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인수, 현인, 고복수, 나훈아, 설운도, 최백호, 김건모의 고향
⊙ 한국 가요 100년을 완성한 부산·경남 출신 천재 작사·작곡가들… 박시춘, 이재호, 손목인, 반야월, 정두수 등
⊙ 일제 강점기와 해방, 동포 귀환, 전쟁, 미군 유입 등으로 부산과 관련한 지명과 정서 대중가요 바탕 돼
⊙ 피비린내 나는 戰時였을 망정, 다양한 서구문화 흐름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던 곳이 부산
⊙ 대구·부산을 양적으로 비교해 대중가수나 가요 수에서 현저한 차이 없어. 그러나 대구는 대중문화 폄시하고 서양 클래식 중시
⊙ 한국 가요 100년을 완성한 부산·경남 출신 천재 작사·작곡가들… 박시춘, 이재호, 손목인, 반야월, 정두수 등
⊙ 일제 강점기와 해방, 동포 귀환, 전쟁, 미군 유입 등으로 부산과 관련한 지명과 정서 대중가요 바탕 돼
⊙ 피비린내 나는 戰時였을 망정, 다양한 서구문화 흐름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던 곳이 부산
⊙ 대구·부산을 양적으로 비교해 대중가수나 가요 수에서 현저한 차이 없어. 그러나 대구는 대중문화 폄시하고 서양 클래식 중시
몇 달 전 《기다린 날이 왔어요!》(2023)라는 가수 황영웅의 팬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조갑제닷컴의 조갑제(趙甲濟) 대표와 《트롯의 부활》(2021)을 펴낸 김장실(金長實)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만났다.
그간 울산 출신 황영웅의 노래에 빠져든 이들을 관찰해온 조 대표는 “그의 노래로 마음과 몸의 병을 치유하고 있다는 이들이 너무 많아 학문적 연구 대상이란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무언가에 반하면 전문가 이상으로 파고드는 그이기에 정확한 분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을 역임한 김 전 사장은 2020년부터 조갑제TV에서 ‘김장실의 트로트 이야기’를 진행했다. 2015년 11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할 정도의 노래 실력에다 타고난 흥, 대중가요를 사회과학으로 해석하는 지적 안목까지 지닌 인물이다.
두 사람은 한국 가요 100년사 속에서 이른바 PK(부산·울산·경남) 출신 대중가수들의 노래와 활약상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 대표는 부산에서 자랐고, 김 전 사장 또한 남해 출신으로 그곳 지리와 정서, 화끈 불뚝 기질의 PK 정서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 가요를 빛낸 부·울·경 음악가들

잊히지 않는 가요 황제 남인수(南仁樹·경남 진주 출신·1918~1962년)를 비롯해 현인(玄仁·부산·1919~2002년), 고복수(高福壽·울산·1911~1972년), 황금심(黃琴心·부산· 1921~2001년), 남백송(南白松·1935~2015년), 트위스트 김(부산·1936~2010년), 살아 있는 가왕(歌王) 나훈아, 톱스타 설운도는 물론이고 현철·문주란·최백호·정훈희·김수희·김건모까지 죄다 PK다.
〈MBC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부산 지역 대학 출신은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를 부른 통기타 중창단 ‘썰물’(1978)을 비롯해 ‘바다에 누워’의 혼성 듀오 ‘높은음자리’(1985), ‘난 아직도 널’의 여성 듀엣 ‘작품하나’(1987), ‘사랑이라는 건’의 전유나(1989), ‘어둠 속에서’의 최영수(1992), ‘꿈의 초상’의 전선민(1997), ‘작전타임’의 설지현(1999) 등이 있다. 은상, 동상까지 치면 배 이상 늘어난다.
2020년 1월 9일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가수 황윤성의 목청에 실려 대중을 울린 노래 ‘사랑 반 눈물 반’의 원곡자는 부산 출신 진해성이다.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톱7으로 이름을 올린 이찬원(울산), 김희재(울산), 정동원(하동)도 있고, 역시 TV조선 〈미스터로또〉에 출연 중인 나상도(남해) 또한 경남 거창군 홍보대사와 남해군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그러고 보니 방탄소년단의 지민과 정국, 2PM의 우영도 부산 갈매기를 보고 자랐다. 걸그룹 ‘에스파’의 윈터(본명 김민정), ‘이달의 소녀’의 이브(하소영)도 부산 토박이다.
한국 가요를 부흥시킨 작사가, 작곡가들도 죄다 남해안 바닷가를 끼고 성장한 이들이다. 모두 가요계의 전설이 되었다.
‘가거라 삼팔선’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전우여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한 작곡가 박시춘(朴是春·1913~1996년)은 경남 밀양이 고향이다.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불효자는 웁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산장의 여인’을 작곡한 이재호(李在鎬·1919~1960년), ‘타향’ ‘목포의 눈물’ ‘사막의 한’ ‘짝사랑’ ‘슈샤인 보이’ ‘마도로스 박’ ‘아빠의 청춘’을 작곡한 손목인(孫牧人·1913~1999년)은 경남 진주 출생이다.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울고 넘는 박달재’ ‘소양강처녀’ ‘만리포 사랑’ ‘무너진 사랑탑’의 노랫말을 만든 반야월(본명 진방남·1917~2012년)은 경남 마산이 고향이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남진의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등을 작사한 정두수(鄭斗守·1937~2016년)는 경남 하동 태생이다.
얼핏 손으로 꼽아본 게 이 정도다. 더 많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만남과 이별 일상화된 부산인들의 운명, 숙명
‘부·울·경’을 통칭해 부산 출신 대중가수들이 이처럼 많은 이유는 뭘까.
부산은 지정학적으로 바다와 해양을 낀 관문이다. 외세 침략 혹은 문화적 접변이라는 충격을 가장 먼저 받는 지역이다. 운명이라면 운명. 일제 강점기와 해방, 동포 귀환, 전쟁, 미군 유입 등으로 부산과 관련한 지명과 정서가 대중가요의 바탕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이후 트로트에 항구, 마도로스와 관련된 노래가 유난히 많은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잘 있거라 부산항’ ‘안개 낀 부산항’ ‘부산행진곡’ ‘부산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등 바다와 관련된 노래 상당수가 부산이 배경이다. 항구, 연락선, 현해탄, 이별, 향수, 자갈치시장, 영도다리, 동백섬, 을숙도, 낙동강, 남포동, 용두산, 해운대, 광안리, 송도, 태종대 등 부산이 싫든 좋든 언급돼 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대중가요 속 부산의 장소성(場所性)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2020년 1월 2일 TV조선 〈미스터트롯〉에서 당시 9세 홍잠언이 부른 ‘항구의 남자’가 떠오른다. 12명의 심사위원 전원 하트를 건넸다. 이 곡 또한 원래 제목은 ‘부산의 남자’였단다.
