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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농촌 사업가’ 송종의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

“수의엔 호주머니가 없다”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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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주울 사람이없어…이젠 ‘밤나무 검사’가 아니라 ‘농촌 사업가’”
⊙ 1998년법제처장 끝으로 낙향,변호사 등록 안 하고 ‘농촌 사업가’로 변신
⊙ 2014년‘천고법치문화재단’ 설립해40여억원 사재출연
⊙ “‘범죄와의 전쟁’, 지휘부가 흔들리지않고 의연하게부하 검사를 믿고 보호한 우리검찰의 자랑스러운 역사”
⊙ “‘검사 윤석열’은 역사가 평가할 것… 청소년들 마약 투약 큰 걱정”
⊙ “법치주의확립에애쓰는 공직자들 칭찬해주고 싶다”
  “덥지? 우선 수박 주스 한 잔 시원하게 드시구려. 얼마 전 어떤 수박 주스 품평대회에서 1등 받은 우리 수박 주스야. 홈쇼핑에서 이 수박 주스(230㎖) 수천 개가 2분 만에 완판 됐대.”
 
  체감온도가 섭씨 40도에 육박하던 지난 6월 23일, 충남 논산시 양촌면 양촌리를 찾은 기자에게 송종의(宋宗義·81) 전 법제처장이 강한 평안도 억양으로 목을 축이라 재촉했다. 송종의 처장은 25년째 이곳에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리는 중이다. 그는 1996년 12월부터 1998년 3월까지 법제처장(장관급)으로 1년 3개월간 재직하고는 이후 벼슬과 인연을 끊었다. 보수 정권마다 그를 중용하려 했으나 고사했고, 변호사 개업 대신 양촌영농조합법인(써니빌)을 설립해 20년째 운영해 오고 있다.
 
송종의 처장이 팔각정 정자 가한정(嘉閒亭) 현판에 적힌 자신의 한시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聆雲睎月(영운희월)은 ‘귀 기울여 구름을 듣고, 달을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뜻이다. 사진=조준우
  공장 입구엔 8톤 냉동트럭이 딸기잼 원료인 ‘딸기 큐브’를 한창 상차(上車)하고 있었다. 송 처장은 백발이 성성했지만 농업 현장을 뛰는 그의 몸은 대추나무 방망이처럼 단단하고 꼿꼿했다. 그는 농산물기업 써니빌 공장 사진을 구글에서 출력해 펜으로 그려가면서 설명했다. 공장 부지 약 2만㎡(약 6000평) 위에 1만㎡(약 3000평) 규모로 밤 저장시설, 딸기와 수박 등 과채류 가공시설, 사택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장 2층에 천목헌(天目軒)이라는 송 처장의 집무실이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천고법치문화재단’ 명함을 건네면서 “평안도 사투리 억양이 살짝 있구나”라며 “아버지 고향이 어디시냐”고 했다. 기자가 “평남 평원(平原)”이라고 하니, “평원은 대동강 서북쪽이고, 내 고향 중화(中和)는 대동강 남쪽이지”라고 했다.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기자를 보며 “‘시집가는 날 등창 난다’더니 하필 당신들 오는 날 입술이 터지고 코에 뾰루지가 났다”며 껄껄 웃었다.
 
 
  ‘밤 수출’ 하려다가 사기당해
 
송 처장은 1973년 4월 양촌면 석서리와 임화리 일대 20만 평을 나라에서 대부받아 밤나무 1만 주를 심었다. 사진=천고법치문화재단
  송종의 처장은 베트남전 참전을 마치고 귀국 비행기에서 고국의 황무지와 같은 누렇게 헐벗은 산야를 내려다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장교수첩 한쪽에 ‘더위와 추위 막을 나무를 심으리라’는 내용의 시조를 쓰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1971년 대전지검 강경지청(현 논산지청) 검사로 부임해 나무 심을 적지를 물색하다 논산 양촌면 김용진 이장과 산림과 공무원들의 도움을 받아 논산 양촌면 일대에 버려진 국유림 3곳을 발견했다.
 
  1973년 4월 5일 양촌면 석서리와 임화리 일대 20만 평을 나라에서 대부받아 밤나무 1만 주와 낙엽송, 개량 소나무 수만 주를 심었다. 4~5년 모아둔 검사 월급과 대구지검을 떠날 때 받은 전별금을 보태 묘목을 샀다.
 
  — 그 넓은 땅에 심은 밤나무 관리를 어떻게 하셨어요.
 
  “나무 심기 직전 서울지검 성동지청으로 발령이 났지 뭐야. 주말마다 뻔질나게 서울과 논산을 왔다 갔다 했지. 공휴일마다 나무 돌보러 간다니 처음엔 다들 미쳤다고 하더라고. 나무 키우는 게 잡초 제거해주고, 비료 줘야 하고 은근히 손이 많이 가거든. 하지만 내 의지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고 검찰 선배들도 이해해주었어. 그때부터 난 ‘밤나무 검사’가 됐지.”
 
  — 서울에서 논산까지 차로 3시간 이상 걸렸을 텐데요.
 
  “처음엔 고속버스 또는 기차를 타고 내려와 자전거를 타고 밤나무 밭을 돌아다녔어. 나중엔 포니, 마크Ⅳ 고물차를 사서 왕복했고. 그동안 밤나무 관리하면서 폐차시킨 차가 3대야. 40만km 이상을 운전했으니 ‘밤나무 찾아 100만 리’를 한 셈이지.”
 

  — 그런데 저 코너 장식장에 있는 300만 불 수출탑은 뭡니까.
 
  “밤 수출 많이 했다고 2010년 무역의 날에 이명박 대통령이 주더라고. 그런데 밤 수출이 쉬운 게 아니야. 사기꾼이 많아.”
 
