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오쩌둥의 조카 마오위안신이 옌볜의 문화대혁명 주도
⊙ 조선족 지도자 주덕해를 ‘주자파’ ‘간첩’으로 몰아 숙청
⊙ 중공군 지역 지휘부, “옌지시를 피로 물들이고 토문관을 돌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삐라 날조해 조선족 공격
⊙ 옌볜 조선족 政法 계통 간부·경찰 175명 외국 간첩으로 지목… 12명이 맞아 죽고 82명이 불구 돼
⊙ 조선어 신문·방송 문 닫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도 폐지
⊙ 조선족 지도자 주덕해를 ‘주자파’ ‘간첩’으로 몰아 숙청
⊙ 중공군 지역 지휘부, “옌지시를 피로 물들이고 토문관을 돌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삐라 날조해 조선족 공격
⊙ 옌볜 조선족 政法 계통 간부·경찰 175명 외국 간첩으로 지목… 12명이 맞아 죽고 82명이 불구 돼
⊙ 조선어 신문·방송 문 닫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도 폐지
- 1962년 9월 옌볜조선족자치주 성립 10주년을 기념하는 주덕해(가운데). 조선족 지도자였던 그도 문화대혁명의 광풍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올해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1992년 한중(韓中) 수교 이래 양국은 빠른 관계 발전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2016년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보복과 외교적 고압적 태도 및 공격적인 전랑(戰狼) 외교 행각을 실감하면서 한국인의 대중(對中) 인식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특히 미중(美中) 간 패권(覇權) 경쟁과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한국인의 반중(反中)·혐중(嫌中) 감정은 최고치에 달한 상황이다. 중국이 2000년대 초반부터 추진하여온 동북역사공정(東北歷史工程)과 그 후속으로 등장한 문화공정은 한국인의 반중감정을 부추겼다. 이 와중에 중국 조선족(朝鮮族)의 정체성(正體性) 문제와 민족문화도 화두(話頭)가 되곤 했다.
2022년 2월 4일 베이징(北京) 동계올림픽 개막식 공연에 중국 조선족 여성이 한복(韓服) 차림으로 등장하는 영상이 전 세계로 송출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주한 중국 대사관에서 “전통문화(한복)는 한반도의 것이며 동시에 중국 조선족의 것”이라는 입장을 표했다. 한국 내에서는 이를 중국이 전통 의상인 한복을 중국 55개 소수(少數)민족 문화 중 하나로 간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파장이 커졌다.
중국 내부에서 중국 조선족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나, 중국이 표방하는 소수민족 우대 정책의 본질은 어떠한 것일까? 1960년대 중국 대륙을 10년간 휩쓸었던 문화대혁명 당시 옌볜조선족자치주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통해 그 이면(裏面)을 파헤쳐 보도록 하겠다.
‘조반단’의 결성
문화대혁명의 불꽃이 베이징대학(北京大學), 난징대학(南京大學)에서 처음 일어났듯이 옌볜(延邊)의 문화대혁명도 옌볜대학과 옌볜농학원의 일부 학생이 집회를 열어 베이징대학과 난징대학의 혁명적 교직원과 학생들을 지지하고 혁명적 군중을 저지한 옌볜대학 공산당위원회 선전부장 김지운(金址雲)을 해임하라는 대자보를 붙이면서 처음 일어났다.
1966년 6월 20일 중국 공산당 옌볜조선족자치주위원회 문화대혁명 영도소조(領導小組)가 결성되었다. 7월 12일에는 자치주 부주장(副州長) 조용호가 인솔한 문화대혁명 공작대가 처음으로 옌볜대학에 파견되었다. 이후 8월 초부터 비판 투쟁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 공작대가 갑자기 해체되면서 ‘반동적인’ 비판 투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이후 옌볜에서 문화대혁명의 기세는 날로 타올랐다. 이를 적극 지지하는 층은 청년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에 앞장서면서 마오쩌둥(毛澤東)과 그의 사상을 보위하기 위한 홍위병(紅衛兵)을 조직하였다. 홍위병에 가입하는 청년 학생은 출신 성분이 좋아야 했다. 그들은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 등을 타파하는 활동을 벌여 명승고적과 문물을 무차별 파괴하였다.
