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여 김동길 ‘석양에 홀로 서서’ 사이트에 올린 글 모아 출간
⊙ 양주동, 변영로, 김동성, 데일 카네기, 후지와라 데이 등 저서를 기초로 ‘이 생각 저 생각’ 엮어
⊙ ‘조선의 머리를 열이라고 할 때, 春園이 아홉을 가졌고, 내가 0.5를 가졌다’(양주동)
⊙ 수학천재는 모국어와 계산력을 가르친 결과
崔明
1940년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 정치학 석·박사 / 서울대 신문대학원 조교수(1972~1975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1975~2006년) 역임. 現 서울대 명예교수
⊙ 양주동, 변영로, 김동성, 데일 카네기, 후지와라 데이 등 저서를 기초로 ‘이 생각 저 생각’ 엮어
⊙ ‘조선의 머리를 열이라고 할 때, 春園이 아홉을 가졌고, 내가 0.5를 가졌다’(양주동)
⊙ 수학천재는 모국어와 계산력을 가르친 결과
崔明
1940년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 정치학 석·박사 / 서울대 신문대학원 조교수(1972~1975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1975~2006년) 역임. 現 서울대 명예교수
나비넥타이 매고 “이게 뭡니까”라고 외치던 산남(山南) 김동길(金東吉·1928~2022년) 선생의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편하게 만날 수 있었던 선생의 홈페이지 ‘석양에 홀로 서서’(www.kimdonggill.com)도 지금은 열리지 않는다.
서울대 정치학과 최명(崔明·82) 명예교수는 매주 월요일마다 ‘석양에 홀로 서서’에 흥미로운 글을 올렸었다. 2020년 4월 중순부터 만 2년 반 동안 이어졌다. 코너 이름은 ‘이 생각 저 생각’. 재미와 교양이 가득해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다.
최 교수는 산남 선생에 대한 그리움에, 그리고 한 편씩 공들여 쓴 글이어서 미련이 남았다. 최근 이 글을 묶어 556쪽에 이르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펴냈다. 최 교수는 “선생이 이 책을 보시면 아무 말씀 없이 그냥 빙그레 웃으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기자는 이 책을 여러 차례 통독하며 최 교수의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들었다.
산남 선생과의 인연은…
신간 《이 생각 저 생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1903~1977년)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1960),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1898~1961년)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1953), 후지와라 데이(藤原 貞)의 실록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를 번역한 정광현(鄭廣鉉)의 《내가 넘은 삼팔선(三八線)》(1949),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1943~)의 여러 편의 글과 논문,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1888~1955년)의 《우도(友道)》(이환신 번역), 천리구(千里駒) 김동성(金東成·1890~1969년)의 《미주(米洲)의 인상(印象)》 등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여러 화제(話題)에 담긴 이야기마다 최 교수는 유려한 문체로 ‘이 생각 저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내는데 평생 학자로 쌓아 올린 지적(知的) 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능한 독자라면 하룻밤 사이에 한자리에 앉아 550쪽이 넘는 책을 다 읽을 수도 있을 만큼 중독성이 높다.
기자는 최 교수를 여러 차례 만나고 통화하며 《이 생각 저 생각》에 담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산남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나요.
“처음 만나 뵌 것은 2016년 3월 김병기 화백의 〈백세청풍(百世淸風): 바람이 일어나다〉란 전시회에서였어요.
선생께서 먼저 오셔서 휠체어에 앉아 계셨는데 서울대 김형국 교수가 나를 끌고 가서 인사를 시켰어요. 반갑게 왼손으로 나의 손을 잡으셨어요. 오른팔이 불편하신 줄도 몰랐어요.”
당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란 책이 나올 예정이었는데 산남 선생이 대표 필자였고 최 교수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이란 글을 실었다고 한다. “나중 이야기지만 산남 선생이 그 글을 좋아하신 것 같고”, 이게 두 사람 인연의 시작이었다.
“일석대좌도 500년 전의 인연이라고 불가(佛家)에서는 말한다지만, 500년을 참았던 것이 터져서인지 산남 선생과 나의 관계는 급속하게 친밀해졌어요. 산남 선생은 누구나 온유하게 사랑하셨지만, 나도 그 사랑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지요.”
나와 《삼국지》, 정음사
― 최명 교수 하면 머릿속에 《삼국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삼국지》 전문가이고 관련 책과 글을 여러 편 발표했지요.
“내가 중학 2학년 때인가, 《학원(學園)》이란 잡지에 연재되던 김용환 화백의 ‘코주부 삼국지’를 더러 읽었어요. 1954년부터 정음사(正音社)에서 《삼국지》를 몇 해에 걸쳐 10권을 펴냈죠. 모두 사서 열심히 읽었어요. 대학 다닐 적엔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삼국지》가 번역되어 그것도 읽었죠.
내가 마흔이 넘어 서울 반포아파트에 살 때인데, 아이들이 읽는 《고우영 삼국지》를 옆에서 같이 보기도 했어요. 아파트 같은 동에 살던 고우영 화백과는 여러 인연이 많아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항상 ‘장비’처럼 마셨는지 늘 대취했죠. 내가 《소설이 아닌 삼국지》(1993)를 낼 적에 그는 스무 장이나 되는 컷을 그려주기도 했어요.
