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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14 | 상진(尙震)전

세상을 비켜 사는 지혜로 난세의 명재상이 되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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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품과 도량이 넓고 커서 일찍이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이수광)
⊙ 자유분방하면서 대립하는 의견을 능수능란하게 조화시켜가는 보기 드문 정치력 보여줘
⊙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현실권력과 타협했지만, 청렴해서 權奸 소리 듣지 않아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상진
  상진(尙震·1493~1564년)은 찰방 상보(尙甫)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8세에 아버지까지 여의어 큰 매부 성몽정(成夢井·1471~1517년) 집에서 자랐다. 성몽정은 문과 장원 출신으로 중종 때 도승지와 대사헌을 지냈고 조광조와 가까웠으며 성품이 단아하고 맑았다고 한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따르면 그는 15세 때까지는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동료들에게 조롱을 당한 뒤에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상진은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에서 밝힌 대로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상보가 역참을 돌보는 종6품 찰방에 오른 것이 전부였다. 자기 집안의 한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상진은 글 읽기는 내팽개치고 말 타고 활 쏘는 데만 열중했다. 무인(武人)이 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20세 무렵 주변 친구들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을 알고 공부를 시작해 25세 무렵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이에 앞서 매부 성몽정이 상진의 의중을 기특하게 여긴 일화가 있는데, 한 번은 성몽정이 상진에게 벼슬살이를 해보라고 하자 상진은 “글을 읽는 것은 큰 공업을 세우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답했다. 이 무렵 그는 성수침(成守琛), 성수종(成守琮) 형제와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성수침은 성혼(成渾)의 아버지이다. 이이, 송익필과 함께 서인을 이끈 파주 삼현(三賢)의 그 성혼이다.
 
 
  尙씨의 유래
 
  여기서 상씨(尙氏)의 유래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과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민족의 손꼽히는 명장(名將)이다. 둘 다 무인인 것 말고도 왕건과 이성계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왕건의 옆에는 도선(道詵)대사가 있었고 이성계의 옆에는 무학(無學)대사가 있었다. 또 당시 전쟁에서는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심이 3대 핵심 요건이었다. 이 중에서 지리를 아는 데는 풍수(風水)만 한 것이 없었다. 당시 왕건이나 이성계에게 풍수는 다름 아닌 군사지리학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적이라도 감싸 안는 포용력이다. 아들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처참한 말로를 맞긴 했지만 이성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鄭夢周)를 끌어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왕건 또한 군사적 우위를 점했으면서도 후백제, 신라가 투항할 때까지 무던히도 기다렸다. 결국 후백제는 견훤의 귀순 등, 내분으로 붕괴되었고, 신라(경순왕) 또한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한데 이렇게 포용력이 큰 왕건조차 도저히 용서 못 할 사람들이 있었다. 후백제의 충청도 목천 사람들이었다. 조선 성종 때 양성지·노사신·강희맹·서거정 등이 편찬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목천 사람들이 끝까지 투항을 하지 않고 버티자 왕건은 이들에게 돈(豚), 상(象), 우(牛), 장(獐) 등과 같은 희귀한 성(姓)을 부여했다. 글자 그대로 돼지, 코끼리, 소, 사슴 등의 짐승 명칭을 성씨로 내린 것이다. 그만큼 왕건의 노여움이 컸다는 뜻이다. 이후에 豚은 頓(돈)으로, 象은 尙(상)으로, 牛는 于(우)로, 獐은 張(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들 네 성은 모두 목천을 본관으로 한다. 이 밖에 목천을 본관으로 하는 마(馬)씨도 있다. 아동문학가로 유명한 마해송이 바로 이 목천 마씨다. 그러나 마씨는 그전부터 있던 성이었다.
 
  목천을 본관으로 하는 이 네 성은 멸문지화(滅門之禍)에 가까운 고초 탓인지 고려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시대에도 명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상진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인물을 찾기가 힘들다.
 
 
  정광필, “게으른 정승이 나왔구나!”
 
