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말 일본 자동차 시장 2위인 혼다와 3위 닛산 합병 논의 발표… 합병 시 현대기아에 필적 예상
⊙ 혼다가 닛산에 구조조정 요구하면서 협상 결렬… 서로 다른 기업 문화도 원인
⊙ ‘기술의 닛산’, 경영진-노조 야합, 노조 경영 참여 끝에 ‘파벌의 닛산’으로 전락
⊙ 아이폰 만드는 홍하이(폭스콘)도 닛산 인수 관심… 애플도 나설 가능성 있어
朴正圭
1968년생. 한양대 기계공학과 졸업, 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과 석사, 일본 교토대 정밀공학과 박사, 미국 미시간대 방문학자 / 기아자동차 중앙기술연구소 연구원, 日 교토대 정밀공학과 조교수, LG전자 생산기술원, 현대자동차 자동차산업연구소·해외공장지원실 근무, 한양대 미래자동차공학과 겸임교수 역임 / 번역서 《반도체초진화론》 《실천 모듈러 설계》 《모노즈쿠리》
⊙ 혼다가 닛산에 구조조정 요구하면서 협상 결렬… 서로 다른 기업 문화도 원인
⊙ ‘기술의 닛산’, 경영진-노조 야합, 노조 경영 참여 끝에 ‘파벌의 닛산’으로 전락
⊙ 아이폰 만드는 홍하이(폭스콘)도 닛산 인수 관심… 애플도 나설 가능성 있어
朴正圭
1968년생. 한양대 기계공학과 졸업, 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과 석사, 일본 교토대 정밀공학과 박사, 미국 미시간대 방문학자 / 기아자동차 중앙기술연구소 연구원, 日 교토대 정밀공학과 조교수, LG전자 생산기술원, 현대자동차 자동차산업연구소·해외공장지원실 근무, 한양대 미래자동차공학과 겸임교수 역임 / 번역서 《반도체초진화론》 《실천 모듈러 설계》 《모노즈쿠리》
- 2024년 12월 23일 닛산 CEO 우치다 마코토(왼쪽)와 혼다 CEO 미베 도시히로(오른쪽)는 양사가 합병 논의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사진=AP/뉴시스
한마디로 ‘카마겟돈(Carmageddon·최후의 전쟁터를 뜻하는 아마겟돈과 자동차의 합성어)’이다. ‘자동차 산업의 붕괴’라는 의미의 카마겟돈은 자동차 산업에 진입하고자 하는 신생 업체의 도전에 대한 완성차 메이커의 두려움의 표현이다. 지금 자동차 산업은 테슬라가 먼저 스마트한 전기차(Smart Electric Vehicle)를 선보이면서 시장을 장악하고, 중국에서는 BYD, 화웨이, 샤오미와 같은 기업들이 이를 뒤따라가면서 기존 자동차 메이커에 도전하는 형국이다. 특히 중국의 BYD는 2024년에 427만 대의 차량을 판매하여, 글로벌 6위로 부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자동차 메이커도 바쁘게 배터리 기업과 합작사를 만들어 전기차를 출시하고 있다. 하지만 뒤처지는 기업도 나오면서 기업 간의 합종연횡(合從連橫)이 활발하다.
작년 12월 23일 일본의 2위, 3위 자동차 메이커인 혼다와 닛산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합병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로 국내 자동차 업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합병에 성공한다면 현대차그룹(현대차·기아)에 필적하는 규모가 되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마치 합병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지난 2월 5일 혼다와 닛산은 합병 협의가 중단되었다고 발표했다. 도대체 혼다-닛산 합병 협의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합병 결렬에까지 이르렀을까. 최근 연일 보도되는 자동차 산업 뉴스는 관련 전문가조차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자동차 산업 백 년 만의 대격변기에 많은 이들이 테슬라, BYD와 같은 혁신 기업에 주목하고 열광하고 있다. 이는 당연하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판매 대수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기업 또한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닛산과 미쓰비시 자동차다.
지금이야 토요타가 일본 자동차 메이커를 대표하지만, 과거에는 닛산이 일본의 대표 기업이었고, 미쓰비시 자동차는 현대차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의 언론을 살펴보면 닛산과 미쓰비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다. 소위 ‘파벌의 닛산’ ‘은폐의 미쓰비시’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어떠했기에 과거의 영화(榮華)는 사라지고 이제는 합병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기술의 닛산
일본 자동차 산업의 역사는 하시모토 마스지로(橋本增治郞·1875~ 1944년)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1911년에 가이신샤(快進社)라는 자동차 메이커를 설립하여 1914년에 ‘닷트(DAT)’라는 일본 최초의 차량을 만들었다. DAT는 차량 개발에 헌신한 덴 겐지로(D), 아오야마 로쿠로(A), 다케우치 메이타로(T)라는 기술자 3명 성(姓)의 이니셜이다.
이후 당시 일본의 재벌 기업인 도바다 그룹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1934년에 정식으로 닛산자동차공업주식회사가 탄생했다. 닛산은 1966년 프린스 자동차 공업과 합병한다. 프린스는 항공기를 만들다가, 전후(戰後) 업종을 변경하여 자동차를 만든 회사로, 고급 엔지니어가 많이 근무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유명 기술자들은 항공기 사업에 종사했고,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직종을 바꾸어 자동차와 열차(신칸센) 제작사로 자리를 옮겼다. 프린스도 그런 회사 중 하나였다.
이렇게 확보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닛산은 1973년에 미국 환경청의 연비 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80년대에 닛산은 ‘젊음의 선택. 선진 기술을 기준으로 차를 선택한다면 닛산’이라는 문구를 신문 광고에 싣기 시작했다. 이후 닛산은 TV 광고를 통해 단순하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기술의 닛산’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반복적으로 내보내면서 오늘날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의 닛산’이라는 용어가 자리 잡았다.
가와마타 가쓰지와 시오지 이치로
과거 일본을 대표하던 기업이 지속적으로 인수 합병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닛산을 ‘기술의 닛산’이라고 하지만, 닛산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용어도 상당히 많다. ‘파벌의 닛산’ ‘노동귀족’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지속되는 닛산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2025년 2월 1일 일본의 주간지 《동양경제》에 실린 〈혼다-닛산 통합 쇼크, 자동차 대재편 시대〉라는 커버스토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전후 일본에서는 ‘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이라는 산업별 노동조합이 등장했는데, 닛산은 일본 노동운동의 본거지였다. 이때 좌파 계열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작업을 한 인물이 가와마타 가쓰지(川又克二·도쿄상업대학 졸업)다. 그는 일본흥업은행 전무이사로 근무하다가 1953년 닛산으로 자리를 옮긴 뒤 제2노조 설립을 주도했고, 1957년에 닛산의 사장이 됐다. 기존 노조를 견제하기 위해 제2노조를 만든 것인데, 이것이 ‘파벌의 닛산’을 만들어낸 단초가 됐다. 이는 토요타와 닛산이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에 토요타는 노동 분쟁을 잘 극복하고, 노동자가 공장 개선의 주역이 되는 ‘토요타 생산방식’을 만들어냈다.