  — 사기를 당했다고요? 검사가 사기를 당했다니 뉴스감입니다.
 
  “검사라도 속이는 놈들에게 별 수 있나. 미국으로 주로 수출했는데, 현지 바이어들이 처음엔 송금을 꼬박꼬박 잘 해주더니, 마지막엔 물건 트집을 잡으며 돈을 부치지 않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떼이다 보니 이건 안 되겠더라고.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 소송하면 더 골치 아파서 포기하고, 수출 물량 줄이고 국내 판매에 치중했지.”
 
 
  “밤이 지천으로 깔려도 주울 사람이 없어”
 
5월 말 딸기잼 원료 생산을 마치고 써니빌은 현재 수박 퓌레 주스를 한창 가공하고 있다. 써니빌의 수박 주스는 전국수박주스품평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고 한다. 사진=조준우
  — 올해 밤농사 작황은 어떤가요.
 
  “작황은 둘째치고 밤농사를 접었다니까. 생각해 봐. 넓은 국유림 3곳에서 매년 30톤, 400가마가 쏟아진다고.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보름 정도 지천으로 깔린 밤을 주워야 하는데, 밤을 주울 사람이 없어. 시기를 놓치면 밤이 말라서 상품 가치가 없어. 노동력이 귀하니 밤값도 비싸서 수출하면 경쟁력이 있나. 국내 시장도 밤 생산 농가마다 냉장창고가 있어서 인터넷으로 소비자와 직거래해. 이러니 어떻게 장사를 하겠어. 이게 우리 농촌의 실상이야.”
 
  — 저런, 이젠 밤나무 검사님이 아니네요.
 
  “작년까지 ‘밤나무 검사’였던 것이고, 50년 동안 쓰던 그 별호(別號)가 사라진 거야. 국유림관리소에 부지를 작년 말에 반납하고, 밤나무는 관리를 맡겼지. 밤 가공 기계는 창고에 천막으로 덮어 넣어두고. 밤은 나하고 인연이 끝났어. 이젠 ‘밤나무 검사’가 아니라 ‘농촌 사업가’야. 이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을 가공하는 사업가지. 지금 딸기 1차 가공품 물량이 전국 몇 등 안에 들어. 딸기는 딸기잼용으로 1차 가공한 것을 1년 내내 냉동창고에 넣어두고 유명 식품회사에 공급하는 거지. 오 기자, 오늘 이곳에 올 때 회사 입구에 서 있던 큰 트럭 봤지? 그게 딸기 가지러 온 트럭이야. 이 밖에 수박, 포도, 사과, 배도 가공하고 있지.”
 
송종의 전 법제처장이 써니빌 공장 조감도 사진을 구글에서 출력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오동룡
  써니빌은 2015년부터 영농조합을 써니빌주식회사로 바꾸고 딸기, 사과, 배, 포도, 모과로 사업 품종을 다변화하고 있다. 전근대적 조합 경영 방식으론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자본금 5억원의 써니빌은 요즘 상근 정규 직원 15명에 70억~8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작년에 가공한 딸기만 1500톤, 대상그룹과 오뚜기 및 SPC(파리크라상, 샤니)에 딸기잼 원료를 납품하고 있다. 5월 말 딸기 생산을 마치고 현재 수박 퓌레 주스를 한창 생산 중이다.
 
  — 검사일과 농사일 중에서 어느 게 수월한가요.
 
  “둘 다 힘들어. 그런데 검사는 늘 도둑놈, 사기꾼, 깡패만 상대하잖아. ‘제가 죄인입니다’라는 사람이 어딨어? 농촌사업은 힘은 들지만 일하다가 가을에 밤이 빨갛게 달리는 걸 보면 흐뭇하고, 일하다가 딸기 하나라도 입에 집어넣을 수 있는 멋이 있잖아.”
 
 
  “변호사 등록조차 안 했다”
 
충남 논산시 양촌면 양촌리에 농업회사법인 써니빌주식회사와 천고법치문화재단 입간판이 나란히 서 있다. 사진=오동룡
  송종의 처장은 초임 검사 때부터 눈썰미 있고 일 잘하는 검사로 통했다. 검찰 선배였던 이종남(李種南) 전 법무부 장관은 ‘나무’ 외에는 한눈팔지 않고 탁월한 수사 성과를 거둔 그를 “여사모사 부장”이라 부르며 무척 아꼈다. 그는 서울지검 특수부장, 대검 중수부장, 서울지검장, 대검차장 등 검찰의 요직이란 요직은 죄다 거쳤다. 대구·경북 TK 출신이 주류였던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삼팔따라지’라는 이북 출신 검사가 그 자리에 발탁됐다는 것은, 탁월한 능력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다.
 
  검찰 이력만 보면 검찰총장 후보 1순위였지만, 1995년 대검 차장검사를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법제처장 퇴임사엔 그가 법조(法曹)와 완전히 결별한다는 대목이 있다. “귀거래혜(歸去來兮) 영고무상(榮枯無常) 산수자한(山水自閑) 좌간부운(坐看浮雲).” ‘이제 돌아가네, 성함과 쇠함이 다 무상한 것, 산과 물이 한가로우니 조용히 앉아 뜬구름을 보리라’는 뜻이다.
 
  — 어떤 경위로 1996년 법제처장을 맡게 됐나요.
 
