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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27년 만의 베트남 통일열차 종단기

베트남은 중국의 代案이 아니다

글 : 유민호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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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 정권, 경제 발전보다 체제 유지에 더 관심
⊙ 하노이-사이공(호찌민) 종단하는 통일열차, 1726km를 32시간30분 걸려 운행하는 세계에서 가장 느린 열차 중 하나
⊙ 나이키 신발과 삼성 스마트폰 만들지만, 아직 기아에서 완전히 못 벗어나
⊙ 美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와 日 미니 항모 이즈모, 일주일 간격으로 다낭에 기항… 하이난의 중국 해군 견제 시작인가?
⊙ 남북 종단 통일열차는 평균 시속 53km, 國道 1호선은 대부분 2차선 도로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하노이-사이공 통일열차. 사진=유민호
  6년 만의 베트남이다. 팬데믹도 있었지만, 그동안 기억 속에서 멀어졌던 땅이 베트남이다. 침향(沈香)을 구입하러 하노이에 가는 친구 덕분에 얼떨결에 베트남행(行)에 나섰다. 도쿄(東京)에서 우연히 접한 추억의 노래도 베트남으로 가게 된 이유다. 30여 년 전 일본어를 처음 배울 때 공부를 겸해 자주 들었던 ‘화물이 없는 배(積み荷のない船)’라는 노래다. 노래를 듣고, 가사를 음미하는 순간 잊고 지냈던 기억과 추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1990년대는 일본인들의 단독 장기 해외여행 전성기였다. 젊음 하나만 믿고, 하루 10달러 이하로 생활하며 1년 이상 해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서바이벌 여행이다. 저렴한 3등석 열차를 타는 여행은 당시 청년들의 꿈이자 낭만이었다. 세계 구석구석까지 찾아가는 오지(奧地) 열차 여행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휴대전화는 없었고 인터넷이 막 등장했던 시기다. 현지의 모든 정보는 서점의 책을 통해 얻어냈다.
 
  당시 일본의 서바이벌 여행 붐은 20대 청년이 쓴 《심야특급(深夜特急)》이란 6권짜리 시리즈물을 통해 본격화됐다. 당시 일본인 2030세대 필독서로, 매번 발간과 함께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당시 분위기에 휩쓸려 필자도 책을 구입했고, 곧바로 해외 하루 10달러 서바이벌 여행의 포로가 됐다. 유튜브에서 접할 수 있지만, 노래 ‘화물이 없는 배’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재구성된 〈심야특급〉의 주제곡이었다. 1990년대 일본 공기를 가늠할 수 있는, 목적지 없이 무작정 여행에 나선 당시 청년들의 마음을 엿보게 하는 노래다. 불 꺼진 밤 10시 도쿄 아사쿠사(淺草) 밤길을 걷던 중 들었던, 가슴을 저리게 하는 한 세대 전 노래였다.
 
 
  하노이-사이공 통일열차
 
《월간조선》 1997년 12월호에 실린 필자의 ‘베트남 통일철도 탑승기’.
  하노이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중앙역이다. 2박 3일이 소요되는, 세계에서 가장 느린 열차 노선 중 하나인 하노이-사이공(노선 이름이 ‘하노이-호찌민’이 아니라 ‘하노이-사이공’인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다) 통일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것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시대지만, 열차 티켓만은 역에 직접 가서 구입하고 싶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열차 여행은 역사에 직접 가서 티켓을 구입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2달러를 주고 오토바이에 매달린 채 하노이 중앙역 티켓 판매처로 갔다.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일부러 밤 9시쯤에 들렀다. 일주일 뒤 스케줄로, 4인 침대칸 아래를 끊었다. 밤 10시 출발하는 SE1 열차로, 2박 3일 뒤인 아침 6시30분에 도착한다. 총 32시간30분이 걸리는 셈이다.
 
  통일열차는 하루 4번씩 왕복한다. 하노이발(發) 열차의 경우, 심야열차인 밤 10시 차량이 가장 길다. 전부 11개 차량으로 연결된, 정원 249명의 열차다. 1인용 좌석, 6인 침대, 4인 침대로 나눠져 있다.
 
