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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사제 서품 70주년 맞은 두봉 주교가 사는 법

“참 고맙게 살아왔다! 지금까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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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사제 서품 받은 뒤 이듬해 한국行… “한국이 굉장히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뭐든지 다 필요하다고 해서 물품이 많았어요”
⊙ “내가(나는) 늘 작아져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 “신부가 되어간다는 것은 평생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 것”
⊙ “두려운 건 폭력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것”
⊙ 1978~79년 ‘오원춘 사건’으로 강제 추방될 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두봉 주교 지지

杜峰
1929년생.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서품(1953년), 1954년 한국 입국, 1955~67년 대전교구에서 사목, 1969~90년 초대 안동교구장, 2019년 12월 대한민국 국적 취득
  여기 벽안(碧眼)의 선교사가 있다. 올해 사제 서품 70주년, 내년이면 한국에 온 지 꼭 70년이다. 6·25전쟁의 상흔에 몸부림치던 1954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스물여섯 살’ 꽃다운 신부(神父)는 이렇게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본명은 르네 뒤퐁(Rene Dupont)이고 한국 이름은 두봉(杜峰). 두견새 두와 봉우리 봉이 합쳐져 두견새 우는 봉우리다.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杜甫)를 연상시킨다.
 
  두봉 주교는 1953년 프랑스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이듬해 한국을 찾았다. 대전 대흥동 보좌신부, 대전교구 상서(尙書)국장에 재직하다 1969년 주교품을 받고 유교적 전통의 뿌리가 깊은 안동에서 초대 안동교구장(재임 1969~1990년)을 맡았다. 가톨릭농민회 설립, 안동문화회관과 농민회관 건립 등 농민 인권을 위해 고군분투했는데 이 과정에서 불량 씨감자 파동인 일명 ‘오원춘 사건’(1978)으로 강제 추방될 뻔했다.
 
 
  “한국 교회는 한국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
 
경북 의성군 봉양면 ‘의성 문화마을’에 위치한 두봉 주교의 집이다. 대문 문패는 ‘두봉 천주교회’다.
  그는 “한국 교회는 한국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며 1979년과 84년, 86년, 89년 네 차례에 걸쳐 고집스레 교구장 사임을 요구해 끝내 관철(?)시켰다. 이후 경기도 행주산성에 있는 자그마한 공소(公所)에서 13년간 머물렀다.
 
  공소는 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신앙 공동체나 건물을 말한다. 이곳에서 신자들이 미사 형식의 공소예절을 행한다.
 
  두봉 주교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면 “나는 (머무르지 않는) 선교사니까, 안동에서 사는 것보다…. 안동에서 살면 직간접으로 주변인들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배려 때문이었다.
 
천주교 초대 안동교구장인 두봉 주교와 현 교구장인 권혁주 주교. 사진=한국천주교주교회의
  그러다 2004년 권혁주 현 안동교구장(주교)이 두봉 주교를 안동에서 가까운 경북 의성군 봉양면에 모시면서 ‘한국 천주교 농민의 대부(代父)’는 여전히 ‘흙’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자칭 봉양 두씨의 시조(始祖)다. 혈통적 후손은 없지만, 말씀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고 있다.
 
  대개의 한국인이 농촌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는 지금도 “대도시 한복판에 몇십 층 건물들이 즐비해도 그 나라가 부강하다고 할 수 없다. 뿌리가 성하고 강해야 그 나무가 무성하고 강하듯, 농민들이 인정받고 농민의 생활이 튼튼해야 그 국가, 그 사회가 튼튼한 것이다”고 말한다.
 
  또 이런 말도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믿음은 한평생 깊어지는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을 새기고 싶어 마늘로 유명한 의성으로 차를 몰았다.
 
  지난 7월 24일 사제 서품 70주년 기념미사를 경북 의성성당에서 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 사흘 뒤에 부랴부랴 달려갔다. 거친 태풍이 휩쓴 자리를 작열하는 태양이 쓰다듬고 있었다. 집 앞 문패는 ‘두봉 천주교회’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곧장 식탁에 앉아 점심을 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식(食)복사 아주머니가 차려준 카레에 밥을 비벼 먹었다.
 
