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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특집·인도의 모든 것

인도와 중국

“중국, 공자의 공동사회주의… 인도, 베다의 개인주의”

글 :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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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대 하천 중심으로 형성된 유구한 문명 ▲ 북방 유목민의 압력 ▲ 사회주의적 경제 운용 후 개혁·개방이라는 점에서 유사
⊙ 인도, 쿼드 가입국이면서도 親러시아 행보… 서구적 관점으로만 보면 낭패
⊙ 간디·네루, 영국의 근대성 수용한 自治 모색… 라쉬 베하리 보스·수바스 찬드라 보스, 일본 도움받은 독립운동 시도
⊙ 1962년 中印전쟁 이후 인도-러시아, 중국-파키스탄이라는 지정학적 구도 형성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 저서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K를 생각한다》
2018년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신화/뉴시스
  바야흐로 지정학적(地政學的) 대변동의 시대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서구 세계의 러시아를 향한 대대적 경제 제재로 인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하나가 된 세계는 다시 두 세계로 갈라지려 하고 있다.
 
  한 축에는 하나의 세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미국, 서유럽, 일본이 뭉친 서구 진영이 있다. 이들은 지역 강대국들의 세력권으로 나누어진 세계가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의 혼란을 빚어낸 1930년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편에는 제국과 문명의 전통을 내세우며 자신의 지역적 권역에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진영이 있다. 핵심국인 중국, 러시아, 이란은 유라시아의 대륙적 교역망을 복구하여 바다를 장악한 서구 진영과는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두 세계, ‘서구’과 ‘유라시아’ 진영
 
  ‘유라시아 진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은 다른 제국과 문명 전통을 갖춘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서구가 오만하게 위대한 문명 전통을 지닌 당신들 나라에 모욕 주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그들의 제국주의적 시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브라질과 같은 지역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이 두 진영 사이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대세 속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점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나라가 있다. 인도다. 지난 4월,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인구 대국에 오른 인도는 세계 문명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 오랜 분열과 혼란, 빈곤의 역사, 감히 다 담을 수 없는 내적 다양성과 그 모든 것을 묶어주는 기이한 통합력이 모두 공존(共存)하는 양면적인 국가다.
 
  외교적으로도 인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에 더 우호적인 모습을 꾸준히 보이면서,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과 일본의 기획에 동참하는 등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그러니 단순히 ‘영성(靈性)을 찾을 수 있는 신비의 대륙’, 아니면 ‘여행조차 고려하면 안 되는 낙후하고 열악한 국가’로 외부인의 환상과 편견을 담아서 인식하기에는, 21세기에 그 중요성과 존재감이 더욱 커질 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하여 한국은 여전히 인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인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두 개의 대하천을 중심으로 문명 형성
 
일본의 지식인 오카쿠라 덴신은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가 아시아를 연결하는 문명의 매개”라고 말했다.
  한국인 입장에서 인도라는 생소한 코끼리를 알고자 한다면 어떤 대상을 비교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 아마 한국의 바로 옆에서 거대한 영토, 14억의 인구, 수천 년의 문명과 역사를 뽐내는 중국만큼 좋은 비교 대상은 없을 것이다. 두 문명은 역사의 시원(始原)부터 탄생하여 전체 인류 문명의 중심에 자리했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자적 세계를 형성했고, 서구 근대의 충격에 와해되었다가 재차 부흥하여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오늘날의 세계를 만드는 주역으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과 인도는 결코 일반화할 수 없는 차이도 많기에, 중국과의 비교는 인도를 더 명확히 이해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두 나라의 위치를 살펴보자. 오늘날의 중국은 황하와 양자강이라는 두 대하천에서 탄생한 문명을 시원으로 하고, 대륙 동안의 계절풍에 따라 작물을 경작하며 농업을 발전시켰다. 인도는 중원(中原) 서쪽의 거대한 티베트 고원과 히말라야 산맥 너머에 있다. 인도 또한 인더스강과 갠지스강이라는 두 대하천을 기반으로, 계절풍에 의존하는 농경 문명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제자백가, 인도에서는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라는 위대한 사상이 탄생했고, 이 사상들은 두 문명에서 형성된 제국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동시에 두 문명은 고립된 세계가 아니었는데, 특히 북쪽에서 그러했다.
 
