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조선》 연재 시작에서 발간까지 14년… 200자 원고지 2만3000여 장
⊙ 구한말에서 김구 암살에 이르는 70여 년간의 한국사 담아
⊙ 일찍부터 공산당의 한계 꿰뚫어 본 이승만의 통찰, ‘백범 전설’의 시작인 ‘치하포 사건’의 시시비비 견지
⊙ 북한 거물 간첩 성시백의 ‘남북협상’ 공작, 대한민국의 장래 어둡게 본 김구의 고백(유어만 보고서) 등 담겨
⊙ 구한말에서 김구 암살에 이르는 70여 년간의 한국사 담아
⊙ 일찍부터 공산당의 한계 꿰뚫어 본 이승만의 통찰, ‘백범 전설’의 시작인 ‘치하포 사건’의 시시비비 견지
⊙ 북한 거물 간첩 성시백의 ‘남북협상’ 공작, 대한민국의 장래 어둡게 본 김구의 고백(유어만 보고서) 등 담겨
- 사진=조선DB
100만 관객을 돌파한 김덕영 감독의 ‘이승만 영화’ 〈건국전쟁〉이 낳은 ‘이승만 열풍’이 오랫동안 잊혔던 명저(名著)를 다시 불러내고 있다. ㈜조선뉴스프레스가 2015년 발간한 손세일(孫世一·89) 전 국회의원의 《이승만과 김구》(총 7권)가 그 책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두 거인인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그분들의 시대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200자 원고지 2만3000여 장, 전 7권 각 권 800면 내외의 대작(大作)이다.
《월간조선》은 ‘이승만과 김구’를 2001년 8월호부터 2013년 7월호까지 12년에 걸쳐 총 111회를 연재했다. 저자는 한 회당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평균 200장 이상의 원고를 썼다. 중간에 두 차례 연재를 쉬었는데, 이는 저자가 재충전(再充塡)을 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연재 기간이나 분량에 있어서 한국 잡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연재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는 연재가 끝난 후 2년에 걸쳐 새로운 학설과 정보 등을 반영하여 글을 손본 후 2015년 7월 책을 냈다.
저자, “이승만·김구, 한국 정치의 위대한 거인들”
손세일 전 의원은 1958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잡지 《사상계》에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활동했다. 1970년에는 한 권짜리 《이승만과 김구》를 펴냈다. 그는 이 책에 대해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해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라고 겸양을 보이지만 이 책은 출간 이후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노재봉 전 국무총리), ‘한국 최초의 정치전기학 저서’(김학준)라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학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의 하나’로 평가했다.
저자는 이후 1980년 정치에 입문, 국회의원을 세 번 지냈다. 저자는 20여 년간의 정치인 생활을 “외도(外道)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정치 현실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이야말로 ‘정치적 패배자’가 아닌 ‘한국 정치의 위대한 거인들’이라는 각성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승만과 김구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특히 저자는 “정치를 해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조직)과 돈이라는 걸 알게 됐고, 이승만과 김구가 독립운동이나 해방 이후 정치 과정에서 보여준 여러 모습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손세일 전 의원은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 모두에게 애정을 보인다. 《이승만과 김구》의 1권 첫 본문인 ‘서설-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의 시작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과 김구는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건한 대표적인 두 정치 지도자이다. 그런 뜻으로 한 나라에 국부(國父)는 한 사람뿐이며 우리나라의 국부는 이승만이라면서 자신이 국부로 불리기를 단호히 거부한 김구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두 국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은 이승만과 김구 중 한 분을 존숭하면서 다른 이를 백안시(白眼視)하는 이들에게는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월간조선》에 글을 연재하는 동안 편집을 맡았던 기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승만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분이라는 것을 실감한 반면, 김구와 관련해서는 ‘신화(神話)’가 적지 않다는 것을 절로 느낄 수 있었다.
이승만, 1923년에 공산주의의 한계 예언
예컨대 이승만이 1923년 《태평양잡지》에 쓴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글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보자.
