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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특집·인도의 모든 것

영국 전문가가 본 ‘영국과 인도’

‘가장 오랜 민주주의 국가’와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

글 : 권석하  在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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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0여 명의 영국 문관들이 100만 명의 인도 공무원 통해 3억 인도인 다스려… ‘백인이 보이지 않는 통치’
⊙ 리시 수낙 총리,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장관은 인도계… 런던 시장 사딕 칸은 파키스탄계
⊙ 초기에는 민간 회사인 동인도회사가 26만 명의 병력 거느리고 무역권, 징세권 등 행사하며 지배
⊙ 영국, 1858년 〈동인도헌장〉 이후 인도에 자신들의 가치 강요하는 것 포기
⊙ 인도, 영국에 투자하는 나라 2위… 영국에서 10만5000명 고용
⊙ 650명의 하원의원 중 5.5%인 36명이 인도아대륙계

權錫夏
1951년생. 영남대 무역학과 졸업, 前 경북 해외자문위원협의회 회장, 現 보라여행사·아이엠컨설팅 대표 / 저서 《영국인 재발견》(1, 2권), 《유럽문화 탐사》 《두터운 유럽》 《핫하고 힙한 영국》 《영국인 발견》(역서)
1930년 간디가 결행한 소금행진은 인도 독립운동의 정점이었다.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애증(愛憎)의 관계나 은원(恩怨)의 관계라는 표현으로는 모자랄 정도로 운명적인 관계이다. 정말 특수하다. 양국의 관계는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EIC)를 통해 인도와의 접촉이 시작된 1600년대로부터 1947년 8월 15일(우리와 우연히도 광복의 날이 같다)의 독립까지 거의 300년이 넘는다.
 
  두 나라의 관계를 말하고자 할 때 동인도회사를 빼고는 시작도 할 수 없다.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경영하는 순서는 정해져 있다. 항상 선교사를 먼저 들여보내고, 그러고는 상인, 군인, 정치인, 문화인 순서로 들어갔다. 그런데 영국은 인도 지배를 시작할 때 실용주의자들답게 상인, 즉 동인도회사라는 상업회사를 전면에 내세웠다.
 
  EIC는 인도를 지배 통치한 회사 국가(The Company-State 또는 Corporate Sovereignty)였다. 어찌 보면 국가보다 더 강력했다. 국가라면 행정부를 통제하는 의회가 있기 마련인데 당시 인도에는 EIC를 견제할 그 어떤 기관도 없었다. 1857년 영국 정부가 EIC로부터 통치권을 박탈할 때까지 거의 101년간 EIC는 전제군주 국가 같았다. 쓸데없이 사상이니 철학이니 하는 정치 술수의 눈가림 없이, 발가벗고 돈만을 목적으로 하는 무자비한 이권(利權) 국가 그 자체였다. 그래서 동인도회사를 반은 무역회사이고 반은 국가(part-trade organization, part-nation-state)라고 학자들은 정의한다.
 
 
  역사를 바꾼 동인도회사
 
영국 동인도회사는 전제군주 국가와 같은 ‘회사국가’였다.
  영국의 인도와의 조우는 영국의 영웅 중 하나로 ‘해적왕’으로 불리던 탐험가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1588년 해전에 참전, 승리를 이끌어 영국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영국 해군 제독이었다. 그는 1577~1580년 영국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했는데, 이때 동인도(East Indies·지금의 동남아시아 제도), 즉 지금의 인도네시아 말루쿠섬에서 엄청난 양의 향신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드레이크 일행은 이 덕분에 투자자들에게 투자 금액의 50배를 돌려줄 정도로 이익을 남겼다. 이 결과 영국에서는 동양에서 일확천금의 기회를 잡으려는 광풍이 불었다.
 
