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中, 從中從北 세력 이용해 한국을 전략적으로 흔들어
⊙ “중국에는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이 아예 없으며 그 체제는 공포에 바탕을 둔 폭정에 지나지 않는다”(몽테스키외)
⊙ ‘4개 현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정치적 현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 소유권 개념도, 시민사회도 없는, 공산당원의 나라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
⊙ “중국에는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이 아예 없으며 그 체제는 공포에 바탕을 둔 폭정에 지나지 않는다”(몽테스키외)
⊙ ‘4개 현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정치적 현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 소유권 개념도, 시민사회도 없는, 공산당원의 나라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
-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12월 15일 베이징대 연설에서 한국도 中國夢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사진=뉴시스
2022년 8월 24일은 한중(韓中)수교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반중여론이 높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는 지난 6월 29일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2월부터 6월 초까지 한국, 미국, 일본 등 19개국 국민 2만4525명을 상대로 한 조사였는데 한국인의 80%가 반중(反中)이었다.
한국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반중여론도 82%였다. 일본의 반중여론은 87%로 19개국 중 가장 높았고, 호주와 스웨덴이 86%, 83%로 뒤를 이었다. 네덜란드가 75%, 독일과 캐나다는 74%가 반중이었다. 반중은 세계적인 현상인 것이다.
한국의 반중여론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당시인 2015년에는 37%였다. 그런데 문재인(文在寅) 정권 시절인 2017년 61%로 급증했고, 2018년 60%, 2019년 63%, 2020년 75%, 2021년 77%로 꾸준히 증가했다. 그리고 2022년 들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한국은 조사 대상국 중 유일하게 청년층의 반중여론이 노년층보다 높았다.
한중수교 이후 한동안 한국에는 낙관적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반중여론이 압도적이다. 더욱이 미래세대인 청년층의 반중여론은 세계 최고다. 왜 이렇게 됐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중국 자신이 야기한 것이다. 지난 경과를 통해 짚어보자.
한국의 뒤통수를 친 중국
1992년 한중수교 이래 한중 관계는 ‘우호협력 관계(1992년) → 협력동반자 관계(1998년) →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2003년) →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2008년)’라는 단계적 격상의 과정을 거쳐 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계속 긴밀해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인 2000년 ‘마늘 파동’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중국산 냉동 마늘 수입이 지나치게 급증하자 관세율을 올리는 세이프가드를 발동했다. 정상적 조치였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산 휴대폰 등의 수입을 전면 중단하는 보복 조치를 취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2002년부터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본격화했다. 고구려 등이 처음부터 중국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하는 역사왜곡 작업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한중 관계를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지만 마늘 파동에 이어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으로 뒤통수를 맞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예고탄에 불과했다. 2015년 9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戰勝節) 행사 참석은 그에 대한 논란을 떠나 어떻든 한국이 중국에 전례(前例) 없는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성의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2016년 주한미군이 사드(THAAD·종말 고고도 지역방어 체계)를 도입하자 중국은 격렬한 반발을 보이며 한국에 대해 대대적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중국의 반발은 억지였다. 중국은 이미 2014년부터 한국 전역을 감시하는 레이더를 대거 설치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들은 한반도를 감시하면서 한국과 주한미군은 중국의 일부라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례(無禮)했다. 중국 외교부는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에 대항해서 되겠냐? 너희 정부가 사드 배치를 하면 단교 수준으로 엄청난 고통을 주겠다”고 했다. 외교적으로 있을 수 없는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언사였다.
