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메르 루주… 안경 쓴 사람, 책을 똑바로 든 사람, 시계 볼 줄 아는 사람을 ‘교육받은 자’로 규정, 학살
⊙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처형당한 보파나와 시타… 남편 학살한 자와 재혼한 기구한 여인
⊙ “어려서 소원이 학교 다니고 책을 마음껏 읽는 것… 다음 세대에는 나의 恨을 더 이상 물려줄 수 없다”(툭툭 운전사 퓌 솜밧)
⊙ 격동의 시절, 공산당에게 아버지 학살당하고 캄보디아에서 목회하는 김해준 목사
⊙ 캄보디아에 번지는 새마을운동…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캄보디아의 10대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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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 아익 대량학살센터 추모탑 내의 유골탑. 이곳에서 발굴한 유골을 수습해 17단으로 건립했다.
‘4월은 잔인한 달.’ T.S. 엘리엇의 시구(詩句)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을 함락(陷落)했다. 그보다 2주 전인 4월 17일엔 인접국 캄보디아(당시 나라 이름은 크메르공화국)에서 크메르 루주가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프놈펜을 점령했다. 크메르 루주는 ‘붉은 크메르’라는 뜻이다. 크메르(Khmer)는 캄보디아의 주요 민족 이름이다.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번영하며 동남아 대부분을 통치하고 그 유명한 앙코르와트 사원을 건립했던 나라가 크메르 제국이며, 1970년부터 75년까지 존속하며 대통령배 축구대회에 대표팀을 파견했던 나라가 크메르공화국이다.
‘붉은 크메르’는 정권을 잡은 뒤 급진적 정책을 도입했다. 자기들은 정의(正義)롭고 도덕적(道德的) 존재이기에, 거의 모든 국민이 자신들을 지지한다고 확신했다. 그들이 꿈꾼 것은 외부와 격절(隔絶)한 원시농촌공동체(原始農村共同體)였다. 그래서 급격한 대규모 사회 개조와 인간 개조를 통해 단번에 이상적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했다. 이것이 ‘붉은 크메르’가 생각한 ‘정의’였다. 연호(年號)도 새로 정했다. ‘0년(Year Zero)’이다. 외세(外勢), 권력층, 자본가 등 기득권 세력을 오로지 자신들의 힘으로 타도했다고 믿은 자의 무모한 오만이었다.
크메르 루주의 내로남불
크메르 루주는 ‘정의’의 생산, 유통, 분배를 오직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체제는 물론, 역사, 문화, 관습 등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모든 것을 적폐(積弊)이자 박멸(撲滅) 대상이라 여겼다. 문명의 상징인 도시는 그래서 그들에게 ‘혁명의 적’이었다. 도시 거주민뿐 아니라 도시 자체가 청산 대상이었다.
집권 직후 그들은 도시민들에게 강제 퇴거를 명령했다. 농촌마다 집단농장을 조직했으니, 그곳까지 걸어가라고 했다. 오랜 내전(內戰)으로 수많은 농촌 출신이 도시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무리하고 무모한 이동, 농장에서의 강제 노동과 영양 부족으로 무수한 인명이 죽어 나갔다.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인정하지 않고, 기계 사용을 금지하니 생산성이 떨어졌다. 비전문가의 간섭도 사정을 악화시켰다. ‘쌀 생산량을 즉각 3배로 증산하라’는 크메르 루주의 명령은 실현될 길이 없었다. 식량 수출국이던 캄보디아가 만성적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나라가 된 건 ‘붉은 크메르’의 집권 이후부터다.
이건 그들의 기대와 예측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깃발’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다른 생각을 많이 하는 혁명의 적’인 지식인이 제1차 박멸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변호사, 의사, 교사 등 지식인을 거리낌 없이 체포하고, 고문하고, 살해했다. 그들이 죽여 없애야 한다며 정의(定義)한 ‘지식인’의 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문직 종사자는 물론, 수녀, 승려 등 종교인, 손에 굳은살이 없는 사람, 안경 쓴 사람도 ‘지식인’으로 분류했다. 책을 똑바로 든 사람은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증거여서, 시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은 ‘교육을 받은 자’라는 증거여서 모두 죽였다. ‘한 사람의 적을 놓치는 것보다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낫다’는 ‘붉은 크메르’의 기본 신념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다.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인 폴 포트 자신도 프랑스 유학파였고, 각료 중에도 지식인과 안경 착용자가 있었지만, 그들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일반인에게 적용하는 기준은 같지 않았다. 외국인도 ‘새롭고 순수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방해물이어서 다 죽였다. 외국인 친구가 있는 캄보디아 사람도 다 죽였다. CIA와 KGB 첩자로 몰아서 죽였다.
1979년 1월 7일까지 3년 8개월 20일 동안 ‘붉은 크메르’는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00만 명 정도의 인명을 살상했다.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毛澤東)을 능가하는 인류 최악의 대학살(大虐殺)이다.
고문당할 때 비명 지르면 추가 고문
학살의 현장이 프놈펜 시내에 있다. 뚜얼슬랭, 일명 S-21이다. 이전에는 학교였던 이곳을 크메르 루주는 극비 수용소로 썼다. 200여 개의 감옥을 만들어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다. 지금은 추모 박물관이다. 4개 동(棟)으로 이뤄진 이곳 박물관은 참혹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 ‘조금이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즉각 대답하라’ ‘혐의를 부인하지 마라’ 등의 ‘규칙’ 중에는, ‘얻어맞거나 전기 고문을 당할 때 비명을 지르지 마라’는 조항도 있다. 조금이라도 비명을 지르면 10회의 채찍질 혹은 5회의 전기 고문을 더 당한다는 추가 설명도 있다. ‘죄수’들은 족쇄에 발이 묶인 채 밤낮 없는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다. 물고문은 하수도 물과 인분을 섞은 물로 자행했으며, 형틀에 전신을 고정하고 손톱, 발톱을 뽑는 고문은 ‘원하는 자백’을 얻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채찍질, 몽둥이질로 갈라진 상처에 소금물을 붓는 것은 ‘치료와 고문’을 동시에 수행하는 획기적 기술이었다. 죄수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혹여 감방 바닥에 대소변을 흘리면 혀로 핥아 깨끗이 청소해야 했다.
크메르 루주는 수감자들을 ‘평등하고 영광스러운 미래’에 불필요한 기생충이라고 불렀다. 고통에 못 이겨 3층에서 투신하는 ‘기생충’이 나오자, 크메르 루주는 건물 복도에 철조망을 쳐 ‘추가 사고’를 막았다. 죄수들은 수감번호로 불렸고 이름을 쓸 수 없었다. 단 두 차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자백한 조서에 서명할 때, 그리고 사형집행장에 사인할 때다.
