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퓰리즘, 문제 단순화해 본질 왜곡… 음모론, 거짓말, 입헌주의 파괴로 이어질 수도
⊙ 포퓰리즘,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대변하려 할 때 보수주의와 결 같이해
⊙ 레이건, 조지 W. 부시 등 보수 정치인들도 기성 정치인 아닌 ‘카우보이’임을 내세워
⊙ “보통의 남녀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과 예절, 바로 이것이 오늘날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레이건)
조평세
1983년생. 런던대 킹스컬리지(KCL) 종교학 학사, 전쟁학 석사, 고려대 북한학 박사 졸업 / 現 1776연구소 대표, 《월드뷰》 부편집장, 빌드업코리아 이사 / 역서 《레이건 일레븐》 《모든 사회의 기초는 보수다》 《웨인 그루뎀의 성경과 정치》 등
⊙ 포퓰리즘,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대변하려 할 때 보수주의와 결 같이해
⊙ 레이건, 조지 W. 부시 등 보수 정치인들도 기성 정치인 아닌 ‘카우보이’임을 내세워
⊙ “보통의 남녀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과 예절, 바로 이것이 오늘날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레이건)
조평세
1983년생. 런던대 킹스컬리지(KCL) 종교학 학사, 전쟁학 석사, 고려대 북한학 박사 졸업 / 現 1776연구소 대표, 《월드뷰》 부편집장, 빌드업코리아 이사 / 역서 《레이건 일레븐》 《모든 사회의 기초는 보수다》 《웨인 그루뎀의 성경과 정치》 등
- 지난 3월 16일 오하이오주 반달리아에서 유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공화당 대선 후보. ‘MAGA’ 모자를 쓰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이 정당의 미래는 보수주의와 포퓰리즘 둘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이 둘이 양립할 수는 없습니다.”
꼭 1년 전, 미국 공화당 대선(大選) 프라이머리 유세 연설에서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이 한 말이다. 전자(前者)의 회복을 호소했던 펜스는 지지를 얻지 못하고 한 달 뒤 경선(競選)에서 사퇴했다. 이후 론 드산티스와 비벡 라마스와미, 니키 헤일리도 줄줄이 사퇴했다. 결국 펜스가 보수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 포퓰리즘의 우두머리 격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는 11월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트럼프는 《힐빌리의 노래》의 저자 J. D. 밴스를 러닝메이트로 낙점하며 포퓰리즘의 ‘공화당 접수’를 매듭지었다. 링컨의 공화당은 이제 트럼프와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정당이 되었다.
그런데 과연 펜스의 공식은 옳은 것일까? 보수주의와 포퓰리즘은 정말 양립이 불가능할까? ‘MAGA 포퓰리즘’이 공화당을 잠식한 이상, 미 공화당에 보수주의가 설 자리는 없는 것일까?
“레이건은 보수 포퓰리스트”
보수주의가 포퓰리즘, 즉 대중적 인기에 반한다는 생각은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다.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최소 50년 역사는 펜스의 공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조지 W. 부시는 모두 한편으론 포퓰리즘적 성향과 공약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보수주의의 모델이자 영웅 레이건을 보자. 그는 1977년 미국보수연합의 정치행동콘퍼런스(CPAC)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보수는 다수(多數)를 장악하려는 소수(少數)의 이념적 순수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수는, 정치·사회 이슈를 자기 멋대로 설정하고 대화를 주도하는 학자들, 유행을 따르기 급급한 좌익 혁명가들, 어쩌다 공직에 선출된 몇몇 경제적 문맹자, 그리고 사회를 함부로 설계하려는 기술자들의 폭정에 맞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다수입니다.”
감세(減稅) 조치로 인한 경제 성장론을 뜻하는 ‘공급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이라는 개념을 창안해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 정책을 설정한 주드 와니스키(Jude Wanniski)는 1980년 레이건의 압승을 예측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골드워터가 보수 엘리트인 반면 레이건은 보수 포퓰리스트(conse rvative populist)이기 때문에 그는 이길 수밖에 없다.”
