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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학문 자영업자’ 선언한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

조 교수의 사자후(獅子吼), “대입 성적과 학문의 열정은 逆비례한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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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주는 학위, 나라에서 주는 학위가 따로 있어야 합니다. 나라에서 주는 학위가 더 공신력이 있다면 학벌사회가 사라집니다. 대안이 대한민국학술원입니다.”

⊙ “유튜브 하는 지금, 내 창조력 가장 왕성”
⊙ 4·19혁명과 ‘봉산탈춤·흥부전에서 받은 충격’ 탓에 불문학→국문학 전공
⊙ ‘공부하려고 고향을 떠났지만, 공부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멀고도 험한 길’
⊙ 계명대·영남대·정문연·서울대서 36년간 가르쳐… 계명대 석좌교수로 5년 재임
⊙ 근대문학 형성의 내재적 원천을 찾는 작업의 결실, 《한국문학통사》 전 6권 완간
⊙ “학문 자영업자가 많아야 온 국민이 평생교육 받을 수 있어”
⊙ “가짜 박사는 가짜 운전면허보다 더 큰 해악… 박사 논문 표절은 엄하게 다스려야”
사진=조준우
  원로 국문학자 조동일(趙東一·82)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9년 계명대 석좌교수를 끝으로 41년간의 교수직을 마무리했다. 현역에서 떠났으나 그의 가르침은 진행형이다. 유튜브(‘조동일 문화대학’) 채널을 개설했다. 채널 소개 글이 인상적이었다.
 
  〈네거리에 나앉아 신을 삼아 행인들에게 나누어준 옛적 선승을 본받아 문학, 철학, 예술 등 문화 전반에 관한 참신한 강의를 누구든지 쉽게 들을 수 있도록 대학을 열고 ‘조동일 문화대학’이라 일컫는다.〉
 
  기자도 ‘구독’을 신청하고 그가 건넨 신을 얼떨결에 받아 안았다. 신은 분명 새것인데 독특한 향기가 났다. 그러나 코맹맹이 기자는 맡을 수 없는, 그의 학문을 흠모하는 ‘동일리안’만이 즐길 수 있는 향기였다. 어떤 이는 재미없고 딴 세상 얘기라며 외면할지 모르겠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전투와 같아”
 
  화려한 영상, 따끈한 이미지는 없지만 묵직한 연구 성과물을 영상으로 제작,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옛 논문이나 책 내용이 아니라 신작(新作)으로.
 
  그러면서 그는 “내 창조력은 지금이 가장 왕성한 시기”라고 외친다. 내년 3월에 출간할 책 《국문학의 자각 확대》 원고를 이미 출판사에 넘겼고, 올 초에 《우리 옛글의 놀라움》이란 책을 펴냈다.
 

  조동일 교수를 만나기 위해 지난 6월 8일 서울 지하철 4호선을 탔다. 그가 사는 경기도 군포의 신도시 산본에 내렸다. 산본 사람들은 그 거인의 발자취를 얼마나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동일 교수는 스물아홉이던 1968년 3월 계명대에서 시작해 영남대(1977~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 1981~87년)을 거쳐 서울대(1987~2004년)에 이르기까지 36년간, 그의 표현대로 ‘교수 노릇’을 했다. 2004년 8월 정년 퇴임한 후 다시 첫 직장이던 계명대로 돌아가 5년간 석좌교수가 되었다.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겨 국어국문학계에 독보적 인물이 되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학문을 한다는 것은 전투하는 것과 같다. 독한 마음 먹고 용기를 갖고 싸우면서 학문을 하라”고 말했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동일리안’들은 이 가르침을 베개 밑에 두고 모질게 정성을 쏟았으리라. 다만 스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자들이 나왔다는 소식이 아직은 안 들린다.
 
 
  “내 창조력은 지금이 가장 왕성한 시기”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가 경기 군포 자택에서 유튜브 채널 ‘조동일 문화대학’에 올릴 동영상 강의를 촬영하고 있다.
  — 유튜브에 새로운 세상이 있지요.
 
  “예, 그렇습니다.”
 
  — 자막과 영상 수정은 누가 하나요.
 
  “기술을 위해 돈을 들이지 않고, 그냥 소박하게 합니다. 아내(이은숙)와 같이 원고 낭독도, 영상 제작도 합니다.”
 
  — 주위 반응은 어떻던가요.
 
  “구독자가 많지 않지만,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좋은 댓글을 달아주면 수고한 보람을 느끼죠. 기존에 쓴 책 내용이 아니라 새롭게 쓴 글이고 문장입니다. 재탕이 아니라 신작입니다. 책을 써서 출판하거나 글을 기고하면 누가 읽는지, 어떤 반응인지 전혀 모르는데 (유튜브 댓글에) 즉각 반응이 있으니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말로 “약간 재미를 주신다면 더 좋으련만…”이라고 하자, 노교수는 이렇게 말을 받았다.
 