바다를 끼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산인들은 어릴 때부터 바다, 항구와 관련된 대중가요에 친숙할 수밖에 없다. 노래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느껴야 했을지도 모른다. 김장실 전 사장은 “‘부산’으로 통칭하는 부·울·경 사람들은 그들만의 체취가 있고 흥이 있다. 독특한 도시의 색깔도 느껴진다. 함께 취하는 독한 소주도 한몫한다. 이런 배경하에 성장한 이들 중 많은 이가 가수가 되었다”고 말했다.
가수 최백호(崔白虎)가 부른 ‘부산에 가면’(2013)이란 노래를 음미해본다.
〈부산에 가면 다시 나를 볼 수 있을까//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나를 반겼던/ 그 부산역 앞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어디로 가면은/ 너도 이제는 없는데/ 무작정 올라가는 달맞이 고개에/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이대로 손을 꼭 잡고 그때처럼 걸어보자//(하략)〉
1950~60년대 부산의 정서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감성이 느껴지는 곡이다. 최백호씨의 말이다.
“같은 바다를 마주 보는 일본의 라디오, TV를 부산에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었다. 저도 어릴 적에 일본 노래를 듣고 자랐으니까…. 아무래도 서양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 대중음악을 공부한 셈이다. 새로운 사람과 물자를 받아들이는 국제적 항구라는 환경도 부산 사람의 예술적 DNA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부산의 인문학자들은 부산은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해양도시라 수용과 포용의 정신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한 만남과 이별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일제 당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떠나간 곳이 부산이었다. 떠나가면 떠나보낸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부산에서 눈물을 흘리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안고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한국 전쟁기에 부·울·경은 수많은 피란민의 이별과 만남의 장소였다.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에는 이별의 정조와 가락이 구슬프게 담겨 있다. 부산의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과 사연과 정서가 도시 곳곳에 배어 있으니 노래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부산 사람을 울리는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유행가는 작사·작곡·가수·대중·시대·사람·사연을 요소로 하는 ‘1곡7재(一曲七材)’의 종합예술품이다. 6·25 전쟁 당시 피란 수도였던 부산에 모든 요소가 숨어 있었다.
부산의 노래 중에 강사랑이 가사를 쓰고 박시춘이 곡을 만들어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가 있다. 이 노래야말로 가장 부산다운 노래다. 눈보라가 치는 흥남부두에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와 영도다리 난간에 기대어 초승달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목이 메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이 노래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1950년대 부산의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려야 한다.
전쟁으로 형제도 부모도 잃고 부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이 노래를 듣고 피가 거꾸로 솟았을지 모른다. 대중가요가 사랑받는 이유는 시대의 특수한 상황과 정서를 잘 담기 때문이다. 영도다리를 배경으로 널리 불린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 다리를 전국적인 명물로 부산의 상징물로 만들었다.
여기서 잠깐. ‘굳세어라 금순아’는 2003년 11월 28일 영도다리에서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을 정도로 부산=영도=‘굳세어라…’로 통하는 한 몸이지만, 실제 배경은 부산이 아니라 대구였다고 한다. 영남대 이동순(李東洵) 명예교수의 주장이다.
“‘굳세어라…’는 이병주, 박시춘, 강사랑 등이 점심 무렵 가까운 식당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월남민들이 노점상을 열고 있는 시장 좌판대 앞을 지나다가 강사랑이 문득 작품의 착상을 얻었다. 식당에 도착하는 동안 길에서 1절을 썼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즉시 가사의 전체 형태를 탈고하여 이를 작곡가 박시춘에게 보여주었다. 박시춘은 작곡에 대한 감흥이 솟구쳐 당일 중으로 완성하여 음반 제작을 완결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니까 ‘굳세어라…’의 작품 착상 배경은 부산과 관계가 없었지만 부르는 사람들이 부산과 영도다리를 생각하면서 불러 부산의 노래가 되었다.
이 곡을 부른 현인이 누구인가. 부산 영도 출신으로 해방 이후 처음 음반을 내 ‘대한민국 가수 1호’라는 별칭을 얻은 가수다.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단번에 스타로 등극한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일본인 계모 밑에서 자랐으며, 학교는 영도 옆 구포초등을 다녔다. 당시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 들어가 샹송과 재즈 공부에 심취했으며, 중공군에게 붙들려 죽을 고비를 겪다가 해방을 맞아 구사일생으로 돌아온다.
부산의 곡,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남인수가 부른 ‘이별의 부산정거장’ 역시 가장 부산다운 노래다. 1952년 어느 가을날. 유호와 박시춘 명콤비는 자갈치시장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음은 김장실 전 사장이 설명하는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이다.
“1952년 어느 가을날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유호가 부산 공연을 마치고 자갈치시장에서 술을 마시다 문득 부산에서 살며 느낀 ‘그동안의 이렇게 저렇게 얽힌 정(情), 그런 노래를 하나 남기고 가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숙소로 오자 박시춘은 기타를 잡았고 멜로디가 튕겨 나왔다. 유호는 노래 시를 가다듬었다. 부산 사람들의 끈끈한 정을 떠올리면서 노래 시를 써 내려갔다.”
노랫말은 이렇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박시춘은 남인수에게 곡을 주었다. 한두 번 나직이 불러보고 남인수는 빙긋이 웃었다.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는 목청을 돋우어 정식으로 불렀다. 특유의 목소리가 부산을 떠나는 피란민과 이들을 보내는 경상도 아가씨의 이별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세상에 나왔다.
가수 남인수는 식민지 조선의 가요 황제였다. 26년간 가수로 활동하며 1000곡 가까운 노래를 불렀다. ‘애수의 소야곡’ ‘꼬집힌 풋사랑’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낙화유수’ ‘무너진 사랑탑’ ‘추억의 소야곡’ ‘청춘 고백’이 대표곡이다.
남인수는 경남 진주 태생이다. 경주 최씨 집안으로 본명은 최창수. 부친이 일찍 타계해 어머니가 강씨 집안으로 재가해 강문수로 개명했다. 소년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전구 공장에서 일했고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으나 천부적인 미성에 더하여 노래에 대한 센스가 뛰어났다고 한다.
한때 현인과 남인수는 라이벌이었다. 1946년 국도극장에서 열린 합동공연 때 포스터 제목이 〈남인수 대 현인 가요 대합전 15회전〉이었다. 마치 권투경기 벽보와 같았다. 남인수는 하얀 신사복에 백구두, 현인은 까만 옷에 까만 구두를 신고 나와 청중까지 팬으로 반반 나뉘어 열광적이었다고 한다. 현인은 여학생과 아줌마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고 남인수는 여성, 특히 화류계 여성들이 좋아했다고 전한다.
