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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튀르키예공화국 100주년

전통과 현대화의 갈등으로 점철된 튀르키예 현대사

에르도안, 아타튀르크의 반대자가 아니라, 그 한계 극복한 인물로 받아들여져

글 :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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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말주의 공화인민당의 패배는 국가 수호·현대화에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통 문명을 향한 인간의 본원적 향수를 지워낼 수 없음을 보여줘

⊙ 케말 아타튀르크, 건국 후 탈이슬람 근대화 노선 추구… 한국 등에 군부 주도 근대화 모델 제시
⊙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케난 에브렌, 경제 자유화를 지지하는 이슬람주의 우익과 결탁
⊙ 1980~1990년대 경제 자유화·세계화 거치면서 아나톨리아 내륙의 신흥 중산층 등장… 에르도안의 기반 돼
⊙ 케말 파샤 계승한 공화인민당, 오랫동안 군부에 의존하면서 무기력해지고, 새로운 비전 제시에 실패
⊙ 앞으로의 시대는 에르도안·모디처럼 현대성과 전통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류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이들이 주도할 것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 저서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K를 생각한다》
지난 8월 30일 전승기념일 행사에서 연설 중인 에르도안 대통령 뒤로 국부 아타튀르크가 그려진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에르도안 페이스북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3년 3월 14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튀르키예공화국의 총리직에 오르면서 ‘에르도안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3년 튀르키예공화국이 건국한 지 80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고 20년이 흐른 지금, 튀르키예는 여전히 ‘에르도안 시대’로 건국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튀르키예의 5월을 뜨겁게 달구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에르도안이 또다시 승리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경제난과 미국과의 관계 악화, 무엇보다 지난 2월에 동남부 가지안테프 지역에서 발생한 대지진 등 악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건국 100주년에 에르도안이 20년 집권을 끝내고 권좌에서 내려올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승자는 에르도안이었다. 이제 그는 1923년 튀르키예의 새로운 수도가 된 앙카라에서 튀르키예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같은 위치에서, 튀르키예공화국 100년의 역사를 결산하고 새로운 100년의 비전을 천명할 지도자가 되었다.
 
  에르도안과 시작될 튀르키예의 새로운 세기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에르도안은 어떻게 장기 집권에 성공했을까? 이 기나긴 ‘에르도안 시대’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그리고 에르도안의 튀르키예는 앞으로 세계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도고 헤이하치로와 무스타파 케말
 
탄지마트 개혁을 추진한 압둘메지드 1세.
  이를 알기 위해서는, 튀르키예공화국이 건국되기 이전, 1905년 쓰시마(對馬島) 해전에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러시아 제국의 발틱함대를 무너뜨린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로 그 순간에, 대륙 반대편에 있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사관학교를 갓 졸업하고 임관한 25세 젊은 장교 하나가 이 소식을 접하면서 전율(戰慄)하며 각성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1881~1938년)로, 훗날 아타튀르크로 알려지며 1923년부터 오늘날까지 튀르키예의 100년 역사를 규정짓는 인물이다.
 
  무스타파 케말이 전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본이 러시아를 향해 보여준 결정적 승리가 그의 조국 오스만 제국이 150년 동안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905년의 오스만 제국은 유럽 열강을 상대로 그런 승리를 꿈조차 꿀 수 없게 된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본래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과 마주한 경쟁자인 유럽의 힘이 급속도로 강력해졌고, 힘의 차이가 너무나 극명해진 결과 1774년 크림 칸국을 빼앗아간 러시아와의 조약, 이집트를 순식간에 유린한 1798년의 나폴레옹 원정 등에 오스만 제국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19세기 내내 오스만 제국은 서구 열강의 압력으로부터 생존하고자 숱한 노력을 기울였다. 1839년 압둘메지드 1세(1823~1861년)는 제국을 근대적으로 전면 재조직한다는 귈하네 칙령을 발표하고 탄지마트 개혁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국을 소생시키기 위한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유럽 민족주의가 제국 내부에서 커다란 동요를 일으키면서 안정적 정책 추진을 어렵게 만든 데 있었다. 제국의 여러 무슬림 지역도 분권화, 혹은 유럽에 의한 식민화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집트와 그리스가 이탈하며 제국은 큰 타격을 받았다. 사실상 제국의 생명은 러시아를 전략적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 영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제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결정하면서 연장될 수 있었다. 크림전쟁에서 영불 연합군은 러시아를 무릎 꿇리고 오스만의 생존을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사이에 제국 내부의 비무슬림 상인들과 연계한 유럽 열강이 제국 내에서 상업적 이익을 최대로 취하고 있었다.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과 그들을 지원하는 영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이 제국의 경제권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청년튀르크당
 
