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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유목사 권위자’ 정재훈 교수가 말하는 돌궐·흉노 오해와 진실

“유목민, 레고 블록 같아… ‘오픈 플랫폼’ 같은 탄력성 배워야”

글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gasou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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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목민들은 무조건 돌아다녔을 것이다?’… 동선에 따라 움직여”
⊙ “‘유목=초원’ ‘정주=농경’은 틀린 등식”
⊙ “유목민의 ‘치고 빠지기 전술’,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 방법”
⊙ “이슬람 政敎一致… 유목 군주 지배 정당성 확보에 도움”
⊙ “튀르크 민족은 언어 공동체… 정복 지역에 튀르크어 뿌리내려”
⊙ “트랜스옥시아나 지역, 이란·중국·인도 만나는 교역 거점”

丁載勳
1965년생.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同 대학원 박사 / 튀르키예 이스탄불대 튀르크학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美 일리노이대 동아시아태평양학연구소 방문학자, 現 경상국립대 사학과 교수 / 저서 《위구르 유목제국사》 《돌궐 유목제국사》 《유라시아로의 시간 여행》(공저) 《흉노 유목제국사》 등
정재훈 경상국립대 사학과 교수
  “사실 유목민(遊牧民)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세요? 정주(定住)하는 겁니다. ‘유목민들은 무조건 돌아다녔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이고 고정관념이죠. 누가 굳이 힘들게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겠어요? 오히려 정주를 하면 더 강력한 세력을 만들 수 있는데 말입니다.”
 
  정재훈 경상국립대 사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유목에 관해 큰 오해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주 아니면 유목’이라는 이분법적 역사관 탓에 거대한 유목 세계를 ‘문명의 바깥’ 혹은 ‘변방(邊方)’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초원을 중심으로 살았던 유목민을 새로운 역사 단위로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유목사 연구의 권위자로 최근 《흉노 유목제국사》를 출간했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위구르 유목제국사》(2005), 《돌궐 유목제국사》(2016)에 이어 고대 유목제국사 트릴로지(trilogy)를 완성했다. 정 교수는 “흉노 유목제국사를 복원하는 작업은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한 북아시아의 유목 세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에서 흉노의 위상과 의미를 곱씹어보는 과정”이라고 밝혔다. 정 교수는 위구르사도 새롭게 정리해 내년쯤 출간할 예정이다.
 
  8월 23일 경남 진주의 경상국립대에서 정재훈 교수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의 연구실 안에 들어서자 흉노, 돌궐, 위구르에 관한 서적과 중국어와 튀르크어로 된 연구 자료가 가득 눈에 들어왔다. 정 교수와 함께 유목민의 기원과 이들이 세계사에 남긴 역사적 발자취 그리고 유목민에 관한 오해 등을 톺아봤다.
 
 
  “유목 민족, 中 전국시대에 처음 등장”
 
정재훈 교수는 지난 2017년 출간한 《돌궐 유목제국사》를 통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아시아학자세계협의회가 주관하는 최우수 학술도서상을 받았다. 사진=경상국립대
  ― 유목민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건 언제입니까.
 
  “도시의 등장보다 오히려 늦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유목민이 등장하는 건 기원전 3세기 전국(戰國)시대 후반에 이르러서입니다. 그 전까지 중국은 도시 국가 형태로 발전하다가 전국시대에 들어서 영역 국가의 형태로 자리 잡거든요. 영토를 북쪽으로 확장하다가 유목민을 만나게 됩니다. 제가 《흉노 유목제국사》에도 썼지만, 이 시기 호(胡)라는 유목 집단이 등장합니다. 호 이전엔 전형적인 유목민은 없었습니다.”
 
  ― 책에서도 목축(牧畜)의 개념을 자세하게 풀어썼는데 다시 한 번 정리해주십시오.
 
  “목축은 굉장히 커다란 카테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유목민뿐만 아니라 농경민도 목축을 했죠. 인간은 단백질을 얻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문명을 단순히 농경과 목축이라는 이분법(二分法)으로 나누면 안 됩니다. 대신 농경(農耕)과 비농경, 도시와 비도시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목축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농경민들은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전혀 효율적인 생산 체계가 아니잖아요. 예컨대 목축은 1명이 양 100마리를 관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 농경은 그렇지 않죠. 그러니 농경이 목축보다 우월하다라는 식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 유목의 역사를 보면 마치 전쟁의 역사를 보는 듯합니다. 죽고 죽이는 세력 다툼이 유난히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인가요.
 