1961년에 시오지 이치로(鹽路一郞·메이지대학 법학부 야간 졸업)라는 인물이 제2노조 위원장이 됐다. 그는 1986년까지 20년 넘게 닛산 노조를 장악했다. 가와마타 사장은 이런 노조와 야합(野合)하는 형태의 경영 방식을 취했다. 노조가 파업을 선언하면 적당한 수준의 당근을 제시하면서 무마한 것이다. 노조 위원장을 사장급으로 대우해 주었고, 닛산의 임원 인사 및 예산 배분을 포함한 경영 판단에 노조가 개입하는 이례적인 형태의 경영 체제를 구축했다. 이러다 보니 닛산에서는 노조에 밉보이면 회사 임원이 될 수 없었다. 한때 닛산 노조는 계열사까지 합쳐서 23만 명에 육박했다. 노조원들이 노조 위원장을 ‘닛산의 천황’이라 부를 정도로 노조 위원장은 군림하는 존재였다. ‘노동귀족’이라는 말은 1986년 다카스기 료(高杉良)라는 소설가가 닛산의 노조 위원장 시오지를 주인공으로 쓴 다큐멘터리 형식의 소설 제목에서 나왔다.
‘파벌의 닛산’
1973년 가와마타 사장은 회장으로 올라갔다. 이후 1977년 새로 사장으로 취임한 이시하라 다카시(石原俊·도호쿠대학 법학부 졸업)는 당시 닛산에 만연해 있는 노사(勞使) 밀월 관계를 청산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닛산은 회장파(가와마타)와 사장파(이시하라)로 양분됐다.
이시하라 사장은 당시 미일(美日) 무역 마찰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 및 유럽 현지에 공장을 세우는 ‘글로벌10’이라는 정책을 수립, 실행했다. 시오지 노조 위원장은 가와마타 회장 및 노조 출신의 임원들과 한편이 되어서, 이시하라 사장의 해외 사업 확장을 반대했다. 이로써 본격적인 파벌 싸움이 시작되었다. 회사 간부들은 경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파벌 싸움에 몰입했다. 이 대립은 1984년 일본의 주간지에 갑자기 시오지 노조 위원장의 금전 문제와 여성 스캔들 사진이 게재되면서 마무리된다. 이 사진은 사장 측에 줄을 선 인사부 내 대책팀이 잡지사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의 권력 투쟁의 와중에 유능한 인물이 회사에서 제거되는 일도 발생했다. 가타야마 유타카(片山豊·게이오대 경제학부 졸업)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일본 본사에서 일어나는 파벌 싸움을 지켜보면서도 묵묵히 미국 내에서 차량 판매에 몰두하여 닛산의 대표 스포츠카인 페어레이디 Z 차량을 론칭시키고 ‘닷산(DATSUN)’ 브랜드를 성공시켰다. 그의 헌신 덕분에 1975년 닛산은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 중 북미 시장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회사가 되었다. 이에 ‘수출의 닛산’이라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1977년 일본 국내에서 파벌 싸움에 몰두하고 있던 회장과 사장은 의기투합하여 사장 후보로 유력시되던 가타야마를 귀국시켜 닛산의 자회사인 광고대리점 사장으로 좌천시켰다. 1980년에는 가타야마가 공들여 성공시킨 닷산(DATSUN) 브랜드까지 없애버렸다. 이처럼 능력보다는 파벌이 인사를 좌우하는 닛산의 문화는 결국 회사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이순신 같은 관계는 대기업에서도 곧잘 일어나는 스토리다. 아이러니하게도 닛산에서 밀려난 가타야마는 1998년 미국 시장에서 서비스를 중시하는 판매망을 구축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자동차 전당(Automotive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다.
르노와의 제휴
파벌 싸움이 심한 조직에서 상대방을 제거하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남용하면서 또 다른 부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닛산이 그랬다.
이시하라 사장은 독자적인 경영권을 확보한 후, 해외 진출 전략을 가속화하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많은 돈을 빌렸다. 나름 타당한 전략이었지만, 문제는 너무 지나쳤다는 점이다. 닛산의 부채(負債)는 계속 증가했다. 설상가상으로 1992년 이시하라 사장이 물러날 즈음에는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되면서 경영이 더욱 악화되었다.
닛산은 1992~1995년 4년 연속 당기순손실을 기록했고, 유(有)이자부채는 2조 엔이 넘었다. 닛산은 1996년 일시적으로 흑자를 냈지만, 1997년에는 다시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이 무렵에는 일본의 금융기관들도 자신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닛산에 더 이상 대출을 해줄 수 없었다.
결국 파산 직전의 위기에 처한 닛산은 1999년 프랑스 르노에 주식 36.8%를 내주고, 재건 책임자로 카를로스 곤(Carlos Ghosn)을 받아들였다. 닛산도 르노 지분 15%를 인수하여 표면적으로는 서로 간에 상호 출자하는 형태였지만, 닛산의 르노 지분 15%에는 의결권이 없었다.
닛산호에 승선한 곤은 회사를 재건하는 데에 있어서 압도적인 리더십을 보여줬다. 곤은 ‘비용 절감’을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곤의 닛산은 공장 폐쇄, 자산 매각, 총 직원의 14%에 달하는 2만1000명의 직원 감원(減員), 그리고 계열 부품 공급업체와의 거래 관계 재검토 등을 실시했다. 곤은 그동안 일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형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2003년에는 누적 부채 2조 엔을 청산했다. 그 공로로 2004년 그는 천황으로부터 외국인 경영자로서는 처음으로 훈장을 받았다. 2005년 곤은 르노-닛산의 CEO가 됐다.
글로벌화된 ‘파벌의 닛산’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르노가 닛산의 모(母)회사지만, 나름 대등하고 독립적인 형태로 운영을 하면서 그 정점에서 곤이 미묘한 밸런스를 유지했다.
르노가 자본 제휴한 2000년 판매 대수를 비교하면 닛산은 263만 대, 르노는 238만 대였다. 하지만 2014년 판매 대수는 닛산이 532만 대, 르노가 271만 대였다. 닛산의 판매 대수가 르노의 2배가 될 정도로 닛산이 성장한 것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닛산이 기술·생산·판매 면에서 월등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반대로 르노 입장에서는 자기보다 몸집이 두 배나 커진 닛산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싶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가 새로운 파벌로 나서면서 닛산의 고질병 같은 권력 투쟁이 글로벌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2014년 4월 르노의 주식 15%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 정부는 일명 플로랑주(Florange)법을 만들었다. 2년 이상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는 주(株)당 1표인 의결권이 주당 2표로 늘어나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 법은 마크롱 대통령이 경제산업부 장관에 있을 때 만들어졌다. 그는 정부 개입주의를 강화하여 2015년 4월에는 정부가 르노 주식을 더 매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르노는 주주총회에서 플로랑주법의 적용을 승인하여, 최종적으로 정부가 닛산에 대해 28.67%의 의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정부와 닛산은 반발했지만, 곤은 닛산의 독립 경영을 지지했다.