뚜얼슬랭에는 1만2000~2만 명 사이의 사람들이 수감되었지만, 단 12명만 살아남았다. 어른 일곱, 어린이 다섯이다. 기록에 따라 생존자 수가 11명이라고 나오는 이유는, 가장 어린 생존자였던 생후 4개월의 영아(嬰兒)가 구출 후 며칠 만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입성(入城)하자, 교도소장, 간수 등 관리자들은 황급히 도망쳤다. 그들은 남아 있는 ‘죄수’들을 인근 건물로 소개(疏開)한 뒤 그곳에서 살해하기도 했다.
기록에 집착했던 크메르 루주
1월 10일, 베트남군이 S-21을 접수했다. 종군 사진사 호반따이(Ho Van Tay)가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관리자들이 급하게 달아난 탓에, 참상(慘狀)을 증명할 증거들이 다수 남아 있었다. 낫, 채찍, 단체 족쇄 등 고문 도구 그리고 취조실 철제 침대에 족쇄로 묶인 채 죽어 있던 시신들이다. 바닥의 핏자국, 도망가기 직전까지 고문 가해자가 앉아 있었던 시신 위 의자도 사진으로 남았다. 고문실로 쓰이던 A동 바로 그 장소에 당시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다.
수습한 시신 14구는 지금 박물관 마당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 무덤에 묻혀 있다. 생존자 중 3명은 박물관 구내에서 자신들의 증언집을 판매하고 있다. 화가 보우 멩(Bou Meng), 기능공 쭘 메이(Chum Mey), 그리고 구출 당시 8세였던 노릉 찬 팔(Norng Chan Phal)이다. 1941년생인 보우 멩은 폴 포트 등 크메르 루주 지도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에 동원된 덕에, 쭘 메이는 타이프라이터 수리 작업에 동원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아내와 자녀들이 학살당했으며, 1979년 1월 7일 간수들에 의해 모처로 끌려가다 야음을 틈타 도망쳤다.
현대 문명을 적대시한 크메르 루주가 타이프라이터? ‘붉은 크메르’는 기록에 집착했다. 모든 간수와 수감자의 사진을 찍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수감자를 고문한 후, 그들의 일생을 기록한 두툼한 ‘자백서’를 만들었다. 급히 도망가느라 미처 다 소각하지 못한 수많은 ‘자백서’는 지금도 읽을 수 있다.
서류로 남기면 없던 일들이 ‘실제 일어났던 사실’이 된다고 믿었던 것일까. 개인의 일상 행동 및 발언, 조상, 가족, 친지의 성향을 일일이 조사하고 이를 문서로 만들어 보관하며, 신분제(身分制) 유지의 기본 자료로 악용하는 북한 김씨 왕조의 폭압 통치와 크메르 루주의 학살 사이 공통분모는 바로 이 ‘문건(文件)’이다. 그들 자신이 ‘무산자(無産者)가 아니라 사이비 지식인’이라는 뚜렷한 증거다. 그릇된 신념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오만한 권력의 결합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더구나 스스로를 선민(選民)이며 특권계급(特權階級)이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보파나와 시타
뚜얼슬랭에는 크메르 루주가 남긴 사진이 즐비하다. 수감자들의 증명사진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파나와 시타의 사진도 있다. 농장원으로 일하던 첫사랑 보파나를 크메르 루주 군인이었던 시타가 몇 년 만에 찾아냈다. 지위를 이용해 수소문해서 기적처럼 재회한 것이다. 둘은 부부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뚜얼슬랭으로 끌려와 죽었다. 떨어져 살면서, 보파나와 시타가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반역의 증거’였다. 편지도 문제였지만, 편지 내용은 더 문제였다. 일단 두 사람이 글을 쓰고 읽을 줄 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반역이었다. 게다가, 시타와 보파나는 셰익스피어 등의 고전 작품을 인용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영어와 불어가 구사된, ‘배운 사람’이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가족조차 해체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크메르 루주에게, 10대에 이미 결혼을 약속하고 오랫동안 사랑의 감정을 이어가고 있는, 당의 감시를 피해 사적(私的)으로 소통하는 두 남녀 지식인은 도저히 살려둘 수 없는 존재였다. 사랑과 경배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국가와 당뿐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존경하는 것조차 반역의 징후라고 여긴 집단이 크메르 루주다. 남편 시타는 밀고자의 고발로 어딘가로 끌려가 바로 살해되었고, 아내 보파나는 1976년 10월 12일 뚜얼슬랭으로 끌려와 1977년 3월 18일 사형당했다. 25세, 꽃다운 나이였다.
이들 부부의 사연은 1996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캄보디아계 프랑스 감독 릿티 판(Rithy Pann)이 만든 〈보파나: 어느 캄보디아인의 비극(Bophana: A Cambodian Tragedy)〉이다.
뚜얼슬랭 자료실에 보관 중인 이들의 연애편지와 허위 자백서, 그리고 이들의 생애를 담은 일대기도 책으로 나왔다.
12~20세의 시골 출신 문맹 간수들
끌려온 첫날, 모든 수감자는 증명사진을 찍었다. 간수들도 사진을 찍었다. 베레모를 쓴 것이 간수라는 표시다. 간수로는 주로 12세에서 20세까지의 시골 출신 문맹 소년들을 뽑아서 썼다. 세뇌(洗腦)하기 쉽고, 과격파 행동주의로 내몰기 쉬웠던 까닭이다.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하던 간수들의 상당수가 나중에는 뚜얼슬랭의 수감자가 되어 ‘어제까지의 동료’로부터 고문을 받고 거짓 자백서에 손도장을 찍은 뒤 맞아 죽었다. 아마도, 대다수의 다른 수감자처럼,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볼 때마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지만, 동정심이 일지 않는 사진도 있다. 발에 족쇄를 찬 채 어이없는 그러나 불안한 표정으로 철제 침대에 앉아 이쪽을 응시하는 한 남자의 전신사진이다. 폴 포트 아래서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코이 뚜인이다. 그는 1977년 뚜얼슬랭으로 끌려왔고, 다른 수감자처럼 ‘기생충’ 취급을 받은 뒤 지상에서 사라졌다.
1979년 1월, 크메르 루주의 수괴(首魁) 폴 포트는 잔당(殘黨)을 이끌고 태국과의 접경지대 산속으로 도망쳤다. 크메르 루주가 도망친 후 그 자리를 대신해 베트남의 후원으로 캄푸치아인민공화국(1979년 1월 7일~1989년 9월 25일)이 탄생하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1991년까지 유엔은 크메르 루주를 정통 정부로 인정했다.
폴 포트는 1997년 산중 반란 여파로 연금(軟禁)되었고 이듬해 82세를 일기로 병사(病死)했다. 독살(毒殺) 소문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청 아익 대량학살센터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는 ‘학살과 반인권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소(ECCC)를 설립했다. 2007년 7월 3일 S-21 교도소장 깡 겍이우(일명 뚝)를 기소, 2010년 7월 26일 35년 형을 선고했다. 생존자들의 법정 증언이 결정적 증거였다.