  그가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때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터지기 전이었다. 선비들이 유난히 티를 내며 몸가짐을 삼가는 척을 하자 상진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실록은 “상진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일부러 관(冠)을 쓰지 않고 다리도 뻗고 앉아서 동료들을 조롱하고 업신여기었다”고 적고 있다. 자유인 상진의 기질이 유감없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얼마 후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 명재상 정광필(鄭光弼)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정광필은 주변 사람들에게 “게으른 정승이 나왔구나”라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상진은 중종 14년(기묘년 1519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는데 사재(史才)가 있다 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제수되어 경연(經筵)에 입시하게 되었다.
 
  간혹 좌천을 당하기는 했지만 상진의 벼슬살이는 무난한 편이었다. 중종 21년(1526년)에는 예조정랑으로 성절사 서장관에 보임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궁 관리인 필선(弼善)이 되어 세자를 보필했다. 이때부터 탄탄대로를 달려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쳐 중종 28년(1533년) 마침내 대사간이 된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같은 해 10월 5일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올린 차자(箚子·약식 상소)는 당시 상진의 식견과 기개를 엿보기에 충분하다.
 
  〈총명한 사람은 은미한 것을 통해 드러날 것을 알아차리고 사리를 아는 사람은 그림자만 보고서도 그 형체를 살펴 아는 것입니다. 드러날 것을 알기 때문에 은미한 것을 통해 미리 방지하고, 형체를 살펴 알기 때문에 그림자를 보고도 끊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재변이 한꺼번에 나타나, 계추(季秋)에 천둥이 쳐서 안정하지 못하니, 하늘의 경고가 어찌 원인이 없겠습니까? 조정에 변고가 많아서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았었는데, 지금 약간 안정이 되어 있지만 인심이 어긋나서 재앙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화를 즐겨 간계를 부릴 기회를 엿보는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더욱이 공론이 확립되지 않아 사기(士氣)가 위축되어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의향이 다르므로 한자리에서도 말과 의견이 서로 모순되니, 재앙과 환란의 기틀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권간(權奸)이 조정에서 작란한 뒤로, 물론에 용납되지 못한 자는 청현직에 주의(注擬·천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조(提調·위원회 위원) 같은 겸직도 제수하지 않은 것은 국가를 위한 큰 계책으로 반드시 깊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조(銓曹·인사를 책임지는 이조와 병조)를 은혜 파는 자리로 여겨 천거와 의망이 잇따르고 있는데도 선비들의 공론은 연약한 태도만을 숭상하면서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권간을 아첨으로 섬긴 실정이 뚜렷이 드러나 공론에 죄를 얻어 유배되고 파직된 자는 결단코 다시 조정의 반열에 끼워 이미 정해진 국시를 혼란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식견 있는 사람들이 사사로운 은혜를 팔려고 ‘아무개는 방면하지 않을 수 없다’느니 ‘아무개는 서용하지 않을 수 없다’느니 하고 있으니, 이런 의논이 한번 나오면 저 여우와 쥐 같은 무리들이 갓을 털면서 세상에 나올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꾀는 성공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랏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물며 은명(恩命)은 임금의 큰 권병(權柄)이니 어찌 신하가 간여해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상진이 신권(臣權)을 중시하는 주자학보다는 임금의 강명(剛明·성질이 곧고 두뇌가 명석하다는 의미다)을 더 중시하는 입장에 서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상진은 현대적 맥락에서 재조명을 해야 하는 인물이다. 어떤 하나의 틀에 담아낼 수 없는 그의 자유분방함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대립하는 의견을 능수능란하게 조화시켜가는 보기 드문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의리(義理) 일변도의 성리학적 잣대로 보자면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운 인물이다.
 
 
  중종, “끝내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길 것”
 
  이 무렵 중종은 상진에 대한 총애가 깊었다. 중종 30년(1535년) 동부승지, 좌부승지로 지근거리에서 중종을 모셨고 중종 32년(1537년)에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때 하급 관료 여럿이 권간의 뜻에 영합하고자 정광필을 사지에 내몰려 하자 상진은 분연히 소를 올려 정광필을 구제하였다. 이에 당시 사론(士論)이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같은 해 겨울 형조참판에 올랐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중종 34년(1539년)에 마침내 형조판서에 오른다. 그런데 이 무렵 그가 새로운 관직을 맡을 때마다 대간에서는 반대했는데 겉으로는 너무 빠르다는 것이었지만 속으로는 그의 출신을 부정적으로 본 때문이었다.
 
