서 제 가슴을 쳤습니다. 평범한 글인데, ‘그 누군가가 바로 나구나’ 하면서 ‘네가 대신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느껴졌습니다.
 
 
  지성인이란 시대를 거슬러 살 줄 아는 사람
 
  저는 고교 시절 존경했던 은사님 중에 국어 선생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왔습니다. 선생님은 칠판에 파선하여 침몰하는 배를 그려놓고 학생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성인은 배운 사람을 말합니다. 안 배운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항해하던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탑승객들이 모두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구명보트가 있는 쪽으로 다 몰려가게 되면 배는 더 빨리 뒤집히게 될 것입니다. 이때 지성인은 나 홀로 배의 반대편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나 하나 그렇게 해도 배가 전복되는 것을 막는 데 큰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나부터 그렇게 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배운 사람입니다. 지성인은 시대를 거슬러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집안이 가난해서 학생 시절 공중보건장학의 장학금을 받았는데, 나중에 무의촌에서 근무하는 것이 수혜 조건이었습니다. 전문의가 되고 나서 근무 희망지를 신청할 때 저는 ‘가톨릭이 운영하는 곳, 가난한 이들이 많은 곳, 의료인들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 예를 들면 꽃동네’라고 작성하여 제출하였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복지시설에는 파견이 안 된다, 특례법에 따라 도립병원이나 보건소에 배치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간청하자, 담당자는 장학의가 복지시설에도 파견될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꽃동네는 국가 예산이 책정되지 않아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동의하였고, 무보수로 봉사한 덕에 수도 삶까지 덤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교 시절 국어 선생님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은 가톨릭의 큰어른이셨던 오기선 신부님이 전쟁고아들을 돌보시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사제가 되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것에 미쳐야 한다’는 오기선 신부님의 말씀에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하루 24시간을 언제 어디서나 항상 꽃동네와 가난한 사람들만 생각하고 사셨습니다. 신부님을 사랑하는 분들이 “80세가 넘으셨으니 이제 그만하고 쉬세요” 하고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 신부님은 “사제와 수도자는 은퇴가 없다. 꽃동네는 휴가가 없다. 아픈 것하고 일하는 것은 별개다. 아파도 일해야 한다” 하시며 가실 줄 모르는 사랑과 샘솟는 열정으로 밤낮없이 새로운 비전을 이루기 위해 일하십니다. 저는 한 사제의 최선을 다한 헌신에 감화되어 차츰 새로운 길, 수도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 신부님은 버림받은 사람을 꽃동네에 모시게 되면, 수도자들에게 “버린 사람들을 단죄하지 말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말없이 대신하자” 하시며, ‘내 일도 내 일같이 하고, 남 일도 내 일같이 하자’는 봉사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께서 지어주신 꽃동네 병원에서 그 교훈에 따라 마음껏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병원장이면서 내과 과장이었고, 레지던트와 인턴이었습니다. 봉사자가 부족하여 저는 매일 식사를 수발하고, 목욕은 물론, 시신 염습까지 하였고, 때로는 응급 시에 앰뷸런스 운전까지 했습니다. 의사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감당하면서 저는 온전한 자유와 참 기쁨, 내적 평화를 체험하였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소명, 부르심이었고, 저는 마침내 세속을 떠나 수도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하는 사랑, ‘나는 너만을 사랑한다. 네가 죄가 있든 없든’
 
  꽃동네 남녀 수도자들은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위험한 나라, 아이티에서 수많은 갱단으로부터 살인과 납치의 위험을 당하며 400여 명의 버림받은 가족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대사관에서 철수를 권하였지만,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에 따라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정신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 신부님은 꽃동네 주보 성인을 예수성심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예수성심은 죄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용서하는 사랑으로 그들의 고통과 죽음, 죄까지 대신하려는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죄인인 저도 창설자의 가르침인, “나는 너만을 사랑한다. 네가 죄가 있든 없든” 이 말씀에 따라 ‘용서하는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을 섬기다가 세상 떠날 때,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이 몸은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자유로워지라” 축원해주신 현호선사
  15년 시봉, 나만의 충심 어린 세월이여…

 
  ⊙ 효봉 → 구산 → 현호로 이어지는 近世 법맥을 이어받으신 스승
  ⊙ 가랑비에 옷이 젖듯 모름결에 배어드는 어묵동정(語默動靜)의 배움 잊지 못해

 
  원경스님 서울 심곡암 회주·경실련 공동대표·사회복지원각 대표
 
원경스님
  모름지기 덕성이 있는 이라면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절집에서는 명심하여 잊어서는 안 될 다섯 가지 큰 은혜인 오종대은명심불망(五種大恩銘心不忘)을 상기하며 나침반으로 삼고 있다.
 
  첫째는 모든 제도를 갖추어서 잘살게 한 국가의 은혜인 각안기소국왕지은(各安其所國王之恩)이다.
 
  둘째는 고통 속에 낳아 기른 하늘 같은 부모의 은혜인 생양구로부모지은(生養劬勞父母之恩)이다.
 
  셋째는 바른 법을 전해주신 스승의 은혜인 유통정법사장지은(流通正法師長之恩)이다.
 
  넷째는 의식주의 어려움을 돌봐주신 시주와 후원의 은혜인 사사공양단월지은(四事供養檀月之恩)이다.
 
  다섯째는 함께 더불어 공부하면서 위해주는 친구의 은혜인 탁마상성붕우지은(琢磨相成朋友之恩)을 들고 있다.
 
 
  스승을 잘 섬기는 일은 일생일대에 최고로 중해
 
  이런 은혜에 보은(報恩)하기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잊지 않으려는 애정과 다짐이 필요하기에 아침저녁으로 되뇌며 염송(念誦)을 하고 있다. 소납은 다섯 가지 은혜 가운데 넷째인 의식주의 어려움을 돌봐주신 시주와 후원의 은혜인 사사공양단월지은을 갚는 의미에서 9년 전부터 서울 탑골공원 원각사[사회복지원각]에서 1년 365일 매일 300여 명의 어르신들에게 무료급식을 실천하고 있다.
 
  올해 들어 스승의 날을 맞이하니, 바르게 가르쳐준 스승의 역량과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출가 수행자의 마음가짐을 경계함을 일깨워주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의 가르침에는 “소나무를 의지하는 칡넝쿨은 천길인 듯 솟구치지만 풀밭에서 자란 식물은 삼척의 높이를 면할 길이 없다”라고 하였듯이 스승을 잘 만나고 잘 섬기는 일은 일생일대에 최고로 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산 큰스님 여럿 제자 중에 제일 수제자
 
  나의 스승은 고려 말 한국불교 중흥조이신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이후 면면히 법맥(法脈)을 이어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에서 초대 종정(宗正)을 지낸 효봉선사로부터 구산선사에 이어 선맥(禪脈)을 이은 석림 현호선사이시다. 승보종찰인 조계총림 송광사의 도승(道僧)으로 유명하셨던 구산 큰스님께서 여럿 제자 중에 제일 수제자로 여겨 법명답게 “호랑아!” 하며 아끼셨다.
 
  ‘현(玄)자 호(虎)자’ 현호스님의 법명을 지니신 연유는 이렇다. 나에게는 노스님이 되시는 구산 큰스님께서 백운산 상백운암에서 수행하실 적에 검은 호랑이가 품에 안겨드는 선몽을 꾸신 후 제자로 입실(入室)한 인연으로 그리 부르셨다 한다.
 
  1961년에 출가하시어 제방에 참선 수행을 하셨고 당신의 스승이신 구산스님을 시봉(侍奉)하시면서 “바른 깨달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구도열을 다하셨다. 그리하여 효봉 → 구산 → 현호로 이어지는 근세의 법맥을 이어받으신 분이시다. 이사(理事)에 무애(無碍)하셔 수행과 사리에 밝으시니 당신의 스승인 구산스님의 마지막 유훈인 고려 시대 보조국사 이후 면면히 이어온 송광사 제8차 중창 불사를 이룩하여 한국불교사에 근대 불사의 전형을 이룩하셨다.
 
  나는 이런 나의 스승을 15년을 시봉하였다. 자타를 막론하고 나름의 최선을 다했던 나만의 충심 어린 시봉의 세월이었다. ‘받들어 모신다’는 뜻을 지닌 시봉이란 단순히 노역의 의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스승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삶의 매 순간 속에서 보고 들으며 삶의 가치관을 온전히 닮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특히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이는 전생부터의 선근(善根)이 있기에 옳은 것은 옳은 대로 그른 것은 그른 대로 옥석을 가려 스스로 바른 제 길을 간다.
 
  도를 깨달아도 전생의 습기는 쉽게 가시지 않기 때문에 천성의 그림자는 쉽사리 거둬지질 않는다. 그러므로 스승의 못마땅한 성향이 있다 하더라도 근본을 취할 뿐 지말(枝末)에 흔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뜻과 다른 이의 핍박마저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역행보살(逆行菩薩·악행의 업보를 널리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릇된 행동을 하는 보살)이라 생각하며 대반전의 마음으로 승화시키노라면 일체가 스승 아님이 없다. 그래서 스승을 섬긴다는 의미는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출가 후 심한 갈등이 닥쳤던 그때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정과 성을 다하고 나면 반드시 깨침이 있고 배움은 움트고 자라서 제 둥지를 만들게 되어 있다. 어찌 보면 무심히 15년을 보낸 듯하지만, 일상의 시봉 속에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 모름결에 배어드는 어묵동정(語默動靜)의 배움이 따른다. 이런 와중에도 특별한 돈오(頓悟)적 전기가 마련되기도 하며 ‘제자를 일깨워줌’에는 위기와 기회의 절체절명 순간에 스승의 보살핌이 발현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첫째는 간절한 구도심의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위법망구’ 정신이라고 일컫는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인 것이다. 이런 정성에 스승님의 지혜와 자애심은 깨달음의 각성을 이루게 한다.
 
  이러한 묘리를 선문(禪門)에서는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예를 들어 표현한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시기가 되면 스스로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가려는 쪼음(줄·啐)을 시작한다. 이때에 이르러서 어미 닭은 그 반응을 속히 알고서 밖에서 쪼아(탁·啄) 이내 부화의 완성을 이룩하듯, 스승과 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줄은 제자의 자질과 노력의 의미이고 탁은 스승의 능력과 자비의 영역인데, 공부의 성취는 이 이상적인 조화에서 이루어진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출가 후 10여 년 즈음에 심한 갈등이 닥쳐 몹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런 와중에 혼자만의 고민인 줄 알았는데 나의 스승은 금세 간파하시고 혼란스러움을 일깨워주셨다. 적이 알아차리고 구름이 걷히듯 마음이 잡히노니 “지즉각(知卽覺)이요 각즉탈(覺卽脫)이니라” 하시며 “자유로워지라”며 축원해주셨다. 진정한 스승을 모시노라면 평상심 속에 무덤덤한 일상처럼 흐를 수 있지만 스승의 자애로움이란 마음의 끈을 늘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 스승의 은혜가 지중한 것이다.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요즘의 세상 풍조에 다소 아쉬움이 있다면 전통적 사제 간의 정과 의리보다는 값싼 자본의 논리에 치우쳐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풍조에 서글픔마저 느낀다. 산문에서도 출가자의 감소를 인해 교구본사와 사찰에서는 출가 전 수행 과정을 거치는 행자(行者)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스승과 제자의 전통적인 수련 과정을 거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또 출가자의 연령이 높아져 초발심 때부터 세속의 묵은 때를 벗겨내기 어려워 스승의 가르침을 오롯하게 봉대(奉戴)하는 제자 또한 찾기 어렵다.
 
  바야흐로 현대의 우리 인류는 유사 이래 최고의 발전이라는 점진적 가속도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변해간다 하여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에 대한 ‘인간애’만큼은 변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며 미래에도 그럴 수밖에 없다.
 