  하노이-사이공 구간을 기준으로 할 때, 필자가 끊은 4인 침대칸이 80달러, 6인 침대칸은 60달러, 좌석은 1인당 40달러 정도다. 짧은 구간은 좌석을 이용해도 되지만, 장거리 구간이라 4인 침대칸을 끊었다. 2시간이 걸리는 하노이-호찌민 구간 항공기 요금은 70달러 정도다. 열차가 더 비싸다.
 

  통일열차에 관한 기억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필자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유엔이 벌이고 있던 메콩강 개발계획을 살펴보던 중 통일열차의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월간조선》에 통일열차 종단기(縱斷記)를 기고했기 때문인지 27년 전 기억이 거의 대부분 남아 있다. 흥미롭게도 당시나 지금이나 통일열차의 속도는 똑같다. 하노이-호찌민 1726km를 32시간30분에 달린다. 평균 시속 53km다. 필자가 체험한 열차 가운데, 가장 느린 것은 쿠바 아바나에서 서부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까지의 1024km 노선이다. 1995년 필자가 이용했을 때는 무려 25시간이 걸렸다. 베트남 통일열차의 시속 53km는 1995년 당시 쿠바 횡단열차의 40km보다는 빠르다. 그러나 쿠바가 2019년 중국 자본을 들여와 노선을 정비하면서 운행시간이 15시간대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제 쿠바 횡단열차 속도는 시속 66km로 올라서면서 통일열차의 속도를 추월했다.
 
  20세기 말 존재했던 심야 완행열차가 2023년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는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맙고 정겨운 풍경이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한 세대 전 모습을 유지하는 아날로그 시대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이다.
 
 
  캔커피를 통해 오가는 情
 
하노이-사이공 통일열차의 4층 침대칸. 꼭 아래 좌석을 차지해야 한다.
  하노이의 밤은 뜨겁다. 체감(體感)온도로 보면 대낮에는 45도까지 올라가고, 밤이라 해도 30도는 간단히 넘어간다. 땀에 젖은 채 통일열차 플랫폼까지 걸어서 갔다. 30분 일찍 도착했지만, 이미 사람들이 붐빈다. 대부분 엄청난 크기의 짐을 들고 있다. 살아 있는 닭과 생선도 볼 수 있다. 침대칸 열차 이용의 노하우인데, 반드시 아래 칸을 이용해야 한다. 짐을 침대 아래 빈 공간에 둘 수도 있고, 허공에서 버둥거림 없이 바로 발바닥을 바닥에 대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50대 남성이 필자 좌석 머리 위 침대에 누워 있다. 엄청나게 큰 짐이 이미 필자의 침대 아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베트남어를 총동원해 인사를 했다.
 
  필자의 사교법인데, 긴 여행을 할 때에는 주변 현지인들과 음료나 아이스크림부터 나누는 것이 좋다. 상대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을 통제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상대가 역한 냄새의 음식을 꺼내 먹는다 치자. 현지 기준으로 보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외지인인 경우, 무의식적으로 불편한 심정을 드러내기 쉽다. 음료 등을 통해 웃음을 나누면서 가까워지고 나면, 불편한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기가 어려워진다. 상대의 미소를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현지 문화와 예법에 나 자신을 맞추려는 ‘근신(謹愼)’ 목적의 친절이기도 하다. 21세기 베트남이라지만, 아직 캔커피는 낯설다. 우리 돈으로 600원짜리 캔커피 20개를 미리 구입해 기차에 올랐기 때문에 필자 주변 사람 모두에게 나눠줄 수 있었다. 베트남인들은 캔커피를 건네는 즉시 나름대로 맛 평가를 하면서 돌려가면서 나눠 마신다.
 
 
  달라진 통일열차
 
통일열차는 아름다운 산과 바다, 정글, 호수 등 환상적인 경치들 사이를 달린다.
  열차는 정확히 6월 30일 밤 10시 출발했다. 출발을 알리는 기적(汽笛)소리는 없었다. 하노이 밤 풍경이 열차를 따라 이어졌다. 무지개색 화려한 불빛이 어두운 하노이에 깔려 표류했다. 열차가 지나가는 동안 건널목 신호등에서는 수많은 오토바이가 눈에 띄었다. 밤 10시에 전부 어디로 가는지, 도로 전체가 오토바이로 채워져 있다.
 