한편 2016년 닛산은 미쓰비시 자동차의 지분 34%를 확보했다. 당시 미쓰비시 자동차는 연비 부정 문제를 일으켜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흔히 미쓰비시 자동차를 ‘은폐의 미쓰비시’라고 부른다.
2000년 미쓰비시 자동차가 23년간 10개 차종 이상의 품질 문제를 은폐해 왔으며, 특히 1992년부터는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하여 고도로 정교한 형태로 문제를 은폐해 왔다는 사실이 검찰 조사로 밝혀졌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002년에 운행 중인 미쓰비시의 트럭 바퀴가 빠져 보도를 걷고 있는 사람이 죽는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 미쓰비시는 단순 정비 불량이라고 주장했다. 이 또한 품질 문제를 은폐한 것이라는 사실이 2004년에 밝혀졌다.
미쓰비시의 문제는 이런 은폐 체질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2016년 3번째 부정 사건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연비(燃費) 조작이다. 당시 일본 내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아서, 미쓰비시 그룹도 직접적으로 미쓰비시 자동차를 지원하기 곤란했다.
이 때문에 닛산이 대신해 나서면서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가 탄생했다. 르노-닛산-미쓰비시는 세계 3위의 자동차 제조사가 되었다. 이때가 닛산의 정점이었다.
2018년이 되자 갑자기 곤은 르노와 닛산의 자본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당시 대통령이 된 마크롱의 프랑스 정부가 곤을 CEO로 재임명하는 조건으로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를로스 곤의 체포
2018년 11월에 카를로스 곤이 갑자기 일본 검찰에 의해서 체포됐다. 임원 보수의 과소(寡小) 기재, 투자 자본의 사적(私的) 유용, 경비의 부정 지출이 죄목이었다. 하지만 일본 검찰이 인신(人身) 구속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르노가 닛산을 흡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책략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곤이 체포된 상황에서 르노는 조기에 닛산과 미쓰비시 자동차를 통합하는 지주(持株)회사 방식의 새로운 체제를 만들고, 그곳에 르노 출신을 회장으로 파견하여 3사를 지배하고 싶어 했다. 프랑스가 제시하는 지주회사 방식이 채택된다면, 새로 설립되는 지주회사의 대주주는 프랑스 정부가 된다. 왜냐하면 2019년 1월 21일 기준으로 르노와 닛산의 시가총액은 각각 2조1100억 엔과 3조8700억 엔(르노의 1.8배)이었다. 시가총액 비율로 보면 새 회사 주식을 르노가 35%, 닛산이 65% 가지게 된다. 하지만 당시 르노는 닛산 주식의 43.4%를 보유하고 있었고 르노의 최대 주주는 프랑스 정부였다.(출처: 2019년 3월, 구로가와 논문, 〈르노와 닛산 자동차 제휴의 좌절〉)
곤 퇴임 이후 2019년에 있었던 닛산의 새로운 사장을 뽑는 과정도 흥미롭다. 당시 사장 후보를 지명하는 위원회에 속한 6명 중 3명이 실력파로 알려진 닛산의 세키 준(關潤·방위대학 기계공학과 졸업) 전무를 사장 후보로 추천했다. 하지만 르노는 당시 후보에도 없던 우치다 마코토(内田誠·도시샤대학 신학부 졸업)를 사장으로 선임했다. 그러자 실력보다는 르노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선임되었다는 말이 나왔다. 세키 전무는 닛산에서 넘버 3인 부(副)COO(최고 집행책임자)의 직책을 맡았지만, 얼마 후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는 일본전산(Nidec)을 거쳐 2023년 대만의 홍하이로 옮겨 전기차 사업을 맡았다. 후술하겠지만 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닛산 인수전의 촉매(觸媒) 역할을 하게 된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2023년 2월 르노와 닛산과의 자본 관계는 개편되었다. 르노는 보유하고 있던 닛산 주식(43.4%) 중 28.4%를 프랑스의 신탁회사로 이전, 르노의 닛산에 대한 출자 비율을 15%로 낮추었다. 겉보기에는 양사(兩社)가 동등한 관계가 되었다. 닛산과 일본 정부의 요구가 상당히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탁회사로 이전된 주식에 대해서도 닛산에 우선 매각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5년 만에 판매 대수 40% 하락
위와 같이 글로벌 파벌 싸움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닛산의 판매 대수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한다. 닛산 결산 발표에서 가져온 회계연도별 판매 데이터를 보면, 577만 대(2017년) → 552만 대(2018년) → 493만 대(2019년) → 405만 대(2020년) → 388만 대(2021년) → 330.5만 대(2022년)로 나타난다. 닛산의 판매 대수가 5년간 40% 줄어든 것이다.
닛산의 차량 판매가 떨어진 원인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크게 보면 일본 내에서 토요타의 경쟁력이 더욱 강화되면서 닛산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외국으로 나가면 현대차, BYD, 테슬라와 같은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는데, 닛산의 경쟁력은 향상되지 않았다. 르노의 영향권에 있는 닛산은 차량 개발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의사 결정이 느리다.
지금 돌이켜보면 유럽 자동차 제조사와 비슷한 차량 개발 전략을 펼친 것이 화근(禍根)이었다. 토요타와 혼다가 하이브리드 차량을 개발할 때에 닛산은 전기차 ‘리프(leaf)’를 개발하여 2010년 12월에 출시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당장 전기가 부족해진 일본에서는 전기차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 미국에서는 하이브리드 차량이 많이 판매되고 있지만, 닛산은 제대로 된 하이브리드 차량이 없다.
한편 한정된 자원하에서 공장과 차량 개발에 대한 적절한 배분을 해야 하는데, 닛산은 그 밸런스가 깨져 있다. 2021년에 새로 리뉴얼한 닛산의 도치기(栃木) 공장은 상당한 비용을 들여 공장 자동화를 이루었다. 노동 분쟁이 많은 회사는 일반적으로 공장 자동화를 선호한다. 그런데 닛산은 자원이 한정된 상태에서 차량 개발에 적절한 투자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닛산이 미국에서 판매하는 차량 대부분은 오래전 모델이다. 한마디로 주목받는 신차(新車)가 별로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차량 공급이 부족할 때에는 차량 가격을 올리고 수익력이 좋은 고급 차량을 중심으로 차량을 판매할 수 있었지만, 코로나19 사태가 끝나자 신차가 없는 닛산은 어쩔 수 없이 가격 할인을 하면서 차를 팔 수밖에 없었다. 2023년 닛산의 전체 수익은 영업이익이 3367억 엔이었고, 이 중 북미 시장이 2417억 엔으로 전체 73%를 차지했다. 하지만 2024년도 전체 영업이익은 329억 엔인데, 북미 시장에서는 41억 엔 적자이다. 이렇게 되자 닛산의 독자 생존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토요타, 日 중소 자동차 회사의 방패막이 자임
자동차 산업에서는 ‘규모의 경제’가 존재한다. 초기 투자 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판매량이 확보되어야 이익을 낼 수 있다. 이 ‘규모의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 자동차 메이커는 개발 부문에서는 플랫폼/모듈러 설계 전략을 펼쳤다. 그리고 생산 측면에서는 ‘토요타 생산 방식’을 도입했다.
