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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柳鍾根 前 전북도지사

“정책은 냉철한 두뇌로 해야… 머리 뜨거워지면 文 부동산법 같은 惡法 나와”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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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 경제 가정교사’, 민선 전북지사 거쳐 한때 대권 주자로 꼽혀… 지금은 부인이 발달장애인을 위한 교회 연 양평 거주
⊙ “노무현 정부 때 시장경제 퇴색 시작… 문재인 정부 민주주의·시장경제 모두 퇴색”
⊙ “새만금, 상하이(上海) 푸둥(浦東) 지구와 같은 시기(1991년)에 공사 착공… DJ 때도 광주·전남에서 견제”
⊙ “포지티브 규제에서 네거티브 규제로 규제체제 바뀌어야 한국 혁신 가능”
⊙ “윤석열 정부, 규제 개혁 방향 잘 잡아… 시장 개입은 하지 말아야”

柳鍾根
1944년생.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 뉴저지 주립 럿거스대 교수, 뉴저지 주지사 수석 경제자문관, 29·30대 전라북도지사(1995~2002), 국가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 김대중 대통령 경제고문(1998~2000), 대주그룹 회장, 사단법인 한국경제사회연구소 이사장 역임 / 《유종근의 新국가론》(2001), 《강한 대한민국의 조건》(2007), 《유종근이 말하는 경제 돌파구》(2017) 등 저술
  욥(Job)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잃는다. 몸에는 고통스러운 악성 종기가 생기고,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잃었다. 믿었던 친구들마저 욥을 욕한다. 의인(義人)이었던 욥은 왜 고난을 당했을까. 기독교 《구약성경》 중 욥기(The Book of Job)는 여러 해석과 논란을 낳았다. 고난을 겪고도 과연 욥이 믿음을 유지할 것인지, 신(神)과 사탄이 내기를 하는 대목은 특히 논쟁적이다. 신의 뜻을 인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욥의 고난이 건네는 수수께끼를 생각하며 지난 6월 25일 한 예배당에 앉아 있었다.
 
 
  발달장애인 위한 교회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모이는 행복한 교회(경기도 양평).
  갑자기 한 신자가 벌떡 일어섰다.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다. 청년은 서성거리며 알아듣기 힘든 말을 웅얼댔다. 청년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 일어나 청년의 팔을 잡았다.
 
  “그래 화장실 가자.”
 
  부자(父子)는 사라지고, 익숙한 일인 듯 예배는 계속됐다.
 
  찬송가를 들으며 교회 안을 흘깃 둘러봤다. 벽에 걸린 십자가며, 작은 피아노까지는 다른 교회들과 같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일단 신자들이 앉는 의자가 없었다. 열 명 남짓한 신자들은 바닥에 앉아 예배를 봤다. 마이크며 스피커도 없다. 신자들 중엔 가만히 앉아 있는 게 힘들어 보이는 이들도 몇몇 보였다.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낯선 이인 기자를 빤히 바라보기도 했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행복한 교회’는 발달장애인, 흔히 ‘자폐’라고 부르는 질환을 앓는 이들과 그 가족을 위한 교회다. 다섯 가족이 예배에 참석한다. 발달장애인들의 학교인 서울 밀알학교에서 만난 가족들이다. 이들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교회다. 예배에 방해가 될까 봐 일반 교회엔 갈 수가 없다. 발달장애인들은 소음에 민감하기 때문에 행복한 교회에서는 마이크를 쓰지 않는단다.
 
  강대상 바로 앞엔 등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푼 여성과 여성의 아버지인 듯한 남성이 앉아 있었다. 여성은 기분이 무척 좋은 듯 연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뭐라 뭐라 말한다. 아버지는 예배에 집중하자며 여성의 무릎을 다정스럽게 토닥인다.
 
  IMF 구제금융 사태로 나라가 휘청이던 시기, DJ의 경제고문을 맡아 연일 뉴스에 등장했던 첫 민선 전북지사 유종근(柳鍾根·79)과 그의 딸 유예지(27)다. 설교 중인 김윤아(60) 목사는 유 전 지사의 부인이다.
 
 
  4형제 모두 경제학 공부
 
  예배가 끝나고 교회 2층으로 올라갔다. 예배를 드린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공간을 가만히 보니 특징이 있다. 불필요한 장식이 없고 중요한 곳은 철재를 사용했다. 계단 난간이나 문틀 같은 곳이다. 기자의 눈길을 봤는지 김윤아 목사가 설명했다.
 
  “애들이 안전해야 되니 난간을 철재로 만들었어요. 일반인들은 여기저기 감각과 주의가 분산되는데, 발달장애 친구들은 하나에 집중하잖아요. 힘을 주면 괴력이 나와요. 안 부서지는 게 우선이에요.”
 
  발달장애인 신자들이 뜻을 알기 힘든 소리를 내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부모와도 의사소통이 쉽지 않아 보였다. 익숙한 풍경인 듯 유 전 지사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4형제 중 둘째인데, 특이한 건 4형제가 모두 경제학을 공부했다. 유종수 전 캐나다 알고마대학 부총장, 유종근 지사, 유종성 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장이다.
 

  ― 경제학을 전공한 이유가 있나요.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Alfred Marshall)은 원래 윤리철학자였습니다. 애덤 스미스도 마찬가지예요. 마셜이 산책을 하다 우연히 런던의 빈민가를 지나게 됐어요. 그곳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진 겁니다. ‘아, 저 사람들을 위해 내가 뭔가 해야겠구나’… 그래서 독학으로 경제학을 공부해 ‘신(新)고전경제학’을 창시한 겁니다.
 
  고3 때 마셜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법대를 갈까 의대를 갈까 고민이 많았는데 그 얘기를 듣고 생각했지요. ‘아, 나도 경제학자가 돼서 우리나라를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야겠다.’ 이런 이유로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유학 가 교수가 됐지요.”
 
