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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2023년 신년, ‘전환기의 리더’ 하드리아누스를 생각한다

글 : 유민호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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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무리한 팽창 포기… 서로마의 멸망 늦춰
⊙ 판테온을 비롯해 가는 곳마다 기념비적 건물 지은 문화 황제
⊙ 보조병 출신들에게 로마 시민권 부여해 병력 및 인구 확보
⊙ 5賢帝 중 하나로 재위 기간의 3분의 2를 속주 순시로 보낸 ‘현장형 지도자’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하드리아누스 황제. 사진=유민호
  “발을 위에서부터 집어넣는 것이 긴 장화를 신는 방법이다. 북쪽 알프스를 넘어 들어가야 한다.”
 
  1796년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공격할 때 남긴 말이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는 말과 함께 눈 덮인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부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이탈리아인들도 자국(自國)의 영토를 긴 장화로 표현한다. 축구로 날밤을 새우는 나라답게, 장화 축구화를 신고 시칠리아를 공처럼 차는 표현의 지도를 본 적이 있다. 같은 반도국가지만, 한국은 토끼나 호랑이 같은 동물을 국토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이탈리아라는 장화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답은 ‘먼저 신는 사람이 임자다’.
 
  필자는 2022년 12월 초부터 장화의 나라 이탈리아 지도 내 ‘앞 발목’ 부분에 머물고 있다. 나폴리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바이아(Baia)라는 곳이다. 나폴리 앞바다를 정면으로 볼 때 오른쪽에 들어선 반도로, 멀리 휴화산(休火山) 베수비오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바이우스(Baius)라는 선원의 이름을 딴 곳으로, 기원전 8세기부터 개척된 고대 도시다. 바이아 지역은 고대 에게해 주민이 정착한 뒤 개발한, 이탈리아 내 첫 번째 그리스 식민지다. 이후 로마 시대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이후 역대 황제 전용 휴양지로 개발되었다. 로마가 사라지는 5세기까지 나폴리나 근처의 폼페이가 아니라 그리스 흔적이 강한 바이아가 이탈리아 최고 휴양지로 통했다. 방어에 완벽한 지형과 바다를 눈앞에 둔 온천 지대라는 점이 황제의 눈에 든 가장 큰 이유다.
 
 
  ‘현장의 황제’
 
나폴리에서 바라본 바이아 풍경. 중간의 섬 오른쪽에 들어선 공간으로, 고대 그리스가 개척한 이탈리아 내 첫 번째 식민지이기도 하다. 사진=유민호
  필자가 바이아를 찾은 이유는 황제 하드리아누스(76~138년. 재위 117~138년)를 만나기 위해서다. 하드리아누스는 서기 134년부터 4년간 바이아에 머물다가 138년 7월,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로마의 번영과 국력이 최고 절정에 달하게 한 5현제(五賢帝·Five good emperors) 중 한 명이 황제 하드리아누스다. 서방 역사를 통틀어, 최대 영토와 번영을 구가했던 로마 지도자의 최후가 바이아에 새겨져 있다. 이탈리아와 다뉴브강은 물론, 그리스·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이르는 지중해 주변 전체가 하드리아누스의 평생 여정이었다. 말이나 배가 여행 수단이었던 시대였는데도, 지중해 주변 수천 킬로미터가 하드리아누스의 그림자로 채워져 있다. 황제 시찰 기념비에서부터, 황제 특별 하사금으로 세워진 건축물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하도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정도인데, 지중해 주변 유명 로마 유적지 중 하드리아누스와 무관한 곳은 없다고 보면 된다.
 
  역사학자 대부분이 인정하는 것이지만, 현지 시찰 기록이란 측면에서 하드리아누스를 넘어설 황제는 단 한 명도 없다. 로마 당시만이 아닌, 21세기 지금까지 등장한 그 어떤 정치가보다도 월등히 앞서 있다. 서기 117년부터 138년까지 21년간 황제로 재위한 기간의 약 3분의 2 정도를 로마 밖 속주(屬州) 시찰로 보냈다.
 
