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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대한민국 유도탄의 아버지 이경서 박사

“저희는 정말 목숨 걸고 했어요”

글 : 장원재  (주)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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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무기는 국가적 노력이 투입되어야 만들 수 있다”
⊙ “박정희 대통령의 궁극적인 목표는 핵 개발…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 들여오는 프로젝트가 실패한 후에는 구체적인 움직임 없었다”
⊙ “나이키 미사일을 유지·보수하는 것처럼 하면서 지대지 미사일 개발”
⊙ 미국에서 추진제 믹서, 영국에서 관성 유도장치 도입
⊙ “내 제안을 대통령이 100%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느낌만큼 짜릿한 경험은 없었다”

이경서 박사
1938년생. 서울대 공과대학 2년 수료, 미국 MIT공대 기계공학과 졸업, 同 대학원 석사·박사, 미 BBN사 선임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책임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ADD) 유도탄 개발 담당 부소장 겸 대전기계창장, 국제화재해상보험㈜ 사장, 한국중공업㈜ 부사장, 단암전자통신㈜ 회장, 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한국과학재단 부이사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역임. 현 단암시스템즈㈜ 회장 / [수상] 보국훈장 천수장, 국민훈장 모란장 국방과학장려 특1 대통령 표창 등
  “기적은 행동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남이 잘사는 비법을, 다만 지식으로 삼는다거나 감상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이냐.”(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1963)
 
  “나라의 명운(命運)이 걸린 문제다. 즉각 유도탄(誘導彈) 개발에 착수하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긴급 밀명(密命)이 떨어졌다.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 나온 직후의 일이다. 1969년 7월 2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은 괌에서 백악관 수행기자단과 기자회견을 했다. 닉슨은 단호했다. 동맹국들의 ‘자주국방 능력 강화’를 역설하고, 미국의 부담 감축 방침을 천명했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미국은 세 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서 싸워야 했다.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그리고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이 그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처럼 미국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시킨 지역은 일찍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출혈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닉슨 독트린은 대한민국에 있어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직접적인 군사적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러한 회견 내용은 즉각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닉슨은 우방 및 동맹국들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는 지키겠지만, 핵(核) 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1차적 방위를 책임지라고 했다. 핵우산과 경제원조는 계속하겠지만, 군사적 개입은 줄이겠다는 선언이었다. 한반도에 관해서는 ‘한국 안보의 한국화(Koreanization of Korea Security)’라는 말을 들고 나왔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국산 무기라고는 소총(小銃) 한 자루도 못 만드는 나라에서, 무슨 수로 1차적 방위를 책임진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수년간의 불철주야(不撤晝夜) 분투를 통해 가능으로 바꿔낸 사람들이 있다. 이 중 한 명이 유도탄 개발의 총책임자 이경서(李景瑞·85) 박사다.
 
 
  ‘서울이 맞으면 평양을 때린다’
 
  ― 박정희 대통령이 유도탄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단호히 명령한 배경은 뭡니까.
 
  “그 당시에 상호주의 원칙, 비례폭격 비례대응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북이 도발해서 소총 한 발 쏘면 우리도 소총 한 발만 쏜다는 원칙이죠. 예를 들어, 저쪽에서 포 한 발 쏘면 우리도 포 똑같은 것으로 한 발 쏜다는 1대 1 개념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소련제 프로그(Frog)라는 사정거리(射程距離) 70km인 로켓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로켓을 휴전선 인근에서 쏘면 서울에 떨어질 수 있었죠. 박 대통령은 대응 수단이 꼭 필요하다고 본 듯합니다.”
 
  ― 북한이 서울을 향해 쏘면 우리도 평양을 향해 쏜다는 개념이군요.
 
  “그렇습니다. ‘서울이 맞으면 평양을 때린다’가 상호주의에 의한 비례대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행기를 보낼 수는 없죠. 그건 에스컬레이션(Escalation), 즉 상황 확대니까 그건 안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로켓, 즉 유도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 사거리를 200km로 늘려 잡은 이유는 뭡니까.
 
  “서울에서 평양까지가 약 170km거든요. 대통령이 원한 미사일은 바로 이 용도로 유사시 직접 평양을 때릴 수 있는 지대지(地對地) 유도탄이었습니다.”
 
  ― 당시는 소총 한 자루도 제대로 못 만들던 시절인데, 아무리 대통령 지시라고 해도 단기간에 개발이 가능했나요?
 