 
  ‘조문국’을 아십니까?
 
  ― 카레 좋아하십니까.
 
  “주는 것이니 먹는 거지 뭐. 카레도 좋고 다른 것도 좋고 뭐든 상관없어요. 뭐든지 잘 먹어요.”
 
  손으로 감자볶음, 양파절임, 찐 옥수수, 풋고추 된장무침 등을 일일이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도 우리 집 생산이에요. 이것도 우리 집 생산, 이것도 우리 집에서 한 것이고 이것도 우리 감자, 이것도 우리 집에서 생산한 거예요. 하하하.”
 
  ― 안 그래도 오늘이 ‘의성 5일장날’이라고 해서 의성 마늘을 좀 사려고 합니다.
 
  “하하하. 말을 들어보니까 이곳에서 마늘이 잘 되는 이유가 있답니다. 마늘은 재가 섞인 흙에서 잘 자란다고 그럽디다. 여기는 옛날에, 아주 옛날 옛날 옛날에 화산이 있었다고 해요. 이 땅에 재가 많이 스며들어 있기에…. 의성군은 옛날에 한 나라였어요.”
 

  ― 나라였나요?
 
  “조문국(召文國)이라고 의성군하고 안동시 일부가 조문국 땅이었는데, 나라가 작아 신라(新羅)한테 당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정치하는 사람들은 늘 그런 방법을 쓰는데 신라도 그랬어요. 옛날 예수님 시대에 로마가 이스라엘 왕을 인정했듯이, (신라가) 조문국의 왕을 인정해주었어요.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학미리, 탑리리 일대에 고분군 수백 기가 있는데 왕릉은 조문국 왕으로 나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을 살펴보면 벌휴왕 2년(A.D. 185년)에 사로국(신라)이 조문국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공격으로 조문국이 멸망했는지는 정확지 않으나 서기 185년까지 조문국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성금성산고분군(경북도 기념물 제128호)이 위치해 있는 금성면 일대가 조문국의 터전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왕을 조금 앞세워 여러 가지 편리를 봐주는…, 세계의 역사를 보면 강한 국가들이 이런 방법을 많이 써요. 하하하. 여기 경북 의성에 조문국박물관도 있어요.”
 
  ― 그렇군요. 신라가 조문국의 자치를 인정해주었군요. 주교님이 향토 사학자가 되셨네요.
 
  “하하하.”
 
 
  ‘사제가 된다는 것의 의미’
 
  ― 의성에는 천주교 신자 수가 좀 많습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모범 본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몇 달 전에 〈조문국과 천주교〉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릴 정도로 의성에서 성당을 다 인정해줄 뿐만이 아니라 신자가 아니더라도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은 없거든요. 새 성당을 짓는다고 하면 별도로 (성전 건립) 헌금을 안 내도 될 정도로…. 그렇다고 신자들이 부자라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성당 일이라면 돈을 잘 냅니다.”
 
  ― 대단하네요.
 
  “설교도 잘하고, 성당 분위기 역시 좋아요. 성당에 가면 서로 나누는 걸 좋아하고, 성가대는 아주 일류, 그리고 성모회도 있어요. 난 몰랐는데 이 때문에 오늘 아침 의성성당에 갔다 왔어요.
 
  왜 그러냐(갔느냐) 하면 암만해도 그때(사제 서품 70주년 기념미사 때) 잔치를 좀 베풀었거든요. 풍물놀이도 하고 손님에게 마련한 음식을 보니 아주 일류였어요. 굉장해! 안동교구청에서 돈을 줘서 그런가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성모회에서 일주일간 준비했다는 겁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오늘 성당에 갔다 왔어요. 무언가 선물을 좀 해야겠어서. 여긴 다른 본당하고 좀 달라요. 하하하.”
 
  ― 사제 서품 70주년이신데 어떤 메시지를 후배 사제들에게 남기고 싶습니까.
 