압둘하미드 2세.
  1878년에 절치부심한 러시아가 오스만군을 완전히 패퇴시키고 제국의 존속 자체를 다시 위협하자, 황제(술탄) 압둘하미드 2세(1842~1918년)는 기존의 서구화 개혁으로는 제국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영국의 외교적 지원으로 제국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발칸 북부의 영토를 전부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인 인구가 줄어든 것을 두고 압둘하미드는 차라리 이슬람 정체성(正體性)을 제국 통합의 기제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칼리프(이슬람교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이 모든 무슬림의 수호자임을 호소했다. 압둘하미드는 헌정(憲政)을 중지, 의회를 폐쇄하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며 물질적 근대화를 신속히 추진해나갔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압둘하미드 시기에 철도, 학교, 병원 등 여러 근대적 인프라가 확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서구를 문명의 척도로 생각하고, 제국을 위해서는 급진적 서구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새로운 세대의 엘리트들은 황제 전제정(專制政)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881년에 태어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들에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향해 거둔 승리는 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급진적 근대화 개혁을 통해 일본은 오스만이 150년 동안 이기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적인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일본의 승리는 오스만의 젊은 엘리트들에게, 비서구인이라고 태생적으로 열등한 것이 아니며, 지도자와 국민이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음을 입증한 사건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일본이 러시아를 무찌른 가장 큰 요소에는 헌법이 있었다. 헌법이 없는 러시아 전제정과 비교해 입헌군주정, 즉 더 문명적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이 국가의 빠른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압둘하미드 2세의 헌정 중지에 불만을 품고 여러 조직을 결성했던 제국의 청년 장교들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단일 조직으로 결집하였고, 1906년 연합진보위원회를 창설했다. 아타튀르크는 1907년에 이 조직의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들은 ‘청년튀르크(Young turks)’로 불렸다. 청년튀르크는 헌정을 복원하고 조국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1908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압둘하미드 전제정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황혼, 영웅의 탄생
 
  하지만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오스만 제국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심각한 적신호였다. 영국은 이로써 19세기 내내 러시아와 벌여온 전략적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끝났다고 판단하여 러시아를 새로운 위협인 독일에 맞서는 동맹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러시아는 독일에 맞서는 동맹의 대가로 중동(中東)에서의 자신의 지분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정교회(正敎會)의 수호자를 자임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도 분할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회복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영국의 지원은 러시아에 맞서 오스만 제국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었다. 이제 그 지원이 사라지며, 제국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살기 위해서라도 영국과 러시아를 당해낼 수 있는 또 다른 강대국인 독일과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독일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불구덩이로 뛰어들게 되었다.
 

  오스만 입장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대재난이나 다름없었다. 승리를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 하는 총력전(總力戰)을 수행하기에 오스만의 국력과 사회 통합력, 조직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북동쪽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밀고 내려왔고, 남쪽에서는 영국군이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스만의 여러 민족 집단을 선동하여 오스만의 전쟁 수행 능력에 타격을 입히고자 했다. 러시아와 오스만 양측에 걸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엄청난 공격이 벌어졌다. 영국은 아랍 부족장들을 상대로 새로운 아랍 국가 건설을 약속했고, 그 결과 ‘아랍 대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제국의 근대화를 향한 노력은 아예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로 향하는 문턱,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에 상륙하는 영국군을 무찔렀다. 무시무시한 영국군을 무찌르고 제국을 지켜낸 인물은 30대 중반의 대령 무스타파 케말이었다. 포연이 자욱하고 시체가 즐비한 해안선에서 제국의 젊은 군인은 민족의 영웅으로 변모해나갔다.
 
