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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만남

《오늘이 온다 - 제헌국회 회의록 속의 건국》 펴낸 권기돈 박사

“나라의 길을 만드시느라 애쓰신 제헌의원들… 눈물을 흘렸다”

글 : 장원재  ㈜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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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필리핀은 헌법 만드는 데 사흘밖에 안 걸렸다”며 재촉
⊙ “‘조그마한 행위까지 전부 다 친일 행위라고 하면 우리 어여쁜 고운 소녀들도 친일파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던 신익희의 말에 가슴 찡해”
⊙ “건국 초에는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의 운명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 계속… 6·25 거치면서 반석에 올라”
⊙ “학자들, 속기록만 읽었어도 저지르지 않았을 오류 너무 많아”
권기돈 박사
  조작(操作)이 진실을 대체하고 나아가 진실처럼 유통되는 사회는 희망이 부재하다. 사회 전체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기 때문이다. 링컨이 말하지 않았는가. ‘대중을 단기간 속일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조작된 진실’은 국경을 넘는 순간 힘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진실의 순간’은 언젠가는 온다. 반드시 온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 그동안의 역사적 부채(負債)를 이자까지 쳐서 모두 갚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왜곡을 막는 일은 그래서 우리가 치러야 할 정신적·사회적 빚을 없애는 일과 마찬가지다. 진실을 밝히려면 디테일이 중요하다. 디테일이 깃든 진실로 반박하면, 거짓과 소문이 진실의 자리를 대치하는 사고는 일어나지 못한다. 제헌절을 앞두고 권기돈(權奇敦·60) 박사를 만난 것은 그래서이다.
 
 
  제헌국회 회의록으로 본 건국
 
  권 박사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위스콘신메디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통령실 연설기록비서관실 선임행정관,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원장 등 공직 경험도 있다. 최근에 《오늘이 온다 - 제헌국회 회의록 속의 건국》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제헌의원(制憲議員)들의 목소리가 원음 그대로 담겨 있고, 당대의 상황을 해설하는 저자의 목소리와 논평이 병진하는 책이다. 자료 읽기와 숙성의 기간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웅변하는 역작이다.
 
  ―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제헌국회 속기록을 읽는 모임이 있었는데요, 거기에 제가 객원으로 참여를 하게 됐습니다. 한 4~5년 전 이야기입니다.”
 
  ― 굉장히 디테일한 접근을 했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이전의 역사책, 학자들의 저술은 말하자면 큰 붓으로 굵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구조죠. 저는 이야기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세부 묘사도 있어야 하니까 디테일을 살린 겁니다. 속기록을 알리자는 목적도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제헌국회 의원들의 발언을 많이 소개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주 세밀하게 이야기를 하면 당시 역사를 재미있게 살펴볼 수 있거든요.”
 
  ― 책을 쓰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어떤 겁니까.
 
  “발언을 그대로 옮긴 부분이 꽤 됩니다. 그런데 맥락이 공유가 안 돼 그 발언이 왜 나왔는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종종 나왔어요. 그래서 어떤 때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 추측해야 했습니다. 도저히 이해 안 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럴 때는 영어로 하면 ‘베스트 게스(best guess)’죠. ‘베스트 게스’로 발언을 추측하고 재구성해 하나의 스토리로 엮었습니다. 이런 과정은 아주 재미있지만, 시간이 꽤 걸렸어요. 발언 자체만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당시 신문기사 등 주변 자료를 참조하면서 읽어나갔기 때문에 제 짐작이 거의 맞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확신합니다. 특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발언 가운데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았습니다.”
 
 
  이승만의 고민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했다. 최고령자인 이승만 박사가 임시 의장을 거쳐 초대 국회의장이 됐다. 사진=조선DB
  ― 무슨 뜻입니까.
 
  “1948년에서 50년의 시기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정부는 세웠지만 남로당의 사회 파괴 활동은 일상이었고, 삼팔선에서는 매일같이 교전이 일어났죠. 이것만이 아닙니다.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일본도 호의적이 아니었고요. 그러니까 하루하루가 대한민국의 생존이 걸려 있는 만성적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니까,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해결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하루가 모자랐을 겁니다.”
 
  ― 우남(雩南)은 스스로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등 업무량이 살인적이었다고 알려져 있죠.
 