  “사제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합니다. 사제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린 사제라고 부릅니다마는 글쎄요,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몰라서 우리를 두고 사제라고 부릅니다마는 ‘참 사제’는 아니다. 고해성사를 줄 적에 ‘나는 죄사함을 준다’고 하지만 음… 내가 누구냐? ‘나’ 하고 ‘참 나’ 하고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요? ‘참 나’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깊이 깊이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십니다. 내 안에서 생활하십니다. 요한 세례자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그래요. ‘내가(나는) 늘 작아져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예수님이라고 부르면 맞는 말일 수가 있겠다. 내 삶은 예수님의 삶이지 내 삶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면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 신부들은 다 알고 있죠. 중요한 것이 기도(祈禱)입니다.
 
  미사를 올리고,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바치고, 묵주기도를 20단 바치고, 그리고 1시간 정도…. 젊었을 때는 그 시간을 묵상(默想) 시간이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부르고 싶진 않아요.”
 
 
  “예수님과 저의 관계가…”
 
  두봉 주교는 한 번 호흡을 가다듬은 뒤 이렇게 강조했다.
 
  “왜? 나 자신을 살피는 묵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
 
  웬만하면 침묵을 지키죠. 무얼 이야기를 해봐야 다 알고 계시니 이야기를 해봐야 오히려 방해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고…. 그냥 두 손을 번쩍 들고 ‘대사제이신 예수님이 놀라우신 분이시다.’ 영광 중의 한마디, ‘주님을 기리나이다. 찬미하나이다. 흠숭하나이다.’ 네~, 그래요. 주님의 시간,… 그런 시간을 보냅니다.”
 
  두봉 주교는 “50년 전부터 지금까지 ‘주님의 시간’을 갖고 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예수님을 닮아간다? 아니다. 그냥, 자리를 내드린다. 받아들인다.’ 그렇게 살아보자는 얘기를 다른 신부님들 앞에서 했어요. 신부가 되어간다는 것은 평생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한도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두봉 주교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기자의 글로 표현하기에 벅찼다. 대화 중 눈시울이 뜨거워진 두봉 주교는 “제가… 눈물이 나오는 건 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종종 이렇게 눈물이 나온다. 뭐가 섭섭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기자도 갑자기 땀인지 눈물인지 뭔가가 흘러나왔다.
 
  ― 사제 서품 70주년을 맞아 이 질문을 안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사제가 되셨는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제 삼촌이 신부였어요. 어릴 적부터 나도 신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출발점이죠.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형제는 5남매였는데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사촌 동생 2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7남매가 되었어요.
 
  형제들이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어요. 신부가 되려면 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우리가 뒷받침해주겠다’고 해서 용기를 냈어요. 한국식 학제(學制)로 말하자면 고3 종교철학 시간에 유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 여러 가지 교회에 대해 배웠어요. 그 과목을 가르치던 분이 신부님이셨어요.
 
  그분 말씀이 ‘사랑에 참 사랑이 있다면 밑에 사랑, 중간 사랑, 최고 사랑이 있고, 행복도 맨 아래 행복에서 중간 행복, 최고 행복까지 많다. 그런데 예수님이 최고의 사랑이시다. 최고 사랑에 해당하는 것이 최고 행복이다. 예수님은 남을 위해 당신 목숨까지 다 내어놓을 정도로 자기를 잊으시고 완전히 자기를 남들에게 바치신 그런 사랑, 최고의 사랑이자 최고의 행복을 실천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의식적으로 ‘아, 그렇다면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야겠다. 나도 최고 사랑을 베풀면 최고 행복이겠다’ 뭐라고 할까? 정말 행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특수 상황…, 남들에게 주는 사랑이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살아보겠다! 그래서 그 마음을 갖고 신학교를 다녔고, 그 마음으로 신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저의 관계가 아주 친밀한 그런 관계가 되어 탄복하게 되었어요.”
 
 
  “기쁘고 떳떳하게”
 
  ― 탄복했다?
 