  이런 기회를 잡으려는 일단의 투자자들은 1600년 12월 31일 동인도회사를 결성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향후 15년간 희망봉 너머로는 동인도회사 말고는 누구도 갈 수 없고 만일 어기면 선박과 화물을 압류하고 관련자는 감옥에 간다는 독점권의 칙허(charter)까지 내려주었다. 1601년 출발한 5척(도합 1500톤)의 첫 선단이 1603년에 돌아와 투자자들에게 노다지를 안겨주었다. EIC는 이후 274년간 존재하면서 대영제국의 형성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헌을 했다. 주요 원료, 노동력을 인도가 공급하지 않았으면 영국의 산업혁명은 불가능했고 그 뒤에는 바로 EIC가 존재했다.
 
  EIC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 민간 주도의 합자회사였다. 인류 최초의 근대적 다국적(多國籍) 기업이었고,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였다. 26만 명의 자체 병력을 가진 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 영국군 전체의 두 배 규모였다.
 

  절정기였던 1700년대 중반에서 1800년대 초반 동인도회사는 세계무역 물량의 절반을 취급했다. 주로 목면, 비단, 인디고 염료, 설탕, 소금, 향신료, 초(화약과 비료의 원료), 차, 아편 등이 주교역 품목이었다.
 
  1800년대 인도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고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권력형 상업 조직이었던 EIC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효율적이고, 강력하고, 가장 무자비했던, 오로지 돈만을 앞세운 중세판 무역 상사였다.
 
 
  ‘벵골소대’
 
  EIC와 영국 정부와의 관계, 즉 인도에서의 조세 정책, 이민 정책 등에 관한 문제로 정권이 바뀔 정도로 당시 영국에 인도는 중요한 곳이었다. EIC 등에서 근무를 하고 돈을 벌어 돌아온 인도 근무 경험이 있는 하원의원이 당시 하원 558명 중 1764년 6명, 1774년 22명, 1784년 36명이나 있었다. 소위 ‘벵골소대’라 불리는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EIC에 손해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나섰다. 이들은 단순히 EIC에서의 봉급만이 아닌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뒤로 사무역(私貿易)을 해 축재(蓄財)를 한 뒤 귀국해 부패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이었다. 이런 의원들을 당시는 네이보브(Nabob)라고 불렀다.
 
  당시 동인도 행정관의 연봉은 1만 파운드(현재 한화로 약 20억7200만원)에 달했다. 동인도회사는 무역은 물론 세금 징수, 보안, 전쟁까지도 담당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 무역을 독점했고, 특히 징세권이 있어서 무한(無限)의 권력을 휘둘렀다. 동인도회사의 대표인 총독의 임명권도 정부가 아니라 EIC 이사회에 있었다. 인도군 사령관만 국왕 임명직이었다.
 
  영국에 ‘동인도회사’라는 영감(靈感)을 준 나라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였다. 당시 두 나라의 동인도회사에 비해 영국 EIC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영세했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동인도회사는 거의 정부 기관이거나 반관반민(半官半民)이었던 데 반해 영국 EIC는 완전한 민간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영국 EIC가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동인도회사보다 더 오래가고 더 강력했다고 평가된다.
 
 
  ‘인도문관’
 
  혹자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오래가고 강력했던 이유를 인도문관(ICS·Indian Civil Service) 양성 제도에서 찾기도 한다. 당시 동인도회사의 인도문관은 중산층 자제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1853년까지는 동인도회사에서 자의로 선출해서 임명했다.
 
  1853년 영국 의회는 동인도회사의 인도문관은 경쟁시험을 통해 선발하라는 법을 제정했다. 국가가 공정한 선발을 감독해야 할 만큼 선망의 직업이었다는 뜻이다. 매년 8월에 런던에서 응시생들이 모여서 시험을 쳤다. 시험에는 반드시 승마 시험이 포함되었다. 인도문관은 이튼칼리지 같은 영국 전통의 명문 사립학교 출신으로 옥스브리지(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온 18~23세 사이의 인재 중에서 주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인도로 배치되기 전 2년간의 집중 훈련을 다시 받아야 했다.
 