  “재미있게 할 재주는 없어요, 허허허. 제가 그린 그림을 해설한 영상이 있어요. 색다른 맛이 있어서 학문을 하지 않은 사람도 관심 갖고 볼 수 있어요.”
 
  그러더니 “내 창조력은 지금이 가장 왕성한 시기”라고 말했다.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 같아요. 뭐든지 쉬면 후퇴하고 열심히 하면 더 나아지는 것 같아요.”
 
  — 지금껏 열심히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아…, 지금도 열심히 하죠. 요즘은 다른 일이 없고, 시간을 충분히 내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건강 비결요? 일어나 아령을 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합니다. 골프요? 평생 친 적 없어요. 매일 산책하고 매주 등산 가고.
 
  이곳 수리산이 좋은 산입니다. 집에서 채 10분이 안 걸립니다. 정년 후에 어디서 살까 하다가 명당을 찾아온 겁니다.”
 
  — 산본에 산 지 꽤 되었죠.
 
  “20년이 넘었습니다.”
 
  — 선생님 덕분에 이 신도시가 유명해진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묻혀 살기 위해 여기로 왔어요. 강연을 해도 여기선 안 합니다. 얼굴이 알려지기 싫어서, 허허허.”
 
 
  “봉산탈춤·흥부전에서 받은 충격”, 불문과에서 국문학으로
 
조동일 교수가 경기 군포 자택의 작업실에서 그린 노거수 그림 앞에 서 있다. 그는 “동·서양화의 느낌이 고루 나는 구아슈로 그린다”고 했다. 3년 전 모습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조동일 교수의 일생을 더듬어보았다. 정말이지 극적(劇的)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절 그는 “화가가 될까 작가가 될까 생각하다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58년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중학교 때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를 욀 정도로 읽었고 홍명희의 《임꺽정》은 10번 이상 탐독했단다.
 
  대학 시절 초현실주의 시를 쓰다가 4·19혁명을 겪었다. 다시 “봉산탈춤, 흥부전에서 받은 충격” 때문에 국문학 전공으로 방향을 틀었다. 불문과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국문과 3학년에 학사 편입했다.
 
  그 무렵, 시인 김지하와 함께 “탈춤, 판소리, 민요, 무가(巫歌)와 민화, 민예 등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연구 및 그 방향성을 공유하며 ‘우리문화연구회’ 운동을 곁에서 참여”하였다.
 
  대학원 국문과 석사 학위 논문은 〈가면극의 희극적 갈등〉. 첫 책은 《서사민요연구》(1970)였다. 고전문학, 특히 구비문학에 관한 연구를 모체로, 시야를 한국문학 전 영역으로 넓혀 《한국문학통사》(전 6권)를 완성했다. 집필 계획을 세워놓고 하루 16시간씩 매일 연구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3번의 큰 개고(改稿)를 거쳐 지금(개정 4판)까지 6만 질 이상이 팔렸다. 대단한 성과다. 이후 그는 한국문학사에서 동아시아문학사를 거쳐 세계문학사로 나아갔다가 지방문학사로 되돌아왔다.
 
  문학사와 철학사, 문학사와 사회사의 관계도 계속 다루었고 여기다 문학 연구에서 학문 일반으로 나아갔다. 이른바 ‘수입 학문’의 폐단과 자립 학문의 폐쇄성을 넘는 새로운 학문의 방법론이 필요하다며 ‘창조학’을 주장했다.
 
  기자가 유튜브 채널 ‘조동일 문화대학’을 들어보니 요즘엔 ‘대등론’과 ‘창조주권론’을 외치고 있다. 흐르는 물처럼 계속 진화(進化)하며 학문의 영역을 넓고 깊게 다지고 있었다.
 
 
  대등론, 창조주권론이란
 
  — 대등론, 창조주권론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조선 후기 문장가 이덕무 선생은 ‘쇠똥구리는 쇠똥 뭉치를 자기 나름대로 사랑하고, 검은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어요. 쇠똥구리와 용은 서로를 인정할 뿐 동경하거나 멸시하지 않죠. 대등론은 ‘차등론’이나 ‘평등론’과 다른 개념으로 새로운 화합을 지향합니다. 귀천과 우열을 인정하는 차등론이나 공허한 이상론에 머무를 수 있는 평등론을 넘어 대등론은 ‘무명론(無名論)’과도 연결되는데 잘남과 못남을 가리지 않고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동아시아의 화합을 위해선 대등론이 필요한데 창조주권론과 궤를 같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창조주권을 가지고 있고 또 발견합니다. 창조주권을 관리하는 국면이 다르고 선택이 다를 뿐 주권에 우열이 없습니다. 나는 이쪽에서 별나게 하고, 누구는 저쪽에서 하는 것뿐이지 이쪽이 저쪽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선 절대 안 됩니다.”
 