  “불가능했지만,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포기할 수는 없었죠. 보고서를 낼 때 ‘국가적으로 달려들면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꼬박 6년이 걸렸지만 결국은 해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세계 유수의 방위산업 선진국이지만, 시작은 미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이 자주국방(自主國防)의 첫걸음이자 긴급히 필요한 사업이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세워 무기 생산 연구를 지시했다. 당시 북한은 탱크까지 자체 생산하던 수준이었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이상, 무기 생산에 관한 남북 격차를 하루라도 빨리, 무조건 줄여야 했다.
 
 
  ‘번개사업’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재직 시절 이경서 박사가 200km 사정거리 유도탄을 개발할 당시의 모습이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제일 먼저 한 과제가 ‘번개사업’입니다. 3개월 안에 기관총, 소총 등 시제품(試製品)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했죠. 역설계(逆設計)를 하든, 카피하든 일단 비슷하게 만들어라. 단, 생산시설을 새로 만들지 말고 현재 국내의 인력과 장비를 활용하라. 성능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겉은 비슷한 소총과 기관총 시제품을 3개월 안에 만들어냈습니다.”
 
  ― 3개월 가지고 될 일입니까.
 
  “불가능하죠. 하지만 당시는 대통령뿐 아니라 일반 국민, 과학자 모두 국가 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을 때였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손 놓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어요. 박 대통령께서 당시 우리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봅니다.”
 
  기관총 부품은 1/10,000mm 수준의 정밀도를 가져야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1/100mm 정밀도 부품도 생산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장난감(?) 수준의 모조품 무기였지만, 시연회(試演會)가 끝나자 자신감이 생겼다. 크고 작은 사고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총알은 발사되었다. 표적도 비슷하게 맞히는 데 성공했다. 제대로 된 무기를 양산(量産)하는 수준까지 가려면 갈 길이 멀었지만, 노력하면 우리 능력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 한계의 경계가 늘어난 것이었다.
 
  “번개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미국의 협조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술지원단이 와서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기술 도면 등 자료도 주고, 그래서 우리나라 무기 제조 기술이 갑자기 확 올라갔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무기 개발 계획이 이 수준에서 멈추길 바랐을 터이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국익(國益)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지도자였다. 번개사업 직후, 장거리 유도탄을 개발할 능력이 있는지 검토해서 보고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왔다. 다들 번개사업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이에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ADD로 막 옮겨온 이경서 박사에게 ‘책임지고 보고서 만드는’ 역할이 주어졌다.
 
  “유도탄 만들 수 있느냐고 하는데 ‘만들 수 없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KIST에 있는 교수 두 분한테 연락을 했죠. 조그만 여관방 하나 빌려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살아”
 
  이경서 박사는 MIT에서 석·박사를 하고 미국 BBN사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국가의 부름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 미국에서 전문직 연구원이었고, 귀국하면 연봉도 25% 수준으로 낮아지는데, 가족의 반대라든가 갈등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어요. 왜냐하면,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사람들의 영어나 관습이 지금과 또 달라서 미국 생활이 그렇게 편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꼭 귀국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죠. 미국에서 평생 산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실향민(失鄕民)이라,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이경서 박사는 1938년 평양 태생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어머니의 고향은 대동강 하류의 진남포(鎭南浦)다. 아버지는 금융업에 종사했다. 일제(日帝) 때 발령받은 곳이 평양. 이경서는 평양에서 초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다. 지금 김일성경기장 인근에 있던 기림리국민학교다.
 
  ― 월남(越南)은 언제 한 겁니까.
 
  “해방된 다음 해 1946년에 했습니다. 김일성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화폐개혁이었죠. 1946년 1월에 소위 조선중앙은행을 만들고 1947년 12월에 화폐개혁을 했습니다. 금융기관에 계셨던 제 아버님이 이에 반대했는지, 언젠가부터 공산당이 저희 가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먼저 혼자서 월남하셨고, 나머지 가족이 부친의 연락을 받고 38선을 걸어서 넘었습니다.”
 
 
  인당수 넘어 越南
 
  ― 얼마나 뒤에 출발한 겁니까.
 
  “제가 어렸을 때라 잘 기억은 못 하지만, 한 10개월 정도 뒤였을 겁니다.”
 