 
  공화국의 출범
 
1923년 10월 19일 케말 아타튀르크는 새 수도 앙카라에서 튀르키예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제국을 구할 수는 없었다. 1918년이 되었을 때, 제국의 전쟁 수행 능력은 완전히 고갈되었다. 동맹국인 독일도 새로 도착한 미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4년에 걸친 대전쟁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승전국들은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해체하기로 결의했다.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마저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마침내 1920년 체결된 세브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아랍 영토를 모두 잃는 것은 물론이고, 제국의 본토인 아나톨리아마저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에 분할당했다. 패배한 제국의 황제는 조약에 무력(無力)하게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조국의 굴욕과 무력한 지배층에 분개한 이들은 승전국의 점령에 맞서 봉기했다. 봉기군은 갈리폴리의 영웅 무스타파 케말을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앙카라에서 튀르키예대국민의회를 열어 모든 튀르키예인의 항전을 호소했다. 3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 끝에 케말의 군대는 영국군, 프랑스군, 그리스군을 몰아내고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과 이스탄불을 지켜낼 수 있었다. 1923년, 세브르 조약을 대신할 새로운 조약인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 열강과의 전쟁 및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운동으로 점철된 오스만 제국의 ‘기나긴 19세기’는 마침내 끝날 수 있었다.
 
  케말은 앙카라를 새 수도(首都)로 정하고 이제 이 나라는 오스만 제국이 아니라 ‘튀르키예공화국’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튀르키예 의회는 조국을 구해낸 그에게 튀르키예인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아타튀르크’라는 성(姓)을 헌정(獻呈)했다.
 
 
  ‘세브르 트라우마’와 케말주의
 
  공화국의 지도자가 된 아타튀르크와 그의 동료들의 문제의식은 간명했다. 세브르 조약은 서구 열강이 무력(武力)을 앞세워 얼마든지 튀르키예를 분할할 수 있음을 보여줘 전 국민적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아타튀르크의 사명이 되었다.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이 어째서 그렇게 허약했는지, 개혁은 왜 성공할 수 없었는지를 숙고하며 신생 튀르키예의 새로운 비전을 정립했다. ‘케말주의’의 탄생이었다.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이슬람교 전통의 영향력을 일소해야 하고, 하나로 묶기 어려운 다민족(多民族) 사회를 튀르키예인이 중심이 되는 단일민족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계몽된 군인과 관료 엘리트가 주도하는 국가 기구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당연하게도, 반대자는 철저히 억압되어야 마땅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그 절정인 세브르 조약이 남긴 트라우마는 아타튀르크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막대한 사명감을 안겨주었고, 사명감은 강력한 억압을 정당화해주었다.
 
  아타튀르크와 그의 후계자들은 근대적 교육과 민법 체계를 도입하고, 공적(公的) 영역에서 이슬람의 존재감을 지웠다.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히잡 착용도 해제했다. 구습(舊習)을 일소하고 문자를 빠르게 보급하기 위해 아랍 문자 대신 라틴 알파벳이 채택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한 아타튀르크의 승리와 그가 추진한 과감한 개혁은 18년 전 도고 헤이하치로의 승리만큼이나 큰 울림을 주었다. 군부(軍部)가 주도하여 국가를 빠르게 근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반대자들은 억압해도 무방했던 모습은 20세기 아시아의 수많은 지도자가 공유(共有)하는 신화(神話)가 되었다. 이란의 레자 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와 같은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5·16 군사혁명을 일으킨 장교들 또한 아타튀르크에게서 큰 영감을 받았다. 서구에 뒤처진 아시아 민족을 재건하고 국가를 근대화하는 지도자 신화의 시작이었다.
 
 
 
멘데레스 정권

 
케말 아타튀르크의 후계자인 제2대 대통령 이스메트 이뇌뉘.
  아타튀르크는 15년간 튀르키예를 통치하고 1938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死後)에도 케말주의 노선에 따른 근대화 프로그램은 계속해서 추진되었다. 그의 후임자인 이스메트 이뇌뉘(1884~1973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키면서 튀르키예를 안전하게 지켜냈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새롭게 떠오른 초강대국인 공산주의 소련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노출되게 되었다. 독일을 무찌른 소련은 동유럽에서 지배권을 강화했으며, 이를 계기로 이스탄불 인근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했다. 튀르키예 내부에서도 좌경 공산 세력이 더욱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스메트 이뇌뉘는 공산 세력으로부터 튀르키예를 지키기 위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공화인민당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지던 튀르키예는 자유선거가 실시되는 다당제(多黨制) 민주국가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선거는 공화인민당에 패배를 가져왔다. 사반세기에 걸친 공화인민당 정부에 대한 불만에 표심이 민주당의 아드난 멘데레스(1889~1961년)로 결집되었고, 1950년 튀르키예는 최초의 정권 교체를 경험한다.
 