  이 때문인지 중종 36년(1541년) 중종이 그를 한성판윤으로 삼으려 했으나, 시행되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듬해 중종은 다시 그를 한성판윤에 임명하고 병권(兵權)을 책임지는 도총관(都摠管)까지 겸직시켰다. 이후 여름에 공조판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특명으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중종이 그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엿볼 수 있다. 중종 39년(1544년) 2월 24일에는 마침내 정승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는데(의정부 우찬성 제수), 사간원이 또 반대했다.
 
  역시 이유는 자헌대부(정2품)가 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반대에도 중종은 그를 그대로 우찬성에 제수했다. 그러나 3월이 되어서도 연일 상진의 일을 아뢰자 3월 3일 중종은 결국 우찬성 제수를 취소하고 두 달 후 형조판서에 제수했다. 당시 중종은 “끝내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길 것이다”라고 했지만 결국 자기 손으로 정승에 임명하지는 못했다.
 
 
  현실권력과 타협해 사림 비판 받기도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짧았던 인종 재위 기간 상진은 유인숙(柳仁淑)의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마침 이 무렵 유인숙은 공조판서를 거쳐 상진이 제수됐던 우찬성에 올랐다. 유인숙은 대체로 조광조와 같은 노선을 걸은 사림(士林) 계열이다. 상진은 이때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사실상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인종이 9개월 만에 승하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명종 즉위와 함께 유인숙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던 중에 사사(賜死)되었다.
 
  상진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중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특진을 했다. 이 바람에 견제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 상진은 이재(吏才)가 뛰어났다. 오늘날로 보자면 행정 능력이 특출했다는 말이다. 더불어 시국을 한 걸음 물러서서 보는 여유를 갖고 있었다. 훈구(勳舊)보다는 사림과 가까우면서도 기묘사화나 을사사화를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중종 때 공조·형조·병조 등의 판서를 두루 거친 상진에게도 명종 즉위와 함께 시작된 문정왕후와 윤원형(尹元衡) 시대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상진은 결국 현실권력과 타협하는 길을 걸었다. 덕분에 명종 즉위와 함께 우참찬에 임명됐다. 참찬은 정2품, 찬성은 종1품이니 품계는 오르지 않았지만 역시 참찬이나 찬성은 판서를 마치고 정승 훈련을 받는 곳이라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명종 1년(1546년) 1월 17일 그가 우참찬에 제수된 날 사신(史臣)은 상진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상진은 천성이 탐욕스럽고 기절(氣節·기개와 절조)이 없어 일을 잘 회피하였으며,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걱정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봐 걱정하여 세상의 추세에 따라서 향배(向背)를 잘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유인숙이 전장(銓長·이조판서)으로 있으면서 상진을 내쫓아 경상감사로 삼으니 그는 항시 분노를 품고 인숙이 언급될 때면 반드시 노(奴)라고 꾸짖었는데, 이에 이르러서 이기(李芑·1476~1552년) 등이 극력 추천해서 이 직에 제배(除拜)된 것이다.〉
 
  전형적인 사림의 시각이다. 이런 비판에는 비부(鄙夫)에 관한 공자 언급까지 동원되었다. 《논어》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말했다.
 
  “비루한 사람과 함께 임금을 섬기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지위를) 얻기 전에는 그것을 얻어보려고 근심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그것을 잃을까 근심한다. 정말로 잃을 것을 걱정할 경우엔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못 하는 짓이 없다.”〉
 
  《명종실록》은 선조 때 편찬되었다. 그렇다면 이 시절 세력을 이루었던 사림들이 주도했을 것이며 사림과 거리를 두려 했던 상진이었기에 이런 비판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명종 때 정승이 되다
 
  명종 1년(1546년) 9월 3일 상진은 자리를 옮겨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2년 후인 명종 3년(1548년) 7월 25일 상진은 우찬성에 제배된다. 이에 상진은 거듭 사직을 청했으나 명종은[아니 사실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문정왕후의 뜻일 것이다] “경은 여러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잘못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하니 사직하지 마라”며 윤허하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명종 대에 들어 늘 그를 후원한 인물은 이기이다. 명종 4년 9월 18일 드디어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도 영의정 이기의 추천 덕이었다.
 