옌볜의 문화대혁명은 조반단(造反團·‘반란단’이라는 의미)이 조직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66년 8월 하순 베이징, 다롄(大連), 하얼빈(哈爾濱) 등지에서 공부하던 조선족 대학생들이 ‘혁명적 연계(革命串聯)’를 맺기 위해 옌볜에 들어왔다. 그들은 옌볜대학, 옌볜의학원, 옌볜농학원 등의 대학생들에게 조반단을 조직하여 자체적으로 혁명할 것을 선동하였다. 이에 많은 옌볜의 학생이 동조하였다.
마오위안신의 등장
이들의 주도로 1966년 8월 27일 옌볜대학 여학생 기숙사 앞마당에서 ‘8·27 혁명조반단’이 조직되었다. 옌볜대학의 학생들 외에 일부 교수도 가담하였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외지에서 온 학생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과 교직원들은 같은 날 ‘혁명조반단’을 결성하였다. 혁명조반단은 이후 ‘홍기전투연군(紅旗戰鬪聯軍)’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는데, 일명 ‘홍련(紅聯)’이라 불렸다. 결국 옌볜에서 문화대혁명을 주도한다고 자임하는 조직이 두 개 탄생하였다.
이 두 조직은 문화대혁명 주도권을 두고 격렬히 대립하였다. 특히 1967년에 들어서서 옌볜일보사를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졌다. 1967년 1월 4일 상하이(上海)의 조반단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한 8·27 혁명조반단 측은 선전기구를 먼저 탈취해야 한다며 옌볜일보사에 쳐들어가 이곳을 접수하였다.
소식을 들은 홍련 측 군중 수천 명은 이를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하고 옌볜일보사로 가서 신문사를 포위하였다. 8·27 혁명조반단 측도 옌볜일보사로 모여들었다. 두 조반단의 충돌은 피했으나, 이후 8·27 혁명조반단 측이 홍련에 가담했던 군중 100여 명을 옌볜대학에 잡아다 가두고 심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옌볜에서는 보다 과격한 조반단이 조직되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조카인 마오위안신(毛遠新)이 1967년 1월 25일 옌지(延吉)에 왔다. 그는 본래 하얼빈군사공정학원(哈爾濱軍事工程學院)의 1964년도 졸업생이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조카라는 ‘밑천’을 가지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동북 3성[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에서 ‘태상황(太上皇)’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주덕해를 타도하라!’
사인방(四人幇)의 사주를 받은 마오위안신은 문화대혁명을 선동하는 7편의 문장을 발표하여 진정한 조반단을 식별하는 기준은 주덕해(朱德海·1911~1972년·옌볜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렸다고 하면서 주덕해를 타도하고 옌볜에서 진정한 반란파(造反團)를 새로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위안신과 옌볜군사관제위원회(延邊軍事管制委員會)의 지지하에 옌지시와 각 현(縣)에서 각 계통의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紅色造反者革命委員會)’라는 새로운 반란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위원회는 옌볜의 조선족민족지도자인 주덕해를 타도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한편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에 반발하는 새로운 단체가 또 생겨났다. 즉 주덕해를 보호하려는 여러 군중 조직이 연합하여 ‘노동자혁명위원회(工人革命委員會)’ ‘농민혁명위원회’ ‘상업계통혁명위원회’ 등을 결성한 것이다. 옌볜의학원의 ‘베쑨 공사’, 옌지시 2중의 ‘항대(抗大)’ 등의 학생 조직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주덕해는 좋은 간부’라면서 옌볜자치주의 또 다른 핵심 간부인 김명한과 남명학 타도를 외쳤다. 이 결과 옌볜에서는 8·27 혁명조반단, 홍련,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 노동자혁명위원회 등 4개의 파벌이 상호 대립하였다.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는 주덕해의 ‘죄상’을 집요하게 추궁하였다. 1967년 4월 초, 이들은 주(州)당위원회, 주인민위원회, 시(市)당위원회, 시인민위원회, 주공안처, 시공안처 등 기관들과 연합하여 기관홍혁회(機關紅革會)를 결성하였다.
