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교과서, “조선 내전 발발”… 마오쩌둥의 남침 모의 참여 은폐
⊙ 마오쩌둥, 휴전 직후 “세계대전 발발 지연시킨 중국의 위대한 승리”로 규정
⊙ 시진핑, “항미원조 전쟁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 주장(2010년)
⊙ “국력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국의 무력 위협에 직면한 국가적 위기…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 역사적 결정”(2021년 중국 공산당 역사결의)
서상문
1959년생. 대만 국립정치대학 역사학 박사(중국 근현대사, 중국공산당사, 한국전쟁 전공) / 前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베이징대학 및 대만 중앙연구원 방문학자, 現 환동해미래연구원장 / 저서 《毛澤東과 6·25전쟁》 《혁명러시아와 중국공산당 1917~1923》 《중국의 국경전쟁 1949~1979》 《6·25전쟁 :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와 전투수행》(상·하) 《돌파 : 정의를 향한 한 역사학자의 고군분투!》 등
⊙ 마오쩌둥, 휴전 직후 “세계대전 발발 지연시킨 중국의 위대한 승리”로 규정
⊙ 시진핑, “항미원조 전쟁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 주장(2010년)
⊙ “국력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국의 무력 위협에 직면한 국가적 위기…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 역사적 결정”(2021년 중국 공산당 역사결의)
서상문
1959년생. 대만 국립정치대학 역사학 박사(중국 근현대사, 중국공산당사, 한국전쟁 전공) / 前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베이징대학 및 대만 중앙연구원 방문학자, 現 환동해미래연구원장 / 저서 《毛澤東과 6·25전쟁》 《혁명러시아와 중국공산당 1917~1923》 《중국의 국경전쟁 1949~1979》 《6·25전쟁 :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와 전투수행》(상·하) 《돌파 : 정의를 향한 한 역사학자의 고군분투!》 등
- 시진핑은 2020년 10월 19일 베이징 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서 열린 ‘항미원조 전쟁 70주년 기념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 “중국 인민지원군이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주장했다. 사진=신화/연합뉴스
10월 19일은 중공군(중국은 국가 군대가 없고 중국 공산당에 소속된 군대이기 때문에 ‘중국군’은 잘못된 용어임)이 한반도에 발을 디딘 지 74주년이 되는 해다. 1950년 이날 1차로 25만748명의 중공군이 북한으로 극비리에 잠입해 들어왔다.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중공군은 그보다 3일 전인 10월 16일 밤 정찰 임무를 띠고 먼저 잠입한 ‘선발대’ 제12사단 제370연대 병력이었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면 중공군의 한반도 파병 날짜는 1950년 10월 16일이었다.
참전 후 중공군은 군사적·정치적 남북통일을 목전에 둔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北進)을 저지함으로써 통일을 가로막았다. 1953년 7월 휴전 후 중공군은 철수를 시작, 1958년 10월 25일에 마지막 부대가 북한 땅을 떠났다.
중국 공산당(중공) 정권은 한국 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그 이면에 중공의 역사 왜곡과 은폐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중공 정권은 북한과의 관계, 미국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하게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애국 의식과 중화주의를 고취하면서 공산당 1당 독재, 시진핑(習近平)의 장기 집권 필요성을 선전하는 데 ‘항미원조 전쟁’을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항미원조 전쟁’에 대한 기술(記述)을 살펴보는 것은 중공 수뇌부의 한국 전쟁에 대한 인식, 중국의 국내 정치 및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조선 전쟁’ ‘항미원조 전쟁’
최근 중국의 한국 전쟁 기술은 시진핑 제3기에 들어온 뒤부터 북한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중공 일당 전정(專政·독재의 중국식 표현)이라는 국가 권력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변하지 않을 게 있다.
첫째, 한국 전쟁은 남북한 간의 내전(內戰)으로서 중국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자기들이 군대(중국인민지원군) 파병을 개시한 1950년 10월을 기준으로 그 이전 북한의 남침 및 유엔군의 참전과 북진까지를 ‘조선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단계까지의 전쟁은 중국과 관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중공군 개입 이후는 ‘항미원조 전쟁’이라 한다.