〈이처럼 공산당의 평등주의 사상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나서, 이승만은 그들의 주장의 부당한 점으로 1)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 2) 자본가를 없이하자 함 3)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 4)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 5)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한다 함이라는 다섯 가지를 들었다. 그는 이 다섯 가지 주장의 부당성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중략)
그런데 이후의 공산주의의 역사와 관련하여 볼 때에 이때의 이승만의 주장 가운데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자본가를 없애자는 주장의 부당성을 설명한 대목이다. 그는 공산당의 주장대로 자본가가 다 없어져서 〈재정가(기업인)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미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이용후생하는 모든 물건이 더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라고 하여, 시장경제체제의 경쟁의 원리와 기술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판단은 60년이 훨씬 더 지나서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에 의하여 옳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가을의 소련공산당대회에서 “기술혁신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이토록 발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토로했었다.〉
1923년이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지 불과 5년 후이다. 공산주의의 모순이 아직 드러나기 전이었고, 오히려 유럽이나 미국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도 인류 사상 초유의 공산주의 실험에 열광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때 이미 공산주의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꿰뚫어 본 것이다.
‘치하포 사건’의 진실
반면 ‘백범 전설’의 시작인 ‘치하포 나루 사건’의 경우, 피살자는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군 장교나 밀정이 아니라 상인이었고 이로 인해 당시 한국 정부가 곤란을 겪었음을 밝히고 있다.
〈김구가 변복한 일본인을 보자 대뜸 민비를 시해한 일본공사 미우라이거나 그 공범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순진성과 동시에 국모 시해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반일감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일본공사가 혼자서 치하포와 같은 벽지로 피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쓰치다의 소지품을 조사해보니까 그가 일본군 육군 중위였다고 한 대목이다. 그러나 쓰치다가 일본군 육군 중위였음을 증명하는 소지품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에도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해주부에서나 인천감리서에서의 세 차례에 걸친 심리에서도 쓰치다의 신분과 관련된 심문은 없었다.
이 무렵에 조선에 파견되어 있는 일본군에서 중위는, 가령 동학농민군의 해주성 공략 때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상당한 지휘권을 가진 장교였다. 그러한 신분의 일본군 중위가 변복을 하고 혼자서 벽지를 여행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략)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쓰치다의 소지품을 챙긴 일본 경찰은 쓰치다가 나가사키(長崎)현 쓰시마(對馬島)의 이즈하라(嚴原)항 사람으로서 조선에 장사하러 온 상인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보고에 따르면 쓰치다는 이즈하라항의 무역상 오쿠보 키(大久保機)의 고용인으로서 1895년 10월에 진남포에 도착하여 11월 4일에 장사를 하러 황주로 갔었으며, 사건 당시에 그는 황주 십이포(十二浦)에서 조응두(趙應斗)의 배 한 척을 세내어 통역을 대동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참이었다.〉
저자가 ‘치하포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김구를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팩트’가 그렇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승만에 대해서나 김구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과정에서의 애환들을 많이 소개하는 것만큼이나, 김구가 김원봉 등 좌파 세력과 겪었던 갈등, 상전 행세를 하는 중국 국민당 정부를 상대하는 과정에서의 마음 고생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진짜 해방전후사’
오늘날 ‘이념적 내전(內戰)’을 치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특히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 책의 6권과 7권이다. 그야말로 ‘진짜 해방전후사’, 즉 해방부터 건국 직후의 이야기까지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파, 김규식·여운형 등의 중도파, 박헌영 등의 좌파, 그리고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가 아주 세세하게 나와 있다. 1947년 말까지만 해도 이승만과 노선을 거의 같이하던 김구가 왜 표변하여 남북협상에 나서게 되었는지, 소련군정과 김일성 일당이 남북협상을 어떻게 준비하고 김구를 참가시키기 위해 무슨 공작을 벌였는지도 잘 나타나 있다.
〈김구와 김규식의 특사 두 사람이 평양에 다녀왔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남북협상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흥분된 분위기는 한결 고조되었다. 그러나 막상 김구는 이때에 일찍 경험하지 못했을 만큼 심각한 고뇌에 빠졌다.
