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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현대사

《군인 백선엽》

1000장의 6·25전쟁 사진 속에서 ‘군인 백선엽’을 만나다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사진제공 : 청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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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6월경 막사 앞에 선 백선엽 제2군단장.
  
 사진집 《군인 백선엽》(청미디어)이 출간됐다. 기자가 백선엽(白善燁·1920~2020년)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4월이었다.
 
  백선엽 장군이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회 자문위원장으로 재임할 당시, 기자는 백 장군으로부터 기사 작성에 활용하도록 6·25전쟁 사진을 제공받았다. 백 장군이 6·25전쟁을 치른 동료 장성들보다 압도적으로 사진이 많은 까닭은 유엔군과의 연합작전, 그리고 1군단장, 참모총장, 제1군사령관 등 국군의 핵심 포스트를 거쳤기 때문이다. 《군인 백선엽》은 모두 1002매의 사진을 담고 있다. 기자가 갖고 있는 백선엽 장군 사진 가운데 600여 장을 엄선했고, 여기에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사진 등을 추가로 사용했다.
 
  사진집에는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이 자주 등장한다. 백선엽 장군은 생전에 밴 플리트 장군이 아들 제임스 밴프리트 중위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알리는 사진을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91년 백선엽 장군은 플로리다주 포크시티에 거주하는 99세의 밴 플리트 장군을 찾았다. 병석에 누워 있던 밴 플리트는 40년 전 한국 전선에서 동고동락했던 백선엽과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한다. 백 장군의 큰딸 백남희씨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슬피 우시는 것을 처음 봤다”고 했다. 밴 플리트는 1992년 100회 생일을 지내고 그해 9월 23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백선엽 장군은 100세까지 살았고, 그의 인생 가운데 6·25전쟁의 3년은 평범한 사람 인생 수십 개를 합친 것과 맞먹게 함축적이고 치열하다.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는 발간 축사에서 “청소년 기간의 백선엽 장군은 나보다 모든 면에서 우등생이었고, 전쟁을 통해 역사에 남을 공적을 세웠다”며 “나 같은 사람을 대신할 사람은 많았으나 백선엽 장군을 대신할 군인은 없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감수를 맡은 온창일(溫暢一) 육사 명예교수는 “백 장군은 작전 시 지휘관은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시간과 장소에 위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했다”며 “용감하고 지략 있는 군인”이라고 했다.⊙
 
백선엽 사단장이 미 제1기병사단과 합류점인 선교리 로터리에서 찰스 파머 미 제1기병사단 포병사령관(준장)과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사진=LIFE
 
백선엽 제1사단장이 1950년 8월 사단사령부에서 북한군 포로 1명을 직접 조사하고 있다.
 
1950년 8월 23일 백선엽 제1사단장(오른쪽)이 사령부를 방문한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가운데)과 워커 미 8군사령관(왼쪽 끝)에게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다부동 전황을 보고하고 있는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
 
1950년 가을, 국군 위문공연을 바라보는 군인들. 끔찍한 전쟁 속에서도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마음을 달래주는 다양한 공연들이 이어졌다.
 
제1사단 지휘소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제1사단 참모들과 함께한 백선엽 장군. 1951년 2월 1일 촬영.
 
1951년 2월 8일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지프를 함께 타고 수원의 미 제1군단사령부로 가는 도중 미군 트럭을 비켜가려다 차가 뒤집혔다. 신 장관과 사단 수석고문관 헤이즈레트 대령은 무사했으나 백선엽 장군은 허리를 다치고 안면도 찢기는 부상으로 수원의 이동외과병원에 입원했다.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달려온 리지웨이는 “사단장이 꼭 필요한 시기”라며 군의관의 후송에 반대했다. 백선엽 장군도 부대를 비울 수 없어 하루 만에 퇴원했다.
 
백선엽 제1군단장이 집을 짓고 있는 마을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51년 6월 15일.
 
덕수궁 중화전 앞에 주둔한 미군. 포격으로 중화전의 지붕이 부서지고 경내는 온통 잡초투성이다.
 