  “서울지검장 때 안기부 엄삼탁(嚴三鐸) 기조실장을 잡아넣는 것을 보고 총장 시키면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겠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미안했을 거야. 법제처장 임명 이틀 전, 양촌면 면사무소 직원이 밤나무 산으로 헐레벌떡 나를 찾아와 청와대에서 급하게 날 찾는다는 거야. 청와대에 전화를 하니, 직원이 대통령 각하를 직접 바꿔드리겠대. 김 대통령이 ‘정부 내각 개편에서 입각 당사자들 통보를 하는데, 오직 당신만이 연락이 되지 않아 내각 명단을 지금껏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면서 어디에 다니기에 집에도 없고, 연락도 되지 않는가. 내가 당신을 법제처장으로 임명하니 그리 알라’며 30초 만에 전화를 탁 끊더라고.”
 
  — 법제처장을 마치시고 ‘전관 변호사’나 대형 로펌으로 가실 생각은 없었나요.
 
  “내 입으로 귀거래 16자를 얘기했으니 벼슬을 더 못 해. 내가 법조를 떠난 지가 벌써 오랜 옛날이고, 변호사 등록도 하지 않았어. 난 변호사협회 명부에도 이름이 없는 자연인이야. 그렇게 나를 반기는 나무가 있고, 산이 있는 이곳으로 온 거야.”
 
  —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고위직 제안을 받지 않았나요.
 
  “이건 내 입으로 답변하기가 어려운 질문인데…. 시인하든, 부인하든, 그 답변은 한때나마 국정 책임을 맡았던 통치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지. 내 사무실 한쪽 벽에 평검사부터 법제처장까지 13개의 공직 명패를 순서대로 정리한 걸 보면, 맨 아래 ‘검사’ 명패 밑에는 ‘자연인 송종의’가, 맨 위 ‘법제처장’ 명패 위에는 ‘자유인 송종의’가 차지하고 있어요. 더 이상 벼슬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거지.”
 
  송 처장은 기자에게 프로젝터 빔을 작동해 ‘천목거사의 생활’이라는 46페이지 분량의 프레젠테이션(PPT)을 보여줬다. 2005년 이수성(李壽成) 전 총리가 김영삼 정부 시절 퇴직 장관 모임인 ‘민우회(民友會)’ 회원 10여 명과 부부 동반으로 써니빌을 방문했을 때 소니 카메라로 주변 풍광을 찍어 PPT로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송 처장은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이 모두 오 기자님처럼 ‘당신은 왜 변호사도 하지 않고 여기 찾아와 이러고 사느냐’고 묻는다”며 “매번 똑같은 설명을 해주다 보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내 손으로 PPT를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내게 쓰는 조사와 축사’
 
  — 담배를 계속 피우는데, 건강은 괜찮습니까.
 
  “평생 하던 장난인데, 끊어지겠수? 1995년 11월 지인과 홍콩에서 심심풀이로 ‘철판신수 강천일(鐵板神數 江天逸)’이란 역술가에게 물었더니, 내가 77세에 죽는다 하더라고. 원숭이띠 여자와 기유년(1969년)에 결혼하고, 아들은 토끼띠, 딸은 개띠라고 해. 내 일평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맞히니 환장할 노릇이지.”
 
  — 소름 돋는데요.
 
  “사람인 이상, 77세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있을 수 없잖아. 죽는다는 해, 2017년을 한 해 앞두고 내 재산에 관한 처리 방침을 정해서 외동딸 미현(美賢)이에게 장문의 유서를 썼어. 수년 전부터 준비해 오던 ‘천고법치문화재단’ 설립에도 속도를 내 2014년 5월 등기를 마쳤고, 이듬해부터 ‘천고법치문화상’을 만들어 시상하고 있지. 신기하게도 강천일 말대로 2014년부터 온갖 죽을병이 찾아오는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 77세를 넘겨 강천일의 사주풀이가 잘못된 것임을 입증해야겠다고 다짐했어.”
 
  — 운명과의 싸움이군요.
 
  “내가 생각해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며 그 병마를 용케도 이겨냈지. 전립선비대증을 고치려고 두 번씩이나 큰 수술을 받은 후 부정맥, 척추관 협착증이 점차 사라지더니 77세, 2017년이 지났어. 감격스러운 마음에 《밤나무 검사의 글자취》란 책에 ‘내게 쓰는 조사와 축사’란 글을 쓴 거야. 새로 태어난 송종의가 77세까지 산 송종의에게 주는 조사지. ‘존경하는 철판신수 강천일 씨! 당신이 정성스럽게 살펴준 내 사주는 틀렸소. 그러나 당신이 지적해준 내 허물은 그대가 내게 준 양약(良藥)으로 알고 고쳐가리다’라고 썼어. 2021년 7월부터 양촌리에 새로 들어선 국방대학교 부설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했어. 베트남전 참전유공자라 수영장 출입이 가능해요. 수영 시작한 지 2개월이 지나면서 통증이 많이 줄어서 이젠 큰 고통 없이 지내고 있지.”
 
  — 사택 ‘천고재(天古齋)’는 무슨 뜻인가요.
 
  “외아들 석윤(錫允)이 이야기를 해야겠군. 그 녀석을 스무 살이던 1996년 3월 교통사고로 잃었어. 그 애통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나. 49재를 치르고 ‘고유문(告由文)’을 쓰면서 인생의 가치를 새로운 것에서 찾기 시작했어. 우리 부부가 부산 안국사(安國寺)에 내려가 천목당(天目堂)에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그때 스님이 나는 천목(天目), 처는 고불법(古佛法)이란 법명을 주셨어. 그 둘이 사는 집이 천고재인 거야.”
 
 
  ‘회고록’을 ‘참회록’으로 쓰다
 
  송종의 처장은 올 1월 29년간 공직 생활을 회고한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법률신문사 펴냄)을 출간했다. 그는 “저의 고백이 후배들에게 ‘오답노트’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회고록을 썼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의 말대로 회고록에는 서울지검 평검사 시절 인적사항이 뒤바뀐 석방 지휘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서명 날인해 구속기소해야 할 피고인이 달아나는 바람에 일주일 만에 해결한 실수담 등이 담겨 있다.
 