  “먼저, 이들의 대결이 족속 간 대결이냐 국가적 대결이냐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족속 간 대결은 생존과 결부돼 있죠. 그런데 국가는 조금 달라요. 국가가 생기고 난 다음의 갈등은 이를 유지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느 민족의 역사와 다르지 않아요. 유목민이라고 해서 호전적이다? 이것 또한 선입견이죠.”
 
 
  “유목민-정주민 관계는 共存 관계”
 
정재훈 교수가 펴낸 유목제국사 3부작. 왼쪽부터 《위구르 유목제국사》(2005), 《돌궐 유목제국사》(2016), 《흉노 유목제국사》(2023)
  ― 그렇다면 유목민과 정주민 사이의 관계는요?
 
  “갈등보단 공존(共存)에 훨씬 가깝습니다. 물론, 현상으로만 볼 땐 싸운 기록이 더 많죠. 사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100년의 역사 가운데 10년을 싸웠다고 칩시다. 그럼 나머지 90년은요? 10년의 전쟁을 부각할 것이냐, 90년의 평화를 부각할 것이냐는 역사 인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국가 권력과 정치 권력은 전쟁을 강조합니다. 특히,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를요. 우리의 역사가 두드러지는데 전쟁 승리만 한 것이 없으니까요.”
 
  ― 이른바 ‘문명사관’에 따라 역사를 배워왔기 때문에 이분법적 역사관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유목’ 하면 흔히 ‘야만스럽다’는 선입견이 따라오곤 합니다.
 
  “문명사관이라고 하는 건 ‘정주의 삶이 옳다’는 사고에서 시작됩니다. 각자 사는 방식이 다른데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런 선입견이 생겨나는 것이죠.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히게 되면 다른 문화는 야만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기를 날로 먹는 것처럼 다소 야만적이라고 느껴지는 유목 문화들은 사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생겨난 그들만의 방식입니다. 결국, 그런 선입견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 유목 민족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제도나 문화, 그리고 다른 민족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개방적인 문화를 지향했나요.
 
  “네. 저는 유목민들이 레고(lego) 블록의 특성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레고 블록은 구멍만 맞으면 어떤 형태로든 맞춰 조립할 수 있잖아요. 비품이든 정품이든 상관없어요. 무조건 따라야 하는 도면도 없죠. 유목민도 이와 같습니다. 자신이 가진 기본 블록에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블록이면 뭐든지 가져다 꼽아 썼죠. 마치 ‘오픈 플랫폼’ 같다고 할까요.”
 
 
  유목 국가의 운영 시스템
 
  ― 흉노부터 오스만 제국까지 공통된 특성인가요?
 
  “그렇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유목 민족의 후예이긴 하나 유목 국가라고 하지는 않죠. 그러나 국가 운영 체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흉노부터 셀주크 튀르크, 몽골 제국,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유목 국가의 운영 시스템을 적용했다는 겁니다.”
 
  ― 유목 국가의 운영 시스템이요?
 
  “네. 유목 국가는 1차 산업인 목축, 3차 산업인 유통만으로 이루어진 국가입니다. 2차 산업은 필요가 없죠. 약탈하면 되니까요. 오스만 제국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해 ‘유통 네트워크’를 구축했죠. 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공납 제도를 만들고, 상공 거점을 설치해 필요한 물건이 제국 내에서 유통될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 국가의 시스템을 국가 차원으로 확장한 형태입니다.”
 
  ― 유목 민족들의 전술(戰術)에 관해서도 궁금합니다. 말을 잘 다룬 것으로 유명합니다. 몽골 제국도 기마병을 앞세운 기동력으로 세계를 호령했고요.
 
  “네. 하지만 유목민들이 중국에 비해 기마전에서 우위를 보인 건 남북조 시대 이전까지입니다. 유목민들은 등자(鐙子·말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라고 하는 기구를 사용했거든요. 그런데 5호16국 시대가 지나고 남북조 시대가 들어서면 중국에서도 등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면서 둘 간 기마병 전력의 차이가 없어졌어요. 그러니 유목민들은 전술적으로 싸워야 했죠.”
 
 
  ‘유목민들은 원래 잘 싸우는 종족’이다?
 
  ― 어떤 전술을 사용했나요.
 