《삼국지》를 좋아한다는 얘기가 퍼져서인지, 《삼국지》와 관련된 각종 책을 보낸 동료와 제자들도 있어요. 덕분에 진수의 《삼국지》도 읽었고,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삼국시대 부분도 읽을 수 있었어요.”
1983년 정음사에서 《중국고전문학선집》을 출판한 일이 있다. 그 첫 3권이 《삼국지》였다. 10권으로 출판된 것을 3권으로 압축한 것이었다. 10권으로 된 《삼국지》의 번역 및 발행인은 최영해(崔暎海·1913~1981년)이다. 그는 국어학자 최현배(崔鉉培·1894~1970년) 선생의 장남으로 당시 정음사 대표였다. 《중국고전문학선집》 〈삼국지〉의 번역 및 발행자는 최동식(崔東植·현 고려대 화학과 명예교수)인데 최영해의 장남이다.
“최동식 교수의 전공은 화학이었지만 ‘사회역학(社會力學)’이라고 스스로 명명한 좀 기이한 사회이론을 개발했고, 사회과학도들과 잘 어울렸어요. 시작은 불확실하나 그를 여러 번 만났죠. 늘 의기투합했고, 술도 많이 마셨지요. 《삼국지》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어요.”
― 《이 생각 저 생각》도 장비의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로 시작하더군요.
“조조의 계략 때문에 유비가 원술과 싸운 적이 있었는데 서주를 비워둘 수 없었어요. 유비는 ‘관우와 장비, 둘 중에 누가 남아서 성을 지키겠느냐?’고 물었어요.
서로 남아서 지키겠다고 하지만 관우와 같이 가는 편이 유리하다고 유비는 생각하죠. 그러나 장비에게 성을 맡기는 것이 마음이 놓이질 않았어요. 그러자 장비가 말합니다.
‘형님! 그건 염려 마십시오. 오늘부터 맹세코 술도 안 마시고…’라고. 그러나 결국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며 술을 마시게 되어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 장비의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는 말이 《삼국연의》에는 없으나, 정음사 《삼국지》에는 나옵니다.”
장비의 그 말은 번역한 사람이 원문에 없는 것을 창작하여 집어넣은 것이 된다. 최명 교수의 말이다.
“최동식 교수의 말대로라면 정음사 《삼국지》의 처음 얼마는 소설가 박태원(朴泰遠·1909~1986년), 뒷부분은 최영해가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는 말의 창작은 이 두 사람 중 한 명이 했을 테죠.
정음사 《삼국지》는 모두 100회로 되어 있고, 장비의 말은 11회에 나오기 때문에 아주 앞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박태원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는 모더니즘 작가로 알려졌고,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한 신변소설을 주로 썼어요. 1946년 그는 중학생을 위한 《중등문범(中等文範)》이란 한글 교재를 편집하여 정음사에서 출판한 적도 있어요.”
양주동의 술 이야기
― 《이 생각 저 생각》에는 양주동 선생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나오더군요.
“무애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려가요 ‘가시리’에 대한 선생의 현대적 평설(評說)을 고등학교 국어책에서 읽은 후입니다.”
평설의 시작은 이렇다.
〈… 별리(別離)를 제재로 한 시가(詩歌)가 고금 동서에 무릇 그 얼마리오마는, 이 ‘가시리’ 일편(一篇) 통편(通篇) 67자(字) 20수어(數語)의 소박미와 함축미, 그 절절(切切)한 애원(哀怨), 그 면면(綿綿)한 정한(情恨), 아울러 그 구법(句法), 그 장법(章法)을 따를 만한 노래가 어디 있느뇨. (후략)〉
최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무애의 ‘가시리’ 평설은 특히 명문이라 나는 어떻게 하면 그런 글을 쓰나 하는 생각을 했고, 무애의 박학(博學)과 글 솜씨는 동경(憧憬)의 대상이었죠. 그러다가 대학 2학년 때인가 선생이 특강을 하러 오셔서 얼굴을 직접 뵌 적이 있어요.
무애는 어느 강연에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머리를 열이라고 할 때, 춘원(이광수)이 아홉을 가졌고, 내가 0.5를 가졌다. 그 나머지를 3000만이 나눠가졌으니, 그게 오죽하겠는가?’라고…. 그는 자칭 국보(國寶)였지요.”
― 무애의 이야기 중에 술[酒]을 빼놓을 수 없지요.
“술 잘 먹는 DNA를 갖고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닮은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문재(文才)와 산재(算才)에 뛰어났다고 해요. 여기에 평생 술을 좋아하여 하루에 삼백배(三百杯)를 마시는 대주호였어요. ‘술로 말미암아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뜻밖의 횡액으로 세상을 떠났거니와, 그 문(文)과 산(算)과 주(酒), 삼장(三長)을 고스란히 내게 물려준 것은 슬프고도 고마운 일’이라고 무애는 아버지를 기렸지요.
다섯 살, 아버지 잔의 술을 빨아 마시던 철음(啜飮)이, 열 살에는 광에서 훔쳐 마신 도음(盜飮)으로 발전했고, 열한 살에는 모음(募飮)으로 진보했어요.”