기관홍혁회는 1967년 5월 초부터 주덕해의 지도하에 오랫동안 일해온 주당위원회, 주인민위원회 등 조직의 주요 간부 100여 명을 납치하고 주덕해의 ‘죄상’을 말할 것을 강요했다. 이는 집요하게 전개되었다. 1967년 5월 30일 홍색조반혁명위원회와 대립하였던 노동자혁명위원회 측이 주당위원회 청사에 쳐들어가서 자치주 핵심 간부 전인영(田仁永·한족) 등을 구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기관홍혁회에서는 주덕해의 ‘죄상’을 끌어내기 위해 구금하고 있던 간부들을 주인민위원회 청사로 옮기고 ‘죄상’ 밝히기 작업을 계속 진행하였다.
‘주자파’ ‘매국 역적’이 된 주덕해
1967년 6월 중순에 옌지 시내에서 조반단 간의 상호 무장 대립이 심해지자 홍색반란자혁명위원회(紅色造反者革命委員會) 측에서는 간부 40여 명을 둔화현(敦化縣)의 추리구 임장으로 몰래 빼돌려 거기서 기존의 작업을 계속하도록 했다. 이때 홍색반란자혁명위원회 측에서는 간부들을 구타하는 등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여기서 주덕해의 ‘죄상’을 담은 자료를 만들었다. 이들은 주덕해에게 ‘옌볜에서 으뜸가는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이자, ‘외국과 내통한 매국 역적’이라는 죄명을 씌웠다.
‘죄상’ 밝히기 작업은 1967년 말에야 끝이 났다. 주덕해의 ‘죄상’은 대자보나 팸플릿, 군중을 대상으로 한 연설을 통해 대중에게 선전되었다. 이 팸플릿을 제작한 옌볜농학원동방홍공사(延邊農學院東方紅公社)는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 계열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는 옌볜군사관제위원회[주임 고봉(皋峰)]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우세한 무장력을 동원하여 ‘반국폭동(叛國暴亂)’이라는 누명을 씌워 1967년 8월에는 노동자혁명위원회 측을, 이듬해 봄에는 8·27 혁명조반단 측을 제압하여 옌볜의 최강자가 되었다.
〈불! 불! 불! 피! 피! 피!〉
그 당시 옌볜에 주둔한 군부대를 통솔하는 옌볜군사관제위원회에 의해 무고한 옌볜 시민들이 학살되고 ‘만인갱(萬人坑)’이 발생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반역폭동’ 누명 사건은 조선족의 민족성을 진압하기 위해 대량 학살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1967년부터 고봉은 조선족은 신뢰할 수 없다는 여론을 내내 퍼뜨렸다. 그는 옌볜군사관제위원회 회의에서 “옌지시를 피로 물들이고 토문관을 돌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血洗延吉市, 突破圖們關, 打回老家去)”라는 날조된 삐라를 꺼내 들며 노동자혁명위원회와 8·27 혁명조반단에 누명을 씌워 사람들을 미혹했다. 그들은 또한 스스로 인쇄한 날조된 신문에 “반역자들은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총 300정, 중기관총 2문, 경기관총 6문, 각종 소총 300정을 가지고 있다”는 선동 글을 작성해 여기저기에 퍼뜨렸다. 그러면서 고봉은 즉시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고 선포했다. 대학살의 예고였다.
1967년 8월 5일 이른 아침, 옌볜군사관제위원회는 3168군 장병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옌지를 포위했다. 여기에는 안투(安圖) 주둔군도 동원했다. 옌볜병원입원과와 옌볜의과대학은 3000여 명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옌볜군사관제위원회는 확성기로 ‘노동자혁명위원회’에 ‘엄중경고’와 ‘방화범·살인자 검거 통고’를 발표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조국 동북(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국경에서 끔찍한 반혁명 반란이 일어났다〉와 〈불! 불! 불! 피! 피! 피! 반혁명 반란의 기록〉이라는 전단을 만들어 배포했다.
학살
전단을 만든 저우비종(周必忠)은 “전단의 사진과 글은 모두 거짓이다. 일부는 터무니없는 혐의로 죄를 뒤집어씌웠고, 일부는 날조된 사실이고 옳고 그름을 혼동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옌지시를 피로 물들이고 두만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선동 구호는 그들에게 강제로 죄를 씌우기 위해 조작된 것이다”라고 밝혔다.
