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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본에선

일본 좌파의 몰락

일본 좌파 정당-언론, 북한 옹호하다가 동반 몰락

글 : 리 소데쓰  류코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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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좌파, 일본 좌파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 일본사회당, “(일본인) 납치는 한국 안기부가 각본 쓰고 《산케이신문》이 각색한, ‘창작된 이야기’”
⊙ 사회당, 김일성과의 만남에서 의원이 기립해 대답할 정도로 김일성에게 굴종
⊙ “사회당이 몰락한 것은 시대 흐름을 통찰하는 능력 결여, 사회·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 못 한 탓”(다나카 히데유키)
⊙ 《아사히신문》, 親사회당-親北反韓으로 일관하다가 좌파와 함께 몰락
⊙ 강원용 목사, “공산주의에 대해 소박하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 돼”

리 소데쓰
1959년생. 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졸업, 日 조치대 신문학 박사 / 中 《흑룡강일보》 기자, 日 《테레케이블신문》 기자, (주)도호오(東方)실업·(유)중국경제발전연구소 대표이사, 조치대 국제관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푸단(復旦)대 신문학과 객좌교수 역임. 現 류코쿠대학 사회학부 교수 / 저서 《김정은 체제 왜 붕괴되지 않는가》 《한·중·일 한자문화, 어디로 가는가》 《일중한 미디어의 충돌》 《만주에 있어서의 일본인 경영 신문의 역사》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인 경영 신문의 역사》 등
《아사히신문》은 2014년 8월 5일 위안부 강제연행 관련 오보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필자는 ‘좌(左)’도 ‘우(右)’도 아닌 분을 보았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강원용(姜元龍·1917~2006년) 목사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을 것이다. 강 목사님은 필자에게는 스승이요 어버이 같은 분이다. 필자가 결혼식을 앞두고 목사님께 편지를 보냈더니 그 바쁘신 와중에 도쿄로 날아와 평생 잊지 못할 말씀을 해주셨다.
 
  “인간은 정적(情的)인 사고(思考)와 지적(知的)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정적인 사고의 레벨이 높아지면 지적인 사고는 낮아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정적인 사고가 자신을 지배할 때는 그릇된 판단을 하기 쉽다.”
 
  그때 필자는 도쿄(東京)에서 박사 학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앞날이 전혀 확실하지 않았고 현실 또한 막막한 상태였다.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며 학비까지 마련해야 하는 주제에 결혼을 한다니 걱정이 됐을 것이다.
 
 
  강원용 목사와의 만남
 
  강원용 목사님은 평생을 같이한 부인 김명주 여사와 23세에 결혼, 1940년 일본 유학을 떠났는데 그때 부인은 임신한 몸이었다. 배에서 멀미를 심하게 한데다 피로가 겹쳐서 복막염을 앓게 되었고 결국 도중에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만주 북간도 용정(龍井·지금의 연변조선족 자치주 용정시)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필자가 강원용 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1991년이다. 그해 9월 필자는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유학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국에 가기 전에 어머님도 뵙고 친지들께 인사도 할 겸 중국을 방문했다. 귀국 전날 베이징(北京)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동훈(董勳) 전 통일원 차관이 “강원용 목사님이 부인을 동반해 중국을 방문하니 안내를 부탁한다”고 했다. 필자는 그때까지 강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다.
 
  강 목사님은 젊은 날의 추억이 남아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 용정 근교의 명동촌을 둘러보려고 중국을 찾았던 것이다. 명동촌에는 강 목사님이 다녔던 은진중학교 유적이 남아 있었고 농민계몽을 위해 야학(夜學)을 열었던 오두막 집터도 남아 있다고 들었다.
 

  필자는 귀국편 항공권을 버리고 강 목사님 부부를 모시고 연변을 방문했다. 그때 지금의 아내와 만났다. 목사님은 필자로 하여금 미국 유학을 포기하는 대신 아내를 만나게 해준 셈이다.
 