  가족 10명이 함께 떠났는데 감시를 피하다 보니 서로 흩어졌다. 할머니, 형[이봉서(李鳳瑞) 전 동력자원부 장관]과 셋이서 38선을 건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밤 열두 시, 한 시쯤 됐는데 38선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죠. 그때가 장마철이라 개구리가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요즘도 밤에 개구리 소리가 들려오면 그날의 광경이 정확하게 떠오릅니다.”
 
  38선 경비병은 민간 경비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뇌물도 통했고, 밀수꾼 등 여러 차례 남북을 오가는 사람이 그래도 여럿 있던 시절이다. 경비대는 장사꾼에게는 심하게 굴었지만 일반인들에겐 “다시 돌아가십시오”라며 그냥 풀어줬다. 풀려난 사람들은 다른 길로 우회해서 38선을 넘었다.
 
  ―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걸어갔습니까.
 
  “평양에서 사리원까지 기차를 탔고, 사리원에서부터 해주까지 걸어서 38선 넘어 옹진(甕津)까지 왔죠. 옹진반도가 38선 이남이니까, 그때는 대한민국 영토였습니다. 거기서 배 타고 인천으로 왔습니다.”
 
  어선을 빌렸다. 소위 말하는 똑딱선을 타고 넘어왔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있어요. 선장이 ‘여기가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입니다’라고 그러는데 정말 파도가 험했어요. 바닷물도 파랗지 않고 누렇더군요.”
 
  국민학교 6학년 때 6·25가 터졌다. 피란을 못 가서 적치하(赤治下)에서 3개월을 살았다. 집 옆으로 탱크가 지나가기도 하고, 어린아이라서인지는 몰라도 크게 위협을 당한 일은 없었다. 영화관이 공짜였던 것도 기억한다. 소련 영화 등 공산주의 선전 영화를 무료로 상영했다. 평생토록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광경도 목격했다.
 
  “집에서 나와 창경궁 쪽으로 가는데 시체 태우는 것을 봤어요. 육군들, 병원에 입원했던 사람들인지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죠. 소각장보다도 시체 쌓아놓은 높이가 더 높았어요. 시신은 전부 팬티만 입은 채로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추산 1000여 명이 학살당한 ‘서울 의대 부속병원 학살 사건’의 목격담이다. 이경서 박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쇼킹한 장면이었다’고 증언한다.
 
 
  “다른 길 가고 싶어서 기계과 선택”
 
  1·4 후퇴 때 대구와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부산에서 ‘천막학교’에 다니다 바뀐 제도에 따라 제1차 국가시험을 봤고, 경기중학교에 합격했다. 경기중고에서 각별히 친했던 동기동창으로는 훗날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내는 정근모(鄭根模)가 있다.
 
  ― 고교 졸업 후 서울 공대로 진학했는데, 공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저희 집안 분들이 대부분 상과(商科)를 나오셨습니다. 아버님도, 형도, 큰아버님도 사촌들도 대부분 금융계로 가셨어요. 저는 다른 길을 가고 싶어서 기계과를 선택했습니다.”
 
  이경서는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유학길에 오른다. MIT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했으니 상당한 인정을 받은 셈이다. MIT는 학문적 혼종교배(混種交配)를 지향해 자교(自校) 출신 석·박사 진학률을 20% 내외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쫓아갔는데 운이 좋았죠. 4학년 때 지도교수께서 실험을 시켰는데, 제가 이론적 해결책이 떠올라서 혼자 도서관에서 자료 찾고 공부해 정해진 일정을 확 앞당겨 마무리했습니다. 제 이름으로 논문을 내자고 하시기에 교수님을 주요 저자로 하고, 저를 제1저자로 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기계공학의 제일 권위 있는 저널에 논문이 실렸고, 그분 덕분에 대학원에 들어가게 됐죠.”
 
  미국 생활을 같이 했던 인사로는 친구 정근모 외에 배순훈 전 대우전자 사장, 이태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등이 있다.
 