  EIC는 인도문관 양성 학교(Haileybury and Imperial Service College)를 설립했다. 이 학교 출신이 아니면 인도문관이 될 수 없었다. 대(代)를 이어 이 학교에 들어가 졸업하고 동인도회사에 취직을 해서 ‘앵글로 인디언 패밀리’가 형성되었다. 당시 해외 식민지 파견 외교관, 군인, 공무원직을 영국 중산층 자제들이 해야 하는 가장 ‘고상한 직업(respectable job)’이라고 불렀는데 EIC의 인도문관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EIC는 연봉도 다른 직업보다 월등 많았기 때문에 다른 ‘고상한 직업’보다 인재들이 더 몰려들었다. 이렇게 영국의 중산층 인재들이 식민지로 나가 대영제국의 세계 경영에 일조를 했다. 이 제도는 나중에 영국 정부가 영국령 인도제국으로 직할 통치를 할 때도 제국문관(ICS·Imperial Civil Service) 제도로 이어진다.
 
 
  ‘백인이 보이지 않는 통치’
 
  영국 통치가 갖는 특징 중 하나인 소수(少數) 백인에 의한 효율적인 통치 방식은 동인도회사 시대에 확립되었다. EIC 경영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문민 통치였고, 폭동 진압에도 영국 군대가 직접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주로 인도 군인들을 이용해 보안을 유지하고 영국 군인들은 뒤에서 지시와 통제만 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백인이 보이지 않는 통치’라고도 한다. 문민 통치의 핵심이 되는 인도 근무 행정관은 제국문관, 경찰, 임업, 교육, 농업, 수의, 엔지니어링, 의료 요원 등으로 4000여 명이었다. 이 당시 인도 인구가 3억 명이었음에 비추어 아주 극소수였다. 1920년경에는 약 500여 명의 인도인 고문관도 있었다.
 
  영국의 직할 통치 기간인 영국령 인도제국 시기(1858~1947년)를 말하기 위해서는 충성심 강하고 실무능력이 뛰어난 제국문관들을 포함한 영국인 행정관들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대영제국이 막바지까지 유효하게 유지된 이유가 바로 이 행정관들에 의한 관료 제도와 관료 통치에 있다. 1932년 인도에선 100여만 명의 인도인 공무원이 당시 3억 명의 인구를 관리했다. 그들을 통제하고 지휘한 영국인 행정관의 권위는 거의 무소부재(無所不在), 전지전능 수준이었다. 인도인들에게 이들은 거의 영국 정부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들은 영국 내의 사회적인 지위가 항상 높았고 봉급도 많은 데다가 신분도 보장되어 있어 인기가 좋았다. 덕분에 인재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런 전통은 아직도 남아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지금도 외교관을 지망한다.
 
 
  ‘분리해서 지배하라’
 
인도대항쟁(세포이의 반란)은 종교와 종족을 넘어선 인도인들의 거족적인 항쟁이었다.
  EIC는 1857~1859년 인도대항쟁(the Indian Rebellion) 이후 영국 정부가 인도를 ‘영국령 인도제국(the British Indian Empire 또는 British Raj)’으로 바꾸어 직할 통치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101년간 인도를 지배했다. 인도대항쟁은 인도 반란(Indian Mutiny), 세포이 반란(Sepoy Mutiny·세포이는 영국군에 속한 인도 사병), 1차 독립전쟁(First War of Independence)이라고 다양하게 불린다.
 
  당시 동인도회사의 군대는 6만6000명의 영국군과 인도군 13만 명, 35만 명의 지방 종족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란은 인도군 13만 명 중 일부가 일으켰다.
 