  “탄복…. 예수님이 너무 좋고, 예수님처럼 산다는 게 너무 고맙고, 그런데 사제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든지, 후회했다든지, ‘다른 행복이 어디 있지 않은가?’, 여성에 관한 생각을 안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사람이니까. 결혼 생각을 했고, 그런데 그것보다 더 훌륭한 사랑을 선택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살아보니까, 참… 말하기가 거북할 정도로 내가 행복하게 살아왔다! 내가 정말 기쁘게 살아왔다! 참 고맙게 살아왔다! 지금까지!
 
  뭐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에 육체적인 어려움이라든가, 정서적인 유혹을 받지 못했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 네, 그런데….
 
  “여기 안동교구의 모토가 되었다고 해야겠는데, ‘기쁘고 떳떳하게!’ 네~,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일단 우리 신부님들에게 이렇게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보라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권장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길게 이야기를 했지요?”
 
  ― 아닙니다.
 
  “하하하하.”
 
  ― 성소(聖召), 그러니까 신(神)의 부르심은 선택을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선택을 받는 것인가요.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고 하셨거든요. 지금 나에게도,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네, 선택하신다…. 그런데 내가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 그런가요?
 
  “선택하신다 해도 내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선택을 내가 고맙게 생각하고, 그 삶을 내가… 살겠다는, 그런 개인의 다짐도 그만큼 필요하죠.”
 
 
  “(죽는다 해도) 간다!”
 
젊은 시절의 두봉 신부. 위에서부터 신학생 시절, 군 복무 시절, 1953년 사제 서품식 모습(맨 오른쪽)이다.
  ― 알겠습니다. 왜 하필 선택이 한국이었을까요? 왜 한국을 택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난 저쪽(프랑스)에서 군(軍) 복무 중이었어요. 당시에 남자는 1년 동안 의무복무를 했지요. 그때 한국에 사변(事變)이 일어나 파병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신학생 시절이었는데 가까운 친구가 있었어요. 고아인 그 친구가 하루는 ‘난 부모도 없고 돈도 없으니 돈을 벌어야겠다’며 한국에 간다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전사(戰死)했어요. 그래서 한국에 대해 관심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한국으로 발령받던 날이 1953년 6월 29일이었습니다. 부름 받는 날(사제 서품을 받은 날?), 한국 발령을 받았어요.
 
  그런데 뜻밖이었어요. 아직 휴전을 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 중인 나라에 사제를 안 보내거든요. 그래서 나는 전혀 한국행을 생각 못 했어요.
 
  그런데 받아보니까, ‘어? 내 친구도 지원했는데…, 전쟁 중에 피해가 막심하고, 가난하기 짝이 없는 나라라던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박수를 쳤어요. 너무 고맙다! 그래서 무척 좋아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 선교사로 떠난다는 것은 사실 순교하기 위해 가는 것 아닙니까.
 
  “뭐, 죽기 위해…, 103위 한국 성인 중 10명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다 해도(죽는다고 해도), 간다!”
 
  ― 기쁘게 가셨군요.
 
  “죽으러 간다는 것보다, 목숨이라도 다 내놓는다. 그런 것은 다 우리 정신이죠.
 
  한국까지 가는데 거의 두 달 반 이상이 걸렸어요. 왜 그런가 하면 그땐 비행기가 없었으니까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서 일본 요코하마까지 한 달이 걸립니다. 웬만하면 밤에 움직이고 아침에 항구에 도착합니다. 그럼, 배에서 내릴 사람은 내리고, 새로 타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도 도착하는 항구마다 배에서 내려 여행을 떠나거나 선배 신부님들을 찾아가곤 했지요. 그렇게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는데 당장 한국행 배가 없었어요.
 
  3주일 동안 기다렸다가 어느 화물선이 인천으로 간다고 해 탔어요. 그땐 짐이 많았어요. 한국이 굉장히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뭐든지 다 필요하다고 해서 물품이 많았어요.
 