  결혼은 미국에서 했다. 교회에서 만난 유학생 아가씨다. 유학생 하나가 약혼을 하자, 처녀 총각들 마음에 불이 붙어 수많은 커플이 결혼에 이르렀다. MIT에서 박사를 마치고, 3년 동안 연구소에서 일했다. 하버드대, MIT 교수들이 공동으로 세운 연구소였다. 귀국 제의를 받고 미련 없이 짐을 쌌다. 1969년, 도미(渡美) 10년 만이었다. 군말 없이 뜻에 따라준 아내에게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늘이 도와서 성공한 프로젝트’
 
이경서 박사가 1974년 미국 국방부를 방문했을 때다. 유도탄 개발 대신 퇴역한 미사일을 유지·보수하는 것처럼 속였다고 한다.
  귀국 후 첫 프로젝트는 ‘기계공업 육성 방향’ 수립. 우리나라 여건에 맞는 리더 인더스트리(leader industry) 딱 하나만 중점 육성해야 한다는 안(案)을 마련했다. 산업 기반이 총체적으로 부실한 상황에서 여러 산업을 동시에 육성한다는 것은 욕심이 지나쳐 성과를 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기계공업 육성 방향은 첫째, 국산 무기 개발, 둘째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산업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국가적 프로젝트에 매달려 있는데 갑자기 국내외 안보 상황이 급변한 사정은 전술(前述)한 바와 같다. 이제는 유도탄 개발에 일생을 걸어야 했다.
 
  “보고서 내고 한 달쯤 있다가 상세한 계획서를 내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유도탄 개발 계획’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항공공업’이라는 위장 명칭을 썼죠. 아파트 하나 빌려서 군(軍)에 계신 박사분들 몇 분하고 3개월 동안 작업했습니다. 극비 보안 사항이라 가족들한테 연락도 못 했어요. 정보 당국에서 저희 숙소를 지키고 있었죠.”
 
  대통령이 사인하자 일 처리에 탄력이 붙었다. 연구비가 나오고, 대전에 유도탄연구소도 만들었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눈감아준 면도 있다.
 
  ― ‘200km 사정거리 유도탄을 개발한다’, 이것이 말은 간단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첩첩산중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사실 아이디어도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운이 좋아서, 하늘이 도와서 성공한 프로젝트입니다. 저희 기술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에요.”
 
  ― 그때 낸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가 ‘나이키 미사일 개조 프로젝트’였다고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우리 상황과 여건을 살피고 시작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잖아요. 사정거리 200km 유도탄을 개발한다 하면 미국이 주목할 것이고, 우리 군(軍)이 보유한 나이키 미사일을 유지·보수하는 것처럼 하면 감시망이 헐거워질 거라 생각했죠. 또한 나이키는 당시 미국에서 거의 퇴역(退役)한 상태였어요. 우리가 나이키 관련 정보를 달라는 명분도 확실했습니다. 나이키는 지대공(地對空) 유도탄이지만, 지대지로서도 한 140km는 날아갑니다. 이걸 개조하면 사정거리 200km 유도탄이 충분히 나오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美, 유도탄은 용인, 核은 不容”
 
  ― 미사일 사거리에 미국이 자꾸 제한을 두고 여기까지는 해도 되고 이거는 안 되고 이렇게 제동을 거는 이유는 뭡니까.
 
  “군비증강(軍備增强)을 원하지 않는 거지요. 남북이 서로 경쟁하면 군사적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커지니까요. 또 우리 무기 성능이 좋아지면, 미국은 한국이 자기들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 혹시 비거리(飛距離)를 늘려주면 우리 미사일이 핵탄두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봐서 그런 거는 아닐까요.
 
  “당시 미국의 기본 정책은 노 에스컬레이션(No Escalation)이었어요. 지금은 우리가 700km까지 사정거리를 늘렸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서 늘어난 겁니다. 한 번에 쉽게 된 것이 아니에요.”
 
  ― 그렇다면 한국의 핵 개발은 실제로 추진이 됐습니까.
 
  “저는 그렇게 봅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아는 바에 의하면, 그때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 들여오는 프로젝트가 실패한 후에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었어요. 처음에 박정희 대통령의 궁극적인 목표는 핵 개발이었죠. 하지만 중간에 하도 미국이 감시하고 견제하니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겁니다. ‘원자탄 제조 기술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 ‘간단한 실험장비로도 얼마든지 제조 가능하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핵무기는 국가적 노력이 투입되어야 만들 수 있습니다. 미국은 프랑스가 우리나라에 재처리시설을 팔았을 때 생기는 이익을 물어주면서까지 한국의 핵 개발을 막았습니다.”
 
  ― 미사일과 핵에 대한 미국의 대응 수준 자체가 달랐다, 그런 말씀이시네요.
 
  “그렇죠. 재래식 유도탄 개발은 어느 정도 인정한 겁니다.”
 
 
  처음부터 고체 연료 개발
 
  ― 미사일 개발 당시 가장 어려웠던 기술적 난제(難題)는 뭐였습니까.
 