  필자의 청춘기 기억이지만,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라고 하면 오토바이 시내 관광이 기본이었다. 장년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접었지만, 지금도 하루 7달러면 24시간 오토바이 렌털이 가능하다. 면허증도 필요 없다. 다만 사고가 나거나 오토바이를 분실할 경우에는 전부 본인 책임이다.
 
  하노이는 생각보다 큰 도시다. 워낙 느림보이기도 하지만, SE1호 통일열차가 하노이 불빛을 저 멀리 뒤로하기까지 거의 30분이 걸렸다. 반대편 침대칸 두 개는 빈 상태다. 후에(Hue)역에서 손님 두 명이 탈 것이라는 얘기를 역무원에게서 들었다. 베트남인은 친절하다. 마음을 열면, 마치 가족처럼 대한다. 영어가 서툰 역무원은 뭔가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가 역력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통일열차에 탄 외국인은 필자와 독일인 대학생 두 명뿐이었다.
 
  통일열차를 타는 순간 1997년 당시의 통일열차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똑같지만, 열차 안에 숨어 있는 변화가 적지 않다. 먼저 열차 역무원 자리 위에 걸려 있던 호찌민 초상화가 없다. 베트남인에게 ‘박 호(호찌민 아저씨)’로 통하는 호찌민은 베트남 통일 6년 전인 1969년 저세상으로 갔다.
 
  가장 큰 변화는 소음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1997년 당시에는 소음이 엄청났다. 차창이 엉성하기 때문에 달리는 열차의 소음이 전부 안으로 밀려들었다. 천장에 달린 선풍기 소음도 기억난다. 당시 대화를 하려면 거의 악을 쓰듯 큰 소리로 해야만 했다. 2023년의 통일열차는 조용하다.
 
  선풍기도 사라지고 에어컨이 설치돼 있다. 베트남에서 가장 쾌적한 공간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창문은 마음대로 열 수가 없다. 베트남 전쟁 당시 생긴 악습이겠지만, 베트남인들은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지는 희한한 풍습이 있었다. 26년 전 기차에서 경험했지만, 특히 어린이들이 차창에 큰 돌을 던졌다. 유리창과 승객 보호를 위해 촘촘한 쇠창살을 유리창에 달았다. 현재 쇠창살은 완전히 사라졌다.
 
  필자가 가장 감탄한 것은 화장실의 변화다. 통일열차를 타기 전에 가장 염려했던 것은 화장실이었다. 과거에는 기차 아래의 뻥 뚫린 공간으로 배설물이 떨어지는 식이었다. ‘푸세식’도 아니고 ‘투세식’이라고 해야 하나? 씻을 물도 없었다. 지금은 좌변기로 바뀌었고 물로 청소도 가능한 청결한 공간으로 변해 있다. 화장지도 항상 걸려 있고, 거울을 보면서 면도도 할 수 있다.
 
 
  베트남 정체성의 근간, 남딘
 
  밤 11시30분이 되자 남딘(Nam Dinh)이란 도시에 도착했다. 침대 위 50대 베트남인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남딘 도착 직전 역무원이 와서 침대칸의 불을 전부 껐다. 10분 정도 머무는 동안 열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봤다. 열대 특유의 꽃 과일나무 냄새가 표류했다. 노랗고 붉은 광고판 불빛과 더불어 십자가도 볼 수 있었다. 남딘은 프랑스 식민지 당시 가톨릭 교회가 가장 많이 들어섰던 곳이다.
 
  공산주의체제라고 하지만 종교의 자유는 보장된다. 그러나 국가안보와 체제수호를 위한 각종 규제 속의 자유일 뿐이다. 종교의 자유에 관한 구체적 시행규칙은 전부 공산당이 결정한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 대부분이 ‘공산당 아바타’이다. 교회 지도자가 교회에서 정부를 비난할 경우 전부 어디론가 사라진다고 보면 된다.
 