2011년 6월에는 크메르 루주 2인자 누온 체아(당시 나이 85세), 외무부 장관 이엥 사리(85), 그의 부인이자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엥 티릿(79), 키우 삼판(79) 전 국가주석 등을 재판에 회부했다. 이 중 자신의 만행을 공식적으로 사과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위에서 시키는 일을 명령에 따라 했을 뿐’이라는 변명만 했다. 이들은 대부분 재판 중에 고령으로 사망했다. 깡 겍이우는 감옥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현재는 키우 삼판만 살아 있다.
변명으로 일관하던 깡 겍이우의 경우,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청 아익 대량학살센터 안에 있는 킬링 트리 앞에서다. 크메르 루주는 처음엔 뚜얼슬랭 인근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묻었다.
시체가 늘어나면서 매장지가 부족했고, 간수들은 부패한 시신이 불러올지도 모를 전염병의 창궐을 걱정했다. 그래서 뚜얼슬랭에서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대량 학살지를 마련했다. 중국인 커뮤니티가 공동묘지로 사용하던 곳이다. 그들은 ‘죄수’들을 트럭으로 실어 날랐고, 죄수들은 대부분 도착 당일 처형되었다. 그곳이 청 아익 대량학살센터다.
킬링 트리
크메르 루주는 총알을 아낀다며 낫, 도끼, 몽둥이로 사람들을 살해했고, 비닐봉지로 얼굴을 감싸 묶어 질식사시키기도 했다. 그러고 구덩이를 판 뒤 수백 구의 시체를 밀어 넣었다. 추모센터 한가운데 17층 위령탑이 있다. 탑 안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유골이 가득하다. 철사에 묶인 뼈들도 있다. 발목, 팔목이 묶인 채로 살해당한 흔적이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비가 내리면 유골이 나온다고 한다. 유골을 발견하면 임의로 처리하지 말고 관리자에게 꼭 알려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킬링 트리는 이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곳이다. 말 그대로 커다란 나무다. 영유아들을 살해한 현장이다. 크메르 루주는 ‘잡초를 뽑으려면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며 어린아이 또한 무자비하게 죽였다. 아기들을 나무에 패대기치거나, 공중으로 던진 뒤 낙하하는 아기를 총검으로 찔렀다. 나무 표면에서 혈흔은 물론, 피부, 심지어는 뇌 조직도 나왔다. 깡 겍이우는 처음엔 모든 사실이 조작되었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과학적 증거를 들이밀자 잘못을 인정했다.
캄보디아 전역에 산재한 300여 곳의 수용소·학살 현장
청 아익 대량학살센터 앞에도 책을 파는 생존자가 있었다. 앙코르와트 인근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숨 리티(Sum Rithy) 할아버지다. 구글 번역기로 어렵게 인터뷰하는 중에 툭툭(삼륜차를 개조한 택시) 기사 퓌 솜밧 씨가 통역을 자청했다. 훌륭한 영어였다. 퓌 솜밧 씨는 1970년생으로, 본인도 크메르 루주 집권 시기 농촌으로 강제 이주, 소년 노동을 했다고 했다. 영어는 독학으로 배웠다. 국제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필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그는 “김정은이 스위스 유학생이라 좀 나아지려니 했는데, 하는 짓을 보면 자기 아버지보다 더하다. 공산당은 모두 똑같은 놈들이다”라고 했다. 김일성과 시아누크, 비동맹 등 1960~1970년대 이야기도 했다. 정보가 정교했다. 신문 구독 이외에, 따로 독서를 한 흔적이다. 이런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삶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숨 리티 할아버지가 갇혀 있던 앙코르와트 인근 수용소뿐 아니라, 캄보디아 전역엔 300곳이 넘는 수용소와 학살 현장이 있었다. 프놈펜 북동쪽으로 80km쯤 떨어진 베트남 접경지대의 주(州) 캄퐁참(현지 발음은 깜쁘엉짬에 가깝다). 캄보디아에 거주하며 사역 중인 김해준(金海俊·75) 목사가 프놈프로스 불교 사원으로 필자를 안내했다.
“지금은 주변을 메워 사원 마당으로 만들었지만, 예전엔 사원 건물 바로 앞이 낭떠러지였어요. 사람을 찌르고 바로 언덕 아래로 밀어버렸답니다. 바로 죽거나, 굴러 떨어지면서 죽는 거죠. 20년 전만 해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골들이 언덕 아래 벌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어요.”
김해준 목사가 절 앞 사자상(像)을 보여준다. 엉덩이 부분이 움푹 패 있다.
“크메르 루주 지역책임자가 여기다 대고 칼을 갈았답니다. 돌 사자상이 이렇게 팰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인명(人命)을 해친 걸까요. 언젠가는 팬 부분을 시멘트로 메워놓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역사의 교훈이라며 다시 그 부분을 걷어냈습니다.”
공산당에게 학살당한 김해준 목사의 아버지
김해준 목사는 기구한 인생의 인물이다. 경기고, 서울대를 나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수학 교수로 재직하다 어느 날 홀연히 캄보디아로 건너왔다. 1993년 12월에 처음 방문했고, 정착해서 산 지는 20년이 지났다. 캄퐁참의 한센인 환자 자녀들을 위해 세운 작은 학교가 지금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재학생 1000명이 넘는 국제학교로 커졌다. 캄퐁참 베델크리스천학교다. 그에게는 캄보디아로 와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저는 1947년생입니다. 1950년 5월에 대전에서 아버지가 좌익들에게 인민재판을 받고 맞아서 돌아가셨죠.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그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바로 돌아가신 건 아니고, 방으로 옮기고 서너 시간 사경(死境)을 헤매시다 절명(絶命)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아 있어요. 제가 11남매인데, 반공(反共) 가족이라며 공산당은 제 가족을 격리 수용했습니다. 갇혀 있던 곳에서 형 셋, 누나 두 분이 굶어서 돌아가시고 여섯 형제자매만 살아남았죠. 저를 자주 업어주던, 저 바로 위의 여섯 살 누님도 그때 돌아가셨어요. 킬링필드 참상을 접하고, 이 비극(悲劇)에 대해 알면 알수록 캄보디아 사람들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격동의 한국사가 투영된 가족사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의 가족사(家族史) 자체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이다. 공산당에게 타살당한 아버지는 김인표(金仁杓). 홍난파의 스승으로 우리 근대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만돌린 연주자다. 1920년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보니 음악동우회를 결성, 농촌 계몽운동에 나서는 김인표에 관한 기사가 여럿 보인다. 작은아버지는 일본제국 해군 장교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사망했다.
