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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帝國 문명사 공부하는 김장실 한국관광공사 사장

“드라마 같은 生의 연대기, 계속 진행 中”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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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관광객 1000만 명 유치… 2027년 3000만 명, 300억 달러 관광수입 목표”
⊙ 소 꼴 먹이러 가거나 풀을 벨 때 혼자 트로트 흥얼… 美 카네기홀에서 공연
⊙ “누나 둘은 굶어 죽었고, 큰누님하고 둘째형님은 초등학교도 못 나와…”
⊙ 하와이대 대학원에서 한국 민주화 과정 연구로 3년 만에 박사 학위… 《월간조선》 1993년 1월호에 소개
⊙ 예술의전당 사장 시절, 각종 현안 모두 해결… “삶에서 가장 머무르고 싶은 순간”

金長實
1956년생, 영남대 법대,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하와이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문화관광부 공보관,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 대통령 정치특보 보좌관, 문화관광부 예술국장·종무실장·제1차관, 예술의전당 사장, 19대 국회의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민통합초청위원장 역임 / 홍조근정훈장, 내무부장관상, 의정대상 수상
김장실 한국관광공사 사장. 몇해 전 인천세계휠체어농구선수권 대회 조직위원장 시절의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김장실(金長實)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게 만드는 인물이다. 알면 알수록 그의 심장 속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을 기어코 무장해체시키는 그의 흥(興)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뜨거움이 담겨 있었다.
 
  관광공사 본사는 강원도 원주에 있다. 지난 4월부터 6월 사이 서울센터를 찾을 때마다 기자와 만남이 이어졌다.
 
  인터뷰 녹취록을 풀어놓으니 A4 용지로 44장이나 되었다. 어림잡아 단편소설 분량이다. 은모래 백사장(경남 남해군 상주면 금전리)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관광공사 사장에 이른 지금까지 생(生)의 두꺼운 연대기였다. 결혼과 자녀 이야기를 빼고는 다 들었던 것 같은데, 아쉽지만 지면에 모두 담기 어려웠다.
 
 
  문명사를 공부하다!
 
김장실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1월 17일 서울 중구 웨스턴조선 호텔에서 열린 ‘2023년 한국관광공사 사업계획 설명회’에서 K-관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남녘 바닷가 출신의 문화행정가(문화체육관광부 1차관, 예술의전당 사장 역임)이자 정치인(19대 국회의원)인 그는 2015년 11월 ‘꿈의 무대’라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트로트를 부른 실력파 가수이자 대중음악 평론가이기도 하다. ‘가요로 쓴 한국현대사’란 부제를 단 《트롯의 부활》(2021)을 펴낸 일도 있다.
 
  지난 10년간 문명사(文明史) 공부에 빠져 로마·몽골 같은 거대 제국(帝國)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연구했는데 관련 원서를 170여 권이나 읽었다고 한다.
 
  먼저 우리가 만나 처음 나눈 대화 주제 역시 책에 관한 것들이었다.
 
  “멜빈 레플러라는 분의 책인데 1920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의 외교 정책이 국가 안보 정책으로 어떻게 진화(進化)했는지를 설명하는데모크라틱 캐피털리즘(Democratic Capitalism)이라고…. ‘민주적 자본주의’로 해석해야 하나?…”라고 혼잣말하듯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책 제목을 확인하니 《세이프가딩 데모크라틱 캐피털리즘(Safeguarding Democratic Capitalism)》이었다.)
 
  “라이너 지텔만이 쓴 《인 디펜스 오브 캐피털리즘(In Defence of Capitalism)》도 보고 있어요. 흔히 자본주의는 굶주림과 빈곤, 불평등을 조장하면서 이윤, 지배적 독점을 우선시한다는 시각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공격들의 결함(缺陷)을 들여다보는 내용이죠.”
 
  관광공사 CEO의 독서치고는 너무 뜨거웠다.
 
  ― 경제학 책인가요? 사회학 책인가요.
 
  “정치경제학 책입니다. 제 전공이 정치학이니까. 조심스러운 얘긴데 문명사 공부한다고 지난 10년간 집중적으로 책을 탐독하니 딱 세 가지가 잡히더라고요. 하나는, 단기적으로 최고 지도자와 그 지도층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실력과 인품이 훌륭한 사람들이 동시대에 많이 쏟아져 나오면 나라가 확~ 불길처럼 일어납니다.”
 
 
  “사회 지속되려면 관용 중요”
 
  ― 그런 지도자가 세월이 흘러 권좌에서 물러나면요?
 