  — 대학 시절, 브르통(Andre Breton) 같은 초현실주의 시를 쓰다가 민요와 탈춤에 빠져들어 고전문학을 전공한 것은 제가 《월간조선》을 그만두고 《한겨레》에 입사하는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그런 180도 전환이 가능합니까.
 
  “학창 시절 의식이 서구지향적이었어요. 우리 것은 볼 게 없다고 생각해 불문학을 전공했어요.
 
  4·19혁명에 적극 참여하면서 세상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어요. 주체성을 가지고 미래를 창조해야 할 책임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것이어서 좋은 것만이 아니라 그곳에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서양중심주의를 시정하고 세계문학이나 학문 일반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 방향으로 나간 것이죠.”
 
 
  인생의 大전환, 大결단
 
조동일 교수는 2009년 계명대 석좌교수를 끝으로 41년간의 대학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이를 기념하며 기념식수를 했다. 29세 때 전임강사로 계명대와 첫 인연을 맺었고, 마지막도 계명대와 함께했다.
  — 불문학 전공이 국문학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한국문학을 동아시아문학과 세계문학으로 이해하는 데 불어가 크게 도움이 됐어요. 불어로 된 제3세계 문학 작품과 연구서를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예컨대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은 주로 불어와 영어로 창작하는데 불어 창작 비중이 좀 더 커요. 제가 불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제3세계 문학의 진면목(眞面目)을 만날 수 없었겠죠.”
 
  — 인생에서 그런 전환이 흔치 않습니다.
 
  “대결단인데,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하려고 고향을 떠났지만, 공부는 다름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오는,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 멋진 표현입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와 고전문학부터 다시 시작해 국문학을 공부하고 동아시아, 제3세계 문학을 거쳐 다시 세계문학으로 나아간 것이죠.”
 
  그가 20~40대에 재직했던 계명대, 영남대는 대구에 있어서, 그의 고향 경북 북부지방 구비문학을 탐구해 문학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시절에는 혼자 한국문학을 담당한 덕분에 문학사를 통괄해서 서술하는 작업을 강의와 밀착시켜 진행할 수 있었다.
 
  서울대에 와서는 좀 더 자유롭게 문학과 철학의 관계를 논하고, 동아시아문학을 거쳐 세계문학으로 나아갔다.
 
보안사 민간인 사찰 대상으로 감시받아
 
  “제게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이죠”
 
  조동일 명예교수는 1987년 서울대 교수로 돌아오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신원조회 때문이었다. 훗날 알려진 사실인데 보안사 민간인 사찰 대상이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적이 있어요. 죄목이 황당하죠. 서울대 도서관에서 좌익 서적을 탐독했다는 게 이유였어요.”
 
  — 도서관에서 읽은 책 때문에?
 
  “서울대 도서관에 있던 소위 ‘좌익 책’을 읽지 못하게 하다가 4·19 이후 금서(禁書) 목록에서 해제됐어요. 일본은 반공(反共)을 주장하면서도 마르크스 관련 서적을 깡그리 다 번역했어요. 또 불어로 된 금서도 있었죠.
 
  휴학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어요. 사람들은 고시공부하는 줄 알았겠지만 수많은 언어로 된 수많은 책을 그냥 탐독했을 뿐입니다.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은 것이죠. 그리고 알고 싶잖아요. 알고 넘어서는 것과 모르면서 비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학교에 오래 남아 공부하니까 의심의 눈길로 봤는데, 제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겁니다. 물론 제 학문활동이 학생운동한 분들에게 영향을 줬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니에요. 제게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이죠.
 
  누구는 유학 가서 공부했으나 저는 유학을 안 갔으니 공부를 더 했다고 생각해요. 그 시절 서울대에서 그렇게 공부한 사람은 없었어요.”
 
  “운명은 자기 하기 나름. 복도 셀프다”
 
  — 어떻게 보면 운명이 삶에 관여한 것이 아닐까요. 평생의 학문연구가 삶에 연결돼 있어요.
 
  “그런데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다 자기 하기 나름이죠. 운명은 자기가 만든다…. 심지어 복도 셀프다. 저는 이런 말을 자주 해요.”
 
  우리의 대화가 ‘운명’으로 이어지자 대학 시절 시인 김지하(金芝河)와 조동일 교수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음은 시인 김지하 회고록의 일부다.
 
  〈(1960년 4·19 무렵) 민족미학, 민족예술, 민족문학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이 있었고 민족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제3세계적인 세계 인식을 다양하게 말하고 자기 인식을 나누었다. 우리는 한 패거리가 되었다. (중략) 4·19혁명은 맨 처음 조형(조동일)의 하숙방에서 모의되었다. 그 모의에서 저 유명한 명문 ‘4·19선언문’이 이수정(李秀正)씨로부터 나오도록 모의되었고 코스며 책임까지 논의되었다. 그러나 조형은 한 세월 지나기 전까지는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2〉 조동일’, 프레시안, 2002년 7월23일자 중에서
 
  — 김지하 선생과 가까우셨나 봅니다.
 