  “그렇습니다. 본인이 끊임없이 영어로 글을 써야 했고, 외신과의 인터뷰며 온갖 걸 다 하고 있는데, 국회에서는 자기가 보기에 아주 사소한 일 가지고 자꾸 장관들 오라고 하고 어떤 때는 대통령보고도 오라고 하고 자주 시비를 거니까 어느 날 국회에 나와서 살짝 우물쭈물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제 생각에는, ‘나라의 생존이 달려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런 작은 일 가지고 왜 이렇게 장시간 논의를 하느냐’, 이런 의미인 것 같은데….”
 
  ― 국사책을 보면, 1948년 5·10 총선 이후 국회에서 7월 17일 헌법이 만들어지고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렇게 간략하게 묘사돼 있는데, 《오늘이 온다》를 읽어보면 그사이에 파란만장(波瀾萬丈) 우여곡절(迂餘曲折)이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당시 가장 시급했던 것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죠. 정부를 빨리 구성해 유엔총회에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됐다는 걸 알리고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건국 결정을 했으니까요. 승인 신청을 한 시점은 9월 20~21일경입니다.”
 

  ― 시간이 부족했겠네요.
 
  “네. 먼저 헌법을 만든 뒤 그 헌법에 따라서 대통령을 뽑고 내각을 구성하고 사법부를 구성하고 그다음에 한미행정협정을 통해서 미군정(美軍政)으로부터 행정권을 공식적으로 이양받아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하는 거였죠. 그래야 유엔에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알릴 수도 있었고요. 5월 10일 총선거부터 기산하면, 불과 넉 달 사이에 이 모든 절차를 다 마쳐야 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 제헌국회 의원들은 나름 청사에 길이 빛날 좋은 헌법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원칙에 대해 토론하고 조문을 검토하고 심의하는 데 시간을 꽤 썼어요. 이승만 대통령이나 당시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던 신익희(申翼熙), 김성수(金性洙) 이런 분들 입장에서는 빨리 헌법을 만들고 나라를 세워야 하는데 무한정 토론만 하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당시 국회의장이 ‘이럴 틈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매일 합니다. 심지어는 ‘필리핀은 헌법 만드는 데 사흘밖에 안 걸렸다. 우리도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한다’ 등의 이야기도 하죠.”
 
  ― 대통령 선출 이전엔 우남이 국회의장이었죠?
 
  “네. 당시 연세가 73세로 최고령 제헌국회 의원이었는데, 그 연세에 국회의장으로서 하루 종일 사회를 보기가 너무 힘들잖아요.”
 
  ― 그렇죠.
 
  “그래서 당시 부의장이던 신익희나 김동원(金東元) 같은 분들에게 사회를 맡기다가 조금 지체가 된다 싶으면 우남 본인이 직접 의장으로서 사회를 보면서 빨리 의사 진행을 했던 겁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
 
김약수
  ―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제헌의원 가운데 제 개인적으로는 세 사람 정도가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 저희는 1948년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알기 때문에 발언록을 읽으며 ‘이 사람이 이때 이래서 이렇게 발언했구나’라는 추측이 가능한데요, 김약수(金若水) 의원, 최태규 의원은 훗날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됩니다. 특히 최태규 의원은 6·25 때 탈옥해 자진 월북(越北)까지 하죠.
 
  “이 사람들의 발언을 보면 좀 묘한 데가 있습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핵심은 노일환, 그다음에 이문원 이 두 의원입니다. 남로당 출신 간첩과 접촉해, 노일환은 돈 받은 사실까지 다 실토합니다. 의원 10여 명 정도가 더 연루돼 있었는데 다 경중에 맞게 처벌을 받습니다.”
 
  ― 이문원, 노일환 의원은 소장파 아니었나요?
 
  “그렇죠. 30대 중반, 40대 초반이었습니다. 김약수 의원을 말씀하셨는데, 김 의원 같은 경우는 일제(日帝) 시대 때 좌익 쪽에 속해 있었죠. 이 사람은 지명도는 높았지만 대단한 간첩은 아니고 나이도 많았어요. 제가 아는 한 교수님의 판단에 따르면, 이 사람은 개인적인 야심이 커서 소장파의 리더로 활동했다더군요. ‘자기의 정치적 중량감을 불리기 위해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을까?’라는 해석이죠. 6·25 당시 인민군이 파옥(破獄)했을 때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금됐던 의원 중 서용길 의원 한 사람 빼곤 다 북한으로 올라갑니다.”
 