  출가 전 학창 시절 불렀던 ‘스승의 노래’가 생각난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독자 여러분도 이번 스승의 날에는 꼭 스승님을 찾아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시길 권한다.⊙
 

  나의 스승은 軍大
  ‘가라 헌병 하사 때린 조갑제 병장’, ‘反骨 기자’가 되다

 
  ⊙ 3년 4개월간 공군 복무하면서 영어·일어 익히고, 인수인계의 중요성 배워
  ⊙ “시청 출입 기자는 시청 수위를 대하는 태도와 시장을 대하는 태도가 같아야”(신문사 편집국 간부)

 
  趙甲濟 조갑제닷컴/TV 대표·前 《월간조선》 편집장
 
젊은 시절 조갑제 기자.
  나는 1967년 3월 1일 공군 사병으로 대전의 훈련소에 161기로 입교했다. 두 달 예정의 신병 훈련을 받던 중 폐렴을 동반한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40일간 입원한 뒤 다시 훈련소로 돌아가 수료할 때는 163기였다.
 
  정체성(正體性)에 혼란이 생겼다. 계급보다는 기수(期數)로 서열을 따지는 전통이 강했던 공군인데 나는 162기보다 입교가 빨랐다. 따라서 군번도 빠른데 기수로선 후배였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넉 달간 관제병(管制兵) 교육을 받는데 내무반에선 수시로 부하를 혼내기 위한 집합이 있었다. 162기가 “163기 이하 집합”이라고 하면 나는 어디에 서야 하나? 바보처럼 물어볼 수가 없으니 기준은 내가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군대는 기수가 아니라 군번이다.”
 
  이런 나의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팩트가 있었다. 제대는 기수 순이 아니라 군번 순으로 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163기지만 군번은 입대할 때 받으므로 제대는 162기보다 먼저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62기가 집합시킬 때 나는 불참했다. “내가 군번이 앞서는데 부하처럼 줄을 서서 얻어맞을 순 없다”고 맞서니 아니꼽지만 어쩌겠는가? 하사관들도 나의 논리를 뒷받침해주었다.
 
  통신학교 교육을 받은 뒤 요격관제 특기병이 된 나는 동해안의 1219m 산꼭대기 레이더 사이트에 배속되었다. 여기선 아예 161기 행세를 했다. 먼저 와 있던 동기생들이 많아 내 편을 들어주었다. 나보다 먼저 이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162기는 졸지에 한 달 뒤에 들어온 나를 상사(上司)로 대우해주어야 했다. 육사 8기처럼 역시 동기생은 많아야 하는 것이다.
 
 
  ‘군대는 군번이다’
 
  1968년 1·21 사태로 군 복무 기간이 3년에다가 4개월이 연장되어 인생 항로에 변동이 생겼다.
 
  1970년 봄 제대(除隊) 말년, 후배들의 전입(轉入)이 줄어 고참 병장인 나도 보초를 서야 했다. 7, 8명의 사병이 헌병대에 모여 초소를 배정받는데 한 명이 늦게 나타났다. 헌병대 하사가 화를 내더니 옆줄로 서 있는 우리를 향해 “눈 감앗!” 하고는 주먹으로 뺨을 한 대씩 때리기 시작했다(일명 ‘아구창 돌리기’). 나는 맨 오른쪽에 서 있었는데 왼쪽으로부터 ‘퍽’ ‘퍽’ 터지는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덩치가 큰 그 하사는 하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162기 병장이었다. ‘그냥 한 대 맞아줄까?’라는 생각도 잠시 그가 내 앞에 섰다.
 
  “나는 맞을 수 없어. 내가 기수도 군번도 빠른데 후배한테 얻어맞으면 되겠어?”
 
  “뭐야, 이 새끼.”
 
  그의 주먹보다 내 주먹이 먼저였다(나는 대학교 때 권투 클럽 활동을 했고, 기자 초년병 시절에는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이란 책을 번역한 적도 있다). 내 주먹에 턱을 강타당한 그는 뒤로 나자빠졌다. 초병들이 착탄한 카빈을 어깨에 멘 상태에서 이런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헌병대장이 뛰어나와 나를 현장 체포, 신문실로 끌고 갔다.
 
  조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여기서도 ‘군대는 군번이다’는 점을 강조했다.
 
  “군인이 부하한테 얻어맞아서야 되겠습니까. 그것도 헌병 병장이 하사를 사칭, 선배 병장을 때리는데 맞고 있으면 됩니까. 정당방위입니다.”
 
  사람 좋은 헌병대장은 조서(調書)를 쓰다가 말고 가만있더니 “알았어. 가 봐”라고 했다. 헌병대 시설에서 헌병을 구타한 행위를 법으로 걸면 실형(實刑)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나는 보초를 선 뒤 내무반으로 돌아와 하사관들에게 ‘사고 보고’를 했다. 평소 헌병들의 횡포에 불만이 많았던지 “잘했다”는 반응이었다. 부대의 여론이 ‘가라(가짜) 헌병 하사 때린 조갑제 병장’ 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1970년 6월 30일 건강한 몸과 정신 상태로 제대할 수가 있었다.
 
 
  군대라는 인생대학
 
  이 부대에서 나는 미군과 함께 근무하면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익혔다(플로팅 보드에 항적을 그리는 일을 하다가 글자를 거꾸로 쓰는, 별로 돈이 안 되는 기술도 함께). 자위대와 연결된 통신망을 통하여 일본어 회화 연습도 했다. 군대는 나의 스승이었다. 나에게 군대는 ‘軍大(군대)’였다.
 
  제대 후 대학 3학년으로 복귀하지 않고 바로 신문사에 들어갔으니 나의 학력은 대학 중퇴(나중에 명예졸업장은 받음)지만 당시 재학생이 70만 명이던 ‘인생대학’에선 3년 4개월을 제대로 채웠다.
 
  2020년 4월 15일 자정 무렵, 한참 총선 개표가 진행 중인데 황교안(黃敎安) 미래통합당 대표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선거 패배의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한 뒤 국민들의 시야(視野)에서 사라졌다.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나는 대전 공군 병원에서 퇴원, 훈련소로 복귀하던 날을 추억했다. 폐렴과 늑막염을 함께 앓아 죽다가 살아난 나는 안온한 병원을 떠나 격렬한 훈련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번에 재발하면 골로 가는데’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두 달 배운 군인정신으로 병원 생활만큼은 깨끗이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날 새벽에 일어난 조갑제 이등병은 병실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환자들에게 “복귀를 명 받았습니다”라고 보고를 한 뒤 미지(未知)의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스물두 살 조갑제 이등병도 인수인계를 깔끔하게 하는데 대통령 권한 대행을 지낸 천하의 엘리트가 아직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도망가듯이 저게 뭐야’ 하는 의구심은 적중했다. 그는 1년 반 뒤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경선 무대로 복귀했는데 부정선거 음모론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 군대라는 스승으로부터 인수인계의 중요성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기사문은 짧고 정확하고 쉽게 써야”
 
  “제대 후 즉시 3학년으로 복귀한다”는 나의 인생 설계도는 김신조 때문에 제대가 늦어져 재조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교 졸업자가 아니라도 지원할 수 있는 신문사(부산의 국제신보)에 수습기자 시험을 쳐서 들어가 1971년 2월부터 지금까지 54년째 기사를 쓰고 있다. 수습기자 교육 첫 시간에 들어온 한 편집국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시청 출입 기자는 시청 수위를 대하는 태도와 시장을 대하는 태도가 같아야 합니다.”
 
  둘째 시간을 맡은 김규태 문화부장(시인, 작고)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좋은 기사문은 짧고 정확하고 쉽게 써야 합니다.”
 
  복문(複文)을 피하고 형용사와 부사 사용도 최소화하여 명사와 동사 중심의 철골(鐵骨) 같은 문장을 권했다. 기자가 가졌으면 하는 인간관과 문장론에 대한 두 분의 두 마디는 살아 있는 지침이 되었고, 지금도 이렇게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두 마디를 덧붙여서.
 
  “글은 짧고 정확하고 쉽게, 그리고 빨리, 많이 써야 한다.”
 
  54년 전 헌병대에서 ‘얻어맞느냐, 저항하느냐’를 고민했던 약 1분간은 나의 79년 생애에 결정적 의미를 지녔음을 그 후 알게 되었다. 부하에게 그냥 얻어맞는 편한 선택을 했다면 그 비겁함에 대한 자책(自責)이 나를 따라다녔을 것이고 ‘반골(反骨)기자 조갑제’는 없었을지 모른다.⊙
 

  자애로운 아버지 같으셨던 선생님
  “일본은 결국 망하겠구나. 도쿄도 공습을 받겠네”

 
  ⊙ “소생은 선생님의 학은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현승종 총리)
  ⊙ “선생님께서 학도병으로 소집되는 학생들을 위해 마지막 강의에서 뭐라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시는지요”

 
  정종휴 전남대 명예교수·前 주교황청 대사
 
프란치스코 교황과 정종휴 전 대사.
  구보 마사하타(久保正幡) 선생님과의 만남은 섭리였다. 1978년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이분이 가톨릭이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다. 서양법제사가 전공이신 선생님은 도쿄대학 법학부를 정년 하신 명예교수셨다. 일본에서 연락을 드렸더니 반가이 맞아주셨다. 마침내 1979년 2월 도쿄 요쓰야 조치대학(上智大學) 인근의 성 이그나치오 성당 앞에서 처음 뵈었다. 이후 그분은 세상을 뜨실 때까지 나에겐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구보 선생님은 1911년생이시고 2010년에 작고하셨으니 99세까지 장수하셨다. 요양원에 들어가시기 전 댁으로 전화를 드렸다. “정군인가. 정군…” 하시면서 감격에 겨워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구보 선생님께 듣고 배운 것은 산더미처럼 많다. 그분의 은혜는 대학 4년간 접했던 교수님들과의 통상적인 교류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다양했다.
 
 
  구보 선생님과 현승종 총리
 
구보 선생님.
  구보 선생님은 좋은 분들을 알게 해 주셨다. 전공이 민법이고 기타가와(北川)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된다는 것을 들으시더니 “민법이라면 (일본) 서쪽에는 교토대학 너의 지도교수지만 동쪽에는 도쿄대학 호시노 에이이치(星野英一) 교수가 있다”시면서, 구보 선생님 표현으로는 “‘호시노 군이 있으니까’ 이번에 온 김에 인사를 하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하셨다. 그래서 도쿄대학 법학부에 가서 당대 민법의 최고봉 호시노 에이이치 선생님도 뵈었다. 호시노 선생님이 주신 논문은 일본 민법전을 기초한 세 사람의 법 사상과 그 현대적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에 이런 주장이 있었다. 일본이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모토 아래 그것도 19세기 말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문화사적인 비극”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교토대학 대학원 집중강의(일종의 계절학기) 때 호시노 교수의 세미나에도 참가했고 그분의 논문도 수없이 읽었지만 이보다 큰 충격이 되는 가르침은 없었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화두로 남아 있고 일본 친구들과 일본 사회를 주제로 논쟁할 때 더러 주목을 받는 것도 그 덕분이다.
 
  구보 선생님은 온천으로 유명한 아타미에 ‘산골짝 오두막(空谷山房)’을 두고 계셨다. 선생님은 나를 이 별장으로 몇 번이나 불러주고 재워주셨다. 1950년대 전반 로마에서 2년 연구 중 익힌 솜씨로 스파게티도 만들어 주셨다.
 
  “스파게티는 살짝 덜 익어야 맛이 있는 거야.”
 
  어느 날은 “정군, 현승종 박사를 아느냐”시면서 편지 한 통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고려대 교수로 계시다가 성균관대 총장을 그만둔 현승종 선생님이 쓰신 것이었다. 완벽한 일어로 세로로 쓰인 달필이었다.
 
  “소생은 선생님의 학은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원대학교 비교법연구소에 오셔서 특강해주소서.”
 
  성균관대와 한림대 총장을 거쳐 노태우 정부 때 총리까지 맡으신 현승종 박사는 구보 선생님의 해방 전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집중강의 서양법제사 강의를 들었던 것이다.
 