  가장 먼저 밟은 한국 땅이 경남 마산이에요. 그다음이 부산이고요. 부산 다음으로 다시 일본 오키나와에 갔다가 인천으로 갔어요. 그때가 12월이었는데, 정확하게 12월 19일이었는데 너무 추웠어요.
 
  추웠고, 뭐든지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도 남녀 구분 없이 대부분 군복…, 군복을 입고 있었어요.”
 
 
  “아버지로부터 32년간 매주 편지 받아”
 
두봉 주교의 부모님이 보내준 편지. 부모님은 32년간 매주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 그래도 한국에 70년간 머무르시면서, 한국인이 되셔서, 가끔 고향이 그립거나 형제들이 그리울 때는 언제인가요? 또 그리울 때는 어떻게 해요?
 
  “그건 뭐… 남의 이야기지…. 나 같은 사람이….
 
  7남매 중에 친누나 둘은 세상을 떠났고 친동생 한 명이 남아 있어요. 사촌 동생도 둘 중 한 명은 떠났고 한 명이 남았는데 동생 둘 다 아흔이 넘었어요. 그런데 제가 70년간 한국서 살았기에 그들하고는 접촉이 거의 없었어요. 조카나 그 다음 세대는 잘 모릅니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빠, 엄마가 모두 모범 가톨릭 신자들이었고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원으로 평생 남을 돕는 데 헌신하며 사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매주 편지를 받았어요. 32년 동안 보내셨죠. 엄마가 살아계셨을 적엔 편지봉투 안에 두 분의 편지가 함께 있었어요. 짐작건대 아들이 낯선 나라에 갔는데 말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어려울 것이고, 그래서 뭐 도와줄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시다가 편지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저는 2주일에 한 번씩 답장을 보냈습니다.
 
  편지를 보관하지 않은 이유가, (편지) 내용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이었어요. 날씨가 어떻다든지, 동생이 찾아왔다든지, 이웃에 누가 이사 왔다든가 하는 식이었어요.”
 
 
  儒林을 놀라게 한 젊은 주교
 
《안동학》 제14집(2015년)에 실린 안동문화회관의 모습이다.
  두봉 주교의 철학은 “열린 교회를 만들자”이다. 1969년 처음 안동교구장으로 내려와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하는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 최대 규모였던 6층짜리 안동문화회관을 세웠다. 1973년 9월 개관한 안동문화회관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 ‘신상’을 평생 처음 타보기 위해 영주, 군위, 의성에서 두루마기 한복 차림으로 어르신들이 찾아왔다. 계단이 인조석 마감인데 반달반들 닦아놓으니 길에서 신발을 벗고 올라왔다고 한다. 문화회관은 잠실야구장, 대구시민회관, 대구문화예술회관 등을 설계한 청구대(현 대구대) 건축과 김인호(金仁鎬·1932~1989년) 교수가 지었다. 놀라운 것은 문화회관으로는 대도시인 대구시민회관보다 1년 먼저 착공해 1년 앞서 개관했다.
 
  또 가톨릭상지대학과 나환자를 치료하던 병원(영주 다미안 의원)도 그 무렵 설립됐으며 농민회관과 학생회관도 세워졌다. 그렇게 두봉 주교는 안동 주민이 되었고 안동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 첫 안동교구를 설립하며 교구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임명을 거절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대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왜 외국인이 선교하러 왔느냐’고요. ‘유교, 불교 다 있는데 우리가 왜 서양 종교를 믿어야 하나. 우리를 존중해달라. 서로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서로가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선교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안 좋다. 정말 안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교구장이 되면 아유~ 더욱더…. 교구장이 외국인이면 더욱 외국 종교라 생각할 테니 거절했는데, 어쩔 수 없이….”
 
