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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아시아판 나토’ 구상의 선구자는 李承晩·朴正熙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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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만의 장제스, 필리핀의 퀴리노와 태평양동맹 구상
⊙ 박정희, 닉슨 독트린 공식화되기 이전에 아시아태평양조약기구(APATO) 구상 내놓아
⊙ 박정희, “APATO 목적은 中共 등 아시아공산주의 저지… 대만·일본 참여 필수”
⊙ “자유중국·한국은 자유의 방파제가 아니라 자유의 파도… 자유의 파도가 북경·평양까지 휩쓸어버릴 것”(박정희, 1966년 2월 대만 국빈 방문 시)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8월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과 만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집단안보체제 추진에 합의했다.
  지난 8월 2일 밤 낸시 펠로시 미(美) 하원의장이 대만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8월 3일 펠로시 의장은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만나 회담을 가졌다. 중국은 격하게 반발했다. 대만기업체 등에 경제제재에 이어 8월 4일부터는 ‘군사행동’의 돌입을 예고했다. 펠로시 의장은 대만 방문을 마치고 8월 3일 저녁 한국으로 향했다.
 
  펠로시 의장과 미 의회 대표단은 8월 3일 오산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항에 펠로시 일행을 맞는 한국 대표단은 아무도 없었다. 펠로시 의장은 다음 날인 4일 한국 국회를 방문해 김진표(金振杓) 국회의장을 비롯해 여야(與野) 대표단을 만났다. 그러나 윤석열(尹錫悅) 대통령과의 만남은 없었다.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의 휴가가 시작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통화를 하기는 했다. 8월 4일 오후 윤 대통령은 펠로시 의장과 40분간 전화통화를 했다.
 
  같은 날 오후 1시부터 중국은 대만 해역에서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함대를 동원해 대만 해상을 사방에서 포위해 ‘실탄 사격’을 하고 다량의 전투기로 대만 영공을 침입했다. 대만 해역 전역에 미사일도 발사했다. 전례 없는 대규모 무력(武力)시위였다. 대만 무력 통일 예행연습 수준이라고 했다.
 
  한국 방문을 마친 펠로시 의장은 아시아 순방 마지막 국가인 일본으로 향했다. 8월 4일 밤 일본에 도착한 펠로시 의장은 다음 날 아침 8시 일본 총리 관저를 방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 조찬 회담을 가졌다. 그때도 중국은 대만 해상에 계속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었다.
 
  펠로시 의장은 8월 1일부터 5일까지 아시아 순방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대만, 한국, 일본 등 모두 5개국을 방문했다. 펠로시 의장은 5개국 가운데 4개국에서 국가정상과 회담을 가졌다. 한국에서만 국가정상과의 만남이 없었다.
 
 
  민주주의와 전제주의 사이의 선택
 
  펠로시 의장은 8월 3일 차이잉원 대만 총통을 만난 자리에서 “오늘날 세계는 민주주의와 전제주의(Autocracy) 사이의 선택에 직면했다”며 “대만과 전(全) 세계의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결의는 여전히 철통 같다”고 말했다. 중국은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 대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도발이라고 반발했다. 그러나 펠로시는 ‘세계적 차원의 민주주의 수호’의 문제라고 선언했다.
 
  펠로시의 아시아 순방은 미국의 중간선거를 앞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런 비판과는 별도로 지금 세계의 상황은 펠로시의 말대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그렇지만 동아시아 일대에서의 중국의 도발도 그냥 영토적 야심의 문제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렇듯 중국의 도발도 ‘전체주의적 전제정(專制政)’의 ‘자유민주적 가치에 입각한 국제질서’에 대한 공격이다.
 