큰고모 김금덕(金今德·1909~ 1975년)은 의친왕(義親王) 자녀의 보육교사로 일하다 후궁이 되었고 의친왕의 다섯째 딸 이해경을 낳았다. 의친왕과 부부싸움 끝에 이혼을 요구하고 재혼한 뒤 제헌의회, 2대 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던 여걸이다. 말을 타고 장터를 돌며 선거운동한 일화도 유명하다. “여자가 어디서 대낮부터 뭔 짓 하느냐”는 촌로(村老)들의 비판에 “내가 지금 이렇게 해야 나중에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며 맞받아쳤던 신여성이다. 왕족과의 이혼도, 재혼도, 국회의원 출마도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 사건이다. 작은고모는 비전향 장기수다. 1947년 박헌영(朴憲永·1900~1955년)이 영구차 속 관에 숨어 월북(越北)할 때 관 옆을 지켰던 당사자라고 한다. 전향을 거부하다 2003년 무렵 사망했다.
“6·25동란과 마찬가지로, 킬링필드 참상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잖습니까. 여기 사람들의 아픔을 제가 먼저 체험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치유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김해준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1993년 첫 방문 때만 해도 내전(內戰)이 진행 중이었다. 나라 곳곳에 2000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었고, 도농(都農)을 막론하고 대낮에도 노상강도가 출몰했다고 한다.
“동네 강도들의 무장 수준이 수류탄, AK-47 소총이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교회 올 때도 다들 총 한 자루씩 차고 출석했습니다. 방아쇠가 없는 사용 불가한 총이라도 다들 메고 왔어요. 무기 든 걸 보여줘야 강도가 접근을 못 할 것 아닙니까. 일종의 신변 보호장치였던 셈이죠.”
캄보디아의 새마을운동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곳에 김해준 목사가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만든 이유가 있다. 캄보디아의 미래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싶어서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절대 빈곤 국가이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다진 분입니다. 국내외의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부정적 평가와도 맞서며 지도력을 발휘했죠. ‘열심히 일하면 잘살게 된다’… 말뿐이 아닌 실천을 통해 이걸 현실에서 구현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랜 내전과 대규모 학살로 캄보디아는 매우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같은 지도자가 나와서 캄보디아가 잘살게 되면,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풍요로 이어질 겁니다. 캄보디아 국민 전체가 킬링필드 때문에 입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되겠죠. 그래서 이 학교를 통해 캄보디아를 풍요롭게 만드는 미래의 지도자가 꼭 나오기를 희망합니다.”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 안성일(安成日) 새마을운동중앙회 국제협력국장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산주의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농촌을 잘살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마을운동과 같은 거국적 정신운동이 일어난다면, 캄보디아도 중진국으로 도약하고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일이 가능합니다.”
새마을운동중앙회는 대한민국의 성공사례 노하우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기관이다. 3월 말 10개국 16명의 새마을 협력관을 초청해 교육하고, 4월 2일부터 11일까지는 캄보디아 새마을 협력관만을 불러 새마을 정신을 알릴 예정이다. 4월에는 라오스로 날아가 새마을 시범 마을을 둘러볼 계획도 있다.
“천연두(天然痘)는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심각한 전염병이었지만, 인류의 노력으로 지구상에서 없애버렸습니다. 새마을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면, 자조, 협동을 통해 가난을 없애버리는 운동이니까요.”
박정희의 일기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가 나온 김에 대통령의 일기(日記)를 잠깐 살펴보자. 크메르 루주 집권 후 1년쯤 지난 1976년 4월 24일(토)에 쓴 일기다.
〈작금 지상(紙上)과 방송을 통하여, 공산화된 크메르에서 자행되는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은 지 1년간에, 크메르 인구의 약 1할에 가까운 50만~60만 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6·25를 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이기에 크메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천인공노할 이 참상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의분(義憤)을 금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이와 같은 잔인무도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전(全) 인류가 특히 툭하면 남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평화니 인도(人道)니를 찾던 각국의 인사들, 언론·종교단체, 무슨 무슨 옹호 단체들이 어찌하여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다는 그 자체가 더욱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소위 세계평화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 모양인지? 모든 것이 다 위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만 한다. 크메르의 참상을 들으면서 나의 머리에서 문득 떠오르고 잊히지 않는 일은, 작년 이 무렵 크메르가 적화되자 서울에 와 있던 크메르 대사관 직원들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대사와 기타 몇몇 고급 직원들은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밖의 하급 직원들은 본국이 공산화되었더라도 자기들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우리 정부에서 여비를 도와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그 후 그들이 방콕을 경유, 본국으로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사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이 있을 줄이야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 포악할까? 인류 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주의(主義)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용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 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주와 똑같은 살인 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니 조국이니 통일이니 연방제가 어떠니 하고 광적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재니 파쇼니 비방을 하고 돌아다니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조갑제, 《박정희: 한 근대혁명가의 비장한 생애 12》에서 인용)
귀국 외교관들, 공항에서 전원 사살
박정희 대통령이 걱정했던 귀국 크메르 외교관들은 다 죽었다. 크메르 루주는 외국에 거주하던 외교관 등 유력 인사들을 귀국시켰다. 가족과 친지에게 귀국을 설득하라고 했다. 방콕에서 출발한 전세기가 프놈펜에 착륙하자 탑승객을 공항에서 전원 사살한 기록이 있다.
뚜얼슬랭엔 크메르 루주가 파괴한 축구장 사진도 있다. 운동 경기는 서구(西歐)의 산물이며 현대 문명의 발명품이라고 여겼기에 그들은 운동선수들을 마구 학살했다. 외국에 다녀온 국가대표들은 외국 문물을 접한 ‘혁명의 적’이기도 했다. 필자의 어린 시절, 직접 눈으로 봤던 선수들이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렇다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인구의 4분의 1이 죽었으니, 거의 모든 캄보디아 사람의 가슴엔 우물보다 깊은 상처가 있는 것이다.
캄보디아 국영 TV는 KBS의 이산가족 찾기 같은 상봉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지구 곳곳으로 흩어졌다 40여 년 만에 만난 가족들은 각자의 기구한 사연을 들으며 펑펑 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형, 동생, 누나, 오빠가 살아 있다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상황을 지켜본 누군가의 입을 통해 당시의 사연을 듣고 또 한 번 운다.