  교회 십자가의 불빛이 흥미로웠다. 필자의 부친은 개척교회 목사였다. 교회를 겸한 집에는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흥미롭게도 베트남에는 붉은색뿐 아니라 하늘색 불빛 십자가도 있다. 기묘한 불빛인데 베트남 전통종교 의식에 등장하는 오색기(五色旗)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역무원의 말로는 남딘은 베트남 정체성(正體性)의 근간이라고 한다. 13세기 몽골 침략에 맞서 승리를 쟁취한 땅이기 때문이다. 몽골 격퇴는 베트남인 모두가 자랑하는 역사다. 1225년부터 1400년까지 몽골의 수많은 공격을 전부 물리친 나라가 베트남이다. 일본 가미카제(神風)만이 아니라, 베트남 남딘도 무적불패(無敵不敗)라는 몽골군의 신화(神話)를 깬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 남딘 한복판에는 몽골과의 전쟁을 지휘한 쩐흥다오(陳興道) 입상이 세워져 있다. 베트남 도교(道敎) 사찰 어디에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수호신(守護神)이자 호국신(護國神)이 바로 쩐흥다오다.
 
 
  베트남전쟁의 도화선이 된 통킹
 
  눈을 뜬 것은 아침 5시30분쯤이다. 멀리서 해가 떠오른다. 일출(日出)과 일몰(日沒)은 전 세계 어디에 가도 나름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베트남의 일출과 일몰은 붉다기보다는 검다는 느낌이 한층 더 강하다.
 
  21세기 베트남 관광객 가운데 베트남전쟁을 떠올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전쟁은 이미 48년 전에 끝난 까마득한 역사일 뿐이다. 필자가 처음 베트남을 찾은 것은 1995년이다. 당시 여행객 대부분의 관심사는 베트남전의 역사였다. 특히 미국 관광객의 경우 미군으로 참전했던 사람이거나 그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20대의 참전 기억을 사오십대의 관광객으로 돌아와 되새기는 여행이었다. 2023년 현재 베트남전 참전 미군은 80대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베트남전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나 세대가 거의 사라졌다. 할리우드 분위기를 봐도 21세기 이후 만들어진 베트남전 영화는 제로에 가깝다. 시간은 그렇게, 알게 모르게 빠르게 흘러간다.
 
  기차가 속도를 더하면서 달린다. 마치 정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구글 지도를 보니까, 정글에서 약 10km 떨어진 쪽에 바다가 있다. 열차 안에는 속도와 온도 안내판이 걸려 있다. 기차는 시속 74km다. 아침인데도 열차 밖 온도가 이미 상온 35도를 넘어선 상태다. 아침 7시쯤 되자, 승객 모두 일어나 씻고 식사를 시작했다. 대부분 직접 만들어 온 음식을 먹는다. 열차에서는 밥과 음료를 파는 수레도 있다. 대략 5달러 정도면 반찬과 국을 포함한 쌀밥을 먹을 수 있다. 얼음 통에 채워진 달콤한 베트남 커피도 2달러면 마실 수 있다.
 
  통일열차는 그 유명한 통킹(Tonkin)만을 따라 남하한다. 1964년 8월 존슨 대통령이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이 미국 군함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무력 응징을 감행하면서 베트남전쟁이 본격화됐다.
 
  한국은 통킹만 사건 1개월 뒤인 1964년 9월 의무중대를 베트남에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1973년까지 연인원(延人員) 30만 명 이상의 한국군을 파견했다. 근래 한국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격하하거나 수정주의 사관(史觀)의 관점에서 비난하는 것이 유행인 듯하다. 필자는 당시 부사관으로 참전했던 친척의 소감을 통해 반 세기 전 베트남 참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
 
  “정치·외교·군사를 떠난 인륜(人倫)의 문제였다. 6·25 때 서방의 도움을 받은 나라로, 공산주의 위협에 처한 베트남(남베트남)을 돕는 것이야말로 도덕·윤리의 실천이자 실현이었다. 당시 한국군 대부분은 6·25 체험 세대였다. 도움을 받은 이상 반드시 갚아야만 한다는 심정으로 베트남에서 싸웠다.”
 
  통킹은 한자(漢字)로 ‘동경(東京)’이다. 21세기 베트남은 미중(美中) 디커플링(decoupling)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나라로 부상(浮上)하고 있다. 특히 군사적 분야에서의 베트남의 위상이나 가치는 남다르다. 통킹만은 중국 해군기지가 있는 하이난(海南)섬을 눈앞에 두고 있는 글로벌 전략 요충지(要衝地)다. 베트남은 해상 팽창을 본격화하고 있는 중국의 하이난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
 
 
  다낭에 기항한 美 항모
 
미국 해군 항모 로널드 레이건호는 6월 25일 베트남 다낭에 기항, 베트남 측 인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같은 공산 국가라지만, 중국과 베트남은 물과 기름의 관계다. 중국은 어려웠던 1960년대 문혁(文革) 시기에도 베트남을 지원했다고 강조한다. 베트남은 중국이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을 이용해 베트남의 분열을 획책했다고 비난한다.
 