  현승종 박사의 구보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은 남달랐다. 미국에 가기 위해서는 도쿄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던 1950년대에 “현승종 군은 홍고(도쿄대학 법학부) 연구실에 들러 ‘선생님, 못 뵙고 떠납니다’고 정중한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강원대 특강을 마치고 구보 선생님은 김포-후쿠오카 항로로 돌아오셨다. 이후 열차편으로 교토에 들러 성 비아토르 수도원에 짐을 푸신 후 교토대학 유학생회관에 사는 나의 숙소에 왕림하셨다. 선생님은 아내가 마련한 소찬을 드시면서 수십 년 만의 사제 간의 상봉에 관한 감개무량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방학 때 잠시 귀국했을 때 현승종 선생님께서는 나를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셨는지 모른다.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소분샤(創文社)
 
구보 선생님의 엽서.
  구보 선생님은 이토록 양심적인 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깨끗한 분이셨다. 그분의 성격은 그분의 학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선생님은 연구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프랑크 시대의 로마법과 게르만법’에 관한 일련의 연구로 두각을 나타내는 한편 ‘근본 사료(史料)’의 번역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1930년대부터 서양 중세법 연구의 기본 문헌인 《리부아리아 법전(Rex Ribuaria)》(1940년 출판)과 《살리카 법전(Rex Salica)》(1949년 출판)의 번역에 착수했다.
 
  일본이 총체적으로 ‘총력전’이니 뭐니 하면서 전쟁에 광분할 때였다.
 
  “총력전이라니. 총력으로 보면 미국이 일본보다 훨씬 더 센데…. 일본은 결국 망하겠구나. 도쿄도 공습을 받겠네.”
 
  역사가다운 혜안으로 동경에서 가마쿠라로 이사를 했다. 그러는 가운데도 머릿속에 서양 중세 부족 법전의 일본어 번역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젊은 학자는 중세 라틴어로 쓰인 수십 종의 사본을 일일이 대조해가면서 번역에 몰두했다. 이 가운데 《살리카 법전》은 1952년 일본 학사원(學士院) 상을 받게 된다.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학술상이 저서가 아니고 번역서에 주어진 것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상 이유서에는 구보 선생님을 ‘역자’라 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로 나타냈다. 그만큼 난해 난독의 작업이었고 번역과 함께 실린 ‘법전의 50종 이상의 사본과 계보, 해설, 주석, 소개’가 통상적인 법학과 역사학 저술을 훨씬 능가하는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보 선생님은 어느 날 나를 위 두 법전의 역서를 낸 소분샤(創文社)라는 출판사로 데리고 가셨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출판의 혼’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곳으로 철학·종교·역사와 법학·정치학 등 인문사회과학서의 명저 학술 출판으로 알려진 곳이다. 소분샤는 1960년부터 2012년까지 52년에 걸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전 39권)을 완간했다. 인구도 훨씬 많으나 가톨릭 신자 수는 40만 명이 채 안 되는 일본에서 신자 수 600만 명에 육박하는 한국에서보다 25년이나 더 일찍 《신학대전》의 출판이 시작된 것은 바로 소분샤 같은 출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분샤는 슬프게도 2020년 문을 닫았다. 소분샤가 1985년부터 추진해온 전 103권 《하이데거 전집》 출판은 50권 정도 나온 상태에서 도쿄대학출판부가 이어받았다. 선생님은 소분샤의 창립자와 편집장에게 날 소개해주셨다.
 
 
  “학문과 신앙에는 국경이 없다”
 
  그 인연으로 난 첫 저서 《한국민법전의 비교법적 연구(韓國民法典の比較法的硏究)》를 1989년 소분샤에서 내게 되었다. 그것도 세로 쓰기 조판으로, 내가 좋아하는 활판 인쇄, 게다가 금박 양장본에 케이스까지 딸린 것으로, 지금 봐도 멋있다. 저서의 서문 맨 뒷 줄엔 이렇게 썼다.
 
  “끝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날 친히 이끌어주신 분은 도쿄대학 명예교수 구보 마사하타 선생님이다. 이 기회에 구보 선생님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리고 싶다.”
 
  책을 보내드렸더니 선생님은 “밖에서 돌아오시더니 신발장 위에 놓인 소포 우편물을 보시고는 신발을 벗다 말고 열어보시고 기뻐하셨다”고 훗날 사모님이 전해 주었다.
 
  구보 선생님은 나에게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들의 세계, 법학계 전반의 내부 사정, 일본 사회의 빛과 그림자, 가톨릭 교회 등등. 그분한테 아니면 어디서 그렇게 들을 수 있었겠는가. 1983년에 뵈었을 때 선생님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던 제자들 모임에 초대받으셨다고 했다. 대장성 차관을 지낸 일본 국영철도(國鐵) 총재가 말을 꺼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학도병으로 소집되는 학생들을 위해 마지막 강의에서 뭐라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시는지요.”
 
  “글쎄. 내가 어찌 그걸 다 기억하겠나.”
 
  “학도병으로 나가는 학생들에게는 누구나 다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빈다 했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군의 무운(武運)과 더불어 문운(文運)을 빈다.’ 선생님의 그때 그 말씀을 저희 모두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습니다.”
 
  선생님을 뵐 때는 더러 선생님의 저작물에 한마디 써주시라 했다.
 
  “학문과 신앙에는 국경이 없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Historia iuris super qua fabricatur scientia, prudentia et sapientia iuris.(법의 역사는 법의 학식, 지식, 지혜의 토대)”
 
  “역사를 배우는 궁극적 의의는 인간사에 변하는 것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
 
 
  선생님이 남기신 무서운 말씀들
 
  그런데 구보 선생님께서 내게 해주신 가장 무서운 말씀은 다음과 같다.
 
  “민법·형법·소송법 같은 실정법학자의 연구 생활은 잘못되어도 한계가 있다. 어차피 실정법이라는 토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토대가 없는 이론법학자(법철학, 법사회학, 법사학, 인권법, 젠더법 등)의 연구 생활은 잘못되면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만다.”
 
  “저술 편수가 많고 적고, 학계의 존경을 받고 말고, 연구비를 많이 받고 말고, 책이 잘 팔리고 말고와 그 학자의 연구 생활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현대 법학의 세계적 흐름을 보면 그럴듯한 오류일수록 환영받는 측면이 있다. 구보 선생님의 40년 전 말씀은 진정 예언적이었다.
 
  선생님의 감화를 받은 내가 선생님을 닮지 못한 것은 분명 나의 그릇의 한계이다. 하지만 내가 비록 민법학자로서의 업적은 빈약하지만 선생님 같은 분의 영향이 있었기에 ‘자연법’에 대한 관심을 더욱 키워올 수 있었음을 나는 복되게 생각한다.⊙
 

  미국에서 만난 나의 선생님들
  “이제는 교수님 대신 선생님으로 불러도 될까요?”

 
  ⊙ 2019년 외조부 나운영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 공부하며 만난 로버트 프로바인 선생님
  ⊙ 유학으로 미국에 온 지 35년… 선생님 복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

 
  박소현 미국 휘턴 칼리지(Wheaton College) 음악원 교수·바이올리니스트
 
박소현 교수와 로버트 프로바인.
  “우리 집에 돈은 없어도 너는 선생님 복은 많아.”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선생님 복? 내가 살고 있는 미국 땅에서는 모르는 개념이다. 스승의 날조차 없는 미국에서 선생은 직업에 불과하니까.
 
  스승의 날을 맞아 되돌아보니 정말 많은 선생님이 나를 가르쳐주셨다. 열 살이 되기 전의 선생님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박사 학위를 마치고 학생의 신분을 벗기까지 바이올린 선생님만 여덟 분이다. 그분들의 인내와 사랑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나는 바이올린 선생이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요즘도 레슨 도중에 불쑥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그렇게 열심히 설명해주시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기도 한다.
 
  바이올린 공부를 하기 위해서 미국에 유학을 왔지만 실기 외에도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선생님들이 계셨다. 1989년 가족 없이 볼티모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을 때 나는 영어를 거의 못 했고, 교장 선생님의 사모님(Jan Smith)께서 3년 내내 매주 서너 번씩 나와 책상에 나란히 앉아 단어 하나하나를 가르쳐주시며 격려해주셨다. 내가 엉성한 영어로 어려움과 고민을 말씀드리면 집중해서 끝까지 다 들어주셨고, 때로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분의 눈빛, 음성, 미소에서 충분히 느끼고 배웠다. 아무 상관없는 타국의 학생도 이렇게 변함없이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다는 것을.
 
 
  국악책 겉표지의 이메일 주소로 연락해 만남 성사돼
 
  대학에 들어가서 박사 과정 마치기까지 10년 동안 클리블랜드 음악원에서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중에 음악이론 교수였던 딘 가이(Dean Guy) 선생님은 맹인이셨는데 음악이론을 좋아하던 나를 조교로 써주셨다. 늘 반쯤 찡그린 표정이셨던 가이 교수님은 내가 절대음감 때문에 시창 청음 시간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도록 모든 가락을 조를 바꾸어 시창하게 하시고 과제를 따로 더 주셔서 내가 반드시 다른 학생들만큼 노력하도록 하셨다.
 
  수업 전에 강의실 문 밖에 서계시며 멀리서부터 누가 걸어오는지 알아맞히시던 교수님. 장애인이었지만 아무에게도 꿀림 없이 늘 공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본을 보이셨고, 나는 수년 동안 가이 교수님 곁에서 배웠다.
 
  나의 선생님 복은 내가 대학에 재직하면서도 계속되었다. 특히 음악학 교수와 음악이론 교수들 중 부모님이나 삼촌뻘 되는 분들이 풋내기 선생이었던 나를 넓은 마음으로 이끌어주셨다. 대학 안에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젊은 선생으로서 비슷한 나이의 대학원 학생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또 나의 연습과 공부는 어떤 모습으로 계속해야 하는지 등, 이 중 음악이론과 작곡을 가르치던 존 바우어(John Baur) 선생님은 음악은 45세쯤 되어야 뭔가 알고 제대로 공부하게 된다며 숨 가쁜 일상 안에서 연습시간 부족으로 좌절하던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다. 정년퇴임이 가까워 오는데도 한결같이 가벼운 발걸음과 시원한 웃음소리로 나를 반겨주시니 나도 끝까지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며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올해 나는 미국 대학에서 가르친 지 23년째이다. 이 글을 쓰면서 현재 나에게 가장 소중한 선생님이 누군가 생각해보면 로버트 프로바인(Robert C. Provine) 교수이다.
 
  나는 외할아버지 되시는 작곡가 나운영(羅運榮·1922~1993년)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1955)를 좀 더 잘 알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으로 2019년에 국악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몇 달 만에 판소리, 산조, 시나위, 창극 등 우리 전통 민속음악에 반해버렸는데 그때만 해도 내 주위에 국악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더군다나 서양 악기로 전통산조를 연주한다는 아이디어를 이해하거나 서양음악만 배워온 내가 국악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길이 없었다. 2020년 초에 답답한 마음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이혜구(李惠求·1909~2010년) 박사가 저술한 국악에 관한 책 겉표지에 작게 써 있는 번역자 프로바인 교수를 인터넷에서 찾아 이메일로 연락을 드렸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에 살면서 전통음악에 매료되어 이혜구 박사와 공부하고 김병섭 명인의 개인장고놀이를 몸소 배운 후 일생을 한국음악을 알리는 데에 바친 프로바인 교수는 미국 음대 도서관이라면 모두 소장하고 있는 《갤런드 세계음악백과사전(Garland Encyclopedia of World Music)》 중 동양음악 볼륨, 특히 한국음악 부문 전체를 편집하셨다. 이렇게 서양음악을 전공했지만 누구보다도 한국음악을 귀히 여기고 깊이 연구하신 프로바인 교수를 알게 돼 국악 연구와 관련한 나의 고민거리를 모두 해소할 수 있었다.
 
 
  나의 선생님 복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
 
  끊임없는 나의 질문에 관한 온갖 자료를 보내주시고 내가 쓴 글들을 자세히 검토해주셨다. 또 산조를 배우러 한국에 갈 때마다 내가 겪은 여러 가지 문화적 차이와 어려움에 대해 그때그때 상담해주시고, 나의 크고 작은 음악적 깨달음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셨다. 나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분이다. 이렇게 훌륭하고 지식 많은 분이 어쩌면 이리도 겸손하고 자상하실까. 통 이해가 안 된다.
 