“파리가 말 궁둥이에 붙어 가듯…”
그런데 몇 가지 돌출적 사안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인 것은 중국이 한국을 전략적으로 흔드는 것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핵(北核) 문제가 그것을 보여준다. 중국은 에너지와 식량, 그 외 교역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북한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 이것을 끊어버리면 북한의 핵 장난은 그 순간 끝난다. 그러나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핵을 개발하고 있는 북한에 불만을 표출하지만 결정적인 고비에선 언제나 북한 편을 들었다. 중국으로선 북한이 한국과 미국을 견제하고 흔드는 전략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야욕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공산중국도 마찬가지다. 마오쩌둥이 6·25전쟁 당시 중국군 침공을 밀어붙이면서 한 말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이었다. 한반도를 자신들의 일부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2017년 시진핑(習近平)도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다. 그러나 6·25전쟁 때처럼 군사적으로 직접 나설 수는 없다. 한미 동맹의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을 활용하면 돌려치기가 된다. 북한을 통해 한국을 압박하면 한국 내의 종북종중(從北從中) 세력이 움직인다. 그것을 통해 한미 동맹을 흔드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 당시 이 같은 전략은 효과를 극명히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드 배치는 사실상 방치 상태가 됐다. 하지만 중국이 사드 배치를 이유로 행했던 한류(韓流) 금지의 한한령(限韓令)은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권은 항의의 시늉조차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에 대한 굴종적 자세를 이어갔다.
문재인과 그 정권 인사들의 종중(從中) 언사는 새삼 열거할 것도 없다. 다만 두 가지 직설적 언사는 다시 기억해두자. 일찍이 “한국은 궁극적으로 다시 중국의 속국(屬國)이 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한 자가 있었다. 박원순은 “파리가 말 궁둥이에 붙어 가듯 한국은 중국에 붙어 가야 한다”고 했다.
중국이 북한을 혈맹(血盟)이라고 했듯이 종북(從北)과 종중도 혈맹이다. 종북 성향의 586운동권 출신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뿌리 깊은 성향이 종중이다. 그런 자들이 정권을 잡아 그 성향대로 했다. 문재인 정권 시대는 한국에 진정 위험한 시대였다.
中共에는 시민사회가 없다
한중수교 이후 한국은 한동안 중국에 대한 경계가 매우 약했다. 한국만이 아니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도 그랬다. 중국이 경제성장을 이룩하면 정치적으로도 민주적 변화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어설픈 생각이었다.
경제와 정치는 긴밀하다. 경제적 기반이 취약하면 정치적 성숙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자동적으로 정치적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성숙은 또 다른 차원이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건 맞다. 그러나 부(富)의 성취가 곧바로 예(禮)를 가져다주는 건 아니다. 졸부(猝富)의 졸렬함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예를 갖춤은 별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도 마찬가지다. 근대 국민국가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근대 국민국가는 시민사회와 짝을 이룬다. 시민사회의 수준이 그 국민국가의 정치적 수준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민과 시민사회가 전제될 때의 얘기다. 시민과 시민사회는 소유권의 인정과 보장이 없으면 아예 성립 자체가 안 된다. 정치적 수준을 논할 것도 없다.
중국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래 괄목할 경제성장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에 어울리게 기대됐던 정치적 성숙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정치적 성숙을 가능하게 할 시민적 가치 자체가 전혀 성립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13조원을 빼앗긴 마윈
이 같은 상태는 중국공산당 스스로 못 박아 놓은 것이었다. 1992년 10월 12~18일 있었던 제14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는 개혁·개방을 하되 ‘4개 기본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견지, 인민민주독재, 공산당의 영도, 사회주의 노선’이다. 간단히 말해 경제성장을 추진하겠지만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독재를 확고히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선 개인의 소유권·재산권은 잠정적일 뿐이다. 공산당에 의해 언제든 박탈될 수 있다. 한때 중국 최고 부호로 유명했던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馬雲)은 중국 금융당국의 제재에 의해 재산을 120억 달러(13조원)나 증발(蒸發)당했다. 뿐만 아니라 88일간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중국의 금융 정책을 비판한 때문이었다. 마윈만이 아니다. 이 같은 일들은 크고 작은 형태로 수없이 자행되고 있다.
중국에는 시민도 시민사회도 없다. 제도적으로 있을 수 없다. 중국은 1억 명에 육박하는 공산당 당원이 지배하는 나라다. 마윈도 공산당 당원이었다. 마윈의 재산 증발은 그의 당적(黨籍) 박탈과 함께 이루어졌다. 공산당과 무관하게 부(富)를 일구는 것은 불가능하다. 직접적으로 당원이 아니라도 공산당과 협조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에서 재산권은 최종적으로 공산당이 갖는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 시민적 양식에 입각한 정치적 성숙을 기대할 수는 없다.