  중국은 항상 중원 북쪽의 강력한 유목민(遊牧民)과 투쟁하면서 제국을 지켜야만 했고, 때로는 유목민의 침략에 제국이 무너져 거대한 혼란이 펼쳐지기도 했다.
 
  인도는 중국만큼 넓은 면적에서 유목 세계와 마주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북방의 위협을 항상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카이베르 고개는 중국 북서쪽의 하서주랑(河西柱廊)과 마찬가지로 유목민이 인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통로의 역할을 했다.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목축민들은 고대(古代) 인더스 문명을 정복하고 새로운 아리아 문명을 세웠는데, 이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이 오늘날 인도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힌두교의 근원이다. 중국이 흉노, 돌궐, 거란, 여진, 몽골과 싸워야 했듯이 인도도 그리스인, 월지인, 돌궐인, 무슬림의 침입에 노출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서로 단절되어 있던 중국과 인도를 연결해주는 매개가 되어주기도 했다. 유목민 이전에도 중국과 인도는 티베트와 버마(미얀마)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으로 향하는 차마고도(茶馬古道)를 통해 간헐적으로 접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원에 펼쳐진 교역과 정복의 길을 통해 중국과 인도의 물산과 사람, 종교가 훨씬 큰 폭으로 오갔다. 특히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는 아시아 전체를 연결하는 문명의 매개였다. 이를 간파한 일본의 지식인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은 그의 대표작 《동양의 이상》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기도 했다.
 
  “아시아는 하나다. 공자(孔子)의 공동사회주의를 가진 중국 문명과 베다의 개인주의를 가진 인도 문명을 히말라야가 가르고 있는데, 이는 오로지 강력한 두 문명을 두드러져 보이게 할 뿐이다. 하지만 그 눈 덮인 장벽조차도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향한 열망의 드넓은 확장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중국의 바다, 인도의 바다
 
  한편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면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남중국과 남인도는 두 문명의 중심지였던 북중국, 북인도와는 다소 구별되는 문화적 특질을 가졌고,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독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제국과 종교는 결국에는 남북을 하나로 묶어냈다.
 
  그리고 북쪽의 초원과 연결된 두 문명은 남쪽에서는 바다로 연결되었다. 여기서도 상인들과 순례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중국은 남중국해를 통해 동남아시아 전역의 주요 무역항에 접근해서 물산을 교역했다. 인도는 바다로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국의 바다가 믈라카에서 끝나는 것과 달리, 인도의 바다는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인도네시아까지 펼쳐진 거대한 인도양이었다. 계절에 따라 풍향이 달라지는 계절풍을 통해 인도 상인들은 페르시아 상인과 함께 드넓은 인도양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어냈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의 영향이 결정적이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명의 기초를 제공했다. 동남아시아는 인도와 중국이 교차한다는 의미에서 후대에 ‘인도차이나’라고 불릴 정도였다.
 
  북쪽과 남쪽에서의 중요한 변화는 오늘날 두 나라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냈다.
 
  육지에서 온 첫 번째 변화는 몽골 세계 제국의 등장이었다. 중국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았고, 그 이후에는 유목 세계와 정주(定住) 세계를 결합한 만주인들의 청(淸)제국이 다시금 도래했다.
 
  인도는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북인도는 이미 그 이전부터 튀르크계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몽골의 영향력은 인도에서 오랜 기간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와 티무르의 후예인 바부르가 북인도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특히 바부르는 아예 북인도에 정착하여 몽골인들의 제국, 즉 ‘무굴제국’을 건국했다.
 
  청제국과 무굴제국은 중국과 인도라는 정주 문명과 몽골, 튀르크, 만주의 유목민들이 하나로 융합한 ‘몽골 후계 제국’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다. 두 제국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위대한 건축과 예술이 꽃을 피웠다. 그러나 모든 유목민을 복속시킨 청만큼 강력하지 못했던 무굴제국은 북쪽 아프가니스탄과 남쪽 힌두 왕국들의 반격을 이기지 못하고 더 일찍 무너졌다.
 
 
 
식민 혹은 半식민의 체험

 
  하지만 더 중요한 변화는 남쪽에서 찾아왔다. 그 이전까지 남쪽의 위협은 북쪽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강력한 대포와 함선을 갖춘 영국인들이 등장하며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영국인들은 상업적 힘과 더 강한 군대를 바탕으로 처음에는 인도로 침투했고, 1세기 뒤에는 중국으로 침투했다.
 