아드난 멘데레스 전 총리.
  같은 해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남침을 목도하고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튀르키예군을 파병한 것은 멘데레스가 취한 거의 최초의 중요한 정책 중 하나였다. 튀르키예는 한국전쟁에서 공산군에 맞서 분투하며 자유 진영을 지킬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튀르키예의 숙적(宿敵)인 그리스의 반대에도 튀르키예의 나토(NATO) 가입을 지지했다. 튀르키예가 공산 세력에 맞선 안보 우산을 확보하며 자유 진영에 공식적으로 속하게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튀르키예 군부는 멘데레스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멘데레스가 점점 독단적인 통치를 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멘데레스는 공화인민당이 오랜 기간 억압해온 이슬람에 지지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군부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슬람이 부활하는 것은 케말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라고 간주하며 분노했다. 1960년 군부는 최초의 쿠데타를 감행해 멘데레스를 처형한 뒤 민선 정부를 새로 꾸리도록 지시했다. 이 경험은 국가의 발전과 아타튀르크의 ‘개혁’을 위해서는 선도적 존재인 군(軍)이 나서서 쿠데타를 감행해도 된다는 관념으로 자리 잡았다.
 
 
  박정희 군부와 튀르키예 군부의 차이점
 
  문제는 군부와 연계된 케말주의 세력이 계속해서 안정적 지지를 확보할 만큼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 데 있었다. 여전히 다수의 튀르키예인이 갖고 있던 이슬람 신앙을 억누르는 것은 점차 다수의 반감에 부딪히고 있었다.
 
  경제 발전이 정체(停滯)된 것도 큰 문제였다. 아타튀르크와 동료들은 오스만 제국 시기에 기독교계 민족들이 유럽 열강을 등에 업고 제국의 상업을 장악한 것을 기억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군과 관료 엘리트들이 국가 경제 발전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믿음은 케말주의가 사회주의에 우호적이 되도록 이끌었다. 물론 소련식 공산주의는 배격했지만, 국영기업을 중심으로 국가가 경제 전반에 개입하고, 대외무역과 외자(外資) 유치를 꺼리는 좌파적 경제 정책이 계속해서 시행되었다. 이 점에서 케말주의 군부는 똑같이 군 엘리트가 국가적 동원을 통해 발전을 이끌었지만, 대외무역과 외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박정희(朴正熙) 정부 및 대한민국 군부와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멘데레스 이후 시기에는 국가를 운영하는 케말주의 엘리트들은 대체로 온건한 사회주의 성향을 띠는 가운데, 이슬람과 자유경제를 주장하는 우익과 친소적(親蘇的)인 좌익이 부딪히는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인기 없는 정부 대신에 급진적인 전환을 주장하는 재야(在野) 세력들이 세를 불려 나갔다.
 
  그 결과 1971년 극심해진 좌우 갈등으로 내각 및 사회 혼란이 지속되자 군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사태를 정리해야만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좌익과 이슬람주의 우익의 성장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군부와 이슬람주의의 결탁

 
  1970년대는 정치·경제적으로 자유 진영이 위기에 처하며 좌익 세력이 약진한 시기였고, 중동에서는 이슬람주의가 발호한 시기이기도 했다. 1979년에는 이란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케말을 모방한 이란 팔레비 왕정(王政)을 무너뜨리는 혁명이 일어났다.
 
