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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이강욱 한국승정원일기연구소장

“두 손 잃던 날, ‘공부하다 죽자’고 결심했다”

글 : 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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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부산 냉장고 부품 공장서 油壓 프레스에 양손 절단
⊙ ‘갈고리 義手’에 붓 끼우고 書堂에서 《四書三經》 등 漢學 독파
⊙ 국책학술기관서 ‘古典번역위원’으로 公認… 논문 심사 의뢰도
⊙ “君臣 간 생생한 역사 기록된 《承政院日記》는 ‘王宮新聞’ 수준”

李康旭
1960년 출생. 제1회 獨學 국문학사 및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유교경전학과 졸업 / 국사편찬위원회 《承政院日記》 정보화사업팀장,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및 역사문헌번역실 수석전문위원. 現 한국승정원일기연구소장
사진=조현호
  1983년 겨울 저녁, 부산 태종대 갯바위 앞 도로. 택시 한 대가 멈춰 선다. 운전대를 잡던 기사가 먼저 내려 뒷문을 열어준다. 엉거주춤 몸을 뒤틀며 나오는 환자복 차림의 사내. 택시는 떠나고 사내는 난간 아래로 기어간다. 깎아지른 절벽의 턱밑으로 파도가 친다. 말로만 듣던 ‘자살바위’ 위에 서고 보니 짧았던 젊은 날의 생애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지나간다. 죽고 싶지만 또 살고 싶은 심경이 복잡하다. 사내는 눈을 감아본다. 골수암으로 다리를 절단하고도 2년밖에 살지 못한 재활병동의 소녀가 떠오른다. 세상에 대한 원한과 서러움으로 밤잠을 못 이루던 그에게 다가와 위로해주던 소녀. 고민이 깊어질 무렵, 한 남자의 불호령이 사내의 귓전을 울린다. 두 팔이 없는 재활훈련 강사였다.
 
  “자네! 지금 다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밥을 남이 떠먹여줘야 하나? 팔목에 덧씌울 고무 밴드를 만들어줄 테니까, 거기에 숟가락을 꽂고 혼자 밥 먹는 연습을 하게!”
 
  차디찬 바닷바람에 사내는 주저앉는다. 살고자 하는 욕구가, 살아야 하겠다는 의지가 저 어두운 갯가를 적시는 밀물처럼 차오른다. 양팔로 간신히 눈물을 닦아내며 일어선 그는 ‘자살바위’에서 그렇게 살아나왔다. 그동안 돌봐주던 고향 친구에게 “3년 안에 내 힘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땐 진짜 자살하겠다”는 각오를 남기고 책에 파묻혔다. 그 결과, 36년이 지난 현재 사내는 고전(古典) 번역·연구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전문가로 거듭났다. 두 손을 사고로 잃었지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기구인 승정원에서 군신(君臣)의 말과 글, 동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를 비롯해 사료(史料)와 고문헌(古文獻)의 가치를 알게 된 이강욱(李康旭·59) 한국승정원일기연구소장의 이야기다.
 
 
  油壓 프레스에 눌린 靑雲의 꿈
 
君臣이 나눈 말과 글, 동정을 기록한 조선시대 3대 관찬사료인 《승정원일기》 원본과 脫草(초서체를 정체로 바꾸는 것) 영인본(복제본).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그 ‘살벌하고 악몽 같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이 소장의 본래 꿈은 장군(將軍)이었지만 신체조건이 따라주지 못했다. 물 건너간 ‘육사(陸士) 입학’을 뒤로하고 다니던 고교를 자퇴한 뒤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친 그는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다. 어떤 어려운 일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입대 전 공부했던 자격증 시험이 떠올랐다. ‘냉동고압가스기계기능사’였다. 희귀한 만큼 취업도 보장되는 자격증이었는데, 입대 전 시험을 보고 아직 결과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무렵 자격증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고 해서, 잠시 일을 했던 부산의 한 냉장고 부품 공장이 생각났다. 이 소장은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해당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게 맞는다면, 유관 업종에서 경력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옛 동료들도 다시 만나볼 심산으로 한 20일 정도 근무를 하던 차에 사고가 났다. 당시 이 소장의 원래 보직은 제품 품질 관리였는데, 현장 일손이 모자라 작업장에 나간 게 그만 화(禍)를 불렀다. 회사에서 새로 들여놓은 300t짜리 유압(油壓) 프레스에서 제품을 꺼내주는 작업을 하다, 상관의 작동 실수로 금형(金型)에 눌려 두 손을 잃게 된 것이다. 1983년 11월 11일, 23세 때 일이었다.
 
 
  “글씨만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
 
  지난 2월 25일 서울 광화문 인근 한국승정원일기연구소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당시의 아찔했던 순간을 담담하게 회고했다.
 