  그런 인연이 있어 강원용 목사님은 필자를 만날 때마다 아내의 안부를 물으시고, 또 아내를 만나면 손녀처럼 귀여워해주셨다. 첫 딸애를 안고 목사님이 계시는 수유리 크리스천아카데미를 찾아갔을 때는 “애는 하나면 돼”라며 “더 낳지 말라”고 하셨다. 둘째 아기를 안고 갔더니 그냥 웃으시며 “이젠 됐어”라고 하셨다.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
 
  그 당시 필자는 한국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강 목사님의 정치 성향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연변 방문길에 목사님은 비행기에서 출판을 앞둔 책 원고 교정을 보고 계셨다. 그 원고가 목사님의 자서전 《빈 들에서》(전 3권)(열린문화, 1993년)라는 책이었다는 것은 그 후에 책을 보내주셔서 알았다. 책 속에 이런 내용이 있다.
 
  〈“당신은 정치가요?”
 
  “아니요.”
 
  “당신은 사회운동가요?”
 
  “아니요.”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나는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요.”〉
 
  그때만 해도 필자는 그 뜻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한국의 현대사와 현실정치를 모르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17년생인 강원용 목사님은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목사님이 태어날 무렵 가문은 이미 기울어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15세 때 개신교도가 된 그는 농번기에도 일요일은 예배를 봐야 한다며 농사일을 거들지 않아 아버지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소학교)를 졸업한 후 농민운동에 정열을 불태웠던 그는 18세 되던 해에 가출하여 만주 용정으로 건너가 용정 근교 명동촌에 있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 명동촌엔 조선인 지식인이 많이 모여 있었다. 동갑내기인 시인 윤동주도 명동촌 출신이었다. 한 살 어린 문익환 목사도 명동촌에 있었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필자의 뇌리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이야기는 북한에 관한 이야기다.
 
  1944년 겨울 목사님은 일본 경찰(그 당시 간도는 일본 관헌의 통치 밑에 있었다)에게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이듬해 봄 가석방(假釋放)되어 도피 생활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이하는 목사님이 남긴 증언이다.
 
 
  강원용 목사의 북한 체험
 
강원용 목사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다음이었을 겁니다. 나는 스탈린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들었기에 ‘예배의 자유’를 호소하는 벽보를 붙이고 다녔어요. 일제 당시 감옥 생활을 한 적이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그 지역의 치안유지위원회 위원장 겸 선전부장을 맡게 됐어요.
 
  치안유지위에서는 며칠도 안 돼 ‘동무, 동무’ 하는 패거리가 생겨났어요. 그런데 서로 동무라고 부르는 그룹만 총을 가지는 거예요. 그 패들과 처음 부딪히게 된 것은 그들이 대대적인 데모를 한다고 하기에 그걸 반대했거든요. 데모를 하다가 일본군과 충돌하여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걱정했기 때문이었죠. 데모를 하더라도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끝난 다음에 하자고 했더니 나를 반동으로 몰아 인민재판에 부치더군요.
 
  인민재판장으로 끌려 나가면서 나는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보고 재판하기 전에 15분만 얘기할 시간을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기회를 주자’ ‘주지 말자’ 하고 저희끼리 싸우다가 결국 허락해주더군요.
 
  그땐 정말 웅변을 토했습니다. 한 5분이 지나니 박수가 나오고 10분이 되니까 함성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풀려 나왔는데, 그때 ‘이곳은 못 살 곳이다. 도망가자’는 생각이 들어 38선을 넘었습니다.
 
  그때 나는 공산주의에 대해 소박하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1987년 평민사가 펴낸 《강원용과의 대화》 속의 이홍구(李洪九·전 국무총리) 박사와의 대담에서도 나온다. 강 목사님은 필자와 아내에게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셨다. 그 시절의 체험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평생 북한 이해의 바탕이 됐을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나고 자란 필자는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필자의 북한 연구의 저변에도 이와 비슷한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강원용 목사님은 생전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유신(維新)에는 반대했으나, 전두환(全斗煥) 정권 때는 국정자문위원직을 수락하는 등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필자에게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자초지종을 들려준 적이 있다).
 