변영로의 술 이야기
― 무애의 《문주반생기》와 함께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 역시 왕년 주당(酒黨)들의 애독서입니다. 수주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수주 역시 대단한 애주가였어요. 수주가 5~6세의 일입니다. 술이 먹고 싶어 어른에게 청해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술을 훔쳐 마시기로 작정하였지요.
술독 앞에 다다랐지만 술독이 높았어요. 그래, 책상과 궤짝 등을 포개어 놓고 기어오르다가 그만 실족하여 떨어지고 말았는데 얼마나 다쳤는지 아프다고 우는 통에 난리가 났다고 해요. 곡절을 안 자당은 등반에 실패한 그 독에서 표주박으로 술을 가득 떠서 주셨다고 합니다. 감격해서 마셨을 겁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아들 사랑이 술로 이어졌어요. 아버지는 술상만 대하면 막내아들을 불러 앉히고, ‘얘 영복(榮福·수주의 아명)아, 술이란 먹어야 하는 것이고 과한 것만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술을 부어주셨다는 겁니다. 시작은 어머니였고, 수련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것이죠.”
― 최명 교수께서도 한때 ‘주선(酒仙)’이라 불렸다고 들었습니다.
혹자는 그를 ‘낙타’에 비유하곤 했는데 주봉(酒峰)과 사람으로 둘러싸인 인봉(人峰)을 가졌다 하여 쌍봉낙타와 닮았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술을 끊었다.
“2016년 산남 선생을 처음 뵈었을 무렵 김옥길기념관(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이 수리 중이어서 봉원동 로터리 바로 옆 사무실을 임시로 쓰고 계셨어요.
그 무렵, 김병기 화백의 100회 생신축하연이 그 사무실에서 열린다는 초청장이 왔어요. 메뉴는 냉면과 빈대떡이라고 돼 있는데, 김형국 교수가 몰래(?) 사온 등산용 참이슬 소주가 10여 병이 있었고, 또 기대치도 않은 돼지고기 편육이 나와서 축하연은 둘째고 그만 취하고 말았어요.
그러다가 그다음 해인 2017년 4월에 나는 술을 끊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7일에 나의 금주를 축하한다 하시며, 산남 선생이 이백의 시 두 구(句)를 금색으로 장식된 노란 마분지에 붓으로 써주셨어요.
‘칼을 뽑아 물을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술잔 들어 근심을 씻으려 하나 근심은 다시 솟는다.(抽刀斷水水更流 擧杯鎖愁愁更愁)’
금주를 축하한다고 써주신 것인데 나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술을 끊어도 다시 술을 마실지 모른다’는 심정을 내게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禁酒와 산남과의 이별
시 두 구론 모자르다고 생각했는지, 혹은 술을 끊고 나서 커피를 더 마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해 8월 말 산남은 최 교수에게 ‘원두를 갈아서 끓이는 매우 수수한 기구를 구하여 원두 몇 봉과 함께 보내오니 이 노인의 정성을 헤아려 웃으며 받으시기를!’이란 글을 보내왔다고 한다.
“산남은 내가 술 끊은 것을 대단히 신통하게 여기신 것이 분명합니다.”
최 교수가 김옥길기념관으로 선생을 뵈러 간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정이 많은 선생은 갈 때마다 선물을 주었는데, 책도 주고 먹을 것도 주었다. 받은 책 가운데 《게티즈버그 연설문(The Gettysburg Address)》도 있다. 자그마한 책이었다. 선생이 이런 서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최명 교수에게 “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 A. Lincoln, May 11, 2018. with love and respect, 김동길〉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라는 링컨의 말과 함께 ‘사랑과 존경’의 뜻을 최 교수에게 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 2년이 지났다. 2020년 4월, 산남 선생이 최 교수를 불러 ‘석양에 홀로 서서’에 글을 쓰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최 교수는 “재주도 없이 매주 쓰는 것이 부담스러웠으나”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를 사랑하고 믿고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산남 선생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2021년 12월 23일 오후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인사 겸 묵은세배를 드리러 갔지요.
그러고 작년 10월 6일 영면하신 다음다음 날 오후 세 시 김옥길기념관 뒤뜰에 마련된 빈소에서 선생의 웃는 모습을 사진에서 뵈었습니다. 하나님 곁으로 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후지와라 데이 이야기
《이 생각 저 생각》에서 최명 교수는 후지와라 데이가 쓴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의 국내 번역서인 《내가 넘은 삼팔선》을 길게 인용한다.
이 책은 일본이 패망하자 주인공 후지와라 데이가 남편과 이별한 후 혼자 여섯 살, 세 살, 생후 1개월 된 아이 셋과 함께 겪은 실록이다. 날품팔이를 해가며 평안도 선천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향에 가기까지 긴 여정을 담고 있다. 최 교수의 말이다.
“데이의 가족이 탄 기차가 부산 부두에 도착한 것이 1946년 8월 26일이었고 어렵사리 배를 타고 후쿠오카현(福岡縣)의 하카타항(博多港)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하선은 쉽지 않았어요. 20여 일을 배에 묶여 있었죠. 밤이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남편이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마왕(魔王)’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하늘에는 별들이 아름답게 걸려 있었고, 어쩌다 유성이 바다 위로 사라졌다고 해요.”