  — 처장님이 지으신 책들의 세 번째 표지 날개엔 《명심보감(明心寶鑑)》 정기(正己)편 제26장에 나오는 ‘자허원군 성유심문(紫虛元君 誠諭心文)’이란 글이 실려 있습니다.
 
  “자허원군께서 지성으로 훈계하신 284자의 말씀인데, 내 인생의 좌우명(座右銘)이에요. 내 공직 회고록도 이 글에 비추어 참회하는 내용들이고. 한자(漢字)도 잘 모르는 아들 녀석에게 외우라며 회초리를 댔는데, 죽었으니 내가 얼마나 미안해.”
 
  — 민청학련 사건의 주임검사로 알려졌는데요.
 
  “잘못 알려진 사실이야. 1974년 성동지청 검사로 있으면서 국방부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관으로 파견근무를 갔어. 그때 민청학련 주모자로 지목된 이철(李哲·코레일 사장 역임)을 조사한 게 민청학련 사건 주임검사로 잘못 알려진 거야. 이 사건 주임검사는 선배 검사인데, 국방부 법무관리담당관이 ‘송종의가 문장력이 있고 목소리가 우렁차니 사건의 논고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 말석 검사가 사양했어야 하는데, 우쭐하는 공명심(功名心)으로 나선 거야. 그 바람에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가 민청학련 사건의 주임검사로, 유신체제에서 명성을 날린 검사로 알려진 사정이야.”
 
  — 부산지검 1차장 때는 박희태(朴熺太) 검사장을 모셨더군요.
 
  “박희태 검사장은 고시 13회의 선두그룹이었지. 재치 있는 말과 유머 화법으로 많은 사람을 즐겁게 했지. 이분은 1983년 자신이 개발한 양조기법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고 자부하는 폭탄주의 대가야. 술자리에서 본인은 도인, 차장검사는 선사, 부장검사는 법사로 호칭했는데, 검사장은 탄주도인(彈酒道人), 나는 밤나무를 심는다고 해서 율산선사(栗山禪師), 기독교 장로였던 문종수(文鍾洙) 차장은 노장선사(老長禪師)로 불렀어. 성품이 원만해 부하를 괴롭히는 일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부하들을 전적으로 신임하며 청을 이끌어 검찰청은 늘 화기만당(和氣滿堂)이었지.”
 
 
  “청소년들 마약 투약이 큰 걱정”
 
배명인 법무부 장관(왼쪽)에게 보고하는 당시 송종의 서울지검 특수제3부장. 당시 송종의 부장은 대학입시 부정사건과 법원직원 비리사건을 수사했다. 사진=천고법치문화재단
  — 대검 강력부장으로 ‘범죄와의 전쟁’이란 무시무시한 수사를 지휘하셨죠?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은 자유민주적 법질서에 기초한 최초의 범죄 단속과 처벌이란 데 의미가 있지. 각 지검의 초대 강력부장 6명을 심혈을 기울여 인선했고, 특히 서울지검 초대 강력부장으로 자타 공인 특수수사통 심재륜(沈在淪) 당시 서울지검 특수1부장을 천거했어. 김기춘(金淇春) 검찰총장에게 조폭 단속이 시작되면 담당검사를 모함하는 내용이 검찰 수뇌부에 들려올 것인데,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 달라고 했어. 우리나라 폭력 조직의 3대 패밀리인 양은파 일당 7명 검거를 시작으로 1990년 4월 조폭 대부 김태촌(金泰村)에 대한 내사를 시작해 그해 말 구속했어. 지휘부가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부하 검사를 믿고 격려하면서 철저한 보호자로 나섰는데, 우리 검찰의 자랑스러운 역사야.”
 
  — 요즘 마약 범죄가 심각합니다.
 
  “윤석열 정부도 대검찰청에 강력부를 신설해 마약 수사를 활성화하고 있더라고. 마약 수사의 ‘대부’ 류창종(柳昌宗) 검사가 마약과장 3년 6개월을 하면서 얻은 수사 노하우를 내 회고록에 담았어. 당시 대검 마약과는 메스암페타민(히로뽕) 문제를 단시간에 해결하기 위해 남용사범보다 공급 조직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사하는 방식을 택했거든. 이게 효과를 발휘했는지, 당시에 비난받던 마약 수출국이 2년 만에 마약 청정국으로 공인받은 거야. 요즘 우리는 마약 수입국이야. 먹고살 만하니까 마약을 소비하는 세상이 된 거야. 청소년들까지 마약을 투약하니까 이게 더 걱정이지. 마약이 만연되면 국가 공권력이 발동돼도 감당이 안 돼요.”
 
 
  ‘슬롯머신 사건’ 때 사표 제출
 
  — 서울지검장 시절 지휘한 ‘슬롯머신 사건’은 검찰까지 뒤흔들었습니다.
 
  “홍준표(洪準杓) 주임검사가 전임 검사장이었던 이건개(李健介) 지검장에게 수사 착수 보고를 했으나 ‘수사해선 안 된다’는 결정이 내려져 캐비닛 속에 잠자고 있었던 내사 사건이야. 내가 지검장에 부임하고 보고받고 보니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더라고. 하지만 나는 흔쾌히 홍 검사에게 사건의 수사를 허락했어. 이 사건은 처음에 강력부(류창종 부장, 주임검사 홍준표)가 주관했으나, 범위가 확대되면서 특별수사 3개부(부장-조용국·김대웅·정홍원)까지 투입해 신승남(愼承男) 3차장 휘하의 전 부서가 뛰어들었던 수사였지.”
 