  인도대항쟁은 1857년 5월 10일 뉴델리에서 64km 떨어진 군영(軍營)에서 시작되었다. 1858년 6월 20일 진압되었고, 영국 정부는 살인에 관련이 없는 자는 무조건 사면해주었다. 하지만 항쟁은 1859년 7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
 
  EIC는 인도 내 국내 치안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가져야 했지만, 본국에서 모두 데려올 수가 없어서 인도인 용병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은 인도인들이 인구는 많지만 수많은 종족, 언어, 문화, 종교, 신분 등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적절하게 이용, 부대를 철저하게 분리, 편성했다. 이는 일견 인도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은 하나의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도 다른 부대를 이용해 진압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장치였다. ‘분리해서 지배(divide and rule)’하는 방법인 셈이었다. 영국은 대항쟁 때에도 반란의 주역인 무슬림과 브라만족 부대를 반대 종족인 시크와 발루치 부대를 이용해 진압했다.
 
 
  ‘인도대항쟁’
 
  대항쟁 반란의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인도군에게 지급된 신식 엔필드총의 탄약통에 소와 돼지의 기름으로 만들어진 윤활유가 사용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이 때문에 평소에는 절대 행동을 같이 안 하는, 소를 신성시 여기는 힌두교도와 돼지를 금기시하는 무슬림 인도 군인들이 동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 정부가 자신들을 기독교도로 강제 개종시키려는 음모가 있다고 믿은 탓이다.
 
  또한 반란 직전에 영국정부가 여인이 남편이 죽어서 화장을 할 때 남편 시신 위에 엎드려 같이 타 죽어야 하는 오랜 관습인 사티(sati)를 불법화하고 과부의 재혼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등의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것이 또한 전체 인종, 종교, 계급을 막론하고 의심을 사게 만들어 민간인들도 반란에 대거 참여했다.
 
  반란이 시작되자 인도군들에 의해 인도에 거주하고 있던 영국인 4만 명 중 6000명이 살해되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영국 군인들은 더욱 잔학해졌다. 진압 과정에서 격앙한 영국군의 만행은 필설로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수준이었다. 무슬림 군인에게 돼지고기를, 힌두 군인에게 소고기를 강제로 먹게 했다. 먹지 않으면 교수형에 처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의 경우, 강간을 일삼았다. 이에 인도 군인들도 잔학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도대항쟁으로 영국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이 동인도회사로부터 인도 통치권을 박탈하고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에 나선다는 결정이었다. 이와 동시에 인도인들도 자신들의 독립이 필요하다는 각성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제1차 인도대항쟁이 일어난 1857년부터 인도가 독립하는 1947년까지 90년간의 영국령 인도제국 시절은 영국의 인도 직할 통치와 인도인의 독립운동이 병존하는 시대가 된다.
 
  영국령 인도제국은 인도뿐 아니라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부탄, 몰디브, 미얀마 등을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였다. 당시 영국 여왕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은 1876년 인도 여황제(Empress of India)가 되었다. 대영제국 국가 중 가장 면적도 크고 인구도 많은 인도는 이렇게 해서 ‘영국 왕관의 보석(the jewel in the British crown)’이 되었다. 이 같은 겸직은 현 찰스 3세 왕의 할아버지인 조지 6세 때인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도대항쟁 이후 영국 정부는 인도를 상대로 보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영국 정부는 우선 인도인과 영국인 사이 보다 긴밀한 유대를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이는 영국군 장교와 인도인 사병 사이만이 아니라 인도 일반인과 영국 일반인 사이까지 아울렀다. 1861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영국인 12만500명이 인도에 있었다. 이 중 4만1000여 명이 민간인이었다. 인도제국군은 6만6000명의 영국군과 13만 명의 인도군, 그리고 35만 명의 지방 종족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도대항쟁에 지방 영주들과 대토지 소유주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항쟁 이후 이들에게 영국 정부는 보상을 했고 인도 정치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도 주었다. 인도 지방 토후(土侯)들을 제국 통치의 조력자이자 일종의 공범자(共犯者)로 만든 셈이다. 물론 그들의 영지 또한 보장해주었다.
 