  강 목사님은 민주화운동을 지지·성원했지만,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정권의 대북(對北) 정책은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2005년 ‘진보학자’로 알려진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만경대 정신’ 운운하며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개입을 비판하는 등 친북(親北) 발언을 쏟아냈을 때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도 빨리 끝나고 통일도 됐을 것이라는 주장은 북한에서나 하는 말이다. 나는 전쟁 때 시골에서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숨어서 지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소식이 알려지자 구덩이 속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춤을 췄다.”
 
  그런 강원용 목사님을 한국에서는 좌우를 아우르는 정치가, 사회운동가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친미 반공’ ‘보수주의자’ ‘의식에는 한계가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반면에 그를 용공(容共)이나 좌파에 가까운 분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필자의 눈에 강 목사님은 ‘좌’도 ‘우’도 아닌 누구나 포용해주는 여해(如海·강원용 목사의 호)와 같은 분이었다. 그런 목사님이 절대 용서 못 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북한 정권’이었다. 북한 ‘공산주의’의 본질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일본사회당의 몰락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사회당 몰락의 계기가 됐다. 북한에 피랍된 일본인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요코다 메구미(피랍 당시 13세).
  요즈음 한국에는 북한 정권을 옹호하는 언동을 서슴지 않고 북한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학자들이 많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니,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좌파’의 역사를 보면 오늘의 한국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좌파 정치인·학자들이 얼마나 시대착오를 범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진보 좌파’를 자처하는 세력을 보면 과거 일본의 좌파와 닮은 점이 많다. 북한 지도자에게는 관용적이고 우호적이면서 자국(自國)의 지도자는 적(敵)처럼 대하고, 북한 주민의 인권은 외면하면서 자국의 ‘인권’ 상황은 문제 삼는다. 그리고 반미적(反美的)이며 감상적 평화주의자들이 많다.
 
  일본 좌파 세력의 맹주(盟主)를 자처하며 야당으로서는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던, 일본사회당(이하 ‘사회당’)이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북한이었다.
 
  ‘조선노동당의 유일한 우호정당’을 표방해오던 사회당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정일이었다. 북한이 납치와 같은 만행을 저지를 이유도 없고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해왔던 사회당은 2002년 9월 김정일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납치를 시인하자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급속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2021년에 이르러서는 중의원·참의원을 합해 국회의원 2명, 당원 수 1만3000명(2021년 3월 현재)에 불과한 작은 정당으로 전락했다.
 
  물론 한때 일본의 보수와 혁신, 우파와 좌파 대결의 한 축(軸)을 이루며 국회에서 3분의 1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사회당이 몰락하게 된 원인에는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그로 인한 일본 사회 전체의 ‘우경화(右傾化)’에도 원인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 국민들이 사회당과 거리를 두고, 심지어 실망하고 분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다.
 
 
  ‘북조선’ 표현도 금기
 
  일본에서 북한에 의한 납치 의혹이 불거진 것은 1980년이었다. 그해 1월 7일 《산케이(産經)신문》이 ‘커플 3쌍 의문의 증발, 외국정보기관이 관여했나’라는 제목의 특종을 보도했다. 이 기사를 썼던 아베 마사미(阿部雅美) 기자는 후일 “그때 다른 신문사는 북조선 눈치를 보느라 보도를 안 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런데 북조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보수계 언론조차 납치를 언급하는 기사는 싣지 않았다. 그 후 10년 동안이나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술회했다.(2021년 12월 《논좌(論座)》)
 
  《산케이신문》 보도로부터 7년 후인 1987년, 북한은 서울올림픽 개최 저지를 목적으로 대한항공기를 폭파했다. 일본인 납치 문제는 이 사건의 실행범인 김현희의 증언으로 다시 주목받았다. 북한이 공작 활동의 일환으로 일본인을 납치하여 공작원 교육에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3월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 석상에서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 국가공안위원장은 “납치는 외국 정보기관의 소행임을 인지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 사실은 《산케이신문》도 작은 기사로 보도했지만, 그 외 주요 일간지나 TV방송은 이를 무시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북한을 ‘북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됐었다. 《산케이신문》이 1996년 신문 지상에 ‘조선민주주의공화국(북조선)’을 ‘북조선’이라고 표기했을 때 일본의 친북(親北) 조직인 조선총연합회(조총련) 관계자들이 《산케이신문》 사옥으로 몰려가 행패를 부리는 일까지 있었다. 《아사히신문》, 일본방송공사(NHK) 등 일본의 기타 언론이 북한을 ‘북조선’으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이후이다.
 
