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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베네치아에서 法治를 생각한다

쿠데타 획책한 도제(대통령)를 가차 없이 처형

글 : 유민호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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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세기 엔리코 단돌로의 ‘도제의 업무 선서’ 이후 법치 정착
⊙ 공화국 재산을 훔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매년 초 시민 전체회의에서 호명(1415년)
⊙ 베네치아의 곤돌라가 검은색인 이유는 사치를 막기 위해 곤돌라 색깔을 검은색으로 통일하도록 한 법규 때문
⊙ 베네치아, 12세기 이후 법치로 흥하다가 16세기 이후 법치 망가지면서 몰락
⊙ 잘못이 있다면 대통령이든 정치인이든 예외 없이 처벌받아야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하예즈의 〈피옴보 계단에 선 마리노 팔리에로 최후의 순간〉. 사진=퍼블릭 도메인
  밀라노라고 하면 패션이나 명품 브랜드 가방부터 떠올릴 듯하다. 하지만 밀라노는 패션뿐 아니라 미식(美食)과 산업의 중심이자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즉 19세기 초 시작되어 1871년에 끝난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848년 당시 점령군 오스트리아에 항거해 벌어진 5일간의 밀라노 시민운동은 이탈리아 통일을 가속화시킨 결정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밀라노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인 브레라 뮤지엄(Pinacoteca di Brera)은 19세기 통일운동 당시의 흔적을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예술품으로 표현한 공간이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키스(Il Bacio)〉라는 제목의 유화(油畵)다. ‘통일갤러리’라고 불리는 브레라 38호실 한복판에 전시되어 있는 명화로, 베네치아 출신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의 작품이다. 하예즈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과 결과, 그리고 통일 조국의 이상(理想)과 이념을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유명한 화가다.
 
하예즈의 〈키스〉.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나서는 의용군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키스〉는 가로 88cm, 세로 110cm 크기의 중형 사이즈의 작품이다. 대리석 벽과 계단을 배경으로 한 쌍의 남녀가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다. 남녀의 얼굴 모습과 표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키스로 연결된 남녀의 애절하고도 불타는 사랑이 화폭 전체에 잘 나타나 있다.
 
  구체적인 배경을 모르고 본다면 청춘 남녀의 애정을 그린 것으로 여기겠지만, 리소르지멘토가 막판에 접어든 1859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전장(戰場)으로 떠나는 의용군을 그린 작품이다. 가리발디(Garibaldi) 장군이 이끄는 의용군에 속해 출정하는 청년은 의용군의 상징인 붉은색 바지를 입고 있다. 청년은 계단에 왼쪽 다리를 올린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여성을 안고 있다. 키스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전장으로 달려가겠다는 의미다. 숭고하고도 고결한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는 청년과 그를 사랑하는 여성의 애틋하고도 절박한 시간이 두 사람이 나누는 키스에 녹아 있다. 한국이라면 민주화나 통일에 관한 그림을 과연 어떤 식으로 그려낼까?
 
 
  〈피옴보 계단에 선 마리노 팔리에로 최후의 순간〉
 
  브레라의 통일갤러리에서 필자가 가장 애착을 갖는 그림은 〈키스〉의 왼쪽에 걸린 초대형 유화다. 가로 192cm, 세로 238cm에 달하는 그림으로 〈피옴보 계단에 선 마리노 팔리에로 최후의 순간(The Final Moments of Doge Marino Faliero on the Piombo Staircase·이하 ‘팔리에로’)〉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역시 하예즈의 작품이다. 피와 살이 튀는 충혈된 결의와 두 손을 치켜든 승리의 기록화가 아닌, 고전적 기법의 평화로운 메타포(Metaphor)에 기초한 소재와 주제가 하예즈 그림의 특징이다.
 
  필자가 〈팔리에로〉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림의 무대가 베네치아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베네치아는 인류 문명·문화를 이해하는 창문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은 물론, 비잔틴제국과 이슬람 아프리카, 나아가 고대(古代)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첫 단추가 베네치아다. 베네치아를 기점으로 한 세계관이야말로 인류 문명사의 좌표가 될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하예즈의 그림 〈팔리에로〉는 베네치아 역사의 비극(悲劇)이자 오점(汚點)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이 그림 속에는 인구 10만 명의 도시 공화국이 연출한 1400년의 눈부신 역사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코드가 담겨 있다.
 