  이기는 젊어서는 장인 김진이 저지른 뇌물죄에 연루되어 서경(署經·사헌부 승인)을 필요로 하는 요직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중종 말기 신임을 받아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형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오르고 마침내 좌의정까지 지냈지만 인종 때 대윤(大尹) 거두 윤임(尹任) 등이 탄핵하여 병조판서로 강등됐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다가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과 손을 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상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상진이 우의정이 되던 날 역시 사신은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상진은 아첨이나 하고 비위나 맞추는 자로서 상부(相府·의정부)에 10여 년이나 있었으면서 건백(建白·건의)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시론이 비루하게 여겼다.”
 
  상진이 정승이 되면서 한미하기 그지없던 그의 집안은 3대 추은(推恩)을 받아 아버지는 의정부 영의정, 할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 증조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증직(贈職)받았다.
 
  상진이 우의정으로 있을 당시 곤경에 빠진 일이 있었다. 문정왕후가 비망기를 내려 선교양종(禪敎兩宗·불교 종파인 선종과 교종을 말한다)의 복립(復立)을 명한 것이다. 이에 대해 좌의정 심연원(沈連源)과 우의정 상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대 의사를 밝혔으나 문정왕후는 윤허하지 않았다. 이 충돌은 해를 넘겨가며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명종 6년(1551년) 8월 23일 상진은 좌의정에 오른다. 여전히 선교양종을 세우는 문제가 조정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었다. 《국조인물고》는 이 무렵 일화 한 가지를 전한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며 청단(聽斷)할 때 선교양종의 제도를 다시 시행하려고 공에게 이야기하기를 “승려들이 계통이 없다. 양종을 설치하여 통섭되도록 하고 싶다”고 하니, 공이 아뢰기를 “오래도록 폐지한 지금 다시 시행한다는 것은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의 생각은 은미하고 부드러운 말로 넌지시 고하여 임금의 뜻을 돌이키려고 기대하였는데, 공의 생각을 모른 사람은 주상의 뜻에 영합하였다고 의심하였다. 공은 그 말을 듣고 “유석(儒釋·유교와 불교)의 시비는 흑백처럼 분명한 것인데 내가 어찌 군주에게 영합하기까지 할 사람인가? 대체로 평소에 행동한 것이 남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저 스스로를 반성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상진에 대해서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에게 ‘아부했다’는 비판이 종종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려는 심모원려(深謀遠慮)임을 당대의 식자들은 다 알고 있었기에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종 때의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잇는 명상(名相)”이라는 찬사가 많았다.
 
 
  상진의 인품과 도량
 
  참고로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에서 ‘상진의 인품과 도량’이라는 별도의 항목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정승 상진은 인품과 도량이 넓고 커서 일찍이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
 
  당시 육조판서를 두루 지낸 오상(吳祥)은 이런 시를 지었다.
 
  ‘희황악속금여소 지재춘풍배주간(羲皇樂俗今如掃 只在春風杯酒間)’
 
  그 뜻은 대략 ‘복희씨 시대의 음악과 풍속은 지금 쓸어낸 듯 없어져버렸고/ 다만 봄바람 부는 술자리에만 남아 있구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본 상진은 “어찌 말을 그렇게 야박하게 하는가”라며 첫 구의 마지막 두 자와 둘째 구의 앞부분 두 자를 고쳐 이렇게 읊었다.
 