  더 결속력 있는 제국 정부를 지니고 있었고, 영국 및 유럽 열강으로부터 거리가 먼 중국은 그나마 허울뿐인 독립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11년 청제국이 무너지고, 중국에 결속력 있는 통일 정부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중국은 다시금 분열의 수렁으로 빠졌다.
 
  한편 통일된 제국을 여전히 이루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언어와 종족, 종교 정체성(正體性)으로 나뉘어 있던 인도는 영국에 각개격파되어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정부가 자리 잡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국과 인도에서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갔고, 한때 서구인들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던 위대한 제국의 사람들은 생존 한계선에서 허덕이는 거대한 빈곤 인구로 추락했다. 이러한 상황은 서구인들에게는 자부심과 오만함을 안겨주었고, 중국인과 인도인에게는 굴욕감, 그리고 자강(自彊)을 해야만 한다는 열망의 원천이 되었다. 바야흐로 아시아의 근대 지식인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일본의 오카쿠라 덴신이 아시아 연대(連帶)를 호소하며 글을 쓰는 것도 이 시기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향해 거둔 승리는 아시아의 근대 지식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자강을 한다면 아시아 민족도 서양을 이길 수 있다는 증거였다.
 
 
  일본 도움을 받으려 한 인도 독립운동가들
 
인도-일본 우애의 상징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
  하지만 자강에 대한 태도는 각국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허울뿐이지만 국가가 있던 중국에서는 일본과 같은 근대화를 어떻게 이룰지를 놓고 논쟁이 이어졌다.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인도는 ‘민족성이 나약하면 완전한 식민지로 굴러떨어지는’ 반면교사(反面敎師)나 다름없었다. 생명 사상을 전개한 인도의 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924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망국(亡國)의 시인’이라며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식민화의 역사가 오래된 인도에서는 다른 방식의 자강운동도 나타나고 있었다. 영국은 제국주의 국가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현지 엘리트를 포섭하고, 그들을 제국의 근대 교육 체계로 통합하여 식민지의 안정적 통치를 노린 국가였다. 부유한 상인부터 하층 노무자까지 수많은 인도인이 영국의 제국 네트워크를 통해 당시 세계 최첨단의 지식과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영국의 식민 통치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영국의 근대성(近代性)을 인도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도 고민하며 자치(自治)운동을 전개했다. 런던에서 공부하여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 활동을 한 마하트마 간디,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가 대표적이었다. 간디는 일본에 맞서 싸우던 장제스(蔣介石)와 전쟁 중에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처절한 전투를 지휘하는 장제스가 보기에 간디는 타고르와 마찬가지인 ‘망국의 지식인’이었다.
 
  한편 일본의 팽창은 두 나라에 완전히 상반된 것 같으면서도 유사한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서양으로부터 아시아의 독립을 구호로 내건 일본은 장제스를 중심으로 뭉치는 중국이 그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파괴적인 중일전쟁을 개시했다.
 
  반면 인도에서는, 영국군을 무력(武力)으로 무찌른 일본에 감탄하는 분위기가 이어지며 일본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인도국민군이 결성되었다. 일본이 중국에서 잔인한 학살을 펼치는 동안에 일본의 아시아주의 지식인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도쿄(東京)에 망명한 인도의 민족 운동가 라쉬 베하리 보스, 인도국민군의 수장(首長)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도-일본 우애의 상징이 되었다.
 
 
 
독립과 내전, 근대화

 
  하지만 ‘일본의 전쟁’은 어쨌든 두 나라가 제국주의로부터 최종적으로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을 거의 자력(自力)으로 방어해낸 장제스의 중국은 1945년에 국제연합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얻어내며 당당한 승전국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제국을 유지할 수 없음이 드러난 영국은 1947년에 ‘왕관의 보석’인 인도를 독립시켰다. 아시아의 두 거대 국가가 당당한 주권국으로서 세계 지도에서 모습을 다시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외적(外敵)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간 잠재되어 있던 내적 긴장이 폭발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냉전(冷戰)의 소용돌이로 들어간 중국은 항일전쟁 와중에 세력을 확대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과 싸우며 4년간 이어지는 국공내전(國共內戰)에 돌입했다.
 
  인도에서는 무굴제국 말기와 영국식민지 시기에 누적되어 온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독립을 계기로 전면화되었다. 인도는 무슬림 다수 지역인 파키스탄과 힌두교 다수 지역인 인도로 분할되었다.
 