  6·25전쟁 당시 납북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13명 중 최후의 생존자였던 구인덕(프랑스명 셀레스텡 코요스·1908~1993년) 신부가 안동교구장으로 내려갈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는데 젊은 주교가 임명되어 안동교계가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착좌식 취임사를 하며 첫말을 《논어》의 구절을 예로 들자 신도들은 물론이고 구경 온 내빈, 유림들마저 놀랐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말도 아주 유창했단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 천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국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었던 1825년에 미사를 담당할 사제를 보내달라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편지를 받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 선교사 파견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1831년 조선 교구(敎區)를 설정하였고,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방(Maubant) 신부가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순교의 길을 걸어간 분이 24명, 한국 땅에 묻힌 분이 100여 명이다. 1984년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103위 한국 성인 중 10명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이라는 사실에서 이들이 한국 천주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생각지 못했던 데로 자꾸 주님께서 저를 이끌어…”
 
  ― 안동교구장이 되신 뒤 정말 헌신적으로 일하셨지요? 문화회관이니 농민회관 같은 건물들이 지금도 있나요.
 
  “가톨릭상지대학은 잘 운영되고 있고 농민회관은 다른 목적으로 쓰이고 있어요. 지금은 농민회관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문화회관은 완전히 없어졌고요. 안동시에서 새롭게 건물을 지었어요. 나환자촌도 지금은 다 없어지고…. 안동교구가 처음 생겼을 때 인구가 170만 명이었어요. 지금 얼마인지 아십니까?”
 
  ― 절반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60만 명이에요. 가장 작은 교구가 되었고 그래서 재조정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얘기가 있었어요. 포항대리구하고 합친다? 그거는 뭐, 포항에서 안동까지 (너무 멀어) 찾아오는 사람, 없고요. 차라리 작은 교구로 남아 있는 것이, 작은 농촌 교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해요. 여기 안동교구에 주일학교 없는 본당이 자꾸 많아집니다. 왜? 초등학생이 한 명도 없어요.”
 
  ― 큰일이네요. 농촌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안 들리고….
 
  “그래도 신부들이 다른 교구를 부러워한다든가, 큰 교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냥 있는 대로 사는 것을 좋아해요. 있는 대로 감사하게…. 저에게 버릇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든 그 안에서 좋은 것만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안 좋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다고 기도해요. 원치 않는 일을 두고도 감사하기란 쉽지 않지요. 그러나 이끌어주시는 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뜻을 받들려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네, 그냥 주시는 대로 받아들여야죠.”
 
  ― 신(神)의 뜻을 받들면 종국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암만해도 근본적으로는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느님은 창조주시니까, 자신 있게 ‘주님의 뜻이 이것’이라 말하기 어렵죠. 그런데 성령(聖靈)께서 우리 하나하나를, 우리 교회를 지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이끌어주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더라도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고, 원하시는 대로 무조건 승낙하고, 고마워하고,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그냥, 제 삶을 볼 것 같으면 생각지 못했던 데로 자꾸 주님께서 저를 이끌어주셨어요. 그래서 훗날 이게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판단할 수가 있지만 그 순간엔 잘 모르죠.
 
  다만 아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은 판단하고, 주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싶은 것처럼 따라가면 이상하게 다른 길로 이끌어주시는 경우가 있어요. 생각하지 않았던….
 
  그냥 나 같은 사람을 한국으로 보낸 것부터 생각해보면,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일…, 안동교구가 생긴 거라든지….”
 
  ― 그런데 신을 믿지 않는 비신자도 이끌어주십니까.
 
  “네, 네! 신자가 아닌 분도 양심이라는 곳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오원춘 사건’의 전말
 
《조선일보》 1979년 9월 5일자 7면에 실린 〈오원춘 피고 첫 공판 열려〉 기사를 캡처했다.
  ― 아무래도 이 질문을 좀 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오원춘(吳元春) 사건’의 당사자인 오원춘씨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네, 잘 살아요. 근래에는 만나지 못했어요. 2015년 8월인가… 경북 영양군 청기면 청기공소가 50주년이 됐을 때 찾아가 미사를 올렸는데, 오원춘이도 지금은 노인이 되었겠지요.”
 
  1978년 무렵의 일이다. 경북 영양군 청기면 농민들은 영양군과 농협에서 알선한 씨감자를 심었으나 싹이 나지 않아 감자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당시 유일한 농민 조직이던 가톨릭농민회는 피해 농민들과 협의해 피해 보상을 요구했고, 안동교구 사제단의 지원으로 피해액 전액(700여만 원)을 농협으로부터 보상받았다.
 