몽테스키외(1689~1755년)는 일찍이 “중국에는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이 아예 없으며 그 체제는 공포에 바탕을 둔 폭정(暴政)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 단지 전근대(前近代) 왕조 시대의 중국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오늘의 중국도 그렇다. 중국은 전근대의 전제주의에 공산당의 전체주의적 전제정이 그대로 겹쳐 있다.
전제주의와 中華主義
중국의 경제적 번영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특히 송(宋)나라 시대 중국의 번영은 대단했다. 역대 왕조 가운데 영토는 가장 작았지만 절정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재산권이 보호되고 나름의 개방과 자유로움이 있었던 덕분이다. 송이 멸망하지 않았으면 중국이 서구(西歐)보다 먼저 근대화를 이룩했을 수도 있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송은 그 번영을 지켜나가지 못했다. 무(武)를 경시한 숭문주의(崇文主義)의 탓이 컸다. 어떻든 중국에서의 근대적 성장은 송을 끝으로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몽골 지배하의 원(元)나라를 거친 뒤의 명(明)은 극악한 전제정 체제였다. 태조 주원장은 황권(皇權) 강화를 위해 살육의 공포정치를 했다. 3대인 성조 영락제는 동창(東廠)이라는 비밀경찰을 동원한 통치를 했다. 명은 그러면서 우민(愚民) 정책을 폈다. 남송 시대에 탄생한 성리학(性理學)은 명 시대 들어 전제정의 이데올로기가 됐다.
성리학은 등장 당시에는 긍정적 의미도 있었다. 혈통이나 신분이 아닌 과거 급제로 형성된 사대부(士大夫)층은 전제왕정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그 사대부층이 성리학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성리학에는 송나라의 개방적이었던 사회상에 대한 지식층의 부정적 인식이 있었다. 과부의 재혼도 당연히 여겼던 여성의 권리를 타락으로 보았다. 상인들의 성장도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것이 명나라 시대에 들어와 극단화했다. 전제왕정에 대한 견제의 의미는 사라지고 우민의 이데올로기만 남았다. 이것은 청(淸)나라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렇게 하여 중국의 전제주의 문화는 역사적으로 굳어진 속성이 됐다. 중국은 송나라 시대에 맞이한 근대적 문명 도약의 기회를 상실한 뒤 전제주의가 본성화(本性化)했다. 외적(外的)인 중화주의(中華主義)는 그 전제주의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정치·사회 현대화 없는 ‘4개 현대화’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시작할 때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대외 정책의 기조로 하라고 했다. “참을성 있게 힘을 기른다”는 것이다. “100년간 미국과의 대결은 피하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시진핑이 들어서면서 대국굴기(大國崛起)를 내걸고 패권주의적(覇權主義的) 야심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의 지침에서 때 이른 일탈(逸脫)이었다. 그런데 그 일탈은 내적인 문제점의 필연적인 외적 발현이기도 했다.
중국은 근대적 가치관의 성숙을 이룩하지 못한 전근대성의 문제를 그대로 안은 채 공산전체주의 국가로서 출발했다. ‘4개 현대화(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한다고 했지만 돈만 벌어들였을 뿐 사회적·정치적 현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국제정치적 행보와 구호도 과거의 영광 재현이다. 시진핑이 내건 중국몽(中國夢)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전근대 전제왕정 시대 중화주의의 복사판이다. 국제적인 선전·공작 기구로 내세운 기관도 하필이면 2500년 전 성현(聖賢)의 이름을 건 ‘공자학원’이다.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변함없는 야심’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자신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는 자유민주 진영이 부여한 기회 덕분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 기회를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패권적 야심 추구에 나섰다.
인류 역사는 수많은 진통과 전란(戰亂)을 겪었지만 보다 더 평화로운 세계를 향해 서서히 성장해왔다. 문명적 성취와 성숙의 결과다. 물론 서구 근대사는 전란으로 점철돼 있다. 양차대전의 참상도 있었다. 그러나 근대문명은 그 같은 문제를 극복하고 현대에 들어서면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낳았다. 자유민주문명의 힘이었다. 그런데 중국에는 이게 없다.