  “유도탄은 추진기관과 유도장치가 제일 기본적입니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추진기관은 엔진이고 유도장치는 조종(操縱)입니다. 목표물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장치죠.”
 
  ― 그 두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사실 막연했어요. 하지만 ‘선진국 기술이 뭐 하늘에서 떨어진 건 아니지 않으냐, 이건 우리로서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하는 막무가내 정신과 사명감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1차적인 문제는 추진제였다. 우리에겐 기술이 전혀 없으니, 외국에서 도입하는 길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추진제는 액체와 고체가 있는데, 액체는 비교적 쉬워요. 고체는 어렵죠. 가루로 만드는 거니까. 북한도 최근에서야 고체 추진제를 씁니다. 그 전에는 전부 액체를 썼어요. 액체는 쉽지만 안정성이 떨어집니다. 안정성뿐만 아니라 군 장비로서의 효율도 떨어지죠. 왜 그런가? 액체 추진제는 발사하기 24시간 전에 충전(充塡)해야 한다든지,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 24시간 지난 후에나 쏠 수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 그래서 우리 유도탄은 처음부터 어려운 줄 알면서도 고체로 간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액체 연료는 처음부터 생각도 안 했어요.”
 
  기술 팔 곳을 찾아 사방으로 돌아다니는데 다행히 프랑스에서 기술을 팔겠다는 연락이 왔다.
 
  ― 미국 회사들은 연락이 없었습니까.
 
  “팔려면 팔 수도 있는데, 미 국무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미국 회사들은 ‘얼마든지 팔겠다’고 그러는데 국무부에서는 절대 불가라고 했죠. 프랑스 회사는 미국과 상관없이 기술을 팔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 뭡니까.
 
  “추진제 재료들을 섞는 거대한 믹서가 있어요. 여러 가지 물질을 아주 균질하게 섞어주는 정밀 기계입니다. 사정거리 200km용 추진제를 만들려면 크기가 300갤런 정도 되는 믹서가 필요하죠. 프랑스에서 파는 건 50갤런 정도였어요.”
 
  ― 50갤런짜리를 여섯 번 돌리면 안 됩니까.
 
  “그건 최후의 도박인데, 성공률이 떨어집니다. 균일성(均一性)이 미세하게 떨어져도 실패 확률은 확 올라갑니다. 유도탄은 한 번 발사에 막대한 비용이 들고, 실패는 폭발로도 이어져 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 적은 용량 믹서를 여러 번 돌린다고 될 일이 아니네요.
 
  “그렇지요. 추진제는 금속 재료들을 아주 균질하게 섞어서 만듭니다. 많은 양을, 정말 분가루 같은 것을 잘 섞어야 하는 거죠. 조그만 것은 쉬운데 용량이 크면 클수록 굉장히 더 어려워집니다. 그걸 다 정말 골고루 섞어야 하니까. 그게 사실 제일 어려운 노하우인데 미국에선 그걸 못 주겠다는 거였죠.”
 
 
  횡재
 
1978년 9월 26일 백곰미사일 시사회(試射會)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국산 무기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 난관 역시 기적적으로 해결했다. 폐기 직전의 공장설비를 시세의 10분의 1 가격으로 사 올 수 있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으니 일단 프랑스에서 50갤런짜리 믹서를 들여오고 나중에 우리가 개발하든지 그때 가서 해결하자고 생각했다. 위험하더라도 대안이 없었다. 50갤런짜리 믹서 계약을 하러 프랑스로 한 팀이 출장을 떠났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저는 미국에 다른 일로 출장 중이었어요. 비행장에서 추진체 원료를 취급하는 회사 사장을 만났죠. 원료 구입이 목적이었는데, 이분이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를 하더군요.”
 
  ― 뭐였나요.
 
  “추진제를 만드는 회사가 수요가 없어 공장을 몇 년째 놀리고 있다. 그래서 설비를 처분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경기가 나빠서 급하게 팔려고 하니, 잘하면 싸게 살 수도 있다고 해요. 비행장에서 바로 공장으로 찾아갔습니다. 가서 그 회사 부사장을 만났는데, 공장엔 사람 하나 없고 그냥 시설만 있었어요. 완전히 버려둔 지 2년 정도 지났다고 하더군요. 얼마에 팔겠냐고 하니까 200만 달러면 오케이래요. 국무부 허가 얘기도 했더니 그건 자기들이 해결하겠다고 했어요. 그거, 제대로 사려면 2000만 달러 주고도 못 사는 겁니다.”
 