데이는 세 아이를 아주 잘 키웠다. 그때 여섯 살이던 큰아들 마사히로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자동차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당시 세 살이던 둘째 마사히코는 도쿄대학 이학부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수학을 가르치다가 1975년에 귀국하여 대학교수가 되었다. 또 갓 태어났던 딸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두 아이의 어머니라고 한다. 최 교수의 말이다.
“데이는 세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 평생 전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심신에 깊은 상처를 지닌 세 아이를 어른으로 키운 데는 말할 수 없는 노력이 있었던 것이죠. 아이들에게 불행의 짐을 지운 것이 부모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데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죄의 의미로, 그때는 내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버렸을 만큼, 그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교육론
최명 교수가 《내가 넘은 삼팔선》을 소개한 것은 데이의 둘째 아들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지와라 마사히코가 쓴 〈읽고 쓰기 주판으로밖에 인간을 만들 수 없다〉 등등의 논문을 읽고 ‘이 생각 저 생각’을 드러낸다.
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에는 〈교육칙어(敎育勅語)〉란 것이 있었다. 국체(國體)라는 말이 최고의 가치로 존중되고 ‘공(公)’의 개념이 강조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전후(戰後) 〈교육기본법〉은 그 반동으로 ‘개인의 존엄’과 ‘개인의 가치’를 내세웠다. 아이들의 ‘버릇없는 짓’이 무슨 대단한 ‘개성’인 것으로 존중되었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수리이탈(數理離脫)과 독서이탈은 과학기술의 낙후와 연결되고, 그것은 결국 경제쇠퇴를 가져올 수 있어요. 방지책은 무엇일까요? ‘참을성’의 부족을 낳는 ‘아동중심주의’와 방임에 가까운 ‘개성존중’을 타파하는 길뿐입니다. 후지와라의 이러한 외침은 우리도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요.”
한국과 일본의 국어교사는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의 네 가지 영역을 모두 중시한다. 그러나 후지와라는 반대다. 말하기와 듣기는 학교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일상생활에서 자연히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후지와라에 따르면 교육의 비중을 읽기 20, 쓰기 5, 말하기와 듣기는 각각 1이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읽기에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두어 국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죠.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상용한자를 모두 읽을 수 있게 가르쳐야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국어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일본 신문을 보면 한자 천지예요.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국어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을 전제로 합니다.”
“수학에 몰두하면 미적 감수성 발달”
읽기를 통한 지식 습득에만 만족해선 안 된다. 후지와라는 “주판(籌板)이 더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판은 수학 공부를 말한다.
“읽기와 계산 연습은 뇌의 전두전야(前頭前野)에 혈액을 증가시킨다고 해요. 전두전야는 대뇌의 앞부분인 이마 근처인데 사람의 개성을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고 하죠. 지혜를 늘리는 기능을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수학에 몰두하면 논리의 힘이 증대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 미적 감수성이 발달된다고 합니다. 미적 감수성은 독창력과 관계가 있어요. 수학천재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모국어와 계산력을 가르친 결과입니다.”
최 교수의 교육론은 이렇다. 후지와라의 주장에 덧붙여 이렇게 설명한다.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아는 어휘는 부족할 수밖에 없어요. 어휘가 부족하니까 사고(思考)를 위한 소재도 자연 빈약해집니다. 세상을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죠. 그리하여 후지와라는 ‘말의 오염은 나라를 망치지 못하더라도, 어휘 부족은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했어요.
수학 역시 어휘의 수확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수학이든 철학이든, 갖가지 현상에 어휘를 대입해서, 그 어휘를 획득함으로써 다양한 사상과 이론, 정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국어와 산수의 기초가 단단하면 나중에 독창성이 저절로 우러나게 됩니다.”
끝으로 최 교수에 따르면, 후지와라 마사히코는 “국어 공부가 정서(情緖)를 배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국어 교육이 잘못되어 그런지 정서가 메마른 지 오래다.
“정서를 배양하려면 아름다운 것에 감동을 받는 것도 중요하죠. 그러려면 자연이나 예술을 가까이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름다운 시가(詩歌), 한시(漢詩), 자연을 노래하는 문학을 접해야 합니다.
후지와라는 ‘조국(祖國)이란 국어(國語)’라고 외칩니다. 조국이 국어라는 것은 국어 속에 조국을 조국이게 하는 문화, 전통, 정서 등의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다루는 기술 3가지
최 교수는 데일 카네기의 국내 번역서인 《우도(友道)》를 자세히 다룬다. 8·15 해방 이후 연세대 신과대학 이환신(李桓信·1902~1984년) 교수가 번역한 책이다. 다양한 인간관계의 기술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다.
― 책에는 데일이 설명하는 ‘사람을 다루는 기본적인 기술’ 3가지가 나오는데 맛보기로 설명해주세요.
“첫째, 비판·책망·불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판은 도리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변명에 힘쓰게 하고, 방어를 더 단단하게 할 뿐이에요. 그러니 그런 사람을 비판해보았자 소용이 없어요.
둘째, 정직하고 진솔한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아첨은 이기적이고, 칭찬은 공정하죠. 먼저 다른 사람의 장점이 무엇인지 찾아야 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면 참되고 바른 칭찬이 저절로 나오죠.
셋째, ‘다른 사람의 소원을 불러일으키라!’입니다. 낚시꾼이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를 매달듯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편하게 만날 수 있었던 선생의 홈페이지 ‘석양에 홀로 서서’(www.kimdonggill.com)도 지금은 열리지 않는다.