  “유목민들은 정면 대결을 하기보다 전쟁을 효과적으로 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중국과의 전쟁을 살펴보면 유목민들은 절대 중국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았습니다. 치고 빠지는 전술을 썼죠. 그러면 중국군은 이들을 잡으러 쫓아옵니다. 유목민은 초원으로 나가서 이들을 며칠 동안 끌고 다녀요. 그러면 중국군은 진이 빠지겠죠. 이때 기습하는 겁니다. 또 칭기즈칸이 서방 원정을 떠나며 호라즘(Khorezm) 제국을 무너뜨렸는데요, 호라즘 제국이 몽골군에 비해 결코 군사력이 약해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몽골군에게 비효율적으로 대응했고, 이에 따라 전술적으로 진 것이죠. 유목 민족은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 지피지기(知彼知己)에 따라 맞춤형 전술을 택한 것이네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악하기까지 하죠.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유목민은 매 싸움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싸웠습니다. 인구나 경제력 등을 고려했을 때 한 번 패배하면 세력이 급격하게 꺾였죠.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목민들은 원래 잘 싸우는 종족’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이라는 것 또한 오해죠. 오히려 유목 민족이 정주 제국과 전력으로 붙었을 때 이긴 적은 없습니다.”
 
  ―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사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또 트랜스옥시아나(Transoxiana) 지역입니다.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 사이에 위치한 비옥한 토지로 알고 있는데요, 이 지역이 갖는 의의는 어떤 건가요.
 
  “이 지역은 8세기 이전까지 소그디아나(Sogdiana), 즉 ‘소그드인이 사는 도시’라고 불렸습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20개 정도 되는 오아시스 도시가 모여 있는 곳이죠. 이 지역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인도, 중국, 이란 등 3곳을 연결하는 포인트이기 때문입니다. 시베리아의 모피, 중국의 비단, 인도의 카펫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이죠. 무역사의 관점에서도 굉장히 의미가 큰 지역입니다.”
 
 
  “튀르크 민족은 언어 공동체”
 
  ― 중앙아시아 지역은 ‘튀르키스탄(튀르크인들의 땅)’으로 불릴 만큼 이곳 유목민들과 튀르크족은 동의어에 가까울 만큼 연관이 깊습니다. 현재 튀르크족은 몽골과 위구르부터 러시아 내 추바시야 공화국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을 수 있는 키워드가 있을까요.
 
  “언어입니다. 튀르크 계통 언어를 쓰는 집단은 곧 튀르크족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인종이나 종족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개념에 익숙하지만, 튀르크족은 언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죠.”
 
  ― 튀르크어가 이토록 넓은 지역에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국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튀르크족은 선택과 집중을 했습니다. 정복한 지역의 원주민들과 문화를 교환했죠. 예를 들어 이란계가 사는 지역을 장악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향유하는 문화는 그대로 놔둡니다. 대신 이 지역에 튀르크어를 뿌리내리는 것이죠. 마치 물물교환처럼요.”
 
  튀르크어가 중앙아시아 지역의 지배 언어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들어서였다. 11세기 후반의 언어학자 마무드 알카슈가리(Mahmud al-Kashghari)에 따르면, 이 시기 중앙아시아 여러 도시에서는 튀르크어가 주된 언어로 사용됐고, 현지의 이란계 언어들은 도시 주변의 촌락에서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현재 튀르크어족은 전 세계 1억 명 이상의 화자가 사용하는 언어가 됐다.
 
  ― 튀르크 민족에게 언어는 곧 정체성(正體性)이라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죠. 돌궐 제국 시대부터 이들은 자신만의 문자를 가졌습니다. 이들은 언어를 곧 국가 정체성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했죠. 정복 지역의 문화를 받아들이되 튀르크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요.”
 
 
  “이슬람, 11~12세기 이르면 中央亞 주류 종교”
 
  이슬람교 역시 유목민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이슬람교는 아랍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610년에 제창한 일신교(一神敎)로 8세기 무렵 중앙아시아에 전파됐다. 특히 751년 당(唐)나라와 이슬람 군대가 맞붙은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가 승리하며 중앙아시아 지역 내 중국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어 755년 발생한 안사(安史)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당나라는 중앙아시아에서 군대를 철수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슬람이 중앙아시아에 진출할 수 있는 본격적인 활로가 열렸다. 이후 이슬람은 11~12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중앙아시아 내 주류 종교로 자리 잡았다. 다른 종교가 아닌 이슬람교가 이 지역의 헤게모니를 꿰찰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지역엔 과거부터 텡그리 신앙[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유목 민족이 믿었던 천신(天神) 신앙의 일종으로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이 섞인 종교]부터 조로아스터, 마니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해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종교가 유행한 까닭이 무엇인가요.
 