  “완전히 형체가 없어질 정도로 눌렸어요. 제가 기계 뒤쪽에서 보조하다 그랬는데, 앞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다가오지 못할 정도였어요. 저도 뭐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비명 같은) 소리조차 안 나왔죠.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만일 머리를 이렇게 넣었다든지 했다면…. 그런 생각하면 아찔하죠.”
 
  사고 즉시 긴급 이송돼 목숨은 건졌지만 이미 형체가 사라진 두 손은 되찾을 수 없었다. 본인은 물론 가족·지인들의 좌절에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심정이 차고 넘쳤다. ‘나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취업과 결혼은커녕 일상생활조차 힘들었던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
 
  한동안 입에 욕을 달고 살았고 세상을 비관했지만, 그런다고 삶이 그대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가서 의수(義手)를 알아보고 재활치료를 했다. 거기서 각종 기형과 불구가 된 환자들의 처절한 분투기를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글씨만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의사와 하늘에 빌었다. 그때부터 그의 기상 시각은 새벽 다섯 시가 됐다.
 
 
  義手에 펜과 붓을 끼우고
 
  본격적으로 ‘먹고살’ 궁리를 했다. 자신에게 적합한 갈고리형 의수에 펜과 붓을 끼우고 밤낮없이 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 현실적으로 일반 직장에 취업하기는 어려웠다. 자격증 시험에 집중했다. 공인중개사 시험에 최종 합격했고, 공인노무사 시험도 1차 통과를 했다. 2차 시험도 문제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여러 장의 답안을 요구하는 장문의 서술형이라 포기했다. 딜레마에 빠진 이 소장은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다 죽자”고 결심했다. 출발은 한문(漢文)과 사학(史學)이었다.
 
  외숙이 운영하는 서당(書堂)에서 친형들이 한학(漢學)을 배운 영향을 받아, 고전과 사료에 심취했다. 전주 시내의 한 서당에서 5년간 《사서삼경(四書三經)》 《고문진보(古文眞寶)》 《통감절요(通鑑節要)》를 독파했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니 기량도 일취월장했다. 고교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독학사(獨學士)를 취득했으며, 성균관대 대학원 유교경전학과까지 입학·졸업했다. 성균관(成均館) 부설 한림원(翰林院)과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서 고전 번역·연구 관련 고급과정도 통과했다.
 
 
  《승정원일기》와의 만남
 
  세상은 그렇게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를 서서히 주목했다. 1998년 2월 마침내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 국역위원(國譯委員) 시험에 합격, 《홍재전서》(弘齋全書·조선 후기 임금 정조의 문집)와 《일성록》(日省錄·조선 임금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책) 번역을 맡게 됐다.
 
  사실상 프리랜서였지만, 두 손을 잃은 이후 사회가 그에게 허락해준 첫 번째 직장이었다. 사고를 당한 뒤 15년 동안 공부한 결실이었다. 그 무렵, 한창 사료 번역에 심취해 있던 그에게 운명적으로 찾아온 또 하나의 사료가 있었다. 훗날 연구소까지 열게 된 《승정원일기》였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국편에서 작업한 《승정원일기》 정보화사업에 참여했어요. 현존하는 《승정원일기》는 지금 사람이 번역하면 50~60년이 걸릴 정도로 양이 방대해요. 번역 없이 전산화 작업만 해서 원문(原文)을 그대로 컴퓨터에 옮겨도, 전문가가 아니면 바로 읽기가 어렵죠. 그래서 제가 팀장을 맡아서 동료들과 문구마다 표점(쉼표·마침표)을 달고, 기사 내용을 요약해서 제목 다는 작업을 했죠. 예를 들어 내용이 ‘국왕의 명이다’면, ‘임금은 이조판서에 누구를 임명하라고 명했다’ 이런 식으로 다는 거죠. 그때 《승정원일기》를 자세히 읽어볼 수 있었죠.”
 
 
  “광해의 월담까지 《승정원일기》에”
 
영화 〈광해〉의 스틸컷. 이강욱 소장은 “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궐에 갇힌 광해가 담을 넘는 이야기, 강화도에 유배된 광해가 탈출하려고 땅굴을 파다 발각된 이야기까지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왕실과 조정의 대소사가 다 적혀 있어) 거의 ‘왕궁신문’ 수준”이라고 했다. 사진=조선DB
  현재 조선 인조대에서 순종 때까지만 기록이 남아 있는 《승정원일기》는 실록(實錄)과 달리 국왕이 당대에 생존해 있을 때 편찬된 자료로, 《일성록》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관찬사료(官撰史料)’로 꼽힌다. 이 사료들은 다른 사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승정원일기》의 경우 승정원에 속한 정7품 벼슬인 주서(注書)가 한 달 또는 보름 단위로 1권의 책을 작성해 서고에 보관한다. 흘려 쓰는 초서체(草書體)로 속기(速記)를 하기 때문에, 입시기사(入侍記士)가 그걸 다시 보기 좋게 옮겨 쓴다. 이후 한림(翰林·예문관에 소속된 검열관)이 그 기록을 정리해서 왕이 죽은 뒤 사관(史官)들이 실록을 편찬할 때 기초자료로 제공한다.
 