칸트는 일찍이 1795년 《영구평화론》에서 국가들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는 세계시민사회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개별 국가 내에서 시민적 평화를 위해 국가 구성이 불가피하듯이, 국가들 간에도 ‘국제연맹’ 같은 것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국제연합이 존재하는 오늘날에도 감상적으로 취급되곤 한다. 사실 평화는 언제나 잠정적이다. 그러나 칸트가 평화의 조건으로 ‘시민’을 포착한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후 자유민주 진영 국가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무력(武力) 충돌은 없었다. 여기에는 냉전(冷戰)이 자유민주 진영의 갈등을 억제했다는 요인도 있다. 하지만 자유민주 진영 나라들이 시민적 가치를 소중히 하고 공유(共有)하게 됐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칸트의 시민·평화론에는 자유로운 통상(通商)과 상업정신이라는 바탕이 있다. 통상·상업은 무력에 의한 ‘약탈 대신 거래’의 선택이다. 이 같은 상업정신은 한 국가 내적으로도 시민정신의 기초가 된다. 시민사회에 기반한 국민국가란 소유권과 거래의 규칙을 수호하는 정치체다. 세계시민에 바탕한 평화란 결국 그것의 국제적 확장판이다.
유엔과 나토
물론 통상의 확대가 곧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평화는 단지 시민적 양식만으로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시민적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그것을 지키는 것을 임무로 하는 무장된 힘이 있어야 한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수립된 국제연맹은 실효가 없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뒤 설립된 국제연합은 달랐다. 역할을 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첫 번째 사례가 한국이었다. 공산 세력의 침략으로 발발한 6·25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은 유엔이 한국 수호를 위해 참전을 결의하면서 전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존재도 있었다.
나토는 1949년 4월 4일 미국, 영국, 캐나다, 덴마크,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프랑스 등 12개국을 회원으로 하여 창설됐다. 사회주의 진영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엔이 직접적으로 군대를 가질 수는 없었다. 더욱이 소련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자유민주 진영의 입장에선 별도의 군사적 힘이 있어야 했다. 나토가 그 역할을 했다. 6·25전쟁 참전 유엔군의 핵심은 나토 회원국 군대였다.
6·25전쟁 참전 16개국은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연방, 룩셈부르크 등이다(순서는 파병인원 수). 그런데 그중 9개국이 NATO 회원국이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네덜란드, 그리스,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등이다. 6·25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하나의 국가를 위해 지원한 전쟁이었다. 유엔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 중심에는 나토라는 군사동맹체가 있었다.
‘무장한 칸트’
그럴 만했다. 나토는 그냥의 군사조약이 아니었다. 가치 동맹이었다. 1949년 워싱턴에서 체결된 나토의 조약은 모두 14개 조로 돼 있다. 그중 군사적 핵심 항목은 제5조다. ‘나토 회원국 중 하나가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는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 행위로 간주해 집단 자위권을 발동, 자동 개입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전문(前文)은 더 중요하다.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본 조약의 모든 당사국은 유엔헌장의 목적과 원칙에 대한 신념과 모든 국민 및 정부와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하는 열망을 재확인한다. 조약 당사국은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및 법치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국민들의 자유와 공동의 유산 및 문명을 수호할 것을 결의한다.” 자유민주문명의 가치 수호 선언이다.
‘나토와 유엔’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무장(武裝)한 칸트’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언명을 빌리자면 “무장한 예언자만이 성공한다”, 즉 세계시민에 바탕한 평화의 실현을 위해 ‘국제연맹’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본 구상은 그렇게 하여 현실로 구현되었다 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나토의 초청을 받아 나토 회담에 참석했다. 실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나토는 6·25전쟁 당시 한국을 구한 참전국의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 가치 동맹에 입각한 평화 수호의 영역을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朴正熙, 아시아판 나토 제안
나토는 6월 2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정상회의 첫날 공개한 향후 10년간 목표를 담은 ‘전략 개념’에서 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위협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중국의 야망과 강압적인 정책은 우리의 이익·안보·가치에 대한 도전이다”고 한 것이다.
러시아와 관련해서도 경계를 분명히 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깊어지고,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를 약화하려는 양측의 시도는 우리의 가치와 이익에 반한다”고 명시했다. 한편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해서도 위협적 문제로 적시했다.