백야전전투사령부의 공비토벌 여파로 적지 않은 고아가 발생했다. 부모를 잃은 공비와 입산자의 자녀를 국군이 돕기 위해 백선엽 장군은 당시 이을식 전남지사의 도움을 얻어 송정리 적산가옥을 구해 고아원을 세웠다. 고아원의 이름은 ‘백선육아원’. 당시 종군기자로서 후일 세계선명회 총재가 된 밥 피어스 박사도 수많은 고아의 양육을 도왔다. 백 장군은 1988년 고아원의 전 재산을 천주교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 기증해 사업을 이어가도록 했다.
 
제2군단 재창설식이 끝난 후 임시막사 다과회 석상에서 밴 플리트 장군이 파머 제10군단장, 오다니엘 제2군단장, 와이만 제9군단장(왼쪽부터)에게 “아들 밴 플리트 중위가 전날 옥구비행장을 출발해 폭격에 나섰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며 실종 소식을 알리고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고개를 떨구고 있고, 백선엽 장군이 황망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1952년 4월 5일.
 
육군참모총장 육군 중장 백선엽 장군.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7월 22일 부산 정치 파동의 여파로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을 해임했다. 백선엽 제2군단장은 이 총장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백선엽 신임 육군참모총장은 계엄하에서 대통령의 통치권도 일부 보좌, 수행해야 했다.
 
백선엽 제2군단장이 참모들과 이야기 도중 담뱃불을 붙이고 있다. 백선엽 장군은 간식을 즐기지 않는 대신 내내 담배를 피웠다. 그러나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지 않는 ‘뻐끔담배’로 건강에 큰 지장은 없었고, 1960년 전역 후 곧 금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일권 제2군단장은 다시 육군참모총장에 복귀했고, 이형근 대장은 신설된 연합참모본부 총장에 임명됐다. 참모총장을 거친 정일권 장군과 군번 1번인 이형근 장군의 차등을 두기 어려웠던 이승만 대통령은 고심 끝에 같은 날 두 사람에게 동시에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백선엽 참모총장이 휴전 당일 판문점에 나가 귀환하는 국군포로들을 맞이하고 있다. 포로들은 비통한 얼굴로 묵묵히 내려와 유엔군 측에 안기는 순간부터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다. 귀환 포로 중 장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백 총장은 서양 행진곡을 연주하는 군악대장에게 “우리 민요를 연주하라”고 해 ‘아리랑’ ‘도라지’ 멜로디가 판문점에서 울려퍼졌다.
 
연합참모본부 장성들이 백선엽 장군이 근무한 부대 마크들을 모아 기념패를 만들었다. 백선엽 장군의 나이 만 40세가 되는 때였다.
 
사열대를 지나던 백선엽 제1군사령관이 한 병사의 총기를 살펴보고 있다. 소총을 잡고 있는 백 장군의 모습에서 포스가 느껴진다.
 
회의에 참석해 메모하고 있는 백선엽 참모총장.
 

 
양구 근처 일선을 시찰하며 사단장들과 악수를 나누는 백선엽 참모총장. 당시 제2군단 포병사령관 박정희 준장(오른쪽 두 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이 백선엽 장군의 모친 방효열 여사(왼쪽 세 번째)의 환갑을 맞아 방 여사 가족을 경무대로 초대, ‘금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왼쪽부터 백인엽 장군, 백선엽 장군, 방 여사, 프란체스카 여사, 이 대통령, 변영태 국무총리, 이호 국방부 차관.
 
1960년 7월 15일 주중대사로 발령받고 타이베이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모습. 좌우로 의장대가 도열해 있고 환송객들로 공항이 붐볐다.
 
프랑스 대사 시절, 백선엽 장군이 차녀 남순, 차남 남흥과 파리 거리를 걷고 있다.
 
백선엽 장군이 전쟁기념관 내에 있는 6·25전쟁 미군 전사자 명패를 어루만지며 상념에 잠겨 있다. 백 장군은 “6·25전쟁에서 미군은 3만3600명이 전사하고, 10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며 “이것을 잊는다면 우리가 금수(禽獸)보다 나을 게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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