  중국은 대만만이 아니라 도련선(島鏈線)을 앞세워 해양에 인접한 동아시아 국가 모두를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중국이 장악하려는 해양로(海洋路)는 한국에도 경제적으로 생명선(生命線)이다. 대만이 중국의 직접 지배하에 넘어가면 한국으로의 수송로는 중국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러면 한국은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위험해진다. 국제정치적 운명은 물론 자유민주체제 자체도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한국이 오늘날 누리고 있는 경제적 성취는 자유민주체제로 건국되고 자유민주 문명 세계의 일원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기반이 지금 안팎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한국의 상황은 대만 이상으로 긴박하다. 그런데 한국은 처음부터 그랬다.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부터가 공산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결이었다. 그 대결은 단순히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전체주의 진영과 자유민주 진영 간의 세계적 대결의 연장선이었다.
 
 
  李承晩, 태평양동맹 구상
 
  그 긴박한 상황을 돌파해 자유민주체제 대한민국을 건국해낸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위업(偉業)을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이 맞고 있는 도전과 관련해 다시 한 번 상기해봐야 할 게 있다. 이승만이 공산전체주의의 제국주의적 위험을 시종일관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그에 맞서는 싸움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1898년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서 제국주의 러시아 세력의 철수를 요구한 바 있었다. 나중에 공산혁명이 일어난 후 이승만은 러시아의 제국주의 성향은 여전할 것이며, 오히려 공산주의를 명분으로 삼아 제국주의적 성향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는 사상(思想) 자체도 문제지만 그것이 제국주의적 성향과 결합할 때는 제어할 수 없는 악마적 위험을 낳는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 같은 위험을 간파하고 선구적(先驅的)으로 대응해간 세계적으로 거의 드문 지도자였다. 미국을 위시한 유럽세계는 한동안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미국과 서구(西歐)는 동유럽이 소련의 위성국(衛星國)으로 전락하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대응에 나서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천명하고 1949년 4월 4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결성했다. 이승만은 아시아에서도 나토와 같은 자유민주체제 수호를 위한 집단안보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것이 태평양동맹(Pacific Pact) 구상이었다.
 
  이승만은 이를 위해 필리핀의 퀴리노(E. Quirino) 대통령에게 특사(特使)를 보내 동의를 얻어냈다. 이에 따라 퀴리노는 1949년 2월 태평양동맹을 제창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1949년 8월 6일 한국 진해(鎭海)에서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대만) 총통과 회담을 갖고 8월 8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국제공산주의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집단안보체제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대응의 대상은 소련만이 아니었다. 공산화된 중국도 당연히 대상이었다. 이승만은 중공(中共)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와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이 결합한 괴수(怪獸)가 될 것으로 보고 있었다.
 
 
  아시아민족반공연맹
 
  그러나 이승만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미국의 냉담한 반응 때문이었다. 미국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에 실망하여 원조를 중단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화에도 불구하고 대륙 중국에 대한 막연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퀴리노-장제스-이승만’이 연대한 태평양동맹 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이 중대한 착각이었음은 6·25전쟁이 발발한 뒤 중공군 또한 전면적으로 침공해오면서 증명됐다.
 
  이승만은 6·25전쟁 휴전 뒤 1953년 10월 1일 한미(韓美)동맹을 체결해내 한국 안보의 반석을 다졌다. 그런데 한미동맹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아시아에서의 국제적인 반공안보체제 구축에도 노력했다.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The Asian People Anti-Communist League)을 만드는 것이었다. 중공은 당연히 그 대응의 대상이었다.
 
  이승만은 1954년 5월 서울에 이어 6월에는 진해에서 한국·대만·필리핀·태국·베트남 5개국 및 기타 지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민족반공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한국반공연맹도 창설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까지 5차에 걸쳐 아시아민족반공대회를 이끌어나갔다.
 
  이승만의 반공노선을 계승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한국반공연맹을 특별법인체로 재정비했다. 1967년 9월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을 모체로 하여 64개국을 회원으로 한 세계반공연맹(WACL)이 창립됐다. 한국반공연맹이 주도한 것이었다. 세계반공연맹은 1990년 소련 등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될 당시 세계자유민주연맹(WLFD·World League for Freedom and Democracy)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WLFD는 현재 세계 139개국을 회원으로 하고 있다. 그 뿌리는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이다.
 