  로마 황제의 의무이자 전통이지만, 전쟁터에 나가 직접 전쟁을 지휘하면서 부하 군인들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한 야전 사령관 황제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황제 전용 칼이나 무기를 멀리했다. 로마 군인들과 똑같은 옷과 음식 그리고 무기를 갖고 전쟁터로 달려갔다고 한다. 텔레비전 수사 드라마로 치자면, 범행 현장이나 용의자 추적에 매달릴 뿐, 사무실 근무를 무시하고 싫어한 경찰관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황제의 자취는 어디에…
 
  바이아는 이 같은 ‘현장의 황제’가 세상을 뜨기 전 4년 동안 머물렀던 휴양지다. 현재 남은 바이아의 로마 흔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비너스와 머큐리 그리고 다이아나 신전이다. 그리스 이름으로는 각각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그리고 아르테미스로 불리는 신(神)들의 무대다. 이들 신전은 전부 돔(Dome)형으로 나폴리 앞바다를 정면으로 보면서 세워져 있다.
 

  신전은 그리스·로마 당시 도시의 얼굴이자 상징이었다. 현지 발행 동전의 앞뒤 어딘가에 지역 내 신전 그림이 ‘반드시’ 들어갔다. 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도 신전이었다. 따라서 외부에서 도시로 들어올 때 멀리서도 볼 수 있는 건물이 신전이었다. 도시로 귀환하면서 멀리서 신전을 보면서 함성을 질렀을 로마인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바이아 유적지의 상당 부분은 현재 바다 수면 아래에서 잠자고 있다. 베수비오 폭발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지반 침하로 인해 신전 주변 거주지 대부분이 수몰(水沒)된 상태다. 해양 고고학 유적지로, 여름철이 되면 전 세계에서 온 다이버들로 붐빈다. 바이아 전체를 훑었지만, 하드리아누스가 숨지기 직전 어디에서 거주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략 3개의 신전 위 어딘가에 하드리아누스의 거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리스 문화에 몰입
 
  로마 역사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황제 이전에,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지식인으로 통한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을 모아 문학·예술·철학 토론을 즐겼다고 한다. 5현제 중 마지막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러했듯이, 하드리아누스 역시 황제라기보다 문학가·철학가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어가 가능한 것은 물론, 그리스 문학과 예술에 특히 주목한 인물이다. 원래 하드리아누스 이전까지만 해도 로마 황제는 수염이나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수염이나 긴 머리는 로마에 정복당한 그리스의 풍습으로 여겨졌다. 점령자가 속국의 풍습을 따를 수는 없는 법. 제정(帝政) 로마 초대(初代)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그러했듯이, 수염이 없는 단정한 모습이 황제의 모델로 통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수염을 기르고, 그리스어로 된 문학과 예술에 열중했다. 그리스 지식인의 상징이기도 했던 동성애(同性愛) 관계도 숨기지 않았다.
 
  그리스 최초의 식민지였던 바이아는 그리스의 풍습과 문화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던 곳이다. 신전 주변에서 만난 석양은 에게해 그리스 섬에서 보던 모습과 너무도 똑같다. 그리스 도시의 특징 중 하나는 반드시 해가 뜨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 신전과 도시를 세운다는 점이다. 적이나 해적(海賊)의 공격에 직면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바다 근처 어딘가에 대리석 건물을 세웠다. 바이아도 마찬가지였다. 하드리아누스의 그리스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고려한다면, 왜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바이아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황제의 역사는 ‘막장 역사’

 
  한국 기준에서 보면, 로마 황제의 역사는 암살, 음모, 배신 나아가 근친상간(近親相姦)도 서슴지 않았던 ‘막장 역사’였다. 기원전 27년 제정 로마를 창건한 아우구스투스 이래, 서로마가 망한 서기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에 이르는 70명의 황제 가운데는 후대(後代)의 모범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사람도 많다.
 
  하드리아누스는 황제가 되자마자 자신의 즉위에 반대하던 원로원 의원 4명을 처형했다. 원로원의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협박이었던 셈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현제’가 아니라 폭군일 수도 있다. 이렇듯 로마사는 카오스(혼돈) 세계에서 코스모스(질서)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용하다. 흑백(黑白) 선악(善惡)으로 분명히 나눠진 동양식 역사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서점에 가보면 알겠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기술된 로마사 작가의 대부분은 일본인이다. 이들은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연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BC 44)를 천황과 총리,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대본영(大本營)을 합친 캐릭터로 이해하면서 ‘독재를 했더라도 번영과 안정을 이루었다면 좋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사실 한국과 중국이 그러하듯 개발독재를 통해 단기간 성장에 성공한 경우도 적지 않다. 과정보다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 과거 동양적 역사관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다시 보는 로마사는 다르다. 오늘날에는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과정이 나쁘다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이 보다 일반적인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로마의 황제들 가운데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몇 명의 황제 가운데 하나가 하드리아누스이다.
 