  ― 이념에 따른 선택을 한 거네요.
 
  “글쎄요. 하지만 북한으로 자진해서 올라간 건 팩트죠. 남쪽에 계속 있으면 어떤 위험에 처할 거라는 판단 때문에 월북한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한데, 어쨌든 서용길 의원은 남한에 남아서 전후(戰後)에 재심 요청을 합니다. 자기는 무죄라고. 그런데 기록이 다 없어져서 재심이 불가능했어요. 이분은 나중에 고려대학교인가 어느 대학교 교수로 일합니다.”
 
  ― 국회 프락치 사건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이문원과 노일환이 핵심이고, 나머지는 이 둘이 주도하는 모임에 몇 번 나간 게 화근이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최태규는 북한에 가서 1999년인가 자서전 비슷한 책을 썼는데 거짓말과 과장을 많이 섞어 이승만을 맹비난했더군요.”
 
 
  소장파 리더 노일환
 
  ― 노일환 같은 경우에는 국회 개원 초부터 매우 적극적으로 발언을 하고, 특히 이승만 박사를 노골적으로 비난한 대목도 여럿 있더군요.
 
  “네. 이 사람이 《동아일보》 기자 출신입니다. 당시에 34세인가 35세 정도였는데 4·3사건을 직접 취재해 생생한 기사를 남기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한 판단도 참 다릅니다. 이 사람이 남로당과 만나서 거금을 받기도 하지만, 남로당 지하당 임시 최고지도자도 하고 1957년 북한을 탈출, 일본으로 망명한 박갑동(朴甲東)이 쓴 책을 보면 ‘노일환은 빨갱이가 아니었다’라는 대목이 있어요. 아무튼 노일환은 개원 초기부터 과격한 발언을 많이 합니다. 엄청나게 똑똑한 건 사실인 것 같아요. 발언이 논리 정연하고, 거의 할아버지 격인 이승만 대통령이 출석해 있는데도 우남을 천황에 비유하면서 당당하게 발언합니다.”
 
  노일환이 이 발언을 할 때 플로어의 분위기는 격앙 그 자체였다. ‘저 자식 끌어내려라!’ 등의 발언이 많이 나왔다. 이승만은 의연했다.
 
  ‘왜들 그러느냐, 말을 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해야지 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느냐’라면서 분위기를 수습한다. 젊은 의원의 결기도 대단하고, 그걸 받아주는 이승만의 풍모도 대단하다.
 
  “노일환이 남로당 측하고 직접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때는 1949년 2월 들어서입니다. 그때부터 상당히 강경한 발언이 이어집니다. 나중에 프락치 사건하고 연관 지어 생각하면, 이때부터는 사전 모의를 하고 강경 발언을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
 
조헌영 의원
  처음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가 어떤 계기로 돌아서는 의원이 있다. 조헌영(趙憲永) 의원이다.
 
  “조헌영 의원은 굉장히 놀라운 분입니다. 이분 아드님이 청록파(靑鹿派) 시인이자 절창(絶唱) ‘승무(僧舞)’로 유명한 조지훈 시인입니다. 조헌영 의원은 경북 영양에서 출마했죠.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또 한의학도 전공했습니다. 6·25 중에 납북되어서 북한에서는 조평통 위원장까지 지냈습니다. 역량이 아주 탁월한 한민당 중진 중 한 명이었는데, 제헌국회 시절에는 원내 교섭단체 제도가 없어서 의원들이 무제한으로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의 법조문을 두고 무한정 토론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논의가 방향을 잃고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는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조헌영 의원이 나타나서 엉킨 실타래 풀어내듯이 쾌도난마(快刀亂麻)로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중도에 가까운 리버럴이었습니다.”
 
  ― 그 점이 발언에서 드러납니까.
 
  “그렇죠.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노선에 따르지만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간다든지 이런 점이 보이면 태클을 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분은 좀 불행한 정치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대 자체가 중도의 입장을 잘 허용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이분의 주장은 맥없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國父)의 입장에서 특정 정파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승만이 국회에 나와 “나는 정파를 초월하려고 한다”라고 발언하자 조헌영은 “당신도 독촉 그러니까 대한독립촉성중앙회(大韓獨立促成中央會)라는 당파의 수령 아닌가. 모든 사람이 당파 소속”이라고 반박한다. 조헌영은 1950년 1월 한민당을 탈당한다. ‘파당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이 탈당의 변이다.
 