둘째, 마오쩌둥(毛澤東)은 스탈린 및 김일성(金日成)과 한국 전쟁 사전(事前) 모의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 중국이 6·25 전쟁에 파병 개입한 것은 미(美) 제국주의의 중국 안보 위협 때문이며, 이 개입은 국가 차원의 파병이 아니라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북한)을 돕고,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을 위해 스스로 자발적으로 북한에 들어간 지원병이라는 입장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용어는 1950년 10월 중국 최고 권력자인 마오쩌둥이 중공당 내외 다수의 반대를 물리치고 중공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 전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이 말은 당시 마오쩌둥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도록 고안해낸 정치적 선동 용어였다. 한국 전쟁 파병 전후부터 시작된 ‘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규탄대회를 전국적 규모의 정치 운동으로 연계시켜서 항미원조 운동을 벌인 마오쩌둥의 구상과 의중이 반영된 것이다.
마오쩌둥의 참전
2021년 2월 중공 중앙당사연구실에서 펴낸 《중국공산당 간사(中國共産黨簡史)》에도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朝鮮內戰爆發)”고 기술돼 있다. 중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한 이유로는 두 가지가 제시돼 있다.
첫째, 당시 미국 정부가 즉각 조선 내전에 무장 간섭을 하기로 결의를 하면서 미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해 중국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했고, 중국의 통일대업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둘째, 10월 초 미군이 중국 정부의 두 차례 경고를 무시하고 38도선을 넘어 전화(戰火)를 중국-북한 변경 지역으로 확대해 직접 신(新)중국의 국가 안전을 위협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북한 조선노동당과 정부가 중국의 출병(出兵)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오쩌둥이 6·25가 일어나기 전 김일성, 스탈린과 함께 남침을 모의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대군을 보내 김일성을 군사적으로 도우면서 전쟁의 성격까지 비틀어버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1950년 5월 15일, 마오쩌둥은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로 찾아와 한반도 적화(赤化)를 위한 남침 전쟁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한 김일성과 부수상 박헌영(朴憲永)에게 “중국은 대만을 해방한 후에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스탈린이 이미 한반도 적화 통일 문제에 동의한 이상 준비 중인 타이완 해방 작전을 뒤로 미루고 한반도 무력(武力) 통일을 제1순위로 두기로 했다”면서 김일성의 3단계 침공 방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마오쩌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일성에게) 몇 가지 전술적 충고까지 했다. 또 국공내전(國共內戰)에 참전했던 조선족 병력 5만 명 이상을 김일성에게 흔쾌히 넘겨주기로 했다.
마오쩌둥은 유엔 결의에 따라 참전한 미군의 목표는 북한 침략군을 격퇴해 남침 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는 점, 즉 38도선을 넘어 중국을 위협할 의사가 없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참전을 강행한 것은 과거 소련이 획득한 중국 내 권익을 돌려주겠다는 스탈린의 약속을 보장받고, 몇 가지 자신의 국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미국이 북한 점령 후 중국으로 공격해올 것이라고 예단(豫斷)하고, 미군을 기다리기보다는 압록강을 건너 북한 땅의 일부 지역에 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자국 영토를 이중으로 방어할 수 있는 지대(glacis)를 확보할 요량으로 참전했다. 그는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중공 수뇌부에게 중북(中北) 국경 지역에서의 중국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할 것이라고 통보했음에도 ‘미국위협론’을 부풀리고 ‘정의의 전쟁’으로 호도하면서 대군을 북한에 들여보냈다.
마오쩌둥의 6·25 인식 벗어나면 투옥
중국의 ‘정의롭지 못한 전쟁 개입’으로 한반도 통일은 성사 일보 직전에 무산됐고, 남북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한국 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 12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14차 회의에서 ‘항미원조 전쟁’에 대해 “영웅의 인민 전쟁”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미국에 이겼다고 주장하면서 “중공의 ‘위대한 승리’로 세계대전의 발발 시간을 지연시키게 됐다. 만약 적이 다시 전쟁을 걸어온다면 중국은 더 자신 있게 대적(對敵)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마오쩌둥의 발언은 이후 중공의 공식 당론이 됐다. 이는 역사가들에게도 마오쩌둥이 말한 틀 속에서 역사를 기술하라는 지침이나 다름없었다. 역사학계나 교육계, 언론에선 아무도 이와 다른 얘기를 하지 못해왔다. 필자가 아는 중국 내 일급 한국 전쟁 전문가는 중공의 가이드라인을 벗어난 주장을 했다가 체포되어 오랫동안 투옥되었다.