‘나도 소년병이었다’
용서는 가능할까? 캄퐁떰 마을 한 주민의 기막힌 사연을 읽고 판단해보시기 바란다. 크메르 루주 몰락 후 빠이 여인은 새 남편을 만나 30년 이상을 함께 살았다. 새 남편 삔이 크메르 루주 조직원이었다는 건 결혼 전에 알았다. 그런데 훗날 조사 과정에서 빠이의 전 남편을 살해한 당사자가 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제기구가 학살 과정을 조사할 때, 삔은 자기가 사람들을 죽이고 묻은 장소를 지목했고, 그곳에서 한쪽 다리가 없는 유골이 나왔다. 장애인이던 빠이 전 남편의 유골이었다. 한쪽 팔뼈가 부러져 있었고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었다. 죽음에 이르도록 ‘물리적 타격’을 가한 흔적이었다. 삔의 동료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삔과 빠이는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다. 삔은 정기적으로 절에 가서 스님들을 도우며 속죄를 하고 있다. 뚜얼슬랭의 소년 생존자 노릉 참 팔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김해준 목사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전도 집회를 마친 어느 날 심야에 교회로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저 같은 죄인도 살 수 있습니까?’라고 묻더군요. 크메르 루주 소년병 출신이었어요. 사람도 많이 죽였고, 주변엔 죄책감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한 동료들도 많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모든 걸 고하고 피해자들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빌자고 했어요. 그분이 간증하는데,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좌중(座中)이 물을 끼얹듯 조용해졌지요. 간증이 끝나고 오른쪽 뒤에서 한 분이 조용히 일어서더군요. 자기도 크메르 루주 소년병이었다는 겁니다. 왼쪽에서도,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에게 알리듯이요. 1979년 이후 과거를 숨기고 살았던 사람들이 생전 처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도 소년병이었다’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빈 겁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용서는 쉽지 않지만 희망은 있다. 새마을운동에 헌신하는 공무원이 있고, 《월간조선》 2022년 10월호에 나온 찌링 보툼 랑세이 주한 캄보디아왕국 대사 같은 인재도 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지만, 호주로 이민 간 고모 덕에 외국에서 고학(苦學)할 기회를 잡은 랑세이 대사는 ‘내가 받은 혜택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겠다’는 공공의식이 투철하다. 기업인이냐 공직이냐 갈림길에 놓였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 찌링아! 큰돈 버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서 일해라’고 했단다. ‘총칼 대신 토지 소유권으로 농민을 잘사는 길로 인도했다’는 인터뷰 기사에선 이승만(李承晩)의 토지개혁과 박정희의 경제개발 의지가 떠오른다.
필자가 만났던 툭툭 운전사 퓌 솜밧 씨는 “어려서 소원이 학교에 다니고 책을 마음껏 읽는 것이었는데, 크메르 루주가 학교와 책을 다 없애서 하지 못했다”면서 “우리 다음 세대에는 나의 한(恨)을 더 이상 물려줄 수 없다”고 했다.
베델학교의 고등학생들에게 인터뷰를 청하니 앞자리 여학생 세 명이 적극적으로 손을 들었다. 호 반리다(Hor Vanlida), 크리 애나(Kry Anna), 썽 시위로아(Soeng Sivhor)다. 학생들은 유창한 영어로 자기들의 생각을 똑 부러지게 밝혔다. 호 반리다와 썽 시위로아는 대학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공부할 생각이다. 지역사회와 나라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크리 애나는 아직 전공을 정하지 못했지만, 후배와 미래 세대를 위한 직업을 갖고 싶다고 했다. BTS와 블랙핑크 같은 한국 아티스트, K드라마도 좋아한다. K드라마의 경우, 배우들이 멋있기도 하고, 스토리가 정교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발전하면 사람들이 저렇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세 학생 모두 “기회가 닿으면 꼭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한국도 못 사는 나라였다가 지금처럼 발전했으니 캄보디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앞선 지식을 배우면, 그리고 그 지식을 고국에 돌아와 풀어놓으면 그만큼 캄보디아도 빨리 발전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고, 공동체에 기여하겠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나라는 퇴보하지 않으리라. 캄보디아는 이제 화해와 용서, 그리고 미래와 희망(希望)의 땅이다. 이제는 마음껏 꿈을 꿀 수 있는 나라다. 그들의 꿈을 응원한다. 대한민국은 캄보디아의 응원단이다.⊙
‘붉은 크메르’는 정권을 잡은 뒤 급진적 정책을 도입했다. 자기들은 정의(正義)롭고 도덕적(道德的) 존재이기에, 거의 모든 국민이 자신들을 지지한다고 확신했다. 그들이 꿈꾼 것은 외부와 격절(隔絶)한 원시농촌공동체(原始農村共同體)였다. 그래서 급격한 대규모 사회 개조와 인간 개조를 통해 단번에 이상적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했다. 이것이 ‘붉은 크메르’가 생각한 ‘정의’였다. 연호(年號)도 새로 정했다. ‘0년(Year Zero)’이다. 외세(外勢), 권력층, 자본가 등 기득권 세력을 오로지 자신들의 힘으로 타도했다고 믿은 자의 무모한 오만이었다.
크메르 루주의 내로남불
크메르 루주는 ‘정의’의 생산, 유통, 분배를 오직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체제는 물론, 역사, 문화, 관습 등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모든 것을 적폐(積弊)이자 박멸(撲滅) 대상이라 여겼다. 문명의 상징인 도시는 그래서 그들에게 ‘혁명의 적’이었다. 도시 거주민뿐 아니라 도시 자체가 청산 대상이었다.
집권 직후 그들은 도시민들에게 강제 퇴거를 명령했다. 농촌마다 집단농장을 조직했으니, 그곳까지 걸어가라고 했다. 오랜 내전(內戰)으로 수많은 농촌 출신이 도시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무리하고 무모한 이동, 농장에서의 강제 노동과 영양 부족으로 무수한 인명이 죽어 나갔다.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인정하지 않고, 기계 사용을 금지하니 생산성이 떨어졌다. 비전문가의 간섭도 사정을 악화시켰다. ‘쌀 생산량을 즉각 3배로 증산하라’는 크메르 루주의 명령은 실현될 길이 없었다. 식량 수출국이던 캄보디아가 만성적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나라가 된 건 ‘붉은 크메르’의 집권 이후부터다.
이건 그들의 기대와 예측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깃발’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다른 생각을 많이 하는 혁명의 적’인 지식인이 제1차 박멸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변호사, 의사, 교사 등 지식인을 거리낌 없이 체포하고, 고문하고, 살해했다. 그들이 죽여 없애야 한다며 정의(定義)한 ‘지식인’의 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문직 종사자는 물론, 수녀, 승려 등 종교인, 손에 굳은살이 없는 사람, 안경 쓴 사람도 ‘지식인’으로 분류했다. 책을 똑바로 든 사람은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증거여서, 시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은 ‘교육을 받은 자’라는 증거여서 모두 죽였다. ‘한 사람의 적을 놓치는 것보다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낫다’는 ‘붉은 크메르’의 기본 신념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다.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인 폴 포트 자신도 프랑스 유학파였고, 각료 중에도 지식인과 안경 착용자가 있었지만, 그들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일반인에게 적용하는 기준은 같지 않았다. 외국인도 ‘새롭고 순수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방해물이어서 다 죽였다. 외국인 친구가 있는 캄보디아 사람도 다 죽였다. CIA와 KGB 첩자로 몰아서 죽였다.
1979년 1월 7일까지 3년 8개월 20일 동안 ‘붉은 크메르’는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00만 명 정도의 인명을 살상했다.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毛澤東)을 능가하는 인류 최악의 대학살(大虐殺)이다.