  ― 횡재하셨네요.
 
  “그렇지요. 바로 프랑스로 전화해서 계약하는 거 조금 미루라고 하고 프랑스로 갔습니다. 미국에서 설비 들여오게 된 이야기는 안 하고, ‘1단계, 2단계, 3단계로 나눠서 계약하자’고 했죠. 처음에 5갤런짜리 믹서로 추진제 만드는 기술 배우고, 다음에 50갤런짜리로 기술 전수하고, 뭐 이렇게 몇 단계로 나눠서 계약했습니다.”
 
  ― 이 기술도 상당히 싸게 도입하신 거네요.
 
  “그렇죠. 쌍방 중에 한쪽만 거부해도 단계별 계약을 자동 해지(解止)하는 것으로 서류를 만들었으니까요. 프랑스에서 우리 핵심 인력이 기술을 배우는 동안 다른 팀은 미국에 가서 낡은 공장을 통으로 뜯어왔습니다. 5개월 걸렸어요. 300갤런짜리 믹서기를 들여오고 설치하던 날의 그 감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 공장 설비를 들여오는 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기술을 안 주려고 그랬는데, 우리 팀들이 가서 싸우다시피 매뉴얼 등을 다 들고 왔습니다. 국무부에서 반출을 허가한 기계에만 테이프가 붙어 있고 그것만 가져올 수 있는데, 안 붙어 있는 것까지 그냥 싹 다 들고 왔죠. 하여튼 가져올 수 있는 건 다 가지고 왔어요. 쓰레기까지 다 가져왔습니다.”
 
  쓰레기까지 가지고 왔다는 소문은 청와대에까지 들어갔다. 대통령이 현장 점검을 나와 300갤런 믹서기 앞에서 딱 멈춰 섰다. ‘이거 돌려 봐!’ 믹서가 제대로 돌아가는 걸 본 대통령은 흡족한 얼굴을 하며 자리를 떴다.
 
 
  유도장치 도입 비화
 
  유도장치 도입도 비화가 많다. 나이키는 레이더로 목표를 잡아 맞히는 미사일이다. 비거리가 늘어나면 레이더 성능도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물론 기존 나이키 미사일을 제어하는 장비는 있었다. 하지만 비거리를 늘려 개조한 후의 나이키를 제어하려면 다른 차원의 장비가 필요했다.
 
  “그걸 전부 생각하면 골치 아프죠. 모든 문제는 일단 해결하는 대로 해결하고, 우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돈 주고 살 수 있는 기술이 무엇인지 다 알아보자고 했어요. 문제 하나 하나 해결하는 과정이 하늘이 도와줬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 어떤 일이 또 있었습니까.
 
  “당시 미국 방위산업이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었어요. 월남 전쟁도 끝나고, 무기 쓰는 곳도 없고 말이죠. 그래서 부도 직전까지 몰리니까 나이키 허큘리스 만든 회사에서 우리한테 제안이 왔어요. ‘한국에서 사정거리 200km 유도탄을 만든다는데, 아예 우리가 나이키를 240km 지대공 유도탄으로 개조해서 주겠다. 그걸 사라’는 겁니다. 단, 기술 제휴는 없고 자기들이 만들어서 팔겠다, 한 발에 얼마씩이다고 말이죠.”
 

  이 문제는 ADD가 아니라 국방부 차원에서 논의가 오갔다. 나중에 의견을 묻기에 이경서 박사는 ‘야, 이거 무슨 방법이 있겠다’는 느낌이 왔다.
 
  “국방부에다 ‘일단 사겠다고 그러십시오’라고 했어요. 한데 국방부 측에서는 ‘구입은 간단하다. 하지만 대통령께서 원하시는 건 우리가 자체적으로 기술을 확보하는 것 아니냐. 사 오는 걸로 만족하시겠느냐?’고 하더군요. 물론 미국 회사에다 ‘사기는 사는데, 우리가 이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한 프로젝트인지 미국 회사하고 우리 팀하고 같이 예비 설계를 하자. 어떻게 고치겠다는 연구를 함께 해서, 그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이 나면 사주겠다’ 이렇게 제안을 할 것이라고 했죠.”
 
  ―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네요.
 