  “조헌영 의원은 진정한 ‘무소속’의 효시입니다. 이승만 노선에 무작정 찬성하지도, 그렇다고 소장파 노선에 무조건 찬성한 것도 아닌 뚜렷한 정치적 신념을 보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조헌영 의원 탈당 후 몇 달이 지나 무소속 그룹이 형성되었는데, 곽상훈 의원의 탈당 성명이 조 의원 성명과 내용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제헌국회 시기에 대한민국이 잃었던 분들 중에 아까운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닙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조헌영 의원과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을 꼽습니다.”
 
 
  “반민특위는 세계관의 충돌”
 
  ― 저는 이 책이 대한민국 건국사를 그린 매우 세밀한 벽화이자 기록화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권 박사께서 조금 자제를 했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든 대목이 반민특위(反民特委)를 기술한 대목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반민특위는 우리 역사에서 지금까지도 워낙 뜨거운 감자 아닙니까? 그래서 제 가치 판단을 많이 집어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민특위는 두 가지 양립하는 세계관의 충돌이죠. 일제 시대가 끝났으니 민족정기를 세워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고, 또 건국이라는, 신생 대한민국의 생존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정의감을 앞세우다가는 생존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는 말도 옳으니까요. 지금도 판단이 쉽지 않은데, 당대 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
 
  ― 그래도 개인적인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 이 가치관이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습니까? 각자 명분이 확실하니까요. 반민특위도 이런 가치관의 대립인데 저는 신생 대한민국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반민특위가 다소 많이 나갔다는 생각을 합니다.”
 
  권기돈 박사가 공감한 의견은 신익희 국회의장의 발언이다.
 
  “신 의장의 판단과 논리가 가장 설득력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 ‘민족정기를 세우는 작업은 언젠간 반드시 해야 한다. 언젠간 꼭 해야 하고, 이것을 미루면 미룰수록 이 나라에 더 해롭다. 하지만 일제는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이다. 이것을 조그마한 행위까지 전부 다 친일 행위라고 하면 우리 어여쁜 고운 소녀들도 친일파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가장 대표적이고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던 일부를 처단하는 데 그쳐야 한다.’ 이 발언을 접하며 가슴이 찡했습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
 
  ― 가슴이 찡했다고요?
 
  “인간이란 존재는 굉장히 약한 존재입니다. 외부에서 압도적인 물리력이 강제하면 비겁해지기 쉽습니다. 이건 사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가 있죠. 물론 목숨을 걸고 버티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정말 예외적인 일부에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압도적인 물리력 앞에서 움츠러들고 어느 정도 비겁해지기 마련인데,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곤란하죠. 후세 사람들이 마치 자기는 저항할 수 있을 것처럼, 최대한 정의(正義)를 펼칠 수 있을 것처럼 가정하고 앞 시대 사람들을 재단(裁斷)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는 것이 제가 이해한 신익희 선생 말씀의 핵심입니다.”
 
  복거일(卜鉅一)의 역저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도 반민특위 이야기가 나온다. ‘반민특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혐의 혹은 무죄로 풀려난 것은 정의의 미실현이 아니고 오히려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의 놀라운 성취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법적 절차에 따라 단죄했고, 둘째 심증은 가지만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는 죄를 줄 수 없다는 판결이 속출했다는 이유에서다. 법치국가의 형식과 절차가 현대적 의미에서 지켜졌다는 뜻이다.
 
 
  법의 논리 vs 정치 논리
 
1948년 9월 22일 발효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체포된 친일파들이 포승에 묶여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조선DB
  “과거사 청산, 친일 청산이라는 건 근본적으로 정치적 행위입니다. 하지만 처벌을 하고 형(刑)을 주고 이런 것은 실정법에 기반해야 하는 법적인 행위죠. 그러니까 정치 논리와 법의 논리가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과거사 청산이나 친일파 청산은 그래서 법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야말로 마녀사냥으로 진행하기 십상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반민특위 내에서도 그것 가지고 그러니까 특별검사와 특별재판소 사이에 논란이 일어납니다. 두 기관이 판단이 달랐던 겁니다. 특별재판부의 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선생이었고 특별검사장은 당시 권승열(權承烈) 검찰총장이었는데, 문제는 방금 이야기했던 노일환 의원이 특검 차장을 했다는 점입니다. 화신백화점 대표 박흥식이 친일파 1호로 구속이 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는데, 그것 가지고 특재와 특검이 국회에 나와서 또 논쟁을 하죠.”
 