(1948년) 4월 11일, 12일 이틀 동안 열린 국민의회 제45차 정기총회는 이승만과의 결별을 공식으로 확인하는 회의였다. 회의는 먼저 명목만 남아 있는 국민의회의 정부의장을 개선(改選)했다. 사퇴서를 제출해 놓고 있는 의장 조소앙(趙素昻)의 후임으로는 유림(柳林)을, 부의장으로는 김구의 두뇌이자 입 역할을 하는 엄항섭(嚴恒燮)을 선임했다. 이 무렵 엄항섭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북한의 거물 공작원 성시백(成始伯)과도 남북협상 문제를 두고 만나고 있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과정에는 북한의 공작원 성시백의 공작이 있었다는 얘기다. 성시백은 김일성의 직접 지시를 받는 거물 공작원으로 훗날 국회 프락치 사건 등도 그의 공작 결과였다.
거물 간첩 성시백
〈이 무렵 일련의 공산주의 프락치 활동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무역상 행세를 하면서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와 《우리신문》 발행에 관여하는 등 종횡으로 활동하던 수수께끼의 인물 성시백이 남로당과는 관계없이 움직이는 방대한 조직의 활동이었다.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라는 이 조직은 김일성의 직접 지령에 따라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시백은 포섭한 인사들을 1950년 5월 10일에 실시되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킨 뒤 합법 투쟁을 전개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성시백은 1950년 5월 15일에 체포되었는데, 이때에 검거된 인원은 모두 112명이나 되었다. 이들의 직업도 정당원, 공무원, 상인, 교원, 외국공관 직원, 회사원 등 다양했다. 북한은 평양에 ‘애국렬사릉’을 조성할 때에 그곳에 성시백의 묘도 만들어 놓았다.
북한의 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매우 이례적으로 1997년 5월 26일 자 2면 전체를 성시백에 대한 특집 기사로 채웠는데, 이 기사는 1949년의 국회 프락치 사건이 성시백의 공작에 따른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성시백 동지는 1948년 가을부터 괴뢰 ‘국회’ 공작에 힘을 넣었다. 괴뢰 ‘국회’ 안에는 각양각색의 분파들이 있었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분파와 그들 간의 싸움을 이용하여 우선 ‘국회’ 안에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섭하여 반미 반괴뢰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대담하게 벌여 나갔다. 그리하여 ‘국회부의장’과 수십 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 데 성공한 성시백 동지는 그들로 하여금 ‘국회’ 연단에서 ‘외군철퇴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 주었다.…”〉
‘남북협상’ 감독은 소련군정
또 소련군정이 남북협상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진행, 종결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개입했다는 내용도 있다.
〈4월 24일에는 남북연석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남쪽에서 간 대표 200여 명은 이날 황해제철소를 시찰했다.
슈티코프와 레베데프는 남북연석회의의 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슈티코프는 4월 24일에 레베데프와의 통화에서 “연석회의에 만족한다”고 말하고, “남조선 대표들에게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라. 원한다면 군대도 보여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반대했던 4김회담도 승낙했다.
슈티코프의 이날 지시사항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남북지도자협의회에 관한 것이었다.
“소회의(지도자협의회)를 개최하고 결정서를 채택한다.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외국 군대 철수 뒤에 내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권력을 접수해서 선거를 실시하고 이후 통일정부를 수립한다. 조선 민족은 단일 민족이다. 조선인들은 이 모든 것을 성취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 만일 이상의 합의사항에 반대하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으며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느냐고 따진다. 신망과 주도권을 장악한다.…”〉
대한민국의 장래 비관한 김구
영화 〈건국전쟁〉에서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가 언급하면서 널리 알려진 〈유어만 보고서〉, 즉 유엔한국위원단 의장이었던 중국 외교관 유어만(劉馭萬)이 1948년 7월 11일 경교장에서 김구와 만나 나눈 대화 내용도 이 책에 이미 나와 있다.