  하예즈는 자신의 그림 〈팔리에로〉를 통해 통일 이탈리아의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탈리아인이라면 계단에서 내려와 관복을 벗고 있는 팔리에로의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반역을 저지른 팔리에로가 계단에서 내려오지 않고 계속해서 위에 머물러 있다면 통일 이탈리아의 미래가 암흑 속으로 떨어질 것이란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코드가 〈팔리에로〉에 새겨져 있을까?
 
 
  쿠데타 혐의로 처형된 대통령
 
  마리노 팔리에로(1274~1353년)는 14세기 중반 베네치아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Lord Byron)에 의해 연극 주인공으로도 등장하는 등 유럽 문학과 음악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팔리에로는 1354년 공화국 베네치아의 대통령 격인 도제(Doge)에 오른 인물이다. 취임 당시 80세로 역대 최고령 도제 중 하나다. 팔리에로는 도제에 오른 지 7개월 만인 1355년 4월, 베네치아의 공화정(共和政)을 전복하고 왕정(王政)을 수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곧바로 시민법정에 세워진 그는 공개 참수형(斬首刑)에 처해진 후 사지(四肢)를 찢긴다. 함께 붙잡힌 쿠데타 음모자 10여 명도 비슷한 형벌에 처해졌다.
 

  하예즈는 〈팔리에로〉를 통해 장차 수립될 통일 이탈리아 공화정에 반대할 경우,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새로 수립되는 통일 이탈리아는 왕이나 특권층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고 법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법치 공화국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그림의 메시지이다.
 
  하예즈는 머리가 잘리거나 능지처참된 상태의 팔리에로를 그리지 않았다. 우측 하단에 도끼를 든 처형수를 통해 계단에서 내려온, 권력에서 추락한 팔리에로의 최후를 상상케 할 뿐이다. 법은 집행하되,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품격과 존엄성은 지키겠다는 의미다. 〈키스〉에서 보듯, 상징적이고도 은유적인 표현 기법이다.
 
 
  팔리에로가 처형된 곳
 
베네치아의 수호신인 ‘산 마르코의 사자’(오른쪽)와 ‘토다로’(왼쪽)상이 있는 기둥. 이 두 기둥 사이에서 마리노 팔리에로가 처형됐다. 오른쪽 건물은 베네치아 정부 청사인 두칼레궁. 사진=배진영
  필자는 지난해 연말부터 베네치아 동쪽 리도에 머물고 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는 즉시 산 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베네치아와 인연을 맺으면서 알게 됐지만, 현지인들은 산 마르코 광장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베네치아의 중심지인 산 마르코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99%는 관광객이다. 산 마르코 광장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베네치아인들이 찾지 않는 공간이다. 사람도 많고, 기념품 판매상만 즐비하고, 에스프레소 한잔도 배로 비싸서 현지인과는 무관하다.
 
  필자가 오래간만에 산 마르코로 향한 이유는 팔리에로의 처형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팔리에로의 처형은 법정의 공개 참수 결정이 내려진 직후 거행됐다.
 
  그곳이 베네치아의 중심인 산 마르코 광장이다. 바다에서 산 마르코 광장으로 올라갈 경우, 곧바로 높이 20m 기둥 위 수호신 한 쌍을 만나게 된다. 바다에서 볼 때, 오른쪽 기둥 위에는 사자상이, 왼쪽 기둥 위에는 토다로(Todaro)상이 있다. 사자상은 예수의 제자 마르코(산 마르코)의 상징이다. 그리스가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수호신으로 모시듯, 베네치아는 828년 이래 산 마르코를 공화국의 얼굴로 삼아왔다. 토다로는 수호신 마르코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한 쌍의 수호신이 응시하는 시선의 방향이다. 산 마르코 사자상은 동쪽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날개를 단 모습으로 동쪽 바다에서 몰려올지도 모를 외부의 적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토다로 수호신의 시선은 산 마르코 광장 쪽으로 향한다. 발아래 용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토다로 수호신은 베네치아를 내부의 적으로부터 수호하고 있다.
 