 
  수비형 황제
 
트라야누스 황제
  필자가 하드리아누스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2023년의 한국이 모델로 삼을 만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환경적 측면에서 당시의 로마와 현재의 한국은 많이 닮았다. 하드리아누스 집권기는 로마 최절정기와 일치한다. 최정점의 뒤에 오는 것은 밑으로 내려가는 하향(下向) 곡선이다. 성장이 끝나고 추락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100달러짜리 햄버거와 1000만원짜리 명품 가방, 100만 달러짜리 아파트가 넘쳐나는 나라가 2023년의 한국이다. 후일 역사가들은 ‘2023년=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한 시대’라고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로마가 그러했듯이 절정의 다음은 추락이다. 2023년 한국은 경제·정치 나아가 외교·군사 측면에서의 경고음이 동시에 울려 퍼지고 있다. 절정기에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순간 로마는 어떤 식으로 대응했을까? 하드리아누스를 보면 그런 궁금증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2023년 하드리아누스를 한국의 교훈이자 개선점의 모델로 삼을 경우 과연 어떤 부분이 관심을 끌 수 있을까? 크게 세 가지가 떠오른다.
 
  첫째, 하드리아누스는 로마를 공격형에서 수비형 체제로 바꾼 황제다. 5현제는 16세기 초 피렌체의 현실주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가 만들어낸 말이다. 로마 당시는 물론 마키아벨리 이전까지는 ‘로마 5현제’라는 발상 자체가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서기 96년 즉위한 네르바에서부터 180년 사망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의 약 100년을 ‘로마 황금기’라 불렀다. 전쟁도 거의 없고, 평화와 번영이 계속되었던 시기이다.
 
  고대의 국가관으로는 국토의 면적이 번영의 상징이었다. 로마 국토가 최대 규모에 달한 것은 하드리아누스 직전의 황제 트라야누스 때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스페인, 독일과 동부 유럽 나아가 메소포타미아와 북부 아프리카 전부가 로마의 영토였다. 트라야누스는 63세 때 파르티아와의 전쟁 도중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하드리아누스는 서기 117년 8월 9일, 시리아 안티오크(현재 튀르키예 안타키아)에 머물던 중, 자신이 트라야누스 양자(養子), 즉 후계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8월 11일에는 트라야누스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는 양자로 결정된 지 이틀 만에 주변 군인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41세 때였다.
 
 
 
현실을 직시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즉위 당시의 로마 영토. 최대로 팽창된 상태였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즉위와 함께 동부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포기한다.(짙은 색깔로 표시한 부분이 하드리아누스가 포기한 영토)
  흥미로운 것은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반응이다. 곧바로 로마로 달려가 황제로서의 정통성과 파워를 과시했을 것 같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당시 지중해의 작은 도시 셀리누스에 머물다가 죽었다. 필자는 1년 전 셀리누스에 가보았는데, 절벽 위에 있는 철옹성이었지만 허름한 곳이어서 로마 황제가 살았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셀리누스는 당시 하드리아누스가 머물렀던 안티오크에서 약 400km 정도 떨어져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곧바로 배를 타고 와서 트라야누스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이어 화장(火葬)한 트라야누스의 유골을 갖고 다시 안티오크로 돌아왔다. 그가 로마로 들어간 것은 118년 7월이었다. 그는 이 11개월 동안 안티오크에서 로마군을 지휘하면서 변방의 적들과 싸우다가, 동부 유럽을 거쳐 로마에 입성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대제국을 공격형에서 수비형 체제로 바꾼 것은 로마로 들어가기 직전 발표한 칙령을 통해서였다. 현재의 이란 지역인 유프라테스강 동쪽의 파르티아와 북부의 아르메니아를 전부 포기한다는 것이 칙령의 핵심이었다. 트라야누스도 숨지기 직전까지 직접 나서 이 지역을 침공하는 적들과 싸웠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이 선(線) 바깥의 땅을 전부 포기하고 로마로 돌아갔다. 원로원은 그를 ‘겁쟁이 황제’라 부르면서 비난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은 전쟁 자금과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적들을 물리치더라도, 이후 그 땅을 로마 영토로 계속해서 유지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건국 이래 팽창을 지속해온 나라였다. 이 같은 성장 신화는 하드리아누스를 정점으로 막을 내렸다. 하드리아누스는 전쟁터와 국경 지역에서 평생을 보낸 군인 출신으로 누구보다도 현장을 잘 알기에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이다.
 