  — 파장이 커지자 류창종 부장과 홍준표 검사가 사표를 제출했다면서요.
 
  “정보기관과 사정기관의 거물들이 하나둘씩 걸려들기 시작했어. 여기서 그친 게 아니라 그 불똥이 검찰조직 상층부까지 번지는 사태로 발전하면서 실로 걷잡을 수 없게 됐어. 우리 검찰 내부 고위 인사 여러 명의 비리가 사실로 밝혀지면서 나는 결국 사표를 써 대검찰청에 보내야 했지.”
 
  — 서울지검장으로서 수사를 잘 했는데, 왜 사표를 내요?
 
  “내 소신대로 밀어붙인 수사의 최종 책임자는 검사장인 송종의였기 때문이야. 류창종 부장이랑 홍준표 검사가 사표를 써 들고 왔기에, ‘너희는 사표를 낼 벼슬이 못 돼’라고 물리치고 내가 냈어요. 박종철(朴鍾喆) 검찰총장은 나의 구두 사의(辭意) 표명은 받았는데, 서울법대 동기생 김유후(金有厚) 서울고검장이 사표를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대검으로 보내질 않은 거야. 김 고검장이 떠나면서 아무 말 없이 웃으면서 사표를 돌려주더군. 결국 슬롯머신 사건으로 고검장급 검찰 선배 세 사람이 구속되거나 검찰을 떠났지. 대한민국 검찰 역사상 치욕스러운 사건이지만, 우리 때는 그렇게 검사들이 기개가 있었다고.”
 
  — 흔히 검찰의 속성을 ‘갈대’로 표현하곤 합니다. 국민들은 ‘검찰의 칼에 눈이 달렸다’고도 비판하고 있어요.
 
  “천만에. 내가 보면 요즘 나무랄 데 없이 잘하고 있어요. 윤석열 대통령 취임하고 나서 눈 똑바로 뜨고 수사하고 있어. 《조선일보》 기자가 검찰 잘한다고 칭찬 기사 쓰는 거 봤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정의가 살아 숨 쉬게 하는 일을 검사와 법관이 맡아서 하고 있는 거야. 다만 국민이 체감하지 못할 뿐이지.”
 
  — 검찰의 수사권이 대폭 경찰로 이관됐습니다. 검찰은 수사를 경찰이 담당하고 검사는 기소만 전담하는 현행 제도가 세계적 추세에 어긋난다고 주장합니다만.
 
  “서울지검 검사 시절인 1979년 4월 한 달간 대검 송무담당관 이명희(李明熙) 검사장을 모시고 이명재(李明載) 검사와 한 팀으로 선진국 형사사법제도를 시찰해 장문의 보고서를 만든 일이 있어. 그때 보고 들은 경험으로 보면, 지금 경찰의 수사권 독립은 잘못됐어요. 경찰에 수사권을 맡기면 결국 국민이 피해를 보는 거야. 수사는 법률적 지식과 올바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 하지 않으면 때로는 모자라고, 때로는 과하다는 국민의 비난이 쏟아질 거야.”
 
  —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정부 요직에 검찰 출신이 많이 눈에 띕니다.
 
  “윤 대통령도 주변을 더 살펴보는 노력은 해야겠지만, 윤 대통령의 입장에서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은 검사라는 거지. 그걸 반드시 숫자로만 따져 나쁘다고 할 일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각계에서 골고루 뽑는다고 국정(國政)이 잘되리란 보장이 어디 있어? 예컨대 김영수(金榮秀) 서울지검 공안2부장은 문화체육부 장관도 멋들어지게 잘했잖아.”
 
  — ‘검사 윤석열’을 어떻게 평가하세요.
 
  “검사가 처리한 사건은 역사가 평가해야지, 사람이 평가하면 못 써요.”
 
  ―사위 조성준(趙成埈) 교수는 판‧검사를 못하게 하셨다면서요?
 
  “딸을 시집보낼 나이가 됐는데, 불현듯 검사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 보니 검사라는 직업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을 거야. 딸아이가 데려온 신랑감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 행정 시험 다 합격했더군. 만약 판‧검사를 할 거라면 내 딸과 인연이 없다고 했지. 지금 사위는 미 시카고 켄트 법대 교수로 국제법과 외교 통상 관련 학문을 가르치고 있어. 다행스럽게도 사위가 교수하길 잘했다고 하더군. 얼마 전 서재를 정리하다 사위가 두고 간 영문판 《Free Markets and Social Regulation》이란 책을 발견했어. 사위가 부끄럽다며 슬며시 놓고 간 책인데, 책 서문 마지막 문장에 저세상 사람인 처남을 언급했어.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그 마음씨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사위도 검사의 길을 걷고 싶었을 텐데요.
 
  “그런 요직일수록 다 작두 위를 걷는 거야. 검사는 대부분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야. 그렇지 않으면 검사 노릇 못해. 국가와 국민에 대해 무한 충성을 요구하는 직업이야. 그래서 평검사도 고위공직자에 포함시키는 거야.”
 
  ―사위는 검사를 못하게 말리시고, 왜 장관님은 검사를 하셨나요?
 
  “불자(佛子)셨던 어머니는 ‘너는 검사를 하지 말라’고 하셨어. 우리 때는 검사가 판사보다 더 인기 있는 직업이었어. 성적도 괜찮은 데다, 평북 정주 출신의 큰처남 문상익(文相翼) 전 수원지검장, 그리고 둘째 처남 문상우(文相羽) 대검 사무국장이 약혼한 매부에게 검사하라고 그렇게 강권하더라고(웃음).”
 