하지만 최근 자동차 기술의 패러다임이 배터리, 소프트웨어, 반도체로 변화하면서 자동차 메이커는 IT 기업과 같은 막대한 수준의 기술 투자를 해야 하게 됐다. 문제는 이렇게 투자한 비용을 언제 회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기존 메이커는 엔진/하이브리드 차량과 같이 지금 당장 팔리는 차량에 대한 기술 투자와 차량 개발도 해야 한다. 즉 기존 메이커는 미래와 현재를 위해 2중 투자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 점이 신흥 전기차 메이커와 다른 점이다.
이미 1000만 대 규모의 차량을 판매하는 토요타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다이하쓰, 마쓰다, 스바루 등 중소 규모의 자동차 제조사 입장에서는 기술 개발 비용을 감당하기가 힘들다. 만약 이런 기업이 부도가 나서 중국 기업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일본 입장에서는 큰 손실이다.
그래서인지 토요타는 일본 내 중소 자동차 메이커와 협력 관계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왔다. 토요타는 2016년에 다이하쓰를 완전 자(子)회사화했다. 2017년에는 마쓰다의 주식을 5.05% 인수하여 2대 주주가 되었다. 토요타는 스스로 일본의 중소 자동차 메이커를 위한 방패막이 역할을 해온 것이다. 지금 범(汎)토요타에 속하는 회사들의 판매 대수를 다 합치면 약 1700만 대에 이른다.
2019년부터 혼다–닛산 합병설
문제는 혼다와 닛산이다. 2023년 기준으로 혼다의 판매 대수는 398만 대, 닛산은 337만 대인데, 다소 애매한 규모다.
혼다-닛산 합병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2019년 11월 23일 일본 주간지 《다이아몬드》는 이미 특집기사를 통해 혼다-닛산의 통합설을 다루었다. 혼다-닛산과 토요타의 회사 규모 등을 비교하면서 다양한 시뮬레이션 결과물들을 보여주었다. 이런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당시부터 일본 내에서는 혼다-닛산 합병안이 다각도로 검토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2019년 당시 혼다와 닛산이 통합했다면 판매 대수가 1000만 대 규모였겠지만, 지금은 730만 대 수준이다. 그동안 혼다-닛산은 앞에서는 토요타, 현대차와 같은 기존 기업에 밀리고 뒤에서는 테슬라, BYD와 같은 신흥 메이커에 치이는 상황에서 자동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쪼그라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닛산을 노리는 많은 회사가 하나둘 등장했다. 2020년에는 미쓰비시그룹(상사)이 장래 자동차 비즈니스를 위해 자본을 투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실제 협의한 적이 있다.
필자가 알기에 외국 기업으로는 중국의 둥펑(東風)기차가 가장 먼저 닛산에 대한 인수 의향을 내보였다. 둥펑기차는 닛산의 중국 합작사다. 그 뒤를 이어 대만의 홍하이(鴻海), 즉 폭스콘(Foxconn)이 닛산 인수 합병에 나섰다. 홍하이는 아이폰과 같은 전자기기를 위탁 생산하는 EMS 회사로 유명한데, 2021년부터 전기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닛산의 넘버3 출신인 세키 준은 과거 닛산의 중국 합작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고, 현재는 홍하이의 전기차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세키 준이 이번 인수 합병전의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닛산과 혼다의 기업 문화
이런 가운데 작년 연말 혼다-닛산-미쓰비시 합병 검토 발표가 나온 것이다. 당초에는 금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합병안을 검토하고, 2026년 8월에는 이 회사들을 운영할 지주회사를 설립한다는 목표였다. 지주회사의 사장은 혼다가 임명할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합병에만 성공한다면 일본 자동차 산업은 크게 범토요타 계열과 범혼다 계열로 재편된다.
그런데 혼다 입장에서는 경영 통합을 하는 데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 닛산 스스로 상당한 수준의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500만 대에서 300만 대로 회사 규모가 줄어들었음에도 상당한 수준의 잉여 인력과 설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은데 이 중 가장 큰 것이 서로 다른 기업 문화다. 혼다-닛산의 합병 얘기가 나오자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두 회사의 조직 문화가 물과 기름처럼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닛산의 본거지는 도쿄와 요코하마(橫濱) 근교다. 닛산의 본사는 2009년 요코하마로 옮기기 전까지 1968년부터 41년간 도쿄의 긴자(銀座)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닛산은 도심의 세련됨을 중시한다. 또 학벌이 좋은 사람들이 취직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닛산의 임원 수는 혼다의 2배 수준이다. 닛산은 파벌이 많다. 그래서 일본에서 닛산은 부문(본사, 연구소, 생산기술 등) 내 결속력은 강하지만, 부문 간에는 협조하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반대로 혼다는 하마마쓰(濱松)라는 시골 동네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우직함과 투박함이 혼다의 장점이다. 서로 태생부터 다르다.
흔히 닛산을 ‘기술의 닛산’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술자의 닛산’은 아니다. 닛산은 기술자가 경영자가 되기 힘든 회사다. 현재 닛산 경영진 중에는 외국인도 많아 외국어 실력이 승진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는 반대로 혼다는 ‘기술자만 사장이 되는’ 회사다. 그것도 엔진 전문가가 대부분이다.
합병 협상 결렬
교과서적으로 본다면 닛산이 혼다보다 앞선 회사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닛산이 경영 위기에 빠져 있다. 이런 두 회사가 합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시너지 효과도 있을 수 있다. 앞으로 필요로 하는 배터리, 차량 OS 등과 같은 기술 투자를 일원화(一元化)하면, 상당 수준의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 혼다와 닛산의 부품사들 또한 구조 개혁을 통해서 규모를 키워나갈 수 있다. 하지만 합병을 통한 시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혼다 주도로 제대로 된 거버넌스를 확립하는 것이 기본 전제다.