  반민특위 내에서도 견해가 달랐다는 뜻이다. 노일환 같은 경우는 정치 논리를, 김병로 같은 경우는 법의 논리를 앞세운 경우다.
 
  “소장파 김옥주 의원 등이 ‘지금 친일파 청산하는데 특재가 뭐 하고 있느냐!’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니까 가인(街人·김병로의 호)이 ‘그러면 법을 새로 만들어라. 그래야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처벌이 가능하다. 지금 법은 그렇게 만들어놓고 실정법 어겨가면서 처벌하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맞부딪칩니다. 반민법과 반민특위 조직법을 만들고 법에 따라서 친일파 재판을 하다 보니까, 정치의 논리에 따라서는 당연히 처벌돼야 될 사람들이 법의 논리에 따라서는 석방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건국 초 대한민국은 진정한 자주독립국이 아니었다”
 
1948년 5·10 총선 포스터. ‘총선거로 독립문은 열린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 사회학 박사이고 해방 공간의 역사를 초미시적(超微視的)으로 연구하셨는데 6·25의 의미는 어떻게 보십니까.
 
  “당시 제헌의원 가운데 상당수는 남북한 사이에 전쟁은 불가피하지 않겠는가라고 많이들 느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정도로 풀스케일의 국제전이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죠. 미국조차도 그렇게는 생각 안 했으니까요. 6·25는 어떤 면에서 보면 거의 필연입니다.”
 
  ―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인위적으로 분단된 상태였고, 남이나 북이나 통일을 일종의 지상 과제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이승만 대통령도 대화나 협상에 의한 해결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었고….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무력 사용을 통해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남북한 지도자들이 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전쟁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가 있죠. 당시 제헌국회 의원들, 예를 들어 지청천 같은 사람도 국회 발언에서 ‘곧 전쟁 난다’라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거든요.”
 
  ― 휴전협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지만, 6·25 전쟁이 있었기에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지금의 경제대국 반석에 오르는 계기가 마련된 것 아닌가요? 남한 내부의 반체제 세력이 거의 정리가 된 점도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신생 대한민국이 1949년에 유엔의 승인을 받았지만, 제대로 된 승인까지는 아니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떤 의미냐?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계속되었다고 봅니다. 진정한 자주독립국이 아니고 여전히 유엔 관할하에 있는 자주독립국….”
 
  권 박사는 당시의 상황을 ‘언제든지 독립을 원천 무효로 돌릴 수 있는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6·25전쟁 당시 국군의 북진(北進)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38선을 넘어갈 때 유엔군의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이 그 증거라고 했다. 평양 시민들은 환영대회를 열고 이승만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대우했지만, 법적으로 이승만의 평양행은 개인 자격의 방문이었다.
 
  “그러니까 38선 이남의 관할권은 가졌지만, 한반도 전체에 대해서는 관할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겁니다. 우리의 헌법 조항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다음에 1951년 봄부터 정전협정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이승만이 ‘죽어도 못 한다’고 버티니까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 제거 계획을 짜지 않습니까?”
 
  ― 에버레디 계획 말씀입니까.
 
  “에버레디 계획 이전에,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기 전에 노골적으로 이승만 제거 작전을 펼칩니다.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는 유엔총회 같은 데서 이승만 대통령을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차라리 유엔 신탁 통치를 하는 게 낫겠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1948년에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이 되었어도 사실은 여전히 유엔 관할하에 있는, 언제든지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는 그런 나라였던 거죠. 그런데 6·25가 일어나고 정전협정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끊임없이 유엔이든 미국이든 ‘내정 간섭하지 마라’며 피 터지게 싸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6·25는 유엔총회건 미국이건 다시 신탁 통치로 간다든지 이런 구상을 할 수 없도록 만든 그런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좀 제 나름대로의 독단적인 해석입니다.”
 
  ― 명실상부한 독립국으로 거듭났다는 말씀이네요.
 
  “네. 한미동맹, 군사동맹이 장착돼 비로소 번영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거죠. 여기에 우리 국민 특유의 근면 성실함이 더해져 오늘날처럼 좋은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고요.”
 