 
  “DJ, ‘유 박사님, 나 경제 공부 좀 하고 싶습니다’”
 
  그는 미국의 럿거스(Rutgers)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뉴저지에 있는 명문 주립대다. 2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기서 경험을 좀 쌓고 한국에 들어가서 경제 발전을 도와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 경제가 계속 발전하는 걸 보니 그럴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뉴저지 주지사 경제 자문을 맡게 됐어요. 그때 생각했지요. ‘대한민국은 유종근이 없어도 되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전라북도는 못 사는 지역이니까 지사를 해서 발전시켜야겠다.’”
 
  경제학은 그를 정치인 김대중과의 인연으로 이끌었다.
 
  “1980년 광주 5·18이 일어나고 DJ가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됐어요. 미국에서 DJ 구명(救命)운동이 일어났어요. 저도 뉴욕과 뉴저지에서 구명운동을 했어요. DJ가 풀려난 후 미국으로 건너왔어요. 그때 만나게 됐지요.”
 
  DJ는 1982년 12월 형(刑) 집행 정지로 풀려난 후 곧장 미국으로 건너간다. 1985년 2월까지 미국에 머무르며 망명 생활을 했다.
 
  “DJ가 미국에 도착한 날 처음 만났어요. 예전에 DJ가 민주당 대변인을 할 때 《경향신문》 기자로 민주당 출입을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 와 사업을 하고 있던 이상순이라는 분이 절 소개해줬어요. 경제학 박사라면서요. 그다음 날 DJ 환영 행사장 입구에서 제가 손님들을 안내하고 있는데 DJ가 저를 보자마자 90도로 절을 하는 겁니다.”
 
  ― 절을 왜 한 거죠?
 
  “‘유 박사님, 나 경제 공부 좀 하고 싶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아버지 같은 분이 그러는데 뭐라고 해요. ‘아이고, 제가 잘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경제 가정교사가 됐죠.”
 
  ― 가르칠 만했나요.
 
  “DJ가 머리가 좋은 데다 사업을 했잖아요. 해운업을 해서 돈도 벌었고 신문사도 운영했어요. 시장을 아니까 금방 통해요. 그런데 연설만 하면 자꾸 ‘제3세계 연대(連帶)’니 하는 얘기를 해요. 왜 그런가 했더니, 당시 DJ 곁에 반미(反美) 성향 인사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조언한 겁니다.”
 
 
  DJ, “전부 반미주의자들만 있어”
 
  유 전 지사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미국 정치인들을 만나서도 맨날 반미 얘기를 해요. 한번은 이름을 대면 알 만한 한국 학자와 DJ, 제가 미국 외교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위원장과 오찬을 했어요. 외교위원장은 미국 외교 정책을 쥐락펴락하는 사람이잖아요. 그 자리에서 그 학자가 ‘미 제국주의’ 운운하며 욕을 하는 겁니다. 한참 듣다 듣다 못해 제가 한마디 했어요.”
 
  ― 뭐라고 했나요.
 
  “‘박사님,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그러자 남미(南美) 학자가 그렇게 얘기한대요. ‘아니, 남미 사람들이 반미주의자들이니까 하는 얘기지, 그 사람들의 말이 진리는 아니잖습니까. 사실적 근거를 갖고 얘길 해야지요’ 제가 그렇게 나서니 외교위원장이 반색을 해요.”
 
  ―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분과 내가 한참 논쟁을 하니 DJ가 그만들 하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후에 저에게 인권문제연구소를 맡아달라는 겁니다. 거절했지요. ‘저는 워싱턴에 살지도 않고, 시간도 자유롭지 않고, 월급쟁이니 돈도 많지 않은데, 어떻게 맡습니까’ 그랬더니 네 번, 다섯 번 권하는 겁니다.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러냐고 했어요.”
 
  ― 왜 그랬던 겁니까.
 
  “DJ가 그럽디다.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 전부 반미주의자들만 있어. 유 박사는 미국 정치인들과도 합리적으로 대화를 하잖소.’”
 
  ― DJ는 이후에도 연설에서 제3세계 얘기를 했나요?
 
  “워싱턴으로 DJ를 찾아가서 말했어요. ‘미국이 누굴 택해 한국의 대통령으로 만드는 시대는 지났지만, 대통령이 되는 걸 막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선 김대중은 좌파다, 불그스름하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인 게 확인되면 대통령이 되도록 두겠습니까. 지금 대한민국이 제3세계와 뭐 그렇게 급한 관계가 있다고 왜 연설마다 쓸데없이 제3세계 얘기를 하고, 반미적인 얘기를 합니까.’”
 
  ― 아주 직설적으로 얘기했군요.
 
  “그러면서 말했지요. ‘미국에 망명 온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주신 기회다. 이 기회에 미국 사람들에게 김대중은 반미주의자도 좌파도 아닌 건전한 진보 정치인이라는 것을 보여줄 때다.’”
 
  ― DJ가 화를 내던가요?
 
  “정말 좋은 조언이라고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말했어요. ‘연설할 때 제3세계 얘기는 하지 마시고, 시장 친화적인 얘기를 하고 그런 내용의 책을 쓰세요’라고. 한 달쯤 후에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가보니 이래요. ‘내가 학자도 아닌데 책을 어떻게 쓰나, 날 좀 도와달라.’”
 
  ― 그래서 도왔나요?
 
  “제가 대신 책을 써드릴 수는 없잖아요.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를 해놓으면 제가 보완할 수는 있지만요. 그래서 그동안에 정리한 거 있으면 보여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참고하라고 《대중경제론》 책을 줍디다.”
 
 
  “건전한 진보 정치인이라는 것을 보여줄 때”
 
박현채가 쓴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백문백답》
  1971년 대선을 앞두고 낸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백문백답》이었다. 계속된 유 전 지사의 말이다.
 
  “읽어봤더니 반(反)시장적이에요. ‘이걸 선생님이 쓰신 겁니까? 도대체 누가 쓴 겁니까. 이건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새로 씁시다.’”
 
  《대중경제 백문백답》은 박현채(朴玄埰·1934~1995년)의 작품이다.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대표적인 좌파 경제학자다. 학창 시절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했고 후에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에도 관여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빨치산 조원제는 박현채를 모델 삼아 탄생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소농(小農)들의 자발적 통합을 통한 협업(協業) 경영과 중소기업 위주의 발전, 수입대체 산업화를 통해 대외(對外) 의존에서 벗어난 자립 경제를 강조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조국근대화론과 정확히 반대되는 주장이다. 현재 활동 중인 박현채의 제자 중 대표적 인물이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다.
 