각급 학교의 교과서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라고 겉보기에는 중립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다분히 북한의 입장을 의식한 것이다. 오히려 이는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남침 전쟁에 동의하고, 병력까지 보태주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국 교과서는 ‘미 제국주의’가 군대를 한반도에 보내 북한을 침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려고 위협하는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 마오쩌둥의 현명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으로 항미원조 전쟁에 참전해서 ‘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가르쳐왔다.
후진타오 시기 ‘항미원조 전쟁’ 다시 소환
이러한 마오쩌둥의 가이드라인과 중국의 한국 전쟁 관련 교육은 마오쩌둥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를 거쳐 시진핑 제1기 집권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미중(美中) 관계가 상대적으로 양호했으며, 중·북 관계도 큰 마찰이나 갈등이 없었다. 이에 따라 중공 수뇌부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 마오쩌둥 및 중공의 입장을 그대로 견지해왔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 시 중국이 우리 정부에 중국의 참전에 대해 한마디도 사과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후진타오 집권기에 들어서면서 노골적으로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을 소환하는 일이 잦아졌다. 6·25 전쟁 60주년이던 2010년 10월 25일,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항미원조 전쟁 참전 제60주년 좌담회’가 그 예(例)다. 참전 군인들에 대한 훈·포장 수여, 최고 지도자가 주최하는 좌담회 개회 및 격려가 이어졌다. 전몰용사에 대한 대규모 추모제도 거행했다. 미국을 물리쳤다는 내용의 영화나 드라마들이 나왔고, 항미원조전쟁기념관을 통한 선전 활동도 벌어졌다.
1958년 개관한 단둥(丹東) 소재 항미원조전쟁기념관은 대대적인 개편 및 수리를 마치고 2020년 9월 재개관됐다. 필자가 가본 바에 따르면 이곳에 전시되고 있는 항미원조 전쟁의 내용은 어구(語句)만 약간 다를 뿐, 내용은 여타 매체나 교과서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과 천편일률적으로 같다.
시진핑, “항미원조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으로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확정된 상태였던 시진핑은 후진타오 주석과 함께한 회합에서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 노병들을 위무하면서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으로서 “제국주의가 중국 인민에게 강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논란이 일자 중국 외교부는 이 발언이 시진핑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중국 정부의 정론’이라고 못 박았다.
그때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부 내에서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수차례 주장한 정치 개혁 여부를 둘러싸고 힘 겨루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치 개혁 주장은 곧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 이후의 당내 역학(力學) 관계와 맞물려 있었다. 중공당 내에는 ‘정치개혁파’를 중심으로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고 있었다. 시진핑의 발언은 6·25 전쟁에 대한 중공 당론과 참전 노병들을 정치적 ‘오브제’로 활용하면서 중·북 혈맹을 강조한 성동격서(聲東擊西)였던 셈이다. 중국으로서는 ‘한국 길들이기’라는 부차적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에 소장되어 있는 중공 최고 기밀을 제한 없이 열람할 수 있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6·25의 진실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과 성격을 이런 식으로 왜곡한 것은 그만큼 한국을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방증(傍證)한다. 그가 후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였다.
중공당 ‘역사결의’에 소환된 ‘조선 전쟁’
마오쩌둥 이래 이어져 온 6·25 전쟁에 대한 원칙적인 평가와 입장은 바뀌지 않았지만, 시진핑 2기부터는 미·중 관계와 중·북 관계의 변화에 따라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기술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발발했다. 조선인민군은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한국군은 절절히 패퇴했다”고 기술한 것은 미묘하게나마 북한의 남침을 시사(示唆)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2021년 11월 11일 중공 제19차 6중전회 두 번째 회의에서 통과된 ‘역사결의’에 대한 11월 30일의 부연 설명과 지시를 내리는 자리에서 시진핑은 ‘항미원조 전쟁’에 대해서 또다시 거론했다. 중공 지도부는 매년 항미원조 전쟁 기념일마다 기본 입장을 확인해오곤 하지만, 이를 중공당의 역사결의에까지 삽입한 건 이례적이다. 중공당은 중대한 고비 때마다 역사를 소환해 ‘역사결의’로 당의 기강을 잡고 인민들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다잡아 왔다. 물론 실제로는 당내 노선투쟁이나 권력투쟁에 이긴 자가 역사를 개필(改筆)하는 것이다. 권력을 잡은 자가 과거도 장악하는 전형적인 예다. 하여튼 이때 시진핑은 이렇게 천명했다.