이와 관련 아시아판 나토 구상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시아판 나토 구상은 일찍이 1968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이미 제기한 바 있었다. 아시아태평양조약기구(APATO·Asia-Pacific Treaty Organization) 구상이다. 점증하는 공산중국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선 NATO와 같은 집단안보기구로서의 APATO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의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의 자체방위론’에 대한 능동적 대응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APATO 구상은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이 구상은 예언적이다. 나토가 마침내 중국을 위협으로 명시한 것은 아시아판 나토 구상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은 한중 관계 30주년을 전례 없는 격변과 함께 맞고 있다. 어떻게 임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함께하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 자신이 미래가 아닌 과거 패권의 재현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중국몽과 함께하겠다”고 했었다.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인 우상호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의 나토회의 참석에 대해 “신냉전 시대 한쪽 선택은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균형을 말하는 듯하지만 중국에 붙어 가야 한다는 게 본뜻이다. 그러나 한국은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냐?”는 중국과 미래를 함께할 수는 없다. 여론도 그렇고 국제정세도 그렇다.⊙
한국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반중여론도 82%였다. 일본의 반중여론은 87%로 19개국 중 가장 높았고, 호주와 스웨덴이 86%, 83%로 뒤를 이었다. 네덜란드가 75%, 독일과 캐나다는 74%가 반중이었다. 반중은 세계적인 현상인 것이다.
한국의 반중여론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당시인 2015년에는 37%였다. 그런데 문재인(文在寅) 정권 시절인 2017년 61%로 급증했고, 2018년 60%, 2019년 63%, 2020년 75%, 2021년 77%로 꾸준히 증가했다. 그리고 2022년 들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한국은 조사 대상국 중 유일하게 청년층의 반중여론이 노년층보다 높았다.
한중수교 이후 한동안 한국에는 낙관적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반중여론이 압도적이다. 더욱이 미래세대인 청년층의 반중여론은 세계 최고다. 왜 이렇게 됐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중국 자신이 야기한 것이다. 지난 경과를 통해 짚어보자.
한국의 뒤통수를 친 중국
1992년 한중수교 이래 한중 관계는 ‘우호협력 관계(1992년) → 협력동반자 관계(1998년) →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2003년) →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2008년)’라는 단계적 격상의 과정을 거쳐 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계속 긴밀해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인 2000년 ‘마늘 파동’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중국산 냉동 마늘 수입이 지나치게 급증하자 관세율을 올리는 세이프가드를 발동했다. 정상적 조치였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산 휴대폰 등의 수입을 전면 중단하는 보복 조치를 취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2002년부터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본격화했다. 고구려 등이 처음부터 중국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하는 역사왜곡 작업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한중 관계를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지만 마늘 파동에 이어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으로 뒤통수를 맞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예고탄에 불과했다. 2015년 9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戰勝節) 행사 참석은 그에 대한 논란을 떠나 어떻든 한국이 중국에 전례(前例) 없는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성의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2016년 주한미군이 사드(THAAD·종말 고고도 지역방어 체계)를 도입하자 중국은 격렬한 반발을 보이며 한국에 대해 대대적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중국의 반발은 억지였다. 중국은 이미 2014년부터 한국 전역을 감시하는 레이더를 대거 설치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들은 한반도를 감시하면서 한국과 주한미군은 중국의 일부라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례(無禮)했다. 중국 외교부는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에 대항해서 되겠냐? 너희 정부가 사드 배치를 하면 단교 수준으로 엄청난 고통을 주겠다”고 했다. 외교적으로 있을 수 없는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언사였다.
“파리가 말 궁둥이에 붙어 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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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은 6·25 당시 ‘순망치한’이라며 북한을 지원했다. 1951년 1월 서울을 점령한 후 중앙청에서 환호하는 중공군. |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야욕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공산중국도 마찬가지다. 마오쩌둥이 6·25전쟁 당시 중국군 침공을 밀어붙이면서 한 말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이었다. 한반도를 자신들의 일부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2017년 시진핑(習近平)도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다. 그러나 6·25전쟁 때처럼 군사적으로 직접 나설 수는 없다. 한미 동맹의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을 활용하면 돌려치기가 된다. 북한을 통해 한국을 압박하면 한국 내의 종북종중(從北從中) 세력이 움직인다. 그것을 통해 한미 동맹을 흔드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 당시 이 같은 전략은 효과를 극명히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드 배치는 사실상 방치 상태가 됐다. 하지만 중국이 사드 배치를 이유로 행했던 한류(韓流) 금지의 한한령(限韓令)은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권은 항의의 시늉조차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에 대한 굴종적 자세를 이어갔다.