  프로바인 교수를 알게 된 지 2개월 후에 교수님 대신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되겠느냐고 여쭤보았다. 한국어는 물론 호칭의 뉘앙스를 잘 아시니 반겨주셨다. 자신의 스승이신 이혜구 박사도 가깝게 지낸 제자들에게는 “선생님”이었다며 선생님이라고 불러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유학으로 미국에 온 지 35년. 나는 전통음악 연구를 통해 내가 진정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우리말로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미국인 스승을 만났다. 나의 선생님 복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나 보다. 이 세상에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다. 2024년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나를 정성으로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내 마음의 심층에 계시는 이해인 수녀님
  어머니 잃고 우는 어느 청년을 위해 기도해주신…

 
  ⊙ 일면식도 없던 수녀님께 무작정 편지를 쓰던 유학 시절
  ⊙ 손수 키운 꽃으로 만든 책갈피를 선물로 보내와

 
  허창덕 영남대 국제교육부총장·사회학과 교수
 
허창덕 교수와 이해인 수녀님.
  몇 해 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때 미국에서 이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발송인은 내가 모르는 분이었다. 그런데 이메일 제목이 ‘허창덕 선생님? 혹시 이해인 수녀님이 찾으시는…’이었다. 평소에 외국에서 오는 스팸메일이 워낙 많다 보니 보통은 바이러스를 염려하여 낯선 이메일은 잘 열어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인 수녀님을 언급하기에 ‘이게 뭐지?’ 하며 열어보았다. 내용은 이랬다.
 
  “본인은 미국 애틀랜타에 살고 있는 동포이며, 얼마 전 한국에서 이해인 수녀님을 만났는데 수녀님께서 오래전에 미국에서 편지를 보내곤 했던 허창덕이라는 사람을 한 번 찾아봐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선생님의 이름과 이메일을 찾게 되었는데, 혹시 수녀님이 찾으시는 그분이 맞다면 자기에게 연락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당장 그분께 내가 그 사람이 맞다고 답장을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녀님과 직접 통화를 하게 되었고, 카톡을 연결하고 요즘은 가끔 찾아뵙기도 한다.
 
 
  아내의 눈물을 보는 그 순간
 
  나이 육십이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살아왔다. 하지만 같은 물일지라도 흐르는 수심이 다르듯이, 지금껏 내가 만나온 많은 인연 중에 수녀님은 가장 심층에 계시는 분이다. 그 심층의 자리는 나에게 곧 어머니의 자리이다.
 
  미국 유학 중이던 1997년 2월, 어머니께서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만 나이로 59세셨다. 보통의 모자 관계보다도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더욱 각별했다. 자수성가한 시부모님 밑에서 시집살이하면서 아들 다섯을 키우는 일이 너무 고되었던 어머니는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셨다. 어머니의 유일한 즐거움은 어린 나를 붙들고 울거나 대소사를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나는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며 희망을 주는 딸 같은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췌장암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느꼈다. 나는 급히 귀국했고,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만한 한약재를 찾아 전국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잠든 어머니 곁에서 숨죽여 울고 있던 나를 보시곤 어머니도 함께 우시면서 말씀하셨다.
 
  “앞으로 너는 울지 마라, 네가 울면 엄마도 운다!”
 
  나는 어머니께 오늘만 울고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어머니를 산소에 모실 때까지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렇게 약속하고 어머니를 보내드렸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직후 이젠 어머니를 다신 볼 수 없단 생각에 그동안 억눌러왔던 눈물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만 뜨면 울었다. 6개월을 내내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오늘도 우느냐?’며 내 방에 들어서던 아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내의 눈물을 본 그 순간, 갑자기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아, 돌아가신 엄마 때문에 살아 있는 아내를 울리고 있구나!”
 
  그날로 나는 울음을 멈추었다. 아내를 울리는 것을 어머니가 원치 않으실 거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아픔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어머니께 못다 한 마음의 말들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그때 나는 대학 시절 읽었던 수녀님의 시집과 글들을 생각했고, 일면식도 없던 수녀님께 무작정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조금은 쑥스럽고 부끄러운 표현들과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을 수녀님께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것 같다. 수녀님은 이런 나의 일방적 편지에도 묵묵히 답장을 해주셨고, 손수 키운 꽃으로 만든 책갈피를 선물로 보내주시곤 했다. 수녀님의 따뜻한 답장은 천붕의 아픔을 견뎌내는 그 시절에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불쌍한 학생을 잊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주신 수녀님
 
  수녀님과 나의 편지는 그 이듬해 큰아이가 태어나고, 박사 자격 시험이 임박할 때까지 이어졌다가 어느 순간 끊어졌다. 수녀님의 명성이 드높아진 데다가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일상의 무게가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녀님은 늘 내 가슴에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셨다.
 
  수녀님을 만나 뵙기 위해 성베네딕도 수녀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해인글방의 한 칸을 가득 채운, 많은 독자의 정성스러운 편지들을 볼 수가 있었다. 그 많은 편지들을 보면서 무려 25년 전에 두서없는 편지를 보내던 그 학생을 잊지 않고, 먼저 찾아주신 수녀님이 더욱 고맙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오월은 감사의 달이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도 기도가 된다. 어머니를 잃고 우는 어느 청년을 위해 25년 동안 잊지 않고 기도해주신 클라우디아 이해인 수녀님께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커서 만난 세상의 아버지들
  “경영학과에 가거라. 아버지도 안 계시고 동생이 넷이나 되잖니”

 
  ⊙ 쌀가게 아저씨가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니 넘어져도 다치지 않았고…
  ⊙ 사람이나 나무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잘 자라

 
  윤동한 한국콜마(주) 회장·(사)서울여해재단 이사장·경영학 박사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내게 인연은 빛과 같다. 빛은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듯 인연이 그렇다. 산에 가면 산에서 만난 인연이 있고 바다에 가면 바다에서 만난 인연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사실 내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인생을 살면서 만난 크고 작은 ‘인연의 합’이 만들어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나 소목장 장인처럼 처음부터 큰 인연에서부터, 말 그대로 옷깃만 스치고 지나갈 수도 있었으나, 한때 내 인생에 머물러 따뜻함을 안겨준 작지만 잊을 수 없는 인연들까지 말이다.
 
 
  이름과 이름값의 효과
 
  “윤강호”
 
  어릴 적 나의 이름이다. 하루는 밀양 외할머니가 집에 오셔서 강호야 하고 불렀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자 ‘강호’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 오 남매를 남겨 두시고 사십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급서는 친가 못지않게 외가에도 엄청난 재앙이었다. 외가 쪽 어른들은 내가 이 집의 장남이니 ‘강한 호랑이’처럼 자라야 한다는 뜻에서 ‘강호’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우리 이름에는 이름값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던데 강호라는 이름처럼 나도 단단하게 자랄 수 있었으니, 나의 건승을 빌어준 집안 어른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집의 지붕 역할을 하던 아버지의 빈자리는 담임 선생님에게도 커 보였던 것 같다.
 
  내 꿈은 어릴 때부터 역사 선생님이 되는 거였다. 대학에 가면 사학(史學)을 전공할 거라고 일찌감치 진로를 정했으니 담임 선생님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학과보다 경영학과에 가거라. 아버지도 안 계시고 네 밑으로 동생이 넷이나 되잖니. 어머니와 외할머니까지 있지 않으냐. 잘살아야 한다.”
 
  그때 처음으로 ‘이 집의 가장(家長)이 나구나’라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어쩔 수 없이 역사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했다. 나중에 ‘기업가’가 되기로 새로운 꿈을 갖게 되면서 경영학과로 가라고 했던 선생님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수십 년이 훨씬 지난 일인데도 마치 어제 있었던 일 같다.
 
 
  “넘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라”
 
  이름을 지어준 외가 어른들처럼 ‘그때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곤 하는, 커서 만난 세상의 아버지들은 또 있다.
 
  가장 먼저 쌀가게 아저씨를 들 수 있다. 중학교를 거쳐 대구에서 진학했는데 대구 아이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골 출신이라 나는 몹시 충격이 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구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자전거 도시였다.
 
  나는 스스로의 적응 과제로 자전거 타기를 정했다. 그때부터 머릿속으로 ‘어떻게 하면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마침 동네에 쌀가게가 있었는데 자전거로 쌀 배달을 했다. 우선 주인아저씨와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고 가면서 아저씨가 배달하는 모습을 보니 한 손으로는 핸들을, 다른 한 손으로는 쌀을 잡고 가파른 골목을 힘겹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쌀가게로 달려가 자전거를 밀어주며 아저씨의 쌀 배달을 도왔다. 몇 번 밀어주니 주인아저씨가 “왜 밀어주는 거니?”라며 말을 걸어왔고 나는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뜻이 갸륵했는지 아저씨는 자신이 뒤에서 잡아줄 테니 자전거를 타보라며 본격적으로 자전거 수업을 해주셨다. 긴 골목을 삐뚤삐뚤하게 다니니 아저씨가 “넘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라”라며 타는 법을 알려주셨다. 아저씨가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니 덕분에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자전거도 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시골에서 유학 온 열 명의 친구 중 내가 제일 먼저 자전거 타기를 할 수 있었다. 이때가 중학교 1학년이었다. 자전거로 인연을 맺은 쌀가게 아저씨는 훗날 농협에 취직하기 위해 신용보증인이 필요했을 때도 망설임 없이 나서주셨다. 가족이 아니고는 보증을 해주지 않던 시절인데도 아저씨 덕분에 무사히 첫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돌산에서 잘 자라는 오동나무처럼
 
  두 번째 인연은 건설 현장에서 만난 김 목수 아저씨였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계속 전액 장학금을 받았는데 2학년 때 반만 받게 된 적이 있었다. 학비를 메우기 위해 주택 건설 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대구에는 목조 주택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아파트는 거의 없었다. 나는 낮에는 잡무를 돕고 해 질 무렵 퇴근하여 야간대학에 개설된 과목을 들은 후, 다시 건설 현장으로 돌아와 야간 경비를 하였다. 동녘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김 목수 아저씨가 출근했는데 요즘 말로 현장소장이었다. 늘 대나무 도시락을 건네며 고학생이었던 내 끼니를 챙겨준 고마운 분이었다. 내가 대학생인 것을 안 다음부터는 서문시장에 가서 못이나 철물을 사 오라는 쉬운 일만 시켜주었다. 그때마다 천천히 와도 된다며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일하랴, 공부하랴 쉽지 않은 시간을 아저씨 덕분에 잘 버틸 수 있었다.
 
  세 번째 인연은 진주에서 가구를 만드는 소목장 장인(匠人)이다. 나무의 나이테에도 동서남북이라는 방위가 있다. 나무 밑동을 잘라 단면을 보면 정중앙을 목재의 가운데라고 해서 수심(樹心)이라고 한다. 잘 보면 이 수심을 중심으로 그려진 나이테의 간격이 동일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햇빛을 얼마나 많이 받느냐에 따라 성장에서도 차이가 난다. 보통 나무들은 남쪽의 나이테가 북쪽보다 길이도 길고 면적도 넓다. 남쪽 면이 북쪽 면보다 햇빛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나무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잘 자라는 것은 똑같은가 보다.
 
  그런데 돌산에서 자라는 오동나무는 나이테가 동서남북 모두 균일하다. 골고루 성장한다는 증거다. 장인의 말로는 장식장을 만들 때 액세서리가 붙는 부위에는 가장 단단한 목재를 써야 하는데 돌산에서 자란 오동나무만 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게 돌산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오동나무처럼 되라는 뜻에서 석오(石梧)라는 호를 지어주셨다. 이 호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최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고 신용 보증까지 서준 쌀가게 아저씨가 10대 만난 아버지였다면 아들 대하듯 현장에서 알뜰살뜰 챙겨준 김 목수 아저씨는 20대 만난 아버지였다. 석오라는 호를 지어준 소목장 장인 역시 어릴 적 ‘강호’라는 이름을 지어준 외가 어른들처럼 건승을 기원해준 고마운 인연이다. 모두 작은 인연이지만 소중한 인연들이다. 큰 인연을 만나 한번에 인생이 바뀌는 일보다 작은 인연들이 누적되어 인생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공부는 독하게 하는 것’이라 가르친 조재관 교수님
  학창 시절 졸음을 쫓기 위해 면도칼로 손가락을 베어 가며 공부

 
  ⊙ 유학 시절에는 삭발하고 영어 발음 장애 극복하려 입에 작은 조약돌 물고 다녀
  ⊙ 학생들에게 ‘해도를 펴라’는 자작시 읊어주며 야망 북돋아… 묘비엔 ‘태평양의 사나이 여기 잠들다’

 
  신복룡 前 건국대 석좌교수(정치학)
 
신복룡 교수.
  강증산(姜甑山) 선생은 《오훈회(五訓誨)》를 통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비빌 언덕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神)은 늘 그리 박절하지 않다. 일생에 언제인가는 스쳐가듯 의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와의 인연이 이어지면 그는 행운을 잡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분이 있었는데, 건국대학교 조재관(趙在瓘) 교수님이다. 한국전쟁 수복 직후인 1957년, 나는 15세에 상경하여 신산(辛酸)한 고학(苦學) 생활을 하다가 1961년에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 당시에 꿈이 있었다면 사치였을 것이다. 나는 강의실에서는 늘 왼쪽 앞자리에 앉았다.
 