 
  우여곡절 끝에 군법무관 합격
 
송 처장이 논산 양촌리 밭에서 “이만하면 인생 잘 산 거 아니냐”며 활짝 웃고 있다. 2016년 7월 5일 촬영. 사진=조선DB
  송종의 처장은 1941년 평안남도 중화군 신흥면에서 태어났다. 면장을 지낸 부친이 정미소와 양조장을 운영한 덕에 부유한 집의 막내아들로 자랐다. 하지만 해방 직후 북한 공산 정권에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일가가 몸만 빠져나와 38선을 넘었다. 아버지는 환갑을 넘겼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 한시에도 능하시고 법조계에서 ‘한학의 도사’로 유명하신데, 한문은 언제 배우신 겁니까.
 
  “나를 ‘한학의 도사’라 하는데, 사실과 달라. 《국어사전》까지 만드셨던 용산고 고문(古文) 담당 한영선 선생님이 한학(漢學)에 능통하셨어. 이분이 방과 후에 칠판에 써준 이태백(李太白)과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노트에 깨알처럼 받아써서 다 외웠어. 그때 외운 한시들이 지금도 머리에서 툭툭 튀어나와. 내가 쓴 시조는 200수 가까이 될 거야. 한자를 잘 안 덕분에 대구지검 초임 검사 시절엔 다른 검사실에서 차장검사가 내린 소위 ‘문어 다리’라고 하는 초서체의 부전지(附箋紙)를 내가 도맡아 해독해주곤 했지.”
 
  ―고교 시절 공부를 잘하셨군요.
 
  “공부 잘한단 소리를 듣긴 했지만, 공부 잘한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오? 원래 라디오 조립을 잘해 고등학교 때 라디오까지 제작해 팔아먹던 공과대 체질인데 고시 붙으려고 법대 간 거야. 내가 고시 합격해서 집안 일으키려고 말이지.”
 
  ―문재(文才)도 뛰어나신데, 작가가 될 생각은요.
 
  “작가 됐으면 굶어죽었지, 뭐. 내가 쓰는 글 읽을 사람이 누가 있겠나. 검사는 평생 글 쓰는 사람이니까 평소 쓰던 대로 그나마 책을 서너 권 쓴 거야.”
 
  송종의는 1966년 육군 법무장교로 근무했다. 선천적 고도근시라면 군대를 면제받을 수도 있는 사안인데, 군에 입대했을 뿐 아니라 베트남전 파병까지 자원했다.
 
  — 그렇게까지 기를 쓰고 군대에 갈 이유가 있었나요.
 
  “그때도 검사들은 동기생보다 임관이 3년 늦어지니까 군대에 안 가려고 난리였지. 그런데 난 등록금이 없어 3학년 휴학하고 논산훈련소엘 간 거야. 이 눈 갖고는 총을 쏠 수 없다고 대번에 신체검사 낙방이야. 어렸을 적부터 남아(男兒)로 태어나 군인이 될 수 없는 몸이라면 남자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군법무관에 다시 도전했지. 군의관에게 ‘법무관이 총 들고 싸우는 군인도 아닌데 고도근시가 무슨 문제냐’고 항의했더니 합격을 시켜줬어. 사법시험 합격생이 40명도 안 돼 법무관이 태부족이었던 시절이야.”
 
  — 베트남까지 가셨더군요.
 
  “친한 서울법대 동기 이원섭(李元燮), 송기방(宋基方) 두 사람이 비둘기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엘 간다는 거야. 강원도 화천 오음리에서 파월장병 특별훈련을 받고 베트남으로 향하는데, 청량리역에서 어머니가 ‘너는 불에 가도 안 죽고 물에 가도 안 죽는다’고 격려해주시더라고. 한데 육군본부 착오로 한국군 건설지원단인 비둘기부대가 아닌 전투부대인 맹호부대로 발령이 난 거야. 미 수송선 제너럴 블래치포드를 타고 퀴논항에서 내렸는데, 아오자이를 입은 월남 아가씨들이 꽃다발을 걸어주더라고. 파월수첩에 적혀 있는 월남 회화로 ‘자아옹 만죠이(아저씨, 안녕하세요)’라고 했더니 아가씨들이 깔깔대며 웃는데…. 어쨌든 채명신(蔡命新) 주월사령관을 찾아가 항의하니 1개월 만에 사이공 근처 비둘기부대로 옮겨주더군. 한데 후임 법무장교 심상명(沈相明) 중위(법무부 장관 역임)와 장수길(張秀吉, 김앤장 대표 변호사) 중위가 늦게 오는 바람에 1년 4개월이나 근무했어.”
 
  ―전투현장이라 탈영이나 총기 사고가 많았을 것 같아요.
 
  “군무이탈보다 교통사고가 더 많았어. 천천히 달리다 베트콩에게 스나이핑 당하기 때문에 빨리 달리다가 베트남 사람을 치어. 업무상 과실치사인데, 베트남 피해보상은 미군이 부담했어. 우리는 무죄를 선고할 수 없으니 재판에 넘기지 않고 기소유예로 용서해 버렸지. 최일영 비둘기부대장이 ‘사람 죽인 사람도 자꾸 용서해 주니 사고가 자주 난다’며 야단을 하더라고. 비둘기부대에 법무장교는 검찰관인 나 송종의, 법무사(판사)인 동기생 송기방 두 사람이었어. 한 방에 자면서 내가 ‘A사건을 기소할까 말까’하면, 송 법무사는 ‘집행유예로 하자’고 했어. 이게 바로 ‘베갯머리송사’지.”
 
  — 군에서 얻은 것이 있습니까.
 