  두 나라는 1979년 2월 그 유명한 ‘제한전쟁’을 치렀다. 국경은 넘지 않고, 국경선 주변에서만 포격을 주고받은, 승자(勝者)도 패자(敗者)도 없는 희한한 전쟁이었다. 한 달 만에 끝난 전쟁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반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산권이지만, 소원하고도 어정쩡한 관계다. 그러나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하면서 베트남도 그 영향권 내로 빨려 들어갔다.
 
  20세기 미국은 베트남을 쿠바에 버금가는 적(敵)으로 규정했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베트남은 미국의 새로운 친구로 부상했다. 이념적으로는 중국과 가깝지만, 과거 총부리를 겨눴던 미국을 반기는 것이 베트남 지도부의 본심이다. 결국 양다리 박쥐외교가 베트남 국가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시간이 갈수록 중국은 베트남의 현실적 위협이 되고 있다. 해상 영토 문제로 인한 양국 간 불화가 주된 원인이다. 미국은 이 같은 상황하에서 베트남과의 군사협력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필자가 통일열차를 타기 직전 미국의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가 베트남 다낭(Da Nang)에 기항(寄港)했다. 누가 봐도 중국 견제를 위한 것이지만, 베트남은 친선 방문이란 식으로 의미를 축소했다.
 
 
  日 미니 항모 이즈모도 다낭 기항
 
  흥미롭게도 이보다 일주일 전에는 자위대 군함 이즈모(出雲)가 역사상 처음으로 다낭에 들어왔다. 이즈모는 F-35B 최첨단 전투기를 탑재한 미니 항모(航母)다. 역시 친선 방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중국 전문가들은 다르게 본다. 장차 있을지도 모를 전쟁에서 중국 하이난을 타깃으로 한 한·미·일 합동작전 준비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베트남은 아직도 미국을 강하게 불신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의 일본에 대한 신뢰는 남다르다. 군사뿐만 아니라 외교적 측면에서 볼 때도, 일본은 미국과 베트남은 물론 미국과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증진을 돕는 중간 다리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베트남에 기항한 항공모함이 로널드 레이건호라는 점이다. 일본에 상주(常駐)하고 있는 로널드 레이건호는 해외에 주둔하는 유일한 항공모함이다. 워싱턴에서는 이미 아시아 내에 항공모함 두 척을 상주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다. 기본적으로 일본이 중심이 되겠지만, 베트남이나 필리핀의 구(舊)미군기지에 미국 항모가 상주하는 것이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원할지도 의문이지만, 미군 항모 2척의 아시아 상주가 구체화되더라도 한국에는 상주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중간 기항지나 항모 수리 거점으로서 한국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주도 강정 해군기지는 한국은 물론,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는 중요 군사시설이 될 수밖에 없다.
 
 
  베트남전의 격전지 후에
 
통일 이후 반세기를 지나면서 호찌민은 점차 과거의 인물이 되어가고 있지만, 공산당 정부는 끊임없이 그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오전 10시58분 ‘후에(Hue)’에 도착했다.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阮朝)의 수도로 한국으로 치자면 경주 같은 곳이다. 하노이에서 688km 떨어진 곳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에게 후에는 베트남 최대 격전지이자 폐허란 이미지로 남아 있다. 미군 폭격으로 인해 초토화(焦土化)된 것은 물론, 베트남 통일 후에도 공산당의 왕조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오랫동안 방치됐다. 아직 방문한 적은 없지만 성형 수술로 재단장한 도시보다 전쟁과 이념의 후유증에 한층 더 관심이 갔다.
 
  후에에 도착하는 순간, 비어 있던 상하 침대칸 손님이 들어왔다. 60대 부부로, 큰 짐 3개가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캔커피를 건네자 이름도 모르는 열대 과일 하나를 줬다. 냄새가 너무 역해서 못 먹을 정도였지만, 주는 정을 생각해서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그들은 최종 목적지가 사이공이라고 했다.
 