  1962년, 국제정치학 시간에 조재관 교수님은 카(E. H. Carr)의 《위기의 20년(Twenty Years Crisis, 1919~1939)》(1961)으로 원서 강독 겸 국제정치학 강의를 하셨는데, 그의 해박한 지식과 학문에 대한 열정, 그리고 조국을 위한 꿈과 야망에 학생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분으로부터 ‘공부는 이렇게 독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월간조선》으로부터 ‘스승의 날’을 맞아 기억에 남는 스승에 대한 글을 요청받았다. 그분의 4주년 묘비 제막식(1985)에 조사(弔辭)를 겸하여 쓴 〈행록(行錄)〉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여기에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감히 이 글로 요청받은 글을 갈음하고자 한다.
 
 
  〈함안공 천석 조재관 박사 행록(咸安公 天石 趙在瓘 博士 行錄)〉
 
  선생께서 가신 지 2년여가 지나 함안 조씨(咸安 趙氏) 문중의 청이 있기에 불초 후학이 부끄럼을 무릅쓰고 붓을 들어 선생의 행록을 적어 후생에게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창천(蒼天)은 유유(悠悠)하여 선생이 떠난 하늘에 구름만이 떠돌고 남편과 아버지와 스승을 잃은 사람들의 오열(嗚咽)은 허공에 헤매니 가신 님의 덕을 추모함인가, 아직은 유명(幽明)의 정을 끊지 못함인가? 하늘은 어찌하여 선생께 그만한 재주와 경륜을 주었으면서도 이를 펼 잔명(殘命)은 허락지 않았는가? “한번 태어남이 뜬구름 이는 것과 같고, 한 세상 떠나감이 뜬구름 사라지는 것 같다”(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涵虛)고 하나 그의 한평생의 태어남과 삶과 죽음이 어찌 이토록 기구했을까?
 
  선생께서는 망국의 설움이 짙어만 가는 1930년에 경상남도 함안군 가이면 도항리에서 부친 순규공(順奎公)과 모친 인동 장(張)씨 무옥(武玉) 여사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효성스러웠고 호학(好學)했고 나라를 걱정하며 자랐다. 해방과 더불어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했을 때만 해도 선생은 한낱 꿈 많은 소년이었다.
 
  1950년에 농촌 출신의 몸으로 연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젊음의 날개를 펼 무렵 그가 그토록 짙게 사랑했던 조국은 전화(戰禍)에 휩싸였고 선생님은 부산 피란 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이때 선생은 푸른 파도가 굽이치는 항도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언제인가 당신의 생전에 태평양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때가 오면 자신이 그 대양의 등대가 되리라 결심했다.
 
  낮에는 학비를 벌고 밤에는 글을 읽으니 그 피곤함이 오죽했으랴마는 몰아치는 잠을 쫓기 위해 면도칼로 손가락을 베었고 그것이 덧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시 호롱불에 손끝을 지졌으니 우리는 선생의 행적에서 지난날 춘추전국시대의 소진(蘇秦)이 입신양명을 위해 책을 읽을 때 졸음을 쫓고자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종지뼈까지 피가 흐른 고사[蘇秦刺股]를 생각게 한다.
 
  각고의 2년 세월이 흐른 후 대학 3학년의 한창 즐길 나이에 고등고시[외무]에 합격했으나 세속의 명리도 뿌리치고 출사(出仕)를 단념한 채 경신(儆新)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학비를 조달하며 학부와 동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1958년에서부터 정치대학(현 건국대학교의 전신)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1961년에 교수의 직분을 맡았으니 그때 선생의 수(壽) 32세였다.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나의 출발이다’
 
조재관 교수.
  대학에서의 선생의 강의는 학문 이상의 것이었다. 때로는 인생을 담론했고 예술을 노래했다. 한 떨기 꽃잎 속에서 우주의 신비를 천착하려 했으며 야망의 시(詩)를 읊기도 했다. 개강 무렵이면 선생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자작시(自作詩)를 들려주었다.
 
  해도(海圖)를 펴라
  진주처럼 반짝이는 무수한 항구들
  창문을 열어다오, 미지의 애인이여
  지구의 혈맥처럼
  줄기차게 흐르는 해류를 타고
  아!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나의 출발이다.
 
  닻줄을 감아라
  납덩이 같은 저기압에 바람이 일면
  이랑이랑 뱃놀이는 파도를 갈고
  푸르디푸른 하늘은
  내 가슴에 부딪혀 무너져 내리나니
  아! 오늘은
  나의 젊은 날의 출항이다.

 
  그 시절이 그러했듯이 선생님의 30대도 간고(艱苦)했다. 신촌 봉원사(奉元寺)의 범종(梵鍾) 소리를 들으며 산비탈 오두막에서 그는 날 새는 줄 모르며 집필했고 이 당시에 남긴 《국제정치학》과 《여론선전개설》은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나의 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나이 서른일곱 살이 되던 1966년 자신의 학문을 더 넓히고자 홀연히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기약 없는 유학길의 첫 도착지인 네덜란드에 내렸을 때 그의 수중에 남은 것은 단돈 50달러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태평양을 바라볼 수도 없었고 그 꿈을 키울 수도 없었다. 네덜란드에서 1년을 보낸 선생님은 1967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버클리)으로 건너갔다. 이때의 유학 생활은 지금도 전설처럼 후학들의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이발 비용을 아낀다는 뜻도 있으려니와 학문의 일가를 이루지 않고서는 고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에서 삭발했고, 영어 발음의 장애를 극복하고자 작은 조약돌을 물고 다녔다. 밤이면 책을 읽는 틈틈이 태평양의 지도와 “태평양(太平洋)의 등대(燈臺)”라고 쓴 혈서를 응시하며 내일의 야망을 불태웠다. 이런 절차탁마(切磋琢磨)의 6년 세월이 흐른 뒤 1972년에 〈공산주의의 간부 훈련 제도의 비교 연구〉라는 논문으로 명문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약돌로 진주를 빚으려고…’
 
  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귀국한 선생은 건국대학교 교수로 복직되어 학생처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그가 귀국하여 처음으로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학생들은 기립 박수와 함께 꽃다발을 그의 품에 안겨줌으로써 이 전설적인 스승을 맞이했다. 그 뒤 선생님은 한국국제정치학회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슬프다. 하늘은 그의 재주를 시샘했음인가? 선생은 1980년부터 몸이 야위고 탈진해갔다. 몸에 이미 암이 번지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음인지 선생님은 나를 불러 세상을 떠난 뒤 이렇게 묘비명을 쓰라 이르셨다.
 
  여기 조약돌로써 진주를 빚으려고
  몸부림치며 살다 간
  태평양의 사나이 잠들다

 
  유언을 마치신 다음 선생님께서는, “이제 나이 50이 되니 지천명(知天命)이라던 공자(孔子)의 뜻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암의 확진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나 주위의 기도에도 보람 없이 선생은 더욱 쇠진해갔다. 선생은 이겨야 한다고, 그리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당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의 신심 속에 자신의 종말을 맞이하고자 했다. 그는 교회의 장로가 되자 나를 다시 불러 예전에 일러준 묘비명에 “주님의 사랑 안에”라는 구절을 첨가하도록 부탁했다.
 
  자신의 운명이 가까워져 옴을 안 선생님은,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유언의 형식으로 마지막 강의를 한 것과 같이 자신도 못다 한 얘기를 전하리라고 생각하고 후학들을 머리맡에 불러 《논어》와 플라톤을 강의하면서 이 자리를 천석학원(天石學院)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태평양의 등대가 되리라’
 
  1981년 6월이 되자 선생님은 보고 싶은 얼굴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으고 학문과 삶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6월 13일, 건국대학교 강당에 500여 명의 동학(同學)·친지·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생님은 최후의 강의를 마친 뒤 사랑하는 아들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병세는 악화했다. “주여! 저 사람 대신 저희를 부르소서” 하며 기도하는 교우들의 흐느낌을 들으며 1981년 6월 17일 오전 1시에 사랑하는 아내 김은경 여사, 장남 창석(敞錫) 군, 장녀 혜영(惠英) 양, 차녀 혜선(惠善) 양의 손목을 잡고 “너희와 더불어 더 살고 싶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운명하시니 향년 51세였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지만 하늘은 어이하여 이토록 야속스러운가? 하늘나라에는 국제정치학 교수를 다급히 뽑아야 할 이유도 없거늘, 어찌 그리 일찍 부르셨는지 야속하다. 태평양의 등대가 되리라던 그 야망과 의지는 어디로 갔으며, 동서고금의 역사와 철학을 강론하던 그 박학함은 어디서 볼 수 있으며,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을 사랑했고, 셰익스피어를 되뇌던 그 예술은 어디로 갔으며, 만능 스포츠의 육신은 어디로 간 채, 천석 조재관 선생은 이토록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가?
 
  교수님이 물려주신 유품 “배운 사람이 더 배신한다”는 말씀이 가슴을 찌른다.
 
  엎드려 울며 후학
  조재관 교수님
 
  신복룡 삼가 지음(伏地流涕 後學 申福龍 謹撰)⊙
 

  중학생 시절의 스승들
  “내 사랑하는 말코, 고추, 코주부, 나이롱, 땅콩 선생님”

 
  ⊙ 뉴욕 맨해튼 파크 애비뉴 56번가 화랑에서 극적 상봉한 미술 선생님
  ⊙ “어린 양떼 여기 모여 회오의 잔 드리오니 / 편이 가시오”

 
  박찬성 수필가·前 한국산업은행 이사 대우
 
박찬성 수필가.
  중학생 시절 내 고향 영주 땅은 큰 물난리를 겪었다. 1961년 7월 어느 날 새벽에 무려 300mm의 물 폭탄이 쏟아졌다. 소백산 원류에서 발원한 사나운 물결이 읍내를 휘감아 돌던 서천(西川)의 허술한 제방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삽시간에 읍내 전체가 수면 아래로 사라졌고 며칠 후 물이 빠져나간 뒤의 모습은 폐허 그 자체였다.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빠른 정부의 복구 지원과 국민들의 따스한 구호의 손길은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던 읍민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듬해 새로 건설한 공설운동장에서 수해 복구 준공식이 열렸다. 키가 작달 만한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무개차(無蓋車)를 타고 손을 흔들며 입장했고 그 뒤로 수많은 각계의 고위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에는 수해 복구 작업을 총지휘한 이성가 육군 소장과 버거 주한미국대사도 있었다. 유독 대사의 멋진 흰색 카우보이 모자가 한 시골 중학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중학생 친구들과 함께 장내를 빼곡히 메운 환영 인파의 틈에 끼어 있었다.
 
  우리 집은 읍내에서 산 하나를 넘어 북쪽으로 벗어난 외곽 지역이어서 다행히 물난리는 피했지만 남쪽 끄트머리의 학교까지는 근 이십 리 길이었다. 다리가 성하지 않은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사 주신 검은색 목달이구두를 신고 통학했다. 군화를 재생한 조악한 사제품 구두였지만 당시엔 귀한 물건이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니 지금도 온화한 미소로 또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스승들이 있었다. 그땐 선생님마다 별명이 있었는데 거기엔 얄개들의 장난기와 애정이 서려 있었다.
 