  ― 책을 어떻게 새로 썼나요.
 
  “목차를 짜서 한 챕터씩 함께 토론을 했어요. 그걸 정리해서 책으로 냈지요. 얘기를 해보면 시장을 잘 알아요. 금방 알아들으니 참 수월하게 정리가 됐어요.”
 
  단순히 책을 집필한 게 아니라 경제학 과외를 한 셈이다. 왜 유 전 지사의 이름 앞에 ‘DJ의 경제 선생’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이해가 됐다.
 
  “제가 미국에서 오랫동안 교수 생활을 해서 미국 생활에 익숙해진 점도 있고, 망명해 있는 동안 어쨌든 내가 가르쳤으니까 이후에도 DJ를 대할 때 다른 정치인들처럼 외경심(畏敬心)을 갖고 벌벌 떠는 게 없었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 눈에는 제가 좀 건방져 보였을 수 있어요.”
 
 
  마이클 잭슨과 DJ
 
DJ가 미국 망명 시기 출간한 《대중참여경제론》(왼쪽)과 한국에서 출간된 번역본.
  이렇게 완성된 김대중의 논문은 《Mass-Participatory Economy-A Democratic Alternative for Korea(대중참여경제론)》란 제목으로 1985년 하버드대에서 출간됐다. 이듬해 《대중경제론》이란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번역, 간행됐다.
 
  “책을 일부러 좀 더 강하게 우파적으로 썼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이렇게 평가했어요. ‘미국 공화당 의원들도 비판할 수 없는 완전히 시장 친화적인 내용이다.’ 미국이 DJ를 다시 보게 된 겁니다.”
 
대선 다음 날인 1992년 12월 19일 마포중앙당사에서 정계 은퇴 선언을 하는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 김 후보 왼쪽이 유종근. 사진=조선DB
  DJ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두 사람의 인연은 이어졌다.
 
  “1992년 대통령 선거일이었어요. 선거 결과를 보니 또 떨어졌어요. 아무래도 정계 은퇴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DJ의 앞으로의 행보를 구상해 정리를 했어요. 다음 날 당사로 빨리 오라고 해서 갔더니, 정계 은퇴 기자회견을 하는데 외신 기자들에게 통역하고 설명을 해주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날 정리해놓은 메모를 건네줬어요. 거기에 담긴 게 아태재단 구상이었어요. 기자회견이 끝난 후에 DJ가 그래요. ‘꼭 해야겠다. 사무총장을 맡아달라.’ 못 한다고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1995년 그는 민선 1기 전북도지사에 당선된다. ‘경제학으로 사람들을 돕겠다’는 젊은 시절 꿈을 이룰 기회였다. 2년 후인 1997년 다시 대선의 계절이 돌아왔다. 김대중과 이회창(李會昌) 중 누구도 승리를 낙관할 수 없는 선거였다.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 초박빙이었다. 이때 의외의 인물이 한국 선거판에 나타난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다.
 
1997년 11월 21일 아태재단에서 마이클 잭슨과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가 만났다. 왼쪽부터 유종근 당시 전북도지사, 최규선씨. 사진=조선DB
  마이클 잭슨은 1997년 11월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마이클 잭슨은 무주리조트 투자와 한국 공연을 검토하고 있었다. 결정에 앞서 사전 조사를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이었다. 그런 마이클 잭슨이 11월 21일 느닷없이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를 만난다. 두 사람이 얼싸안은 사진이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아마 마이클 잭슨은 어느 나라 글자인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敬天愛人(경천애인)’ 휘호를 DJ가 마이클 잭슨에게 건네주는 사진은, 합성사진인가 싶을 정도로 이채롭다. 이 만남에 뒷얘기가 있었다. 유 전 지사의 얘기다.
 
  “마이클 잭슨이 무주리조트 투자를 검토하러 무주에 왔어요. 그걸 알고 DJ 선거 캠프에서 난리가 났어요. 마이클 잭슨을 선거 캠프로 오게 하려고요. 마이클 잭슨에게 DJ를 아냐고 물었어요. 모른대요. ‘그 사람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얘길 했어요. 그랬더니 이래요. ‘내가 왜 한국 정치에 끼어드나, 난 안 간다.’”
 
  ― 마이클 잭슨이 똑똑했네요.
 
  “그런데 캠프에서는 난리예요. 그래서 설득했어요. ‘당신 만델라 존경하지 않느냐. 만델라를 위해 모금 행사도 열어주지 않았냐. 주변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들어도 존경하는 사람이니 용기 내서 돕는 거 아니냐. DJ도 만델라 못지않은 사람이다’ 쭉 듣더니 마이클 잭슨이 그래요. ‘If you say so(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러면서 DJ를 만나러 갔어요.”
 
 
  “기업이 살아야 근로자들이 산다”
 
유종근 전 지사 가족은 마이클 잭슨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진=유종근
  마이클 잭슨의 지지까지 받아낸 DJ는 결국 대선에서 승리했다. 당선의 기쁨도 잠시, DJ 앞에는 중대한 과제가 놓여 있었다. 휘청거리는 나라 경제를 살려놓아야 했다. IMF에서 요구하는 조치들을 따르면서 한국 경제 체질을 바꿔야 했다. 계속된 유 전 지사의 말이다.
 
  “선거 결과가 나오고 제가 DJ에게 당부했어요. ‘당선 회견할 때 분명히 실업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올 거다. 그러면 구조조정하겠다고 하시라.’ 당선되니 생각이 달라졌는지 구조조정을 안 하겠다는 식으로 답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미국이 발칵 뒤집힌 겁니다.”
 
  ― IMF와의 약속을 뒤집는 대답이었으니까요.
 
  “너무 화가 나서 그날 저녁에 전주로 내려가 버렸어요. 일요일 오후에 전화가 왔어요. 내일 아침 10시에 미국 재무차관이 오니 도와달라는 겁니다. ‘저는 이제 도울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조언도 안 들으시는데 안 갈랍니다’고 답했어요.”
 