  통일열차를 타면서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베트남인들은 통일열차의 최종 목적지를 현재 정식 지명인 ‘호찌민’이 아닌 ‘사이공’이라고 부른다. 남베트남 시절의 이름인 사이공을 멀리하려는 공산당 생각에 반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사정을 알고 나니 이해가 됐다. 통일열차의 호찌민 최종 정차지가 ‘사이공 역(Ga Sai Gon)’이라고 한다. 옛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찌민의 이름을 따서 바뀌었지만, 아직도 역 이름으로나마 살아 있는 셈이다.
 
 
  달러의 경제학
 
  후에를 지난 지 3시간 뒤인 오후 3시30분이 되자 다낭에 도착했다. 통일열차가 바다에 인접해 달린다. 다낭 주변은 베트남 최고의 휴양지로 개발된 상태다. 멀리서 봐도 휴양지로 보이는 국제 수준의 큰 호텔이 즐비하다. 미군 항모가 들렀을 때는 5000명의 승무원이 다낭 최고급 호텔에 머물렀다고 한다.
 
  제국주의 첨병이라 비난도 받지만, 외지(外地)에 가는 순간 관광객으로 변신하는 것이 미군이다. 어린 시절 필자의 집은 미군기지 주변에 있었다. 미군이 뿌리는 돈과 물건들이 지역경제의 힘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훈련 참가를 위해 대규모 미군이 온다는 소식과 함께 기지 주변도 활기를 되찾았다. 주자학적(朱子學的) 양반 논리에 입각한 자존(自尊)이나 반미(反美) 이전에 한 푼이라도 달러를 벌어서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1인당 국민소득 3756달러의 베트남인이 볼 때, 항모에서 내린 미군 5000명의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클지 상상할 수 있다.
 
  통일열차를 타는 재미 중 하나는 다낭에 도착한 이후부터 열차가 거꾸로 달린다는 점이다. Z 모양의 철도 노선이기 때문에 일단 다낭에 갔다가 역행하는 것이다. 단순한 변화지만, 32시간 긴 피로감을 잊게 만든다.
 
 
  ‘공산당 퍼스트’
 
하노이 시내에 있는 레닌 동상. 베트남이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임을 상기하게 해준다.
  일몰은 다낭을 떠난 뒤 2시간 뒤부터 시작됐다. 검은 태양이 정글 너머 서쪽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통일열차를 타면서 갖게 된 근본적 의문인데, 왜 베트남 정부는 통일열차 개선에 나서지 않을까? 섬나라 쿠바조차도 횡단열차 개선에 나서는 판인데, 왜 베트남은 그 흔한 고속철도 건설계획조차 없는 것일까? 10년, 20년 뒤에 추진된다는 통일열차 개선책에 관한 소문은 많다. 그러나 실제 추진할 의지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1970년 개통된 한국의 경부고속도로가 그러했듯이, 경제 발전은 도로·철도·항구와 같은 인프라 구축(構築)에서 시작된다. 베트남은 왜 인프라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단 하나로 집약될 정답이 있다. 바로 ‘공산당 퍼스트(First)’다. 한마디로 말해 베트남 공산당 정부는 국민이 잘살고 경제가 발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라가 경제적으로 번영하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로의 변화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2023년 현재 중국의 시진핑(習近平)이 벌이고 있는 황당한 정책들에서 보듯, 중국의 최대 관심사도 ‘공산당 퍼스트’, 즉 공산당 존립과 권력 유지다. 국민의 행복이나 경제적 번영은 이 같은 목적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된다. ‘공산당 퍼스트’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경제가 추락하든, 미국과의 관계가 끊어지든, 대학이 문을 닫든 상관없다. 경제가 너무 어려워져서 공산당 체제를 무너뜨릴 만한 폭동이나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만 경제가 굴러가면 충분하다. 물론 북한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신정(神政)독재국가 이란까지 이런 대열에 가담하고 있다. 사실 나라가 어려워질수록 독재 정권은 이를 외국 탓으로 돌리면서 내부 구심력(求心力)을 강화해나갈 수 있다. 시속 53km의 베트남 통일열차는 이 같은 공산당 독재의 한계와 허상을 증명하는 최적의 증거다.
 