 
  검은색 목달이구두 신고 통학하던 그 시절
 
  힘써 공부하던 과목은 역시 영어였다. 우윳빛 얼굴에 이국적인 풍모의 김영철 선생님의 별명은 ‘말코 선생님’이었다. 큰 코를 실룩이며 내는 그의 미끄러지는 듯한 기름진 영어 발음을 거울 앞에서 수없이 흉내 내어 봤지만 뻣뻣한 나의 혀는 순치될 줄 몰랐다. 3학년 때의 김상철 선생님은 길이가 자반(尺半)은 됨직한 반질반질한 목봉을 항상 손에 들고 다녔다. 매 시간 학생들의 머리에 교육봉을 올려놓고 단어나 구문 외우기 숙제를 체크했다. 즉답을 못 하면 손바닥을 내놓아야 했다. ‘고추 선생님’의 눈물이 쏙 나올 정도의 매운맛 목봉에는 선생님의 제자들에 대한 열정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특별히 좋아했던 과목은 미술이었다. ‘코주부’ 오세영 선생님은 한때 나에게 화가의 꿈을 갖게 해주었다. 선생님은 야외 사생 시간에 내가 그린 수채화를 놓고 반 친구들 앞에서 극찬했는데 그 칭찬 한마디가 칠순에 이르도록 내 기억에 살아 있다.
 
  그러고 보면 자라나는 세대에게 칭찬이란 아낄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산업은행 뉴욕 현지 법인에 근무하던 1990년대 초 그러니까 중학교를 졸업한 후 30년 만에 뉴욕 맨해튼에서 나는 선생님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파크 애비뉴 56번가 화랑에서 열린 고향 선배 이두식 교수의 개인 전시회에 갔을 때였다. 선생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단초는 그분 특유의 끝이 봉긋이 솟은 ‘코’ 덕분이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객지인 작은 시골 중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시작한 선생님이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또 재미 한인 화가협회장으로 활동하던 모습은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국사 선생님 또한 잊을 수가 없다. 구수한 이야기식 수업으로 인기 짱이던 김영진 선생님의 별명은 ‘나이롱 선생님’이었다. 깔끔한 정장에 머리엔 포마드 기름을 바르고 힘껏 멋을 부렸다.
 
  그런데 선생님에겐 이상한 습벽이 있었다. 교단에서 늘 한 손엔 분필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수업을 했는데 주머니 안쪽으로 그의 손이 이따금씩 당신의 ‘그 부위’를 슬쩍 훔치는 장면이 포착되곤 했다. 그럴 때면 뒤쪽에 자리한 얄개들이 킥킥댔고 즉시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선생님의 괴벽은 학기 내내 변함없이 지속되었고 이내 우리는 익숙해져 갔다. 요즘 학생들이라면 어땠을까.
 
  체육 시간이면 나는 한없이 왜소해졌다. 키가 작아서 ‘땅콩 선생님’이라 불리던 조영수 선생님은 작은 거인이었다. “넌 큰 장애가 아니야. 노력하면 얼마든지 선수가 될 수도 있어!”라며 나의 등을 두드려주었고 축구와 배구 시합에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뛰게 했다. 다부진 몸매에 얼굴이 가무잡잡한 선생님은 스스로의 장애에 과민했던 어린 마음을 연단시켜준 잊지 못할 스승이다.
 
 
  “Boys, be ambitious!”
 
  그윽한 인품의 향기가 묻어나던 선생님 두 분이 더 떠오른다. 한 분은 첫 수업 시간에 당신의 꿈이 ‘유엔 사무총장’이라고 밝혀 그의 별명이 된 김영하 교감 선생님이다. 시골 중학교 까까중들을 앞에 앉혀놓고 세계를 품는 원대한 꿈을 꿀 것을 역설하던 선생님은 도덕을 가르쳤다. “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큰 꿈을 가져라!)”라는 명언도 이 선생님에게서 처음 배웠다. 가끔 능통한 영어 스피치 실력을 보여준 선생님은 아쉽게도 끝내 교직계에서 은퇴했다.
 
  또 한 분은 제일 연장자였던 송재인 농업 선생님이다. 수업 시간에 “채소란 뭔가?” 하면서 근엄하게 좌중을 돌아보았다. 잔뜩 어리둥절해하던 우리에게 “키워 먹는 나물 아이가!”라며 허를 찌른 선생님의 재담은 인기 없는 농업 시간에 대해 친근감을 갖게 했다. 가축 사육법까지 가르치던 노란 치아에 백발의 선생님은 친할아버지 같아서 “송 할배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재직 중 평교사로 돌아가셨을 때 학교장(學校葬)을 했는데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곡에 어느 국어 선생님이 개사한 조가(弔歌)를 전교생들이 교정에서 함께 부르며 울먹였다.
 
  스승에 대한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요즘 세상 어디서 다시 구경할 수 있을까. 얼마 전 혹시 당시의 가사가 모교에 사료로 남아 있는지 문의해보았지만 기록을 찾을 길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의 기억에 제2절의 가사만이라도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나직이 혼자서 불러본다.
 
  “어린 양떼 여기 모여 회오의 잔 드리오니 / 편히 가시오. 이 설움 땅을 치고 웁니다 / 불길 같은 그 정열 꺼질리야 있으련만 / 정해진 운명 앞에 슬피 눈을 감으셨네.”
 
  까까중이던 제자도 어언 고희 줄에 들었건만 스승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60여 년 전 스승들의 숨결이 오늘따라 가까이 다가와 나의 인생 여정을 차분히 성찰하게 한다.⊙
 

  큰 시인이 되라던 선생님
  시(詩) 장원으로 바꿔 먹은 단팥빵과 크림빵 70개

 
  ⊙ “호승이 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다”
  ⊙ 선생님 말씀, “호승이 시집은 내가 다 사 봤어요”

 
  정호승 시인
 
정호승 시인.
  스승 없는 존재는 없다. 누구든 스승에 의해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대구 계성중학교 2학년 신학기 때의 일이다. 국어 시간에 김진태 선생님께서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에 관한 수업을 마치시고 숙제를 내셨다.
 
  “일주일 뒤 다음 시간까지 다들 시를 한 편씩 써 오너라.”
 
  나는 숙제를 하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를 한 편 썼다. 제목은 ‘자갈밭에서’. 내가 살던 대구 신천동(지금은 범어동)에 신천(지금은 범어천)이라는 천(川)이 있었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냇물이 천변을 넘기도 하지만 갈수기인 겨울에는 바닥에 깔린 자갈이 드러날 정도로 건천(乾川)이 돼 나는 그 자갈밭 위를 걸어 다니곤 했다.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가,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고 초라한가, 아버지는 왜 직장을 그만둬 식구들을 가난하게 하는가, 나는 왜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가 등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행갈이와 연 구분을 해서 한 편의 시를 썼다.
 
  다시 국어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다들 숙제 해왔나?” 하고 물으셨다. 우리는 “예! 해왔심니더!” 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느닷없이 나를 지적하며 “호승이, 너 숙제 해왔나?” 하고 물으셨다. 키가 작아 앞줄에 앉은 내가 지목당한 것이다.
 
  “예, 해, 왔는데요….”
 
  내가 마치 숙제를 안 해온 것처럼 더듬더듬 말하자, 선생님께서는 “해왔으면 일어나서 읽어 봐!” 하고 말씀하셨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일어나 읽어보라고 하실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벌떡 일어나 숙제로 쓴 시 ‘자갈밭에서’를 낭독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교단 아래로 내려와 계시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호승이 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다!”
 
  부끄러웠다. 선생님께서 갑자기 생각하지 못한 칭찬을 해주시니 친구들 보기에 민망했다. 그리고 칭찬도 칭찬이지만 까까머리인, 일주일도 감지 않은 더러운 내 머리를 조금도 더럽다고 여기지 않고 쓰다듬어 주시는 게 더 부끄럽고 죄송했다. 내가 선생님의 손을 살짝 피하는 듯 고개를 숙여도 선생님의 칭찬의 쓰다듬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선생님의 그 칭찬하는 손의 온기와 부드러움, 두툼하게 느껴진 손의 두께와 힘을 기억하고 있다.)
 
 
  “호승이가 나가면 됩니더!”
 
  선생님의 칭찬이 있은 지 한 달 뒤, 교내 백일장이 열렸다.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 반에서 백일장에 누가 나가면 좋을까?”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우리 반 친구들이 “호승이가 나가면 됩니더!” 하고 소리쳤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 말에 지금 당장 백일장에 참가하라고 말씀하셨다.
 
  “운동장 끝 솔숲에 가면 다들 모여 있으니까 그리로 가면 돼.”
 
  덜컥 겁이 났다. 백일 동안 나를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 것일까. 엄마한테 백일 동안 집에 못 간다고 연락도 못 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걱정을 하면서 가방을 챙겨 들고 나가려고 하자 선생님께서는 가방은 교실에 두고 가라고 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백일장의 뜻을 모르고 백일 동안 어디로 가야 되는 줄 알았다.)
 
  운동장 솔숲엔 이미 백일장에 참가한 이들이 많았다. 백일장을 진행하는 선생님께서는 원고지를 나누어 주시면서 시를 쓰든 산문을 쓰든 쓰고 싶은 글을 써 제출하라고 하셨다. 그때서야 나는 백일장이 글을 쓰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제로 나붙은 제시어는 ‘불’이었다. “어떤 제목이든 ‘불’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된다. ‘산불’이라고 해도 좋고, ‘불꽃’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시를 한 번 써본 경험을 토대로 ‘등불’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 시가 장원이 되었다. 시상식은 전교생이 참석하는 월요일 조회 석상에서 열렸다. 호명(呼名)을 받고 단상에 오르자 교장 선생님께서 상장을 주시면서 부상(副賞)으로 금액이 적히고 학교장 직인이 찍힌 종이 한 장을 주셨다.
 
  “이 종이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고 교내 매점에 가면 종이에 적힌 금액대로 현찰로 쓸 수 있는 겁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그 종이를 높이 들고 설명한 탓인지 그날 점심시간이 되자 반 친구들이 나를 교내 매점으로 데리고 갔다. 교내 매점에서는 교장 선생님께서 주신 종이를 내밀고 빵을 달라고 하자 삼립 단팥빵과 크림빵을 70여 개나 주었다.
 
 
  매달 작품을 응모해서 상장과 부상을 받아
 
  나는 친구들과 빵을 나눠 먹으며 신이 났다. 당시 계성중학교에서는 매달 학생들의 문예작품을 모집하고 시상했다. 계성중학교가 시인 박목월(朴木月),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선생의 모교일 뿐만 아니라, 당시 국어 선생님 중에도 문단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계셔 학생들의 문예 작품에 관심이 많으셨다. (1963년 당시 계성중학교에는 아동문학가 김성도 선생님,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된 선생님이 계셨고, 김진태 선생님 또한 《만선일보(滿鮮日報)》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된 소설가이자,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화 〈고집쟁이 양〉이 당선된 아동문학가로서 동화집 《별과 구름과 꽃》, 수필집 《침묵의 향기》 등을 출간하셨다.)
 
  나는 매달 작품을 응모해서 상장과 부상을 받았다. 부상은 교내 매점에서 빵을 사 먹고 학용품을 사는 데 쓰였다.
 
  나는 그렇게 해서 시를 쓰는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는 문예 담당 선생님이자 시인이신 이성수(李星水), 대학생 때는 문학평론가 김우종(金宇鍾), 시인 조병화(趙炳華), 소설가 황순원(黃順元) 선생님이 내 스승이 되어주셨다. 특히 김우종 선생님은 경희대 국문과 주최 전국고교생 문예현상 모집에서 내가 투고한 평론 〈고교문예의 성찰-고교시를 중심으로〉를 당선시켜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셨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정호승의 스승 김진태 선생님(계성중 1963).
  내 나이 마흔 무렵, 문득 지나간 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중학생 때 국어 시간에 나를 칭찬해주신 김진태 선생님이 먼저 떠올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단 한 번도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없었다. 급히 선생님께 연락을 취했다. 선생님께서는 반가이 전화를 받으시면서 존댓말을 쓰셨다. 말씀을 낮추시라고 하자 선생님께서는 “다 큰 제자들에게 말을 놓지 않는다”고 하셨다.
 