  중국의 내전과 인도의 분할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으며 비극이 계속되었다. 한편 인도가 갈라지는 가운데 중국은 마오쩌둥이 장제스를 몰아내고 대륙을 장악했으나, 장제스는 대만으로 이동하여 중화민국의 명맥을 잇겠다고 선언하며 ‘중국의 냉전’을 이어갔다.
 
  1950년대에도 두 나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걸어갔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대규모 농업집단화, 국가의 경제 장악, 대량 숙청이 이어졌다. 인도에서는 상대적으로 평화가 이어졌고, 영국의 통치 기구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전문 인력을 기반으로 의회민주주의도 이루어냈다.
 
  방식은 다소 달랐음에도 두 나라의 지도자인 마오쩌둥과 네루는 국가가 주도하는 개발을 통해 빠른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물론 그 꿈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사회를 장악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나, 시장 원칙을 수용하고 국가를 안정화시키는 데는 그다지 능력이 없었다. 네루는 사회를 장악하지도 못했고, 시장 경제의 도입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세계에 경제를 개방하고, 본격적인 발전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세월이 더 필요했다.
 
 
  중국과 인도의 충돌
 
2020년 6월 18일 인도 수리야펫에서는 중국과의 국경 분쟁에서 사망한 B. 산토시 바부 인도군 대령의 장례식이 열렸다. 사진=AP/뉴시스
  한편 마오쩌둥과 네루는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며 외교적으로 같은 노선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적인 비동맹 운동의 대의는 주권 국가로 독립한 중국과 인도의 국가적 이익보다 앞설 수는 없었다. 1962년에 중국과 인도는 카슈미르와 히말라야 인근의 국경 문제를 둘러싸고 무력 충돌을 벌였다. 군사적으로는 중국의 승리였으나, 인도는 소련에 접근하여 중국을 견제할 카드로 쓰고자 했고, 이는 중소(中蘇) 관계 악화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소련과 인도에 위협을 느낀 중국은 처음에는 파키스탄과 나중에는 미국과 연계하여 지정학적 압박을 해소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오늘날 남아시아 지정학의 기본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 흐름은 1980년대에 가속화될 더 큰 변화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었다. 미국과 관계를 개선한 중국은 더 나아가 아예 서구 자본주의에 합류하여 마오쩌둥식 개발의 실패를 극복하고 빠른 발전을 달성하기를 원했다. 인도에서도 자와할랄 네루와 그의 딸 인디라 간디 이후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계획 경제를 포기하고 시장 경제로 이행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막강한 사회 장악력을 바탕으로 전면적으로 발전을 향해 몰두한 중국에 비해서 인도는 여전히 국가 통합성이 약했고, 인프라도 부족한 상태였다.
 
 
  힌두민족주의의 등장
 
  인도가 경제 개방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위해서는 독립 후 50년간 야권(野圈)에 머물러 있었던 힌두민족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서야 했다. 세속주의(世俗主義)와 계획 경제를 추구한 네루, 인도국민회의당과 달리, 인도인민당(BJP)은 힌두교를 인도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고자 했으며, 힌두교와 시장 경제를 조화시키는 새로운 경제사상도 발전시킨 터였다.
 
  힌두민족주의자들은 마치 만주족을 몰아내고자 한 청말(淸末)의 한족(漢族) 지식인들처럼, 무굴제국과 이슬람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힌두를 중심으로 인도의 정체성을 다시 부여하고자 했다. 1992년 유서 깊은 이슬람 사원이 파괴된 아요디아 사건, 2002년 구자라트 무슬림을 향해 벌어진 대규모 폭력 소요는 힌두민족주의 부상(浮上)에 따른 인도의 갈등을 예시하는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시장 개방의 결과로 부상한 도시 중산층(中産層)들이 힌두 정체성을 적극 포용하면서, 힌두민족주의는 부상하는 인도의 미래를 상징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들의 힘을 통해 구자라트 주지사로서 경제 개발과 폭력 소요 모두에 연관이 되어 있는 나렌드라 모디가 2014년에 총리로 집권할 수 있었다. 모디는 10년에 가까운 집권기 동안 고도성장을 이끌고, 강력한 권력으로 화폐 개혁을 강행하는 등 ‘민주적 스트롱맨’으로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과 쿼드의 탄생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인도-태평양을 내걸고 인도에 공을 들였다. 사진=AP/뉴시스
  모디가 등장한 2010년대는 지정학의 격변기이기도 했다. 2010년 중국은 국내총생산에서 일본을 뛰어넘어 제2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고, 2013년에는 시진핑(習近平)이 집권하면서 더욱 공세적인 외교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 외교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고대 실크로드의 연결망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겠다는 일대일로(一帶一路)였다. 중국은 인도의 숙적(宿敵) 파키스탄과 유대(紐帶) 관계를 강화하여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 프로젝트를 개시하고, 스리랑카에 항만을 개발하고, 미얀마에도 항구와 가스관을 연결하여 미국이 장악한 해상로를 우회할 수 있는 공급망을 구축(構築)하기를 원했다.
 