  ― 미국 재무차관이 달려올 정도의 상황이었군요.
 
  “결국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산에 있는 DJ 자택으로 갔어요. 혼자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라이스대학 교수였던 채수찬 박사와 함께 갔어요. DJ에게 말했지요. ‘12월 3일에 IMF와 한국 정부가 협약을 맺고 자금 지원을 받았는데 그게 바닥이 났습니다. 지금 미국이 한 번 더 도와주지 않으면 한국은 이제 망하게 생겼어요. 미국 정부가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당선자가 반시장적인 정책으로 나오면 어떡합니까. 미국 입장에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는 겁니다. 클린턴이 재무차관을 왜 보냈겠습니까. 천하의 김대중을 차관이 테스트해보겠다는 거 아닙니까 이게 무슨 꼴입니까.’”
 
  ― DJ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화를 벌컥 내요. ‘유 박사는 미국에서 교수 하다 한국에서 도지사 돼서 서류 결재만 해봤지, 기업 운영해봤어? 노동자들 월급 줘봤어? 그렇게 함부로 노동자들 해고하고 길에 내몰아도 되는 거야?’”
 
  ― 뭐라고 답했나요.
 
  “‘기업이 살아야 근로자들이 사는 겁니다. 근로자 살리려다 기업이 망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10명 내보내서 90명을 살릴 수 있었는데, 10명을 안 내보내서 기업이 망하면 100명이 다 실업자가 됩니다. 그럼 그건 괜찮은 겁니까?’ 밥상머리에서 언성을 높이면서 한 시간을 토론했어요.”
 
 
  대통령 경제고문 맡아
 
1998년 3월 6일 뉴욕 체이스 맨해튼 뱅크에서 열린 ‘한국 외채연장 설명회’를 마치고 귀국하는 유종근 외채협상단장(왼쪽)과 정덕구 재경원 제2차관보. 사진=조선DB
  ― 토론의 결론은 어떻게 나왔나요.
 
  “제가 한참 설명하니 갑자기 DJ가 그래요. ‘알았어. 이제 내가 알았어. 유 박사 하란 대로 할게. 어떻게 하면 되지?’ ‘보나 마나 구조조정이 첫 번째 질문일 겁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하겠다고 대답하시고 각론은 그냥 저에게 전권 위임하고 맡겨주세요.’”
 
  ― 논리적으로 납득이 된 거군요.
 
  “그분이 멋있는 점이 그거예요. 상대방 논리가 납득되면 인정을 해요. 데이비드 립튼 재무차관을 만났는데 역시 첫 질문으로 구조조정 문제가 나왔어요. DJ가 대답을 아주 명쾌하게 잘 했어요. ‘나는 중요한 건 기업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립튼 얼굴이 대번에 환해져요.”
 
  지금 돌아보면 한국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순간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유 전 지사는 대통령 경제고문을 맡았다. 1998년 전북도지사 재선에도 성공했으니, 도정(道政)과 국정(國政)을 동시에 수행한 셈이다. IMF 구제금융 시기를 거치며 그는 차기 대통령 후보감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미국 대학교수 출신 경제학 박사 도지사. 부산상고 출신의 노무현(盧武鉉) 의원과는 컬러가 다른 후보였다.
 
  감시받는 게 일상이 됐다. 서른두 살의 나이에 도지사 부인이 된 김 목사의 일거수일투족이 입살에 올랐다.
 
  “하루는 김한정 당시 청와대 부속실장이 저한테 그래요. ‘박사님, 사모님 관리 좀 하세요. 고급 의상실에 돌아다닌답니다.’ 제가 그랬어요.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은 동대문에 가서 옷감을 사다 직접 만들어 입는데.’ 알고 보니 전주의 어느 의상실에서 ‘지사 부인도 우리 옷 입는다’고 거짓 소문을 낸 거예요. 그런 정보가 들어간 거죠.”
 
  김 목사가 옆에서 이야기를 거들었다.
 
  “동교동의 여비서들이 저한테 그래요. ‘유 지사님 빨리 오셔서 해명 좀 하시지 왜 당하고 계시나.’ 정치인들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와서 이런다는 거예요. ‘유 지사 걱정입니다. 문제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런 얘기를 계속 들으면 어떻게 됩니까. 남편을 구속한다는 얘기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왔어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어요.”
 
  김 목사는 평화민주당(민주당 전신) 여성국 초대 차장 출신이다. 두 사람은 1992년 결혼했다. 유 전 지사에겐 재혼이었다.
 
 
  잇따른 시련
 
  그 와중에 이상한 사건도 일어난다. ‘고관집 절도 사건’이다. 1999년 4월 김강용이라는 절도범은 자신이 전북도 서울 사택에서 미화(美貨) 12만 달러를 훔쳤다고 주장했다. 유 전 지사는 “도난당한 금품 중 미화는 1달러도 없다”고 부인했다. 훔쳤다는 사람은 있는데 잃어버린 사람은 없는 특이한 사건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김강용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마약중독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2만 달러의 실체가 확인되지 않으면서 수사는 유야무야 끝났다. 이미 유 전 지사의 이미지엔 흠이 난 후였다.
 
  그는 후에 미국 대사관 직원에게서 이 이상한 사건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는 얘기를 듣게 된다.
 
  “본국에 보고하는 내용을 직원이 몰래 저에게 들려줬어요. 한국의 모(某) 기관장이 저를 싹부터 잘라내기 위해 꾸며낸 공작이었다는 겁니다.”
 
  2001년 12월 그는 대선 경선 참여 선언을 했다. 그러고 이듬해 3월 수뢰(受賂)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된다. 대선 경선 포기를 선언하고 구속 수감됐다. 정치적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개인적인 시련도 덮쳤다. 딸 예지가 자폐 판정을 받았다.
 