이호섭이 말하는 부·울·경 사람들의 음악 DNA
방송인이자 문학박사인 이호섭(李虎燮)은 히트곡 제조기다. 박남정의 ‘사랑의 불시착’, 주현미의 ‘잠깐만’ ‘짝사랑’을 작사하고, 설운도의 ‘다 함께 차차차’, 윤희상의 ‘카스바의 여인’, 이자연의 ‘찰랑찰랑’, 편승엽의 ‘찬찬찬’ 등을 작곡했다. 대학교수이자 트로트 가수로도 활약했다.
경남 의령 출신인 그는 KBS 〈전국노래자랑〉 단골 심사위원이었으며 작고하기 전 송해 선생의 대타 MC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현재 고향인 의령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이호섭가요제’를 열고 있다. 오는 4월 ‘8회 가요제’를 준비 중이다. 그에게 부·울·경 가수의 DNA에 대해 물어보았다.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인 부산에 미군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UN군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팝송, 재즈 등을 비롯해 다양한 음악이 쏟아졌다. 그리고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임시수도에서 직접 상영됐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전시(戰時)였을 망정, 다양한 서구 문화 흐름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임시수도 부산이 레코드 시대를 선도한 점, 일찍부터 서양음악 교육을 받은 선각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6·25 이후의 상황이 이랬지만 일제 때도 마찬가지였다. 레코드 시대가 도래하면서 부산·경남 가수들이 우리 가요계를 쥐락펴락했다.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은 작사·작곡자도 있다. 흥미롭게도 이분들은 일찍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음악을 공부한 분들이다. 예컨대 작사가 이재호 선생의 경우 일본고등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그러니 새로운 음악 사조에 익숙하고 이를 국내에 전파하는 데 남들보다 앞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방송의 영향 또한 크다고 했다.
“자정이 넘으면 당시 라디오 방송이 모두 정파(停播)가 됐다. 그런데 부산과 경남은 일본의 방송, 대만의 방송이 디렉트로 들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새로운 음악의 사조를 가장 빨리, 신속하게 흡수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갖춘 곳이 부·울·경으로 통칭하는 부산이었다. 심지어 평양 방송까지 들렸으니까. 저는 북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충성의 노래’, 북한의 피바다 가극단에서 각색한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 같은 작품들을 이미 어렸을 때 다 듣고 자랐다. 이런 음악의 세례를 받았으니 부산 사람들은 일찍부터 음악에 귀가 뚫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요즘 부산·경남 가수들의 노래도 가만히 들어보면 같은 트로트라도 정통의 트로트 위에 새로운 유웨이브 물결이 가미돼 말하자면 크로스 오버 뮤직”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바다를 끼고 있지만 부·울·경의 음악 분위기는 호남의 목포와 다르다. 목포는 부산·원산·인천에 이은 네 번째 개항지인데 전설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李蘭影·1916~1965년)을 낳은 곳이다.
“목포를 수식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1흑3백’이다. 3백은 나주평야 일대의 쌀과 신안의 소금, 고하도의 면화를, 1흑은 김을 뜻한다. 그만큼 풍부한 자원이 모여든 곳이라는 뜻이다. 수탈이 극심했기에 저항도 컸던 곳이 목포다.
호남은 예부터 남도창(唱)이 유행했고, 미술로 보면 남종화가 풍부하게 발전했다. 아무래도 한국적 서정에 바탕을 둔 판소리류의 전통 음악과 친숙한 지역이다.
그러나 부산이라는 항구도시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대륙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며 성장했다.”
부산, 戰後 음반 산업의 메카
부산 가요의 최전성기는 195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초까지 10년 정도다. 전후 상처 난 민족의 가슴을 보듬어준 건 부산의 음반 산업이었다. 서울의 일류 음반사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방송사들도 부산에 정착했다. 그러자 문화예술인들 또한 속속 집결했다.
당시 부산에 미도파레코드, 도미도레코드가 있었는데 두 회사가 전국의 대중가요 창작 및 제작을 독점할 정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부산이 대중가요의 메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미도파사는 부산시 서구 남부민동 입구에, 도미도사는 부산 서구 아미동에 있었다. 그때 제작한 음반은 양면에 2곡씩 수록된 잘 깨지는 재질의 SP판이었다.
미도파사에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작곡한 박시춘과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부산 출신 백영호가 전속으로 있었다. 또 작사가로는 ‘한국 연예계의 등불’이었던 반야월, 야인초, 월견초가 있었고 백영호와 콤비를 이루던 한산도도 있었다. 전속가수로는 남인수·백년설·백설희·진송남·방태원·정향·신해성·남상규·후랑크백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어딜 가나 그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도미도레코드사는 1·4 후퇴로 부산으로 내려간 작곡가 한복남이 축음기 바늘 장사로 연명하던 중 미제 녹음기를 우연히 구해 세우게 된 회사다. 쌀가마니와 미국 담요를 둘러쳐 대충 방음을 하고 밤새워 녹음했는데 음반은 엿장수가 수집하여 재생한 고물 레코드를 숯불에 구워 소위 빈대떡 레코드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하에 탄생한 대표적인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였다.
도미도사에는 수백여 곡을 작곡해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던 ‘물방아 도는 내력’의 이재호, ‘꿈에 본 내 고향’의 김기태도 함께 있었다. 작사가로는 야인초(김봉철), 월견초(서정권), 천봉, 반야월, 차경철 등이 노랫말을 만들었다.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당시 부산에는 코로나, 스타, 유니온, 신태평 등 수십 개의 레코드 회사가 난립했다. 하지만 대개 도미도레코드처럼 열악하고 영세했다. 이렇게 만든 음반에 라벨을 붙이고 막걸리를 배달하는 짐자전거에 실어 국제시장에 직접 나가서 팔았다.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 일대의 다방을 돌면서 가족이 음반과 바늘을 팔기도 했다. 그때 나온 노래가 ‘홍콩아가씨’(금사향), ‘물방아 도는 내력’(박재홍), ‘꿈에 본 내 고향’(한정무) 등이다. ‘신라의 칼’ ‘에레나가 된 순이’(한정무) 등은 직접 자신이 곡을 붙인 노래다. 신인가수 허민을 발굴해 ‘페르샤 왕자’ ‘백마강’을 히트시키기도 했다.”
임시수도가 되면서 전시 방송국도 들어섰다. 부산 방송국은 이재호, 대구 방송국은 작곡가 이병주, 그리고 마산 방송국은 반야월을 중심으로 가수들이 전쟁과 피란을 주제로 노래했다. ‘마산 엘레지’ ‘눈 내리는 마산항’ 등이 당시 반야월이 만든 노래다.