심지어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도 일면 포퓰리스트였다. 그가 (언제나처럼) 위트 있게 말했던 다음의 경구(警句)는 지금도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나는 보스턴 전화번호부에 (가나다순으로) 실린 첫 2000명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하버드대학교 교수진 2000명이 지배하는 사회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민주 정치에 내재된 포퓰리즘
이 논의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포퓰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모호한 개념이다.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뉘앙스는 ‘엘리트 지배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적 표출과 이에 대한 편승’ 정도다. 그런데 민주 사회에서는 그 지배층을 다름 아닌 대중이 선출했다는 데에 그 인식의 모순이 있다. ‘국민 주권’의 영어 풀이 자체가 ‘(대중에게) 인기 있는 주권(popular sovereignty)’인 것을 봐도 그렇다. 포퓰리즘은 실제로 다수의 지지로 권력을 위임받는 민주 정치의 필연적인 작동 원리이자 현상이다. 민주 사회에서 정치인의 성공은 대중과의 폭넓은 동질감은 물론 지배 엘리트와의 구별된 정체성(正體性)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보수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골드워터나 레이건이나 조지 W. 부시는 모두 기성(旣成) 정치인이 아닌 카우보이임을 내세웠다.
또한 포퓰리즘의 실질적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모한다. 공화당을 창설한 링컨의 시대에는 관세와 산업화가 대중의 지지를 얻었고 그 정책들은 현재 소위 엘리트주의 경제학을 구성했다. 지금은 그 반대의 내용이 미국 대중의 인기에 부합한다. 레이건이 올라탔던 포퓰리즘도 오늘날의 ‘MAGA 포퓰리즘’과는 매우 다른 종류였다. 그는 철저한 자유시장주의자로서 더 넓은 자유무역과 활발한 이민 정책을 펼쳤다. 이에 반해 트럼프는 분명 훨씬 더 순수한 의미의 포퓰리스트임이 틀림없다. 그는 소위 기득권층과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환멸감을 등에 업고 대립각을 세운다. 경제적으로는 보호주의적이고 대외적으로는 고립주의적이다.
그러나 이런 포퓰리스트 트럼프도 대통령으로서 세금 감면과 규제 완화, 공세적 대외 정책, 보수주의 법관 임명 등 다양한 보수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오히려 기존 보수 정치인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보수주의 정책 목표를 과감히 펼쳤고 상당 부분 성공했다. 그도 레이건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시대에 적합한 ‘보수 포퓰리스트’였다. 적어도 지난 트럼프 행정부의 행적으로 보면 그렇다.
사회·문화적 측면에서의 ‘보수 포퓰리즘’
그렇다면 보수주의와 포퓰리즘은 시대에 따라 분명 겹치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포퓰리즘이 엘리트 지배층의 과히 상식에 반하는 정책 기조, 정서와 대립하며 일반인, 즉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대변하려 할 때, 그것은 보수주의와 결을 같이한다. 그리고 보수주의 운동에서는 보기 드문 인기와 폭발력을 발휘한다.
가령 팬데믹 기간 동안 미약한 근거의 공중보건을 빌미 삼아 과도한 봉쇄와 자유 침해를 강요했던 지배층, 아이들에게 편협하게 획일화된 교과 내용을 규정하며 부모의 교육권을 침해하는 사회 설계자들, DEI(다양성, 평등, 포용)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앞세워 대학입시부터 공공기관 및 사기업 채용에서까지 일반인의 역차별을 조장하는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른’ PC주의자들, 최근 상당 부분 반박되고 있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개념 도입을 기업에 강요하는 환경 파시즘적 정책 입안자들 등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경멸과 반발에는 보수주의적 이유와 포퓰리즘적 이유가 모두 존재한다.
원칙적으로도 보수우파 내 대다수는 워싱턴 DC의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 소위 ‘딥스테이트’라고 불리는 행정국가에 적대적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대 보수주의자 대부분은 여론을 독점하다시피 주도하는 거대 주류 언론을 불신한다. 때문에 오늘날 보수주의자는 ‘딥스테이트’나 ‘거대 언론’과 같은 날카롭고 반(反)엘리트적인 포퓰리즘의 의식과 표현에 쉬이 편승하기도 한다.
특히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이 ‘보수 포퓰리즘’은 오늘날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보수는 전통적 결혼과 가족을 지지하고, 전통적인 유대-기독교적 성(性) 가치관과 도덕관을 방어한다. 이것이 서구 자유문명을 지탱하는 주요 기둥 중 하나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결혼과 가족은 물론, 전통적일 뿐 아니라 생물학적 차원의 성(性) 인식은 소수 지배 엘리트 계층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 적어도 2020년대 보수주의자의 투쟁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서의 포퓰리즘과 맥락을 함께한다.