1967년 8월 16일 새벽 3시, 마오위안신과 고봉은 최전선 사령부 정치위원 류장위(劉章宇)를 소환해 군사지도를 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주 폭발 지점은 입원실 북쪽에 있다. 폭발이 성공하면 돌격대는 즉시 건물로 진입하라!”
1967년 8월 16일 오전 11시, 옌볜의과대학 연구실 벽이 폭파되면서 입원환자과에 구멍이 생겼다. 돌격대는 즉시 건물에 진입해 기관총을 쏘아댔다. 그 자리에서 수많은 학생이 죽었다. 그들은 총검으로 사람들을 찔렀고 3000여 명의 무고한 시민이 학살되었다.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를 지지하던 옌볜군사관제위원회 주임 고봉은 이후 옌볜에서 문화대혁명 기간 최고위직을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문화대혁명 기간 거의 내내 주덕해의 죄상을 추적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옌볜 지역을 비롯해 기타 조선족 지역에서 간첩, 반역자, 민족주의 분자 등의 누명을 쓰고 많은 조선족이 박해와 살해를 당했다. 특히 6·25 시절 북한에 갔거나 북한에 친인척이 있는 사람, 북한과 통신이나 연락이 있거나, 북한에 대해 좋은 말을 했던 사람, 심지어 북한 대표단의 통역을 했던 사람마저 북한 간첩으로 간주하여 투옥을 당했다. 당시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의 조선족 간부 32명이 북한 간첩으로 심사를 받았다. 하얼빈시 공안국의 23명 조선족 간부 가운데 18명이 북한의 간첩과 반역자라는 죄명으로 심사를 받았다.
‘계급대오 정리학습반’
1968년 4월 처음으로 옌볜자치주공안국, 자치주 검찰원, 자치주 법원에 계급대오(階級隊伍) 정리학습반이 개설되면서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 학습반에서는 소위 외국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51명을 ‘계급의 적’으로 적발, 각종 형벌을 받게 했다. 이 중 3명은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10여 명은 불구가 되었다. 조선족 정법(政法) 계통의 간부와 경찰 175명이 외국 간첩으로 지목되었다. 이 중에서 12명이 학습반 기간에 맞아 죽었으며 82명이 불구가 되었다.
수많은 조선족 간부와 지식인, 그리고 일반인까지도 변절자, 간첩, 반혁명분자, 불순분자로 지목받아 비판을 당하고 혹자는 감옥에 갇히고, 혹자는 조반파가 임시로 설치한 이른바 ‘소 우리’에 구금되어 인신(人身)의 자유를 잃은 ‘죄인’이 되었다.
불법으로 고문실을 차려놓고 수십 가지 형구(刑具)로 형벌을 가하여 ‘지하 국민당 파내기’ 운동을 전 자치주로 확산시켰다. 그 결과 이른바 ‘국민당 지하 당원’ 1453명을 색출했다. 이 가운데 148명이 심사 과정에서 맞아 죽거나 자살했다. 1930년대 초부터 혁명에 참가하였고 옌볜대학 창설 준비위원회 때부터 줄곧 대학을 운영해온 임민호 총장도 이때 제자들에게 맞아 끝내 사망했다.
수많은 간부와 지식인이 마오쩌둥의 이른바 1966년 5·7 지시에 따라 농민으로부터 재교육을 받는다는 명분으로 농촌으로 하방(下放)되었다. 사실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노동 개조였다.
조선어 교육 폐지
문화대혁명으로 말미암아 조선어 책, 신문, 잡지, 참고 자료 문헌 등은 소각되거나 압수당했고 출판이 중지됐다. 도서관의 조선어 책은 폐기되거나 열람할 수 없게 되었다.
1967년 중공군이 문화대혁명에 참여하면서 옌볜일보사에도 1개 중대 병력이 진주하여 군사통제가 실시됐다. 2월 25일 결국 《옌볜일보》는 폐간됐다. 조선어 신문·잡지 등은 대부분 정간(停刊)되었으며 조선어 방송은 폐지됐다. 조선족 언론인들은 대거 투옥되거나 숙청됐다.
조선어를 존중하는 행위를 수정주의(修正主義) 또는 투항주의(投降主義)라고 비판했고, 조선어 무용론(無用論)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옌볜조선족자치주 공문서에서 한글이 사라지고 학교의 조선어문 교육도 폐지됐다.