  영국은 인도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면 사리 같은 인도 여인들의 복장을 개선한다든지 결혼 풍습 등에도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이런 영국의 노력을 서구의 전통과 풍습을 자신들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여기고 저항했다. 심지어는 자신들을 서양인으로 세뇌시키려 한다고 오해까지 했다. 이에 영국은 인도 사회개혁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내놓는다.
 
 
  ‘인도의 대헌장’ 〈동인도선언〉
 
인도인 하인의 시중을 받는 빅토리아 여왕. 영국 여왕이자 인도제국 여제이기도 했다.
  인도대항쟁 이후 영국은 인도를 단순한 착취의 대상에서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인도인들은 강자에게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해야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엄청난 교훈을 얻었다.
 
  이에 빅토리아 여왕은 1858년 11월 1일 “우리는 우리의 신념을 어떤 신민에게도 강요할 권리와 요망을 모두 포기한다(We disclaim alike our Right and Desire to impose Our Convictions on any of Our Subjects)”는 〈동인도선언(the East India Proclamation)〉을 공포했다. 여왕의 선언에 이어 영국 의회는 인도통치법을 통과시켜 동인도회사의 인도 통치권을 박탈하고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할 통치할 수 있게 바꾸었다. 이와 함께 인도인들을 영국인과 같은 영국왕의 신민으로 인정(same rights as all Our other Subjects)하고 동시에 종교적인 관용과 인도의 관습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promised to support religious toleration, to recognise the Customs of India). 인종차별을 끝내고, 법의 완전한 보호를 어떤 차별도 없이 받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인도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마하트마 간디를 비롯한 인도의 지도자들은 영국의 가치와 신념을 인도인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는 〈동인도선언〉이 인도인에게는 〈대헌장(Magna Carta)〉 같은 중요한 선언이었다고 높게 평가했다. 덕분인지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정말 놀랍도록 지키며 살고 있다. 영국 곳곳에서도 전통 복장인 사리를 입은 인도 여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암리차르 사건
 
  1858년 인도통치법 시행 이후 반세기 동안 영국은 인도에서 중대한 사회개혁 정책을 펼쳐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국은 통신, 교통, 공공사업 등에 치중했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안정과 번영의 시대가 도래했다.
 
  1919년 4월 13일 잘리안왈라 바그로 알려진 펀자브 지방의 암리차르에서 영국군이 무장하지 않은 인도 시위대 군중에게 발포하여 최소 379명에서 최대 1500명이 사망하고, 1200여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시위는 경찰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시민을 체포할 권한을 주는 로우라트법에 대한 항의 집회였다.
 
  암리차르 사건은 인도인에 대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소한의 무력 사용(minimal force whenever possible)’ 원칙이 파기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도인들의 영국에 대한 신뢰도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파괴되었다. 영국 정부는 보리스 존슨 총리가 2019년 ‘깊은 유감(deep regret)’이라는 공식 사과를 할 때까지 이 사건에 대한 공식 사과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영국과 인도 두 나라 사이에 넘기가 힘들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당시 영국 전쟁장관(육군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이를 두고 ‘어불성설의 잔혹한 행위’라면서 영국 하원에서 성토했다. 영국 하원은 사령관의 처벌을 247대 37로 승인했다.
 
  이 사건은 간디의 무저항·무협조운동(nonviolent noncooperation movement)의 계기가 되었고, 결국 영국의 인도 통치의 끝과 인도 독립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간디의 저항운동에도 굽히지 않고 직할 통치를 더욱 강화했다. 이에 간디의 무저항운동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인도인이 과거 자랑스러워하던 영국의 작위와 공훈을 자진 반납했다. 인도 공무원들도 사직하거나 협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민들은 영국산 제품 불매운동에 나섰다.
 