레이건, “우리는 광신집단이 아니라 다수의 일원”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1977년 레이건의 CPAC 연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다음 대목에서 ‘보통의 남녀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과 예절’이 곧 보수주의라고 규정하며 보수가 곧 ‘다수’를 대변하고 있음을 역설한다.
〈보수주의는 이 세상에 그 많은 공포와 파괴를 가져온 이데올로기적 광신(狂信) 따위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방식대로 그들의 삶을 만들어가는 보통의 남녀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과 예절, 바로 이것이 오늘날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보수주의의 원칙들이 옳은 이유는, 이들이 한 세대 혹은 열몇 세대 정도의 사람들이 겪은 경험이 아닌 전체 인류 경험의 합에서 발견한 것들을 근거로 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변하고 있는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적 다수는, 미국인들이 관심도 갖지 않는 어떤 추상적 이론 따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상식과 지성, 합리성, 근면,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용기에 기반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 나라를 건설하고 위대하게 한 그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철학을 팔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철학을 공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현대 보수주의가 바로 그들의 정치적 본향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광신집단이 아니라 다수의 일원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행동하고 이야기합시다.〉
이럼에도 포퓰리즘은 보수주의를 그 근간의 가치관으로부터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포퓰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이고 맹목적인 음모론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위험한 대중의 ‘민주적’ 전투성은 존재하지 않는 적을 조장해내거나 헌법적 제약에 대한 조급함과 이탈로도 표현될 수 있다.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누리고 있는 헌정질서가 어디까지나 보수주의 가치관의 위대한 결과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미국에서의 보수주의는 다름 아닌 미국의 입헌주의(立憲主義)’인 것이다. 다시 말해, 1776년 독립정신으로 대표되는 미국 자유의 질서를 보전하여 수호하는 것이 곧 보수주의다. 보수주의자는 보수우파 내 일부 인물들이 암시하는, 유럽의 왕정(王政)이나 중세를 낭만화하며 헌정질서를 이탈하려는 듯한 욕구를 경계해야 한다. 충분히 길들여 능숙히 통제하지 못할 호랑이(포퓰리즘) 등에 함부로 올라타선 안 된다. 개인이 아닌 집단 대중은 길들일 수 없고, 언제나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본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미국의 혁명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프랑스 혁명과 현저히 구별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에드먼드 버크는 두 대중운동이자 시민혁명의 본질적 차이를 설파하며 미국의 혁명은 지지했고 프랑스 혁명은 반대했다. 1775년 그는 영국 의회에서 ‘대표성도 얻지 못한 채 세금만 내야 했던’ 미국인들의 호소를 변호하면서, 그들에게 ‘영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복원시켜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에게 미국 혁명은, 100여 년 전 영국 본토에서의 명예혁명이 그러했듯이, ‘이루어지지 않고 예방된(revolution not made, but prevented)’ 혁명이었던 것이다.
포퓰리즘, 대중의 희생자 의식 부추겨
그 혁명의 결과, 미국의 연방헌법은 어느 하나의 개인이나 정부뿐 아니라 다수(인민 대중)의 폭정(暴政)까지도 방지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크기나 주민 수에 상관없이 각 주(州)에서 동일한 인원(2명)이 선출되어 연방의 이익을 도모하는 상원이, 각 주의 인구에 비례하여 선출된 하원을 견제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상원의 차받침접시 효과(senatorial saucer)’라고 부른다. 다수의 열망에서 비롯될 수 있는 하원의 ‘뜨거운’ 입법안을 임기가 두 배 이상 긴 상원이 시간을 두고 식혀서 재고한다는 의미다. 사법부의 최고봉인 연방대법원의 상징 중 하나가 거북이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의 구현의 속도는 인민의 섣부른 열망에 따르지 않고 느리고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방대법원에는 아예 증인석이나 배심원석이 없다. 오로지 헌법에 준하는 법리(法理)의 여부만을 두고 양측 변호인이 다툴 뿐이다. 2대 대통령 존 애덤스가 미국 공화국을 ‘사람이 아닌 법의 정부(government of laws, not men)’라고 정의했던 것은 단지 말뿐이 아니었다.