  정권 임기가 끝나기 직전인 2007년 12월 31일 노무현 정부는 그를 특별사면했다. 3년 9개월 옥살이가 끝나고도 정계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선거 출마 자격이 없었다. 감방에서 내보내는 줬지만, 복권(復權)을 해주진 않았다. MB 정부 시기인 2010년에야 복권됐다. 출소 후 그는 대주그룹 회장과 한국경제사회연구소 이사장에 취임했다.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늦둥이 아들 주영이를 잃었다. 유주영 군은 생후 20개월에 성경을 읽고 열 살에는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구사하며 엄마의 신학 논문 교정을 봐주던 천재였다. 2018년 가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주영이는 45일 만에 하늘로 갔다. 남은 이들에게 찾아온 슬픔은 글로써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아픔이었다. 이후 2023년 유 전 지사는 모든 외부 직책을 내려놓고 부인 김 목사, 딸 예지와 함께 있다. 예지는 발달장애인 화가다. 그림을 그려 전시회도 열었다.
 
 
  DJ의 功過
 
  지난 8월 18일 서울 강남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공교롭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14주기 기일이었다.
 
  ― DJ의 가장 큰 공(功)은 뭘까요.
 
  “두 가지입니다. IMF 위기 극복, 그리고 IT 산업이 발전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준 겁니다. IMF의 권고이기도 했지만 기업들이 개혁을 했잖아요. 선단(船團)식 경영을 지양하고 세계 경쟁 체제로 들어갔지요. 그때까진 한국 대기업들이 해외에선 이름 없는 기업들이었거든요. 이제는 삼성, LG, 포스코, 현대차 같은 기업들이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됐어요. 기업도 개혁했지만 규제도 많이 줄였어요. 한국이 이만큼 발전한 건 그때의 개혁 덕분이라 봅니다.”
 
  ― 그 시기 한국은 세계에서 이례적으로 빨리 IT 인프라를 확충하기도 했지요.
 
  “DJ가 수감 생활과 집에서 연금되어 있는 동안 공부를 많이 했어요. 앨빈 토플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앞으로는 정보화 시대다’라며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고 IT 인프라를 깔고 IT 산업 투자를 장려했어요. 그 덕에 요새 한국이 10대 경제 강국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 DJ의 과(過)는 뭘까요.
 
  “결국 햇볕 정책입니다. 1994년에 맺은 미북(美北) 제네바 합의 결렬에 대해서는 미국과 북한의 입장에서 양비론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어요. 6·15선언은 다릅니다. 김정일이 답방을 안 했잖아요. 정치 9단 김대중이 김정일한테 답방해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자꾸 하는 게 말이 됩니까. 국제적 합의를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파기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습니까. 처음 햇볕 정책에서 제안한 대로, 믿을 수 없는 인물로 판명 났으면, 정책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왜 햇볕 정책을 수정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정책이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던 거예요. 어떻게든지 그걸 이어가 보려고 한 거죠. 문제는 노무현-문재인(文在寅) 정권이 DJ를 계승한다면서 교조주의적으로 햇볕 정책을 이용한 겁니다. 상대를 믿을 수 있으면 협상을 이어가자는 게 햇볕 정책의 전제인데, 믿을 수 없는 걸로 판명 났잖아요? 북한과의 관계를 정치적 자본으로 삼아 우려먹는 정치인도 있으니 참 문제입니다.”
 
  유 전 지사는 “결국 DJ의 가장 큰 과(過)는 노무현을 후계자로 세운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자체로는 공도 있고, 과도 있어요.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있었기 때문에 문재인 정권이 집권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두고두고 해악을 끼쳤어요.”
 
 
  “최저임금 없어져야”
 
  ― 그러고 보면 민주당은 DJ를 볼모 삼아 호남에서 표를 걷어가면서 DJ가 했던 고민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DJ가 제게 물어요. 국정 운영 방침을 뭘로 정하면 좋을까. 제안했어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어떻습니까?’ 그대로 정해졌어요. 그런데 진보를 표방하는 일부 언론에서 표현을 살짝 틀었어요. ‘민주적 시장경제’로요. 그게 아니에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예요. 노무현 정부 들어서면서 시장경제가 퇴색되기 시작했어요. 문재인 정부 시기엔 민주주의, 시장경제 모두 퇴색됐어요.”
 
  ― 경제학자로서 볼 때, 문재인 정부 기간 시행된 잘못된 정책을 꼽는다면요?
 
  “다 잘못됐어요. 최저임금 대폭 올린 게 대표적이죠. 사실 최저임금은 없어져야 돼요. 임금은 시장이 알아서 결정합니다. 능력과 관계없이 최저임금 이상을 주라고 하면, 그 능력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고용이 안 돼요. 최저임금보다 적게 받더라도 고용이 되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텐데, 최저임금 때문에 아예 고용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겁니다.”
 
  ― 최저임금이 올라간 후 기계로 주문을 받는 키오스크가 급격히 확대됐어요.
 
  “노조는 자꾸 최저임금을 올리자고 그러죠. 그래야 자기들의 임금도 거기에 맞춰서 올라가니까요. 저소득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면서 자기들의 임금 수준을 올리려는 아주 나쁜 행위입니다. 기업이 근로자 해고를 못 하게 막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기업이 비정규직만 채용해요. 정규직 일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뜨거운 머리에서 惡法 나와”
 
  ― 문재인 정부 정책에 민주노총 같은 노조가 영향을 미쳤지요?
 
  “좋은 의도로 입법을 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앨프리드 마셜이 이렇게 말했어요. 뜨거운 심장과 냉철한 두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뜨거운 심장이 있어야 하지만 정책은 냉철한 두뇌로 해야 합니다.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그런 악법이 나오는 거예요. 부동산법이 그게 뭡니까.”
 
  문재인 정권은 집권 기간 부동산 관련 세제를 32번 고쳤다. 그 결과는 집값 폭등과 뒤이은 건설 시장 불황이다. 계속된 유 전 지사의 말이다.
 
  “제가 미국에서 25년을 살았어요. 그동안 미국 주택 경기가 몇 번 바뀌었어요. 거품이 낄 때는 주택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릅니다. 너도 나도 투기를 합니다. 투기가 절대 나쁜 게 아니에요. 시장 기능입니다. 그런 기회가 있을 때 돈 버는 걸로 욕하면 안 됩니다. 주식에 투자해서 돈 버는 건 괜찮고, 주택에 투자해 돈 버는 건 나쁜 거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다 기능이 있어요.”
 
  ― 문 정권은 다주택자들을 범죄자라고 했는데요.
 