 
 
공화국 수호신의 이름으로…

 
두 개의 붉은 대리석 기둥(원 안)이 있는 곳이 팔리에로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진 곳이다. 사진=유민호
  팔리에로는 1355년 4월 15일 처형됐다. 현장은 크게 두 군데로 나눠진다. 하예즈의 〈팔리에로〉 그림 속 풍경과 달리 당시 팔리에로에 대한 선고는 도제의 집무실 2층 베란다에서 내려졌다.
 
  산 마르코 광장에 가면, 산 마르코 교회(Saint Mark's Basilica)를 측면으로 한 두칼레궁(베네치아 공화국의 정부 청사이자 도제 집무실) 2층 기둥을 유심히 관찰하길 바란다. 전부 흰색 대리석이지만, 유일하게 엷은 붉은색으로 남은 기둥 두 개를 발견할 수 있다. 산 마르코 교회에서 볼 때, 두칼레궁 2층의 9번째와 10번째 대리석 기둥이다. 팔리에로가 공개 참수형을 선고받은 곳이다. 당시 팔리에로는 아래의 땅에서 2층 붉은 기둥을 보면서 자신에 대한 선고를 들었을 것이다. 팔리에로가 머물렀을 듯한 공간은 현재 공사 중으로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다. 예전에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는데, 가로 세로 1m 정도의 사각형 대리석이 놓여 있는 공간이다. 공화국의 모든 죄인은 사각형 대리석 위에 서서, 붉은 대리석 사이에서 내려지는 법관의 선고를 들었을 것이다.
 
  팔리에로의 참수가 이뤄진 곳은 앞에서 말한 산 마르코의 사자와 토다로의 기둥 사이의 약 20m 정도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처형을 집행한 것은 개인 차원의 복수나 응징이 아니라 공화국 수호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징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팔리에로의 처형은 공화국 시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도끼를 든 처형수가 높이 3m 정도 단상 위에서 행했다.
 
  이곳은 오늘날 관광객이 즐겨 찾는 베네치아의 명소 중 하나다. 관광객들은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베네치아인이 보기에는 너무도 불길하고 불온한 모습일 것이다. 베네치아 공화국 시절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린 장소이기 때문이다. 미신일 수도 있겠지만, 베네치아인은 ‘절대’ 이 두 개의 돌기둥 사이를 지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사형수들의 피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죽은 자에 대한 예의 때문이기도 하다고 한다.
 
 
  지중해의 패권국가 베네치아
 
두칼레궁 대회의실 상단에는 역대 도제 120명의 초상이 그려져 있지만, 반역죄로 처형된 팔리에로의 자리(원 안)는 그가 형벌에 처해진 사실을 적은 검은색 천이 초상을 대신하고 있다. 사진=배진영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한 것은 1797년 5월 12일이다.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가 정복자 나폴레옹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면서 1100여 년간 이어온 도제 중심의 공화정이 끝났다. 베네치아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서기 5세기를 기점으로 할 경우 거의 1400년 만의 일이었다. 베네치아 전성기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12세기부터였다. 베네치아의 번영은 이후 15세기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오스만튀르크가 지중해를 장악하는 16세기까지 이어진다.
 
  13세기 전성기의 베네치아는 인구의 절반 정도인 4만 명이 선원이었다. 지중해를 누비는 대규모 상선도 3300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800년 전에 엄청난 물자를 실은 10척의 배가 매일 베네치아에 들어오고, 베네치아산 물건을 잔뜩 실은 10척의 새로운 배가 지중해로 떠났다.
 
  베네치아는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외부의 적에게 산 마르코 광장을 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단순히 경제적 번영만을 누린 것이 아니라, 철옹성 같은 평화 속에서 500년간 번영을 누렸던 세계 최고 부자 나라가 베네치아였다.
 
  어떻게 인구 10만 명에 불과했던 베네치아가 유럽의 왕자(王者), 지중해의 패권(覇權)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지정학적(地政學的) 장점, 귀족과 시민의 일치단결, 강력한 해군, 뛰어난 외교력, 철통 방어를 가능케 한 자연조건, 종교에서 벗어난 세속(世俗) 정치의 파워, 10만 베네치아 시민을 지탱해온 30만 명의 노예들, 포드자동차 조립 시스템의 원조(元祖) 격인 선진 조선(造船) 기술, 인터넷 시스템을 방불케 하는 해양 네트워크…. 각자의 관점에서 방점을 다르게 찍을 뿐, 이것들이 대부분이 동의하는 베네치아 번영과 평화의 기반이 된 요소들이다.
 