〈유어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오히려 바깥에 계시는 것보다는 정부에 들어가셔야 할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박사는 선생의 오랜 동지인 신익희(申翼熙), 이범석(李範奭), 이청천(李靑天)씨 같은 분들을 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참여하셔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한민당 뜻대로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박사가 국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싶어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견제하면 이 박사에게 힘이 될 것이고 만약 포기하신다면 한민당이 이 박사를 좌지우지하게 될 것인데, 선생께서도 한민당이 국가의 운명을 견제 없이 전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김구는 정치싸움 등 이미 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구나 나는 한 특정 정당의 비방 캠페인에 의하여 반미주의자로 알려졌어요.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을 확실히 도와줄 수 있는 이웃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요. 우리의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가 필요한데, 내가 정부 안에 있으면 미국인들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 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유어만은 이승만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비난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김구의 말을 부정했다.
김구는 이어 중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한국 정부 승인 전망에 대하여 유어만의 견해를 묻고 나서 매우 주목되는 발언을 했다.
“내가 남북한지도자회의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 동안 북한군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동안 남한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 만한 병력을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 병력을 남한으로 투입시키고 한순간에 여기에서 정부가 수립되고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미-소 양 주둔군이 철수하더라도 내전은 있을 수 없다고 장담한 4월 30일의 공동성명 내용과는 사뭇 다른 주장이었다. 김구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유어만은 소련인들이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영문으로 작성된 위의 대화록은 이화장의 이승만 문서에 들어 있는데, 그것은 유어만이 작성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한 것이 틀림없다.〉
‘대한민국 건국’을 이해하는 교과서
좌우의 이념대립이 극심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과 정통성에 대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감안해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인식, 해방 이후 남북협상의 전개 과정 등에 대한 이야기 등을 중심으로 소개했지만, 이 책에는 이밖에도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많이 있다. 단순히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책으로서뿐만 아니라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를 거쳐 해방,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시기를 다루는 한국 역사책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이 책에 나타난 이승만과 김구의 삶, 지적(知的) 궤적, 개성(個性)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일생은 물론 해방 전후 두 분 행적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특히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다만 ‘이승만과 김구’의 이야기가 김구 암살로 끝나는 것은 아쉽다. 원래 《월간조선》에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조갑제(趙甲濟) 월간조선사 대표는 김구의 암살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말고 이승만의 최후까지 다루어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대비열전(對比列傳)’이라는 형식 때문인지, 책 발간까지 14년에 걸쳐 글을 쓰느라 에너지를 소진했기 때문인지 저자는 김구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권당 800페이지 내외의 책이 7권이나 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문장이 유려하고 정확해서 읽기에 어렵지는 않다.
독자들, “자손들에게 물려줄 책”
이 책은 10년 전 발매되어 한동안 화제가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잊혔고 서점 판매도 중단되었다.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 가운데 종종 이 책을 구입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있어도 응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판매를 재개하면서 독자들의 호응이 이어지고 있다. 부산의 한 대학교수는 “헌책방에도 없어 도서관에서 장기 대출했었다”며 책이 다시 나온 것을 반겼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을 생각하면 비싸지 않다”(대구의 목사), “두 아들과 자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겠다”(50대 초의 직장인)는 분들도 있었다.
7권 전질에 27만900원(10% 할인 가격. 정가 30만1000원)으로 10년 전 책정된 가격 그대로다.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일 수도 있지만 근래에 500페이지 내외의 인문사회 서적이 4만~5만원쯤 하고 15만원이나 하는 1300페이지짜리 인문서도 있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등 대형 서점의 인터넷 사이트, 알라딘·예스24 등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본사 문의전화 (02)724-6875, 6797⊙
《월간조선》은 ‘이승만과 김구’를 2001년 8월호부터 2013년 7월호까지 12년에 걸쳐 총 111회를 연재했다. 저자는 한 회당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평균 200장 이상의 원고를 썼다. 중간에 두 차례 연재를 쉬었는데, 이는 저자가 재충전(再充塡)을 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연재 기간이나 분량에 있어서 한국 잡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연재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는 연재가 끝난 후 2년에 걸쳐 새로운 학설과 정보 등을 반영하여 글을 손본 후 2015년 7월 책을 냈다.