“1950년 조선 전쟁도 국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국의 무력 위협에 직면한 국가적 위기였다.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保家衛國) 역사적 정책 결정으로 침략자 군대의 국경 진입 위험을 면했으며, 신중국의 안전을 수호했다.”
시진핑의 위 발언은 “당내 분파를 가차 없이 처리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공의 이념과 이론을 다루는 기관지 중의 한 유력 매체인 《구시(求是)》 2022년 1월호에 머리기사로 게재됐다. 시진핑의 발언은 자신의 3연임(連任)을 정당화하면서, 자신을 마오쩌둥과 동급으로 올려놓은 것에 대해 반발과 잡음이 없도록 당내 기강을 잡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이는 미국과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애국주의, 혁명영웅주의, 중공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인들의 결집을 호소하고 미국에 대한 적대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중국이 이런 식으로 버젓이 한국 전쟁사를 마음껏 비틀고 있는데도 국내 정치권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응을 자제해왔다. 2010년 시진핑의 ‘항미원조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 발언 당시 이회창(李會昌) 자유선진당 대표가 “한국과 한국 국민을 무시한 발언”이라면서 중국 측에 해명과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정부에 촉구한 적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라진 줄 알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참전 후 중공군은 군사적·정치적 남북통일을 목전에 둔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北進)을 저지함으로써 통일을 가로막았다. 1953년 7월 휴전 후 중공군은 철수를 시작, 1958년 10월 25일에 마지막 부대가 북한 땅을 떠났다.
중국 공산당(중공) 정권은 한국 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그 이면에 중공의 역사 왜곡과 은폐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중공 정권은 북한과의 관계, 미국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하게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애국 의식과 중화주의를 고취하면서 공산당 1당 독재, 시진핑(習近平)의 장기 집권 필요성을 선전하는 데 ‘항미원조 전쟁’을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항미원조 전쟁’에 대한 기술(記述)을 살펴보는 것은 중공 수뇌부의 한국 전쟁에 대한 인식, 중국의 국내 정치 및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조선 전쟁’ ‘항미원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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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항미원조 보가위국’을 명목으로 한국 전쟁에 중공군을 투입했다. |
첫째, 한국 전쟁은 남북한 간의 내전(內戰)으로서 중국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자기들이 군대(중국인민지원군) 파병을 개시한 1950년 10월을 기준으로 그 이전 북한의 남침 및 유엔군의 참전과 북진까지를 ‘조선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단계까지의 전쟁은 중국과 관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중공군 개입 이후는 ‘항미원조 전쟁’이라 한다.
둘째, 마오쩌둥(毛澤東)은 스탈린 및 김일성(金日成)과 한국 전쟁 사전(事前) 모의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 중국이 6·25 전쟁에 파병 개입한 것은 미(美) 제국주의의 중국 안보 위협 때문이며, 이 개입은 국가 차원의 파병이 아니라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북한)을 돕고,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을 위해 스스로 자발적으로 북한에 들어간 지원병이라는 입장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용어는 1950년 10월 중국 최고 권력자인 마오쩌둥이 중공당 내외 다수의 반대를 물리치고 중공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 전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이 말은 당시 마오쩌둥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도록 고안해낸 정치적 선동 용어였다. 한국 전쟁 파병 전후부터 시작된 ‘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규탄대회를 전국적 규모의 정치 운동으로 연계시켜서 항미원조 운동을 벌인 마오쩌둥의 구상과 의중이 반영된 것이다.
마오쩌둥의 참전
2021년 2월 중공 중앙당사연구실에서 펴낸 《중국공산당 간사(中國共産黨簡史)》에도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朝鮮內戰爆發)”고 기술돼 있다. 중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한 이유로는 두 가지가 제시돼 있다.