조선족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만 받은 것이 아니라 족보와 서적 등 귀한 자료가 불태워지는 등 조선족의 민족 전통과 문화의 계승, 발전이 중단되었다. 이후 조선족 사회는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 우상(偶像) 숭배 세뇌 교육이 철저하게 실시되었다.
1982년 한 보고에 의하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옌볜에서 4000여 명이 처형되었고, 50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수만 명이 투옥, 격리되거나 심문을 받았다고 한다. 계급 투쟁이 진행되던 이 시기는 현대인으로서는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이 상실된 광란(狂亂)의 시기였다. 적지 않은 이들이 비인간적인 박해를 받다가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떤 이는 시달림 끝에 원한을 가슴에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옌볜 지역은 중국의 그 어느 지역 못지않게 문화대혁명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여파로 옌볜의 사회적 심리 형성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줬다.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문화대혁명은 끝났다. 이후 중국은 개혁·개방과 함께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은 여전하다. 중국은 겉으로는 소수민족 우대를 내세우면서도 역사적으로 다양한 민족을 탄압하고 하나의 잣대로 동화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민족 언어 말살 정책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보복과 외교적 고압적 태도 및 공격적인 전랑(戰狼) 외교 행각을 실감하면서 한국인의 대중(對中) 인식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특히 미중(美中) 간 패권(覇權) 경쟁과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한국인의 반중(反中)·혐중(嫌中) 감정은 최고치에 달한 상황이다. 중국이 2000년대 초반부터 추진하여온 동북역사공정(東北歷史工程)과 그 후속으로 등장한 문화공정은 한국인의 반중감정을 부추겼다. 이 와중에 중국 조선족(朝鮮族)의 정체성(正體性) 문제와 민족문화도 화두(話頭)가 되곤 했다.
2022년 2월 4일 베이징(北京) 동계올림픽 개막식 공연에 중국 조선족 여성이 한복(韓服) 차림으로 등장하는 영상이 전 세계로 송출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주한 중국 대사관에서 “전통문화(한복)는 한반도의 것이며 동시에 중국 조선족의 것”이라는 입장을 표했다. 한국 내에서는 이를 중국이 전통 의상인 한복을 중국 55개 소수(少數)민족 문화 중 하나로 간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파장이 커졌다.
중국 내부에서 중국 조선족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나, 중국이 표방하는 소수민족 우대 정책의 본질은 어떠한 것일까? 1960년대 중국 대륙을 10년간 휩쓸었던 문화대혁명 당시 옌볜조선족자치주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통해 그 이면(裏面)을 파헤쳐 보도록 하겠다.
‘조반단’의 결성
문화대혁명의 불꽃이 베이징대학(北京大學), 난징대학(南京大學)에서 처음 일어났듯이 옌볜(延邊)의 문화대혁명도 옌볜대학과 옌볜농학원의 일부 학생이 집회를 열어 베이징대학과 난징대학의 혁명적 교직원과 학생들을 지지하고 혁명적 군중을 저지한 옌볜대학 공산당위원회 선전부장 김지운(金址雲)을 해임하라는 대자보를 붙이면서 처음 일어났다.
1966년 6월 20일 중국 공산당 옌볜조선족자치주위원회 문화대혁명 영도소조(領導小組)가 결성되었다. 7월 12일에는 자치주 부주장(副州長) 조용호가 인솔한 문화대혁명 공작대가 처음으로 옌볜대학에 파견되었다. 이후 8월 초부터 비판 투쟁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 공작대가 갑자기 해체되면서 ‘반동적인’ 비판 투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이후 옌볜에서 문화대혁명의 기세는 날로 타올랐다. 이를 적극 지지하는 층은 청년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에 앞장서면서 마오쩌둥(毛澤東)과 그의 사상을 보위하기 위한 홍위병(紅衛兵)을 조직하였다. 홍위병에 가입하는 청년 학생은 출신 성분이 좋아야 했다. 그들은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 등을 타파하는 활동을 벌여 명승고적과 문물을 무차별 파괴하였다.