  “세월 앞에 장사가 있나요? 그럼에도 재임 시절 깔아놓은 법과 제도로 그럭저럭 굴러가는데 ‘중간치기’ 지도자가 후임으로 와도 레일을 따라 졸졸졸 가기만 하면 제국이 그런대로 유지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것도 오래가면 역시 낡게 됩니다. 결국 시대에 안 맞는 옷(법과 제도)을 걸치면 문제가 터지죠. 그럴 때 새롭게 쇄신(刷新)하는 문화가 있는가? 구성원 간에 서로 신뢰(信賴)하는 사회가 형성되어 있는가? 고(高)신뢰 사회면 유지비용이 적게 드는데, 저(低)신뢰 사회면 비용이 많이 들어요.”
 

  ― 방폐장(放廢場)이나 쓰레기매립장, 터널공사 같은 문제를 두고 공공갈등이 첨예해지면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겠죠.
 
  “갈등 처리가 안 돼 내부에 망조(亡兆)가 들면 밖에서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무너지는 거지. 사회가 지속되려면 신뢰가 중요한데, 여기서 관용(寬容)이 중요해요.”
 
  ― 사회가 발전하려면 다른 생각이래도 서로 품어줘야겠지요?
 
  “로마 제국이 아주 훌륭한 모델이지요. 칭기즈 칸 모델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착같이 달려드는 놈은 사정없이 채찍을 가하되 고개를 숙이면 품어줍니다.
 
  훗날 제가 공직에서 완전히 해방되면, 그때까지 시력이 허락하면 3부작으로 책을 써볼까 합니다.”
 
 
  ‘저 자식은 맨날 노래나 부르고 돌아댕기네’ 할까 봐…
 
  ― 일전에 《트롯의 부활》(2021)을 쓴 뒤에 ‘한국 대중가요로 본 정치사회학’이란 관점에서 다시 책을 쓰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지 않았나요?
 
  “한국 가요 100년사에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가요가 나왔잖아요. 그 많은 노래 중에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18곡을 분석한 책이 《트롯의 부활》입니다. 마무리하기 아쉬워 새로운 관점에서 도전하려고 했지요.
 
  지난 100년간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부침(浮沈) 속에 온갖 신산(辛酸)과 영예를 겪은 우리 민족의 삶이 다 노래와 연관이 돼 있어요. 조갑제TV에 나가 노래 부르고 해설한 게 책 한 권 분량은 되지만 ‘저 자식은 맨날 노래나 부르고 돌아댕기네’ 하는 이미지가 굳어질까 봐….”
 
  그러더니 이런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보탰다.
 
  “옛 히트곡들을 쭉 살펴봤더니 영화 주제가가 히트한 경우가 많더군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부터 엊그제 돌아가신 현미의 ‘떠날 때는 말 없이’, 최희준의 ‘하숙생’ ‘팔도강산’, 정훈희의 ‘안개’까지 다 영화 주제가입니다.
 
  그래서 영화 주제곡만 쫙 뽑아다가 책 한 권을 내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 재밌을 것 같은데 살짝 맛만 보여주십시오.
 
  “그럴까요? 최희준의 ‘하숙생’을 작사한 김석야(金石野·1929~2000년)는 충남 천안 출신인데 공주사대(현 공주대)를 나왔습니다. 방송작가 시절, 비구니 스님들이 주로 계신 계룡산 동학사엘 갔더니 쓰레기를 버리는 곁에 긴 머리카락이 수북이 버려져 있더랍니다. 출가하며 삭발한 것이죠. 그걸 보고 ‘애달픈 사연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인생이라는 게 많은 걸 움켜쥐고 가고 싶어도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라는 느낌으로 ‘하숙생’ 가사를 썼어요. 우리나라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철학적인 히트곡입니다.”
 
  김 사장은 마이크를 쥐고 노래하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흥이 있으리라 속으로 생각했다. 계속된 그의 이야기다.
 
  “영화 ‘하숙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영화 속 강민구(신성일 분)는 화학(化學)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유망한 인재입니다. 아코디언도 곧잘 연주하고 작곡 솜씨도 있어요. 일요일에도 출근해 화학실험을 하는데 사귀던 황재숙(김지미)이 따라왔어요.
 
  황재숙이 심심하니까 이것저것 만지다가 그만 폭발이 일어났어요. 그때 강민구가 순간적으로 자기 옷을 벗어 황재숙을 씌워 화를 면하지만 자기 얼굴은 흉하게 됐어요.”
 
 
  “이런 에피소드 엮으면 (책이) 좀 재밌겠지예?”
 
  ― 저런, 화상을 입었군요.
 
  “수술을 몇 번 해도 원래 얼굴이 안 나타나니까, 황재숙이 돈 많은 남자 우 사장(최남현 분)한테 시집을 가버렸어. 강민구가 분통이 터집니다. 황재숙이 어디 사나 알아보고 그 옆집에 하숙을 구하죠. 그러곤 서로가 좋았을 때 불렀던 ‘하숙생’을 마구 부릅니다.
 