더불어 미8군 클럽이나 극장, 댄스홀, 카바레 등도 차차 들어섰다. 미국 스탠더드 팝 형식의 곡들이 대중가요에 스며든 때도 이 시기다. 맘보, 차차, 부기우기 등 댄스음악이 그 예다. 최소원이 쓴 〈한국전쟁 시기 부산에서의 음악 활동에 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노래 ‘닐리리 맘보’ ‘코리아 맘보’ ‘노래가락 차차차’ 등 제목에서 이미 팝 리듬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노래의 후렴구는 해당 장르의 리듬이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팝 리듬을 가진 후렴구를 제외한 나머지 구절의 가사나 선율은 민요나 트로트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부산 사람들이 다양하고 풍성한 음악적 세례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로 악극이나 창극, 대중가요와 버라이어티쇼를 주된 레퍼토리로 삼은 대중적인 공연이 극장식 쇼 공연을 통해 펼쳐졌다. 부산에는 가수나 춤꾼, 악기 연주자, 작곡가, 대본 작가와 연출자, 음반 기획자와 제작자 외에 연극인들까지 모여 무대가 비좁을 정도였다. 또 예술 종군(從軍)의 군악 연주, 피란민을 위한 공연, 그리고 이화여중생의 송환된 포로용사들을 위한 공연이 이뤄졌다.
이런 풍성한 음악적 세례를 받았으니 피란지 부·울·경 사람들이 훗날 거둔 예술적 성취는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부산과 대구의 대중음악 비교
부·울·경 출신 대중가수들은 많은데 대구(경북 포함) 출신 가수들은 왜 기억에 없을까. 대구·경북 역시 부·울·경 못지않게 새로운 사조의 문물을 열심히 받아들인 곳이다.
박인건(朴仁建) 국립극장장은 “대구 오페라와 뮤지컬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대구·경북 지역 음대에서 인재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라며 “국내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간 곳이 대구다.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를 통해 대구에 서양음악이 보급되고 뿌리내리는 과정에 피아노가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대구의 대중음악 역사는 부산과 비교해 뿌리가 약한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많은 대중가수가 대구를 공연하기 힘든 최악의 도시로 꼽는 경향이 있다. 누가 대구 출신 가수인지 또한 기억에 없다.
그러나 1950년대 초반 대구는 말 그대로 한국 가요사의 중심이자 메카였다. 1947년 대구 중구 화전동에 오리엔트레코드사가 창립되어 많은 대중가요가 쏟아졌다. 이동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귀국선’(이인권), ‘전우야 잘 가라’(현인), ‘아내의 노래’(심연옥), ‘전선야곡’(신세영), ‘님 계신 전선’(금사향) 등 200여 곡 이상이란다. 이 교수는 대구근대가요사박물관 건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오래전부터 펴고 있다.
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대구 관련 로컬송이 많지 않아 대구가 배출한 대중가수와 대중음악 역사가 빈약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대구 출신 대중가수로 1930년대 장옥조, 최계란이 있고, 특히 ‘고향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장옥조는 대구 최초의 대중가수였다. 가요사에 대구역과 관련한 곡이 12곡이나 되고 고모령(대구 만촌동)이 언급된 곡도 4곡(‘비 내리는 고모령’ 등)이다.
능금, 사과 특산지로 대구를 부각시킨 곡이 9곡인데 길옥윤이 작사·작곡하고 패티 김이 노래한 ‘능금꽃 피는 고향’에는 대구 팔공산 등 구체적인 지명이 등장한다.”
최규성씨에 따르면 1970년대 대구가 배출한 유명 가수로 국내 최초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 ‘구름, 들꽃, 돌, 연인’ ‘뭉게구름’을 부른 이정선, 애플시스터즈, 권은경, 김동아가 있고 80년대에는 한국 모던포크의 계승자 김광석, 포크 팝 가수 박학기, 그룹 신촌블루스 출신의 김형철과 신재형, 록그룹 각시탈의 김태욱, 메탈그룹 백두산의 기타리스트 김도균, 싱어송라이터 김두수 등이 있다. 90년대엔 양파, 윤영배, 박창근(포크그룹 ‘우리 여기에’)이,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도 김태욱, 장우혁, 방탄소년단의 ‘슈가’와 ‘뷔’ 등이 모두 대구 토박이다. 일부만 소개해도 이 정도다.
그렇다면 대구 출신 가수들이 생각보다 많은데도 왜 대구의 대중음악 위력은 부산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이동순 교수의 설명이다.
“우선 양적으로 대비해 볼 때 대구·경북과 부산·경남 출신 가수의 숫자에서 현저한 차이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우수한 작품 산출로 보면 부산·경남의 테마가 월등히 두드러진다. 그 까닭은 바다와 항구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가수 집단에서 부산이 대구를 압도
― 대구와 부산 사람들이 대중가요를 대하는 인식의 차이는?
“대중가수와 대중가요를 인식하는 차이는 대구·경북이 한층 보수적·폐쇄적이다. 반면 부산·경남은 진취·개방적이다. 분단과 전쟁, 피란살이를 겪으면서 이런 현상은 한층 두드러졌다.
대구는 퇴계학의 영향권 속에서 도학적 인식이 강해 체통, 체면, 품격 따위를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대중문화를 폄시하고 서양 고전음악, 성악, 오페라 등의 공연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
이동순 교수는 “그 결과, 대구는 지금도 오페라하우스 등 서양 고전음악 중심의 취향을 중시하며 보존에 힘을 기울인다”고 했다.
“대구는 박태준(朴泰俊·1900 ~1986년),현제명(玄濟明·1902~ 1960년) 등이 이룩한 음악적 성과를 1950년대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의 업적보다 한층 중요시한다.
부산·경남은 피란 시기 도미도, 미도파, 코로나 레코드 등 SP음반 제작회사가 다양하게 운영되었고, 가수 집단이 적극적으로 배출되었다. 이 세력이 대구를 압도했다.”⊙
그간 울산 출신 황영웅의 노래에 빠져든 이들을 관찰해온 조 대표는 “그의 노래로 마음과 몸의 병을 치유하고 있다는 이들이 너무 많아 학문적 연구 대상이란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무언가에 반하면 전문가 이상으로 파고드는 그이기에 정확한 분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을 역임한 김 전 사장은 2020년부터 조갑제TV에서 ‘김장실의 트로트 이야기’를 진행했다. 2015년 11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할 정도의 노래 실력에다 타고난 흥, 대중가요를 사회과학으로 해석하는 지적 안목까지 지닌 인물이다.