첫째, 당시 미국 정부가 즉각 조선 내전에 무장 간섭을 하기로 결의를 하면서 미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해 중국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했고, 중국의 통일대업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둘째, 10월 초 미군이 중국 정부의 두 차례 경고를 무시하고 38도선을 넘어 전화(戰火)를 중국-북한 변경 지역으로 확대해 직접 신(新)중국의 국가 안전을 위협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북한 조선노동당과 정부가 중국의 출병(出兵)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오쩌둥이 6·25가 일어나기 전 김일성, 스탈린과 함께 남침을 모의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대군을 보내 김일성을 군사적으로 도우면서 전쟁의 성격까지 비틀어버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1950년 5월 15일, 마오쩌둥은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로 찾아와 한반도 적화(赤化)를 위한 남침 전쟁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한 김일성과 부수상 박헌영(朴憲永)에게 “중국은 대만을 해방한 후에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스탈린이 이미 한반도 적화 통일 문제에 동의한 이상 준비 중인 타이완 해방 작전을 뒤로 미루고 한반도 무력(武力) 통일을 제1순위로 두기로 했다”면서 김일성의 3단계 침공 방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마오쩌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일성에게) 몇 가지 전술적 충고까지 했다. 또 국공내전(國共內戰)에 참전했던 조선족 병력 5만 명 이상을 김일성에게 흔쾌히 넘겨주기로 했다.
마오쩌둥은 유엔 결의에 따라 참전한 미군의 목표는 북한 침략군을 격퇴해 남침 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는 점, 즉 38도선을 넘어 중국을 위협할 의사가 없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참전을 강행한 것은 과거 소련이 획득한 중국 내 권익을 돌려주겠다는 스탈린의 약속을 보장받고, 몇 가지 자신의 국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미국이 북한 점령 후 중국으로 공격해올 것이라고 예단(豫斷)하고, 미군을 기다리기보다는 압록강을 건너 북한 땅의 일부 지역에 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자국 영토를 이중으로 방어할 수 있는 지대(glacis)를 확보할 요량으로 참전했다. 그는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중공 수뇌부에게 중북(中北) 국경 지역에서의 중국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할 것이라고 통보했음에도 ‘미국위협론’을 부풀리고 ‘정의의 전쟁’으로 호도하면서 대군을 북한에 들여보냈다.
마오쩌둥의 6·25 인식 벗어나면 투옥
중국의 ‘정의롭지 못한 전쟁 개입’으로 한반도 통일은 성사 일보 직전에 무산됐고, 남북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한국 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 12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14차 회의에서 ‘항미원조 전쟁’에 대해 “영웅의 인민 전쟁”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미국에 이겼다고 주장하면서 “중공의 ‘위대한 승리’로 세계대전의 발발 시간을 지연시키게 됐다. 만약 적이 다시 전쟁을 걸어온다면 중국은 더 자신 있게 대적(對敵)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마오쩌둥의 발언은 이후 중공의 공식 당론이 됐다. 이는 역사가들에게도 마오쩌둥이 말한 틀 속에서 역사를 기술하라는 지침이나 다름없었다. 역사학계나 교육계, 언론에선 아무도 이와 다른 얘기를 하지 못해왔다. 필자가 아는 중국 내 일급 한국 전쟁 전문가는 중공의 가이드라인을 벗어난 주장을 했다가 체포되어 오랫동안 투옥되었다.
각급 학교의 교과서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라고 겉보기에는 중립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다분히 북한의 입장을 의식한 것이다. 오히려 이는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남침 전쟁에 동의하고, 병력까지 보태주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국 교과서는 ‘미 제국주의’가 군대를 한반도에 보내 북한을 침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려고 위협하는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 마오쩌둥의 현명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으로 항미원조 전쟁에 참전해서 ‘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가르쳐왔다.
후진타오 시기 ‘항미원조 전쟁’ 다시 소환
이러한 마오쩌둥의 가이드라인과 중국의 한국 전쟁 관련 교육은 마오쩌둥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를 거쳐 시진핑 제1기 집권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미중(美中) 관계가 상대적으로 양호했으며, 중·북 관계도 큰 마찰이나 갈등이 없었다. 이에 따라 중공 수뇌부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 마오쩌둥 및 중공의 입장을 그대로 견지해왔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 시 중국이 우리 정부에 중국의 참전에 대해 한마디도 사과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후진타오 집권기에 들어서면서 노골적으로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을 소환하는 일이 잦아졌다. 6·25 전쟁 60주년이던 2010년 10월 25일,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항미원조 전쟁 참전 제60주년 좌담회’가 그 예(例)다. 참전 군인들에 대한 훈·포장 수여, 최고 지도자가 주최하는 좌담회 개회 및 격려가 이어졌다. 전몰용사에 대한 대규모 추모제도 거행했다. 미국을 물리쳤다는 내용의 영화나 드라마들이 나왔고, 항미원조전쟁기념관을 통한 선전 활동도 벌어졌다.