  “내 인생에 엄청난 플러스가 됐지. 군 장교 노릇 3년을 했더니 사람 다루는 법을 알게 되더라고. 장교는 군대에서 사람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사병은 인내심을 기르는 거야. 검찰은 검사동일체의 원칙에 따라 군대보다도 더 엄격한 규율을 가진 조직이야. 이런 조직에서 생활하려면 군대 경험을 가진 사람이 훨씬 유리하지.”
 
 
  기부는 받지 않는다
 
  송종의 처장은 2014년 써니빌주식회사의 수익금 11억5000만원을 탈탈 털어 ‘천고법치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정의로운 사회와 법치주의 확립에 기여한 공직자에게 매년 천고법치문화상을 주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엄정한 재단 운영을 위해 김경한(金慶漢) 전 법무부 장관, 김동건(金東建) 전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 안병우(安炳禹) 전 국무조정실장, 송광수(宋光洙) 전 검찰총장 등 법조계 명망가들을 이사로 영입했다.
 
  — 돌아가신 이후에도 재단이 존속해야 하니까 재단 유지가 관건일 것 같은데요.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님들이 잘 이끌어갈 걸로 봐요. 현재까지 상근 직원 하나 없이 재단을 이끄는 게 쉬운 일이겠어? 매년 시상 비용이 1억원 가까이 들어가요. 수상자들에게 순금 30돈짜리 금메달과 현금 1000만원 이상의 포상금을 주고 있기 때문에. 써니빌 주식의 30%, 수익의 대부분이 재단으로 유입되도록 이미 조치를 취해놓았어. 내 개인 재산의 상당 부분도 재단으로 들어가도록 했고. 지난해에도 회사 수익금 14억원을 재단에 전입시켰지. 5억원 기금으로 시작한 재단의 순자산이 현재 44억원에 달해요.”
 
  — 왜 기부를 받지 않나요.
 
  “그럼 내 취지가 퇴색돼. 내가 변호사를 해서 상(賞)을 준다면 아마도 수상자들이 상을 받으려 하지 않을 거야. 기업에서 한두 푼 모은 돈으로 상을 주더라도 자존심 강한 법조인들이 그 상을 받겠나. ‘보험’으로 기부하려는 기업들도 있을 테고…. 명예로운 상이란 걸 지키기 위해 변호사로 번 돈도 아니고, 기업의 찬조도 아닌, 내가 농사지어 번 깨끗한 돈으로 상을 드리겠다는 거지.”
 

  — 법조인 중에서 존경할 만한 분을 꼽아주신다면.
 
  “법조인 집단은 우리 사회에서 괜찮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룹이야. 존경할 만한 분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한두 사람 언급하는 건 적절치 않아. 그래서 후세에 존경할 만한 법조인들을 우리 재단에서 미리 선정해 표창하는 거야. 정해창(丁海昌) 전 법무부 장관, 이시윤(李時潤) 전 감사원장, 정성진(鄭城鎭) 전 법무부 장관. 이상우(李相禹) 전 한림대 총장, 고(故) 윤성근(尹誠根)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권성(權誠) 전 헌법재판관, 신영무(辛永茂) 전 변협회장 등 개인적으로 상 받은 일곱 분이 존경할 만한 법조인이라고 생각해 우리 재단이 고른 거예요.”
 
  — 표창해야 할 사람은 많은데, 예산 문제로 더 상을 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하셨죠?
 
  “지금 법조계의 상은 저술상이나 논문상에 한정되고 있잖아. 지금처럼 어지러운 세상에 칼을 들고 법치주의 확립에 애쓰는 공직자들을 칭찬해주고 싶은 거야. 언론이 칭찬하지 않는 사람 중에서 음지에서 묵묵히 법치주의 확립을 위해 애쓰는 공직자를 표창하려는 거지. 단체도 시상했는데, 통합진보당의 위헌정당 결정을 이끌어낸 법무부 TF팀, 방위사업 비리를 밝혀낸 검찰 합동수사단과 감사원 특별감사단, 경찰청 생활안전국, 허익범(許益範) ‘드루킹댓글조작사건’ 특별검사팀 등 6곳을 지금까지 수상단체로 선정하기도 했어.”
 
 
  故 윤성근 판사
 
2022년 11월 9일 천고법치문화재단이 주최한 천고법치문화상 시상식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센터 서관 4층 아트홀에서 개최됐다. 천고법치문화상 제14호 수상자는 고(故) 윤성근 서울고법 부장판사, 제15호 수상자는 권성 전 헌법재판관, 제16호 수상자는 신영무 에스앤엘 파트너스 대표변호사다. 사진=천고법치문화재단
  특히 지난해 11월 9일 열린 천고법치문화상 시상식에선 14호 천고법치문화상을 사후에 받은 고 윤성근 부장판사(2022년 1월 11일 별세)에 관한 감동적 이야기가 나왔다. 2021년 11월 14일 윤 판사의 장남(윤진석) 결혼식에서 윤 부장의 극도로 쇠약해진 모습을 본 연수원 동기들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책 출간에 들어갔다. 강민구(姜玟求) 부장판사 등 사법연수원 14기 동기 187명은 힘을 합쳐 2021년 11월 17일 48시간 만에 전자책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법창에 비친 윤성근의 초상화》를 출간했다. 책 출간을 통해 윤 부장판사의 법치주의 정신을 알리고 치료비를 모으려던 목적이었다.
 
  종이책도 함께 발간했다.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은 천고법치문화재단에서 제작비 전액(1830여만 원)을 지원하고, 대한변호사협회 등의 도움으로 발간 2주 만인 2021년 12월 2일 1쇄 5000권 판매가 완료됐다. 윤 부장판사는 인세 중 2000만원을 각각 북한인권단체인 ‘사단법인 물망초(이사장 박선영)’와 자폐인들을 지원하는 ‘한국자폐인사랑협회(회장 김용직)’에 기부했다고 한다. 사단법인 물망초는 윤 판사의 기부금으로 탈북 학생 독후감 대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결국 송종의 처장의 제작 지원이 윤성근 판사의 역기부를 낳았고, 물망초는 탈북 학생을 지원할 수 있었다. 각박한 세상에 돈이 춤을 추면서 훈훈한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한 것이다.
 