두 사람은 한국 가요 100년사 속에서 이른바 PK(부산·울산·경남) 출신 대중가수들의 노래와 활약상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 대표는 부산에서 자랐고, 김 전 사장 또한 남해 출신으로 그곳 지리와 정서, 화끈 불뚝 기질의 PK 정서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 가요를 빛낸 부·울·경 음악가들

잊히지 않는 가요 황제 남인수(南仁樹·경남 진주 출신·1918~1962년)를 비롯해 현인(玄仁·부산·1919~2002년), 고복수(高福壽·울산·1911~1972년), 황금심(黃琴心·부산· 1921~2001년), 남백송(南白松·1935~2015년), 트위스트 김(부산·1936~2010년), 살아 있는 가왕(歌王) 나훈아, 톱스타 설운도는 물론이고 현철·문주란·최백호·정훈희·김수희·김건모까지 죄다 PK다.
〈MBC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부산 지역 대학 출신은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를 부른 통기타 중창단 ‘썰물’(1978)을 비롯해 ‘바다에 누워’의 혼성 듀오 ‘높은음자리’(1985), ‘난 아직도 널’의 여성 듀엣 ‘작품하나’(1987), ‘사랑이라는 건’의 전유나(1989), ‘어둠 속에서’의 최영수(1992), ‘꿈의 초상’의 전선민(1997), ‘작전타임’의 설지현(1999) 등이 있다. 은상, 동상까지 치면 배 이상 늘어난다.
2020년 1월 9일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가수 황윤성의 목청에 실려 대중을 울린 노래 ‘사랑 반 눈물 반’의 원곡자는 부산 출신 진해성이다.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톱7으로 이름을 올린 이찬원(울산), 김희재(울산), 정동원(하동)도 있고, 역시 TV조선 〈미스터로또〉에 출연 중인 나상도(남해) 또한 경남 거창군 홍보대사와 남해군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그러고 보니 방탄소년단의 지민과 정국, 2PM의 우영도 부산 갈매기를 보고 자랐다. 걸그룹 ‘에스파’의 윈터(본명 김민정), ‘이달의 소녀’의 이브(하소영)도 부산 토박이다.
한국 가요를 부흥시킨 작사가, 작곡가들도 죄다 남해안 바닷가를 끼고 성장한 이들이다. 모두 가요계의 전설이 되었다.
‘가거라 삼팔선’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전우여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한 작곡가 박시춘(朴是春·1913~1996년)은 경남 밀양이 고향이다.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불효자는 웁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산장의 여인’을 작곡한 이재호(李在鎬·1919~1960년), ‘타향’ ‘목포의 눈물’ ‘사막의 한’ ‘짝사랑’ ‘슈샤인 보이’ ‘마도로스 박’ ‘아빠의 청춘’을 작곡한 손목인(孫牧人·1913~1999년)은 경남 진주 출생이다.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울고 넘는 박달재’ ‘소양강처녀’ ‘만리포 사랑’ ‘무너진 사랑탑’의 노랫말을 만든 반야월(본명 진방남·1917~2012년)은 경남 마산이 고향이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남진의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등을 작사한 정두수(鄭斗守·1937~2016년)는 경남 하동 태생이다.
얼핏 손으로 꼽아본 게 이 정도다. 더 많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만남과 이별 일상화된 부산인들의 운명,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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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부산항 전경이다. 사진=부산진구 |
부산은 지정학적으로 바다와 해양을 낀 관문이다. 외세 침략 혹은 문화적 접변이라는 충격을 가장 먼저 받는 지역이다. 운명이라면 운명. 일제 강점기와 해방, 동포 귀환, 전쟁, 미군 유입 등으로 부산과 관련한 지명과 정서가 대중가요의 바탕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이후 트로트에 항구, 마도로스와 관련된 노래가 유난히 많은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잘 있거라 부산항’ ‘안개 낀 부산항’ ‘부산행진곡’ ‘부산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등 바다와 관련된 노래 상당수가 부산이 배경이다. 항구, 연락선, 현해탄, 이별, 향수, 자갈치시장, 영도다리, 동백섬, 을숙도, 낙동강, 남포동, 용두산, 해운대, 광안리, 송도, 태종대 등 부산이 싫든 좋든 언급돼 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대중가요 속 부산의 장소성(場所性)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2020년 1월 2일 TV조선 〈미스터트롯〉에서 당시 9세 홍잠언이 부른 ‘항구의 남자’가 떠오른다. 12명의 심사위원 전원 하트를 건넸다. 이 곡 또한 원래 제목은 ‘부산의 남자’였단다.
바다를 끼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산인들은 어릴 때부터 바다, 항구와 관련된 대중가요에 친숙할 수밖에 없다. 노래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느껴야 했을지도 모른다. 김장실 전 사장은 “‘부산’으로 통칭하는 부·울·경 사람들은 그들만의 체취가 있고 흥이 있다. 독특한 도시의 색깔도 느껴진다. 함께 취하는 독한 소주도 한몫한다. 이런 배경하에 성장한 이들 중 많은 이가 가수가 되었다”고 말했다.
가수 최백호(崔白虎)가 부른 ‘부산에 가면’(2013)이란 노래를 음미해본다.
〈부산에 가면 다시 나를 볼 수 있을까//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나를 반겼던/ 그 부산역 앞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어디로 가면은/ 너도 이제는 없는데/ 무작정 올라가는 달맞이 고개에/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이대로 손을 꼭 잡고 그때처럼 걸어보자//(하략)〉
1950~60년대 부산의 정서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감성이 느껴지는 곡이다. 최백호씨의 말이다.