  주된 내용은 군신이 만나서 한 대화, 주고받은 글이다. 편전(便殿)에서 조회가 열릴 때 군신이 문답한 내용, 의식과 행사는 물론 윤대·차대(신하들이 정기적으로 궁중에 입시해 왕의 질문에 답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일) 및 경연(군신이 모여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일) 때 나눈 이야기도 기록한다.
 
  군신이 한자리에 모여 나눈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되기 때문에, 행간에서 역사적 사건들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소장은 “가령 노론(老論) 측에서 영조를 임금으로 옹립하고자, 경종을 밤중에 협박하다시피 해서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관철시키는 대목이 발견되기도 한다”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궐에 갇힌 광해(光海)가 담을 넘는 이야기, 강화도에 유배된 광해가 탈출하려고 땅굴을 파다 발각된 이야기까지 나온다. (왕실과 조정의 대소사가 다 적혀 있어) 거의 ‘왕궁신문’ 수준”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대간[臺諫·관료를 감찰·탄핵하는 대관(臺官)과 국왕에게 직간하는 간관(諫官)을 합쳐 부르던 말]의 계사(啓辭·국사나 논죄에 관해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나 글)에 관한 것”이었다며 “대간은 그 뜻이 받아들여지거나 왕의 비답(批答·답서)이 내려올 때까지 계속 계사를 올리는데, 그 일을 맡은 대간이 죽고 나서도 다른 대간이 이어받아 진행할 정도였다. 다만, 새 당파가 집권하면 대간을 장악해 논조를 바꾸기도 하는데, ‘조정의 언로(言路)’라고 불린 대간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됐는지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고 했다.
 
 
  “‘不屈의 의지’가 있는 사람”
 
2015년 12월 16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승정원일기》 원문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완료 보고회에서 한 참석자가 구축된 DB의 시연을 보고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便殿에서 조회가 열릴 때 군신이 문답한 내용, 의식과 행사는 물론 윤대·차대(신하들이 정기적으로 궁중에 입시해 왕의 질문에 답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일) 및 경연(군신이 모여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일) 때 나눈 이야기도 기록돼 있다. 사진=뉴시스
  이 소장은 이후 국편에서 진행한 《조선왕조실록》 대국민 온라인 서비스 사업에 윤문·교열팀장으로 참여했고,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국역연수원에서 ‘사료번역실습’이라는 강의를 열어 후학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승정원의 업무규정집 《은대조례(銀臺條例)》를 번역했고,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실 수석전문위원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2010년 승정원일기연구소와 부설기관 ‘은대학당’을 열어 동료·후학들과 함께 수년간 3대 관찬사료 번역·연구에 매진했다. 사료 연구 중심의 학계와 사료 정리 중심의 국책학술기관 사람들이 서로 모여 토론하는 ‘공부의 장’을 만들고 싶었다. 사무실 마련이 어려울 때는 서울역 앞 대우재단빌딩 2층 세미나실을 빌려 공부했다. 이후 이 소장이 관련 강좌를 열어 수강생들을 모집, 후원금과 수강료를 모아 광화문 옥빌딩 7층에 위치한 아담한 강의실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소장과 제자들은 지금도 그곳에 매일같이 나와 강연을 듣고 발제를 하고 강독회를 여는 등, 열심히 고전 공부를 해나가고 있다.
 
  생을 포기한 ‘방황 청년’에서 어엿한 ‘고전 선생님’이 된 이 소장을 제자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8년 동안 그에게 사료 번역을 배웠다는 한 수강생은 “다른 데서 20년 넘게 번역한 분들에게 자문을 하면, 그분들도 헷갈리는 내용이 있다. 그때 그분들은 ‘이럴 것 같다’고 넘겨짚어 해석한다”며 “(반면) 소장님은 왜 이런 번역이 나오는지 근거 자료를 다 찾아서 학생으로 하여금 ‘승복’하게 만든다. 워낙 꼼꼼하고 철저하게 사료 연구를 하기 때문에 학생들도 (몰랐던 것을)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또 다른 5년 차 수강생도 “공부하다 모르는 용어가 나와도, (이 소장이) 자료를 통해 ‘이거는 이거다’라고 명쾌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확실히 기량이 늘어나는 느낌이 든다”며 “항상 끊임없이 연구하고 논문 작업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도 용기를 얻는다”고 했다. 동(同) 대학원 선후배 간으로 인연을 맺은 부인 노효경씨의 말이다.
 