  결국에는 1980년 튀르키예 또한 새로운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을 때, 튀르키예 군부는 좌익과 우익 중에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혈 낭자한 쿠데타를 또다시 일으킨 군부 지도자 케난 에브렌이 선택한 동맹은, 소련을 등에 업은 좌익이 아니라, 경제 자유화를 지지하는 이슬람주의 우익이었다. 1980년대 내내 케난 에브렌 정부는 이슬람주의자들을 끌어들이고자 노력했고, 세속주의(世俗主義) 원칙을 다소 후퇴시켜 튀르키예 민족과 이슬람이 얼마나 잘 화합할 수 있는지를 역설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을 튀르키예 애국자로 포섭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총리직을 맡은 투르구트 외잘은 경제 자유화 개혁을 이끌면서 훗날 튀르키예 경제 성장의 초석을 닦았다. 이슬람주의자의 정치적 지지 및 경제적 성과가 이어지면서 좌익 세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마침내 소련이 붕괴되며 냉전(冷戰)이 끝났다.
 
  소련과 국내 좌익의 안보 위협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슬람에 우호적인 우익이 본격적으로 약진했다. 1980년대의 경제 자유화와 1990년대의 세계화는, 이스탄불과 이즈미르 같은 서부 해안 도시의 전통적 중산층(中産層)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내륙의 신흥 중산층, ‘아나톨리아 호랑이’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수출 주도형 중소기업을 통해 부(富)를 축적하고, 교육을 통해 중산층에 진입했다. 경제 자유화 및 이슬람 포용의 결과 탄생한 신세대 중산층들은 이슬람의 종교적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를 원했는데, 현대 도시 사회에 걸맞은 현대적 형태의 이슬람을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군부는 1997년 ‘연성(軟性) 쿠데타’를 통해 신흥 우익 세력의 정치 진입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민심을 돌릴 수는 없었다. 케말의 정당 공화인민당은 오랜 군부 의존 때문에 서부 지역의 전통적 지지층으로부터도 인기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이스탄불 시장을 역임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은 2002년 선거에서 말 그대로 압승을 거두었고, 에르도안은 총리직에 올랐다.
 
  집권 초 에르도안의 전략은 간단했다. 경제 발전과 현대화를 이룰 수 있는 이슬람이 있으며, 그것이 서구 자유주의와도 합치함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를 실제로 입증할 수 있다면 ‘세브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군부도 정치에 개입할 수 없을 터였다.
 
  에르도안은 경제 개방을 가속화하여 튀르키예 경제를 새로운 성장 가도에 올려놓았고,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여 내륙 지역의 인프라를 혁신적으로 개선하였다. 그동안 경제 성장에서 배제되어 있던 도시 빈민과 농민이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중산층으로 변신했고, 모스크는 그들에게 사회적 자본과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공간이 되었다. 에르도안은 또한 유럽연합(EU) 가입을 천명하고, 이를 위해 유럽연합이 요구하는 시민 자유와 인권 문제의 개선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모두 군부의 정치 개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치였지만, 그 목표가 튀르키예의 오랜 숙원인 ‘완전한 유럽화’에 있는 것이었기에 군부 입장에서도 딱히 반발할 이유가 없었다.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에서의 전쟁으로 ‘이슬람과의 화해’를 도모하고자 했던 서구인들은 에르도안의 등장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자유경제와 민주주의를 모두 외치고, 이를 ‘현대적 이슬람’을 통해 정당화한 ‘에르도안 모델’은 이슬람 문명이 앞으로 나아갈 길로써 상찬(賞讚)을 받았다.
 
 
  포퓰리즘
 
  하지만 서구화를 충실히 따르는 것 같은 ‘에르도안 모델’은 2010년대 들어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한다. 대외 환경의 변화가 결정적이었다. 유럽연합은 튀르키예의 가입을 다양한 이유로 거부했고, 이는 튀르키예인들에게 자신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유럽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2011년 유로존 위기는 유럽연합이 과연 모델로서 따를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키웠다. 반대로 2011년에 권위주의 정권을 연쇄적으로 무너뜨린 아랍 봉기는 튀르키예의 새로운 방향을 동남쪽에서 열어주는 것같이 보였다. 많은 아랍 군중은 세속주의적 독재자 대신에 에르도안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토론했다.
 
  이런 상황에서 2013년에 이스탄불에서 정권의 부정부패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에르도안의 선택은 명확해졌다. 에르도안은 서구의 눈치를 보며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보다는 강경한 진압 조치를 명령했다. 튀르키예의 야권은 격렬히 반발했고, 서구에서는 에르도안의 튀르키예가 권위주의로 다시 방향을 선회할까 우려했다.
 