 
 
사회당, “납치는 안기부 각본에 불과”

 
일본사회당은 패전 직후인 1945년 11월 일본 내 좌파 세력이 결집하여 만들어졌지만, 1996년 1월 해산했다.
  납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산케이신문》이 북한을 ‘북조선’으로 표기하기 시작한 1996년 6월이었다. 오사카에 본사를 둔 아사히방송 이시다카 겐지(石高健二) 기자가 한국 정보기관의 간부를 취재해 한반도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 《겐다이 코리아》(1961년 11월 창간, 2007년 휴간)에 실은 것이 시작이었다.
 
  한국으로 탈출한 북한 공작원의 증언에 근거해 18년 전 니가타(新潟)시에서 실종된 여자 중학생은 북한에 납치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충격적 내용이었다.
 
  그때 사회당이 보인 반응은 “납치는 한국의 정보기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폭로한 정보이므로 신빙성에 문제가 있고 《산케이신문》이 특종이라고 보도한 북한 공작원(안명철)의 증언도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사회당 기관지 《월간 사회민주》(1997년 7월호)는 “납치는 한국의 안기부가 각본을 쓰고 《산케이신문》이 각색한 사건에 불과하다”면서 “창작된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사회당 내에서 남북한 문제에 깊이 관여하며 야인(野人)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던 덴 히데오(田英夫) 사회당 외교방위부 분회장(당시)은 2002년 10월 8일 “우리는 북조선에 속았다”고 변명했지만, 민심은 이미 사회당을 떠난 뒤였다.
 
 
  사회당, ‘한국’ 인정하지 않아
 
  사회당은 전후(戰後) 일본을 사회주의 체제로 재건해야 한다는 이념을 내걸고 1945년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 관공청 노동조합 등을 지지 세력으로 하여 만들어진 정당이다.
 
  진보·혁신을 자처했던 사회당은 1970년대까지 모든 정식 서류에서 ‘한국’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남조선’ 혹은 ‘박(정희) 정권’으로 지칭하면서 한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사회당은 1965년 6월 한일 양국 정부 사이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을 부정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한일기본조약 제3조)라고 정식으로 인정했지만, 사회당은 이 조약이 “조선반도의 ‘분단을 고정화’시킨다”며 반대했다. 대의명분은 ‘분단 고정화’였지만 북한 입장에 동조하기 위해서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사회당은 창당 초기부터 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한국과 북한 사이에서는 북한에 더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은 북한과 한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는 척하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완전히 북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1970년 8월 사회당 중앙집행위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成田知己)가 이끄는 제3차 방조단(訪朝團)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방문단을 극진히 대접했다. 김일성과 나리타는 8시간에 걸친 긴 회담을 한 다음 8월 25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미제국주의와 일본군국주의의 부활, 재침략 정책 반대 ▲남조선 침략자인 미국은 조선반도에서 군대와 살인병기를 완전 철수할 것 ▲김일성 주석의 영명한 영도를 긍정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사회당은 김일성을 ‘위대한 지도자’로 치켜세우는 한편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정희 체제’를 비난했다.
 
  《전후사(戰後史) 속의 일본 사회당-그들의 이상주의란 무엇이었나》(중앙공론신사, 2000년 3월)의 저자 하라 요시히사(原彬久)에 의하면 사회당 위원장과 김일성이 공동성명을 발표한 후 북한과 사회당은 ‘물과 고기의 사이’가 됐다.
 