“같은 바다를 마주 보는 일본의 라디오, TV를 부산에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었다. 저도 어릴 적에 일본 노래를 듣고 자랐으니까…. 아무래도 서양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 대중음악을 공부한 셈이다. 새로운 사람과 물자를 받아들이는 국제적 항구라는 환경도 부산 사람의 예술적 DNA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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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바다축제 모습이다. 개막식에 초대된 가수가 열창하자 관광객들이 호응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일제 당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떠나간 곳이 부산이었다. 떠나가면 떠나보낸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부산에서 눈물을 흘리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안고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한국 전쟁기에 부·울·경은 수많은 피란민의 이별과 만남의 장소였다.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에는 이별의 정조와 가락이 구슬프게 담겨 있다. 부산의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과 사연과 정서가 도시 곳곳에 배어 있으니 노래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부산 사람의 기질, 의리와 저항은…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문장이야말로 부산 정신을 압축한 말이다. 일제 강점기 부두 노동을 하려고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 고단한 타국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동포들, 6·25 전쟁을 피해 전국 각처에서 밀려든 피란민들, 1960~70년대 경제개발기에 신발, 봉제, 목재, 완구 관련 산업 취업을 위해, 외항선을 타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몰려든 구직자 등 이향(離鄕)이 일상화된 항구도시였다. 안정적이고 정착적인 삶보다는 끊임없이 만남과 헤어짐이 이루어진 순리가 지역민의 기질에 녹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만남과 이별이 생활화된 상황에서 최소한의 자기 정체감을 공동체 속에서 위안받으려는 몸부림이 바로 의리에 대한 강조로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부산 출신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2001)를 대표로 다수의 대중영화에서 부산인의 의리는 일부 깡패 집단의 의리로 그 이미지가 왜곡되어 있기도 하다. 초원복국집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가 남이가’의 정치, 폐쇄적 의리라는 이미지는 더욱더 부산 사람들의 의리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인식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김 원장은 지적한다. 〔김형균의 〈부산정신과 부산인 기질에 관한 소고〉(2019) 참조〕 |
부산 사람을 울리는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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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부산역, 부산세관 제1부두의 모습이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3개월 동안 부산항을 통해 유엔군 10만 명과 군수물자 200만t이 들어왔다. 사진=부산시 |
부산의 노래 중에 강사랑이 가사를 쓰고 박시춘이 곡을 만들어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가 있다. 이 노래야말로 가장 부산다운 노래다. 눈보라가 치는 흥남부두에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와 영도다리 난간에 기대어 초승달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목이 메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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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작곡가 박시춘 |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이 노래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1950년대 부산의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려야 한다.
전쟁으로 형제도 부모도 잃고 부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이 노래를 듣고 피가 거꾸로 솟았을지 모른다. 대중가요가 사랑받는 이유는 시대의 특수한 상황과 정서를 잘 담기 때문이다. 영도다리를 배경으로 널리 불린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 다리를 전국적인 명물로 부산의 상징물로 만들었다.
여기서 잠깐. ‘굳세어라 금순아’는 2003년 11월 28일 영도다리에서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을 정도로 부산=영도=‘굳세어라…’로 통하는 한 몸이지만, 실제 배경은 부산이 아니라 대구였다고 한다. 영남대 이동순(李東洵) 명예교수의 주장이다.
“‘굳세어라…’는 이병주, 박시춘, 강사랑 등이 점심 무렵 가까운 식당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월남민들이 노점상을 열고 있는 시장 좌판대 앞을 지나다가 강사랑이 문득 작품의 착상을 얻었다. 식당에 도착하는 동안 길에서 1절을 썼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즉시 가사의 전체 형태를 탈고하여 이를 작곡가 박시춘에게 보여주었다. 박시춘은 작곡에 대한 감흥이 솟구쳐 당일 중으로 완성하여 음반 제작을 완결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니까 ‘굳세어라…’의 작품 착상 배경은 부산과 관계가 없었지만 부르는 사람들이 부산과 영도다리를 생각하면서 불러 부산의 노래가 되었다.
이 곡을 부른 현인이 누구인가. 부산 영도 출신으로 해방 이후 처음 음반을 내 ‘대한민국 가수 1호’라는 별칭을 얻은 가수다.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단번에 스타로 등극한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일본인 계모 밑에서 자랐으며, 학교는 영도 옆 구포초등을 다녔다. 당시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 들어가 샹송과 재즈 공부에 심취했으며, 중공군에게 붙들려 죽을 고비를 겪다가 해방을 맞아 구사일생으로 돌아온다.
부산의 곡,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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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노래한 김장실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 |
“1952년 어느 가을날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유호가 부산 공연을 마치고 자갈치시장에서 술을 마시다 문득 부산에서 살며 느낀 ‘그동안의 이렇게 저렇게 얽힌 정(情), 그런 노래를 하나 남기고 가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숙소로 오자 박시춘은 기타를 잡았고 멜로디가 튕겨 나왔다. 유호는 노래 시를 가다듬었다. 부산 사람들의 끈끈한 정을 떠올리면서 노래 시를 써 내려갔다.”
노랫말은 이렇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박시춘은 남인수에게 곡을 주었다. 한두 번 나직이 불러보고 남인수는 빙긋이 웃었다.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는 목청을 돋우어 정식으로 불렀다. 특유의 목소리가 부산을 떠나는 피란민과 이들을 보내는 경상도 아가씨의 이별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세상에 나왔다.
가수 남인수는 식민지 조선의 가요 황제였다. 26년간 가수로 활동하며 1000곡 가까운 노래를 불렀다. ‘애수의 소야곡’ ‘꼬집힌 풋사랑’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낙화유수’ ‘무너진 사랑탑’ ‘추억의 소야곡’ ‘청춘 고백’이 대표곡이다.
남인수는 경남 진주 태생이다. 경주 최씨 집안으로 본명은 최창수. 부친이 일찍 타계해 어머니가 강씨 집안으로 재가해 강문수로 개명했다. 소년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전구 공장에서 일했고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으나 천부적인 미성에 더하여 노래에 대한 센스가 뛰어났다고 한다.
한때 현인과 남인수는 라이벌이었다. 1946년 국도극장에서 열린 합동공연 때 포스터 제목이 〈남인수 대 현인 가요 대합전 15회전〉이었다. 마치 권투경기 벽보와 같았다. 남인수는 하얀 신사복에 백구두, 현인은 까만 옷에 까만 구두를 신고 나와 청중까지 팬으로 반반 나뉘어 열광적이었다고 한다. 현인은 여학생과 아줌마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고 남인수는 여성, 특히 화류계 여성들이 좋아했다고 전한다.
이호섭이 말하는 부·울·경 사람들의 음악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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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섭 작곡가 |
경남 의령 출신인 그는 KBS 〈전국노래자랑〉 단골 심사위원이었으며 작고하기 전 송해 선생의 대타 MC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현재 고향인 의령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이호섭가요제’를 열고 있다. 오는 4월 ‘8회 가요제’를 준비 중이다. 그에게 부·울·경 가수의 DNA에 대해 물어보았다.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인 부산에 미군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UN군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팝송, 재즈 등을 비롯해 다양한 음악이 쏟아졌다. 그리고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임시수도에서 직접 상영됐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전시(戰時)였을 망정, 다양한 서구 문화 흐름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임시수도 부산이 레코드 시대를 선도한 점, 일찍부터 서양음악 교육을 받은 선각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6·25 이후의 상황이 이랬지만 일제 때도 마찬가지였다. 레코드 시대가 도래하면서 부산·경남 가수들이 우리 가요계를 쥐락펴락했다.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은 작사·작곡자도 있다. 흥미롭게도 이분들은 일찍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음악을 공부한 분들이다. 예컨대 작사가 이재호 선생의 경우 일본고등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그러니 새로운 음악 사조에 익숙하고 이를 국내에 전파하는 데 남들보다 앞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방송의 영향 또한 크다고 했다.