  에르도안은 자신에 대한 대내외적 반발을 포퓰리즘을 통해 돌파하기로 했다. ‘현대적 이슬람’ 대신에 국가적 자긍심과 도덕의 원천으로써 이슬람을 외치는 빈도가 더욱 잦아졌고, 이 과정에서 현대적 이슬람의 이데올로그였던 페툴라 귈렌(82)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서구화된, 전통적인 공화인민당 지지층인 서부 중산층들은 튀르키예 민족과 이슬람을 버린 이들,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며 위스키나 마시는 신(新) 귀족 집단’으로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수사법은 에르도안의 주요 지지층인, 오랜 기간 케말주의의 경제적 실패로 낙후함을 감내해야 했던 중동부 지역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新오스만주의
 
2016년 7월 16일 군부가 감행한 쿠데타는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끝났다. 사진=AP/뉴시스
  2010년대를 거치며 에르도안은 케말주의라는 튀르키예의 오랜 국시(國是)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 이념을 모색하고 홍보했다. 그는 이슬람에 우호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란의 호메이니와 같은 이슬람 신정(神政)체제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튀르키예인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으면서도 국제적으로 튀르키예의 영광을 떨칠 수 있는 주제가 필요했다.
 
  결국 그가 찾아낸 것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었다. 케말주의하에서 오스만 제국의 역사는 대체로 후진성(後進性)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대신에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전통이 그 빈자리를 채울 때가 많았다. 그러나 대중은 이슬람의 칼리프로서 3개 대륙을 호령했던 오스만 제국의 전통을 여전히 기억하고 싶어 했다. 에르도안은 공식 행사와 대중문화에 걸친 전 영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강조하며, 튀르키예가 서구와 각을 세우고 아랍, 이슬람 지역에서 적극적인 행보를 펴는 것을 정당화했다. 국내적으로는 칼리프를 내세우고 이슬람과 현대화를 동시에 추구한 압둘하미드 2세를 더욱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이러한 튀르키예의 새로운 국가 이념 및 대외 정책을 몇몇 사람은 ‘신(新)오스만주의’라고 칭했다.
 
  포퓰리즘 수사와 신오스만주의 등을 통해 핵심 지지층의 지지를 견고히 할 수 있었던 에르도안은 2016년 위기를 맞이한다. 그를 축출하려는 쿠데타가 발발한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힘이 이미 약화되었고, 시민들이 군부의 정치 개입을 더는 지지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쿠데타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나토 회원국이면서 상하이협력기구 가입
 
  쿠데타를 빌미로 에르도안은 ‘세브르 트라우마’를 더욱 본격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케말주의는 유럽 열강의 침탈과 내부의 불온 세력이 세브르 조약이라는 굴욕을 만들어냈다는 트라우마를 활용해 권력을 유지했다. 그 점에서는 에르도안도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세력과 그들의 앞잡이인 불온 세력(주로 귈렌의 지지자들)이 튀르키예를 위협한다고 호소하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는 점에서 마찬가지 구도를 활용했다.
 
  국내적으로는 자유주의자들과의 기존 동맹 관계를 대부분 청산하고, 대신에 극우적인 민족주의행동당과의 연대(連帶)를 구축하여 정치적 좌표를 더욱 오른쪽으로 옮겼다. 대내외적 위협에서 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와 관료, 언론, 지식인층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진행되었고, 에르도안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에르도안은 미국에 페툴라 귈렌의 송환을 요구했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에르도안의 튀르키예와 서방 국가와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튀르키예는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미국과 중국의 갈등 격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겪으며 가시화된 자유주의 질서의 위기를 십분 활용하기 시작했다. 튀르키예는 나토 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협의체인 상하이협력기구(SCO)에 가입을 신청했다. 튀르키예의 국내 담론 지형에서는 러시아 푸틴의 이데올로그인 알렉산드르 두긴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유라시아주의자’ 그룹이 더욱 목소리를 크게 내게 되었다.
 
  물론 튀르키예가 그렇다고 완전히 반서방 진영으로 기울지는 않았다. 튀르키예는 자국산 드론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했고, 여전히 나토 가입국으로서 역내(域內) 안보 협력에 참여하고 있다.
 