  “네. ‘처음에는 예비 설계를 하고, 우리가 검증을 끝내면 그다음에 디테일한 설계를 하자. 모두 합격하면 그때 주문하겠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죠. 미국 회사 사정도 급했고요. 미사일 만든 회사에서 국방부, 국무부를 설득했습니다. ‘이건 예비 설계 정도니까, 디테일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니까 기술 유출도 없다.’ 그래서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나중에는 보고서 훔쳐내 밤새 복사”
 
  이경서 박사를 포함한 한국 엔지니어 6명은 미국으로 건너가 6개월 동안 ‘전투’를 치렀다. 맥도널 더글러스사에서 전자 장비를 비롯한 노트 하나 못 가져가게 막고 기록 또한 일절 불허(不許)했지만, 우리 연구원들은 ‘모든 정보를 최대한 머릿속에 담아 오자’는 정신으로 낮에 보고 온 것을 밤에 숙소로 돌아와 기록으로 남겼다.
 
  “처음엔 그러다가 나중엔 한계가 와서 정말 못 할 짓을 하기도 했어요. 보고서를 훔쳐 나와 밤새 복사했어요.”
 
  ― 이 사실을 지금 공개해도 되는 건가요.
 
  “괜찮습니다. 저희는 정말 목숨을 걸고 했어요. 적발됐다면 외교적 문제는 물론이고 미국에서 감옥에 갈 수도 있었어요.”
 
  ― 6개월 후에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안 사겠다고 했죠. 조사 결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163만 달러 주고 예비 설계만 하고, 나머지 본 설계 내용까지 다 뽑은 겁니다. 이 계약도 단계별로 계약해서 돈을 아꼈습니다.”
 
  맥도널 더글러스사에서 처음에 부른 가격은 1단계 예비 설계 공동연구 180만 달러, 2단계 시스템 설계와 3단계 시제품 제작은 맥도널 더글러스사 단독 설계 제작으로 2000만 달러였다. 개조한 양산품의 구입 비용은 물론 별도였다. 이경서 박사 팀은 체재비 포함 200만 달러 안쪽에서 기술만 다 가져오는 것으로 외화를 절약한 것이다.
 
 
  영국에서 관성유도장치 도입
 
이경서 박사가 대전기계창장에 재직 시이던 1979년 7월 3일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으며 악수하고 있다.
  ― 영국에서도 기술을 도입했죠.
 
  “관성(慣性)유도장치를 들여왔는데, 정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겁니다. 그 기술을 갖고 있는 나라가 미국, 영국, 프랑스뿐인데 미국과 프랑스에선 말도 꺼내지 말라고 했어요.”
 
  무작정 스코틀랜드로 날아가 관성유도장치 구입을 타진했다. 20개를 사겠다고 하니 깜짝 놀랐다. 엄청난 고가품을 갑자기 나타난 동양인이 대량으로 구입한다고 하니 그쪽 회사에서도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국제거래 허가 품목이었지만, 이경서 박사에게는 복안(復案)이 있었다.
 
  “이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느냐. 당시 일본이 비행기를 개발했는데, 관성유도장치를 미국이 팔았어요. 저는 영국 회사에 가서 ‘미국도 일본한테 팔았는데 왜 너희는 우리한테 못 파느냐’고 했죠.”
 
  영국 페란티(Ferranti)사에서는 당연히 팔 수 있다고 했다. 회사의 소개로 메이슨(Mason) 영국 국방부 과학고문을 만났다. 런던에서 미팅을 마치고 메이슨 교수가 우호적인 답을 줬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가 한 번 검토하겠다’고 했다. 한 달 후 메이슨 교수가 한국에 와서 실사(實査)를 했다. ADD는 메이슨 교수를 밤낮으로 극진하게 모셨다. 관성유도장치의 항법장치에는 미국 기술이 들어가 있었다. 미국의 허락 없이는 영국 정부도, 페란티사도 마음대로 판매가 불가능했다. 궁하면 통하는 법. 이경서 박사가 물었다.
 
  “당신들이 우리하고 계약한 다음에 이 사실을 미국에 언제까지 알려줘야 하느냐?”
 
  돌아온 대답은 “6개월 내에만 알려주면 된다”였다. 이경서 박사는 “우리 연구원을 영국으로 파견할 테니 설계 및 생산 기술을 전수해줘라. 미국에는 6개월의 마지막 날 통보하면 협정 위반은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워낙 국제적으로 민감한 문제라 청와대에도 보고하지 않고 은밀하게 처리했다.
 