1958년 개관한 단둥(丹東) 소재 항미원조전쟁기념관은 대대적인 개편 및 수리를 마치고 2020년 9월 재개관됐다. 필자가 가본 바에 따르면 이곳에 전시되고 있는 항미원조 전쟁의 내용은 어구(語句)만 약간 다를 뿐, 내용은 여타 매체나 교과서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과 천편일률적으로 같다.
시진핑, “항미원조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으로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확정된 상태였던 시진핑은 후진타오 주석과 함께한 회합에서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 노병들을 위무하면서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으로서 “제국주의가 중국 인민에게 강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논란이 일자 중국 외교부는 이 발언이 시진핑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중국 정부의 정론’이라고 못 박았다.
그때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부 내에서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수차례 주장한 정치 개혁 여부를 둘러싸고 힘 겨루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치 개혁 주장은 곧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 이후의 당내 역학(力學) 관계와 맞물려 있었다. 중공당 내에는 ‘정치개혁파’를 중심으로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고 있었다. 시진핑의 발언은 6·25 전쟁에 대한 중공 당론과 참전 노병들을 정치적 ‘오브제’로 활용하면서 중·북 혈맹을 강조한 성동격서(聲東擊西)였던 셈이다. 중국으로서는 ‘한국 길들이기’라는 부차적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에 소장되어 있는 중공 최고 기밀을 제한 없이 열람할 수 있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6·25의 진실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과 성격을 이런 식으로 왜곡한 것은 그만큼 한국을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방증(傍證)한다. 그가 후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였다.
중공당 ‘역사결의’에 소환된 ‘조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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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개봉해 흥행에 성공한 중국 영화 〈장진호〉. 미·중 갈등이 심해지면서 중국공산 정권은 ‘항미원조 전쟁’을 자주 소환하고 있다. |
2021년 11월 11일 중공 제19차 6중전회 두 번째 회의에서 통과된 ‘역사결의’에 대한 11월 30일의 부연 설명과 지시를 내리는 자리에서 시진핑은 ‘항미원조 전쟁’에 대해서 또다시 거론했다. 중공 지도부는 매년 항미원조 전쟁 기념일마다 기본 입장을 확인해오곤 하지만, 이를 중공당의 역사결의에까지 삽입한 건 이례적이다. 중공당은 중대한 고비 때마다 역사를 소환해 ‘역사결의’로 당의 기강을 잡고 인민들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다잡아 왔다. 물론 실제로는 당내 노선투쟁이나 권력투쟁에 이긴 자가 역사를 개필(改筆)하는 것이다. 권력을 잡은 자가 과거도 장악하는 전형적인 예다. 하여튼 이때 시진핑은 이렇게 천명했다.
“1950년 조선 전쟁도 국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국의 무력 위협에 직면한 국가적 위기였다.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保家衛國) 역사적 정책 결정으로 침략자 군대의 국경 진입 위험을 면했으며, 신중국의 안전을 수호했다.”
시진핑의 위 발언은 “당내 분파를 가차 없이 처리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공의 이념과 이론을 다루는 기관지 중의 한 유력 매체인 《구시(求是)》 2022년 1월호에 머리기사로 게재됐다. 시진핑의 발언은 자신의 3연임(連任)을 정당화하면서, 자신을 마오쩌둥과 동급으로 올려놓은 것에 대해 반발과 잡음이 없도록 당내 기강을 잡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이는 미국과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애국주의, 혁명영웅주의, 중공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인들의 결집을 호소하고 미국에 대한 적대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중국이 이런 식으로 버젓이 한국 전쟁사를 마음껏 비틀고 있는데도 국내 정치권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응을 자제해왔다. 2010년 시진핑의 ‘항미원조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 발언 당시 이회창(李會昌) 자유선진당 대표가 “한국과 한국 국민을 무시한 발언”이라면서 중국 측에 해명과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정부에 촉구한 적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라진 줄 알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