옌볜의 문화대혁명은 조반단(造反團·‘반란단’이라는 의미)이 조직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66년 8월 하순 베이징, 다롄(大連), 하얼빈(哈爾濱) 등지에서 공부하던 조선족 대학생들이 ‘혁명적 연계(革命串聯)’를 맺기 위해 옌볜에 들어왔다. 그들은 옌볜대학, 옌볜의학원, 옌볜농학원 등의 대학생들에게 조반단을 조직하여 자체적으로 혁명할 것을 선동하였다. 이에 많은 옌볜의 학생이 동조하였다.
마오위안신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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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毛澤東)의 조카인 마오위안신(毛遠新). |
이 두 조직은 문화대혁명 주도권을 두고 격렬히 대립하였다. 특히 1967년에 들어서서 옌볜일보사를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졌다. 1967년 1월 4일 상하이(上海)의 조반단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한 8·27 혁명조반단 측은 선전기구를 먼저 탈취해야 한다며 옌볜일보사에 쳐들어가 이곳을 접수하였다.
소식을 들은 홍련 측 군중 수천 명은 이를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하고 옌볜일보사로 가서 신문사를 포위하였다. 8·27 혁명조반단 측도 옌볜일보사로 모여들었다. 두 조반단의 충돌은 피했으나, 이후 8·27 혁명조반단 측이 홍련에 가담했던 군중 100여 명을 옌볜대학에 잡아다 가두고 심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옌볜에서는 보다 과격한 조반단이 조직되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조카인 마오위안신(毛遠新)이 1967년 1월 25일 옌지(延吉)에 왔다. 그는 본래 하얼빈군사공정학원(哈爾濱軍事工程學院)의 1964년도 졸업생이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조카라는 ‘밑천’을 가지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동북 3성[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에서 ‘태상황(太上皇)’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주덕해를 타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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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기간 중 홍위병들은 ‘혁명무죄 조반유리’라는 구호 아래 스스로 ‘조반파’를 자처했다. |
마오위안신과 옌볜군사관제위원회(延邊軍事管制委員會)의 지지하에 옌지시와 각 현(縣)에서 각 계통의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紅色造反者革命委員會)’라는 새로운 반란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위원회는 옌볜의 조선족민족지도자인 주덕해를 타도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한편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에 반발하는 새로운 단체가 또 생겨났다. 즉 주덕해를 보호하려는 여러 군중 조직이 연합하여 ‘노동자혁명위원회(工人革命委員會)’ ‘농민혁명위원회’ ‘상업계통혁명위원회’ 등을 결성한 것이다. 옌볜의학원의 ‘베쑨 공사’, 옌지시 2중의 ‘항대(抗大)’ 등의 학생 조직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주덕해는 좋은 간부’라면서 옌볜자치주의 또 다른 핵심 간부인 김명한과 남명학 타도를 외쳤다. 이 결과 옌볜에서는 8·27 혁명조반단, 홍련,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 노동자혁명위원회 등 4개의 파벌이 상호 대립하였다.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는 주덕해의 ‘죄상’을 집요하게 추궁하였다. 1967년 4월 초, 이들은 주(州)당위원회, 주인민위원회, 시(市)당위원회, 시인민위원회, 주공안처, 시공안처 등 기관들과 연합하여 기관홍혁회(機關紅革會)를 결성하였다.
기관홍혁회는 1967년 5월 초부터 주덕해의 지도하에 오랫동안 일해온 주당위원회, 주인민위원회 등 조직의 주요 간부 100여 명을 납치하고 주덕해의 ‘죄상’을 말할 것을 강요했다. 이는 집요하게 전개되었다. 1967년 5월 30일 홍색조반혁명위원회와 대립하였던 노동자혁명위원회 측이 주당위원회 청사에 쳐들어가서 자치주 핵심 간부 전인영(田仁永·한족) 등을 구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기관홍혁회에서는 주덕해의 ‘죄상’을 끌어내기 위해 구금하고 있던 간부들을 주인민위원회 청사로 옮기고 ‘죄상’ 밝히기 작업을 계속 진행하였다.
‘주자파’ ‘매국 역적’이 된 주덕해
1967년 6월 중순에 옌지 시내에서 조반단 간의 상호 무장 대립이 심해지자 홍색반란자혁명위원회(紅色造反者革命委員會) 측에서는 간부 40여 명을 둔화현(敦化縣)의 추리구 임장으로 몰래 빼돌려 거기서 기존의 작업을 계속하도록 했다. 이때 홍색반란자혁명위원회 측에서는 간부들을 구타하는 등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여기서 주덕해의 ‘죄상’을 담은 자료를 만들었다. 이들은 주덕해에게 ‘옌볜에서 으뜸가는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이자, ‘외국과 내통한 매국 역적’이라는 죄명을 씌웠다.