  이승만은 공산전체주의라는 또 다른 제국주의에 맞서는 세계적 대응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1965년 이승만 대통령 서거 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을 기려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새 역사를 짓고 또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근대화의 상징적 존재”라고 조의(弔意)를 표했다.
 
 
 
朴正熙, 미국에 먼저 월남 파병 제안

 
  5·16혁명으로 등장한 박정희는 혁명공약에서 반공노선을 분명히 함과 아울러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우방과의 연대(連帶)를 굳건히 하겠다고 천명했다. 이것은 이승만 노선의 확고한 계승이었다. 박정희는 그와 함께 5·16 공약에서 밝힌 ‘실력 양성’을 위한 노력을 본격화했다. ‘수출입국과 산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에 나섰다.
 
  그것을 위해선 국제정치적 여건의 조성은 필수였다. 세계시장경제체제에 진입할 수 있는 국제 관계를 다져야 했다. 동시에 안보 차원에서도 국제정치적 안정성을 더욱 다져야 했다. 박정희는 2년간의 군정(軍政)을 끝내고 민선(民選) 대통령에 선출되자마자 한일국교 정상화에 나섰다. 한일국교 정상화는 베트남전으로 국제정치적 부담이 가중돼가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군정 시절인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미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용의를 밝힌 바 있었다. 참전을 자청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국의 대한(對韓) 안보공약을 확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베트남전 격화는 주한미군을 부분적으로라도 베트남으로 돌리게 할 수도 있었다. 이를 사전(事前) 차단하기 위해 베트남전 참전을 먼저 제안한 것이다. 1964년 9월 11일 한국은 베트남 파병을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65년 6월 22일 한일국교 정상화 조약을 체결했다.
 
 
  ASPAC 창설
 
1966년 6월 14일 ASPAC 제1차 본회의가 서울 워커힐 코스모스라운지에서 열렸다. 사진=조선DB
  박정희의 국제정치적 노력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1964년 아시아 반공국가들 간의 결속 강화를 목적으로 아시아태평양각료이사회(ASPAC·Asian and Pacific Council) 구상에 착수하여 1966년 서울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한국, 일본, 대만, 호주,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등 9개국을 회원국으로 하고 라오스, 인도네시아를 옵서버로 했다. ASPAC은 중공에 맞서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공이 유엔에 가입하면서(1971년) 1973년부터 해체 상태로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위협이 점증하는 지금으로선 더욱이 그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박정희의 국제정치적 행보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분투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첫 번째 임기 동안 한국 경제는 연간 평균 9.5% 성장을 이룩했다. 1967년 두 번째 임기를 맞이했을 무렵에는 더 높은 도약을 예감케 하고 있었다. 1968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3.1%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국제적으로 예상치 못했던 도전이 닥쳐오고 있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은 무장 특수부대를 내려보내 청와대를 습격하는 도발을 감행했다.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동해 공해(公海)상에서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미 해군 역사상 외국 군대에 자국 군함이 나포된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한국 경제가 성장가도에 본격 진입해가던 때였는데 연초부터 안보상황이 격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美는 해·공군, 아시아는 지상군 제공”
 
  1968년 제4차 ASPAC 각료회의의 일본 개최를 앞둔 11월 미국에서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닉슨은 1967년 10월 미국의 계간(季刊)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베트남 이후의 아시아(Asia after Viet Nam)〉라는 논문을 게재한 바 있었다. 핵심적 내용은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 국가들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의 닉슨 독트린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대책이 마련돼야 했다. 아시아의 국제적 안보체제 구축은 이제 긴급한 현안이 됐다.
 