 
  에르도안주의
 
지난 5월 28일 에르도안 현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되자 지지자들이 에르도안의 사진이 들어 있는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하지만 에르도안의 외교적 독자 노선은 물론이고, 국내적 권력 극대화를 위하여 경제에 자주 개입한 일들은 에르도안의 대표적인 치적이었던 경제 발전을 해칠 수밖에 없었다. 서구 지향적 전문가 계층이 국가에 더 환멸을 느끼고, 서구가 튀르키예의 금리(金利) 정책을 우려하면서, ‘에르도안으로는 안 된다’라는 반감이 청년층을 통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케말주의 시대에 계획경제와 세속주의에 반발한 청년층은 이슬람주의자가 되어 정권을 교체했다. 이제 그들은 중년층이 되었고, 대신에 이슬람을 지향하는 에르도안 시대에 반발하는 새로운 청년층이 등장하여 시대를 다시 ‘정상화’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튀르키예 국내외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하지만 2023년의 대통령 선거는 다수의 튀르키예인이 생각하는 ‘정상성(正常性)’은 케말주의보다는 ‘에르도안주의’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론 조사에서 공화인민당 후보 케말 클르츠다르올루가 우세를 점할 때도 있었으나, 실제 투표 결과는 에르도안의 낙승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를 알고 나서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 공화인민당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에르도안은 어쨌든 집권 초에는 케말주의의 실수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다수의 튀르키예인이 원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발표하여 열광적인 지지층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것은 케말주의의 완전한 청산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에르도안은 케말주의 시대부터 유구하게 지속되어온, ‘국가가 약해진다면 언제든지 서구의 위협이 가시화되고 내부의 적이 국가를 혼란하게 할 것이다’라는 세브르 트라우마를 계승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에르도안 지지자들은 에르도안이 아타튀르크의 반대자가 아니라, 그의 한계를 넘어 그의 사상을 초극(超克)하고 완성한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야당 공화인민당, 새로운 비전 제시 실패
 
  반대로 공화인민당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요컨대 야당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케말주의를 이슬람주의로 극복해낸 것처럼 그에 비견되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에는 에르도안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만들 수 없었다. 선거에서 이미 여러 번 패배했던, 무색무취의 노인 후보 케말 클르츠다르올루는 공화인민당이 새롭게 일신(一新)하기는커녕 여전히 노화(老化)된 채로 선거에 임했음을 보여준 명확한 상징이었다. 그에 비하면, 에르도안의 신오스만주의는 적어도 튀르키예가 과거를 극복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확실한 지향점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성공적으로 구현될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말이다.
 
  2023년의 대통령 선거는 튀르키예의 미래가 ‘오스만 제국의 고차원적 부활’이 될 것인지, ‘서구 지향적 튀르키예공화국의 수복’이 될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양대(兩大) 세력의 결전이었다. 결국에는 승리자가 1923년부터 100년을 이어온 튀르키예공화국의 역사, 나아가서 그 앞 600년을 이어온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 갖는 의미를 규정할 것이었다.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600년 제국사와 100년 공화국사를 지배하게 된 2023년의 에르도안 정부는 앞으로도 튀르키예의 미래를 계속 지배하게 될 것이다.
 
 
  역사관 차이 따른 정치적 대립 구도 재편
 
  이 결과가 우리 세계에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21세기가 사반세기 가까이 진행되면서, 이미 20세기 역사의 많은 순간이 ‘100주년’으로서 기념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서 20세기는 서구 제국주의가 끝나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자민족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새로운 정체(政體)를 수립한 탈식민(脫植民)의 시대로 기억될 때가 많다. 1905년의 러일전쟁, 1923년의 튀르키예공화국 건국은 세기 초에 선구적으로 아시아의 시대가 다시 시작될 것임을 선포한 사건들이었다.
 
  그러고 1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아시아 각국에서 지난 100년을 새롭게 기억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늘어나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2017년에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는커녕,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의 성스러운 전통을 훼손한 불온한 좌익들의 난동이었다고 암시하는 드라마 〈트로츠키〉를 방영하게 했다. 인도에서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자와할랄 네루의 세속주의 전통을 뒤집고 힌두교에 기반한 새로운 애국주의를 만들고자 한다. 그도 아마 2047년의 인도 독립 100주년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중공(中共)은 2021년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과 2049년 신중국 건국 100주년이라는 시간표를 바탕으로 국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요컨대, 고전적인 좌우 갈등 대신에 20세기에 본격화된 ‘아시아의 부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싼 역사관의 차이에 따라 정치적 대립 구도가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셈이다.
 