  약속한 날, 동대구역에 선생님께서 굳이 마중을 나오셨다. 나는 미리 예약해둔 음식점에서 식사하기 전에 선생님께 큰절을 올리고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렸다. 그러면서 선생님께서 “호승이 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다고 칭찬하신 그 말씀이 오늘 저로 하여금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셨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하고 웃으셨다.
 
  나는 그때 내가 특별히 시를 잘 쓴 학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른 학생이 지적당해 시를 낭독했더라도 선생님께서는 “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다”고 칭찬하셨을 것임이 분명했다.
 
  선생님의 칭찬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열심히 노력하면’이라는 전제조건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뜻이 숨어 있다.
 
  모든 일에는 노력이 따른다.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시 또한 마찬가지다. 시는 재능에 의해 나오는 게 아니라 노력에 의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수없이 고쳐 쓴다. 고쳐 쓴다는 것은 바로 노력한다는 것이다.
 
 
  “한국시문학사에 남는 큰 시인이 돼라”
 
  그날 식사를 다 마치고 차를 나누면서 그동안 발간한 몇 권의 내 시집을 선생님께 사인을 해서 드렸다.
 
  “그동안 시집이 출간돼도 보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죄송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호승이 시집은 내가 다 사 봤어요”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너무 부끄럽고 죄송해서 만일 쥐구멍이 있었다면 거기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 뒤 선생님과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선생님께서는 편지에서 “한국시문학사에 남는 큰 시인이 돼라”는 격려와 당부의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 편지는 지금 대구 수성구에 있는 ‘정호승문학관’에 전시해두었다.
 
  내가 최초로 쓴 시 ‘자갈밭에서’는 지금 내게 없다. 제목과 그 내용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처음으로 쓴 시가 육필로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그 시는 오직 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날 국어 시간에 숙제로 해간 시를 제출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보관할 생각을 했을 리는 없다. 또 보관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어디론가 휴지처럼 없어졌을 것이다. 다행히 처음으로 백일장에 장원을 한 시 ‘등불’은 교내 신문에 발표돼 그 원문을 지금껏 가지고 있다.
 
  김진태 선생님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께서는 아무한테도 연락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한다. 나는 아직 선생님의 유택(幽宅)에 가보지도 못했고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그 칭찬 한마디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텐데 나는 참으로 못난 제자다. 언젠가 제주에 강연을 갔을 때 선생님의 따님이 내가 선생님께 보낸 편지를 가지고 와 보여주었다. 그때 왜 그 편지를 달라고 하지 못했을까. 따님이 다시 그 편지를 보여주면 이제는 내가 고이 간직하고 싶다.
 
  “한국시문학사에 남는 큰 시인이 돼라.”
 
  내가 그런 시인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선생님께서 당부하신 그 말씀만은 아직 잊지 않고 있다.⊙
 

  노장철학의 대가 김충렬 교수
  老子 통해 80년대 젊은이들에게 비판 정신 심어줘

 
  ⊙ 강원도 문막으로 찾아뵙자 사륜구동차에 손자 태우고 나타난 동양철학자
  ⊙ 내 편벽된 성향 아시고 ‘마음을 두루두루 쓰도록 노력’하라는 의미 담아 號 지어줘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강원도 문막의 김충렬 교수(앞쪽) 서재에서.
  학교 때는 멀리서 존경심만으로 쳐다보던 김충렬(金忠烈·1931~2008년)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자주 뵐 수 있었던 것은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일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대학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학문적 세례는 받은 바 없다. 학부 때 선생님의 중국철학 강의를 들은 것이 전부다. 그러나 기자와 교수의 관계가 되면서 오히려 선생님을 자주 찾아뵈었고 개인적으로 2001년부터 우리 역사와 동양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선생님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특히 2004년 6월의 만남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1996년 정년퇴직을 하시고 강원도 문막에 마련한 조촐한 서재에서 저술 활동에 전념하며 《유가 윤리강의》 《중국철학사 1》 《노장철학강의》 등을 연이어 펴내고 계실 무렵이었다. 인터뷰 요청을 드리니 “문막으로 올 수 있겠어?”라고 물으셨다. 그 음성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회사 차를 타고 달려갔다. 영동고속도로 문막 톨게이트가 선생님이 만나자고 하신 약속 장소였다. 톨게이트를 나가니 SUV 옆에서 선생님이 손을 흔드셨다. 뜻밖이었다. 동양철학자와 사륜구동차!
 
  “회사 차는 따라오라고 하고 내 차에 타!”
 
  직접 운전하는 사륜구동차에 손자를 태우고 나오셨다.
 
  차를 급하게 모시는데 논두렁길 운전도 능숙하셨다. 선생님은 안창골 서재로 가기에 앞서 10여 호 남짓한 인근 마을의 충효사(忠孝祠)부터 가보자고 했다. 이상한 것은 평소와 달리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도착해 보니 조선 시대 황무진(黃戊辰·1568~1652년)이란 인물을 기리는 이 평범한 사당에는 김 교수 자신이 쓴 현판과 비문이 있었다. ‘글씨를 보여주고 싶으신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툭 던지듯 “여긴 우리 외갓집이 있던 곳이야”라고 하셨다.
 
  “난 서자(庶子)로 태어났는데, 그때 아버지 나이가 지금 내 나이 73세셨지.”
 
  “…”
 
  황무진이란 분은, 김 교수 어머니 쪽 조상이리라.
 
 
  젊은 시절 출가하려다 실패
 
  일제 말 청소년기를 보냈던 선생님에게 노자 읽기는 ‘불안정한 심리에 이상한 충격’을 주었다고 하셨다. ‘울억증(鬱抑症)과 자폐증의 돌파구로 마르크스주의까지 기웃거리던’ 청년 김충렬은 마침내 출가(出家)를 결심한다.
 
  “오대산 상원사로 방한암(方漢巖·1876~1951년)스님을 찾아갔더니 이미 탄허(呑虛·1913~1983년)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였어. ‘넌 중이 맞지 않다’며 내쫓으시더라고.”
 
  당시 출가를 결심하며 지은 한시(漢詩)가 있는데 옮겨보면 이렇다.
 
  “내 명운이 한스러워 고향산천을 등지나니
  뜻은 성현(聖賢) 되는 데 있을 뿐 금의환향을 바라지도 않았노라
  이제 천지를 집 삼아 구름 따라 물길 따라 정처 없이 떠나는 길
  성공이냐 실패냐를 따져 보아 무엇하리.”

 
  출가는 결국 실패했다. 하산한 뒤 붙잡은 ‘장자(莊子)’가 선생님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았다고 하셨다.
 
  이 무렵 청년기 방황은 그의 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청광(淸狂·곱게 미쳤다), 허주(虛舟·빈 배)를 거쳐 중천(中天)을 즐겨 쓰셨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때 처음으로 호를 받았다.
 
  “자네 호 있나?”
 
  “없습니다.”
 
  “이제 사십이 넘었는데 이름 막 부르는 것은 좋지 않아.”
 
  그러고는 즉석에서 붓글씨로 ‘한우보심(翰雨普心)’이라는 글과 ‘보심서실(普心書室)’이라는 글을 내려주셨다. 한참 지나고서야 내 편벽된 성향을 이미 아시고서 ‘마음을 두루두루 쓰도록 노력하라’는 경계의 말씀임을 깨달았다.
 
  선생님이 젊은 시절 좋아하셨던 호 허주, 그것은 노장(老莊) 사상의 그릇이다. 1957년 대만으로 유학 갈 때 선생님은 이미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원문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대만 유학을 마치고 경북대와 계명대를 거쳐 1970년 고려대에 부임하셨다.
 
  “김준엽(金俊燁)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어. 이상은(李相殷) 선생님이 정년으로 나가시니 후임으로 오라는 말씀이었어.”
 
  그 직전에는 당시 한국 철학계를 대표하던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종홍(朴鐘鴻) 교수가 미국에 머물게 되자 자신의 ‘한국철학사’ 강의를 선생님에게 맡겼다.
 
  “그때 강의 준비하면서 한국철학에 대한 개요를 파악할 수 있었지.”
 
 
  “무아지경이 되어 강의”
 
  선생님은 1992년 2월 26일 회갑을 맞아 ‘육십자술(六十自述)’을 지으셨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22년 동안 나는 고려대학에서 많은 영재들을 만났으며 나는 나의 예지와 정열을 쏟아 열심히 연구하고 강의했다. 강의가 있는 날 새벽이면 나는 누워서 전날 준비한 강의안을 머릿속에 정리한다. 그리고 강의안은 거의 보지 않고 홀로 무아지경이 되어 강의를 한다. 준비안에는 없던 예지의 영감이 이따금 튀어나와 나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했다. 강의가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1980년대 학부 수준에서이긴 하지만 선생님의 강의는 참으로 원대하면서도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 문제를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4년 원주 만남에서 이 점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대의 실존적 바탕 위에서 절실한 사회·정치적 문제들과 직결시켜 연구하는 길이었지.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군사정치의 극성기로 반(反)문화, 반정치, 반전통의 노자는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력에 대한 부정과 비판의 정신을 불어넣었어.” 선생님 강의가 가슴속을 파고들었던 이유를 20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문막으로 찾아뵈었던 2004년에 인촌학술상을 수상하셨고 2006년에는 학술원회원이 되셨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모실 수 있었던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2008년 갑자기 연구실에서 쓰러지셨고 그렇게 영결(永訣)하셨다. 2015년 원주시에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철학자 개인을 위한 중천철학도서관을 건립해 영원히 그 정신을 후학들에게 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필자는 묘하게도 2007년부터 공자(孔子)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그것이 새로운 업이 됐다. 선생님은 많은 책을 남기셨고 그래서 선생님의 몸은 가셨어도 선생님의 정신은 한시도 내 곁을 떠나신 적이 없다.⊙
 

  교사의 꿈을 꾸게 만든 선생님
  겨울이 오면 봄이 멀랴… 詩의 마음을 알게 한 선생님

 
  ⊙ 선생님처럼 아무런 방해 없이 유유히 자전거로 운동장 달리고 싶어
  ⊙ “어머니, 아이가 학교 생활 잘 하고 있으니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김태완 기자 kimchi@chosun.com
 
  “겨울이 오면 봄이 멀랴.”
 
  선생님은 좀 멋을 아시는 분이셨다.
 
  가끔 창밖 교정을 내다보시며 혼잣말로 “겨울이 오면 봄이 멀랴”를 읊조리곤 하셨는데 목소리가 낮아 대부분의 친구는 이 구절을 듣지 못했다. 나는 그 무렵 중이염을 앓고 있었다. 고장 난 귀 안에 물약을 넣고 알약을 먹어서인지 작은 소리도 크게 들렸었다. 그래서 그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솔직히 “~멀랴”인지, “~멀리” 혹은 “멀까”인지, “~멀리오”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오(誤)기억도 기억의 일부라고 우격다짐해본다.
 
 
  “봄이 오면 여름이 멀랴” 할 줄 알게 돼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생각해보니 선생님이 그 구절을 분명 무의식중에 뱉으신 것이 아니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구절을 입속에서 돌돌 말아 머릿속에 넣어 두었다. 그러고 무의식중 마음대로 변형시켜 “봄이 오면 여름이 멀랴”를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셨다. 큰 덩치에 베이지 계통의 콤비 재킷을 입으시고 비적비적 페달을 밟으며 출근하셨는데 학교에 도착하셔도 곧바로 교무실로 향하지 않으셨다. 텅 빈 운동장을 자전거로 돌았다. 그것도 천천히.
 
  우리가 지각을 피하려 필사적으로 뛰어갈 때 선생님이 운동장을 느릿느릿 도는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때 어렴풋이 생각했다. ‘나도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라고. 선생님처럼 아무런 방해 없이 유유히 자전거로 운동장을 달리고 싶었다.
 
  선생님은 늘 얼굴이 붉으셨다. 약주를 자주 드셔서 그런지 몰라도 늘 붉은 웃음을 학생에게 꺼내셨다. 유난히 흰 뻐드렁니를 보이시곤 우리를 더 웃게 만드셨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이 술에 취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술 취한 척 어린 제자를 웃게 만들려고 더 크게 웃으셨다고 믿는다. 한데 당시는 내 후각이 고장 나서인지 선생님 곁에 가면 쉰 막걸리 냄새가 났다.
 