서울대 정치학과 최명(崔明·82) 명예교수는 매주 월요일마다 ‘석양에 홀로 서서’에 흥미로운 글을 올렸었다. 2020년 4월 중순부터 만 2년 반 동안 이어졌다. 코너 이름은 ‘이 생각 저 생각’. 재미와 교양이 가득해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다.
최 교수는 산남 선생에 대한 그리움에, 그리고 한 편씩 공들여 쓴 글이어서 미련이 남았다. 최근 이 글을 묶어 556쪽에 이르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펴냈다. 최 교수는 “선생이 이 책을 보시면 아무 말씀 없이 그냥 빙그레 웃으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기자는 이 책을 여러 차례 통독하며 최 교수의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들었다.
산남 선생과의 인연은…
최명 교수가 펴낸 《이 생각 저 생각》 |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1903~1977년)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1960),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1898~1961년)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1953), 후지와라 데이(藤原 貞)의 실록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를 번역한 정광현(鄭廣鉉)의 《내가 넘은 삼팔선(三八線)》(1949),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1943~)의 여러 편의 글과 논문,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1888~1955년)의 《우도(友道)》(이환신 번역), 천리구(千里駒) 김동성(金東成·1890~1969년)의 《미주(米洲)의 인상(印象)》 등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여러 화제(話題)에 담긴 이야기마다 최 교수는 유려한 문체로 ‘이 생각 저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내는데 평생 학자로 쌓아 올린 지적(知的) 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능한 독자라면 하룻밤 사이에 한자리에 앉아 550쪽이 넘는 책을 다 읽을 수도 있을 만큼 중독성이 높다.
기자는 최 교수를 여러 차례 만나고 통화하며 《이 생각 저 생각》에 담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천리구(千里駒) 김동성(金東成)이 쓴 《미주(米洲)의 인상(印象)》. 김희진·황호덕이 옮겼다. 김동성은 문필가이고 만화가이고 번역가이고 정치가이며 언론인이었다. |
“처음 만나 뵌 것은 2016년 3월 김병기 화백의 〈백세청풍(百世淸風): 바람이 일어나다〉란 전시회에서였어요.
선생께서 먼저 오셔서 휠체어에 앉아 계셨는데 서울대 김형국 교수가 나를 끌고 가서 인사를 시켰어요. 반갑게 왼손으로 나의 손을 잡으셨어요. 오른팔이 불편하신 줄도 몰랐어요.”
당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란 책이 나올 예정이었는데 산남 선생이 대표 필자였고 최 교수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이란 글을 실었다고 한다. “나중 이야기지만 산남 선생이 그 글을 좋아하신 것 같고”, 이게 두 사람 인연의 시작이었다.
“일석대좌도 500년 전의 인연이라고 불가(佛家)에서는 말한다지만, 500년을 참았던 것이 터져서인지 산남 선생과 나의 관계는 급속하게 친밀해졌어요. 산남 선생은 누구나 온유하게 사랑하셨지만, 나도 그 사랑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지요.”
최명의 설거지론 “행주는 전자레인지에 약 1분간 돌려” 《이 생각 저 생각》에는 최명 교수의 설거지론(論)도 있다. 이른바 ‘이순신 전법’이다. “흠모하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함자를 설거지와 연관시킨 것은 황송한 일이죠. 굳이 설거지 과정을 소개하자면 아내가 요리를 할 적에, 내가 옆에서 시중을 들다 보면 양푼·양념그릇·도마·칼 따위를 씻어야 됩니다. 하나든 둘이든, 나오는 대로 주방세제(비누)로, 경우에 따라 소다(soda)로도 씻어 건조대에 일단 엎어놓아요. 씻은 그릇이 마르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마른 수건으로 바로 닦아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두죠. 젖은 그릇은 건조대에 잠시 머물 뿐입니다. 건조대가 비어 있어야 내 속이 편해요. 행주는 세균이 잘 번식하기 때문에, 가끔 전자레인지에 넣어 약 1분간 돌리고 나서 말립니다. 그러면 웬만한 세균은 죽어요. 전에는 행주를 삶아 빨았죠. 싱크대를 비누로 싹싹 닦아요. 또 매번은 아니라도 음식찌꺼기를 거르는 금속으로 된 망과 그 아래 물 내려가는 구멍을 헌 칫솔로 닦지요. 금속 거름망은 일주일에 두어 번 저녁 설거지 후 ‘락스’를 푼 물에 밤새 담가두었다가 아침에 헹굽니다. 그럼, 반짝반짝해져요. 저녁 설거지 후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립니다. 그러곤 부엌바닥을 훔쳐요. 부엌바닥용 걸레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면서 혹시 잘못된 것, 또는 빠뜨린 것이 없나 하고 뒤를 돌아보죠. 코로나19 사태 이후 삼시 세 끼를 집에서 먹는 날이 많아졌어요. 그러면 설거지가 세 번이고, 따라서 세 번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
나와 《삼국지》, 정음사
― 최명 교수 하면 머릿속에 《삼국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삼국지》 전문가이고 관련 책과 글을 여러 편 발표했지요.