  여자는 그 노랠 듣고 가책이 생겨 결국 미쳐버려요. 강민구를 다시 찾아가 ‘저를 받아주십시오’라고 해도 남자는 그들 사랑의 징표였던 목걸이를 두고 홀연히 떠나는 게 영화 <하숙생>입니다.”
 
  정진우 감독의 1966년작인 이 영화는 73만9420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뜻밖에도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였다. 김지미는 1970년 자카르타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제27회 베니스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면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어요. 격렬한 계층 상승과 하강 이동이 있던 시절이 1960~70년대입니다. 이촌향도(離村向都)로 지역 간 이동도 심했죠. 영화 스토리 역시 계층 갈등의 하나라 볼 수 있어요. 연인관계가 그렇게 파탄이 난 데는 황금만능주의 때문에 그리된 겁니다.”
 
  기자가 아주 흥미 있어 하자 김 사장은 ‘보너스’로 영화 <꿈은 사라지고> 이야기를 보탰다.
 
  “1957년 지금의 KBS 전신인 HLKA에서 멜로드라마 <꿈은 사라지고>를 송출했는데 큰 인기를 끌었어요. 김석야가 만든 작품이죠. 노필(盧泌·1927~1966년)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문정숙이라는 가수 겸 영화배우가 나와요.
 
  어떤 내용이냐면, 권투선수 유망주인 제대군인(최무룡 분)이 몹시 인물이 좋은 여자(문정숙 분)를 사귀었어요. 이 아가씨를 위해 열심히 훈련하겠다고 다짐하는데 누가 곁에서 ‘저 여자 카페여급’이라고 하니 그만 목표가 상실돼 권투고 뭐고 아무것도 안 합니다. 권투 코치가 겨우 설득해 다시 시작하려는데, 여자는 남자를 위해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남녀 주인공이 최무룡·문정숙인데 둘 다 주제가를 불렀어요. 최무룡의 ‘꿈은 사라지고’,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남녀 주인공이 불러 히트한 곡입니다.
 
  최무룡은 이 노래 외에도 ‘외나무다리’, 문정숙은 ‘그대만 있으면’ 등을 불렀죠. 이런 에피소드를 엮으면 (책이) 좀 재밌겠지예?”
 
  ― 아주 흥미로운데요? 그런데 책에서 사진을 다 빼버리면 어떨까요? 텍스트로만 벽돌 크기 두께로 책을 만드는 겁니다.
 
  “사진을 싹 다 빼고? 정통 학술서 같은 느낌으로?”
 
  우리는 벌써 출판 계약을 맺은 것처럼 이야기하다 한참을 웃었다.
 
 
  백사장 해조음(海潮音) 들으며 부르던 유행가
 
김장실 사장이 국회의원 시절인 2015년 11월 3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모습이다. ‘동백아가씨’ ‘이별의 부산정거장’ ‘비 내리는 호남선’ 등 8곡을 부르며 노래에 담긴 시대상을 설명했다.
  김장실 사장은 “온종일 노래해도 목이 쉬지 않았던” 할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4남 1녀 형제 모두 노래를 곧잘 했다고 한다. 여름날, 반달처럼 휘어진 백사장에서 해조음(海潮音) 소리를 들으며 형제들은 초저녁부터 돌아가면서 목청을 높였다.
 
  소년 김장실은 고향인 경남 남해군 상주면 금전리의 은모래해수욕장을 드나드는 연락선이 오가며 들려주는 노래를 듣고 뜻도 모른 채 따라 부르며 유행가를 배웠다.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는 것 외에 즐길 만한 오락이 별로 없었던 시절이라 학교 가기 전이나 다녀온 이후 시간만 나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유행가를 듣는 것은 물론 아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며 익혔지요.
 
  그 시절 특별한 계기만 주어지면 몇몇 마을 단위로 열린 노래경연대회(소위 콩쿠르)의 맨 앞자리에 앉아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참가자들의 노래와 가수로 대접받던 찬조 출연자들의 노래를 나직이 따라 불렀습니다.
 
  소 꼴 먹이러 가거나 풀을 벨 때 혹은 나무하러 갈 때 혼자 흥얼거렸죠.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 동리(洞里) 인근으로 가을 소풍을 갔는데, 이미자의 ‘정동대감’을 불러 만장의 박수를 받았고, 이후 별명이 ‘정동대감’으로 불렸던 황홀한 경험이 있습니다.”
 
  ‘정동대감’의 노랫말이 궁금해 찾아보았다.
 
  ‘영을 넘고 강을 건너 남도천리를/ 헤어져 그린 그 님 찾아가는데/ 철없이 따라오는 어린 손이 차갑고나// 자장자장 잘 자거라 아가야 잠들어라// 이슬 내려 젖은 길이 멀기만 하다.’
 