  “주택 가격이 오르니, 주택 건설업자들이 계속 지어요. 내가 보니까 시장이 과열돼서 조금 있으면 공급 과잉 되게 생겼어요. 뉴저지의 주택 건설업자들 모아놓고 차트를 그리며 설명해줬어요. ‘자 이제 과잉 공급된다. 조금 있으면 폭락한다. 그만 지어라.’ 다들 저를 비웃었어요.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당신이 뭘 아나. 이렇게 경기가 좋을 때 한몫 잡아야지.’”
 
  ― 어떻게 됐나요?
 
  “결국 폭락했어요. 그런데 미국에선 한 번도 언론이 부동산 시장에 정부가 뭘 하라고 주문하지 않아요. 놔두면 시장이 스스로 조정할 거라고 보는 거예요. 부동산 시장은 가만히 놔두는 게 최선입니다. 정부가 개입하면 할수록 시장만 왜곡돼요. 목숨을 위협받아도 돈 벌기 위해서라면 뛰어들게 하는 게 인간의 이기심입니다. 중국에서는 마약사범이 사형되잖아요? 그래도 마약 거래를 하지 않습니까. 베트남 전쟁 때 한국 기업인들이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운수업을 했잖아요.”
 
  ― 인간의 기본 심리도 모르는 자들이 정책을 만들었네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때,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가 나타나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세일러 교수가 만든 ‘넛지 이론’이 그 예지요.”
 
 
  규제 개혁과 자유 경쟁
 
  ― 현재 한국 경제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규제 개혁이 시급합니다. 역사를 봅시다. 미국보다 앞장서서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이 1950년대 이후부터 서서히 침체하기 시작해, 1970년대까지 계속 가라앉았어요. 미국도 1970년대가 되니 경제는 저성장하고 실업률은 올라갑니다. 일본 제품이 미국 시장에 침투합니다. 미국 학자들이 연구하기 시작해요. 역사적으로 모든 제국은 다 망했다. 20세기의 로마인 미국도 망하는 거 아닌가.”
 
  ― 연구 결과가 어떻게 나왔나요.
 
  “가장 설득력 있는 연구 결과물이 바로 맨슈어 올슨이 쓴 《국가의 흥망(The Rise and Decline of Nations)》(1982년)입니다. 내용은 간단해요. 안정된 민주국가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익 집단이 자꾸 나타납니다.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본인들의 이익 증진을 위해 이익 집단을 만들어요. 한 번 생긴 이익 집단은 소멸하지 않아요. 그러니 이익 집단이 계속 늘어납니다.”
 
  ― 스스로 해체하는 이익 집단은 없지요.
 
  “저마다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로비 활동을 하고 여러 규제를 만들어내요. 개별적으로 보면 지푸라기 하나 옮기는 정도인데, 해가 갈수록 규제 때문에 경제 효율성이 떨어지고, 사회가 경직됩니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나면 판이 새로 짜입니다. 그러면 성장률이 올라가요. 시간이 지나면 점점 성장률이 떨어집니다. 주기적으로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얘기지요. 그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규제를 없애는 겁니다. 그리고 자유무역을 해서 밖에서 경쟁자를 끌어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이 1980년대에 두 가지 조치를 합니다. 규제 개혁과 WTO(세계무역기구)체제 출범입니다.”
 
 
  개혁 성공한 英美
 
2000년 5월 백악관을 찾은 유종근 지사(오른쪽)와 클린턴 대통령. 사진=유종근
  ― 강대국으로 남기 위해 혁신을 했군요.
 
  “제가 미국 유학을 갔을 때 닉슨 대통령이 취임을 했어요. 그때부터 점점 규제가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규제 개혁이 꾸준히 이어졌어요. 왜냐하면 미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들이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에 들어가서 자문을 합니다. 대통령들은 그 조언대로 해요.”
 
  ― 정책의 연속성이 담보되는군요.
 
  “레이건 대통령 때 항공 관제사들이 파업을 했어요. ‘정해진 시점까지 복귀 안 하면 전원 해고’라고 레이건 대통령이 경고했어요. 그런데 복귀를 안 했어요. ‘설마 우리를 해고하겠어?’라며 버텼는데 레이건이 다 해고했어요. 그때만 해도 제가 교만해서 레이건을 우습게 봤어요. ‘배우 출신이 뭘 알겠어’ 어떻게 관제사들을 전원 해고하냐고 레이건을 비난했어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박수를 치는 겁니다.”
 
  ― 왜요?
 
  “그동안 노조가 너무했다는 거예요. 레이건 대통령은 본인이 배우노조 위원장을 해봤으니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았던 겁니다. 그 일을 기점으로 미국의 노사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노조의 장기 파업이 사라지고 노동 시장이 유연화됐어요. 기업 하기 좋아진 거지요.”
 
  ― 결국 경제도 성장했나요?
 
  “20세기 말기에 미국은 초강대국이 됩니다. 미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영국도 신자유주의 개혁을 해요. 대처 총리가 했지요. 호주, 뉴질랜드가 뒤를 따랐어요. 이게 앵글로 색슨족의 영미식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실용주의)입니다. 국가 지도자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판단을 하는 겁니다.”
 
 
  개혁 失期해 독일에 뒤처진 프랑스
 
  ― 유럽은 어떻게 했나요.
 
  “유럽도 결국 그 길을 따라갔어요. 독일에선 2003년 슈뢰더가 개혁을 시작했어요. 개혁엔 고통이 따르니, 슈뢰더 본인은 선거에서 떨어졌어요. 메르켈 총리는 전임자가 시작한 개혁의 과실을 따 먹었지요. 운이 좋은 지도자입니다. 프랑스는 사실 독일보다 이른 1996년에 개혁을 시도했어요. 노조가 강렬하게 반발했습니다. ‘우리는 앵글로 색슨처럼 살기 싫다’ 이게 구호였어요.”
 
  ― 그래서 개혁을 포기했군요.
 
  “대신 일자리 나누기 정책을 펼쳤어요. 주(週) 35시간 일하는 식으로요. 일자리를 나누면 처음에는 일자리가 좀 생겨요. 그게 다 채워지면 결국엔 똑같아집니다. 혁신으로 일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가 유럽의 맹주였는데 독일이 개혁을 시작한 후 독일이 맹주가 됩니다.”
 