  “언젠가 회고록 출판기념회 때, 제가 축사를 했어요. 그때 ‘건강이 나빠진 것하고, 이름이 너무 높아진 것이 김지하의 수난(受難)’이라 말했어요. 이름이 높아지니, 그 이름에 걸맞은 작품을 쓰려 무리하게 되고 남을 너무 의식하게 되었지요. 그냥 들어앉아 자기 충실이나 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 이름이 높기론 두 분이 비슷한 것 아닙니까.
 
  “아니요. 나는 이름이 안 나길 바라고…, 유튜브 통해 대중에 얼굴을 드러냈지만…. 가령 고등학교 동창 중에서 자주 만나는 친구도 제가 뭘 했는지 전혀 몰라요.”
 
  — 그럴 리가요.
 
  “전혀 몰라요. 제 책 한 줄도 안 읽은 친구들이 많아요. 읽으라고 권하고 싶지도, 읽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허명은 독약이고, 무명은 보약’이란 말이 있어요. 가끔 지나치게 과장되게 알려진 것을 발견하면 아연실색하고 얼굴이 뜨거워요. ‘차등론’을 부정하고 ‘대등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자기가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죠. 그건 자살이에요.
 
  쟁취하면서 힘이 들어가면 그때부터 속이게 되고, 자기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게 되는데,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알려지지 않아야 해요.”
 
 
  유일한 박사 과정 입학생
 
  1962년 불문과를 졸업하고 계속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당시 박사 과정에 입학했을 때 인문사회계열 응시자가 그를 제외하고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박사 과정 입학생은 거의 다 의학 전공자였습니다. 응시하던 그해 국문학과뿐만 아니라 인문사회 계열에서 홀로 박사 과정에 입학했어요. 신제 박사 학위를 최초로 받았습니다.”
 
  “공부하려면 유학 가야 한다는 공식을 깨고 국산품의 우수성을 입증할 책임이 있다고 여기고, 최상의 박사 논문을 쓰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국문학 교수가 서양문학을 문학의 전범(典範)으로 섬기는 강의를 하면서 국문학은 폄하하니,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국문과를 외면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조동일 교수가 국문학을 학문 연구의 주역으로 삼고자 결심한 배경은 그의 첫 직장인 계명대에서의 쓴 경험과 관련이 깊었다.
 
  1968년 3월 11일 계명대 전임강사가 되어 대구로 내려갔다. 만 29세 때였다. 불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다가, 국문과 3학년에 학사편입해 4년 동안 공부하고 석사 과정을 갓 마친 해였다.
 
  “당시 계명대는 다른 대학에 거의 없는 미국 박사들이 많았어요. 그분들은 국내 학계 동향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낮춰보기를 일삼았어요.
 
  그 때문에 나름 반발하고 각성해 국문학과를 대학의 중심으로, 국문학을 학문의 주역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기로 결심했어요.
 
  제 학문 분야를 구비문학만 연구할 수 없고, 통상적인 고전문학을 넘어서야 했어요. 미국의 영문학 박사보다 문학 일반론에 대해 더 잘 알고, 다른 여러 나라 문학까지 활용하면서 제 학설을 전개해야 한다고 여겼고, 보편적 의의를 최대한 주장할 수 있도록 철학까지 갖춰야 한다고 다짐했죠.”
 
 
  力作! 《한국문학통사》
 
《한국문학통사》. 현재 개정 4판이 판매되고 있다. 1판은 1982~88년에 간행됐고, 2판은 1989년, 3판은 1994년에 나왔다.
  그 학문의 중간 기착지가 전 6권으로 된 《한국문학통사》(1982~88)였다.
 
  구비문학 전공자가 문학사 전 영역을 다뤄 《한국문학통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운명’과도 관련이 깊다.
 
  대학원 시절 구비문학을 전공했고, 계명대에 와서 고전산문 과목을 맡아 가르쳐야 했다. 이후 한문학까지 관심을 넓혀 고전문학을 넓게 살펴볼 수 있었다.
 
  또 현대문학 강의를 맡게 되면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연결시켜 한국문학 전체를 내다볼 수 있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그래서 “전통단절론의 잘못을 시정하고 근대문학 형성의 내재적 원천을 찾는 작업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문학통사》를 완간한 뒤 1990년대 중반에 이르자, 국문학이 인문학 연구의 주역으로 어지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국문학이란 국산품의 우수성은 국내에서 수입품과 경쟁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학문의 우수성은 상품의 경쟁력과 다르지 않아 밖으로 나가 세계적인 범위에서 인정되는 가치여야 합니다.
 