 
  서로마의 멸망 늦춰
 
  문재인 정권 때부터 대한민국의 국운(國運)이 다하고 있다는 얘기가 자주 나왔다. 각종 지표에서 보듯 성장이 멈추고 있다. 내로남불 정치가들의 시대착오적 세계관이 큰 이유였지만, 팬데믹 이후 국제 정세를 봐도 성장 한계론, 나아가 국운 쇠퇴론은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중 디커플링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출산율이다. 2021년 한국의 출산율은 0.81로 전 세계 최하 수준이다. 동전의 양면이지만, 신생아는 줄고 고령(高齡) 인구는 급증하고 있다. 인구 절벽에 따른 암울한 미래 전망 시나리오들이 거의 매일 쏟아지고 있다.
 
  대제국 로마가 그러했듯이, 국가에도 흥망이 있다. 한국이 당장 망한다는 것이 아니다. 과거처럼 마냥 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미 60대 나이로 접어들었는데도 젊을 때 생각하며 마라톤을 뛰겠다는 고집불통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뛰다가 쓰러질 경우, 혼자만이 아니라 주변 모두에 피해를 줄 뿐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 부동산 침체의 가장 큰 이유는 인구 감소이다. 일본보다 훨씬 악화된 출산율을 감안하면 한국 부동산의 미래가 어떨지 점칠 수 있다.
 
  지금 당장 공격을 멈추고 수비형으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공격형·성장형 시대는 더 이상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만약 하드리아누스가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을 계속하고 변방 적들과 타협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역사가들은 공통적으로 서로마의 멸망이 한층 더 빨라졌을 것으로 본다. 하드리아누스가 영토 축소로 나아가면서, 다른 후임 황제들도 유연한 정책으로 나갈 길을 열어줬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衆論)이다.
 
 
  건축가 황제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 사진=배진영
  둘째, 하드리아누스는 지중해 주변 전부를 돌아다니면서 로마의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파워’를 과시한 인물이다. 초대형 건축물 건립이다. 보통 황제가 속주 현지로 가면 큰 환영식이 벌어졌다. 로마 스타일 행진이 이뤄지고 곧바로 하드리아누스의 연설이 이어졌다. 신전에서의 성스러운 의식도 시작됐다. 당시 황제는 죽은 뒤 곧바로 신으로 추앙됐다. 직전 황제인 트라야누스를 신으로 모시는 의식도 행해졌다.
 
  엄숙한 연설과 신성한 의식이 진행된 뒤에는 황제가 주관하는 도어 스테핑 스타일의 대화가 이어졌다. 현지 지도자들이 황제를 상대로 질문을 하고 청원도 했다. 아침 기자들과 만나는 수준이 아니라, 속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이뤄지는 현장에서의 도어 스테핑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대화가 끝나면 초대형 파티가 벌어졌다. 음식과 와인이 제공되면서 하드리아누스를 따르는 군인들과 현지인들이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맺어졌다. 하드리아누스의 현지 시찰은 로마와 속주를 하나로 만드는 연대(連帶) 파티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하드리아누스가 그 도시를 떠나면 곧바로 황제 시찰 기념 건축물 건립에 들어갔다. 보통 황제가 내리는 특별 기금이나, 속주 내 부자들의 기부로 자금이 충당되었다. 주로 하드리아누스가 좋아하는, 대리석으로 된 그리스풍의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문화를 아는 지도자
 
로마의 판테온은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것이다. 사진=배진영
  하드리아누스는 본인 스스로 로마와 이탈리아 곳곳에 건축물을 건립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은 로마의 모든 신을 모신 판테온(Panteon)이다. 둥근 돔형 지붕으로 만들어진 초대형 건축물로, 하드리아누스가 그리스에서 본 건축 형식에 따른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정치에서 벗어나 시골 별장에서 생활하기를 좋아했다. 티볼리의 여름 별장은 정치에서 벗어나 자연인으로 살고 싶어 했던 인간 하드리아누스가 직접 건립한 파라다이스였다.
 