  ― 프랑스로서는 뼈아픈 실기(失期)네요.
 
  “첫 개혁 시도를 포기하고 20년 후인 2016년 올랑드 대통령이 개혁을 추진합니다. 당시 올랑드 대통령 밑에서 개혁 입안을 추진한 경제장관이 바로 마크롱 현 대통령입니다. 올랑드는 자신의 재선을 포기하고 개혁안을 통과시켰어요. 마크롱이 뒤를 이어 개혁을 이어가고 있죠. 워낙 저항이 심하지만 잘 해내고 있어요. 미국을 따라잡기엔 아직 모자라지만요.”
 
  ―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지도자들이군요.
 
  “결국 지도자가 기득권자들의 저항을 어떻게 이겨내는가에 달렸어요.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국회에 로비를 합니다. 레이건은 연설을 통해 국민을 직접 설득했어요. 그러면 국민이 국회의원들에게 항의합니다. 아무리 로비를 받아도 유권자에게는 못 이깁니다. 그렇게 개혁이 이뤄졌어요.”
 
 
  우버 없는 한국과 일본
 
김윤아 목사와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 뒤편으로 교회 건물이 보인다.
  한국은 국회의원들이 규제를 없애기는커녕 나서서 규제를 만들고 있다. 박홍근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발의해 통과된 ‘타다금지법’이 대표적인 예다. 다른 나라에선 성행 중인 차량 공유 택시 서비스를 아예 못 하게 싹을 자른 법이다. 소수 택시기사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들의 편익을 원천봉쇄했다. 아시아에서 우버(Uber)가 정상 영업을 못 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일본이 30년 정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도 규제 때문입니다. 아베가 아베노믹스를 발표했을 때 저는 실패한다고 봤어요. 그때 아베가 세 개의 화살을 쏘겠다고 했어요.”
 
  아베가 언급한 세 개의 화살은 양적 완화, 확대 재정, 경제구조 개혁을 통한 민간투자 활성화다.
 
  “이 중 가장 중요한 화살이 경제구조 개혁인데 그걸 제대로 못 했어요. 일본 정치도 이권과 너무 밀착돼 있어요.”
 
  ― 한국도 일본식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우리도 일본식 장기 침체에 어쩌면 들어갔는지 몰라요.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빨리 나올 수도 있고, 빠져들어 갈 수도 있어요. 문재인 정권은 규제 만능주의에 빠진 정권이라 경제의 발목을 잡았지요. 규제 체제를 포지티브 규제에서 네거티브 규제 체제로 바꿔야 해요.”
 
  포지티브(positive) 규제는 허용되는 것을 나열하고 이외의 것들은 모두 허용하지 않는 규제를 의미한다. 네거티브(negative) 규제는 법률이나 정책으로 금지된 것이 아니면 모두 허용하는 규제를 뜻한다. 당연히 포지티브 규제가 네거티브 규제보다 더 강력한 규제다. 우리나라 법령은 대부분 포지티브 규제 체제다.
 
  “포지티브 규제 체제에선 혁신이 불가능해요. 법적 근거가 없으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없으니까요. 네거티브 규제 체제에선 일단 해보고, 부작용이 있으면 입법으로 대응하는 게 가능하지요. 법 체계를 바꿔야 하는데 야당이 국회를 장악하고 있어 현재는 할 수가 없어요. 한국인의 정치 DNA는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고 봐요. 겉모습은 정당(政黨)이지만 붕당(朋黨) 정치를 하고 있어요. 이권(利權) 투쟁입니다.”
 
 
  ‘청부 입법’
 
  ― 정치가 경제 발전을 돕기는커녕 막고 있네요.
 
  “몇 년 전에 서울대 학생들이 중고자동차 거래를 중개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기존의 중고차 매매업체들이 국회의원에게 로비해서 규제법안을 만들었어요. 중고차 경매를 중개하려면 주차장이 1000평 이상 있어야 한다는 식의 법안이었어요. 이런 게 청부(請負) 입법이에요.”
 
  2015년에 일어난 이른바 ‘헤이딜러’ 사건이다. 당시 새누리당 김성태 의원이 대표발의한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후 청년 스타트업 ‘헤이딜러’는 폐업 선언을 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규제가 기업을 망친다’는 목소리가 언론과 인터넷 게시판에 쏟아져 나왔다. 이후 국토교통부와 김성태 의원은 개정 법안의 문제점을 인정했다. 헤이딜러는 회생했다. 운이 좋은 경우였다. 유 전 지사의 말이다.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자들의 부탁을 받고 청부 입법을 해주는 게 우리나라 국회입니다. 새로운 업종이 등장해 성공하면 많은 소비자가 이익을 보지만 잠재적인 수혜자들은 그걸 몰라요. 그런데 기득권에 반드시 위협을 받을 사람들은 소수지만 확실히 세력화되어 있어요. 그들이 로비를 해서 혁신을 막는 겁니다. 국회의원들에게 잠재적 수혜자들은 득표에 도움이 안 되니 쉽게 로비에 넘어가 버린단 말이에요. 대통령이 그런 법안을 골라 거부권을 행사해야 되는데 그냥 넘어가요.”
 

  ― 상당히 중요한 시기네요.
 
  “이제는 국내에서 안 되면 외국으로 나가잖아요. 외국 사람들 좋은 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산업화 시대에 다른 나라를 따라가는 건 쉽게 했어요. IT 시대엔 DJ가 깔아놓은 그 인프라 덕을 봤고요. 이제는 그걸 뛰어넘어 새로운 걸 해야 되는데 제도가 발목을 잡고 있는 겁니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법령대로 시스템이 움직이는지도 중요해요. 제 경험상 시스템을 움직이는 관료들의 상당수는 이권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 법이 있어도 현장에서 공무원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얘기군요.
 