  사회당이 북한에 얼마나 비굴한 태도를 보였는지 증명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사회당 아스카다 이치오(飛鳥田一雄)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5차 방조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일성이 아스카다 일행을 오찬에 초대하고는 기분이 좋았던지 일장 ‘연설’을 이어갔다. 김일성과의 대화 중에 아스카다가 북한의 경제 상황에 대해 질문하면 그때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간부에게 구체적인 숫자를 물었다. 그때마다 질문을 받은 간부는 황망히 들고 있던 수저를 놓고 벌떡 일어나서 “수령님” 하고 서두를 뗀 후에 대답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고노 도시오(河野民雄) 사회당 국제부장에 의하면 김일성이 일본 측 수행원 중 한 사람이었던 요네다 도고(米田東吾) 중의원 의원을 향해 “당신은 조선에 몇 번 왔지요?”라고 물었다. 요네다는 북한 간부들처럼 벌떡 일어서서 바른 자세를 갖춘 다음 “아홉 번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노 도시오, 《사회당 외교》 중에서)
 
 
  김정일의 덩샤오핑 비난
 
  사회당이 한국을 국가로 인정한 때는 1984년 12월이었다. 그해 사회당은 대외(對外) 정책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사회당이 우방으로 여겼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북한도 변화를 꾀하고 있었음은 중국에서 입수한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북한은 중국 정부로부터 개혁·개방의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김일성도 이에 부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982년 9월 김일성은 개혁·개방 정책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있던 덩샤오핑(鄧小平)의 고향, 쓰촨(四川)을 방문한다. 김일성은 덩샤오핑과 함께 열차로 장장 30시간 이상이나 이동하며 밀폐된 열차 안에서 단둘이 마주 앉아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김일성은 북한에 돌아가면 아들 김정일을 중국에 보내 개혁·개방의 경험을 배우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국 정부는 개혁·개방 정책의 정당성에 대해 그때까지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권 나라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던 터라 사회주의 형제 국가인 북한이 이에 호응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이듬해 김일성은 약속대로 아들 김정일을 중국에 보냈다. 북한의 속사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중국은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김정일의 환심을 사려고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가 몸소 김정일을 안내하는 파격적인 예우를 보였다. 김정일은 개혁·개방에 앞서가고 있는 중국의 연해 지방인 칭다오(靑島), 난징(南京), 상하이(上海)를 둘러보았다. 귀국하기 전에는 베이징에 들러 덩샤오핑을 위시로 한 중앙위원회 요직에 있던 원로들과 간담회까지 가졌다.
 
  그런데 북한으로 돌아간 직후인 6월 15일 김정일은 당중앙 제6기 7중전회 임시회의를 소집하고 덩샤오핑을 원색적으로 맹비난하는 방중(訪中)보고 연설을 했다.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를 버렸다” “덩샤오핑은 수정주의자다”라고 비판하면서, 더 나아가 덩샤오핑을 향해 ‘쥐새끼 같은 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 내용이 여과 없이 중국에 알려졌다. 덩샤오핑은 격노하여 김정일을 ‘덜된 놈(黃嘴郞)’이라고 하면서 “이놈이 결국 조선(북한)을 망치겠구나”라고 했다.
 
 
  사회당, 1984년에야 한국 인정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김일성은 덩샤오핑을 달래려고 8월과 9월 두 번이나 다롄(大連)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덩샤오핑과 만났다. 덩샤오핑은 김일성에게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귀국 후 김일성은 한국과 미국을 상대로 3자회담을 제안했다. 이제 한반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김정일은 공작원을 미얀마(버마)에 파견하여 10월 9일 랑군(현재의 양곤) 아웅산 묘역에서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노린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이 시기 북한의 모든 권력은 이미 김정일이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속사정을 일본의 사회당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1984년 12월 사회당 외교위원회 및 조선대책특별위원회는 〈우리 당의 당면한 대조선 정책에 대한 견해〉를 발표해 한국을 국가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88년에는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의 한국 방문을 허락했다.
 
 
  ‘사회당이여! 수고했어요’
 
  그 후 사회당이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수정하는 데는 6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1994년 사회당은 그때까지의 정책을 180도 변경하여 미일안보조약 반대, 위헌적인 자위대 보유 반대, 원전(原電) 반대 주장을 철회했다.
 