‘죄상’ 밝히기 작업은 1967년 말에야 끝이 났다. 주덕해의 ‘죄상’은 대자보나 팸플릿, 군중을 대상으로 한 연설을 통해 대중에게 선전되었다. 이 팸플릿을 제작한 옌볜농학원동방홍공사(延邊農學院東方紅公社)는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 계열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는 옌볜군사관제위원회[주임 고봉(皋峰)]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우세한 무장력을 동원하여 ‘반국폭동(叛國暴亂)’이라는 누명을 씌워 1967년 8월에는 노동자혁명위원회 측을, 이듬해 봄에는 8·27 혁명조반단 측을 제압하여 옌볜의 최강자가 되었다.
〈불! 불! 불! 피! 피!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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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기간 중 ‘주자파’로 몰린 이들은 홍위병들에게 모진 학대를 당했다. |
1967년부터 고봉은 조선족은 신뢰할 수 없다는 여론을 내내 퍼뜨렸다. 그는 옌볜군사관제위원회 회의에서 “옌지시를 피로 물들이고 토문관을 돌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血洗延吉市, 突破圖們關, 打回老家去)”라는 날조된 삐라를 꺼내 들며 노동자혁명위원회와 8·27 혁명조반단에 누명을 씌워 사람들을 미혹했다. 그들은 또한 스스로 인쇄한 날조된 신문에 “반역자들은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총 300정, 중기관총 2문, 경기관총 6문, 각종 소총 300정을 가지고 있다”는 선동 글을 작성해 여기저기에 퍼뜨렸다. 그러면서 고봉은 즉시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고 선포했다. 대학살의 예고였다.
1967년 8월 5일 이른 아침, 옌볜군사관제위원회는 3168군 장병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옌지를 포위했다. 여기에는 안투(安圖) 주둔군도 동원했다. 옌볜병원입원과와 옌볜의과대학은 3000여 명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옌볜군사관제위원회는 확성기로 ‘노동자혁명위원회’에 ‘엄중경고’와 ‘방화범·살인자 검거 통고’를 발표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조국 동북(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국경에서 끔찍한 반혁명 반란이 일어났다〉와 〈불! 불! 불! 피! 피! 피! 반혁명 반란의 기록〉이라는 전단을 만들어 배포했다.
학살
전단을 만든 저우비종(周必忠)은 “전단의 사진과 글은 모두 거짓이다. 일부는 터무니없는 혐의로 죄를 뒤집어씌웠고, 일부는 날조된 사실이고 옳고 그름을 혼동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옌지시를 피로 물들이고 두만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선동 구호는 그들에게 강제로 죄를 씌우기 위해 조작된 것이다”라고 밝혔다.
1967년 8월 16일 새벽 3시, 마오위안신과 고봉은 최전선 사령부 정치위원 류장위(劉章宇)를 소환해 군사지도를 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주 폭발 지점은 입원실 북쪽에 있다. 폭발이 성공하면 돌격대는 즉시 건물로 진입하라!”
1967년 8월 16일 오전 11시, 옌볜의과대학 연구실 벽이 폭파되면서 입원환자과에 구멍이 생겼다. 돌격대는 즉시 건물에 진입해 기관총을 쏘아댔다. 그 자리에서 수많은 학생이 죽었다. 그들은 총검으로 사람들을 찔렀고 3000여 명의 무고한 시민이 학살되었다.
홍색조반자혁명위원회를 지지하던 옌볜군사관제위원회 주임 고봉은 이후 옌볜에서 문화대혁명 기간 최고위직을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문화대혁명 기간 거의 내내 주덕해의 죄상을 추적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옌볜 지역을 비롯해 기타 조선족 지역에서 간첩, 반역자, 민족주의 분자 등의 누명을 쓰고 많은 조선족이 박해와 살해를 당했다. 특히 6·25 시절 북한에 갔거나 북한에 친인척이 있는 사람, 북한과 통신이나 연락이 있거나, 북한에 대해 좋은 말을 했던 사람, 심지어 북한 대표단의 통역을 했던 사람마저 북한 간첩으로 간주하여 투옥을 당했다. 당시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의 조선족 간부 32명이 북한 간첩으로 심사를 받았다. 하얼빈시 공안국의 23명 조선족 간부 가운데 18명이 북한의 간첩과 반역자라는 죄명으로 심사를 받았다.