  공교롭게도 중국이 일대일로 과정에서 진출한 핵심 지역들은 모두 인도의 지정학적 세력권에 포함되는 곳들이었다. 물론 인도는 건국 이래로 비동맹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에 중국과 같은 외교 노선을 추구하지는 않았으나, 미국에 대항하는 중국의 움직임이 장차 인도의 목줄을 죌 수 있다는 우려를 체감(體感)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우려를 간파하고 접근한 국가는 역시 중국의 부상에 심대한 우려를 느끼고 있는 국가, 일본이었다. 2010년 센카쿠 열도 분쟁에서 중국이 보인 힘에 충격을 받은 결과, 여당은 민주당에서 자민당으로 교체되었고 일본은 다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외교 노선으로 회귀(回歸)했다. 2000년대부터 인도에 공을 들였던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는, 종래의 아시아-태평양 대신 인도-태평양을 강조하며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도록 관점의 전환을 촉구했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도 일본의 설득에 응하여 구체적인 인도-태평양 전략이 부상하고, 호주도 참여하는 안보 협력체인 쿼드(Quad)가 탄생했다.
 
  인도는 일본과 합작하여 고속철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오카쿠라 덴신부터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수바스 찬드라 보스를 포괄하는 근대 양국의 관계를 재조명하며 협력에 박차를 가했다. 인도가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도 미국, 인도, 일본의 공조(共助)를 가능하게 한 유리한 조건이 되어주었다.
 
 
  인도의 다양한 얼굴
 
  하지만 이것이 인도가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새로운 안보 협력체의 일원으로 완전히 합류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미국은 인도가 러시아 문제에서 전혀 협조할 의사가 없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인도의 장구한 역사와 다양성을 생각하면, 인도의 노선을 무엇이라 하나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인도는 중인(中印)분쟁 당시에 소련의 도움을 받았고, 러시아와 오랜 우호 관계를 만들어온 나라였다. 동시에 인도는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국 중 하나로서, 미국과 서유럽이 주도하는 현재의 세계 질서에 대한 불만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게다가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모디 입장에서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중국 시장을 고려했을 때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온전히 몰두할 수도 없다. 때로는 개발도상국 클럽인 BRICS(브릭스,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의 일원으로서 중국과 공조하여 선진국을 압박하기도 한다. 동시에 부상하는 힌두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인도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 얼마나 조화로울 수 있는지를 공개적으로 되묻는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민주국가이자, 쿼드로 미국, 일본과 함께하는 인도의 이미지만 생각하면 상상하지 못할 모습들이다.
 
 
  ‘인도는 인도 편’
 
  그래도 확실한 것 몇 가지는 있다. 우선 ‘인도는 인도 편’이라는 것이다. 인도 외무장관 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는 인도가 서방이나 중국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고 천명하기도 했다. 인도를 자신의 기준으로 섣불리 판단하고 자신과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다가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다른 움직임에 오히려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인도를 적대한다면,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이 나라와 완전히 등을 지게 될 수도 있다. 서방, 중국, 일본, 한국을 가리지 않고 인도와 함께하지 않는 나라는 미래에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런 낭패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이 놀랍도록 거대하고, 다면적이고, 복잡한 나라를 더 차분히, 길고 넓은 시야 속에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중국과 일본이 인도를 그렇게 보듯, 한국도 독자적인 인도관(印度觀)을 갖기를 기대해본다. 나아가 인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국인의 심성을 형성한 불교 전통과 근대 아시아 지식인과 지도자들의 교류도 보여주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또한 더 잘 비추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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