저자, “이승만·김구, 한국 정치의 위대한 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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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의 저자 손세일 전 의원. 사진=조선DB |
저자는 이후 1980년 정치에 입문, 국회의원을 세 번 지냈다. 저자는 20여 년간의 정치인 생활을 “외도(外道)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정치 현실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이야말로 ‘정치적 패배자’가 아닌 ‘한국 정치의 위대한 거인들’이라는 각성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승만과 김구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특히 저자는 “정치를 해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조직)과 돈이라는 걸 알게 됐고, 이승만과 김구가 독립운동이나 해방 이후 정치 과정에서 보여준 여러 모습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손세일 전 의원은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 모두에게 애정을 보인다. 《이승만과 김구》의 1권 첫 본문인 ‘서설-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의 시작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과 김구는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건한 대표적인 두 정치 지도자이다. 그런 뜻으로 한 나라에 국부(國父)는 한 사람뿐이며 우리나라의 국부는 이승만이라면서 자신이 국부로 불리기를 단호히 거부한 김구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두 국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은 이승만과 김구 중 한 분을 존숭하면서 다른 이를 백안시(白眼視)하는 이들에게는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월간조선》에 글을 연재하는 동안 편집을 맡았던 기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승만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분이라는 것을 실감한 반면, 김구와 관련해서는 ‘신화(神話)’가 적지 않다는 것을 절로 느낄 수 있었다.
이승만, 1923년에 공산주의의 한계 예언
예컨대 이승만이 1923년 《태평양잡지》에 쓴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글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보자.
〈이처럼 공산당의 평등주의 사상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나서, 이승만은 그들의 주장의 부당한 점으로 1)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 2) 자본가를 없이하자 함 3)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 4)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 5)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한다 함이라는 다섯 가지를 들었다. 그는 이 다섯 가지 주장의 부당성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중략)
그런데 이후의 공산주의의 역사와 관련하여 볼 때에 이때의 이승만의 주장 가운데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자본가를 없애자는 주장의 부당성을 설명한 대목이다. 그는 공산당의 주장대로 자본가가 다 없어져서 〈재정가(기업인)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미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이용후생하는 모든 물건이 더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라고 하여, 시장경제체제의 경쟁의 원리와 기술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판단은 60년이 훨씬 더 지나서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에 의하여 옳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가을의 소련공산당대회에서 “기술혁신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이토록 발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토로했었다.〉
1923년이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지 불과 5년 후이다. 공산주의의 모순이 아직 드러나기 전이었고, 오히려 유럽이나 미국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도 인류 사상 초유의 공산주의 실험에 열광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때 이미 공산주의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꿰뚫어 본 것이다.
‘치하포 사건’의 진실
반면 ‘백범 전설’의 시작인 ‘치하포 나루 사건’의 경우, 피살자는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군 장교나 밀정이 아니라 상인이었고 이로 인해 당시 한국 정부가 곤란을 겪었음을 밝히고 있다.
〈김구가 변복한 일본인을 보자 대뜸 민비를 시해한 일본공사 미우라이거나 그 공범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순진성과 동시에 국모 시해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반일감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일본공사가 혼자서 치하포와 같은 벽지로 피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쓰치다의 소지품을 조사해보니까 그가 일본군 육군 중위였다고 한 대목이다. 그러나 쓰치다가 일본군 육군 중위였음을 증명하는 소지품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에도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해주부에서나 인천감리서에서의 세 차례에 걸친 심리에서도 쓰치다의 신분과 관련된 심문은 없었다.