 
  베트남은 중국의 대안이 아니다
 
  통일열차 바로 옆 도로는 국도(國道) 1호선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사수(死守)했던 전략도로가 바로 국도 1호선이다. 통일열차 안에서 관찰했지만, 국도 1호선의 대부분 구간은 중앙선조차도 없는 2차선 도로다. 국토를 종단하는 허리가 2차선에 불과하고, 그나마 도로 상태도 엉망이다. 대형 화물선 통행 자체가 드물고, 밤이 되면 아예 깜깜한 정글로 변한다.
 
  미중 디커플링으로 중국 경제가 엉망이 되면서 베트남이 새로운 대안(代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전혀 다르게 본다. 기아(飢餓)가 사라지는 수준까지야 가겠지만, 공산 정권의 통제를 넘어서는 발전과 번영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다. 흥미롭게도 베트남은 세계기아지수(GHI) 중위권에 있는 나라다(2016년 기준). 쌀 수출국이라고 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프리카 수준에서 막 벗어난 기아지수 중진국에 머물러 있다.
 
  21세기의 기아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아사(餓死)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의 기아는 북한이나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 국한된다. 성인의 영양 부족, 5세 미만 어린이 사망률과 발육장애가 기아지수를 결정한다. 나이키 신발과 삼성 스마트폰을 만드는 나라라고 하지만, 아직도 21세기형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가 베트남이다.
 

  물론 베트남공산당은 이 같은 문제를 중요시하고는 있지만, 기아와 빈곤을 넘어서 경제선진국으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자유민주주의를 누리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하고 남북 공동 번영을 이룩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해봐야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은 북한 주민이 아니라 김정은과 그 주변이다. 김정은 체제가 존속하는 한, 아무리 퍼부어도 북한의 기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1975년 통일 이래 48년간 지속된 시속 53km의 남북종단열차는 앞으로 한 세대는 더 유지될 듯하다.
 
 
  맥주로 시작한 호찌민의 아침
 
호찌민(옛 사이공)의 거리. 호찌민은 수도인 하노이보다 크고 활기차다는 인상을 준다.
  7월 2일. 열차에서 2박을 한 뒤 눈을 뜬 것은 어두컴컴한 새벽 4시30분쯤이다. 사람들의 소음 때문에 깼다. 사이공역에 도착하기 2시간 전인데도 모두 일어나 준비를 한다. 일출이 시작됐다. 정글이 이어지지만, 길이 넓어지면서 오토바이 군단도 나타났다. 열차는 엄청 느린 속도로 호찌민시로 빨려 들어갔다. 도착 1시간 전부터 도시 풍경이 나타났다. 하노이와 비교해 호찌민이 훨씬 크다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음료 판매 수레가 돌아다녔다. 얼음을 넣은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얼음을 달라고 하자, 맥주를 사야만 한다고 했다. 동남아시아 풍경이지만 맥주에 얼음을 넣어 녹여가면서 마신다. 할 수 없이 얼음을 얻기 위해 한국 돈으로 1500원짜리 타이거(Tiger) 맥주를 구입했다. 아침 6시 맥주인 셈이다. 의외로 아침 맥주는 베트남인의 일상 풍경이라고 한다. 베트남 맥주는 이른 새벽에도 즐기는, 얼음과 함께하는 청량제일 뿐이다. 내친김에 캔커피만이 아니라, 맥주도 얼음을 넣어 마셨다.
 
  아침 6시29분, 예정 시각보다 1분 일찍 사이공역에 도착했다. 침대칸 동행 베트남인들이 필자의 손을 잡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역무원도 들러서 인사를 했다.
 
  생전에 다시 탈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속 53km 통일열차가 가진 매력은 남다르다.
 
  “도착 그 자체보다, 좋은 여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끝없이 떠돌면서 살았던 부처의 명언(名言)이다. 결과로서의 목적지보다, 과정으로서의 여행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사이공역은 앞으로 이어질 필자의 수많은 여행에서 중간 기착지 중 하나다. 통일열차 다음 이어질 여정은 어떤 것일까? 만약 심야특급 주제곡 ‘화물이 없는 배’를 다시 듣는다면, 어디로 발길을 돌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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