  씨감자 피해 사례가 전국에서 있었지만, 보상을 받은 곳은 영양이 거의 유일했다고 한다. 오원춘은 그 무렵, 전국 농민회 모임에 나가 씨감자 피해 보상과 관련된 영양군 활동 사례를 발표했다. 이후 전국농민회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모(某)기관에 납치당한다. 보름 만에 겨우 풀려난 오원춘이 양심선언을 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이유는 감자였는데 오원춘이가 농협으로부터 보상을 받았어요. 썩은 감자였으니 보상을 받았던 거죠. 그런데 보상받은 걸 농협에서 말 못 하게 하기 위해 그냥 살짝 돈을 줬던 거지. 그런데 전국농민회 모임 때 그 일을 발표했어요.
 
  발표하면서 ‘어려움이 있으면 항의를 해야 된다.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가 야단을 쳐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정부 측에선 본래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있어서 (오원춘을) 고문하고, 내가 고문에 항의했고, 그러자 ‘외국 사람이 여기 와서 법대로 살아야지, 우리나라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나를 보내려고(추방하려고) 하는데 막으신 분이 주한 교황청 대사님이셨어요.
 
  대사님이 당시 외무부 장관을 찾아가서 ‘교황님이 임명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보내는 것은 문제지 않으냐’고 했어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김수환 추기경님과 주교회의 의장이던 윤공희 대주교님, 저를 (바티칸으로) 부르셔서 알게 되었습니다마는, (교황님이) 폴란드 교구장으로 계셨을 때 비슷한 사건을 겪으셨던 모양이에요. 폴란드가 예전엔 공산국가였잖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고문한다든가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다’고 하시며 교황님이 우리 편을 들어주셨어요. 한 달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을 당하면서 그 사건은 끝이 난 거죠.”
 
 
  “누구든 행복할 수 있는 기준이 양심”
 
2012년 만해실천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당시의 두봉 주교.
  두봉 주교는 목을 가다듬은 뒤 이렇게 말했다.
 
  “두려운 건 폭력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저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내 할 일을 다하고 떳떳하고자 생각했을 뿐입니다. 교회가 약자를 돌보지 못하는 것은 소금의 짠맛을 잃고 누룩이 발효를 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 말씀하신 그 ‘양심’이 뭔지 조금 쉽게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참 이렇게… 하느님께서 사람을 묘하게 만들어주셨어요. 사람들의 마음속에 뭔가 헤아릴 수 있는 그런 기능이 있어요. 양심! 잘했다고 그러면 만족감을 느끼고, 잘못했다고 그러면 가책을 느끼는…. 누구든지,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종교가 어떻든 누구든 판단할 수 있는 그 능력…. 그 누구에게든지 그냥 있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에 의해 우리가 살아간다고 말할 수도 있지마는 양심(에 따라), 좋은 일을 하고 싶어요. 좋은 일을 해야 만족하고 행복해요. 그래서 제 마음속에 충동을 느낍니다. 잘해야 되겠다는 것, 그렇지 아니했을 때는, 죄를 지었을 적에는, 부끄럽고 ‘난 사람이 아니다’ ‘이건 아니다’ 하는…. 그래서 누구든 행복할 수 있는 기준이 양심이에요.”
 
  ― 행복의 기준이 양심이군요.
 
  “참 아주 묘합니다. 누구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누구든 불행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양심의 소리. 그냥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행복의 길을 가는 거예요.”
 
  ― 양심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인가요? 노력해서 갖는 것인가요.
 
  “노력해서 주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주어진 거예요.”
 
  그러더니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을 때, 건강에 관한 것이든, 결혼이나 직업에 관한 것이든 물어올 때가 있어요. 새로운 일을 할 때도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어디다 물어볼 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을 찾아와요.”
 
  ― 믿고 의지하고 싶어서 찾아오나 봅니다.
 