2월 5일 혼다-닛산의 합병 협의가 중단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혼다가 닛산에 강한 구조조정안을 만들어 오라고 요구했지만 닛산의 반응은 느렸다. 혼다 경영진은 닛산이 의사 결정이 너무 느리다며 차라리 닛산이 혼다 자회사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자존심이 강한 닛산은 심한 모독감을 느끼고 반발했다. 이런 과정에서 양사 관계는 오히려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닛산의 미래는 알 수 없다. 이번 합병 무산으로 닛산의 실력이 오히려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다시 대만의 홍하이가 침을 흘리며 닛산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닛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구조조정이다. 이를 닛산이 스스로 해낼 가능성은 현 경영진 체제로는 쉽지 않아 보인다. 홍하이 등과 같은 외부 자본이 닛산을 인수한 뒤에 구조조정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에는 일본 정부가 안전보장법을 이유로 합병을 허가하지 않을 수 있다.
홍하이가 일본 정부의 승인을 끌어내기 위해 미국 기업, 가령 애플과 연합하는 방식도 이제는 상상해 볼 수 있다. 전기자동차 사업을 포기한 애플이지만, 홍하이가 닛산을 구조조정해서 건실한 회사로 만들어내면서 제대로 된 자동차 생산 비즈니스 환경을 구축한다면 다시 자동차 산업에 도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홍하이는 닛산을 개발과 생산 부문으로 분리시킬 수도 있다. 지금 자동차 산업은 워낙 예측하기 힘들기에 이런 억측(臆測)이 억측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닛산 쇠망이 주는 교훈
지금까지 살펴본 닛산의 쇠망사에는 국내 기업이 참고해야 할 교훈이 많이 들어 있다. 적절한 회사 규모와 적절한 수익은 지금과 같은 변화의 시대에 필수적이다. 혼다가 닛산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이유는 세계 1위의 이륜차 판매 실적과 이득 덕분이다. 한마디로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에 혼다는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반면 닛산은 회사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리더십이 없이 부문별 작은 파벌 싸움에 몰두하면서 스스로 화(禍)를 좌초했다. 그래서 닛산은 지금과 같은 변혁기에 제대로 된 학습과 변화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이런 닛산의 케이스는 한국 제조 기업에도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작년 12월 23일 일본의 2위, 3위 자동차 메이커인 혼다와 닛산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합병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로 국내 자동차 업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합병에 성공한다면 현대차그룹(현대차·기아)에 필적하는 규모가 되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마치 합병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지난 2월 5일 혼다와 닛산은 합병 협의가 중단되었다고 발표했다. 도대체 혼다-닛산 합병 협의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합병 결렬에까지 이르렀을까. 최근 연일 보도되는 자동차 산업 뉴스는 관련 전문가조차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자동차 산업 백 년 만의 대격변기에 많은 이들이 테슬라, BYD와 같은 혁신 기업에 주목하고 열광하고 있다. 이는 당연하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판매 대수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기업 또한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닛산과 미쓰비시 자동차다.
지금이야 토요타가 일본 자동차 메이커를 대표하지만, 과거에는 닛산이 일본의 대표 기업이었고, 미쓰비시 자동차는 현대차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의 언론을 살펴보면 닛산과 미쓰비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다. 소위 ‘파벌의 닛산’ ‘은폐의 미쓰비시’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어떠했기에 과거의 영화(榮華)는 사라지고 이제는 합병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기술의 닛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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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이 1914년 내놓은 승용차 DAT. 사진=닛산 |
이후 당시 일본의 재벌 기업인 도바다 그룹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1934년에 정식으로 닛산자동차공업주식회사가 탄생했다. 닛산은 1966년 프린스 자동차 공업과 합병한다. 프린스는 항공기를 만들다가, 전후(戰後) 업종을 변경하여 자동차를 만든 회사로, 고급 엔지니어가 많이 근무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유명 기술자들은 항공기 사업에 종사했고,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직종을 바꾸어 자동차와 열차(신칸센) 제작사로 자리를 옮겼다. 프린스도 그런 회사 중 하나였다.
이렇게 확보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닛산은 1973년에 미국 환경청의 연비 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80년대에 닛산은 ‘젊음의 선택. 선진 기술을 기준으로 차를 선택한다면 닛산’이라는 문구를 신문 광고에 싣기 시작했다. 이후 닛산은 TV 광고를 통해 단순하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기술의 닛산’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반복적으로 내보내면서 오늘날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의 닛산’이라는 용어가 자리 잡았다.
가와마타 가쓰지와 시오지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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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지 이치로. 사진=퍼블릭 도메인 |
전후 일본에서는 ‘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이라는 산업별 노동조합이 등장했는데, 닛산은 일본 노동운동의 본거지였다. 이때 좌파 계열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작업을 한 인물이 가와마타 가쓰지(川又克二·도쿄상업대학 졸업)다. 그는 일본흥업은행 전무이사로 근무하다가 1953년 닛산으로 자리를 옮긴 뒤 제2노조 설립을 주도했고, 1957년에 닛산의 사장이 됐다. 기존 노조를 견제하기 위해 제2노조를 만든 것인데, 이것이 ‘파벌의 닛산’을 만들어낸 단초가 됐다. 이는 토요타와 닛산이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에 토요타는 노동 분쟁을 잘 극복하고, 노동자가 공장 개선의 주역이 되는 ‘토요타 생산방식’을 만들어냈다.
1961년에 시오지 이치로(鹽路一郞·메이지대학 법학부 야간 졸업)라는 인물이 제2노조 위원장이 됐다. 그는 1986년까지 20년 넘게 닛산 노조를 장악했다. 가와마타 사장은 이런 노조와 야합(野合)하는 형태의 경영 방식을 취했다. 노조가 파업을 선언하면 적당한 수준의 당근을 제시하면서 무마한 것이다. 노조 위원장을 사장급으로 대우해 주었고, 닛산의 임원 인사 및 예산 배분을 포함한 경영 판단에 노조가 개입하는 이례적인 형태의 경영 체제를 구축했다. 이러다 보니 닛산에서는 노조에 밉보이면 회사 임원이 될 수 없었다. 한때 닛산 노조는 계열사까지 합쳐서 23만 명에 육박했다. 노조원들이 노조 위원장을 ‘닛산의 천황’이라 부를 정도로 노조 위원장은 군림하는 존재였다. ‘노동귀족’이라는 말은 1986년 다카스기 료(高杉良)라는 소설가가 닛산의 노조 위원장 시오지를 주인공으로 쓴 다큐멘터리 형식의 소설 제목에서 나왔다.
‘파벌의 닛산’
1973년 가와마타 사장은 회장으로 올라갔다. 이후 1977년 새로 사장으로 취임한 이시하라 다카시(石原俊·도호쿠대학 법학부 졸업)는 당시 닛산에 만연해 있는 노사(勞使) 밀월 관계를 청산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닛산은 회장파(가와마타)와 사장파(이시하라)로 양분됐다.