  1923년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1947년의 자와할랄 네루는 아시아의 부흥을 서구 근대성을 아시아 민족들이 빠르게 수용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은 그 수단으로써 내향적(內向的) 국가 계획 경제에 의존했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대신에 시장경제와 전통을 결합시키고, 서구와 근대 대신에 ‘문명’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새로운 우익 집단들이 튀르키예와 인도 등지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들은 ‘아시아의 부흥’을 ‘전통의 현대적 재창조’라고 주창하고, 서구 근대성은 아시아 문명에 맞지 않으며, 문명은 각자만의 길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새뮤얼 헌팅턴은 이미 이런 경향을 면밀히 관찰하고 지난 세기 말에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정확히 예견한 바가 있다. 이제 서구적 보편주의에 입각한 이데올로기의 시대 대신에, 문명 간의 다원적 경쟁이 시작되면서 서구 근대는 새로운 도전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이다. 지난 100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튀르키예에서는 이미 문명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아직 끝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오스만 전통을 지지하는 이들이 100주년을 맞이하여 중요한 승리를 거둔 것은 분명하다.
 
 
  에르도안과 모디의 성공
 
에르도안 대통령과 모디 인도 총리는 현대성과 전통 사이에서 고민하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사진=AP/뉴시스
  자연스럽게 한국의 100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올해로 건국 75주년을 맞이했다. 사반세기가 더 지나면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그간 대한민국의 역사는 북한, 중공, 소련의 공산 세력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수호해온 역사로 기억되고는 했다. 그리고 극동 지역에 공산당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여전히 좌우 이념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는 점은 튀르키예나 인도와 명백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지난 100년의 역사를 서구적 근대성을 빠르게 수용하고자 하는 문명개화 세력과 성리학적 전통에 입각한 과거를 계속 기념하고자 하는 신(新) 사대부 운동권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논의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좌우 이념 대립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 그 내용은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전통과 현대 사이의 역사 전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도 아마 2027년의 대통령 선거가, 2048년 건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 역사 전쟁의 승자를 정하는 중요한 정치적 기점이 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튀르키예는 한국의 중요한 참조가 되어준다.
 
  그래서 여기서 단순히 서구적 근대화, 문명개화 세력의 승리를 기원하기만은 어렵다. 케말주의 공화인민당의 패배는 그들이 아무리 국가 수호와 현대화에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통 문명을 향한 인간의 본원적 향수를 지워낼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현재 유럽과 아시아의 숱한 극우 세력이 서구 근대를 대신할 전통 사상의 깃발 아래 결집하고 있음은 이런 의미에서 심상치 않은 흐름이다.
 
  따라서 필자는 앞으로 새로운 시대는 현대성과 전통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류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이들이 주도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싶다. 물론 전통을 외치며 자신들의 삐뚤어진 권력욕을 정당화시키는 북한과 같은 극단적인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인도의 모디 정권이나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정권을 만들어낸 그 힘은 분명히 함부로 야만적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뿌리가 있다.
 
 
  ‘건국 100주년’을 향한 역사 전쟁
 
  사실 대한민국도 전통과 현대를 초극하고자 했던 전례가 있다. 1978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설립했다. 이는 한국 철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한뫼 안호상(安浩相·1902~1999년)과 열암 박종홍(冽巖 朴鍾鴻·1903~1976년)의 유지를 따른 것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이루어진 한강의 기적이라는 서구적 근대화와 한국 전통을 조화하고자 했던 중요한 시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이러한 시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한뫼와 열암의 지적 전통도 대중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지 않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시도를 계승하여, 대한민국 국가 수호와 발전의 관점에서 전통과 현대를 종합하고자 하는 새로운 지적 흐름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48년이 다가올수록, 튀르키예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관과 세계관을 둘러싼 쟁투는 더욱 격해질 것이다. 아시아와 세계를 보며 우리는 어떻게 100주년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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