  사회당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구소련이 붕괴하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체제 전환이 이루어진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회당은 북한 문제에 있어서는 구태의연한 자세를 버리지 못했다. 북한 세습 체제를 규탄하는 일도 없었고, 납치 문제에서는 북한을 두둔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행태로 인해 사회당은 1993년 7월 선거에서 의석 절반을 잃어버리는 참패(139석에서 77석으로 감소)를 맛보았다. 그해 야당 세력은 55년 동안 집권을 이어온 자유민주당을 무너뜨리고 연립정권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사회당도 한몫 챙기기는 했지만 존재감은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해 발족한 호소카와(細川護熙) 연립정권에서 내각총리대신 특별보좌관을 지낸 다나카 히데유키(田中秀征)는 ‘사회당이여! 수고했어요’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사회당이 몰락하게 된 주요 원인은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고 사회와 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 못 한 탓’(2020년 11월 27일 《논좌》)이라고 했다. 하지만 더 직접적인 원인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북한, 특히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아사히신문》의 大罪’
 
《아사히신문》은 북한을 미화하는 보도를 통해 재일동포 북송을 조장했다. 사진=마이니치신문
  전후 일본의 진보 좌파 세력은 사회당이 이끌고 《아사히신문》이 지원하며 그 명맥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월간잡지 《정론(正論)》은 2009년 12월, ‘《아사히신문》의 대죄(大罪)’라는 특집호에서 “《아사히신문》의 보도 자세와 논조는 ‘사회민주당’(일본 사회당의 후신)을 편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평론가 가다오카 마사미(片岡正巳)는 같은 잡지에 실린 ‘다시 한 번 묻는다-《아사히신문》의 전후 책임’에서 “《아사히》는 일본민주당을 선거에서 이기게 하기 위한 신문”이라고 비판했다.
 
  그해 8월 자민당은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야당 연합에 또 한 번 정권을 빼앗겼다. 《아사히신문》은 이때의 정권 교체를 1993년의 호소카와 정권 창출 때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가다오카 마사미의 글에 의하면 “호소카와 정권은 사회당이 참여하기는 했으나 사회주의 정권이 아니었다”. 《아사히신문》은 “이번 승리야말로 민주당의 진정한 승리”라고 환호했다. 이는 암묵적으로 《아사히신문》이 사회주의 정권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에서 《아사히신문》의 논조나 보도 자세를 비판하는 책자나 논문은 수도 없이 많다. 흔히 우파 논객들의 공격을 받는 보도나 논조는 주로 과거에 있었던 한반도 관련 보도, 특히 북한에 관한 것이었다.
 
  1959년부터 1967년 사이에 있었던 ‘재일조선인 귀환사업’(재일동포 북송)을 《아사히신문》은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아사히신문》은 북한이 선전하는 대로 ‘사회주의 지상낙원의 발전상’을 여과 없이 보도, 북한의 실상을 모르는 일본인들이 북한을 ‘사회주의 지상낙원’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의 북한에로의 귀환을 필사적으로 저지한다는 입장이었다.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환사업’은 198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가족을 따라 북한으로 들어간 일본인 여성들의 소식이 묘연해지고 북한의 비참한 현실을 폭로한 김원조의 《동토의 공화국-북조선 환멸 기행》(1984년 2월)과 같은 증언록이 나왔지만, 《아사히신문》의 북한에 대한 우호적인 보도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6·29선언이 나온 1987년까지 《아사히신문》을 필두로 하는 일본 언론은 북한을 경제적으로 활기에 차 있고 주민들은 무상(無償)의료, 무상교육, 무상주택의 혜택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누리는 밝은 나라로, 한국은 군사독재 밑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어두운 나라로 보도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을 부정적으로 다루었다. 박정희 시대의 근대화 정책이나 경제 발전상에 대해서는 무시로 일관했다.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 북한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보도는 외면하면서 한국의 인권 상황은 문제 삼고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보도를 쏟아냈다.
 
 
  한국 좌파의 미래는?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는 《아사히신문》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과거를 반성’하는 특집 연재를 지면에 싣고 있다. 종군위안부 관련 보도와 관련해서도 지면에 장문의 사과문과 정정(訂正)기사를 게재하는 등 변화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한국의 진보 좌파 세력이 일본 좌파의 전철(前轍)을 밟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북한이라는 체제는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북한에 대해 할 말을 하지 못하거나, 친북적인 입장을 고수하다가는 한국의 진보 좌파 세력 역시 일본 좌파의 전철을 밟게 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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