문재인과 그 정권 인사들의 종중(從中) 언사는 새삼 열거할 것도 없다. 다만 두 가지 직설적 언사는 다시 기억해두자. 일찍이 “한국은 궁극적으로 다시 중국의 속국(屬國)이 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한 자가 있었다. 박원순은 “파리가 말 궁둥이에 붙어 가듯 한국은 중국에 붙어 가야 한다”고 했다.
중국이 북한을 혈맹(血盟)이라고 했듯이 종북(從北)과 종중도 혈맹이다. 종북 성향의 586운동권 출신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뿌리 깊은 성향이 종중이다. 그런 자들이 정권을 잡아 그 성향대로 했다. 문재인 정권 시대는 한국에 진정 위험한 시대였다.
中共에는 시민사회가 없다
한중수교 이후 한국은 한동안 중국에 대한 경계가 매우 약했다. 한국만이 아니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도 그랬다. 중국이 경제성장을 이룩하면 정치적으로도 민주적 변화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어설픈 생각이었다.
경제와 정치는 긴밀하다. 경제적 기반이 취약하면 정치적 성숙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자동적으로 정치적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성숙은 또 다른 차원이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건 맞다. 그러나 부(富)의 성취가 곧바로 예(禮)를 가져다주는 건 아니다. 졸부(猝富)의 졸렬함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예를 갖춤은 별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도 마찬가지다. 근대 국민국가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근대 국민국가는 시민사회와 짝을 이룬다. 시민사회의 수준이 그 국민국가의 정치적 수준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민과 시민사회가 전제될 때의 얘기다. 시민과 시민사회는 소유권의 인정과 보장이 없으면 아예 성립 자체가 안 된다. 정치적 수준을 논할 것도 없다.
중국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래 괄목할 경제성장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에 어울리게 기대됐던 정치적 성숙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정치적 성숙을 가능하게 할 시민적 가치 자체가 전혀 성립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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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바 창업주 마윈. 사진=조선DB |
중국에선 개인의 소유권·재산권은 잠정적일 뿐이다. 공산당에 의해 언제든 박탈될 수 있다. 한때 중국 최고 부호로 유명했던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馬雲)은 중국 금융당국의 제재에 의해 재산을 120억 달러(13조원)나 증발(蒸發)당했다. 뿐만 아니라 88일간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중국의 금융 정책을 비판한 때문이었다. 마윈만이 아니다. 이 같은 일들은 크고 작은 형태로 수없이 자행되고 있다.
중국에는 시민도 시민사회도 없다. 제도적으로 있을 수 없다. 중국은 1억 명에 육박하는 공산당 당원이 지배하는 나라다. 마윈도 공산당 당원이었다. 마윈의 재산 증발은 그의 당적(黨籍) 박탈과 함께 이루어졌다. 공산당과 무관하게 부(富)를 일구는 것은 불가능하다. 직접적으로 당원이 아니라도 공산당과 협조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에서 재산권은 최종적으로 공산당이 갖는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 시민적 양식에 입각한 정치적 성숙을 기대할 수는 없다.
몽테스키외(1689~1755년)는 일찍이 “중국에는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이 아예 없으며 그 체제는 공포에 바탕을 둔 폭정(暴政)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 단지 전근대(前近代) 왕조 시대의 중국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오늘의 중국도 그렇다. 중국은 전근대의 전제주의에 공산당의 전체주의적 전제정이 그대로 겹쳐 있다.