고문당할 때 비명 지르면 추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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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얼슬랭 마당. 앞의 구조물은 고문 형틀로 쓰이던 철봉, 뒤에 보이는 건물이 취조 및 고문실로 쓰이던 A동이다. |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 ‘조금이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즉각 대답하라’ ‘혐의를 부인하지 마라’ 등의 ‘규칙’ 중에는, ‘얻어맞거나 전기 고문을 당할 때 비명을 지르지 마라’는 조항도 있다. 조금이라도 비명을 지르면 10회의 채찍질 혹은 5회의 전기 고문을 더 당한다는 추가 설명도 있다. ‘죄수’들은 족쇄에 발이 묶인 채 밤낮 없는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다. 물고문은 하수도 물과 인분을 섞은 물로 자행했으며, 형틀에 전신을 고정하고 손톱, 발톱을 뽑는 고문은 ‘원하는 자백’을 얻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채찍질, 몽둥이질로 갈라진 상처에 소금물을 붓는 것은 ‘치료와 고문’을 동시에 수행하는 획기적 기술이었다. 죄수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혹여 감방 바닥에 대소변을 흘리면 혀로 핥아 깨끗이 청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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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이 고문에 못 이겨 투신하자 크메르 루주는 자살방지용으로 철조망을 쳤다. |
뚜얼슬랭에는 1만2000~2만 명 사이의 사람들이 수감되었지만, 단 12명만 살아남았다. 어른 일곱, 어린이 다섯이다. 기록에 따라 생존자 수가 11명이라고 나오는 이유는, 가장 어린 생존자였던 생후 4개월의 영아(嬰兒)가 구출 후 며칠 만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입성(入城)하자, 교도소장, 간수 등 관리자들은 황급히 도망쳤다. 그들은 남아 있는 ‘죄수’들을 인근 건물로 소개(疏開)한 뒤 그곳에서 살해하기도 했다.
기록에 집착했던 크메르 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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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얼슬랭 고문실 안 철제 침대. 족쇄, 변기통 등이 남아 있다. |
수습한 시신 14구는 지금 박물관 마당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 무덤에 묻혀 있다. 생존자 중 3명은 박물관 구내에서 자신들의 증언집을 판매하고 있다. 화가 보우 멩(Bou Meng), 기능공 쭘 메이(Chum Mey), 그리고 구출 당시 8세였던 노릉 찬 팔(Norng Chan Phal)이다. 1941년생인 보우 멩은 폴 포트 등 크메르 루주 지도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에 동원된 덕에, 쭘 메이는 타이프라이터 수리 작업에 동원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아내와 자녀들이 학살당했으며, 1979년 1월 7일 간수들에 의해 모처로 끌려가다 야음을 틈타 도망쳤다.
현대 문명을 적대시한 크메르 루주가 타이프라이터? ‘붉은 크메르’는 기록에 집착했다. 모든 간수와 수감자의 사진을 찍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수감자를 고문한 후, 그들의 일생을 기록한 두툼한 ‘자백서’를 만들었다. 급히 도망가느라 미처 다 소각하지 못한 수많은 ‘자백서’는 지금도 읽을 수 있다.
서류로 남기면 없던 일들이 ‘실제 일어났던 사실’이 된다고 믿었던 것일까. 개인의 일상 행동 및 발언, 조상, 가족, 친지의 성향을 일일이 조사하고 이를 문서로 만들어 보관하며, 신분제(身分制) 유지의 기본 자료로 악용하는 북한 김씨 왕조의 폭압 통치와 크메르 루주의 학살 사이 공통분모는 바로 이 ‘문건(文件)’이다. 그들 자신이 ‘무산자(無産者)가 아니라 사이비 지식인’이라는 뚜렷한 증거다. 그릇된 신념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오만한 권력의 결합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더구나 스스로를 선민(選民)이며 특권계급(特權階級)이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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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정 속에서 사랑을 꽃 피운 보파나. 수용소로 끌려와 25세 때 처형되었다. |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뚜얼슬랭으로 끌려와 죽었다. 떨어져 살면서, 보파나와 시타가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반역의 증거’였다. 편지도 문제였지만, 편지 내용은 더 문제였다. 일단 두 사람이 글을 쓰고 읽을 줄 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반역이었다. 게다가, 시타와 보파나는 셰익스피어 등의 고전 작품을 인용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영어와 불어가 구사된, ‘배운 사람’이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가족조차 해체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크메르 루주에게, 10대에 이미 결혼을 약속하고 오랫동안 사랑의 감정을 이어가고 있는, 당의 감시를 피해 사적(私的)으로 소통하는 두 남녀 지식인은 도저히 살려둘 수 없는 존재였다. 사랑과 경배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국가와 당뿐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존경하는 것조차 반역의 징후라고 여긴 집단이 크메르 루주다. 남편 시타는 밀고자의 고발로 어딘가로 끌려가 바로 살해되었고, 아내 보파나는 1976년 10월 12일 뚜얼슬랭으로 끌려와 1977년 3월 18일 사형당했다. 25세, 꽃다운 나이였다.
이들 부부의 사연은 1996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캄보디아계 프랑스 감독 릿티 판(Rithy Pann)이 만든 〈보파나: 어느 캄보디아인의 비극(Bophana: A Cambodian Tragedy)〉이다.
뚜얼슬랭 자료실에 보관 중인 이들의 연애편지와 허위 자백서, 그리고 이들의 생애를 담은 일대기도 책으로 나왔다.
12~20세의 시골 출신 문맹 간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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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주 소년병. 12~20대 초반 시골 출신 문맹자가 다수로, 크메르 루주에 맹목적으로 충성했다. |
사진 한 장 한 장을 볼 때마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지만, 동정심이 일지 않는 사진도 있다. 발에 족쇄를 찬 채 어이없는 그러나 불안한 표정으로 철제 침대에 앉아 이쪽을 응시하는 한 남자의 전신사진이다. 폴 포트 아래서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코이 뚜인이다. 그는 1977년 뚜얼슬랭으로 끌려왔고, 다른 수감자처럼 ‘기생충’ 취급을 받은 뒤 지상에서 사라졌다.
1979년 1월, 크메르 루주의 수괴(首魁) 폴 포트는 잔당(殘黨)을 이끌고 태국과의 접경지대 산속으로 도망쳤다. 크메르 루주가 도망친 후 그 자리를 대신해 베트남의 후원으로 캄푸치아인민공화국(1979년 1월 7일~1989년 9월 25일)이 탄생하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1991년까지 유엔은 크메르 루주를 정통 정부로 인정했다.
폴 포트는 1997년 산중 반란 여파로 연금(軟禁)되었고 이듬해 82세를 일기로 병사(病死)했다. 독살(毒殺) 소문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는 ‘학살과 반인권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소(ECCC)를 설립했다. 2007년 7월 3일 S-21 교도소장 깡 겍이우(일명 뚝)를 기소, 2010년 7월 26일 35년 형을 선고했다. 생존자들의 법정 증언이 결정적 증거였다.