  저는 한국문학을 비교연구의 출발로 삼아 동아시아문학으로, 다시 세계문학으로 나아갔어요.
 
  한국문학 연구에서 문학일반론으로, 문학일반론에서 인문학문론으로, 인문학문론에서 학문론으로 시야를 확대했죠.
 
  반면, 영문학 전공자들은 제3세계 문학에 전혀 관심이 없고, 같은 영어로 쓰여도 아프리카 문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죠.”
 
 
  학술서와 교양서의 장벽을 허물다!
 
  — 《한국문학통사》가 지금까지 6만 질 이상이 나간 것은 대단한 성과입니다.
 
  “전공서적만으로 그렇게 나갈 수는 없어요. 교양서적과 겸해서 국문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압니다. 노력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학문하는 사람과 교양인, 학술서와 교양서의 장벽을 허문 셈이죠.”
 
  — 저도 밑줄을 치며 읽었는데 문체의 독특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상당한 정도로 구어체로 쓰였습니다. 학술 문장의 딱딱함을 벗었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뜻을 모르는 글은 읽을 필요 없어”
 
조동일 교수는 서울대 제자들과 자주 산에 올랐다. 제자들과 등산하기 전 법주사 앞에서. 그는 엄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교수보다 단 1초라도 늦는 학생은 강의실에 들어올 수 없었다.
  — 문체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식이 없고 간결하면서도 쉬운 학술서를 지향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튜브 방송 원고를 그런 식으로 쓰고 있습니다.”
 
  — 게다가 단문입니다.
 
  “생각이 복잡할수록 글은 간명해야 합니다. 어떤 글은, 글은 어렵고 생각은 간단합니다. 그런 글은 좋지 않아요. 글은 간단하고 명료하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글이어야 합니다. 지금의 제 글은 《한국문학통사》 시절보다 더 단문이 됐습니다.”
 
  — 속칭 ‘조동일 문체’라고 해도 되겠지요.
 
  “그렇게 말하면… 좀 지나치지만, 특색이 있는 문체 정도로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외국 독자를 많이 의식해요.
 
  외국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분들이 ‘어떤 분의 책은 아무리 읽어도 뜻을 모르겠다’고 하기에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그런 글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문장이 꼬이거나 비문이면 우리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외국인은 오죽하겠어요?”
 
  — 20대 때 문체는 어땠을까요.
 
  “젊은 시절에 쓴 글은 좀 길어요. 차츰차츰 간결해지고 명료해졌죠. 그리고 글이 길고 복잡한 이유는 생각이 덜 정리돼서 그렇습니다. 또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니까 문장이 길고 복잡해지는데, 지나친 욕심이죠. 많은 이야기 중에 요긴한 것을 간추려 전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국문학통사》를) 쓴 것입니다.”
 

  — 제자들의 논문을 수정하면서 어떻게 가르치셨나요.
 
  “문장이 썩 산뜻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이유는 생각이 덜 정리돼 그렇기도 하고, 문장에 멋을 부려 그렇기도 합니다. 문장에 멋 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자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동일 교수의 젊은 시절을 더듬어보았다.
 
  학생들에게 그의 별명은 ‘오메가 시계’ 혹은 ‘학원 깡패’였다. 수업 시간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강의실에 들어가고(정말 시작종이 울릴 때까지 강의실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일단 교탁에 선 다음에는 누구도 강의실에 들어올 수 없었다.
 
  — 교수보다 단 1초라도 늦는 학생은 퇴실당한다는데 사실인가요.
 
  “물론입니다. 평생 예외가 없었습니다.
 
  서울대에서 《한국문학통사》를 교재로 고전문학사를 강의하면서, 미리 읽어와 소상하게 이해하고 토론을 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낙제점을 주었습니다. 낙제가 수강생의 3분의 1 가까이 된 적도 있습니다. ‘깡패’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후한 별명입니다.”
 
  한 가지 더. 그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수재들이 국문과를 지망해야 나라가 바로 된다.”
 
 
  “하지 않아도 되는 공부라야…”
 
조동일 교수가 1999년 4월 22일 출판문화회관에서 일반 독자와 만나 강연하고 있다.
  — 공부와 관련, “하지 않아도 되는 일(공부)이라야 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연 설명 부탁드립니다.
 
  “제가 하는 강의를 따르지 말고 토론의 대상으로 삼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라고, 저를 넘어서는 학문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부모가 말리는 공부를 자발적인 동기에서 해야 그럴 수 있습니다.”
 
  — 지금까지 만난 여러 제자 중에 ‘스승의 틀린 점을 바로잡은 제자’ ‘스승이 가지 않은 길을 간 제자’ ‘스승을 딛고 올라선 제자’ 중에서 어느 제자의 수가 많습니까.
 
  “저와 대등한 토론이 가능한 제자들은 입학성적이 낮은 대학의 제자였습니다.”
 
  — 정말인가요?
 