이시하라 사장은 당시 미일(美日) 무역 마찰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 및 유럽 현지에 공장을 세우는 ‘글로벌10’이라는 정책을 수립, 실행했다. 시오지 노조 위원장은 가와마타 회장 및 노조 출신의 임원들과 한편이 되어서, 이시하라 사장의 해외 사업 확장을 반대했다. 이로써 본격적인 파벌 싸움이 시작되었다. 회사 간부들은 경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파벌 싸움에 몰입했다. 이 대립은 1984년 일본의 주간지에 갑자기 시오지 노조 위원장의 금전 문제와 여성 스캔들 사진이 게재되면서 마무리된다. 이 사진은 사장 측에 줄을 선 인사부 내 대책팀이 잡지사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의 권력 투쟁의 와중에 유능한 인물이 회사에서 제거되는 일도 발생했다. 가타야마 유타카(片山豊·게이오대 경제학부 졸업)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일본 본사에서 일어나는 파벌 싸움을 지켜보면서도 묵묵히 미국 내에서 차량 판매에 몰두하여 닛산의 대표 스포츠카인 페어레이디 Z 차량을 론칭시키고 ‘닷산(DATSUN)’ 브랜드를 성공시켰다. 그의 헌신 덕분에 1975년 닛산은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 중 북미 시장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회사가 되었다. 이에 ‘수출의 닛산’이라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1977년 일본 국내에서 파벌 싸움에 몰두하고 있던 회장과 사장은 의기투합하여 사장 후보로 유력시되던 가타야마를 귀국시켜 닛산의 자회사인 광고대리점 사장으로 좌천시켰다. 1980년에는 가타야마가 공들여 성공시킨 닷산(DATSUN) 브랜드까지 없애버렸다. 이처럼 능력보다는 파벌이 인사를 좌우하는 닛산의 문화는 결국 회사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이순신 같은 관계는 대기업에서도 곧잘 일어나는 스토리다. 아이러니하게도 닛산에서 밀려난 가타야마는 1998년 미국 시장에서 서비스를 중시하는 판매망을 구축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자동차 전당(Automotive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다.
르노와의 제휴
파벌 싸움이 심한 조직에서 상대방을 제거하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남용하면서 또 다른 부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닛산이 그랬다.
이시하라 사장은 독자적인 경영권을 확보한 후, 해외 진출 전략을 가속화하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많은 돈을 빌렸다. 나름 타당한 전략이었지만, 문제는 너무 지나쳤다는 점이다. 닛산의 부채(負債)는 계속 증가했다. 설상가상으로 1992년 이시하라 사장이 물러날 즈음에는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되면서 경영이 더욱 악화되었다.
닛산은 1992~1995년 4년 연속 당기순손실을 기록했고, 유(有)이자부채는 2조 엔이 넘었다. 닛산은 1996년 일시적으로 흑자를 냈지만, 1997년에는 다시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이 무렵에는 일본의 금융기관들도 자신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닛산에 더 이상 대출을 해줄 수 없었다.
결국 파산 직전의 위기에 처한 닛산은 1999년 프랑스 르노에 주식 36.8%를 내주고, 재건 책임자로 카를로스 곤(Carlos Ghosn)을 받아들였다. 닛산도 르노 지분 15%를 인수하여 표면적으로는 서로 간에 상호 출자하는 형태였지만, 닛산의 르노 지분 15%에는 의결권이 없었다.
닛산호에 승선한 곤은 회사를 재건하는 데에 있어서 압도적인 리더십을 보여줬다. 곤은 ‘비용 절감’을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곤의 닛산은 공장 폐쇄, 자산 매각, 총 직원의 14%에 달하는 2만1000명의 직원 감원(減員), 그리고 계열 부품 공급업체와의 거래 관계 재검토 등을 실시했다. 곤은 그동안 일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형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2003년에는 누적 부채 2조 엔을 청산했다. 그 공로로 2004년 그는 천황으로부터 외국인 경영자로서는 처음으로 훈장을 받았다. 2005년 곤은 르노-닛산의 CEO가 됐다.
글로벌화된 ‘파벌의 닛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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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 CEO 카를로스 곤(왼쪽)과 미쓰비시 자동차 CEO 마쓰코 오사무. 사진=AP/뉴시스 |
르노가 자본 제휴한 2000년 판매 대수를 비교하면 닛산은 263만 대, 르노는 238만 대였다. 하지만 2014년 판매 대수는 닛산이 532만 대, 르노가 271만 대였다. 닛산의 판매 대수가 르노의 2배가 될 정도로 닛산이 성장한 것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닛산이 기술·생산·판매 면에서 월등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반대로 르노 입장에서는 자기보다 몸집이 두 배나 커진 닛산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싶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가 새로운 파벌로 나서면서 닛산의 고질병 같은 권력 투쟁이 글로벌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2014년 4월 르노의 주식 15%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 정부는 일명 플로랑주(Florange)법을 만들었다. 2년 이상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는 주(株)당 1표인 의결권이 주당 2표로 늘어나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 법은 마크롱 대통령이 경제산업부 장관에 있을 때 만들어졌다. 그는 정부 개입주의를 강화하여 2015년 4월에는 정부가 르노 주식을 더 매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르노는 주주총회에서 플로랑주법의 적용을 승인하여, 최종적으로 정부가 닛산에 대해 28.67%의 의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정부와 닛산은 반발했지만, 곤은 닛산의 독립 경영을 지지했다.
한편 2016년 닛산은 미쓰비시 자동차의 지분 34%를 확보했다. 당시 미쓰비시 자동차는 연비 부정 문제를 일으켜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흔히 미쓰비시 자동차를 ‘은폐의 미쓰비시’라고 부른다.
2000년 미쓰비시 자동차가 23년간 10개 차종 이상의 품질 문제를 은폐해 왔으며, 특히 1992년부터는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하여 고도로 정교한 형태로 문제를 은폐해 왔다는 사실이 검찰 조사로 밝혀졌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002년에 운행 중인 미쓰비시의 트럭 바퀴가 빠져 보도를 걷고 있는 사람이 죽는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 미쓰비시는 단순 정비 불량이라고 주장했다. 이 또한 품질 문제를 은폐한 것이라는 사실이 2004년에 밝혀졌다.
미쓰비시의 문제는 이런 은폐 체질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2016년 3번째 부정 사건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연비(燃費) 조작이다. 당시 일본 내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아서, 미쓰비시 그룹도 직접적으로 미쓰비시 자동차를 지원하기 곤란했다.
이 때문에 닛산이 대신해 나서면서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가 탄생했다. 르노-닛산-미쓰비시는 세계 3위의 자동차 제조사가 되었다. 이때가 닛산의 정점이었다.