2011년 6월에는 크메르 루주 2인자 누온 체아(당시 나이 85세), 외무부 장관 이엥 사리(85), 그의 부인이자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엥 티릿(79), 키우 삼판(79) 전 국가주석 등을 재판에 회부했다. 이 중 자신의 만행을 공식적으로 사과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위에서 시키는 일을 명령에 따라 했을 뿐’이라는 변명만 했다. 이들은 대부분 재판 중에 고령으로 사망했다. 깡 겍이우는 감옥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현재는 키우 삼판만 살아 있다.
변명으로 일관하던 깡 겍이우의 경우,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청 아익 대량학살센터 안에 있는 킬링 트리 앞에서다. 크메르 루주는 처음엔 뚜얼슬랭 인근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묻었다.
시체가 늘어나면서 매장지가 부족했고, 간수들은 부패한 시신이 불러올지도 모를 전염병의 창궐을 걱정했다. 그래서 뚜얼슬랭에서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대량 학살지를 마련했다. 중국인 커뮤니티가 공동묘지로 사용하던 곳이다. 그들은 ‘죄수’들을 트럭으로 실어 날랐고, 죄수들은 대부분 도착 당일 처형되었다. 그곳이 청 아익 대량학살센터다.
킬링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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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아익 대량학살센터 내 킬링 트리. 아기들을 패대기쳐 죽인, 끔찍한 사연이 깃든 나무다. 아기들을 추모하는 팔찌가 걸려 있다. |
킬링 트리는 이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곳이다. 말 그대로 커다란 나무다. 영유아들을 살해한 현장이다. 크메르 루주는 ‘잡초를 뽑으려면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며 어린아이 또한 무자비하게 죽였다. 아기들을 나무에 패대기치거나, 공중으로 던진 뒤 낙하하는 아기를 총검으로 찔렀다. 나무 표면에서 혈흔은 물론, 피부, 심지어는 뇌 조직도 나왔다. 깡 겍이우는 처음엔 모든 사실이 조작되었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과학적 증거를 들이밀자 잘못을 인정했다.
캄보디아 전역에 산재한 300여 곳의 수용소·학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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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말하는 툭툭 운전사 퓌 솜밧 씨. 소년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었다고 한다. |
숨 리티 할아버지가 갇혀 있던 앙코르와트 인근 수용소뿐 아니라, 캄보디아 전역엔 300곳이 넘는 수용소와 학살 현장이 있었다. 프놈펜 북동쪽으로 80km쯤 떨어진 베트남 접경지대의 주(州) 캄퐁참(현지 발음은 깜쁘엉짬에 가깝다). 캄보디아에 거주하며 사역 중인 김해준(金海俊·75) 목사가 프놈프로스 불교 사원으로 필자를 안내했다.
“지금은 주변을 메워 사원 마당으로 만들었지만, 예전엔 사원 건물 바로 앞이 낭떠러지였어요. 사람을 찌르고 바로 언덕 아래로 밀어버렸답니다. 바로 죽거나, 굴러 떨어지면서 죽는 거죠. 20년 전만 해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골들이 언덕 아래 벌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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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전역, 300여 곳 학살 현장 중 하나인 캄퐁참 프놈프로스 사원의 사자상. 사람들을 죽일 때마다 칼을 갈아 사자상 오른쪽 엉덩이가 움푹 패었다. |
“크메르 루주 지역책임자가 여기다 대고 칼을 갈았답니다. 돌 사자상이 이렇게 팰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인명(人命)을 해친 걸까요. 언젠가는 팬 부분을 시멘트로 메워놓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역사의 교훈이라며 다시 그 부분을 걷어냈습니다.”
공산당에게 학살당한 김해준 목사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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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20년째 선교 중인 김해준 목사(오른쪽 끝). |
“저는 1947년생입니다. 1950년 5월에 대전에서 아버지가 좌익들에게 인민재판을 받고 맞아서 돌아가셨죠.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그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바로 돌아가신 건 아니고, 방으로 옮기고 서너 시간 사경(死境)을 헤매시다 절명(絶命)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아 있어요. 제가 11남매인데, 반공(反共) 가족이라며 공산당은 제 가족을 격리 수용했습니다. 갇혀 있던 곳에서 형 셋, 누나 두 분이 굶어서 돌아가시고 여섯 형제자매만 살아남았죠. 저를 자주 업어주던, 저 바로 위의 여섯 살 누님도 그때 돌아가셨어요. 킬링필드 참상을 접하고, 이 비극(悲劇)에 대해 알면 알수록 캄보디아 사람들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격동의 한국사가 투영된 가족사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의 가족사(家族史) 자체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이다. 공산당에게 타살당한 아버지는 김인표(金仁杓). 홍난파의 스승으로 우리 근대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만돌린 연주자다. 1920년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보니 음악동우회를 결성, 농촌 계몽운동에 나서는 김인표에 관한 기사가 여럿 보인다. 작은아버지는 일본제국 해군 장교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사망했다.
큰고모 김금덕(金今德·1909~ 1975년)은 의친왕(義親王) 자녀의 보육교사로 일하다 후궁이 되었고 의친왕의 다섯째 딸 이해경을 낳았다. 의친왕과 부부싸움 끝에 이혼을 요구하고 재혼한 뒤 제헌의회, 2대 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던 여걸이다. 말을 타고 장터를 돌며 선거운동한 일화도 유명하다. “여자가 어디서 대낮부터 뭔 짓 하느냐”는 촌로(村老)들의 비판에 “내가 지금 이렇게 해야 나중에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며 맞받아쳤던 신여성이다. 왕족과의 이혼도, 재혼도, 국회의원 출마도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 사건이다. 작은고모는 비전향 장기수다. 1947년 박헌영(朴憲永·1900~1955년)이 영구차 속 관에 숨어 월북(越北)할 때 관 옆을 지켰던 당사자라고 한다. 전향을 거부하다 2003년 무렵 사망했다.
“6·25동란과 마찬가지로, 킬링필드 참상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잖습니까. 여기 사람들의 아픔을 제가 먼저 체험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치유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김해준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1993년 첫 방문 때만 해도 내전(內戰)이 진행 중이었다. 나라 곳곳에 2000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었고, 도농(都農)을 막론하고 대낮에도 노상강도가 출몰했다고 한다.
“동네 강도들의 무장 수준이 수류탄, AK-47 소총이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교회 올 때도 다들 총 한 자루씩 차고 출석했습니다. 방아쇠가 없는 사용 불가한 총이라도 다들 메고 왔어요. 무기 든 걸 보여줘야 강도가 접근을 못 할 것 아닙니까. 일종의 신변 보호장치였던 셈이죠.”