  “그러면 ‘양심대로 살아보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뭔가 ‘아니다’ 하는 그게 양심의 소리예요.”
 
 
  “그냥 그때를 기다리는 거예요”
 
  의성군 봉양면의 두봉 주교 집은 그냥 사택이 아니라 신자모임(반모임이라 부른다)도 할 수 있고 때론 미사도 드릴 수 있다. 동네 사람들이, 혹은 그의 이름을 아는 여행객들이 지나가다 들러 인생 상담을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집은 늘 북적인다. 두봉 주교는 선교사다. 그러니 그들의 방문을 전혀 꺼리지 않는다.
 
  ― 때로는 혼자 계시고 싶을 때 귀찮고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선교사입니다. 오히려 선교가 되기 때문에 아주 잘 받아들입니다. 어떨 땐 피곤할 수가 있겠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막는다든가, 간단하게만 이야기를 한다든가 그러지 않습니다.”
 
  ― 어떤 대화를 나누시나요.
 
  “며칠 전 프랑스 청년이 찾아와 조심스럽게 신앙에 대해 물었어요. 어느 아가씨와 같이 왔는데 외국에서 만난 모양이에요. 결혼할까 말까 생각 중인데 아가씨가 신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청년이 저더러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그래서 길게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요.”
 

  ―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믿음은 각 개인의 깨달음입니다. 믿으라고 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남편 될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세상, 삶, 인생… 도대체 왜 사는가? 이런 것에 대해 그냥 아주 길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어요.
 
  다음 날 온 사람은 부부였는데 아내는 교우(敎友)고 남편은 신자가 아닌데 같이 왔어요. 아내의 태도를 보니 모범적으로 살려고 무척 애써요. 남편이 옆에 앉아 있는데도 ‘남편이 믿음에 대해 관심이 없다. 깨닫지 못해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 남편이 겉으론 말은 안 하지만 내적인 변화가 있는지 모르죠.
 
  “그렇죠. 그냥 그때를 기다리는 거예요.
 
  어저께 왔던 사람은 스웨덴에서 사는 예순 정도 되는 여자였는데, 같이 올 사람이 갑자기 못 오게 돼 혼자 왔어요. 자기가 젊었을 때 프랑스로 유학을 간 모양인데 지도를 꺼내서 어디에 산다는 것을 설명해줘요. 스웨덴은 천주교보다 개신교 신자가 더 많은데 (신자로) 열심히 살더군요.”
 
 
  안동교구 사명 선언문
 
두봉 주교의 집 벽면에 걸린 ‘안동교구 사명 선언문’.
  ― 한국에 오신 지 70년이나 되셨는데 프랑스 말을 아직 기억하십니까.
 
  “네 뭐…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단어가 잘 안 떠오르는 경우가 있고 더러 실수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보청기를 끼고 있어요. 사람들과 일대 일 대화는 가능한데 잡음이 있다든지 사람들이 많이 모인 데서 아니면 텔레비전 방송은 잘 못 알아들어요.”
 
  ― 어떤 실수를 하셨어요.
 
  “수도회 중에 ‘거룩한 말씀의 회’가 있고 ‘말씀의 성모영복 수녀회’가 있어요. ‘거룩한…’에서 저에게 사제 서품 70주년이라고 영적 선물(기도나 묵주 등)을 보내주어 ‘고맙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 문자를 ‘말씀의…’로 보냈더군요. 전엔 그런 실수를 안 했는데 이제 그런 실수를 해요, 종종. 하하하.”
 
  두봉 주교의 웃는 모습이 너무 해맑아 보였다. 웃는 모습이, 마치 안동에 처음 내려가 교구 모토를 ‘기쁘고 떳떳하게’라고 정했을 때로 되돌아간 듯, ‘기쁘고 떳떳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그렇게나 감동스럽게 느껴졌다. 인터뷰를 마치며 집 벽에 걸려 있는 ‘안동교구 사명 선언문’을 속으로 읽어보았다.
 
  〈기쁘고 떳떳하게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천주교 안동교구 사명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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