반면 포퓰리즘은 미국 헌정주의를 보수하려는 현대 보수주의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시킬 우려가 상당하다. 먼저 포퓰리즘은 대중이 엘리트를 선출해 ‘자치(自治·self-govern)’한다는 민주적 원칙을 애써 숨기며 대중과 엘리트를 분리시킨다. 사회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과 잘못을 소수 엘리트 집단에 전가하며 불만과 희생자 의식을 부추긴다.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의 작동 원리다. 이는 좌파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배타주의와 부족주의 근성의 정체성 정치를 낳아 건강한 시민의식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오염시킨다.
포퓰리즘의 끝은 전체주의
포퓰리즘은 또한 복잡다단한 실제를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으로 단순화하여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 종종 모든 질서와 제도권 배후에 자신들만 아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세력을 상정하고 두려움을 조장·증폭하는 각종 음모론이 양산된다. 단 하나의 무엇만 해결하면 대중의 즉각적인 욕구 해소와 모든 정치·사회적 문제가 해소된다는 헛된 거짓말도 난무한다. 이는 보수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중함을 폐기시킨다. 보수주의 신념의 핵심에 있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한계에 대한 인정을 부정하는 태도다. 이 또한 자신들이 권력만 독점하면 지상천국을 만들 수 있다는 좌파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포퓰리즘은 그 원활한 작동을 위해 선동에 능한 카리스마적 정치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데, 종종 이 인물은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는 기존 통상적 절차와 제도를 불신하여 우회하고, 대중에 대한 소통 채널을 독점하기도 한다. 견제받지 않으면 결국 인민 대중의 뜻을 자기 자신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액튼 경의 유명한 경구처럼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이다.
좌익 포퓰리즘이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정의에 집착해 인위적 평등을 강제한다면, 우익 포퓰리즘은 민족주의와 같은 공동체의 정체성에 집착해 배타주의와 파시즘을 조장한다. 둘 다 끝은 전체주의다.
미국 보수주의의 지배적 힘이 된 포퓰리즘
결론적으로 보수주의 운동이나 지도자들은 시대에 따라 포퓰리스트적 레토릭이나 전략을 채택하기도 하며, 정권을 잡은 엘리트층이 반(反)보수적 정책을 펼 때 자연히 그 호소력은 증폭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미 공화당의 포퓰리스트적 전환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포퓰리즘의 위험성은 여전하기 때문에, 보수는 필요에 따라 그 인기를 누리고 활용하되 언제나 보수주의의 원칙을 재확언하는 침착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필수적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매튜 콘티네티는 그의 2023년 저서 《The Right》에서 미국 보수주의의 100년 역사를 되돌아보며 미국 보수 내 항상 있어 왔던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 간의 상호작용을 세밀히 분석했다. 그리고 그는 이 둘의 긴장이 보수주의 운동의 강점이 되기도 하고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음을 추적한다. 그러면서 보수 내 엘리트의 경험과 전문성, 장기적 비전 등이 일반 대중의 관심사를 유도하여 적절히 정렬될 때 그 균형과 상호작용이 보수의 재도약과 공고화라는 건설적 효과를 발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최근 수십 년 동안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인물의 부상(浮上)으로 포퓰리즘이 미국 보수주의에서 지배적인 힘이 되었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 포퓰리스트적 전환이 보수의 정신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장하는 방향으로 내딛기 위해서는, 1950년대 윌리엄 F. 버클리가 그랬듯이 대중과의 조화를 위한 보수 엘리트의 더 큰 자기희생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꼭 1년 전, 미국 공화당 대선(大選) 프라이머리 유세 연설에서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이 한 말이다. 전자(前者)의 회복을 호소했던 펜스는 지지를 얻지 못하고 한 달 뒤 경선(競選)에서 사퇴했다. 이후 론 드산티스와 비벡 라마스와미, 니키 헤일리도 줄줄이 사퇴했다. 결국 펜스가 보수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 포퓰리즘의 우두머리 격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는 11월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트럼프는 《힐빌리의 노래》의 저자 J. D. 밴스를 러닝메이트로 낙점하며 포퓰리즘의 ‘공화당 접수’를 매듭지었다. 링컨의 공화당은 이제 트럼프와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정당이 되었다.