  필자는 여기에 추가하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다. ‘법의 지배’가 바로 그것이다. 80세의 국가 최고 통치자 팔리에로를 가차 없이 처형한 데서 보듯, 공화국 시민 모두에게 평등하면서도 예외가 없이 철저하게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베네치아가 1400년간 존속하고 500년간 번영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베네치아 두칼레궁 내 대회의장(Great council hall)은 산 마르코 광장에 들를 경우 반드시 찾는 명소다. 가로 53.5m, 세로 25m, 높이 15.4m에 달하는 유럽 최대 규모의 실내 회의장으로, 도제 임명식이나 시민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대회의실 사방의 상단 벽면을 보면 역대 도제 120명의 초상화가 두 명씩 짝을 지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딱 한 군데 얼굴이 아니라 글자만 새겨진 검은색 캔버스가 있다.
 
  “참수형을 시행하고 모두의 기억에서 지우는 형벌에 처한다.”
 
  바로 그리스 이래의 전통인 기억말살형(damnatio memoriae)에 처해진 팔리에로의 초상이 있어야 할 자리다. 팔리에로는 청년기부터 베네치아 정치에 깊숙이 참여, 베네치아의 입법·사법·행정의 요직을 두루 거친 후 도제의 자리에 오른 노련한 정치가였지만 참수와 함께 기억말살형에 처해진 것이다.
 
  역사학자들의 분석으로는 팔리에로가 공화정을 전복하고 왕정을 수립하려 쿠데타 음모를 꾸민 동기가 불분명하다. 너무 나이가 많아 사리 판단이 어려운 상황에서 베네치아의 권력을 집중시키려던 세력에게 이용당했다는 얘기도 있다. 팔리에로의 부인이 공화국 내 실력자에게 모욕을 당하면서 개인적 복수 차원에서 그런 일을 꾸몄다는 주장도 있다. 80세 먹은 노인이 새삼스럽게 왕정을 수립해 절대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는 얘기는 아무래도 잘 믿기지 않는다.
 
  고령에다 최고 행정 수장(首長)이라는 점, 공화국에 대한 오랜 봉사와 공헌을 고려해 형을 감경(減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팔리에로는 목이 잘린 후 사지를 찢기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 누구도 공화정과 법치를 깰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이다.
 
 
 
도제의 ‘업무 선서’

 
  베네치아는 법과 규범을 통해 성장한 나라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관습이나 교회법에 의존할 때 베네치아는 규범에 기초한 형법과 민법을 구체화했다. 법치국가 베네치아의 출발점은 법의 원칙을 도제에게 재확인시킨 ‘업무 선서(Promissione ducale)’에 있다. 이 선서는 12세기 초부터 간헐적으로 시행되다가 1195년 도제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에 의해 제도적으로 정착됐다. 원래는 간단한 선서였지만, 이후 이 선서는 도제로서 이전에 베네치아 시민으로서 정치적·형사적·민사적 책임을 지겠다는 맹세이자 약속으로 발전했다. 이후 엔리코 단돌로는 구체적인 법을 만들어 시행하면서 법의 지배와 원칙을 베네치아 전체에 확산시켰다.
 
  당시 도제를 도와 법안을 구체화한 핵심 세력은 상인들이다. 베네치아는 유럽과 지중해 전역의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나라다. 도덕·관습·규범·법이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하면서 장사를 해야만 한다. 대부분이 돈과 관련된 문제지만,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 베네치아인끼리의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도제의 업무 선서’ 이후 법이 정비되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실시되면서 분규와 갈등의 책임소재가 명확해졌다.
 
  16세기 말 베네치아를 무대로 한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Merchant of Venice)〉은 법치를 내세운 베네치아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금전거래의 경우 아주 구체적인 사안까지 기록하고, 분규가 생길 경우 법원에 가서 해결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베네치아의 발달된 법체계와 법질서에 놀라 이 작품을 썼을지도 모른다.
 
  영국은 1215년 제정된 ‘마그나 카르타’를 자랑한다.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약속하면서 왕권을 제약한 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그나 카르타’는 각론이 없는 총론 차원의 법이다. 그나마 당초에는 귀족의 권리를 보장하는 헌장(憲章)이었던 것이 후일 시민의 권리까지 보장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된 것이다.
 