“자정이 넘으면 당시 라디오 방송이 모두 정파(停播)가 됐다. 그런데 부산과 경남은 일본의 방송, 대만의 방송이 디렉트로 들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새로운 음악의 사조를 가장 빨리, 신속하게 흡수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갖춘 곳이 부·울·경으로 통칭하는 부산이었다. 심지어 평양 방송까지 들렸으니까. 저는 북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충성의 노래’, 북한의 피바다 가극단에서 각색한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 같은 작품들을 이미 어렸을 때 다 듣고 자랐다. 이런 음악의 세례를 받았으니 부산 사람들은 일찍부터 음악에 귀가 뚫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요즘 부산·경남 가수들의 노래도 가만히 들어보면 같은 트로트라도 정통의 트로트 위에 새로운 유웨이브 물결이 가미돼 말하자면 크로스 오버 뮤직”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바다를 끼고 있지만 부·울·경의 음악 분위기는 호남의 목포와 다르다. 목포는 부산·원산·인천에 이은 네 번째 개항지인데 전설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李蘭影·1916~1965년)을 낳은 곳이다.
“목포를 수식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1흑3백’이다. 3백은 나주평야 일대의 쌀과 신안의 소금, 고하도의 면화를, 1흑은 김을 뜻한다. 그만큼 풍부한 자원이 모여든 곳이라는 뜻이다. 수탈이 극심했기에 저항도 컸던 곳이 목포다.
호남은 예부터 남도창(唱)이 유행했고, 미술로 보면 남종화가 풍부하게 발전했다. 아무래도 한국적 서정에 바탕을 둔 판소리류의 전통 음악과 친숙한 지역이다.
그러나 부산이라는 항구도시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대륙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며 성장했다.”
부산 문학이 한국 문학이던 시절 대중음악과 마찬가지로 한국 문학 또한 6·25 사변을 겪으며 임시수도 부산으로 몸을 피했다. 황순원(黃順元·1915~2000년)의 《곡예사(曲藝師)》(1952), 안수길(安壽吉·1911~1977년)의 《제3인간형》(1953), 김동리(金東里·1913~1995년)의 《밀다원시대》(1955), 손창섭(孫昌涉·1922~2010년)의 《비 오는 날》(1953), 이호철(李浩哲·1932~2016년)의 《탈향(脫鄕)》(1955) 등이 부산을 무대로 쓰였다. 예컨대 《곡예사》의 배경은 부산 보수공원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보수공원은 현 중구 보수1동 146번지와 60번지 일대, 통칭 책방골목 계단 위쪽이다. 인근에 남항, 즉 자갈치시장이 있고 노천 목로주점이 소설에 등장한다. 소설 속 화자(話者)는 갈매기를 보면서 ‘생선가시’ 같은 잔 걱정을 하며 현실을 이겨나간다. 김동리의 《밀다원시대》를 펼치면 부산의 수많은 지명(地名)이 등장한다. 통신사 지국이 있던 보수동과 밀다원이 있던 광복동, 그리고 밀다원이 없어진 뒤에 스타다방이 있던 남포동, 금강다방이 있던 창선동이 등장한다. 부산은 더는 달아날 수 없는 ‘땅끝’이자 ‘허무의 공간’ ‘절박한 최후의 공간’ ‘새우잠’을 자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몸부림일지언정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당대 문단과 문화예술인들은 살아 있음을, 살아가야 함을 말했다. 〈피란 남하 직후 광복동에 있던 밀다원다방을 비롯해 금강, 춘추, 녹원, 청구 다방은 피란문단의 항구이자 제각기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거처이기도 했다. 밀다원다방은 2층이었는데 이곳에서 심심치 않게 시화전이 열리었고, 제 집 제 방이 없는 피란민들이라 가뭄의 콩나기 격인 고료 때문에 모두가 이 밀다원에서 원고를 쓰고 이곳에서 고료를 받으면 도떼기시장으로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백반에 시장기를 메우고 소주 서너 잔에 생기를 돋구고 얼큰해진 기본으로 다시 밀다원으로 돌아와 분에 넘치는 음악을 듣는가 하면, 선창가 갈매기 술집에 앉아 빗발 속에 껌벅이는 등대를 바라보며 동동주를 마시고 피란살이의 시름과 허탈, 자학, 울분을 삼키느라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이봉구의 〈피난부산문단〉(1971) 중에서) 6·25 사변과 1·4 후퇴로 전국의 문인들에게 절박한 일은 먹고 자는 일이었다. 이전부터 부산을 삶의 터로 잡고 있던 문학인들은 이들 피란 온 문학인들의 잠잘 곳을 마련해주는 일이나 무엇이든 도와주려는 일로 바빴다. 대구에서 1951년 5월 육군종군작가단이 최상덕(崔象德)을 단장으로 결성되었고, 같은 해 마해송(馬海松·1905~1966년 )을 단장으로 한 공군종군문인단도 대구에서 결성되었다. 부산에선 해군종군작가단이 결성되었다. 염상섭(廉想涉·1897~1963년), 이무영(李無影·1908~1960년), 안수길, 이선구가 문관(文官)으로 참여했다. 이후 박계주(朴啓周), 박연희(朴淵禧), 김종호(金宗浩), 이종환(李鍾桓), 윤고종(尹鼓鍾) 등이 참여했다. 절망에서의 적극적 탈출을 실존주의 철학의 견지에서 모색하는 경향(장용학 등)이 있는가 하면, 인간성 상실의 아픔이 소외의식(손창섭 등)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부산 문학이 한국 문학이었고 부산 문단이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
부산, 戰後 음반 산업의 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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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피란 수도였던 부산이 국제항만 도시로 변모했다. 부산시가 세계 명품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광안대교 야경이다. 사진=부산시 |
당시 부산에 미도파레코드, 도미도레코드가 있었는데 두 회사가 전국의 대중가요 창작 및 제작을 독점할 정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부산이 대중가요의 메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미도파사는 부산시 서구 남부민동 입구에, 도미도사는 부산 서구 아미동에 있었다. 그때 제작한 음반은 양면에 2곡씩 수록된 잘 깨지는 재질의 SP판이었다.