  ‘희황악속금유재 간취춘풍배주간(羲皇樂俗今猶在 看取春風杯酒間)’
 
  ‘복희씨 시대의 음악과 풍속이 지금도 남아 있어/ 봄바람 부는 술자리에서 찾아볼 수 있네!’〉
 
  세상을 보는 시각은 말할 것도 없고 스케일이 달랐던 것이다. 이수광이 상진의 ‘도량’을 보여주기 위해 이 일화를 고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상진은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현실권력과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권간’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지 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청렴(淸廉)이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수없이 많다. 그중 하나다. 하루는 창고가 허물어지려 하자 종들이 수리를 하고자 했다. 상진은 그만두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고쳐 세운들 그것을 무엇으로 채우려 하는고?”
 
  창고는 무너져버렸다.
 
  그랬기 때문인지 상진은 세상의 굴곡(屈曲)을 수용하는 자신의 처신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갑내기 친구이자 중종 때 잘나갔던 사림 계열의 송순(宋純)이 윤원형 세력과 충돌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상진이 물었다.
 
  “자네는 어찌 이리 침체되고 불우한가?”
 
  이에 송순은 “내가 자네처럼 목을 움츠리고 바른말을 하지 않았으면 벌써 정승의 지위를 얻었을 것이네!”라고 반박했다. 이에 상진은 “자네가 바른말하지 않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불평스러운 말을 많이 하여 이리저리 귀양 다니는 것이 무슨 맛이 있는가?”라며 웃었다.
 
  상진은 죽음을 맞을 당시 자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묘비는 세우지 말고 짤막한 갈(碣)을 세워 “공은 늦게 거문고를 배워 일찍이 ‘감군은(感君恩)’ 한 곡조를 연주하였다”라고만 쓰면 족하다.〉
 
  그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며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오던 위선과 가식(假飾)의 식자들을 조롱하며 살다가 간 인물인지 모른다.
 
 
  명재상 정광필과 이준경을 이어주는 가교
 
박세채
  명재상 정광필과 이준경(李浚慶)의 가교가 되었다는 점은 정승 상진이 했던 큰 역할 중 하나다.
 
  명종 4년(1549년)에 상진은 이조판서, 이준경은 병조판서로 함께 조정에 있었다. 특히 상진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 이준경을 이조판서로 삼았고 또 이준경은 우찬성에 올랐다. 또 명종 13년(1558년) 5월 29일 상진이 영의정이 될 때 이준경은 우의정 바로 아래인 좌찬성에 제수된다. 물론 이준경이 윤원형과의 관계를 유연하게 이끌어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진은 이준경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명종 14년(1559년)에는 영의정 상진, 우의정 이준경으로 함께 의정부를 끌고 간다. 이어 명종 15년(1560년)에는 영의정 상진, 좌의정 이준경으로 함께 조정을 이끈다.
 
  숙종 20년(1694년) 6월 4일 좌의정 박세채(朴世采)가 차자(상소문)를 올렸는데 명종 말기를 언급하며 이렇게 평하고 있다.
 
  〈명종께서 춘추(春秋)가 차지 못하셨기에 당국(當國)한 제신(諸臣)에게 크게 오도(誤導)되어 여러 차례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고 선량한 선비들이 죽게 되었는데, 중년(中年) 이후에는 점차로 깨달으시어 상진·이준경을 임용(任用)하심으로써 양복(陽復)의 기틀을 이루셨고, 만년에는 또한 이황(李滉)에게 예우(禮遇)를 다 하시매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고쳐지고 선류(善類)들이 무리로 진출(進出)하게 되었었습니다. 오늘날 역대의 조정 가운데서 다스려진 적을 말하자면 반드시 명종과 선조 때를 말하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전의 일에 구애되지 마시고 선왕(先王)들의 성헌(成憲)을 거울로 삼아 잘 계술(繼述)해가는 아름다움을 이루소서.〉
 
  양복(陽復)이란 《주역》 복괘(復卦·)를 가리키는 말로 음(陰)이 득세하던 소인(小人)의 시대가 마침내 사라지려 할 때 아래에서 굳센 양, 즉 군자(君子)가 나온 것을 말한다. 상진·이준경과 크게 멀지 않은 시대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박세채의 평가라는 점에서 신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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