  초등학생이 비련(悲戀)의 엘레지를 어찌 알았을까.
 
 
  “국장이 될 때까지는 족탈불급(足脫不及)으로 빨랐고…”
 
1980년 여름 경남도청 앞에서 행시 동기생들과 함께. 맨 오른쪽이 김장실 수습행정사무관.
  ― 고시공부할 때 더러 몇 시간씩 가요를 불렀다던데.
 
  “경주 백률사에서 공부할 때인데 그 절은 이차돈이 법흥왕에게 ‘내 목을 쳐서 흰 피가 나오면 불교를 국교(國敎)로 선포하이소’ 해가지고 흰 피가 나오면서 그 목이 떨어진 곳에 세웠습니다. 폼만 잡았지 공부가 잘 안 되더라고요, 솔직히…. 그러면 절에서 노래 부르기가 머시기(무엇)하니까 절에서 좀 떨어진 데로 가서 부르곤 했죠.
 
  남해 용문사라는 절에서도 공부했는데 거기서도 공부가 잘 안 되면 정말이지 2~3시간씩 노래를 불렀어요. 한참 부르고 나면 좀 지칩니다.”
 
  ― 힘이 빠져야 공부가 잘되는 법이죠.
 
  “노래 부르고 절에 돌아가 밥 먹고 한숨 잤다가 일어나 다시 공부했지요. 노래를 통해 이런저런 생각을 다 없애버리고, 그러다 보면 공부할 생각도 생기고 그랬습니다.”
 
  김장실 사장은 1979년 행정고시 23회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당시 지원자가 사상 최초로 1만 명을 돌파, 평균 41대 1이란 경쟁률을 기록한 시험이었다. 영남대 법대 4학년 때 행시 1차에 합격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 1학년 때 2차와 3차에 내리 합격했다.
 
  ― 그해 수석 합격자가 고승덕 변호사더군요. 저도 그분을 10여 년 전 ‘공부’와 관련해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대단한 분이죠. 서울법대 2학년 때 최연소 사법고시 합격, 3학년 때 외무고시 차석 합격, 4학년 때 행시 수석, 다시 있을 수 없는 기록입니다.”
 
  ― 그런데 인생은… 인생은 모르는 것이죠.
 
  “시험의 왕이라고 봐야죠. 그분도 그렇지만 저도 공부하느라 엉덩이 오른편이 하도 짓물러서 지금도 그 부위를 만지면 아픕니다.”
 
  김 사장은 손을 바지 안에 쑥 집어넣어 엉덩이 안쪽 부위를 만지기 시작했다.
 
  “약을 발라도 바를 때는 낫다가 완전히 낫지는 않고, 그 상태로 아직 있습니다. 손으로 (부위를) 누르면 지금도 아픕니다.”
 
  기자는 김 사장이 손으로 엉덩이의 아픈 부위를 더듬는 모습이 그저 안쓰러워 보였다.
 
  ― 하루 얼마나 공부했나요.
 
  “많이 할 때는 12시간, 평균 잡아 10시간 이상 하기 힘듭니다.”
 
  ― 고시 동기 중에 승진은 어땠습니까.
 
  “제가 문화부 국장이 될 때까지는 족탈불급(足脫不及)으로 빨랐고 2008년 문화부 차관이 될 때까지 상당히 빠른 편이었어요. 물론 고시 동기 중에 장관도 나왔지요. 기억나는 대로 읊어볼게요. 김석동, 노대래, 유정복, 조명균…, 7~8명 정도가 장관이 되었고 국회의원도 10여 명은 됩니다.”
 
 
  학창 시절 이야기
 
  우리는 추억을 질겅질겅 씹으며 악관절 운동을 하듯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 가까운 부산 출신 기자에게 들었는데, 학창 시절 고학을 했는데 대학에 입학하면서 안정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아버지(金龍祥·1895~1975년)가 4대 독자셨는데 열두 살 때 조부모가 다 돌아가셨어요. 집안에 아버지를 끌어줄 사람이 조금도 없으니까 노름꾼이 달라붙고, 술꾼이 달라붙었어요. 남해같이 논이 귀한 곳에 스물여덟 마지기면 거부(巨富)거든요.
 
  결국 스무 살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떠나 고베하고 오사카에서 20년 넘게 사셨는데 사진만 보고 어머니(文西分·1915~1985년)가 결혼해가지고…. 어머니 말로는 ‘젊은 남자 사진이 와서 혹한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괜찮겠다 싶어 일본에 갔더니, 시모노세키항에 나이 든 남자가 나와 엄청 실망했다’고….
 
