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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아베의 遺業을 이어 改憲으로 직진하나?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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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시스
  이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65) 일본 총리의 진짜 임기가 시작됐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전 총리 암살 이후 자유민주당 내에 갑작스레 생긴 권력의 공백을 기시다는 어떻게 채울까. 기시다 시대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를 꼽아봤다.
 
  첫째, 히로시마(廣島)다. 기시다 총리의 집안은 히로시마에서 3대(代)에 걸쳐 중의원을 지냈다. 조부는 중의원 6선(選), 부친 기시다 후미타케는 중의원 의원과 중소기업청장관을 지냈다. 부친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기시다 총리는 부친의 지역구인 히로시마현 제1구를 물려받았다. 1993년 아베 전 총리와 함께 중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단 한 번도 낙선한 적 없이 내리 9선을 했다.
 

  원폭 피해지인 히로시마현 출신답게 그는 ‘비핵(非核)3원칙’을 지지한다.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이다. 올해 3월 아베 전 총리가 ‘핵공유론’을 거론했을 때도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둘째, ‘고치카이(宏池會)’다. 기시다는 자민당 내 가장 오래된 파벌인 고치카이의 수장(首長)이다. 고치카이는 당내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파로 분류된다. 아시아를 중시하는 외교 방침을 고수해왔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고치카이 소속이었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 총리는 1992년 총리에 취임한 후 첫 해외 방문지로 한국을 택했다.
 
  이듬해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가 발표됐다.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도 고치카이 소속이다.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전 총리 역시 고치카이가 배출했다. 오히라 전 총리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 시절 외무장관을 맡아 1972년 중국과 국교(國交) 수립을 이끌었다.
 
  기시다 총리도 같은 노선을 계승해왔다. 박근혜 대통령 시기인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낸 일본 측 주역이 바로 당시 외무장관이던 기시다 총리였다. 기시다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위안부 문제는 군(軍)의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
 
  기시다는 위안부 합의에 반대하는 아베 당시 총리도 설득했다.
 
  셋째, 평화다. 기시다는 당내 최대 파벌을 이끈 아베의 막후 지원으로 총리에 올랐다. 취임 후 아베 전 총리와 갈등이 있었다. 기시다는 ‘매파’보다는 ‘비둘기파’에 가까웠다. 기시다 총리는 중일우호의원연맹 회장을 지낸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아베 전 총리는 ‘중국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며 반대 목소리를 냈다. 아베 전 총리는 베이징동계올림픽 보이콧을 두고 결정을 망설이는 기시다 총리에게 강경 대응을 주문했다. 기시다 총리는 ‘신세대 리얼리즘 외교’라며 대중(對中) 균형 외교를 제안했다.
 

  그러던 기시다 총리의 발언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눈에 띄게 강경해지고 있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후부터다. 그리고 7월 8일 아베 전 총리의 암살 직후 기시다 총리는 ‘평화헌법 조기(早期) 개정’을 선언했다. 무력(武力) 행사와 교전권(交戰權)에 대한 족쇄를 풀겠단 얘기다.
 
  자민당은 ‘방위비 5년 이내 두 배 이상 인상, 적(敵) 기지 공격 능력 보유’를 공약으로 내걸고 7월 10일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했다. 아베도 하지 못했던 평화헌법 개정을 온건파 총리가 해내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目睹)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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