  그와 관련해 닉슨은 상기 논문에서 ASPAC의 집단안전보장체제 가능성에 기대를 표명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 자신의 책임으로”라는 것을 ASPAC을 통해 실현코자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가능성이 없었다. ASPAC 설립 당초부터 일본은 ASPAC이 안보기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1968년 3월 태국이 ASPAC의 안보기구화 제안을 했을 때 일본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우리나라는 헌법상의 제약으로 지역적 군사기구에 참가할 수 없다. 따라서 ASPAC이 안전보장을 위한 상호원조기구로 개조되면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재무장을 금지하는 평화헌법은 일본 스스로가 만든 게 아니라 맥아더 군정이 만들어 일본에 강제한 것이었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탄생한 자민당은 그것을 기본노선으로 했다. 그 강요를 명분으로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 자신은 철저히 경제에만 매진하는 노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ASPAC의 역할에 대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군사동맹화는 ASPAC의 유지마저 어렵게 할 수 있었다. 결국 다른 대안(代案)이 필요했다.
 

  1968년 11월 19일 국회예산위원회에서 공화당의 양찬우 의원은 “아시아의 안보체제로서 ASPAC의 역할을 중시하는 닉슨 씨의 새 정책에 우리나라가 주동이 되어 (중략) ASPAC을 군사적 동맹체로 발전시킬 용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다음 날인 20일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는 “일본·말레이시아와 같은 국가들의 외교정책상 ASPAC의 군사동맹화는 어렵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11월 21일 정일권 총리는 NATO와 같은 집단방위기구인 아시아태평양조약기구(APATO) 창설을 위한 시안(試案)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11월 23일 정일권 총리는 포터 주한 미 대사와의 면담을 통해 미국 측에 APATO 구상을 타진했다. 그러면서 “APATO는 미국이 해·공군을 지원하고 아시아 국가들이 지상군을 제공”하는 구상이라고 밝혔다. ‘미군의 지상군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차기 닉슨 정권의 정책 방침을 충족시키는 셈이었다.
 
  11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은 APATO 구상의 목적과 방향성에 대해 내각에 직접 지시를 했다. 핵심은 첫째, APATO는 중공과 여타 아시아공산주의를 저지하는 것이어야 하며, 둘째 실효성을 위해선 일본과 대만의 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이 여전히 헌법 9조를 핑계로 안보동맹에는 참여하지 않으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을 통해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해 참여를 실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흔히 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 7월 25일 불시에 ‘닉슨 독트린’을 접하고 크게 당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박 대통령은 닉슨 취임 이전부터 그의 안보 정책 변화 가능성을 주시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닉슨의 판단 착오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2년 2월 중국을 전격 방문, 소련 견제를 위해 중공과 손잡았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그러는 동안 미국의 입장이 달라져 갔다. 닉슨은 1967년 《포린 어페어》 논문을 쓸 당시만 해도 집단안보기구 구상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닉슨은 ASPAC의 안보기구화 구상이 한계에 부딪히자 집단안보기구 구상 자체를 사실상 포기해버렸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의 APATO 구상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1969년 7월 25일 닉슨 대통령은 괌에서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 각국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집단안보기구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던 닉슨이 최종적으로 이렇게 입장을 정리한 것은 베트남전의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게 1차적 이유였다.
 
  더 큰 배경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1972년 2월 마침내 이뤄진 닉슨-마오쩌둥(毛澤東) 회담을 통해 드러났다. 닉슨은 미중(美中) 관계 개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닉슨은 1967년 논문에서 중공과 아시아공산주의의 위협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제기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 논문은 그와 모순된 또 다른 구상을 담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봐서, 중국을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국제사회 밖에 방치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중국의 환상이나 적대심이 증폭되어, 이웃 국가들을 위협하는 행동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중국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세계는 안전해질 수 없다. (중략) 중국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베이징(北京) 정부에 중국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 즉 제국주의적인 야심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나아가 중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해외에서의 모험주의가 아닌 국내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내부 문제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중국 측에 납득시켜야 한다.〉
 
  닉슨이 중국에 대해 언급한 것 가운데 한 가지는 확실히 옳았다. “중국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세계는 안전해질 수 없다”는 언명이다. 지금 중국은 그 점을 더없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닉슨 식으로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닉슨은 “베이징 정부에 중국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고 했다. 완곡한 정치적 어법이겠지만 어떤 국가도 ‘설득’으로 변화하는 법은 없다. 더욱이 세계와 함께할 수 있는 중국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선 공산독재라는 전제정 자체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설득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닉슨의 미중 관계 개선은 소련과 중공 사이에 쐐기를 박는 전략적 함의가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든 ‘중국의 변화’에 대해선 아니었다.
 