  하여튼 아버지는 늦장가를 드셨는데 술을 잘 드시니까, 돈을 못 모아서 해방 후 남해에 정착했어요. 누나 둘은 굶어 죽었고예. 큰누님하고 둘째형님은 초등학교도 못 나왔고, 큰형님은 장남이라 초등학교를 보냈어요.”
 
  김 사장이 “아버지가 나이 예순에 절 낳으셨다”고 말할 때 얼마나 부모 사랑이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배가 고파 늘 먹을 것을 찾아다니던 시절인데 이상하게도 공부를 하고 싶더라고요. 중학교에 갈 형편이 안 됐는데 하도 울며불며 매달리니까 고등학교에 안 간다는 서약을 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중3 여름이 되니까 마음에 바람이 들어 (학교에) 보내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싹싹싹 빌면서 6개월 이상 투쟁을 했죠. 결국 시험만 한 번 쳐본다는 조건으로 응시할 수 있었어요. 외사촌형이 공립학교인 경남공고를 나와 조폐공사에 취직해 돈을 잘 번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그 학교에 원서를 냈죠.”
 
  ― 시험만 쳐본다고 했는데 결국 허락을 받았군요.
 
  “돌아가신 큰형님이 ‘집안 사정상 이사도 해야 하고, 작은형님 결혼식도 올려야 하니 (고교 진학은) 안 된다’고 그랬는데 하도 조르니까 ‘시험이나 한 번 쳐보라’고 한 겁니다. 그날 저녁 큰형님이 술 먹고 들어와 ‘이노무(놈의) 새끼, 집안 사정을 알면서 기어코 시험을 보려 한다’면서 교과서 4권을 완전히 찢고, 2권은 반쯤 찢었어요. 둘째형님이 ‘보내주기로 했으면 그냥 시험이나 치라 하지, 뭐 한다고 그러냐’며 두 형이 몇 시간 동안 말다툼을 했죠.
 
  시험 치러 부산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둘째형님이 20리 길을 따라오며 울던 생각이 나네요. 그때 그런 결심을 했어요. ‘시험에서 떨어지면 죽어버릴란다’ 하고…. 그 후로 ‘그때 가졌던 각오로 임하면 뭘 못 하겠나’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영양결핍으로 온 얼굴이 꺼멓게 되더니…”
 
  ― 고교 시절은 어땠습니까.
 
  “영양결핍으로 온 얼굴이 꺼멓게 되더니 고3이 되니까 책상에 앉아 있을 수가 없더군요. 한번은 어머니가 오셨는데 저를 데리고 병원엔 못 가고 약국에 데려가니, 약사 말이 ‘간염인데 이대로 놔두면 죽는다’고 하더군요. 그날 저녁, 부산 충무동에서 남해로 가는 밤배를 기다리던 어머니가 엄청 우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고교를 졸업하고 영남대 고시반에 들어가 밥 세끼 먹으며 규칙적으로 운동하니까 얼굴에 가득했던 검은 테가 벗겨지더라고요.”
 
  ― 좌우명이 뭔가요.
 
  “성실입니다. 성실에는 단순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걸 넘어 남과의 작은 약속도 진지하게 대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진실되게 살고 성실하게 일하며 남에게 베풀면 내가 안 좋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 생깁니다. 실제로 곱이곱이 어려울 때 이 사람 나타나고 저 사람 나타나서 지금까지 왔어요.”
 
  ― 성실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을 용납 못 하던데 게으른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버드대학의 사회생태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성실의 대명사인 개미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생태를 관찰하니 개미가 성실한 줄만 알았는데 한 40%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냥 왔다 갔다 하더랍니다. ‘이것 봐라’ 해가지고 노는 개미만 핀셋으로 싹 제거를 해버렸더니, 성실한 개미 중에 다시 40% 정도는 게으름을 피우면서 왔다 갔다 하더랍니다.
 
  원래 동물이라는 게 100% 진실되고, 100% 착하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실한 사람이 있으면 게으름 피우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때’라는 게 있는데 때가 안 닥치면 본인이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고, 열심히 해도 잘 안 되고, 그러면 개판을 칠 때도 있어서 약간 너그러움 같은 게 생겨요.”
 
  ― 때를 못 잡아 방황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 누가 손을 딱 잡아주면 좋을 텐데, 평생 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지요?
 
  “그러니까요. 하하하. ‘득도다조(得道多助)’라고 평소 베풀다 보면 엉뚱하게 내가 도움을 주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도와주기도 하고, 세상살이가 그렇더라고요.”
 
 
  청와대 司正·정무라인에서 일하던 엄숙하고 바쁜 나날
 
  우리는 다시 그의 공직 생활을 좀 더 살펴보았다.
 