2018년이 되자 갑자기 곤은 르노와 닛산의 자본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당시 대통령이 된 마크롱의 프랑스 정부가 곤을 CEO로 재임명하는 조건으로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를로스 곤의 체포
2018년 11월에 카를로스 곤이 갑자기 일본 검찰에 의해서 체포됐다. 임원 보수의 과소(寡小) 기재, 투자 자본의 사적(私的) 유용, 경비의 부정 지출이 죄목이었다. 하지만 일본 검찰이 인신(人身) 구속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르노가 닛산을 흡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책략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곤이 체포된 상황에서 르노는 조기에 닛산과 미쓰비시 자동차를 통합하는 지주(持株)회사 방식의 새로운 체제를 만들고, 그곳에 르노 출신을 회장으로 파견하여 3사를 지배하고 싶어 했다. 프랑스가 제시하는 지주회사 방식이 채택된다면, 새로 설립되는 지주회사의 대주주는 프랑스 정부가 된다. 왜냐하면 2019년 1월 21일 기준으로 르노와 닛산의 시가총액은 각각 2조1100억 엔과 3조8700억 엔(르노의 1.8배)이었다. 시가총액 비율로 보면 새 회사 주식을 르노가 35%, 닛산이 65% 가지게 된다. 하지만 당시 르노는 닛산 주식의 43.4%를 보유하고 있었고 르노의 최대 주주는 프랑스 정부였다.(출처: 2019년 3월, 구로가와 논문, 〈르노와 닛산 자동차 제휴의 좌절〉)
곤 퇴임 이후 2019년에 있었던 닛산의 새로운 사장을 뽑는 과정도 흥미롭다. 당시 사장 후보를 지명하는 위원회에 속한 6명 중 3명이 실력파로 알려진 닛산의 세키 준(關潤·방위대학 기계공학과 졸업) 전무를 사장 후보로 추천했다. 하지만 르노는 당시 후보에도 없던 우치다 마코토(内田誠·도시샤대학 신학부 졸업)를 사장으로 선임했다. 그러자 실력보다는 르노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선임되었다는 말이 나왔다. 세키 전무는 닛산에서 넘버 3인 부(副)COO(최고 집행책임자)의 직책을 맡았지만, 얼마 후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는 일본전산(Nidec)을 거쳐 2023년 대만의 홍하이로 옮겨 전기차 사업을 맡았다. 후술하겠지만 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닛산 인수전의 촉매(觸媒) 역할을 하게 된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2023년 2월 르노와 닛산과의 자본 관계는 개편되었다. 르노는 보유하고 있던 닛산 주식(43.4%) 중 28.4%를 프랑스의 신탁회사로 이전, 르노의 닛산에 대한 출자 비율을 15%로 낮추었다. 겉보기에는 양사(兩社)가 동등한 관계가 되었다. 닛산과 일본 정부의 요구가 상당히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탁회사로 이전된 주식에 대해서도 닛산에 우선 매각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5년 만에 판매 대수 40% 하락
위와 같이 글로벌 파벌 싸움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닛산의 판매 대수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한다. 닛산 결산 발표에서 가져온 회계연도별 판매 데이터를 보면, 577만 대(2017년) → 552만 대(2018년) → 493만 대(2019년) → 405만 대(2020년) → 388만 대(2021년) → 330.5만 대(2022년)로 나타난다. 닛산의 판매 대수가 5년간 40% 줄어든 것이다.
닛산의 차량 판매가 떨어진 원인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크게 보면 일본 내에서 토요타의 경쟁력이 더욱 강화되면서 닛산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외국으로 나가면 현대차, BYD, 테슬라와 같은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는데, 닛산의 경쟁력은 향상되지 않았다. 르노의 영향권에 있는 닛산은 차량 개발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의사 결정이 느리다.
지금 돌이켜보면 유럽 자동차 제조사와 비슷한 차량 개발 전략을 펼친 것이 화근(禍根)이었다. 토요타와 혼다가 하이브리드 차량을 개발할 때에 닛산은 전기차 ‘리프(leaf)’를 개발하여 2010년 12월에 출시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당장 전기가 부족해진 일본에서는 전기차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 미국에서는 하이브리드 차량이 많이 판매되고 있지만, 닛산은 제대로 된 하이브리드 차량이 없다.
한편 한정된 자원하에서 공장과 차량 개발에 대한 적절한 배분을 해야 하는데, 닛산은 그 밸런스가 깨져 있다. 2021년에 새로 리뉴얼한 닛산의 도치기(栃木) 공장은 상당한 비용을 들여 공장 자동화를 이루었다. 노동 분쟁이 많은 회사는 일반적으로 공장 자동화를 선호한다. 그런데 닛산은 자원이 한정된 상태에서 차량 개발에 적절한 투자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닛산이 미국에서 판매하는 차량 대부분은 오래전 모델이다. 한마디로 주목받는 신차(新車)가 별로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차량 공급이 부족할 때에는 차량 가격을 올리고 수익력이 좋은 고급 차량을 중심으로 차량을 판매할 수 있었지만, 코로나19 사태가 끝나자 신차가 없는 닛산은 어쩔 수 없이 가격 할인을 하면서 차를 팔 수밖에 없었다. 2023년 닛산의 전체 수익은 영업이익이 3367억 엔이었고, 이 중 북미 시장이 2417억 엔으로 전체 73%를 차지했다. 하지만 2024년도 전체 영업이익은 329억 엔인데, 북미 시장에서는 41억 엔 적자이다. 이렇게 되자 닛산의 독자 생존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토요타, 日 중소 자동차 회사의 방패막이 자임
자동차 산업에서는 ‘규모의 경제’가 존재한다. 초기 투자 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판매량이 확보되어야 이익을 낼 수 있다. 이 ‘규모의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 자동차 메이커는 개발 부문에서는 플랫폼/모듈러 설계 전략을 펼쳤다. 그리고 생산 측면에서는 ‘토요타 생산 방식’을 도입했다.
하지만 최근 자동차 기술의 패러다임이 배터리, 소프트웨어, 반도체로 변화하면서 자동차 메이커는 IT 기업과 같은 막대한 수준의 기술 투자를 해야 하게 됐다. 문제는 이렇게 투자한 비용을 언제 회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기존 메이커는 엔진/하이브리드 차량과 같이 지금 당장 팔리는 차량에 대한 기술 투자와 차량 개발도 해야 한다. 즉 기존 메이커는 미래와 현재를 위해 2중 투자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 점이 신흥 전기차 메이커와 다른 점이다.
이미 1000만 대 규모의 차량을 판매하는 토요타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다이하쓰, 마쓰다, 스바루 등 중소 규모의 자동차 제조사 입장에서는 기술 개발 비용을 감당하기가 힘들다. 만약 이런 기업이 부도가 나서 중국 기업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일본 입장에서는 큰 손실이다.
그래서인지 토요타는 일본 내 중소 자동차 메이커와 협력 관계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왔다. 토요타는 2016년에 다이하쓰를 완전 자(子)회사화했다. 2017년에는 마쓰다의 주식을 5.05% 인수하여 2대 주주가 되었다. 토요타는 스스로 일본의 중소 자동차 메이커를 위한 방패막이 역할을 해온 것이다. 지금 범(汎)토요타에 속하는 회사들의 판매 대수를 다 합치면 약 1700만 대에 이른다.