그런데 과연 펜스의 공식은 옳은 것일까? 보수주의와 포퓰리즘은 정말 양립이 불가능할까? ‘MAGA 포퓰리즘’이 공화당을 잠식한 이상, 미 공화당에 보수주의가 설 자리는 없는 것일까?
“레이건은 보수 포퓰리스트”
보수주의가 포퓰리즘, 즉 대중적 인기에 반한다는 생각은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다.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최소 50년 역사는 펜스의 공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조지 W. 부시는 모두 한편으론 포퓰리즘적 성향과 공약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보수주의의 모델이자 영웅 레이건을 보자. 그는 1977년 미국보수연합의 정치행동콘퍼런스(CPAC)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보수는 다수(多數)를 장악하려는 소수(少數)의 이념적 순수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수는, 정치·사회 이슈를 자기 멋대로 설정하고 대화를 주도하는 학자들, 유행을 따르기 급급한 좌익 혁명가들, 어쩌다 공직에 선출된 몇몇 경제적 문맹자, 그리고 사회를 함부로 설계하려는 기술자들의 폭정에 맞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다수입니다.”
감세(減稅) 조치로 인한 경제 성장론을 뜻하는 ‘공급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이라는 개념을 창안해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 정책을 설정한 주드 와니스키(Jude Wanniski)는 1980년 레이건의 압승을 예측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골드워터가 보수 엘리트인 반면 레이건은 보수 포퓰리스트(conse rvative populist)이기 때문에 그는 이길 수밖에 없다.”
심지어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도 일면 포퓰리스트였다. 그가 (언제나처럼) 위트 있게 말했던 다음의 경구(警句)는 지금도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나는 보스턴 전화번호부에 (가나다순으로) 실린 첫 2000명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하버드대학교 교수진 2000명이 지배하는 사회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민주 정치에 내재된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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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등은 기성 정치인이 아닌 ‘카우보이’임을 내세웠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또한 포퓰리즘의 실질적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모한다. 공화당을 창설한 링컨의 시대에는 관세와 산업화가 대중의 지지를 얻었고 그 정책들은 현재 소위 엘리트주의 경제학을 구성했다. 지금은 그 반대의 내용이 미국 대중의 인기에 부합한다. 레이건이 올라탔던 포퓰리즘도 오늘날의 ‘MAGA 포퓰리즘’과는 매우 다른 종류였다. 그는 철저한 자유시장주의자로서 더 넓은 자유무역과 활발한 이민 정책을 펼쳤다. 이에 반해 트럼프는 분명 훨씬 더 순수한 의미의 포퓰리스트임이 틀림없다. 그는 소위 기득권층과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환멸감을 등에 업고 대립각을 세운다. 경제적으로는 보호주의적이고 대외적으로는 고립주의적이다.
그러나 이런 포퓰리스트 트럼프도 대통령으로서 세금 감면과 규제 완화, 공세적 대외 정책, 보수주의 법관 임명 등 다양한 보수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오히려 기존 보수 정치인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보수주의 정책 목표를 과감히 펼쳤고 상당 부분 성공했다. 그도 레이건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시대에 적합한 ‘보수 포퓰리스트’였다. 적어도 지난 트럼프 행정부의 행적으로 보면 그렇다.
사회·문화적 측면에서의 ‘보수 포퓰리즘’
그렇다면 보수주의와 포퓰리즘은 시대에 따라 분명 겹치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포퓰리즘이 엘리트 지배층의 과히 상식에 반하는 정책 기조, 정서와 대립하며 일반인, 즉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대변하려 할 때, 그것은 보수주의와 결을 같이한다. 그리고 보수주의 운동에서는 보기 드문 인기와 폭발력을 발휘한다.
가령 팬데믹 기간 동안 미약한 근거의 공중보건을 빌미 삼아 과도한 봉쇄와 자유 침해를 강요했던 지배층, 아이들에게 편협하게 획일화된 교과 내용을 규정하며 부모의 교육권을 침해하는 사회 설계자들, DEI(다양성, 평등, 포용)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앞세워 대학입시부터 공공기관 및 사기업 채용에서까지 일반인의 역차별을 조장하는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른’ PC주의자들, 최근 상당 부분 반박되고 있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개념 도입을 기업에 강요하는 환경 파시즘적 정책 입안자들 등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경멸과 반발에는 보수주의적 이유와 포퓰리즘적 이유가 모두 존재한다.