“내가 중학 2학년 때인가, 《학원(學園)》이란 잡지에 연재되던 김용환 화백의 ‘코주부 삼국지’를 더러 읽었어요. 1954년부터 정음사(正音社)에서 《삼국지》를 몇 해에 걸쳐 10권을 펴냈죠. 모두 사서 열심히 읽었어요. 대학 다닐 적엔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삼국지》가 번역되어 그것도 읽었죠.
내가 마흔이 넘어 서울 반포아파트에 살 때인데, 아이들이 읽는 《고우영 삼국지》를 옆에서 같이 보기도 했어요. 아파트 같은 동에 살던 고우영 화백과는 여러 인연이 많아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항상 ‘장비’처럼 마셨는지 늘 대취했죠. 내가 《소설이 아닌 삼국지》(1993)를 낼 적에 그는 스무 장이나 되는 컷을 그려주기도 했어요.
《삼국지》를 좋아한다는 얘기가 퍼져서인지, 《삼국지》와 관련된 각종 책을 보낸 동료와 제자들도 있어요. 덕분에 진수의 《삼국지》도 읽었고,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삼국시대 부분도 읽을 수 있었어요.”
1983년 정음사에서 《중국고전문학선집》을 출판한 일이 있다. 그 첫 3권이 《삼국지》였다. 10권으로 출판된 것을 3권으로 압축한 것이었다. 10권으로 된 《삼국지》의 번역 및 발행인은 최영해(崔暎海·1913~1981년)이다. 그는 국어학자 최현배(崔鉉培·1894~1970년) 선생의 장남으로 당시 정음사 대표였다. 《중국고전문학선집》 〈삼국지〉의 번역 및 발행자는 최동식(崔東植·현 고려대 화학과 명예교수)인데 최영해의 장남이다.
“최동식 교수의 전공은 화학이었지만 ‘사회역학(社會力學)’이라고 스스로 명명한 좀 기이한 사회이론을 개발했고, 사회과학도들과 잘 어울렸어요. 시작은 불확실하나 그를 여러 번 만났죠. 늘 의기투합했고, 술도 많이 마셨지요. 《삼국지》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어요.”
― 《이 생각 저 생각》도 장비의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로 시작하더군요.
“조조의 계략 때문에 유비가 원술과 싸운 적이 있었는데 서주를 비워둘 수 없었어요. 유비는 ‘관우와 장비, 둘 중에 누가 남아서 성을 지키겠느냐?’고 물었어요.
서로 남아서 지키겠다고 하지만 관우와 같이 가는 편이 유리하다고 유비는 생각하죠. 그러나 장비에게 성을 맡기는 것이 마음이 놓이질 않았어요. 그러자 장비가 말합니다.
‘형님! 그건 염려 마십시오. 오늘부터 맹세코 술도 안 마시고…’라고. 그러나 결국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며 술을 마시게 되어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 장비의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는 말이 《삼국연의》에는 없으나, 정음사 《삼국지》에는 나옵니다.”
장비의 그 말은 번역한 사람이 원문에 없는 것을 창작하여 집어넣은 것이 된다. 최명 교수의 말이다.
“최동식 교수의 말대로라면 정음사 《삼국지》의 처음 얼마는 소설가 박태원(朴泰遠·1909~1986년), 뒷부분은 최영해가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는 말의 창작은 이 두 사람 중 한 명이 했을 테죠.
정음사 《삼국지》는 모두 100회로 되어 있고, 장비의 말은 11회에 나오기 때문에 아주 앞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박태원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는 모더니즘 작가로 알려졌고,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한 신변소설을 주로 썼어요. 1946년 그는 중학생을 위한 《중등문범(中等文範)》이란 한글 교재를 편집하여 정음사에서 출판한 적도 있어요.”
양주동의 술 이야기
― 《이 생각 저 생각》에는 양주동 선생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나오더군요.
“무애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려가요 ‘가시리’에 대한 선생의 현대적 평설(評說)을 고등학교 국어책에서 읽은 후입니다.”
평설의 시작은 이렇다.
〈… 별리(別離)를 제재로 한 시가(詩歌)가 고금 동서에 무릇 그 얼마리오마는, 이 ‘가시리’ 일편(一篇) 통편(通篇) 67자(字) 20수어(數語)의 소박미와 함축미, 그 절절(切切)한 애원(哀怨), 그 면면(綿綿)한 정한(情恨), 아울러 그 구법(句法), 그 장법(章法)을 따를 만한 노래가 어디 있느뇨. (후략)〉
최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무애의 ‘가시리’ 평설은 특히 명문이라 나는 어떻게 하면 그런 글을 쓰나 하는 생각을 했고, 무애의 박학(博學)과 글 솜씨는 동경(憧憬)의 대상이었죠. 그러다가 대학 2학년 때인가 선생이 특강을 하러 오셔서 얼굴을 직접 뵌 적이 있어요.
무애는 어느 강연에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머리를 열이라고 할 때, 춘원(이광수)이 아홉을 가졌고, 내가 0.5를 가졌다. 그 나머지를 3000만이 나눠가졌으니, 그게 오죽하겠는가?’라고…. 그는 자칭 국보(國寶)였지요.”
― 무애의 이야기 중에 술[酒]을 빼놓을 수 없지요.