  그의 공직은 1979년 말 행시에 합격한 뒤 대전의 중앙공무원연수원, 경남도청, 남해군청 순으로 이어졌다. 1981년 본격적으로 문화예술 행정을 담당하는 문화공보부로 발령을 받았으나 개인적인 취미와 상관없는 공보 분야에 배치되었다.
 
  “문공부에 있을 때 주로 중장기 홍보를 담당했는데 그때 글을 많이 썼어요. 당시 대통령이 국정과제를 국회에서 제시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지침이 안 내려오더라고요. 하숙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국정과제의 개념과 역사적 배경, 현재의 위상, 어디로 갈 것인지 등의 국정방향, 여기다 홍보 방안을 타자기로 쳤더니 A4용지로 27장이나 돼요. 그걸 국정홍보 자료로 활용했지요.
 
  글 잘 쓴다는 소문이 나니까 당시 경제기획원에 경제교육홍보국이 생겼는데 국민을 상대로 한 경제 홍보 슬라이드를 만들라고 해서 제가 다 원고를 써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와대 사정비서관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뒷조사가 시작된 모양이구나 싶었어요.”
 
  ― 그때가 언제였나요.
 
  “1984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세종문화회관 근처서 만났는데 ‘당신 뒷조사를 해보니 해외유학 가도록 되어 있던데 유학 가는 것 치워버리고 청와대로 들어와라. 승진시켜주겠다’고 하더군요. 친가 쪽은 일자무식이라 상의할 데가 없고 해서 장인어른과 상의하니 ‘유학은 나중에 가도 되지만 청와대 근무는 굉장한 영광인데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선택했어요.”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청와대 사정(司正)비서실과 정무비서실에서의 생활은 당시의 사회분위기만큼이나 무척 엄숙했고 바쁜 나날이었다.
 

  ― 당시 사정의 전체적인 틀은 어땠나요.
 
  “부패를 예방하려면, 급하게 부패를 도려내는 단기적인 처방, 법과 제도를 고쳐 시스템을 튼튼하게 뒷받침해서 부패가 점점 감소하게 만드는 중기적인 처방,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부패를 쇄신하고 방지하는 ‘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 3가지 틀로 사정 자료를 만들었어요.”
 
  김 사장은 5공 시절, 이양우·김종건 사정수석의 보좌관을 맡아 사정 실무에 깊이 관여했는데,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노태우 정권 중반까지 청와대에서 근무를 계속하다가 서른다섯 살이 되니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화여대 진덕규 교수님이 제 평생의 멘토이신데, 그분이 ‘하와이대 정치학과 출신들이 쟁쟁하다’고 권했어요.”
 
 
  3년 만에 정치학 박사 학위 따내
 
  김 사장은 문화부 서기관 신분으로 1989년 8월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 과정을 밟게 되었다. 놀랍게도 3년 만인 1992년 <한국의 민주화 1985~1988: 절충주의적 접근>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88년 청와대에서 일할 당시 민주화운동이 큰 고비를 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국의 민주화를 이론적 틀로 들여다본 것이었다.
 
  “권위주의체제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남미(南美)나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나라들은 소위 민주투사들이 권력을 장악해 급격한 체제 변동을 겪습니다. 그러나 불안 요소가 많기에 역사의 반동(反動)으로 체제가 오래 이어지지 못했어요. 체제 불안정성이 아주 강해지는 특징이 있는데 한국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런 점은 없었습니다.
 
  왜 그랬냐? 산업화를 일군 권위주의체제와 민주화 세력이 직선제 타협을 이뤄냈거든요.”
 
  ― 1987년 6·29선언 말이군요.
 
  “직선제를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아보자고 서로 합의했지만 어쨌든 권위주의체제든, 민주화 세력이든 양쪽 다 만족할 수 없는 타협이었어요. 그럼에도 ‘1노 3김’이 경쟁해 군 출신 정치인이 당선됐어요. 민주화 요구가 봇물처럼 터진 상황이었으나 안정을 희구하던 중산층이 급격한 체제 변화보다 제도화된 틀 속에서 민주화가 진행되도록 노태우를 지지한 것이죠. 이것이 한국적 민주화의 특징입니다.
 
  이후 민주투사였던 김영삼(YS)이 3당 합당을 통해 권위주의 정당과 정권을 인수합니다. 또 한번 급격한 체제 변화 없이 문민정권으로 충격을 완화시킨 것이죠. 대신 YS는 권위주의 군사정부의 적폐들을 과감하게 개혁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고 기가 막힌 게, 이번에는 김대중(DJ)이라는 야권 투사가 김종필(JP)이라는 권위주의체제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이와 연합해 DJP 정권을 창출합니다. 국민이 DJ에게 느끼는 급진적이라는 불안함을 JP를 통해 완화시켰던 겁니다. 노무현 역시 정몽준이라는 재벌 출신과, 물론 막판에 단일화가 깨지긴 했지만, 새로운 정권을 출범시키려 손을 잡았지요.
 