  “살아가는 환경이 척박한 곳에서는 종교가 발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또한 유목민의 생존 문제와 직결되죠.”
 
  ― 수많은 종교 가운데 결국 이슬람이 헤게모니를 차지한 이유는 뭘까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슬람의 특성이 이들의 지배체제와 일맥상통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정교일치(政敎一致) 종교잖아요. 튀르크 군주에게 이슬람교는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얻는 방편이 됩니다. 또 전쟁의 명분을 얻기도 쉬워지죠. 알라의 뜻에 따라 공격한다고 선포하면 그만이니까요.”
 
  ― 군주나 지배층이 아닌 일반 계층은요?
 
  “그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슬람은 기존에 이들이 믿던 텡그리 신앙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텡그리의 천신을 알라로만 바꾸면 그만이죠. 전혀 이질적인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마니교처럼 위구르 지배층만의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설사 국가가 사라진다고 해도 일반 계층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확산될 수 있었던 거죠.”
 

  ― 또 다른 이유도 있나요?
 
  “네. 이슬람 경전인 코란은 성경처럼 길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았죠. 그래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슬람의 가르침을 따르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슬람이 중앙아시아에서 헤게모니를 차지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는 점입니다. 결코 단시간에 급속히 이뤄진 것이 아니었죠. 족히 400~500년은 걸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안정적인 기반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수피즘(이슬람교도 일부가 신봉하는 신비주의 사상)이 유행한 것도 독특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수니파에서는 이를 비아랍적, 비전통적이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잖아요. 수피즘이 유행한 배경에 관해 설명해주신다면요?
 
  “환경이 척박하면 척박할수록 터부(taboo·금기)가 많습니다. 여기엔 주술적(呪術的)인 요소가 가미됩니다. 험지(險地)에서 생활하는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은 늘 죽음의 위험에 노출된 상태입니다.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 기반을 구축한 아랍 세계와의 차이점이죠. 신비주의 성향인 수피즘이 유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유목민들도 정주하길 원했다”
 
  ― 지금까지의 말씀을 듣고 나니 ‘유목=초원’ ‘정주=농경’이라는 등식도 우리의 오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유목 국가의 근간인 군사적인 능력을 더 확대하기 위해 정주하는 것이지, 농경 활동을 하기 위해 정주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이들은 더 이상 전통적 개념의 유목은 하지 않죠. 다만 유목민들이 정주한다고 하더라도 유목적인 기지를 버렸다고 생각하면 틀린 겁니다. 몽골 제국 시대 이후로는 초원을 기반으로 하는 유목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형태처럼 유목의 시스템을 고도화시킨 국가가 생겨나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유목=초원’ ‘정주=농경’이라고 단순하게 결론 내려선 안 됩니다. ‘초원 세계가 오아시스 세계를 지배했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 유목민에게도 정주는 중요한 의미겠네요.
 
  “네. 사실 유목민들도 정주하고 싶어 했습니다. ‘유목민들은 무조건 돌아다녔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이고 고정관념이죠. 돌아다니는 삶이 어디 쉽겠어요? 오히려 정주를 하면 더 강력한 세력을 만들 수 있는데 말입니다. 또 흔히들 유목민들은 무조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이동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이들은 자기들만의 동선(動線)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영역을 정해놓고 움직였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사마천은 《흉노열전》에서 유목민에 관해 ‘맴돌며 옮겨 다닌다(轉移)’라고 서술했습니다. 그런데 후대 역사가들이 ‘옮겨 다닌다(移)’에만 초점을 맞춰버려서 이런 오해가 생겨났습니다. ‘맴돌다(轉)’가 큰 의미를 지니는데도 불구하고요.”
 
  ― 끝으로 오늘날 우리가 유목민과 유목사에서 교훈 삼아야 할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유목 국가의 생명력은 레고 블록과 같은 ‘탄력성’에 있습니다. 군사력을 유지하고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선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을 흡수해야 했습니다. 지배체제, 인재 등용은 물론이거니와 종교나 언어 등 문화까지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도 공존의 가치에 대해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보다 열려 있는 가치관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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