“술 잘 먹는 DNA를 갖고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닮은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문재(文才)와 산재(算才)에 뛰어났다고 해요. 여기에 평생 술을 좋아하여 하루에 삼백배(三百杯)를 마시는 대주호였어요. ‘술로 말미암아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뜻밖의 횡액으로 세상을 떠났거니와, 그 문(文)과 산(算)과 주(酒), 삼장(三長)을 고스란히 내게 물려준 것은 슬프고도 고마운 일’이라고 무애는 아버지를 기렸지요.
다섯 살, 아버지 잔의 술을 빨아 마시던 철음(啜飮)이, 열 살에는 광에서 훔쳐 마신 도음(盜飮)으로 발전했고, 열한 살에는 모음(募飮)으로 진보했어요.”
왼쪽부터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1960),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1953) |
“수주 역시 대단한 애주가였어요. 수주가 5~6세의 일입니다. 술이 먹고 싶어 어른에게 청해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술을 훔쳐 마시기로 작정하였지요.
술독 앞에 다다랐지만 술독이 높았어요. 그래, 책상과 궤짝 등을 포개어 놓고 기어오르다가 그만 실족하여 떨어지고 말았는데 얼마나 다쳤는지 아프다고 우는 통에 난리가 났다고 해요. 곡절을 안 자당은 등반에 실패한 그 독에서 표주박으로 술을 가득 떠서 주셨다고 합니다. 감격해서 마셨을 겁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아들 사랑이 술로 이어졌어요. 아버지는 술상만 대하면 막내아들을 불러 앉히고, ‘얘 영복(榮福·수주의 아명)아, 술이란 먹어야 하는 것이고 과한 것만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술을 부어주셨다는 겁니다. 시작은 어머니였고, 수련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것이죠.”
― 최명 교수께서도 한때 ‘주선(酒仙)’이라 불렸다고 들었습니다.
혹자는 그를 ‘낙타’에 비유하곤 했는데 주봉(酒峰)과 사람으로 둘러싸인 인봉(人峰)을 가졌다 하여 쌍봉낙타와 닮았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술을 끊었다.
“2016년 산남 선생을 처음 뵈었을 무렵 김옥길기념관(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이 수리 중이어서 봉원동 로터리 바로 옆 사무실을 임시로 쓰고 계셨어요.
그 무렵, 김병기 화백의 100회 생신축하연이 그 사무실에서 열린다는 초청장이 왔어요. 메뉴는 냉면과 빈대떡이라고 돼 있는데, 김형국 교수가 몰래(?) 사온 등산용 참이슬 소주가 10여 병이 있었고, 또 기대치도 않은 돼지고기 편육이 나와서 축하연은 둘째고 그만 취하고 말았어요.
그러다가 그다음 해인 2017년 4월에 나는 술을 끊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7일에 나의 금주를 축하한다 하시며, 산남 선생이 이백의 시 두 구(句)를 금색으로 장식된 노란 마분지에 붓으로 써주셨어요.
‘칼을 뽑아 물을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술잔 들어 근심을 씻으려 하나 근심은 다시 솟는다.(抽刀斷水水更流 擧杯鎖愁愁更愁)’
금주를 축하한다고 써주신 것인데 나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술을 끊어도 다시 술을 마실지 모른다’는 심정을 내게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禁酒와 산남과의 이별
자유인 김동길 선생 |
“산남은 내가 술 끊은 것을 대단히 신통하게 여기신 것이 분명합니다.”
최 교수가 김옥길기념관으로 선생을 뵈러 간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정이 많은 선생은 갈 때마다 선물을 주었는데, 책도 주고 먹을 것도 주었다. 받은 책 가운데 《게티즈버그 연설문(The Gettysburg Address)》도 있다. 자그마한 책이었다. 선생이 이런 서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최명 교수에게 “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 A. Lincoln, May 11, 2018. with love and respect, 김동길〉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라는 링컨의 말과 함께 ‘사랑과 존경’의 뜻을 최 교수에게 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 2년이 지났다. 2020년 4월, 산남 선생이 최 교수를 불러 ‘석양에 홀로 서서’에 글을 쓰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최 교수는 “재주도 없이 매주 쓰는 것이 부담스러웠으나”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를 사랑하고 믿고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산남 선생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2021년 12월 23일 오후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인사 겸 묵은세배를 드리러 갔지요.
그러고 작년 10월 6일 영면하신 다음다음 날 오후 세 시 김옥길기념관 뒤뜰에 마련된 빈소에서 선생의 웃는 모습을 사진에서 뵈었습니다. 하나님 곁으로 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후지와라 데이의 소설 같은 기록물인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와 영화 포스터, 그리고 정광현이 번역한 《내가 넘은 삼팔선(三八線)》 |
이 책은 일본이 패망하자 주인공 후지와라 데이가 남편과 이별한 후 혼자 여섯 살, 세 살, 생후 1개월 된 아이 셋과 함께 겪은 실록이다. 날품팔이를 해가며 평안도 선천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향에 가기까지 긴 여정을 담고 있다. 최 교수의 말이다.
“데이의 가족이 탄 기차가 부산 부두에 도착한 것이 1946년 8월 26일이었고 어렵사리 배를 타고 후쿠오카현(福岡縣)의 하카타항(博多港)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하선은 쉽지 않았어요. 20여 일을 배에 묶여 있었죠. 밤이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남편이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마왕(魔王)’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하늘에는 별들이 아름답게 걸려 있었고, 어쩌다 유성이 바다 위로 사라졌다고 해요.”