  “사실입니다. 서울대 재학생의 4분의 1 정도는 대학에 입학해선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진정으로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서울대 입학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에 입학을 못 합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대입 성적과 학문의 문제의식 내지 열정은 역(逆)비례합니다.”
 
 
  “추종자 학문을 할 때는 서울대가 우수하죠”
 
  — 젊은 시절 만난 제자들을 편애해서 그런 말씀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서울대 학생이 우수하다? 점수를 잘 딴다는 것과 우수하다는 것은 별개입니다. (서울대생은) 창조적 학문을 못 하게 돼 있습니다. 할 수 없게 돼 있고 하지 않으려 합니다.
 
  추종자 학문을 할 때는 서울대가 우수하죠. 우리가 선도자 학문을 하거나 창조적 문학을 할 때는 서울대가 안 돼요. 아니, 서울대생이 우수하다는 생각을 깨지 않으면 나라가 안 되는 거예요.”
 
  — 서울대를 없애면 달라질까요.
 
  “폐지하면…, 이놈을 없애면 다음 놈이 서울대가 됩니다. 그러니까 ‘학벌’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야 해요. 서울대 박사보다 더 우수한 박사가 나오게 해야 합니다. 지금의 대입제도가 있는 한 진정으로 우수한 학생은 낙방하게 돼 있어요.
 
  제가 입학할 때 서울대 입학시험이 논술이었어요. ‘춘향전의 문헌학적 가치를 논하라’ ‘고려시대 토지제도를 논하라’가 시험문제였어요. 지금 저더러 수능 보라고 하면 입학을 못 합니다.”
 
  — 서울대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역대 정권이 바뀔 때면 사정(司正)을 해서 각종 비위로 전 정권 인사들을 물갈이하는데, 옷 벗는 이의 절반이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간 빈자리를 메우는 이의 절반이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고 합니다.
 
  “서울대 법대만이 아니라 법률 하는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는 헌병이 지휘하는 나라와 같아서 지휘받는 사람을 두렵게 하는 힘이 전투력과는 무관합니다.
 
  법률을 전공한 사람은 무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알아요. 무얼 해야 한다는 것보다 말이죠. 법대를 나왔어도 변호사나 판검사를 하지 않고 다른 경험을 쌓았다면 신분 세탁은 됩니다. 독학으로 고시 한 사람, 절대 안 됩니다. 시야가 너무 좁습니다.”
 
  — 유감스럽게도 지금 여야 대선 후보들 역시 법률 전공자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어차피 무면허 운전수인데…, 무면허끼리 싸우면서 국민 편을 좌우로 가르는 게 너무 우스워요.”
 
  — 후보 중에 정이 가는 사람은 없나요.
 
  “없어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하면 법 하던 사람은 그만둬야 해. 법 하던 사람이 제일 무식해. 왜냐하면 법 외에는 모르니까. 지금 후보 중에 법 하던 사람을 불신해요.
 
  고시 합격해 판검사, 변호사 하던 사람은 물러나야 해요. 다 무식해요. 공부하고 인생을 겪어본 사람, 세상 물정을 경험한 사람이 나아요.”
 
  조 교수는 너무 매정하게 말했다 싶었는지 한마디 더 보탰다.
 
  “그래도 자신이 무면허인 것을 알기만 하면 희망이 있어요.”
 
  기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계속 솟아올랐다.
 
  — 공부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왜 여러 영역의 공부를 넘나들었습니까.
 
  “학문의 터는 건축물처럼 터를 넓게 잡아야 깊게 파고 높게 세울 수 있습니다. 이는 공부의 밑면이 넓어야 꼭짓점이 높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공부는 넓게 하고 연구는 좁게 시작하라고 해도 됩니다.
 
  또 수입학을 하는 사람은 식당 가서 음식을 사 먹는 사람이지만, 창조학을 하는 사람은 농사를 지어 밥까지 해 먹어야 하니 많은 시간을 요합니다. 4·19혁명을 경험하면서 정치혁명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문화 내지 학문 혁명까지 완수해야 할 책임을 느꼈고, 그 혁명은 길에서 시위하는 게 능사가 아니고, 도서관에 앉아 독하게 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詩 쓰는 시인과 같은 자세가 공부의 첫걸음”
 
조동일 교수가 2002년 베이징외국어대학에서 강연하고 있다.
  — 지방의 대학원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도들을 위해 격려의 말씀 부탁합니다.
 
  “지방뿐만 아니라 어느 대학, 대학원에서, 인문학만이 아닌 다른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시(詩) 쓰는 시인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돈이 되니, 남들이 알아주니까 시를 쓰는 시인은 없습니다. 있다면 사이비입니다.
 