 
  제국의 황혼
 
  영국의 인도 직할 통치의 막바지 무렵 제일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고등문관(ICS)에 지원하는 젊은 영국인들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도 내에서의 저항운동을 알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인도 정부의 토지세, 소금세 징수에 대한 반발이 심각해졌다. 결국 세금 징수에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었고 이어 ICS 행정관의 급여 및 근무조건의 악화가 이어졌다. 결국 ICS 행정관의 대다수를 인도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인 행정관들은 영국에 대한 충성심과 독립에 대한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령 인도제국에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간디가 1930년 3월 12일부터 4월 5일까지 24일간 벌인 소금세에 대한 항의 도보 행진은 인도 독립운동의 정점이었다. ‘소금행진(The Salt March 또는 Salt Satyagraha)’이라고 불리는데 간디가 지도자 78명과 같이 걷기 시작해 결국 100만 명 이상이 합류했다. 무저항·무협조운동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건이다. 행진을 마친 후 간디는 직접 바닷물을 떠서 증발 건조해 소금을 만들어 소금법을 어겼다. 이에 간디는 5월 5일 체포되었으나 이미 인도인들은 위법을 자행, 자신들이 직접 소금을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협상을 제안, 1931년 12월 간디를 런던으로 초청했다.
 
 
  ‘逆식민주의’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을 쟁취했다. 인도 독립을 알리는 기사가 실린 《힌두스탄 타임스》 1면.
  인도는 결국 1947년 8월 15일 독립했다. 인도 독립 이후 인도와 영국의 관계는 1997년까지 50년간 냉랭했다. 냉전 시에도 인도는 항상 영국과 미국의 반대편에 섰다. 양국은 모든 면에서 서로 비협조적이었다. 카슈미르 분쟁에서도 영국은 파키스탄 편을 들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은 소련이 붕괴하면서 인도는 소련(러시아)으로부터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중도 성향의 인도국민회의(INC·Indian National Congress)는 1991~1996년 수입관세와 각종 세금 인하, 시장 규제 완화 등을 통한 대담한 경제개혁을 시작했다. 그 결과 인도는 비약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게 되었고 영국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 되었다. 인도도 경제개발에서 영국과의 관계 개선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결국 두 나라는 상호협조가 훨씬 이익이라는 현실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인도는 미국 다음으로 영국에 투자를 많이 하는 국가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에 투자하는 나라 중 6위에 불과하다. 2019년 통계로는 인도 회사들이 영국에서 10만5000명을 고용해 480억 파운드(79조2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인도 최고의 기업 타타 그룹 하나가 영국에서 6만3760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에 영감을 준 전 런던 정경대학교 총장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역(逆)식민주의(reverse colonialism)’라고도 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에 있어 인도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영국 내에 현재 360만 명의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계 인구가 산다. 인도 2.3%, 파키스탄 1.9%, 방글라데시 0.7%, 스리랑카 0.5%로 모두 합치면 영국 인구의 5.4%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국 사회에서 이들의 비중은 인구 비율에 비해 훨씬 크다. 영국 어디서든 인도아대륙인들을 볼 수 있다. 이는 주로 이들이 런던 같은 대도시에 살기 때문이다.
 
  영국 내에서 2·3세대 인도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영국 사회에서 인도 공동체의 영향력은 전에 비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졌다. 주로 경제계에 인도인들의 진출이 활발하지만, 경제적으로 기반을 잡은 인도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활발하게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정계에서도 인도인들의 존재감이 커졌다. 650명의 하원의원 중 5.5%인 36명이 인도아대륙계이다. 정확하게 자신들의 인구 비율만큼 차지한 셈이다. 현 집권당인 보수당 정권의 내각요원 24명 중 총리 리시 수낙과 내각 3인자인 내무부 장관 수엘라 브레이버먼 또한 인도계이고, 런던 시장도 파키스탄 이민 2세인 노동당 사딕 칸이 맡고 있다.
 