  “전북지사 할 때 새만금 지구에 외국 회사를 유치하려고 했어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에 연락해 투자 설명회를 열었어요. 미식축구 표현을 빌려 이렇게 말했어요. ‘나한테 공을 주면 엔드존(end zone)까지 가져가겠다’ 공장이 가동될 때까지 내가 직접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뜻이에요. 그랬더니 다우코닝이 한국을 투자 후보지로 진지하게 검토하게 됐어요.”
 
  ― 투자가 이뤄졌나요?
 
  “2년 동안 검토하다 포기했어요. 왜? 2년간 산업부 담당관이 6번 바뀌었어요. 그런데 매번 업무 인수인계가 안 돼요. 회사 소개만 하다 끝나는 거예요. 이런 나라에선 못 하겠다고 포기했어요. 딜레마예요. 공무원을 한자리에 오래 두면 전문가가 되는데, 이권에 포획이 되고, 자리 이동을 자주 하면 업무 인수인계가 안 돼요.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이런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상하이 푸둥과 새만금
 

  ― 이번 새만금 스카우트 세계 잼버리 사태도 그런 상황이었을까요?
 
  “원래 우리나라가 국제대회를 잘 치른다고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지사 할 때 무주에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고 뛰어다녔어요. 사마란치(전 IOC 위원장)도 밀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IMF 때 무주리조트를 지은 쌍방울이 부도가 났어요. 그래서 강원도에 뺏겼죠. 그때 IOC 위원들을 많이 만났어요. 다들 ‘한국은 무슨 국제 행사를 하든 완벽하게 한다’고 했어요. 그 신화(神話)가 이번에 깨진 겁니다.”
 
  ― 감사원의 감사(鑑査) 결과가 나오면 원인이 드러나겠지요.
 
  “조직위 구성부터 잘못됐어요. 주무부처는 여성가족부인데다가, 조직위원장에 민주당 현역 의원이 들어가 있으면 배가 산으로 가지 않겠어요?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고 앞으로 새만금을 어떻게 할 거냐 그게 중요합니다. 새만금은 상하이(上海) 푸둥(浦東) 지구와 같은 시기(1991년)에 착공했어요. 푸둥 지구는 벌써 완공되어 북한 김정일까지 찾아가 감탄했잖아요.”
 
  상하이 푸둥 지구 역시 새만금처럼 간척지다. 김정일은 2001년 1월 푸둥 지구의 산업단지를 둘러보고 “상해가 천지개벽(天地開闢)됐다”고 말했다.
 
  유 전 지사는 “역대 정부들이 새만금에 그다지 의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MB는 4대강에 재원을 집중했지요. 심지어 DJ 때도 광주(光州)·전남 쪽에서 견제를 해요. ‘전북에서 대통령이 나오지 않는 한 새만금은 하세월이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래도 이명박 대통령이 새만금에 큰 선물을 줬습니다.”
 
  ― 어떤 선물이죠?
 
  “처음에 간척 시작할 때는 농업용지를 조성하기로 했어요. 제가 주장했어요. ‘쌀이 남아도는데 왜 농업용지로 만드냐, 복합산업단지로 개발해야 한다’… 정작 전북 국회의원들은 저보고 조용히 하라고 난리였어요. 농림부에서 예산받는 데 방해된다고요. MB가 보더니 복합산업단지로 계획을 변경했죠.”
 
  ― 새만금 지구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번 잼버리가 차라리 좋은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점이 드러났으니 이제 고치기만 하면 되잖아요. 앞으로 새만금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거라 확신합니다. 이제부터 새만금 개발은 민간 기업이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지 말아야”
 
  ― 윤석열(尹錫悅) 정부는 잘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윤 대통령이 취임할 때 자유를 강조했잖아요. 방향은 잘 잡았어요. 노조에도 잘 대응하고 있습니다. 노조는 산업 시대의 산물이에요. 노조를 약자로 보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다만 정부가 시장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해요. 정부가 기업에 라면값 내리라고 압박하는 건 시장경제 원칙에 맞지 않아요. 문재인 정부가 강남 아파트 비싸다고 내려야 된다고 한 것과 뭐가 다릅니까.”
 
  ― DJ도 임기 중에 시장에 개입한 적이 있지요?
 
  “원래 DJ는 토론해서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면 받아들였어요. 그런 DJ도 청와대 들어가니까 달라집디다. 기업들에 빅딜을 강요했잖아요. 대통령이 무슨 권한으로 민간 기업에 이건 해라, 하지 마라 강요합니까? 시장경제 원칙에도, 법치주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겁니다. 제가 1년 동안 반대했어요. DJ가 ‘다들 된다는데 왜 유 박사만 안 된다고 하나’라며 섭섭해했어요. 결국 빅딜 문제 때문에 DJ와 사이가 어긋났지요.”
 
  김대중 정부는 집권 직후부터 대기업 간의 업종 교환(?)을 통한 구조조정이라는 특이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현대는 LG로부터 반도체를, 한화로부터 한화에너지(석유 부문)를 넘겨받았다. LG는 반도체를 포기하고 데이콤을 인수했다. 정부 주도의 무리한 구조조정은 실패로 끝났다. 현대는 유동성 위기를 맞으면서 반도체와 정유를 SK에 넘겨야 했다. LG의 데이콤 인수도 실패로 끝났다.
 
 
  후회한 적 없어
 
  정치적 좌절과 딸의 장애, 아들의 죽음. 문득 그에게 물었다. “한국 정치계에 뛰어든 걸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돌아왔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하나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미국에 있었으면 평탄하게 살았겠지요. 제 어린 시절 꿈이 가난한 우리나라 잘살게 하는 거였어요. IMF 위기 당시 국가 경제가 흔들릴 때, 나라 살리는 데 일조(一助)할 수 있었으니 경제학 공부한 보람이 있잖아요. 그걸로 됐습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성경 속 욥을 시험한 신의 심리를 분석했다. 1952년에 쓴 책 《욥에 답하다(Answer to Job)》에서, 그는 ‘원칙이 없다’며 욥을 대신해 신을 비난한다. 욥의 시련을 보며 신도 자신의 모순을 깨달았을 거라 말한다. 인간에게, 때론 국가에도 욥의 시간이 찾아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모든 시련을 겪어내고도 살아 있다는 사실 아닐까.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모인 작은 교회를 떠나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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