전제주의와 中華主義
중국의 경제적 번영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특히 송(宋)나라 시대 중국의 번영은 대단했다. 역대 왕조 가운데 영토는 가장 작았지만 절정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재산권이 보호되고 나름의 개방과 자유로움이 있었던 덕분이다. 송이 멸망하지 않았으면 중국이 서구(西歐)보다 먼저 근대화를 이룩했을 수도 있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송은 그 번영을 지켜나가지 못했다. 무(武)를 경시한 숭문주의(崇文主義)의 탓이 컸다. 어떻든 중국에서의 근대적 성장은 송을 끝으로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몽골 지배하의 원(元)나라를 거친 뒤의 명(明)은 극악한 전제정 체제였다. 태조 주원장은 황권(皇權) 강화를 위해 살육의 공포정치를 했다. 3대인 성조 영락제는 동창(東廠)이라는 비밀경찰을 동원한 통치를 했다. 명은 그러면서 우민(愚民) 정책을 폈다. 남송 시대에 탄생한 성리학(性理學)은 명 시대 들어 전제정의 이데올로기가 됐다.
성리학은 등장 당시에는 긍정적 의미도 있었다. 혈통이나 신분이 아닌 과거 급제로 형성된 사대부(士大夫)층은 전제왕정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그 사대부층이 성리학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성리학에는 송나라의 개방적이었던 사회상에 대한 지식층의 부정적 인식이 있었다. 과부의 재혼도 당연히 여겼던 여성의 권리를 타락으로 보았다. 상인들의 성장도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것이 명나라 시대에 들어와 극단화했다. 전제왕정에 대한 견제의 의미는 사라지고 우민의 이데올로기만 남았다. 이것은 청(淸)나라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렇게 하여 중국의 전제주의 문화는 역사적으로 굳어진 속성이 됐다. 중국은 송나라 시대에 맞이한 근대적 문명 도약의 기회를 상실한 뒤 전제주의가 본성화(本性化)했다. 외적(外的)인 중화주의(中華主義)는 그 전제주의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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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전시에 있는 선전간판. ‘당의 기본노선을 100년간 바꾸지 마라’는 덩샤오핑의 말이 적혀 있다. 사진=조선DB |
중국은 근대적 가치관의 성숙을 이룩하지 못한 전근대성의 문제를 그대로 안은 채 공산전체주의 국가로서 출발했다. ‘4개 현대화(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한다고 했지만 돈만 벌어들였을 뿐 사회적·정치적 현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국제정치적 행보와 구호도 과거의 영광 재현이다. 시진핑이 내건 중국몽(中國夢)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전근대 전제왕정 시대 중화주의의 복사판이다. 국제적인 선전·공작 기구로 내세운 기관도 하필이면 2500년 전 성현(聖賢)의 이름을 건 ‘공자학원’이다.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변함없는 야심’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자신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는 자유민주 진영이 부여한 기회 덕분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 기회를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패권적 야심 추구에 나섰다.
인류 역사는 수많은 진통과 전란(戰亂)을 겪었지만 보다 더 평화로운 세계를 향해 서서히 성장해왔다. 문명적 성취와 성숙의 결과다. 물론 서구 근대사는 전란으로 점철돼 있다. 양차대전의 참상도 있었다. 그러나 근대문명은 그 같은 문제를 극복하고 현대에 들어서면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낳았다. 자유민주문명의 힘이었다. 그런데 중국에는 이게 없다.
칸트는 일찍이 1795년 《영구평화론》에서 국가들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는 세계시민사회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개별 국가 내에서 시민적 평화를 위해 국가 구성이 불가피하듯이, 국가들 간에도 ‘국제연맹’ 같은 것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국제연합이 존재하는 오늘날에도 감상적으로 취급되곤 한다. 사실 평화는 언제나 잠정적이다. 그러나 칸트가 평화의 조건으로 ‘시민’을 포착한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후 자유민주 진영 국가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무력(武力) 충돌은 없었다. 여기에는 냉전(冷戰)이 자유민주 진영의 갈등을 억제했다는 요인도 있다. 하지만 자유민주 진영 나라들이 시민적 가치를 소중히 하고 공유(共有)하게 됐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칸트의 시민·평화론에는 자유로운 통상(通商)과 상업정신이라는 바탕이 있다. 통상·상업은 무력에 의한 ‘약탈 대신 거래’의 선택이다. 이 같은 상업정신은 한 국가 내적으로도 시민정신의 기초가 된다. 시민사회에 기반한 국민국가란 소유권과 거래의 규칙을 수호하는 정치체다. 세계시민에 바탕한 평화란 결국 그것의 국제적 확장판이다.