  영국은 산업혁명 당시 인력이 모자라자 18~19세기에 인도아대륙인의 이민을 대거 받아들였다. 이런 이민자들이 당시 영국 중부 지방의 공장에 취업을 해 영국의 방직업을 지탱했다. 이 후손들이 아직도 영국 중부 지방에 남아 있다. 레스터 인구 56만6000명 중 22%에 해당하는 12만6000명이 인도 계열이다. 런던 근교 해로우는 25만1000명 인구 중 29%인 7만4000명, 혼슬로는 인구 29만3000명 중 21%인 6만800명이 인도 계열이다. 이 지방들을 가보면 거의 인도 식민지 같다.
 
 
  영국의 유산
 
  영국이 인도에 남긴 유산은 근대적인 행정 제도, 교육, 기간산업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철도, 도로, 통신, 체신, 교량, 운하 등의 시설과 관리 제도를 만들어 남겼다. 이는 다른 인도 내 지역들이 서로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게 했고, 무역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 정치와 법치 제도를 남겨 인도를 세상에서 가장 큰 민주 제도 국가라는 평을 듣게 했다. 또 정비된 교육 제도와 기관을 통해 인재 양성을 해 인도로 하여금 국내 총생산(GDP) 기준으로 영국을 6위로 밀어내고 세계 5위를 달성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큰 유산은 ‘영어’다. 800여 개가 넘는 언어와 2000여 개가 넘는 방언을 가진 인도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영어’다. 또 ‘영어’는 인도인들이 세계로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장점이 되고 있다.
 

  영국 지배의 어두운 면은 인력, 자원, 토지 착취다. 인력과 원료를 모두 영국으로 가지고 가는 바람에 인도는 자원과 인력만을 제공하는 기지가 되었다. 인도에서 인도 농부의 손으로 생산되어 영국으로 수출된 면화를 원료로 해서 영국으로 이민 간 인도 노동자들이 값싼 면직물과 면제품 의류를 대량 생산해냈다. 이런 제품들이 다시 인도로 수입되어 소규모 인도 면직물 공장과 수공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인도인들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셈이다. 인도는 그렇게 해서 영국의 종속경제체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인도를 영국에 충성하는 인도 지배 계급에만 이득이 되는 사회로 만들었다. 인도의 농업을 순전히 영국의 이해와 관련되게 짜고 운영했다. 이로 인해 식량을 재배해야 하는 땅에 영국 면직물 산업의 원료 목화를 심게 해서 대기근이 들었을 때 대량 아사(餓死)가 발생하게 했다. 1800년대 후반에 인도를 휩쓴 대기근으로 인도는 직격탄을 맞았다. 기근은 인도아대륙 역사에서 항상 있어 왔지만 이때의 대기근은 특히 심했다. 이 상처는 아직도 인도·영국의 관계를 해치는 요인으로 남아 있다.
 
 
  ‘가장 오랜 민주주의 국가’와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
 
  대기근을 해결하지 못한 대영제국 엘리트들은 수치심을 느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각종 자원을 이용해 식량을 제때에 공급할 수 있는 철도, 도로, 운하 건설을 서둘렀다. 동시에 기후 문제, 식량 생산, 곡식 병충해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 관리하기 시작했다. 몬순으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정보 관리에도 집중했다. 이런 모든 절차는 느리게 진행되었으나 결국 결과를 낳았다. 덕분에 1918년 이후에는 수백 년간 인도를 괴롭히고 황폐화시켰던 기후로 인한 대기근은 사라졌다. 유행병으로 인한 사망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에 대해 영국 학자들은 영국이 인도에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이라고 자부하고 있고, 인도 학자들도 인정한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는 영국과 인도를 “가장 오랜 민주주의 국가와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the world's oldest democracy and its largest)”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은원(恩怨)과 애증(愛憎)이 얽힌 이 두 나라가 21세기에 어떤 관계를 엮어나갈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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