미도파사에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작곡한 박시춘과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부산 출신 백영호가 전속으로 있었다. 또 작사가로는 ‘한국 연예계의 등불’이었던 반야월, 야인초, 월견초가 있었고 백영호와 콤비를 이루던 한산도도 있었다. 전속가수로는 남인수·백년설·백설희·진송남·방태원·정향·신해성·남상규·후랑크백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어딜 가나 그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도미도레코드사는 1·4 후퇴로 부산으로 내려간 작곡가 한복남이 축음기 바늘 장사로 연명하던 중 미제 녹음기를 우연히 구해 세우게 된 회사다. 쌀가마니와 미국 담요를 둘러쳐 대충 방음을 하고 밤새워 녹음했는데 음반은 엿장수가 수집하여 재생한 고물 레코드를 숯불에 구워 소위 빈대떡 레코드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하에 탄생한 대표적인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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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히트곡을 낳은 작사가 반야월. |
“당시 부산에는 코로나, 스타, 유니온, 신태평 등 수십 개의 레코드 회사가 난립했다. 하지만 대개 도미도레코드처럼 열악하고 영세했다. 이렇게 만든 음반에 라벨을 붙이고 막걸리를 배달하는 짐자전거에 실어 국제시장에 직접 나가서 팔았다.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 일대의 다방을 돌면서 가족이 음반과 바늘을 팔기도 했다. 그때 나온 노래가 ‘홍콩아가씨’(금사향), ‘물방아 도는 내력’(박재홍), ‘꿈에 본 내 고향’(한정무) 등이다. ‘신라의 칼’ ‘에레나가 된 순이’(한정무) 등은 직접 자신이 곡을 붙인 노래다. 신인가수 허민을 발굴해 ‘페르샤 왕자’ ‘백마강’을 히트시키기도 했다.”
임시수도가 되면서 전시 방송국도 들어섰다. 부산 방송국은 이재호, 대구 방송국은 작곡가 이병주, 그리고 마산 방송국은 반야월을 중심으로 가수들이 전쟁과 피란을 주제로 노래했다. ‘마산 엘레지’ ‘눈 내리는 마산항’ 등이 당시 반야월이 만든 노래다.
더불어 미8군 클럽이나 극장, 댄스홀, 카바레 등도 차차 들어섰다. 미국 스탠더드 팝 형식의 곡들이 대중가요에 스며든 때도 이 시기다. 맘보, 차차, 부기우기 등 댄스음악이 그 예다. 최소원이 쓴 〈한국전쟁 시기 부산에서의 음악 활동에 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노래 ‘닐리리 맘보’ ‘코리아 맘보’ ‘노래가락 차차차’ 등 제목에서 이미 팝 리듬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노래의 후렴구는 해당 장르의 리듬이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팝 리듬을 가진 후렴구를 제외한 나머지 구절의 가사나 선율은 민요나 트로트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부산 사람들이 다양하고 풍성한 음악적 세례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로 악극이나 창극, 대중가요와 버라이어티쇼를 주된 레퍼토리로 삼은 대중적인 공연이 극장식 쇼 공연을 통해 펼쳐졌다. 부산에는 가수나 춤꾼, 악기 연주자, 작곡가, 대본 작가와 연출자, 음반 기획자와 제작자 외에 연극인들까지 모여 무대가 비좁을 정도였다. 또 예술 종군(從軍)의 군악 연주, 피란민을 위한 공연, 그리고 이화여중생의 송환된 포로용사들을 위한 공연이 이뤄졌다.
이런 풍성한 음악적 세례를 받았으니 피란지 부·울·경 사람들이 훗날 거둔 예술적 성취는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부산과 대구의 대중음악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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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
박인건(朴仁建) 국립극장장은 “대구 오페라와 뮤지컬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대구·경북 지역 음대에서 인재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라며 “국내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간 곳이 대구다.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를 통해 대구에 서양음악이 보급되고 뿌리내리는 과정에 피아노가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대구의 대중음악 역사는 부산과 비교해 뿌리가 약한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많은 대중가수가 대구를 공연하기 힘든 최악의 도시로 꼽는 경향이 있다. 누가 대구 출신 가수인지 또한 기억에 없다.
그러나 1950년대 초반 대구는 말 그대로 한국 가요사의 중심이자 메카였다. 1947년 대구 중구 화전동에 오리엔트레코드사가 창립되어 많은 대중가요가 쏟아졌다. 이동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귀국선’(이인권), ‘전우야 잘 가라’(현인), ‘아내의 노래’(심연옥), ‘전선야곡’(신세영), ‘님 계신 전선’(금사향) 등 200여 곡 이상이란다. 이 교수는 대구근대가요사박물관 건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오래전부터 펴고 있다.
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대구 관련 로컬송이 많지 않아 대구가 배출한 대중가수와 대중음악 역사가 빈약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대구 출신 대중가수로 1930년대 장옥조, 최계란이 있고, 특히 ‘고향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장옥조는 대구 최초의 대중가수였다. 가요사에 대구역과 관련한 곡이 12곡이나 되고 고모령(대구 만촌동)이 언급된 곡도 4곡(‘비 내리는 고모령’ 등)이다.
능금, 사과 특산지로 대구를 부각시킨 곡이 9곡인데 길옥윤이 작사·작곡하고 패티 김이 노래한 ‘능금꽃 피는 고향’에는 대구 팔공산 등 구체적인 지명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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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음악평론가 |
그렇다면 대구 출신 가수들이 생각보다 많은데도 왜 대구의 대중음악 위력은 부산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이동순 교수의 설명이다.
“우선 양적으로 대비해 볼 때 대구·경북과 부산·경남 출신 가수의 숫자에서 현저한 차이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우수한 작품 산출로 보면 부산·경남의 테마가 월등히 두드러진다. 그 까닭은 바다와 항구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가수 집단에서 부산이 대구를 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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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5일 인천 스튜디오파라다이스에서 〈미스트롯3〉 탑20 출연진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TV조선의 트로트 프로가 전통가요 붐을 낳았다. 사진=조선DB |
“대중가수와 대중가요를 인식하는 차이는 대구·경북이 한층 보수적·폐쇄적이다. 반면 부산·경남은 진취·개방적이다. 분단과 전쟁, 피란살이를 겪으면서 이런 현상은 한층 두드러졌다.
대구는 퇴계학의 영향권 속에서 도학적 인식이 강해 체통, 체면, 품격 따위를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대중문화를 폄시하고 서양 고전음악, 성악, 오페라 등의 공연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
이동순 교수는 “그 결과, 대구는 지금도 오페라하우스 등 서양 고전음악 중심의 취향을 중시하며 보존에 힘을 기울인다”고 했다.
“대구는 박태준(朴泰俊·1900 ~1986년),현제명(玄濟明·1902~ 1960년) 등이 이룩한 음악적 성과를 1950년대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의 업적보다 한층 중요시한다.
부산·경남은 피란 시기 도미도, 미도파, 코로나 레코드 등 SP음반 제작회사가 다양하게 운영되었고, 가수 집단이 적극적으로 배출되었다. 이 세력이 대구를 압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