  1195년 나타난 베네치아의 ‘업무 선서’는 ‘마그나 카르타’보다도 20년 앞서 있다. 총론 차원에 그치지 않고 각론 차원의 형법·민법으로 발전됐다는 점에서 한층 앞선 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베네치아가 법치로 무장하면서 공화국의 번영과 평화도 한층 더 심화되었다.
 
 
  규범에 저항할수록 더 크게 처벌
 
  베네치아는 공공규범을 시민 모두에게 공지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정치·경제·사회적 제약을 받게 된다. 베네치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인데, 표를 사지 않은 채 배(차량이 없는 베네치아에서는 버스 역할을 하는 배가 있다)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가끔 기습 검사를 하는데 위반자들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가려 한다. 일단 검사원들은 사정을 전부 들어준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예외 없이 벌금 60유로를 부과한다. 계속 거부할 경우 사무실로 데려가 더 큰 벌금을 부과한다. 그래도 계속 거부할 경우에는 여권을 몰수하고 감옥행이다. 위반자의 국가의 영사관 직원이 오면 거기에다 벌금과 검사원들의 시간 소비에 대한 비용을 청구한다. 필자가 검사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규범과 법에 저항할수록 한층 더 무거운 벌이 기다린다고 한다. 관광객만이 아니라, 베네치아 거주자도 예외가 없다.
 
  애완견 배설물 문제도 마찬가지다. 베네치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집 안에서 개를 기르기 시작한 유럽 내 도시 중 하나다. 지금도 좁은 베네치아 땅에 개가 엄청 많다. 20세기까지만 해도 개 배설물을 방관하는 사람이 많아서 골목마다 골치를 앓았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물 청소 위반자에 대한 벌금을 최대 500유로로 부과하면서 한순간에 문제가 해결됐다고 한다. 베네치아 골목 어디에 가도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한 이유도 바로 벌금 500유로에 있다.
 
  14세기부터 베네치아 시민 250명당 순찰 경찰 1명이 활동했다고 한다. 규범이나 법에 조금만 어긋나도 현장을 목격한 제3자의 신고가 들어간다.
 
 
  1인당 접대 비용도 법으로 규제
 
  필자의 생각으로는 베네치아의 도덕적 수준은 그렇게 높지 못하다. 십자군 전쟁 당시 보여준 베네치아의 외교·군사 행태를 보면 돈이 우선일 뿐, 예루살렘 성지 탈환은 전부 핑계일 뿐이었다. 1204년 제3차 십자군 전쟁 때는 이슬람이 아니라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을 공격해 약탈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산 마르코 성당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는 네 마리의 청동상 말이나 산 마르코 성당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기묘한 문양의 대리석도 비잔틴에서 훔쳐온 것들이다. 도시국가 전체가 돈을 추구하면서 인간 욕망의 최정점을 즐겼다고나 할까?
 
  법과 규범은 그러한 세속적 공기 속에서 탄생된 결과물이다. 사실 전부 도덕으로 해결한다면 법과 규범도 필요 없다. 세속 도시 베네치아에서 법과 규범이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각론 차원에서 어떤 법과 규범이 베네치아 시민들에게 적용됐는지, 구체적 케이스를 통해 살펴보자.
 
  1224년: 말을 탄 채로 리알토(Rialto) 다리와 산 마르코 광장 사이를 오가서는 안 된다.
 
  1229년: 저녁을 대접할 때 1인당 1두카트(Ducat) 이상의 돈을 써서는 안 된다.
 
  1258년: 약사는 의사의 처방전 없이 약을 판매할 수 없다. 의사는 가난한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줘야만 한다.
 
  1315년: 신성한 공공장소에서 불순·불경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1397년: 어두운 거리는 불을 밝힐 새로운 램프를 설치해야만 한다.
 
  1407년: 운하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1415년: 공화국 재산을 훔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매년 초 시민 전체회의에서 호명될 것이다.
 
  1443년: 공화국은 돈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한 변호사 선정을 지원해야 한다.
 
  1455년: 범죄자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옷을 벗겨 탈취하는 것은 불법이다.
 
  1474년: 공화국은 발명품을 만든 발명가에 대한 권리를 특허법을 통해 보호한다.
 
  1663년: 정부 소유를 제외한 모든 사적 곤돌라의 색상은 검은색 하나로 칠해져야만 한다.
 