  풍금도 곧잘 치셨다. 우리는 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높은 산에 올라 저 멀리 나무들을 발아래 구르듯이 노래를 부르세요.”
 
  우리는 산정(山頂)에서 야호를 외치듯 목청껏 노래했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내가 두 옥타브조차 못 올리는 음치 중의 음치인 것은 그때 목을 다쳐 고음을 못 내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때 부를 노래를 있는 힘껏 다 불러서가 아닐까.
 
 
  연필을 깎아주신 선생님
 
  이런 일도 생각이 난다. 중간고사 때 산수 시험을 치다 손가락에 너무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그만 연필심이 부러지고 말았다. 필통을 꺼냈지만 몽당연필 하나 없었다. 할 수 없이 겨우 남은 심으로 끙끙대며 푸는데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아무 말씀 없이 연필을 사각사각 깎아주셨다. 나는 허리를 펴고 멀뚱멀뚱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눈웃음과 함께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손에 쥐여주셨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백하건대 나는 선생님을 통해 드디어 ‘우’를 받을 수 있었다. 초등 시절 나는 모름지기 ‘양’ ‘가’와 ‘미’의 절친이었고 ‘수’와는 너무 먼 사이였었다. 생활통지표에 ‘아이는 착한데 아무런 노력을 안 한다’고 적혀 있었다. 수업을 마친 뒤 따로 남아 특별 보충수업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20점대였다. 정말이지 ‘목욕탕’을 ‘모탕’으로 ‘소리 나는’대로 갈겨도 부끄러움을 몰랐다.
 
  나는 빨간 줄이 그어진, 틀린 문제로 가득한 시험지를 집 마루가 놓인 책상 위에 붙여 놓았다. (그런데 왜 붙였을까? 이유는 기억에 나지 않는데 아마도 선생님의 지시가 아니었을까?) 누나들은 깔깔 웃었고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열심히 시험지를 메꾸었지만 정답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을 통해 구구단을 알게 되었고 국어 맞춤법을 배울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선생님이 나를 사랑할 이유가 없는데도 사랑해주셨다.
 
  유년 시절 엄마는 늘 아프셨다. 내 기억으로 치료할 약이 그때는 없었다. (당시 엄마 병명은 갑상선 기능저하증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고서 약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매일 드셨다. 엄마가 두꺼운 이불을 덮어쓰고 컴컴한 방에 누워 계시면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조용히 곁에 누워 있었다. 그냥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엄마 옆에 있어 드리고 싶었다.
 
  언젠가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가정 방문을 오셨다. 집 안에 들어서진 않으셨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 우리 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학교입니다. 왜냐하면 태완이가 다니는 학교이니까요. 학교 생활 잘 하고 있으니 아무런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눈물이 나왔다.
 
  나는 선생님처럼 나중에 크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랴”라는 문장이 지금의 나로 만들어
 
  훗날 누나가 교대에 진학했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잠시 잠깐 나도 교대 진학을 꿈꾸어 보았다. 풍금을 칠 자신이 없었고 1학년 아이들 앞에서 나비춤을 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러나 교사는 되지 않았다. 꿈은 꾸었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내 내면을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 그 선생님 같은 교사가 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짧은 한 줄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하고 싶다. 또 “겨울이 오면 봄이 멀랴”라는 이 시구(詩句)가 퍼시 셸리(Percy Shelley)의 시구(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와 관련이 있다는 것도 훗날 알게 되었다. 《월간조선》 2019년 2월호에 소개한 퍼시 셸리의 시 ‘서풍(西風)에 부치는 노래’를 소개한다. 전체 5부 중 마지막 부다.
 
  서풍에 부치는 노래(Ode to the West Wind)
  -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
 
  나를 너의 거문고가 되게 하라, 저 숲처럼
  내 잎새가 숲처럼 떨어진들 어떠랴!
  너의 힘찬 조화의 난동이 우리에게서
 
  슬프지만 달콤한 가락을 얻으리라.
  너 거센 정신이여, 내 정신이 되어라!
  너 내가 되어라, 강렬한 자여!
 
  내 꺼져가는 사상을 온 우주에 몰아라
  새 생명을 재촉하는 시든 잎사귀처럼!
  그리고 이 시의 주문에 의하여
 
  꺼지지 않는 화로의 재와 불꽃처럼
  인류에게 내 말을 퍼뜨려라.
  내 입술을 통하여 잠 깨지 않는 대지에
 
  예언의 나팔을 불어라! 오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랴.

 

  Captain! 영원한 대장님
  “어떻게 해서든 너의 7대륙의 뒤는 내가 봐줄 거다”(박영석)

 
  ⊙ 박영석 대장과 견준다면 인생을 건 20년 등반 경험도 ‘막내 대원’과 같아
  ⊙ 박영석꽃, 강기석꽃, 신동민꽃도 원래 피었던 자리로 되돌아오면 좋겠다고 기도해

 
  김영미 산악인·노스페이스 애슬리트팀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코리안 루트 개척)을 떠났을 때의 모습이다. 뒷줄 왼쪽부터 진재창, 박영석(대장). 앞줄 왼쪽부터 신동민, 이형모, 강기석, 김영미 대원.
  “산이 인생의 스승이죠.”
 
  산악인의 삶에 스승이 되어준 이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했던 대답이다. 스승은 멀리서 찾을 이유가 없다고 늘 생각해왔다. 모든 인연의 연결고리가 ‘산’에 있으니 산이 스승이란 말이 틀리지 않다. 삶의 무대를 ‘산’에 두고 봤을 때 첫 번째 스승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히말라야 등반의 꿈을 심어준 모교 산악부의 선배들이다. 히말라야 등반 경험이 없던 선배들이 어떻게 모든 기본을 가르쳐줄 수 있었는지 수수께끼 같다.
 
 
  긴밀하게 느슨하게 내 삶의 길잡이들
 
  오월이다. 사계절 중 겨울과 여름의 사이에 있는 봄의 절정에 있다. 인생의 한창때를 ‘오월의 봄 같은 날들’로 비유하듯 나는 산에 푹 빠져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해 많은 시간을 히말라야의 빙하 위에서 보냈다. 6년 동안 벚꽃이 피고 지는 봄을 잊고 지냈다. 대신 너무 멋지고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행운을 얻었다. 함께 등반하며 친한 사이처럼 “형”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했다. 오르는 것이 전부인 형들의 눈빛엔 맑은 기운이 반짝였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과 인생의 가치를 발견한 듯 빛났다.
 
  누구 하나를 특정 지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이가 긴밀하게 느슨하게 내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걷던 길을 지속하게끔 나침반이 되어준 사람들. 하나 하나 떠올려보니 왜 이리 울컥한지…. 푸른 5월은 이 소중한 몇몇 인연과 이별한 계절이기도 하다.
 
  나는 ‘박영석 사단’이라고 불리던 원정대의 막내 대원이었다. 이제 내 나이가 마흔을 넘어 20년을 넘게 등반했지만 형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내가 막내 같다.
 
  박영석 대장님은 모교 산악부 1기 선배님과 친분이 있으셨다. 선배님은 “지방에 있는 여성 산악인도 한번 키워봐라. 산을 즐길 줄 아는 친구”라며 나를 대장님께 소개했다. 재학생이었으니 히말라야 등반 경험도 전혀 없어 산을 즐길 줄 안다는 게 유일한 프로필이었다. 어떤 테스트도 없이 선배님의 ‘추천’에 박영석 사단의 ‘등반 장학생’이 되었다.
 
  2006년 티베트 에베레스트 등반이 박영석 대장님과 첫 등반이다. 18년 전 대장님은 지금의 나보다 두 살이나 적었다. 당시 대장님은 산악 그랜드 슬램을 모두 완성한 상태였다. 산악 그랜드 슬램이란 8000m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완등, 3극점 도달(남극, 북극, 에베레스트)을 모두 완성한 것을 의미한다. 이 기록을 완성한 2005년(기네스북 등재) 이후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박영석 대장님이 유일하다. ‘나의 대장님’ 경력과 기준이 이쯤이니, 20년 넘게 산을 다녔어도 나는 나를 여전히 막내 대원처럼 여길 수밖에 없다. 대장님과의 나이 차가 17년이다.
 
 
  에베레스트도 세 번 만에 정상에 올라
 
  세월이 흘러 처음 대장님을 만났을 때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그때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가 처음 만났던 대장님보다 지금의 나는 두 살이 더 많지만, 그때 받은 만큼 후배들을 위해 대장님 같은 선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나의 7대륙 최고봉 등반은 모교 산악부와 박영석 대장님과 함께 만들어진 프로젝트다. 20대의 내가 가진 것이라곤 젊음과 열정뿐이었다. 등반을 그렇게 잘하는 편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내 등반은 정상에 오르지 못한 원정이 훨씬 많다. 에베레스트도 세 번 만에 정상에 올랐다.
 
  대장님은 등반을 위해 후원받은 비용을 아껴 후배들의 등반도 지원하셨다. 7대륙 최고봉 등반 지원 또한 그런 여러 가지 중 하나였다. 대장님에겐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있었다. 형들은 대장님을 ‘진짜 사나이’라고 했다.
 
  “선배는 후배에게 무조건 주고, 후배들은 무조건 선배들을 믿고 따라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러니 막내인 나는 늘 받고만 자랐다.
 
  7대륙 최고봉 정복을 하던 중, 중도 하차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 오세아니아 최고봉 칼스텐츠(4884m)를 등반할 때다. 다른 7대륙에 비해 등반의 난도가 높지 않은데 행정적인 이유로 등반 허가가 쉽지 않았고, 비용 또한 비쌌다. 산밑에도 가보지 못하고 호텔에서, 정글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세 번째 기회가 왔을 때 이런 이유들로 등반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처음 대장님과 등반에 대한 1대 1 대화를 했다. 의자를 끌어다 대장님 앞에 마주 앉았다.
 
  “요즘 사회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모두가 힘들다.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후원사를 찾든 내 돈을 더 쓰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네 마음을 굳게 먹고 등반에 전념해라. 어떻게 해서든 너의 7대륙 등반의 뒤는 내가 봐줄 거다.”
 
  대화는 아니었고, 혼자 할 말만 끝내고 벌떡 일어나 원정대 사무실 밖으로 나가셨다. 내가 다른 변명을 할까 봐 듣기 싫으셨던 것 같다.
 
  나의 모든 등반은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이룬 것이 없다. 함께 등반하며 귀동냥했던 남극 얘기들로 나도 한 번쯤 남극을 도전해봐야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남극으로 떠나기 몇 달 전 안나푸르나에서 꺾어 온 세 송이의 에델바이스를 10년 만에 안나푸르나BC의 메모리얼에 가져다 놓았다. 꽃이 피었던 자리에 돌려놓고 싶었다. 박영석꽃, 강기석꽃, 신동민꽃도 원래 피었던 자리로 되돌아오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현실화될 수 없는 바보 같은 바람이다.
 
  마지막 대면 인사가 13년도 훨씬 넘었다. 살아 있어도 잊힌 사람이 있고, 이처럼 만날 수 없지만 잊은 듯 살아가도 여전히 기억되는 이들이 있다. 누구보다 간절히 오늘을 살아내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한 걸음을 견디는 용기를 가르쳐준 그들은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
 
 
  대장님과 함께한 네 번의 에베레스트 등반
 
  대장님과는 에베레스트 등반만 네 번을 했다. 2006년 티베트, 2007년, 2008년,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 등반이다. 그래서인지 내겐 ‘박영석 사단’에서 함께 등반했던 형들이 에베레스트와 같다. 에베레스트가 너무 멀어 손을 뻗어 닿을 수 없고, 안개에 가리어져 볼 수 없지만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 것을 안다.
 
  스승이란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한다. 배움으로 내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한 존재, 나의 자아와 한계를 더 확장하게 하는 배움을 준 나의 스승 박영석 대장님! 스승님이라 부르기엔 너무 멀게 느껴지고 형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깝게 여겨지니 내겐 그저 ‘영원한 대장님’이다.
 
  ‘허투루 살지 말라고, 머뭇거리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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