유엔과 나토
물론 통상의 확대가 곧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평화는 단지 시민적 양식만으로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시민적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그것을 지키는 것을 임무로 하는 무장된 힘이 있어야 한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수립된 국제연맹은 실효가 없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뒤 설립된 국제연합은 달랐다. 역할을 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첫 번째 사례가 한국이었다. 공산 세력의 침략으로 발발한 6·25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은 유엔이 한국 수호를 위해 참전을 결의하면서 전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존재도 있었다.
나토는 1949년 4월 4일 미국, 영국, 캐나다, 덴마크,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프랑스 등 12개국을 회원으로 하여 창설됐다. 사회주의 진영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엔이 직접적으로 군대를 가질 수는 없었다. 더욱이 소련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자유민주 진영의 입장에선 별도의 군사적 힘이 있어야 했다. 나토가 그 역할을 했다. 6·25전쟁 참전 유엔군의 핵심은 나토 회원국 군대였다.
6·25전쟁 참전 16개국은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연방, 룩셈부르크 등이다(순서는 파병인원 수). 그런데 그중 9개국이 NATO 회원국이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네덜란드, 그리스,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등이다. 6·25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하나의 국가를 위해 지원한 전쟁이었다. 유엔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 중심에는 나토라는 군사동맹체가 있었다.
‘무장한 칸트’
그럴 만했다. 나토는 그냥의 군사조약이 아니었다. 가치 동맹이었다. 1949년 워싱턴에서 체결된 나토의 조약은 모두 14개 조로 돼 있다. 그중 군사적 핵심 항목은 제5조다. ‘나토 회원국 중 하나가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는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 행위로 간주해 집단 자위권을 발동, 자동 개입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전문(前文)은 더 중요하다.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본 조약의 모든 당사국은 유엔헌장의 목적과 원칙에 대한 신념과 모든 국민 및 정부와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하는 열망을 재확인한다. 조약 당사국은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및 법치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국민들의 자유와 공동의 유산 및 문명을 수호할 것을 결의한다.” 자유민주문명의 가치 수호 선언이다.
‘나토와 유엔’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무장(武裝)한 칸트’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언명을 빌리자면 “무장한 예언자만이 성공한다”, 즉 세계시민에 바탕한 평화의 실현을 위해 ‘국제연맹’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본 구상은 그렇게 하여 현실로 구현되었다 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나토의 초청을 받아 나토 회담에 참석했다. 실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나토는 6·25전쟁 당시 한국을 구한 참전국의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 가치 동맹에 입각한 평화 수호의 영역을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朴正熙, 아시아판 나토 제안
나토는 6월 2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정상회의 첫날 공개한 향후 10년간 목표를 담은 ‘전략 개념’에서 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위협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중국의 야망과 강압적인 정책은 우리의 이익·안보·가치에 대한 도전이다”고 한 것이다.
러시아와 관련해서도 경계를 분명히 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깊어지고,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를 약화하려는 양측의 시도는 우리의 가치와 이익에 반한다”고 명시했다. 한편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해서도 위협적 문제로 적시했다.
이와 관련 아시아판 나토 구상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시아판 나토 구상은 일찍이 1968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이미 제기한 바 있었다. 아시아태평양조약기구(APATO·Asia-Pacific Treaty Organization) 구상이다. 점증하는 공산중국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선 NATO와 같은 집단안보기구로서의 APATO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의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의 자체방위론’에 대한 능동적 대응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APATO 구상은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이 구상은 예언적이다. 나토가 마침내 중국을 위협으로 명시한 것은 아시아판 나토 구상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은 한중 관계 30주년을 전례 없는 격변과 함께 맞고 있다. 어떻게 임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함께하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 자신이 미래가 아닌 과거 패권의 재현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중국몽과 함께하겠다”고 했었다.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인 우상호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의 나토회의 참석에 대해 “신냉전 시대 한쪽 선택은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균형을 말하는 듯하지만 중국에 붙어 가야 한다는 게 본뜻이다. 그러나 한국은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냐?”는 중국과 미래를 함께할 수는 없다. 여론도 그렇고 국제정세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