원칙적으로도 보수우파 내 대다수는 워싱턴 DC의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 소위 ‘딥스테이트’라고 불리는 행정국가에 적대적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대 보수주의자 대부분은 여론을 독점하다시피 주도하는 거대 주류 언론을 불신한다. 때문에 오늘날 보수주의자는 ‘딥스테이트’나 ‘거대 언론’과 같은 날카롭고 반(反)엘리트적인 포퓰리즘의 의식과 표현에 쉬이 편승하기도 한다.
특히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이 ‘보수 포퓰리즘’은 오늘날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보수는 전통적 결혼과 가족을 지지하고, 전통적인 유대-기독교적 성(性) 가치관과 도덕관을 방어한다. 이것이 서구 자유문명을 지탱하는 주요 기둥 중 하나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결혼과 가족은 물론, 전통적일 뿐 아니라 생물학적 차원의 성(性) 인식은 소수 지배 엘리트 계층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 적어도 2020년대 보수주의자의 투쟁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서의 포퓰리즘과 맥락을 함께한다.
레이건, “우리는 광신집단이 아니라 다수의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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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에 의한 미 국회의사당 난동 사태는 포퓰리즘이 입헌주의를 파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AP/뉴시스 |
〈보수주의는 이 세상에 그 많은 공포와 파괴를 가져온 이데올로기적 광신(狂信) 따위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방식대로 그들의 삶을 만들어가는 보통의 남녀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과 예절, 바로 이것이 오늘날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보수주의의 원칙들이 옳은 이유는, 이들이 한 세대 혹은 열몇 세대 정도의 사람들이 겪은 경험이 아닌 전체 인류 경험의 합에서 발견한 것들을 근거로 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변하고 있는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적 다수는, 미국인들이 관심도 갖지 않는 어떤 추상적 이론 따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상식과 지성, 합리성, 근면,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용기에 기반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 나라를 건설하고 위대하게 한 그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철학을 팔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철학을 공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현대 보수주의가 바로 그들의 정치적 본향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광신집단이 아니라 다수의 일원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행동하고 이야기합시다.〉
이럼에도 포퓰리즘은 보수주의를 그 근간의 가치관으로부터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포퓰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이고 맹목적인 음모론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위험한 대중의 ‘민주적’ 전투성은 존재하지 않는 적을 조장해내거나 헌법적 제약에 대한 조급함과 이탈로도 표현될 수 있다.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누리고 있는 헌정질서가 어디까지나 보수주의 가치관의 위대한 결과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미국에서의 보수주의는 다름 아닌 미국의 입헌주의(立憲主義)’인 것이다. 다시 말해, 1776년 독립정신으로 대표되는 미국 자유의 질서를 보전하여 수호하는 것이 곧 보수주의다. 보수주의자는 보수우파 내 일부 인물들이 암시하는, 유럽의 왕정(王政)이나 중세를 낭만화하며 헌정질서를 이탈하려는 듯한 욕구를 경계해야 한다. 충분히 길들여 능숙히 통제하지 못할 호랑이(포퓰리즘) 등에 함부로 올라타선 안 된다. 개인이 아닌 집단 대중은 길들일 수 없고, 언제나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본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미국의 혁명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프랑스 혁명과 현저히 구별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에드먼드 버크는 두 대중운동이자 시민혁명의 본질적 차이를 설파하며 미국의 혁명은 지지했고 프랑스 혁명은 반대했다. 1775년 그는 영국 의회에서 ‘대표성도 얻지 못한 채 세금만 내야 했던’ 미국인들의 호소를 변호하면서, 그들에게 ‘영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복원시켜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에게 미국 혁명은, 100여 년 전 영국 본토에서의 명예혁명이 그러했듯이, ‘이루어지지 않고 예방된(revolution not made, but prevented)’ 혁명이었던 것이다.