  “(연애할 때) 학교에서 친구랑 같이 만났는데, 저 사람 그때부터 ‘불굴의 의지’가 상당히 있었어요. 성향도 긍정적이었고요.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뭔가를 끝없이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것들에 믿음이 갔어요. 지금도 단순히 부부관계를 넘어서, 선배가 저의 패션(passion·정열)일 정도로 존경스럽게 느껴져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이 분야에 와서 (남편이) 나름 이뤄놓은 것들이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사학 쪽으로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원전(原典) 연구로 상도 받고 그랬거든요. 번역하다가 (스스로) 터득해서 연구 쪽까지 개척한 거죠. 지금도 관부문서, 국왕문서 관련해서는 논문 심사 의뢰도 많이 들어오고 사회적으로 많이 인정받고 있어요.”
 
 
  “인공지능 번역 시대, 종사자들 고민해야”
 
  이 소장은 곧 연구소장직을 내려놓을 예정이다. 한국승정원일기연구소가 출범한 지 햇수로 10년이 됐고, 이제는 번역 중심의 민간기관이 아니라 ‘고전 연구전문기관’으로 개편하고자 내린 용단이다. 내실을 기하고자 사단법인 체제로 만들고 학계의 명망 있는 인사를 초빙해, 이사장 겸 새 소장으로 앉힐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연구소를 완전히 떠나는 건 아니다. 이사로 재직하면서 새로 온 전문가들과 함께 연구소의 발전을 도모할 계획이다. 연구소의 새 명칭은 ‘(사)은대고전문헌연구소’로 정해졌다.
 
  “알파고-이세돌 대결 이후 고전 번역 업계도 변화를 많이 겪었어요. 《승정원일기》만 해도 사람이 번역하면 수십 년 걸릴 일을, 인공지능으로 시험해보니 기간이 훨씬 단축됐거든요. 저는 15~16년 전 국편에서 《승정원일기》 정보화사업을 할 때부터 ‘한 20년 후에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다 번역하겠다’고 봤어요. 물론 아직 (기계 번역에 대해) 찬반이 엇갈리고 있어요. 특히 관찬사료 번역은 개인 문집을 번역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수준 높은 번역을 하려면 역사적 배경이나 행간의 함의를 깊게 알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이 정도 속도에 기존 자료만 충분히 데이터화한다면, 인공지능이 (《승정원일기》 등을) 다 번역할 날도 곧 다가오리라고 봐요.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대비해야 해요. (인공지능이 사료 번역 시 참고해야 할) 조선시대 법전(法典)이나 관서지(官署誌) 등을 우선 번역해서 축적할 것인지, 아니면 번역만 고집할 게 아니라 학술연구 분야를 더 개척해야 할 것인지 고민할 시기가 왔다는 거죠.”
 
 
  一切唯心造
 

  “고전 번역의 정신은 옛사람과 현대인을 이어주는 소통의 정신”이라던 이 소장은 현재 다산(茶山) 정약용의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번역 중이다. 다산이 생각한 법과 형벌론을 다룬 이 책은, 정조 시대 때 전국의 살인사건 전말과 판결을 집대성한 일종의 판례집인 《심리록(審理錄)》에 바탕을 뒀다. 이 소장은 “《흠흠신서》 내용 반 이상이 《심리록》과 중복이 된다”며 “《심리록》에는 정조와 신하들이 각 사건을 추리하고 형조(刑曹)의 판결이 타당했는지 검토하는 대목이 나온다. 문화 콘텐츠 분야를 연구하거나 극본 쓰는 분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내용들이 상당히 많다”고 했다.
 
  이 소장이 장애를 극복하고 일평생 ‘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희망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조언이다.
 
  “자살바위를 돌아 나오면서 영화관을 갔어요. 병원 밥 대신 빵도 사 먹어보고, 여관에 가서 머리도 감아봤죠. 이왕 살겠다고 마음먹은 거, 한번 제대로 살아보려고요….
 
  그때부터 《불경》에 나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글귀를 가슴에 새기고 살았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 마음과 생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죠.
 
  장애인분들에게 꼭 이 얘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내가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 있어요. 더 밝은 세상이 될 수 있어요. 하나의 생각, 하나의 마음 안에 갇혀 있지 말아야 해요. 남의 시선에 너무 주눅 들 필요도 없고요. 지금도 지하철을 타면 제 의수를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고, (자리가 나서) 제가 한가운데 앉으면 양옆의 사람들이 동시에 일어난 적도 많았어요. ‘내가 틀린 게’ 아니라, ‘나와 다르니까’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언제든 어디서든 용기를 잃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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