‘계급대오 정리학습반’
1968년 4월 처음으로 옌볜자치주공안국, 자치주 검찰원, 자치주 법원에 계급대오(階級隊伍) 정리학습반이 개설되면서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 학습반에서는 소위 외국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51명을 ‘계급의 적’으로 적발, 각종 형벌을 받게 했다. 이 중 3명은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10여 명은 불구가 되었다. 조선족 정법(政法) 계통의 간부와 경찰 175명이 외국 간첩으로 지목되었다. 이 중에서 12명이 학습반 기간에 맞아 죽었으며 82명이 불구가 되었다.
수많은 조선족 간부와 지식인, 그리고 일반인까지도 변절자, 간첩, 반혁명분자, 불순분자로 지목받아 비판을 당하고 혹자는 감옥에 갇히고, 혹자는 조반파가 임시로 설치한 이른바 ‘소 우리’에 구금되어 인신(人身)의 자유를 잃은 ‘죄인’이 되었다.
불법으로 고문실을 차려놓고 수십 가지 형구(刑具)로 형벌을 가하여 ‘지하 국민당 파내기’ 운동을 전 자치주로 확산시켰다. 그 결과 이른바 ‘국민당 지하 당원’ 1453명을 색출했다. 이 가운데 148명이 심사 과정에서 맞아 죽거나 자살했다. 1930년대 초부터 혁명에 참가하였고 옌볜대학 창설 준비위원회 때부터 줄곧 대학을 운영해온 임민호 총장도 이때 제자들에게 맞아 끝내 사망했다.
수많은 간부와 지식인이 마오쩌둥의 이른바 1966년 5·7 지시에 따라 농민으로부터 재교육을 받는다는 명분으로 농촌으로 하방(下放)되었다. 사실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노동 개조였다.
조선어 교육 폐지
문화대혁명으로 말미암아 조선어 책, 신문, 잡지, 참고 자료 문헌 등은 소각되거나 압수당했고 출판이 중지됐다. 도서관의 조선어 책은 폐기되거나 열람할 수 없게 되었다.
1967년 중공군이 문화대혁명에 참여하면서 옌볜일보사에도 1개 중대 병력이 진주하여 군사통제가 실시됐다. 2월 25일 결국 《옌볜일보》는 폐간됐다. 조선어 신문·잡지 등은 대부분 정간(停刊)되었으며 조선어 방송은 폐지됐다. 조선족 언론인들은 대거 투옥되거나 숙청됐다.
조선어를 존중하는 행위를 수정주의(修正主義) 또는 투항주의(投降主義)라고 비판했고, 조선어 무용론(無用論)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옌볜조선족자치주 공문서에서 한글이 사라지고 학교의 조선어문 교육도 폐지됐다.
조선족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만 받은 것이 아니라 족보와 서적 등 귀한 자료가 불태워지는 등 조선족의 민족 전통과 문화의 계승, 발전이 중단되었다. 이후 조선족 사회는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 우상(偶像) 숭배 세뇌 교육이 철저하게 실시되었다.
1982년 한 보고에 의하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옌볜에서 4000여 명이 처형되었고, 50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수만 명이 투옥, 격리되거나 심문을 받았다고 한다. 계급 투쟁이 진행되던 이 시기는 현대인으로서는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이 상실된 광란(狂亂)의 시기였다. 적지 않은 이들이 비인간적인 박해를 받다가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떤 이는 시달림 끝에 원한을 가슴에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옌볜 지역은 중국의 그 어느 지역 못지않게 문화대혁명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여파로 옌볜의 사회적 심리 형성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줬다.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문화대혁명은 끝났다. 이후 중국은 개혁·개방과 함께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은 여전하다. 중국은 겉으로는 소수민족 우대를 내세우면서도 역사적으로 다양한 민족을 탄압하고 하나의 잣대로 동화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민족 언어 말살 정책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