  학문에서 하는 창조활동이 무조건 좋아서 열정을 바쳐 노력하면 득도의 경지에 이르러, 학문을 살리고 세상을 구하는 커다란 쓰임새를 얻습니다. 지금 학령인구가 줄고 대학교수 자리도 줄어들지만, 유튜브 등 포털을 통해 참신한 학문을 강의하는 ‘학문 자영업자’가 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 예? 학문 자영업자요?
 
  “코로나19로 인한 대면수업 대신 화상강의 시대를 기회로 잡아서 대학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이 자유롭게 강의해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유튜브 방송을 왜 하느냐. ‘문화복지’의 모범을 보이려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우리를 이끌 이론이 대등론이고 창조주권론이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방송을 합니다.
 
  학문 자영업자들이 많아야 온 국민이 평생교육을 받을 수 있어요. 양질의 강의로 문화복지의 혜택을 골고루 제공해 사고의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그게 문화복지입니다.”
 
 
  학문 자영업자의 길
 
  조동일 교수는 “경제복지만 생각해선 안 된다”며 거듭 문화복지, 학문 자영업을 강조했다.
 
  “지금 세상이 경제복지만 생각합니다. 자꾸 괴이한 범죄가 발생하는데 그걸 엄벌주의로 막으려고 해요. 안 됩니다. 경제복지 못지않게 문화복지를 강화해 문제를 완화시키고 사람들의 사고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사람의 배만 채우지 말고 머리를 채워줘야 합니다. 배만 채우니까 불만이 더 심해져요.
 
  이봐요. 정부가 자꾸 돈을 주니까 박탈감이 더 생겨요. 정부가 지식을 주면 박탈감이 안 생깁니다. 저는 재난지원금을 한 번도 안 받았어요. 결국 전화가 와요. 돈 받으라고. 안 받습니다. 아니, 연금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돈을 왜 줘요? 돈을 그렇게 주면 박탈감이 더 생겨요. 모욕감을 느낍니다.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부동산이 너무 뉴스가 되니까 박탈감이 더 생겨요. 제도를 고치더라도 조용히 고쳐야 해요. 고칠 생각이 없고 표만 얻으려고 하니까 더 떠들어요. 고칠 생각이 있으면 조용히 고치면 됩니다. 다 고쳐놓고 ‘우리가 이렇게 고쳤다’고 말하면 됩니다.”
 
  — 학문 자영업자가 학벌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면 학벌사회가 없어집니다. 대학에서 주는 학위, 나라에서 주는 학위가 따로 있어야 합니다. 나라에서 주는 학위가 더 공신력이 있다면 학벌사회가 사라집니다. 대안이 대한민국학술원입니다. 학술원에서 학문 자영업자가 공개 강의를 하고, 그 강의를 들은 학생이 졸업도 하고 학위도 받을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학벌사회, 입시교육이 없어져요.”
 
  조동일 교수는 급기야 ‘가짜 박사’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논문 표절은 절도 행위”
 

  “공직을 맡을 후보자의 학위 문제가 늘 논란이 되어왔습니다. 신문은 ‘가짜 박사’라고 크게 보도하죠. 드러난 것만 문제 삼지 말고 가짜 박사를 아주 없애야 합니다.
 
  논문 표절은 물건을 훔치는 것과 같은 절도 행위죠. 연구 윤리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말고 형사범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는 지난 5월13일자 《조선일보》에 〈논문 표절 ‘가짜 박사’ 없애야 선진국이 된다〉는 글을 기고했다.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박사 학위는 대학교수 면허증이다. 가짜 박사는 거짓되게 취득한 운전면허보다 더 큰 해악을 끼친다. 운전면허는 부정으로 발급하는 것을 법으로 막으면서, 박사 학위는 가짜로 취득할 수 있게 방치하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다. 깊이 반성하고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 가짜 박사를 어떻게 없앨 수 있나요.
 
  “표절은 처벌해야 합니다. 박사 논문 표절은 다른 표절보다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표절 여부를 박사 학위를 준 대학에 맡기지 말고 사법기관에서 판정하고 기소해야 합니다. 당사자는 절도죄, 논문 지도교수는 절도방조죄에 해당하는 죄로 처벌해야 합니다.”
 
  조 교수는 또 “박사 지도교수를 특정 대학 교수들이 독점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세상에서 말하는 대학의 등급과 교수의 능력은 상관이 없습니다. 몇몇 대학이 박사 학위 수여를 독점하면 질이 더욱 저하됩니다. 어느 대학에 재직하고 있든 능력이 뛰어나고 의욕이 남다른 교수는 일정한 검증을 거쳐 박사 지도교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박사 과정 강의나 박사 논문 심사는 박사 지도교수들끼리 협의해, 대학의 범위를 넘어서서 전국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렇게 하면 특정 대학의 패권주의가 사라지고 대학의 등급이 없어지도록 하는 전기도 마련할 수 있어요.”
 
 
  “몸은 장대한데 대가리는 요렇게 작아”
 
  — 가짜 박사 문제가 계속 불거지니, 국내 박사를 아예 불신합니다.
 