데이는 세 아이를 아주 잘 키웠다. 그때 여섯 살이던 큰아들 마사히로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자동차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당시 세 살이던 둘째 마사히코는 도쿄대학 이학부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수학을 가르치다가 1975년에 귀국하여 대학교수가 되었다. 또 갓 태어났던 딸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두 아이의 어머니라고 한다. 최 교수의 말이다.
“데이는 세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 평생 전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심신에 깊은 상처를 지닌 세 아이를 어른으로 키운 데는 말할 수 없는 노력이 있었던 것이죠. 아이들에게 불행의 짐을 지운 것이 부모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데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죄의 의미로, 그때는 내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버렸을 만큼, 그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교육론
최명 교수가 《내가 넘은 삼팔선》을 소개한 것은 데이의 둘째 아들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지와라 마사히코가 쓴 〈읽고 쓰기 주판으로밖에 인간을 만들 수 없다〉 등등의 논문을 읽고 ‘이 생각 저 생각’을 드러낸다.
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에는 〈교육칙어(敎育勅語)〉란 것이 있었다. 국체(國體)라는 말이 최고의 가치로 존중되고 ‘공(公)’의 개념이 강조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전후(戰後) 〈교육기본법〉은 그 반동으로 ‘개인의 존엄’과 ‘개인의 가치’를 내세웠다. 아이들의 ‘버릇없는 짓’이 무슨 대단한 ‘개성’인 것으로 존중되었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수리이탈(數理離脫)과 독서이탈은 과학기술의 낙후와 연결되고, 그것은 결국 경제쇠퇴를 가져올 수 있어요. 방지책은 무엇일까요? ‘참을성’의 부족을 낳는 ‘아동중심주의’와 방임에 가까운 ‘개성존중’을 타파하는 길뿐입니다. 후지와라의 이러한 외침은 우리도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요.”
한국과 일본의 국어교사는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의 네 가지 영역을 모두 중시한다. 그러나 후지와라는 반대다. 말하기와 듣기는 학교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일상생활에서 자연히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후지와라에 따르면 교육의 비중을 읽기 20, 쓰기 5, 말하기와 듣기는 각각 1이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읽기에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두어 국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죠.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상용한자를 모두 읽을 수 있게 가르쳐야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국어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일본 신문을 보면 한자 천지예요.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국어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을 전제로 합니다.”
“수학에 몰두하면 미적 감수성 발달”
사진=조준우 |
“읽기와 계산 연습은 뇌의 전두전야(前頭前野)에 혈액을 증가시킨다고 해요. 전두전야는 대뇌의 앞부분인 이마 근처인데 사람의 개성을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고 하죠. 지혜를 늘리는 기능을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수학에 몰두하면 논리의 힘이 증대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 미적 감수성이 발달된다고 합니다. 미적 감수성은 독창력과 관계가 있어요. 수학천재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모국어와 계산력을 가르친 결과입니다.”
최 교수의 교육론은 이렇다. 후지와라의 주장에 덧붙여 이렇게 설명한다.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아는 어휘는 부족할 수밖에 없어요. 어휘가 부족하니까 사고(思考)를 위한 소재도 자연 빈약해집니다. 세상을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죠. 그리하여 후지와라는 ‘말의 오염은 나라를 망치지 못하더라도, 어휘 부족은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했어요.
수학 역시 어휘의 수확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수학이든 철학이든, 갖가지 현상에 어휘를 대입해서, 그 어휘를 획득함으로써 다양한 사상과 이론, 정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국어와 산수의 기초가 단단하면 나중에 독창성이 저절로 우러나게 됩니다.”
끝으로 최 교수에 따르면, 후지와라 마사히코는 “국어 공부가 정서(情緖)를 배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국어 교육이 잘못되어 그런지 정서가 메마른 지 오래다.
“정서를 배양하려면 아름다운 것에 감동을 받는 것도 중요하죠. 그러려면 자연이나 예술을 가까이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름다운 시가(詩歌), 한시(漢詩), 자연을 노래하는 문학을 접해야 합니다.
후지와라는 ‘조국(祖國)이란 국어(國語)’라고 외칩니다. 조국이 국어라는 것은 국어 속에 조국을 조국이게 하는 문화, 전통, 정서 등의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다루는 기술 3가지
데일 카네기의 《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과 이환신 교수의 번역서인 《우도(友道)》. 그리고 많은 국내 번역서들이다. |
― 책에는 데일이 설명하는 ‘사람을 다루는 기본적인 기술’ 3가지가 나오는데 맛보기로 설명해주세요.
“첫째, 비판·책망·불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판은 도리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변명에 힘쓰게 하고, 방어를 더 단단하게 할 뿐이에요. 그러니 그런 사람을 비판해보았자 소용이 없어요.
둘째, 정직하고 진솔한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아첨은 이기적이고, 칭찬은 공정하죠. 먼저 다른 사람의 장점이 무엇인지 찾아야 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면 참되고 바른 칭찬이 저절로 나오죠.
셋째, ‘다른 사람의 소원을 불러일으키라!’입니다. 낚시꾼이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를 매달듯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