로마 근처 티볼리의 여름 별장은 인문학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스와 이집트를 하나로 묶어, 동성애 애인이던 안티코를 기린 걸작 인공 건축물이기도 하다. 사진=유민호
  한국에서 문화에 관심을 갖는 정치가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있다 해도, 미국 랭킹 차트에 오른 가수나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K 민족주의’로 연결시키는 정도일 것이다.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념으로서의 문화인 셈이다. 노래 하나를 들으면서도 국가적·민족적 자부심을 느껴야만 한다. 문화를 ‘K 민족주의’나 경제적·실용적 관점에서만 보는, 가난에 찌든 우물 안 세계관의 소산이다. 서울 아니 한국 전체를 통틀어 세계에 내놓을 만한 건축물이 몇 개나 될지 궁금하다. 이탈리아 콜로세움에서 보듯, 역사적 건축물 하나가 국가와 국민의 이미지와 자긍심으로 연결될 수 있다.
 
  필자가 하드리아누스를 21세기 지도자의 모델로 꼽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예술에 대한 심미안이 누구보다도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대목은 앞으로 점점 더 주목의 대상이 될 것이다.
 
 
  시민권 확대
 
  셋째, 하드리아누스는 군역(軍役)을 통해 로마 시민권 확장에 적극 나선 황제였다. 로마 군인은 로마 시민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정규군(군단병·Legions)의 근무 기간은 보통 6년 정도였다. 로마는 정규군 외에도, 로마 시민이 아닌 속주민으로 구성된 군인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규군을 돕는 보조병(Auxiliary)으로, 전쟁이 터질 경우 보급병이나 전면에 나서 싸우는 보병 역할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들 보조병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폈다. 팽창된 로마 국경을 지킬 군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5년간 보조병으로 근무할 경우 시민권을 주었다. 로마 시민이 될 경우 그의 아들도 시민권자가 될 수 있었다. 제대 후에는 근무한 현지에 머물면서 땅도 얻고, 로마와의 가교 역할을 하는 지역 실력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현지 시찰 도중, 보조병들을 대량 모집했다.
 

  하드리아누스의 업적을 알려주는 상징물 중 하나가 영국 허리 한복판을 가르는, 길이 120km에 달하는 긴 성벽, 즉 하드리아누스 장벽(Hadrian's Wall)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이 장벽은 영국 북방의 적들을 막기 위해 구축(構築)되었다. 당시 현지에 파견된 로마군의 대부분은 보조병 출신이었다.
 
  한국은 인구 절벽에다 노동력 절대 부족을 앞두고 있다. 일정한 형태의 국가 봉사나 의무를 행한 경우 한국 국적을 부여함으로써 인구를 늘리는 정책이 절실하다. 그러나 외국인 영주권자에게 주는 ‘기형적인’ 투표권에서 보듯, 특정 국가에 치우친 문호 개방은 후일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의 보조병 모집의 기본 원칙은 출신지 다양화였다. 특정 지역만 모집할 경우 나중에 적대 세력으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국인에게 문은 열되, 나라 사이의 균형과 세계 각국의 흐름에 맞춰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원로원과의 불화
 
  흥미롭게도, 로마에는 하드리아누스를 직접적으로 기리는 조각이나 기념비가 ‘단 하나’도 없다. 지중해 주변 전역에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기념비적 건축물이 많지만, 정작 로마에는 황제의 그림자가 없다.
 
  그 이유는 하드리아누스가 당대 로마 원로원과 불화했기 때문이다. 로마에 조각이나 기념비를 세우려면 원로원의 기금 출연(出捐) 결의나 법률이 필요했다. 현장 시찰로 평생을 보낸 하드리아누스는 입으로 먹고사는 원로원 정치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원로원도 하드리아누스를 마땅치 않게 여기기는 마찬가지여서 그가 죽은 뒤 그에 대한 모든 공식 기록을 없애버리는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에 처하려 하기도 했다.
 
  로마판 ‘나의 무덤에 침을 뱉어라’ 상황이라고 할까? 그러나 1900여 년이 흐른 지금 하드리아누스가 남긴 리더십은 21세기 지도자의 모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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