 
  “이승만, 한미동맹을 이중의 보호막으로 생각”
 
  ― 방금 한미동맹을 얘기하셨는데 한미동맹은 어떻게 보십니까.
 
  “대한민국 생존의 주춧돌이죠. 어쨌든 사람이 일단 살아야 생존이든 번영이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북한군은 우리를 완전히 압도하는 물리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6·25 휴전 이후 미군 철수 시 북한의 재침략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죠. 그래서 북, 소련, 중공의 재침략을 막고 우리의 생존을 확보했다는 면에서 한미동맹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도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 뭡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일본의 재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는 것으로도 보았습니다. 이중(二重)의 보호막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일본의 재침략이 공산주의 침략 못지않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여겨졌어요. 그래서 미국과의 동맹이 없으면 일본이 언젠가 다시 들어온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기준에서 그런 견해를 100% 받아들이기는 힘들죠. 왜냐? 당시 일본은 완전히 미국 관할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한반도를 재침략한다든지 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싶지만 그런 위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권기돈 박사는 ‘문화전(文化戰)’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본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다시 침략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자기들의 경제적·문화적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작업이었다고 했다. 미국 국무부도 일본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질서를 재편하려고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승만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발췌(拔萃) 개헌,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은 역사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시의 기준으로나 오늘의 기준으로 탈(脫)헌법적 행위인 건 맞습니다. 헌정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비난받아야 마땅한 행위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사오입 개헌 같은 경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만, 발췌 개헌 같은 경우는 단순히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연장만을 위해서 일으킨 사건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 좀 더 설명을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아까 말씀하셨던 이승만 제거 계획, 미국이 실제로 에버레디 작전을 가동하기 시작했죠. 발췌 개헌을 앞두고 그러니까 부산 정치 파동을 앞두고 미국 국무부에서는 무초 대사를 시켜서 혹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 당시 한국군 일부 인사에게 공공연하게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켜도 용인하겠다는 이야기였죠. 또 무초 대사도 김성수라든지, 야권 지도자에게 ‘우리는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반(半)공개적으로 했습니다. 어떤 비헌법적 수단에 의한 이승만 정부 전복을 부추기고 있었던 거죠. 이승만이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정전협정이 진행 중인데 말을 안 들으니까 그래서 부추긴 측면이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당시에 어떤 심정이었느냐, 이대로 가다가는 통일도 못 하고 우리 국민들이 그동안 흘린 핏값도 얻질 못한다, 영원히 분단이 될 것이다, 이렇게 느낀 겁니다. 이승만 서한집을 보면 당시 미국이 이승만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사람들이 조병옥(趙炳玉)하고 장면(張勉)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장면이나 조병옥이 집권하면 미국의 입장을 무조건 수용할 것’이라고 염려한 겁니다. 자신이 집권을 연장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운명은 위태로울 터이다, 이렇게 판단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대한민국의 생존을 자기 나름대로 확보하는 차원….”
 
  ― 사사오입 개헌에는 변명거리가 없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이니 변명의 여지가 거의 없죠. 그래도 의미를 둔다면 제헌 헌법 이후 남아 있던 사회주의적 조항들을 제거한 사실이 있습니다. 근로자의 이익 균점권(均霑權)이라든가 그런 것을 삭제했는데, 경제 혁명까지는 아닙니다. 개헌 전에, 사회주의적인 귀속재산불하법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서 상당히 완화를 합니다. 의원들이 법조항에 의거해서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시장경제 정책에 태클을 많이 거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시행령 등을 통해서 우회하죠. 이미 자유시장경제 정책은 헌법이 아니더라도 실제 시행령을 통해서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이 문제는 제가 회의록 속기록을 더 자세히 읽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보학자들, 브루스 커밍스의 오류 그대로 재생산”
 
  권 박사는 2차 문헌과 속기록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했다. 학술 저작 중에서도 오류를 많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 단순한 해석의 오류인가요? 아니면 인용 자체의 오류입니까.
 