 
  다시 돌아온 역사
 
  APATO 구상은 중국에 몰두했던 미국과 안보기구 동참을 피했던 일본의 입장 때문에 무산됐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미국·일본 모두 입장이 바뀌었다. 지금 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은 ‘쿼드(Quad)’로 불리는 ‘4자 안보 대화’라는 안보협의체를 구성한 상태다. 그 같은 변화는 중국이 초래한 것이었다. 쿼드는 2004년 처음 결성됐다가 2008년 중단됐었다. 그런데 2013년 시진핑 등장 이후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도발이 급증하자 2017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정상회의에서 쿼드 4개국은 협의체 부활을 공식화했다.
 
  이와 함께 아시아판 나토 구상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쿼드가 아시아판 나토의 모체(母體)가 될 수 있다고도 한다. 역사는 이렇게 돌고 돌아 50여 년 전 APATO가 제기되었던 상황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은 쿼드에 참여하지 않았다. 문재인(文在寅) 정권 때 쿼드 참여 요청이 있었지만 문 정권이 거절한 것이었다.
 
  한편 한국은 지금 ‘칩4’로 일컬어지는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참여를 요청받고 있다. 미국·한국·일본·대만 등 첨단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4개국 간의 협의체다. 반도체는 이제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다. 스마트폰에서부터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중국은 독자적으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능력이 없다. 절대적으로 수입에 의존한다. 2020년 3500억 달러였던 중국의 반도체 수입액은 2021년에는 4325억 달러로 급증했다. 그래서 중국은 그 기술 확보에 혈안이다. 그러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런 만큼 ‘칩4 협의체’는 중국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전략적 대응이 된다.
 
 
  왕이의 ‘응당 5개 조’
 
  윤석열 정부는 지난 8월 7일 칩4 예비회의 참여를 결정했다. 그러나 본격 참여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칩4 참여에 대해서도 협박조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불량한 상대에게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오히려 기고만장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펠로시의 아시아 5개국 순방이 있었던 며칠 뒤인 8월 9일 박진(朴振) 외교장관과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 간의 회담이 있었다. 중국은 이 회담에서 소위 ‘5개 응당(應當)’이라는 요구를 했다. 한국의 주권(主權)과 독립을 노골적으로 침해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5개 응당’이 아니라 ‘5개 부당(不當)’이며 한마디로 한국에 대한 협박이었다. 중국의 한국에 대한 이 같은 오만방자한 행태는 이전 문재인 정권의 굴종적 태도가 초래한 바 크다. 윤석열 정부는 더 이상 그래선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직접 만나지 않은 데는 나름의 내막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중국에 대해 잘못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눈치의 느낌을 주는 것은 거의 언제나 기대와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일 뿐 아니라 중국과 같은 방자한 상대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자유의 파도’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2월 중화민국을 국빈 방문, 장제스 총통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대통령기록관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2월 15일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국빈(國賓)만찬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혹자는 자유중국과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防波堤)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서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란 말입니까. 우리는 전진하고 있습니다. 폭정(暴政)의 공산주의를 몰아내고 자유세계의 구현을 위하여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입니다. 이 자유의 파도는 머지않아 북경이나, 평양에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전제주의에 맞선 민주주의 수호를 선언한 바로 그 대만에서 56년 전 박정희 대통령은 ‘자유의 파도’를 말했다. 국제정치는 섣부른 모험을 허용치 않는다. 그러나 주권국가다운 결기를 놓아버리면 모험 이상으로 위험해진다. 중국에 대해선 특히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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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lethia    (2022-09-02) 찬성 : 1   반대 : 1
시대를 앞서간 지도자들이오, 우리에겐 과분한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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