2019년부터 혼다–닛산 합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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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협력사인 대만의 홍하이(폭스콘)는 2024년 10월 8일 대만 타이베이의 난강전시센터에서 열린 혼하이 테크 데이(HHTD 24)에 최신 전기차들을 내놓았다. 사진=AP/뉴시스 |
혼다-닛산 합병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2019년 11월 23일 일본 주간지 《다이아몬드》는 이미 특집기사를 통해 혼다-닛산의 통합설을 다루었다. 혼다-닛산과 토요타의 회사 규모 등을 비교하면서 다양한 시뮬레이션 결과물들을 보여주었다. 이런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당시부터 일본 내에서는 혼다-닛산 합병안이 다각도로 검토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2019년 당시 혼다와 닛산이 통합했다면 판매 대수가 1000만 대 규모였겠지만, 지금은 730만 대 수준이다. 그동안 혼다-닛산은 앞에서는 토요타, 현대차와 같은 기존 기업에 밀리고 뒤에서는 테슬라, BYD와 같은 신흥 메이커에 치이는 상황에서 자동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쪼그라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닛산을 노리는 많은 회사가 하나둘 등장했다. 2020년에는 미쓰비시그룹(상사)이 장래 자동차 비즈니스를 위해 자본을 투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실제 협의한 적이 있다.
필자가 알기에 외국 기업으로는 중국의 둥펑(東風)기차가 가장 먼저 닛산에 대한 인수 의향을 내보였다. 둥펑기차는 닛산의 중국 합작사다. 그 뒤를 이어 대만의 홍하이(鴻海), 즉 폭스콘(Foxconn)이 닛산 인수 합병에 나섰다. 홍하이는 아이폰과 같은 전자기기를 위탁 생산하는 EMS 회사로 유명한데, 2021년부터 전기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닛산의 넘버3 출신인 세키 준은 과거 닛산의 중국 합작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고, 현재는 홍하이의 전기차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세키 준이 이번 인수 합병전의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닛산과 혼다의 기업 문화
이런 가운데 작년 연말 혼다-닛산-미쓰비시 합병 검토 발표가 나온 것이다. 당초에는 금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합병안을 검토하고, 2026년 8월에는 이 회사들을 운영할 지주회사를 설립한다는 목표였다. 지주회사의 사장은 혼다가 임명할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합병에만 성공한다면 일본 자동차 산업은 크게 범토요타 계열과 범혼다 계열로 재편된다.
그런데 혼다 입장에서는 경영 통합을 하는 데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 닛산 스스로 상당한 수준의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500만 대에서 300만 대로 회사 규모가 줄어들었음에도 상당한 수준의 잉여 인력과 설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은데 이 중 가장 큰 것이 서로 다른 기업 문화다. 혼다-닛산의 합병 얘기가 나오자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두 회사의 조직 문화가 물과 기름처럼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닛산의 본거지는 도쿄와 요코하마(橫濱) 근교다. 닛산의 본사는 2009년 요코하마로 옮기기 전까지 1968년부터 41년간 도쿄의 긴자(銀座)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닛산은 도심의 세련됨을 중시한다. 또 학벌이 좋은 사람들이 취직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닛산의 임원 수는 혼다의 2배 수준이다. 닛산은 파벌이 많다. 그래서 일본에서 닛산은 부문(본사, 연구소, 생산기술 등) 내 결속력은 강하지만, 부문 간에는 협조하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반대로 혼다는 하마마쓰(濱松)라는 시골 동네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우직함과 투박함이 혼다의 장점이다. 서로 태생부터 다르다.
흔히 닛산을 ‘기술의 닛산’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술자의 닛산’은 아니다. 닛산은 기술자가 경영자가 되기 힘든 회사다. 현재 닛산 경영진 중에는 외국인도 많아 외국어 실력이 승진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는 반대로 혼다는 ‘기술자만 사장이 되는’ 회사다. 그것도 엔진 전문가가 대부분이다.
합병 협상 결렬
교과서적으로 본다면 닛산이 혼다보다 앞선 회사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닛산이 경영 위기에 빠져 있다. 이런 두 회사가 합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시너지 효과도 있을 수 있다. 앞으로 필요로 하는 배터리, 차량 OS 등과 같은 기술 투자를 일원화(一元化)하면, 상당 수준의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 혼다와 닛산의 부품사들 또한 구조 개혁을 통해서 규모를 키워나갈 수 있다. 하지만 합병을 통한 시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혼다 주도로 제대로 된 거버넌스를 확립하는 것이 기본 전제다.
2월 5일 혼다-닛산의 합병 협의가 중단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혼다가 닛산에 강한 구조조정안을 만들어 오라고 요구했지만 닛산의 반응은 느렸다. 혼다 경영진은 닛산이 의사 결정이 너무 느리다며 차라리 닛산이 혼다 자회사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자존심이 강한 닛산은 심한 모독감을 느끼고 반발했다. 이런 과정에서 양사 관계는 오히려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닛산의 미래는 알 수 없다. 이번 합병 무산으로 닛산의 실력이 오히려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다시 대만의 홍하이가 침을 흘리며 닛산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닛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구조조정이다. 이를 닛산이 스스로 해낼 가능성은 현 경영진 체제로는 쉽지 않아 보인다. 홍하이 등과 같은 외부 자본이 닛산을 인수한 뒤에 구조조정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에는 일본 정부가 안전보장법을 이유로 합병을 허가하지 않을 수 있다.
홍하이가 일본 정부의 승인을 끌어내기 위해 미국 기업, 가령 애플과 연합하는 방식도 이제는 상상해 볼 수 있다. 전기자동차 사업을 포기한 애플이지만, 홍하이가 닛산을 구조조정해서 건실한 회사로 만들어내면서 제대로 된 자동차 생산 비즈니스 환경을 구축한다면 다시 자동차 산업에 도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홍하이는 닛산을 개발과 생산 부문으로 분리시킬 수도 있다. 지금 자동차 산업은 워낙 예측하기 힘들기에 이런 억측(臆測)이 억측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닛산 쇠망이 주는 교훈
지금까지 살펴본 닛산의 쇠망사에는 국내 기업이 참고해야 할 교훈이 많이 들어 있다. 적절한 회사 규모와 적절한 수익은 지금과 같은 변화의 시대에 필수적이다. 혼다가 닛산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이유는 세계 1위의 이륜차 판매 실적과 이득 덕분이다. 한마디로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에 혼다는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반면 닛산은 회사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리더십이 없이 부문별 작은 파벌 싸움에 몰두하면서 스스로 화(禍)를 좌초했다. 그래서 닛산은 지금과 같은 변혁기에 제대로 된 학습과 변화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이런 닛산의 케이스는 한국 제조 기업에도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