  “그러니까 청와대에서도 몇 사람만 알고 아무도 몰랐습니다. 계약하고 연수 마치고 6개월 딱 되는 날 미국에 알려줬어요.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야단이 나가지고, 청와대 오원철(吳源哲) 경제 제2수석비서관에게 전화를 했죠. 오 수석이 저에게 전화했기에 그때 제가 실토했습니다. 처음엔 오 수석이 화를 내더니 이내 조용해요.”
 
  ― 왜 그랬습니까.
 
  “오 수석이 보니, 우리도 관성유도장치 기술을 갖게 됐으니까 앞으로 인공위성도 올리고 다른 것도 할 수 있게 된 거잖아요? 대통령께도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박정희, 깨끗하고 이해력 빨라”
 
1978년 9월 26일 백곰미사일 시사회(試射會)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아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그래서 우리 유도탄 ‘백곰’은 언제 완성이 됐습니까.
 
  “1978년입니다. 본격 개발부터 6년 걸렸어요. 수많은 연구원이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가고 오로지 유도탄만 생각한 결과입니다.”
 
  1978년 9월 26일, 마침내 백곰이 하늘을 날았다. 대통령을 포함한 참석자들은 모두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서로 부둥켜안았다. 부둥켜안고 울었다.
 
  ― 그날 정말 감격스러웠겠네요.
 
  “그때는 북한의 전력(戰力)이 훨씬 더 강했죠. 재래식 무기도 강했고 유도탄도 훨씬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우리는 별다른 대응 수단이 없었고요. 백곰 개발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하면 된다’는 정신은 정말 중요해요. 백곰을 성공시키고 나니, 다음부터는 뭘 해도 우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또 기본 기술을 가졌으니까 다음번 유도탄 개발하는 것도 훨씬 수월했어요.”
 
  ―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하나의 국가가 있기 위해서는 자주국방은 절대적인 겁니다.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박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하기 위해 기계공업을 육성했고 산업화의 틀도 세우셨죠. 그분이 이렇게 기틀을 다졌기에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국가다운 국가일 수 있는 겁니다.”
 
  ― 직접 겪은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깨끗해요. 그리고 이해력이 빠릅니다. 전문가의 의견이 있다면, 핵심이 뭔지 바로 아시고, 정확하게 지시하셨죠. 전문가 입장에선, 자신의 전문성을 최대로 인정해주고, 전문성을 살려 일할 환경을 만들어주는 리더가 최고입니다. 평생을 두고, 제 제안을 대통령이 100% 이해하고 지지하신다는 느낌만큼 짜릿한 경험은 없었습니다.”
 
 
  ‘박정희의 꿈’ 이룬 이경서
 
이경서 박사는 미사일 개발 공로를 인정받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 천수장을 받았다.
  자주국방(自主國防)과 자립경제(自立經濟) 달성은 박정희 평생의 꿈이었다. 국가 예산의 48%를 미국의 원조로 채우던 나라가 1950~1960년대의 대한민국이다. 박정희는 경제적·군사적으로 자립 능력이 없는 나라는 끝까지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 ‘국력에 비해 과도한 규모의 군을 유지하며 동시에 경제개발도 해야’ 하는 모순적 과업을 필사적으로 수행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방법을 쓰든 혈로(血路)를 뚫어야 했다. 그중 하나가 무기 개발, 특히 유도탄 개발이었다.
 
  세종은 4군(郡) 6진(鎭) 개척으로 변방을 안정시킨 역사적 승전(勝戰)을 두고 ‘내가 없었다면 김종서가 이 일을 주창하지 못했을 것이요 김종서가 없었더라면 내가 이 일을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말한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이경서는 유도탄 개발을 하지 못했을 것이요 이경서가 없었더라면 박정희는 유도탄 개발을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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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연로    (2024-02-16) 찬성 : 0   반대 : 0
재미있게 읽엇습니다.
그런데 이경서씨는 백곰미사일 개발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좀 안좋은 평을 하는 것 같더군요.
한겨레인가...기사에서 백곰미사일을 괜히 만들어서 다음해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들에 의해 대전기계창이 다 털렸고 결국 그들이 그것을 기반으로 핵미사일을 만들게 되었다는 등...
그 말을 듣고 좀 황당한 기분이었습니다. 머리좋은 사람 특유의 균형잡히지 않고 리버럴에 치우친 사고를 가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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