이 무렵에 조선에 파견되어 있는 일본군에서 중위는, 가령 동학농민군의 해주성 공략 때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상당한 지휘권을 가진 장교였다. 그러한 신분의 일본군 중위가 변복을 하고 혼자서 벽지를 여행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략)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쓰치다의 소지품을 챙긴 일본 경찰은 쓰치다가 나가사키(長崎)현 쓰시마(對馬島)의 이즈하라(嚴原)항 사람으로서 조선에 장사하러 온 상인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보고에 따르면 쓰치다는 이즈하라항의 무역상 오쿠보 키(大久保機)의 고용인으로서 1895년 10월에 진남포에 도착하여 11월 4일에 장사를 하러 황주로 갔었으며, 사건 당시에 그는 황주 십이포(十二浦)에서 조응두(趙應斗)의 배 한 척을 세내어 통역을 대동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참이었다.〉
저자가 ‘치하포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김구를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팩트’가 그렇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승만에 대해서나 김구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과정에서의 애환들을 많이 소개하는 것만큼이나, 김구가 김원봉 등 좌파 세력과 겪었던 갈등, 상전 행세를 하는 중국 국민당 정부를 상대하는 과정에서의 마음 고생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진짜 해방전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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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하지 미군정 사령관을 만났다. 사진=조선DB |
〈김구와 김규식의 특사 두 사람이 평양에 다녀왔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남북협상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흥분된 분위기는 한결 고조되었다. 그러나 막상 김구는 이때에 일찍 경험하지 못했을 만큼 심각한 고뇌에 빠졌다.
(1948년) 4월 11일, 12일 이틀 동안 열린 국민의회 제45차 정기총회는 이승만과의 결별을 공식으로 확인하는 회의였다. 회의는 먼저 명목만 남아 있는 국민의회의 정부의장을 개선(改選)했다. 사퇴서를 제출해 놓고 있는 의장 조소앙(趙素昻)의 후임으로는 유림(柳林)을, 부의장으로는 김구의 두뇌이자 입 역할을 하는 엄항섭(嚴恒燮)을 선임했다. 이 무렵 엄항섭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북한의 거물 공작원 성시백(成始伯)과도 남북협상 문제를 두고 만나고 있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과정에는 북한의 공작원 성시백의 공작이 있었다는 얘기다. 성시백은 김일성의 직접 지시를 받는 거물 공작원으로 훗날 국회 프락치 사건 등도 그의 공작 결과였다.
거물 간첩 성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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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백의 활동을 크게 보도한 1997년 5월 26일 자 《로동신문》. 사진=조선DB |
북한의 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매우 이례적으로 1997년 5월 26일 자 2면 전체를 성시백에 대한 특집 기사로 채웠는데, 이 기사는 1949년의 국회 프락치 사건이 성시백의 공작에 따른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성시백 동지는 1948년 가을부터 괴뢰 ‘국회’ 공작에 힘을 넣었다. 괴뢰 ‘국회’ 안에는 각양각색의 분파들이 있었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분파와 그들 간의 싸움을 이용하여 우선 ‘국회’ 안에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섭하여 반미 반괴뢰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대담하게 벌여 나갔다. 그리하여 ‘국회부의장’과 수십 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 데 성공한 성시백 동지는 그들로 하여금 ‘국회’ 연단에서 ‘외군철퇴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 주었다.…”〉
‘남북협상’ 감독은 소련군정
또 소련군정이 남북협상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진행, 종결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개입했다는 내용도 있다.
〈4월 24일에는 남북연석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남쪽에서 간 대표 200여 명은 이날 황해제철소를 시찰했다.
슈티코프와 레베데프는 남북연석회의의 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슈티코프는 4월 24일에 레베데프와의 통화에서 “연석회의에 만족한다”고 말하고, “남조선 대표들에게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라. 원한다면 군대도 보여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반대했던 4김회담도 승낙했다.
슈티코프의 이날 지시사항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남북지도자협의회에 관한 것이었다.