  “국내 박사를 못 믿으니 해외 박사 학위를 우대합니다. 2018~19년 자료에 따르면 미국 유학생의 국적별 순위는 중국, 인도, 한국, 사우디아라비아 순입니다.
 
  그런데 인구 비례로 계산하면 한국의 미국 유학생 수가 중국이나 인도보다 앞섭니다.”
 
  — 우리나라가 미국 박사 1등이라고요?
 
  “네. 중국의 3배 이상, 인도의 4배 이상입니다. 일본은 한때 우리보다 앞섰지만, 지금은 한국의 5분의 1 수준이고 독일과 미국은 아예 순위권 밖입니다. 미국으로 유학 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지요.
 
  국내 박사가 다 가짜니까 미국 박사라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한국은 세계 6등의 경제 대국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미국 박사만 인정합니다. ‘몸은 장대한데 대가리(머리)는 요렇게 작다’는 겁니다. 이 불균형을 시정해야 합니다.
 
  기술산업 분야에서는 미국과 경쟁해서 이기려 하는데 학문은 아직도 바짝 엎드려 추종이나 하려 하고….”
 
  — 방금 말씀하신 ‘학문’은 인문학을 지칭하는 건가요.
 
  “모든 학문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연과학이 더 심해요. 예외가 없어요.
 
  우리는 언제쯤 노벨상을 받느냐고 자문자답하지만, 해외 학자들이 듣고 코웃음을 쳐요. 왜? 원천연구만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어요. 우리는 원천연구를 못 하게 금지하고 있어요.
 
  연구계획서대로만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문책당해요. 그런데 진짜 원천연구는 (연구)제목이 없고, 계획서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의 추종 연구밖에 못 합니다.”
 
 
  “우리는 남의 추종 연구밖에 못 합니다”
 
  조 교수는 이 대목에서 무척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에 따르면 2019년 현재 181개국에서 14만여명의 외국 유학생이 한국을 찾는다. 중국 유학생 수가 가장 많고 베트남, 몽골, 우즈베키스탄, 일본, 미국, 타이완 순이다.
 
  “서울대에 유학 온 중국인 학생이 저를 찾아왔어요. ‘한국 외교사를 전공해 논문을 쓰려는데 지도교수는 서양 외교사만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한번은 일본인 유학생이 찾아와서 ‘한국 미학을 배우러 왔는데 강의는 서양 미학만 한다’는 겁니다.
 
  외국 유학에 의존하면서 수입학이나 하는 잘못을 청산해야 합니다. 한국 온 유학생들이 선진국인 줄 알고 오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후진국은 수입학만 하고 선진국은 창조학을 한다”
 
서울대 국문학과 시절의 조동일 교수.
  조 교수는 “후진국은 수입학만 하고 선진국은 창조학을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해외 학생들이 몰려드는 시대에 우리 대학은 ‘미국 유학 예비교’로 운영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국산품의 우수성, 이것은 저 혼자 떠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우리말을 배우고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오늘날 인문학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은 하면서, 그 중심을 이루는 국어국문학은 버립니다. 국문학은 순수학문만이 아니고 최대의 실용적 가치를 지닌 응용학문입니다.”
 
  — 대학이 구조조정을 하면서 국문과부터 손을 댑니다.
 
  “서울대 인문대 대학원생 절반이 국문과입니다. 그러나 교수 수는 영문과가 더 많아요. 영어는 게다가 원어민이 가르쳐요.
 
  전국 대학에 국문과가 사라지고 있어요. 그러나 영문과를 없애는 대학은 한 곳도 없어요.
 
  반면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육은 나날이 늘어납니다. 소위 한국어 교육 분야는 계속 늘어나지만, 그 뿌리인 국문과는 잘라버려요.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이처럼 나라가 거꾸로 가는 게 수없이 많아요.”
 
  그는 우리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도 국문과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도 영문과는 한물갔어요. 오직 우리나라만 위세가 높아요. 영문과 위세가 높은 것은 학문을 수입할 때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수입상만 지원하고 수출상은 억제하는 제도를 씁니다. 수출품 만드는 학문 공장은 문 닫으라고 하죠.
 
  국산품의 우수성을 보장한다는 수준의 초보적인 각성을 넘어, 한국인이 인류를 위해 널리 기여하는 지혜가 무엇인지 다각도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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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ic7800    (2021-07-05) 찬성 : 1   반대 : 0
초등학교때부터 고액과외로 답만 달달외어 명문고 명문대 가서 판검사 의사 고위공무원되고 돈으로 미국 유학하어 노벨상 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대입성적이 학문 열정 반비례는 맞는 말입니다. 이공계 갔다가 다시 시험쳐서 의사되는 사람도 있으니...의사와 변호사가 한국만큼 많이 버는 나라 없습니다. 일본 의사 변호사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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