  “둘 다입니다. 예를 들면, 대한정치공작대 사건(1950)을 보죠. 미국 수정주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의 최종 배후는 이승만 혹은 최고 권력 상층부였다. 이 사건은 정권 차원의 기획으로, 목적은 김효석(金孝錫) 장관을 백성욱(白性郁) 장관으로 바꾸고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을 이범석(李範奭)으로 바꾸고…’ 뭐 이런 식으로 썼어요. 그런데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은 1950년 4월 초에 세상에 드러나거든요. 김효석 내무장관은 이미 2월 6일에 경질되었습니다. 한민당 입장에서 경찰 인사를 한다고 이승만 대통령이 백성욱 장관으로 교체하죠. 그리고 이범석 국무총리는 3월 말에 이미 사표를 낸 상태였어요. 그러니까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하는 바는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거죠. 시기가 완전히 어긋나는데도 그렇게 주장합니다. 자료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우리나라 진보 쪽 학자들이 브루스 커밍스의 오류를 그대로 재생산해서 지금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학자들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에도 틀린 정보가 부지기수입니다. 속기록만 읽었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오류가 너무 많아요. 이런 식으로 학계에서 1차 사료를 보지 않고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면, 그 왜곡되거나 과장된 정보를 다른 사람이 인용하면서 정설로 굳어집니다.”
 
 
  “집권 전략이 전부 개헌하고 연결”
 
  ― 제헌 과정을 정밀 관찰하신 분으로서 현행 헌법, 그러니까 1987년 체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5년 단임이 본질적으로는 임시 조치였다, 여야 타협의 산물이었다라는 분도 계시고 어쨌거나 당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는 분도 계시는데 벌써 30년 가까이 됐습니다.
 
  “87년 체제에 대해 요즘은 부정적으로 많이 보지만 저는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1950년대에는 집권 전략이 전부 개헌하고 연결이 되더라고요. 여당이든 야당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처음에 간선제 대통령제로 시작했다가 재임하려고 직선제로 개헌하죠. 3선을 하려고 다시 개헌을 시도하고요. 민주당은 자기들이 집권하기 위해,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인기를 가진 이승만 대통령을 이기기는 어렵고, 그러니까 총리밖에 할 수 없고, 그래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계속 요구하죠. 또 자유당도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 ‘이승만 이후’를 대비해야 하니까 이기붕(李起鵬) 같은 경우는 의원내각제 개헌을 구상합니다. 그러니까 1950년대에는 집권이 곧 개헌으로 연결되는, 그러니까 개헌이 일상화한 불안정한 체제였어요. 박정희(朴正熙) 정부에서도 삼선 개헌과 유신헌법 개헌이 있었죠. 1980년대 초에는 일단 유신헌법하에서 대통령에 뽑힌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5공화국 헌법으로 개헌하고 7년 단임 시대를 시작합니다.”
 
  ― 헌정 중단이 꽤 많았네요.
 
  “87년 이후로는 헌정 중단이 없었죠. 30년 동안 중간에 개헌하자는 목소리는 많았지만, 어쨌든 헌정적으로 안정을 이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5년 단임제는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개인적으로는 4년 중임제 개헌이 필요하지 않을까… 덧붙여 표의 등가성(等價性), 비례성 등을 고려하면 대통령 중임제에다가 비례 대표성을 좀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각제 개헌은 거의 불가능”
 
  ― 내각책임제 개헌은 어떻습니까.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미 우리 국민들이 대통령제에 많이 익숙해졌거든요. 브라질도 내각책임제로 갔다가 국민들이 요청해서 다시 대통령제를 채택한 케이스입니다. 우리 헌정사도 이제 70년인데 내각제로 간다는 건 너무 큰 변화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을 고치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 알겠습니다. 마무리 질문입니다. 국회 속기록을 통해서 《오늘이 온다: 제헌국회 회의록 속에 건국》을 내셨는데 원사료(原史料)를 읽으시면서 혹은 집필하시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달까 울컥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어떤 대목입니까.
 
  “맨 마지막 문장을 쓸 때 조금 울컥했습니다. 진짜로 나라의 길을 만드시느라고 애쓰신 전(全) 의원께 감사드립니다. 이건 정말 진심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프락치 의원이라든지, 예의 없이 막 나가는 소장파들도 있었죠. 아주 집요하게 정부를 물고 늘어지면서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데, 정말 미웠습니다. ‘2년 후에 북한에서 쳐들어오는데 어떻게 저렇게 철없이 행동했을까?’ 이 생각을 하면서도, 어쨌든 그야말로 적수공권(赤手空拳),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물론 현행법이라는 게 존재했지만, 어쨌든 모든 법을 새로 써나가야 했고 모든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다 있는 상황에서 제도를 만들어 나가야 했으니까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뿌듯했습니다. 길을 내는 거잖습니까. 나라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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