포퓰리즘, 대중의 희생자 의식 부추겨
그 혁명의 결과, 미국의 연방헌법은 어느 하나의 개인이나 정부뿐 아니라 다수(인민 대중)의 폭정(暴政)까지도 방지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크기나 주민 수에 상관없이 각 주(州)에서 동일한 인원(2명)이 선출되어 연방의 이익을 도모하는 상원이, 각 주의 인구에 비례하여 선출된 하원을 견제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상원의 차받침접시 효과(senatorial saucer)’라고 부른다. 다수의 열망에서 비롯될 수 있는 하원의 ‘뜨거운’ 입법안을 임기가 두 배 이상 긴 상원이 시간을 두고 식혀서 재고한다는 의미다. 사법부의 최고봉인 연방대법원의 상징 중 하나가 거북이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의 구현의 속도는 인민의 섣부른 열망에 따르지 않고 느리고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방대법원에는 아예 증인석이나 배심원석이 없다. 오로지 헌법에 준하는 법리(法理)의 여부만을 두고 양측 변호인이 다툴 뿐이다. 2대 대통령 존 애덤스가 미국 공화국을 ‘사람이 아닌 법의 정부(government of laws, not men)’라고 정의했던 것은 단지 말뿐이 아니었다.
반면 포퓰리즘은 미국 헌정주의를 보수하려는 현대 보수주의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시킬 우려가 상당하다. 먼저 포퓰리즘은 대중이 엘리트를 선출해 ‘자치(自治·self-govern)’한다는 민주적 원칙을 애써 숨기며 대중과 엘리트를 분리시킨다. 사회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과 잘못을 소수 엘리트 집단에 전가하며 불만과 희생자 의식을 부추긴다.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의 작동 원리다. 이는 좌파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배타주의와 부족주의 근성의 정체성 정치를 낳아 건강한 시민의식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오염시킨다.
포퓰리즘의 끝은 전체주의
포퓰리즘은 또한 복잡다단한 실제를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으로 단순화하여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 종종 모든 질서와 제도권 배후에 자신들만 아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세력을 상정하고 두려움을 조장·증폭하는 각종 음모론이 양산된다. 단 하나의 무엇만 해결하면 대중의 즉각적인 욕구 해소와 모든 정치·사회적 문제가 해소된다는 헛된 거짓말도 난무한다. 이는 보수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중함을 폐기시킨다. 보수주의 신념의 핵심에 있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한계에 대한 인정을 부정하는 태도다. 이 또한 자신들이 권력만 독점하면 지상천국을 만들 수 있다는 좌파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포퓰리즘은 그 원활한 작동을 위해 선동에 능한 카리스마적 정치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데, 종종 이 인물은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는 기존 통상적 절차와 제도를 불신하여 우회하고, 대중에 대한 소통 채널을 독점하기도 한다. 견제받지 않으면 결국 인민 대중의 뜻을 자기 자신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액튼 경의 유명한 경구처럼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이다.
좌익 포퓰리즘이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정의에 집착해 인위적 평등을 강제한다면, 우익 포퓰리즘은 민족주의와 같은 공동체의 정체성에 집착해 배타주의와 파시즘을 조장한다. 둘 다 끝은 전체주의다.
미국 보수주의의 지배적 힘이 된 포퓰리즘
결론적으로 보수주의 운동이나 지도자들은 시대에 따라 포퓰리스트적 레토릭이나 전략을 채택하기도 하며, 정권을 잡은 엘리트층이 반(反)보수적 정책을 펼 때 자연히 그 호소력은 증폭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미 공화당의 포퓰리스트적 전환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포퓰리즘의 위험성은 여전하기 때문에, 보수는 필요에 따라 그 인기를 누리고 활용하되 언제나 보수주의의 원칙을 재확언하는 침착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필수적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매튜 콘티네티는 그의 2023년 저서 《The Right》에서 미국 보수주의의 100년 역사를 되돌아보며 미국 보수 내 항상 있어 왔던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 간의 상호작용을 세밀히 분석했다. 그리고 그는 이 둘의 긴장이 보수주의 운동의 강점이 되기도 하고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음을 추적한다. 그러면서 보수 내 엘리트의 경험과 전문성, 장기적 비전 등이 일반 대중의 관심사를 유도하여 적절히 정렬될 때 그 균형과 상호작용이 보수의 재도약과 공고화라는 건설적 효과를 발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최근 수십 년 동안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인물의 부상(浮上)으로 포퓰리즘이 미국 보수주의에서 지배적인 힘이 되었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 포퓰리스트적 전환이 보수의 정신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장하는 방향으로 내딛기 위해서는, 1950년대 윌리엄 F. 버클리가 그랬듯이 대중과의 조화를 위한 보수 엘리트의 더 큰 자기희생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고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