“소회의(지도자협의회)를 개최하고 결정서를 채택한다.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외국 군대 철수 뒤에 내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권력을 접수해서 선거를 실시하고 이후 통일정부를 수립한다. 조선 민족은 단일 민족이다. 조선인들은 이 모든 것을 성취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 만일 이상의 합의사항에 반대하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으며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느냐고 따진다. 신망과 주도권을 장악한다.…”〉
대한민국의 장래 비관한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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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회의장으로 향하는 김일성과 김구. 남북협상은 소련군정의 지시 아래 김일성이 연출한 정치쇼였다. 사진=조선DB |
〈유어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오히려 바깥에 계시는 것보다는 정부에 들어가셔야 할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박사는 선생의 오랜 동지인 신익희(申翼熙), 이범석(李範奭), 이청천(李靑天)씨 같은 분들을 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참여하셔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한민당 뜻대로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박사가 국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싶어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견제하면 이 박사에게 힘이 될 것이고 만약 포기하신다면 한민당이 이 박사를 좌지우지하게 될 것인데, 선생께서도 한민당이 국가의 운명을 견제 없이 전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김구는 정치싸움 등 이미 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구나 나는 한 특정 정당의 비방 캠페인에 의하여 반미주의자로 알려졌어요.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을 확실히 도와줄 수 있는 이웃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요. 우리의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가 필요한데, 내가 정부 안에 있으면 미국인들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 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유어만은 이승만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비난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김구의 말을 부정했다.
김구는 이어 중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한국 정부 승인 전망에 대하여 유어만의 견해를 묻고 나서 매우 주목되는 발언을 했다.
“내가 남북한지도자회의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 동안 북한군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동안 남한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 만한 병력을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 병력을 남한으로 투입시키고 한순간에 여기에서 정부가 수립되고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미-소 양 주둔군이 철수하더라도 내전은 있을 수 없다고 장담한 4월 30일의 공동성명 내용과는 사뭇 다른 주장이었다. 김구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유어만은 소련인들이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영문으로 작성된 위의 대화록은 이화장의 이승만 문서에 들어 있는데, 그것은 유어만이 작성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한 것이 틀림없다.〉
‘대한민국 건국’을 이해하는 교과서
좌우의 이념대립이 극심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과 정통성에 대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감안해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인식, 해방 이후 남북협상의 전개 과정 등에 대한 이야기 등을 중심으로 소개했지만, 이 책에는 이밖에도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많이 있다. 단순히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책으로서뿐만 아니라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를 거쳐 해방,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시기를 다루는 한국 역사책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이 책에 나타난 이승만과 김구의 삶, 지적(知的) 궤적, 개성(個性)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일생은 물론 해방 전후 두 분 행적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특히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다만 ‘이승만과 김구’의 이야기가 김구 암살로 끝나는 것은 아쉽다. 원래 《월간조선》에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조갑제(趙甲濟) 월간조선사 대표는 김구의 암살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말고 이승만의 최후까지 다루어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대비열전(對比列傳)’이라는 형식 때문인지, 책 발간까지 14년에 걸쳐 글을 쓰느라 에너지를 소진했기 때문인지 저자는 김구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권당 800페이지 내외의 책이 7권이나 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문장이 유려하고 정확해서 읽기에 어렵지는 않다.
독자들, “자손들에게 물려줄 책”
이 책은 10년 전 발매되어 한동안 화제가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잊혔고 서점 판매도 중단되었다.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 가운데 종종 이 책을 구입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있어도 응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판매를 재개하면서 독자들의 호응이 이어지고 있다. 부산의 한 대학교수는 “헌책방에도 없어 도서관에서 장기 대출했었다”며 책이 다시 나온 것을 반겼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을 생각하면 비싸지 않다”(대구의 목사), “두 아들과 자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겠다”(50대 초의 직장인)는 분들도 있었다.
7권 전질에 27만900원(10% 할인 가격. 정가 30만1000원)으로 10년 전 책정된 가격 그대로다.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일 수도 있지만 근래에 500페이지 내외의 인문사회 서적이 4만~5만원쯤 하고 15만원이나 하는 1300페이지짜리 인문서도 있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등 대형 서점의 인터넷 사이트, 알라딘·예스24 등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본사 문의전화 (02)724-6875, 6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