캄보디아의 새마을운동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곳에 김해준 목사가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만든 이유가 있다. 캄보디아의 미래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싶어서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절대 빈곤 국가이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다진 분입니다. 국내외의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부정적 평가와도 맞서며 지도력을 발휘했죠. ‘열심히 일하면 잘살게 된다’… 말뿐이 아닌 실천을 통해 이걸 현실에서 구현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랜 내전과 대규모 학살로 캄보디아는 매우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같은 지도자가 나와서 캄보디아가 잘살게 되면,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풍요로 이어질 겁니다. 캄보디아 국민 전체가 킬링필드 때문에 입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되겠죠. 그래서 이 학교를 통해 캄보디아를 풍요롭게 만드는 미래의 지도자가 꼭 나오기를 희망합니다.”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 안성일(安成日) 새마을운동중앙회 국제협력국장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산주의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농촌을 잘살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마을운동과 같은 거국적 정신운동이 일어난다면, 캄보디아도 중진국으로 도약하고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일이 가능합니다.”
새마을운동중앙회는 대한민국의 성공사례 노하우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기관이다. 3월 말 10개국 16명의 새마을 협력관을 초청해 교육하고, 4월 2일부터 11일까지는 캄보디아 새마을 협력관만을 불러 새마을 정신을 알릴 예정이다. 4월에는 라오스로 날아가 새마을 시범 마을을 둘러볼 계획도 있다.
“천연두(天然痘)는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심각한 전염병이었지만, 인류의 노력으로 지구상에서 없애버렸습니다. 새마을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면, 자조, 협동을 통해 가난을 없애버리는 운동이니까요.”
박정희의 일기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가 나온 김에 대통령의 일기(日記)를 잠깐 살펴보자. 크메르 루주 집권 후 1년쯤 지난 1976년 4월 24일(토)에 쓴 일기다.
〈작금 지상(紙上)과 방송을 통하여, 공산화된 크메르에서 자행되는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은 지 1년간에, 크메르 인구의 약 1할에 가까운 50만~60만 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6·25를 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이기에 크메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천인공노할 이 참상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의분(義憤)을 금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이와 같은 잔인무도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전(全) 인류가 특히 툭하면 남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평화니 인도(人道)니를 찾던 각국의 인사들, 언론·종교단체, 무슨 무슨 옹호 단체들이 어찌하여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다는 그 자체가 더욱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소위 세계평화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 모양인지? 모든 것이 다 위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만 한다. 크메르의 참상을 들으면서 나의 머리에서 문득 떠오르고 잊히지 않는 일은, 작년 이 무렵 크메르가 적화되자 서울에 와 있던 크메르 대사관 직원들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대사와 기타 몇몇 고급 직원들은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밖의 하급 직원들은 본국이 공산화되었더라도 자기들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우리 정부에서 여비를 도와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그 후 그들이 방콕을 경유, 본국으로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사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이 있을 줄이야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 포악할까? 인류 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주의(主義)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용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 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주와 똑같은 살인 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니 조국이니 통일이니 연방제가 어떠니 하고 광적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재니 파쇼니 비방을 하고 돌아다니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조갑제, 《박정희: 한 근대혁명가의 비장한 생애 12》에서 인용)
귀국 외교관들, 공항에서 전원 사살
박정희 대통령이 걱정했던 귀국 크메르 외교관들은 다 죽었다. 크메르 루주는 외국에 거주하던 외교관 등 유력 인사들을 귀국시켰다. 가족과 친지에게 귀국을 설득하라고 했다. 방콕에서 출발한 전세기가 프놈펜에 착륙하자 탑승객을 공항에서 전원 사살한 기록이 있다.
뚜얼슬랭엔 크메르 루주가 파괴한 축구장 사진도 있다. 운동 경기는 서구(西歐)의 산물이며 현대 문명의 발명품이라고 여겼기에 그들은 운동선수들을 마구 학살했다. 외국에 다녀온 국가대표들은 외국 문물을 접한 ‘혁명의 적’이기도 했다. 필자의 어린 시절, 직접 눈으로 봤던 선수들이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렇다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인구의 4분의 1이 죽었으니, 거의 모든 캄보디아 사람의 가슴엔 우물보다 깊은 상처가 있는 것이다.
캄보디아 국영 TV는 KBS의 이산가족 찾기 같은 상봉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지구 곳곳으로 흩어졌다 40여 년 만에 만난 가족들은 각자의 기구한 사연을 들으며 펑펑 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형, 동생, 누나, 오빠가 살아 있다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상황을 지켜본 누군가의 입을 통해 당시의 사연을 듣고 또 한 번 운다.
‘나도 소년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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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아익 추모센터 밖 풍경.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판매하고 있다. |
김해준 목사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전도 집회를 마친 어느 날 심야에 교회로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저 같은 죄인도 살 수 있습니까?’라고 묻더군요. 크메르 루주 소년병 출신이었어요. 사람도 많이 죽였고, 주변엔 죄책감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한 동료들도 많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모든 걸 고하고 피해자들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빌자고 했어요. 그분이 간증하는데,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좌중(座中)이 물을 끼얹듯 조용해졌지요. 간증이 끝나고 오른쪽 뒤에서 한 분이 조용히 일어서더군요. 자기도 크메르 루주 소년병이었다는 겁니다. 왼쪽에서도,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에게 알리듯이요. 1979년 이후 과거를 숨기고 살았던 사람들이 생전 처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도 소년병이었다’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빈 겁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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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캄퐁참 베델크리스천 스쿨의 여고생들. |
필자가 만났던 툭툭 운전사 퓌 솜밧 씨는 “어려서 소원이 학교에 다니고 책을 마음껏 읽는 것이었는데, 크메르 루주가 학교와 책을 다 없애서 하지 못했다”면서 “우리 다음 세대에는 나의 한(恨)을 더 이상 물려줄 수 없다”고 했다.
베델학교의 고등학생들에게 인터뷰를 청하니 앞자리 여학생 세 명이 적극적으로 손을 들었다. 호 반리다(Hor Vanlida), 크리 애나(Kry Anna), 썽 시위로아(Soeng Sivhor)다. 학생들은 유창한 영어로 자기들의 생각을 똑 부러지게 밝혔다. 호 반리다와 썽 시위로아는 대학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공부할 생각이다. 지역사회와 나라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크리 애나는 아직 전공을 정하지 못했지만, 후배와 미래 세대를 위한 직업을 갖고 싶다고 했다. BTS와 블랙핑크 같은 한국 아티스트, K드라마도 좋아한다. K드라마의 경우, 배우들이 멋있기도 하고, 스토리가 정교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발전하면 사람들이 저렇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세 학생 모두 “기회가 닿으면 꼭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한국도 못 사는 나라였다가 지금처럼 발전했으니 캄보디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앞선 지식을 배우면, 그리고 그 지식을 고국에 돌아와 풀어놓으면 그만큼 캄보디아도 빨리 발전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고, 공동체에 기여하겠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나라는 퇴보하지 않으리라. 캄보디아는 이제 화해와 용서, 그리고 미래와 희망(希望)의 땅이다. 이제는 마음껏 꿈을 꿀 수 있는 나라다. 그들의 꿈을 응원한다. 대한민국은 캄보디아의 응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