 
  베네치아의 곤돌라가 검은색인 이유
 
베네치아의 사유 곤돌라는 사치를 막기 위해 1663년 이래 검은색으로 색깔을 통일했다. 사진=배진영
  전체적으로 보면, 권력가나 귀족을 견제하는 법과 규범이 중심이다. 말을 탈 신분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귀족들이다. 귀족이라도 걸어서 오라는 말이다. 곤돌라를 검은색으로 통일한 것은 금이나 보석으로 장식한 부자들의 곤돌라 때문이다. 1663년 제정된 곤돌라 규범은 지금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권력자의 경우 법과 규범을 한층 더 엄격하게 적용했다. 팔리에로가 참수형에 처해진 후 사지를 찢긴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공화국을 수호해야 할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층 시민이 반역자로 체포될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처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역도시 베네치아답게 돈은 법과 규범을 관통하는 공통분모 중 하나다. 역사상 베네치아는 세계 최초로 특허법을 창안해내고 집행한 나라다. 돈에 관련된 문제이기에 그 어떤 곳보다 민감하게 대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18년 전에 이미 특허법을 시행했다. 이후 유럽 전체가 베네치아 특허법을 모방한 것은 물론이다.
 
  법이 아닌 규범이라지만, 실제 어길 경우 벌금이나 감옥행, 심하면 죽음까지 각오해야만 했다. 교회에서 성(性)행위를 한 사람은 50년간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범죄자의 경우 경미한 경우라도 채찍형이 기본이었다. 아무리 작은 범죄라도 두 번 연속 행할 경우에는 엄청난 가중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좀도둑이라도 두 번 행할 경우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법치만이 해답이다
 
  ‘윤석열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법치’다. 정치(政治)도 인치(人治)도 아닌, 법치다. 이념·대의명분·슬로건이 아니라 각론 차원의 구체적인 법을 통한 통치라는 의미에서의 법치다. 정치적 타협이 아닌, 법 구절에 따른 자동실행으로서의 법치다.
 
  120% 찬성한다. 억(億) 단위 부정부패는 기본이고, 100억, 1000억 불법 사기 사건도 심상해진 나라가 2023년의 한국이다. 액수를 기준으로 할 때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 2위 규모의 부정부패 대국에 오를 듯하다. 법대로 하려고 하면 ‘검찰 독재’니 ‘검찰 공화국’이니 하면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사람이 도처에 들끓는다. 부패 정치인과 유사 권력자, 주변의 기생(寄生) 세력들이 차고 넘친다. 내로남불은 기본이고, ‘우리 모두’가 아닌 ‘우리끼리만’ 통하는 외눈박이 논리도 일상화된 지 오래다.
 

  그 모든 궤변과 망상을 잠재울 최고의 방안은 법 하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이미 4명의 대통령이 이 같은 법의 이름하에 감옥으로 갔다. 본인들로서는 억울하기도 하고 하소연하고 싶기도 하겠지만, 이것도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 만든 법에 따른 것이다.
 
  당연히 잘못이 있다면 문재인 전 대통령은 물론, 윤석열 대통령도 법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른 정치가나 공직자 나아가 시민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강철은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내부의 녹 때문에 망가진다. 법이 물러지고, 법 적용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고, 법에 따른 효과가 약할 경우 조직·사회·국가 전체가 허물어진다. 한국은 이미 붕괴 직전 상황에 접어들었다.
 
 
  베네치아, 법치 무너지면서 몰락
 
산 마르코 광장 두칼레궁 입구의 조각상. 도제가 공화국과 시민 전체를 상징하는 산 마르코의 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사진=유민호
  베네치아는 오스만튀르크가 지중해의 패권국가가 된 이후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다가 17세기 말부터 급추락했다. 경제가 엉망이 되면서 법치 정신도 무너진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귀족만을 위한 갖가지 특권이 등장하면서 베네치아 특유의 공동체 정신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우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마지막으로 법치 공화국 베네치아를 창조한 걸출한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행한 업무 선서의 내용을 소개한다. 정확히 828년 전,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명종(明宗) 시대 때 등장한, 도제 스스로의 권력을 제한하면서 만인 평등 법칙의 출발점이 된 선언이다.
 
  “한 점의 거짓도 없는 굳은 신념을 바탕으로, 베네치아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우리는) 계획하고 협상하며, 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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