  자, 이런 걸 보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각 정치 세력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자제하면서 민주화의 길을 만들어 왔어요. 다른 권위주의 국가가 민주화 과정에서 진폭이 커서 사회적 혼란을 겪은 데 비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양보와 타협의 과정을 거치며 (진폭이) 덜하다….”
 
  ― 논문에 보면, ‘민주화가 자유화→민주화→공고화라는 세 단계를 밟게 되는데 한국은 현재 민주화 단계에서 민주주의라는 틀이 정책으로 공고화되는 단계에 진입했다’고 적고 있더군요. 논문을 쓴 지 꼭 30년인데 민주화 단계를 어떻게 평가하나요.
 
  “물론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대체로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소위 민주주의 위기론이 많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죠.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낙선하고 나서 곧바로 패배를 수용하지 않고 미 의사당을 공격했고, 현재 수사를 받고 있어요.
 
  더군다나 소셜미디어 정치로 인해 진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 탈(脫)진실 문제가 불거지고 있어요. 그럼에도 민주화가 공고화되고 있고, 제대로 가고 있다고 보입니다.”
 
 
  “《월간조선》에 박사 학위 논문 실려”
 
《월간조선》 1993년 1월호에 게재된 ‘김장실 문화부 서기관’의 하와이대 박사 학위 논문 기사.
  ―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나요.
 
  “민주적 시스템이 확실해지고, 거기다가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문화’가 확실해져야 합니다. 양보, 타협, 관용 그다음에 깨어 있는 시민의식…. ‘굿 시티즌’, 소위 시민사회를 구상하는 사람들이 건전하게 균형을 잘 잡아줘야 합니다.… 혹시, 아세요? 제 박사 학위 논문이 《월간조선》 1993년 1월호에 게재된 것을?”
 
  ― 네?
 
  “제가 조갑제 대표와 1981년 잡지 《마당》 편집장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어요. 그분이 1945년생이니까 30대 중반이었을 겁니다. 나중 조 대표가 조영래 변호사를 소개해줘서 ‘쓰리’가 노래 부르러 많이 다녔어요.
 
  그런 인연 덕에 조 대표가 당시 《월간조선》 초년병 강인선(현 대통령실 해외홍보비서관) 기자를 시켜 논문을 소개한 겁니다.”
 
  김 사장은 귀국 후 문화체육부로 돌아갔다가 1994년 1월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면서 청와대 정무비서실로 옮기게 됐다. 그러고 얼마 후 김광일·김용태대통령 비서실장을 보좌하게 되었다. “이 눈치 없는 놈이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대통령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김광일 비서실장이 출근하기 전에 밤사이 올라온 각종 정보보고를 손으로 요약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출근한 김 실장이 대통령을 만나러 올라갑니다. 어떤 때는 1시간, 어떤 때는 30분 후에 내려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했죠.
 
  주요한 사건들이 생기면,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를 찾아 1시간가량 김 실장과 만나게 주선하는 것도 제 역할이었죠. 김 실장이 저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예술의전당 사장 시절
 
  행시 23회 동기 중에 가장 선두권이었으나 정권이 교체되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되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세기말 변화와 함께 인연이 바뀌면서 본격적인 고난이 닥쳤다”.
 
  그 무렵,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국장 혜조 스님이 건네준 《법화경(法華經)》을 매일 베껴 썼다.
 
  “사경(寫經)한 지가 20여 년이 되어가는데 날마다 밥을 먹듯 하루도 빠짐없이 사경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서 유형 무형의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제게 생겼지요. 어려움이 몰려와 몹시 세파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고 다른 한편으론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들뜨지 않도록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내면이 형성되기 시작한 겁니다.”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재임 2008년 3월~2009년 4월)을 마친 뒤 예술의전당 사장(재임 2009년 12월~2012년 4월) 시절이 어쩌면 공직의 화려한 불꽃이 활활 타오르던 시절일지 모른다.
 
  “우리 일생에서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얄궂은 일들도 많고…. 그런데 예술의전당에 있을 때 직원들하고 호흡도 잘 맞고 정말 많은 일을 했어요.”
 
  기획재정부가 주관한 공기업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전임자가 2년 연속 70점대를 받아 퇴출을 당했다. 그러나 김 사장이 온 뒤 1년 만에 94.1점으로 최우수, 그 이듬해 98점을 받았다.
 