  — 돈에 대한 철학은.
 
  “돈은 내 것이 아니란 것이야.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죽을 때 다시 돌려주고 떠나는 게 돈이잖아. 수의(壽衣)에 호주머니를 만들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야. 수의엔 호주머니가 없다!”
 
 
  ‘밤나무 검사’가 딸에게 쓴 회한의 편지
 
가한정 정자 옆에 ‘하지꽃’으로 불리는 능소화를 배경으로 송종의 처장과 부인 문정자 여사가 함께했다. 사진=조준우
  송종의 처장이 팔각정 정자 가한정(嘉閒亭) 현판에 적힌 자신의 한시를 기자에게 풀이했다. “가한정은 원래 근로자들의 휴식공간으로 쓰기 위해 2009년 지은 정자야. 현판의 ‘聆雲睎月(영운희월)’은 ‘귀 기울여 구름을 듣고, 달을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뜻이고, 주련의 글 ‘靈嶂掛雲說公案, 僊峰懸月示妙義(영장괘운설공안, 선봉현월시묘의)’는 ‘신령스러운 산줄기에 걸린 구름이 공안을 설하고, 무선봉(舞仙峰)에 걸린 달이 묘한 뜻을 보여준다’는 의미지. 공안(公案)은 원래부터 부처인 자기 자신의 본래 면목을 보기 위한 화두라는 뜻이니, 이 선문답을 깨치면 부처가 되는 것이야.”
 
  — 가한정 옆의 능소화가 아름답네요. 정자 기둥을 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데요?
 
  “원래 능소화는 하늘(宵)을 업신여긴다(凌)는 뜻의 꽃이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하지(夏至) 꽃이지. 옛날엔 능소화를 양반댁 마당에만 심을 수 있다 해서 ‘양반꽃’이라 불렀대요. 이렇게 귀한 능소화가 꽃가루에 독성이 있다고 잘못 알려져 우리 집에서 온갖 푸대접을 받은 거야. 눈이 나쁜 내가 오해해서 싹이 나오는 족족 20년간 줄기를 잘라버렸어. 일반 꽃가루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고 2년 전부터 자라도록 놔뒀지. 그랬더니 저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운 거야. 그릇된 정보가 사람의 판단에 미치는 폐해는 꽃가루가 사람에게 끼치는 해독에 비할 수 없어. 꽃은 사람보다 오래 사니까 억울함을 풀었지만, 사람은 한순간 잘못된 비방과 중상으로 치명상을 입는다는 교훈을 얻었어.”
 
  송종의 처장은 2009년 《밤나무 검사가 딸에게 쓴 인생연가》라는 책을 냈다. 출가해서 미국에 살고 있는 외동딸 미현에게 보내는 22만3000자 분량의 편지와 자작 시조, 한시 등을 모은 것이다. “우리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처럼 다정하게 놀아주지 않는 거야”라며 엄마를 보채며 울었던 어린 딸의 상처를 뒤늦게나마 어루만져 주려고 송 처장은 20일 동안 909페이지(A4 용지 309쪽) 분량의 글을 단숨에 썼다고 한다.
 
  본문을 보면 “그때는 미현이 울었고, 지금은 백발노인이 된 아빠가 울면서 이 글을 쓴다”는 내용이 나온다. 송 처장은 “사위(조성준)와 미현에게 이 글을 보냈더니, 사돈이 미국 아들 집에 갔다가 발견해 읽어보더니 출판으로 연결됐다”고 했다.
 
  2021년 10월 펴낸 《밤나무 검사의 음악편지》는 송 처장의 손녀 사랑으로 탄생한 책이다. 이 책은 송 처장이 15년 전 2개월에 걸쳐 미국에 사는 세 손녀에게 음악 교양과 인문 교양 지식을 명곡 클래식 250곡에다 해설을 붙여 육필 원고로 만들어 미국에 보낸 편지다. 이 편지들을 엮은 것이 이 전자책이다.
 
  우연히 원고를 발견한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이 편지들을 전자책으로 엮어내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했다. 강 판사는 송 처장의 허락을 받아 검색엔진의 도움을 받아 각 곡마다 대표적인 유튜브 음원을 골라 인터넷 주소 URL과 QR코드를 삽입해 전자책으로 완성했다. 실제로 기자가 휴대전화로 QR코드를 찍어보니, 해당 유튜브 URL로 이동해 안데리아 보첼리가 이집트 라다메스 장군으로 부르는 베르디의 ‘청아한 아이다(Celeste Aida)’가 재생된다. 송 처장은 “손녀들에 대한 애정이 서린 글귀를 출판사를 통해 상업적인 유가지로 제작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강남의 음악 학원 몇 곳에서 교재로 채택된 것만으로도 큰 보람”이라고 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한정 정자에서 송종의 처장의 선문답(禪問答)을 듣다 보니 어느덧 오후 3시가 가까웠다. 기자가 “국방대 수영 못 가셔서 어쩌냐”고 하자, “오 기자 덕분에 하루 쉬는 거다”고 했다. 이곳을 찾아오는 귀빈들에게 선물한다는 써니빌 특제 ‘유기농 딸기잼’을 받아 들고 기자는 공장문을 나서 서둘러 양촌IC로 향했다. 양촌리의 한낮 햇볕은 이름처럼 따가웠다. 그래서 송 처장님 써니빌의 수박 주스가 그렇게 달고 시원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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