  “예술의전당은 콘서트홀이 생명인데 제가 갔을 때 2500석 큰 홀 하나하고 350석 작은 홀뿐이라 중간 규모의 챔버홀이 필요했거든요. 제가 민간 자금을 유치하겠다고 선언한 후 여러 기업을 쫓아다녔어요. IBK기업은행이 45억원을 쾌척해 챔버홀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페라 하우스의 토월극장이 개관한 이후로 한 번도 리모델링을 못 했어요. 대체로 극장은 10~15년 주기로 리모델링을 합니다. 스프링 철심이 의자 위로 올라와 양복이 찢어져 배상하는 일까지 생겼어요. 그리고 잘 안 보이는 좌석을 사석이라 하는데 700석 가운데 사석이 150석이나 됐어요. 이걸 민간 자금으로 리모델링하려고 온 데를 다니며 부탁해서 결국 CJ그룹이 150억원을 내가지고….”
 
  그렇게 해서 김장실 사장 시절에 2500석 규모의 대형 콘서트홀과 610석 규모의 챔버홀, 350석 규모의 리사이틀홀을 갖춘 음악당이 완성되었다. 역대 사장과 직원의 숙원사업을 김 사장이 가자마자 해결해버린 것이었다.
 
 
  “예술의전당 사장 시절은 머무르고 싶은 순간”
 
예술의전당 시절의 김장실 사장. 오랜 숙원을 모두 해결한 역대 최고의 CEO였다.
  김 사장은 신명 나게 일하던 그 시절, 그 자리로 돌아간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차 공간 250대를 증설하고, 사전 정산할 수 있게 만들어 공연이 끝나면 얼른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만들었어요. 그래야 내일 일찍 출근할 수 있잖아요. 과거엔 차량 출구가 한 곳이어서 빠져나가는 데 1시간 이상 걸린 것을 두 곳으로 만들었더니 20분 내로 줄었죠.
 
  한번은 신세계백화점 고객관리팀에 암행 감찰을 시켜 이런 보고를 받았어요. ‘억지웃음에다 별로 친절하지 않더라.’”
 
  김 사장은 매주 직원 6~7명씩 신세계 스마일아카데미에 보내 결국 전 직원이 서비스 인정 과정을 이수하게 했다. 그 자신도 솔선수범했다. 미화원이든 경비원이든 누구를 보든 먼저 웃으면서 인사하고 정중하게 대한 것이다. 이 밖에도 토요 콘서트, 대학 오페라 축제, 명품 연극 시리즈 등 대중과 호흡하는 공연을 기획했다.
 
  지난 2018년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역대 사장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12대 사장이었던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살다 보면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예술의전당 사장 시절이 바로 그렇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역대 사장님과 또 지금 현재 근무하는 여러분 때문에 제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서 그냥 내려가기는 섭섭해 이경화가 1983년에 노래한 ‘남은 이야기’의 마지막 소절로 제 심정을 대변합니다. ‘그대가 아니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데, 사랑이 아니면 누구도 마음 줄 수 없는데~.’”
 
  김 사장은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그랬더니 직원들이 팔짝팔짝 뛰더라고. 너무 좋아서….”
 
 
  “중국 관광객이 미국 관광객 앞질러”
 
  김장실 사장은 작년 10월 관광공사 사장에 임명되었다. 다행히 코로나19의 위력이 무너지고 있다. ‘K-관광’ 붐이 일고 있다.
 
  “올해 목표는 관광객 1000만 명 유치입니다. 2027년까지 3000만 명에 300억 달러 관광수입 달성이 장기 목표고요. 매일같이 관광객 추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김 사장은 “올 상반기까지 440만~450만 명가량이 올 것으로 추정되고 하반기에 500만 명 이상이 한국을 찾으면 1000만 명 목표는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 코로나19로 관광객 발길이 뚝 끊겼었는데 김 사장 취임 이후 다시 탄력을 받나 봅니다. 운이 좋으신가 봅니다.
 
  “일본, 중국, 미국 관광객 순인데 지난 4월까지는 미국 관광객이 중국 관광객을 앞섰어요. 중국(정부)은 단체 관광객이 오는 걸 막아놨는데도 개별 관광객이 5월부터 미국 관광객을 앞질러가지고….”
 
  ― 일본행 관광수요를 국내로 돌려야 할 텐데요.
 
  “스토리가 있는 지역 콘텐츠를 발굴하고 먹거리, 볼거리, 체험거리 등 매력적인 관광 콘텐츠를 만드는 수밖에 없지요.”
 
  ―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셨는데 어떤 각오이십니까.
 
  “공사에서 일을 해보니 사업 영역이 다양하고 추진 속도도 빨라서 국내외 할 것 없이 매우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최근 K-컬처 인기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어 공사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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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상우    (2023-08-02) 찬성 : 1   반대 : 0
이 사람은 얼마전에도 한국 관광객 도와준 미국인 부부를 갈라 놓고 한가운데 서서 사진 찍더니, 관광공사 직함을 앞에 내놓고 개인 사설이 왜 이리 잦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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